글자 크기
화면

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광주강의(08. 10. 24) 1강자유게시판디모데전서

광주강의(08. 10. 24) 1강

이름 : 서경수(IP:116.37.101.23)

광주 강의(08. 10. 24) 42-1

강의 시작하겠습니다.

디모데전서 5장 17절부터 할 차례인데, 그것 하기 전에 15절에 “이미 사단에게 돌아간 자들도 있도다.” 이렇게 되어 있는데, 그러니까 사단이 지배하는 영역 따로 있고, 성령이 지배하는 영역이 있어요. 중립은 없습니다. 둘 중 하나지요.

사단에게 지배받든지 아니면 성령에 지배를 받든지, 성령의 지배도 안 받고 사단 지배도 안 받는 그런 인간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구원이란 것이 사단에게서 성령으로 옮겨가는 것이 구원이기 때문에, 성령에게 옮겨 갔을 때만 비로소 자기가 예전에 있었던 동네가 마귀가 지배하는 동네였다는 것을 알게 돼요. 이 때 얼마나 시원하겠습니까? “내가 참 큰일 날 뻔했다. 내가 사단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니 큰일 날 뻔했구나!”

사단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는 것을 성령의 지배를 받게 될 때 비로소 알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성령의 영역으로 온 것에 대해서 너무나 감사하기 때문에 자기 형편이 좀 가난하고 아프고 해도 그것은 큰 문젯거리가 아닙니다.

이런 것들이 전에 사단에게 속했을 때에는 문제가 되지요. “나는 왜 몸이 아플까? 왜 수입이 적을까? 우리 가정은 왜 고부간에 갈등이 있을까?” 이런 것들이 문젯거리가 되는데, 사단에서 성령으로 옮겨오고 보면 이런 것들은 전혀 문젯거리가 되지를 않지요.

성경을 찾아보겠습니다. 사도행전 10장 45절입니다.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47절에 “이에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하리요.”

여기에 보면, 사람들이 뭘 받지요? 뭘 받습니까? 성령을 받지요. 이 소식은 KBS 9시 톱뉴스에 나오는 그런 것보다 더 충격적인 소식입니다. 뉴스에 나오는 첫 소식 ‘주식이 1000선이 무너졌다.’는 것은 뉴스거리도 안 돼요. 이런 것은 같은 사단의 영역 속에서 오르락내리락 하는 거예요. 환율이 어떻고 하는 것은 전부 사단의 영역입니다.

사단의 영역에서, 즉 돈이 지배하는 영역에서 돈 없이 살게 된 영역으로 옮기게 된 것, 이것은 행운 중 행운입니다. 로또복권 당첨되고 난 뒤 2년 후에 다 날리고 도둑질하다 잡힌 사람이 있었지요? 보통 로또복원에 당첨되면 ‘인생 역전되었다.’고 합니다. 사단의 세상에서는 역전이 열 번, 스무 번 돼도 소용없어요. 여전히 사단의 영역입니다. 진짜 인생이 역전되려면 사단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성령이 지배하는 세계로 가면 이것이 진짜 역전입니다.

구00 목사님 글에 보면 이런 것이 있어요. “요새는 살 재미가 없다. (2008년 프로야구 플레이오프에서)롯데가 초반에 탈락해서 재미가 없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재미를 찾지요. 그러나 성령을 받게 되면 롯데가 지든 삼성이 지든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지요. 주식이 오르든 땅값이 내리든 별 신경 쓸 필요가 없단 말이지요.

이 아파트 값이 폭락해서 집값이 반토박이 되었다고 해도 우 집사님이 성령을 받았으면 별로 신경 쓰지 말아야 됩니다. 왜냐하면 집값이 얼마가 되건 그것으로 성령을 살 수 없거든요.

제 3의 지역은 없습니다. 사단 아니면 성령, 성령 아니면 사단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성경을 보기 전에 예상했던 그것을 밀쳐버리고 우리가 예상도 못한 기쁨을 줘요. 우리가 성경을 덮어버리면 “이런 일이 있었으면 좋겠다. 이것은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이런 기대감이 있지만, 막상 성경을 펴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평소에 바라고 있는 것과는 전혀 딴판이에요. 완전히 다른 것을 우리에게 주시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사단에게 돌아간 자들도 있도다(5:15).” 성령에 속해 있다가 사단에게로 간 것은 아니고요, 교회에 왔다가 돌아갔겠지요. 교회 다니다가 ‘이제는 교회 안 다닌다.’ 뭐 이런 식으로 돌아갔겠지요. 이런 사람은 성령이 있는 교회에 온 것이 아니고 사단이 세운 교회 다니다가 그만둔 것이에요.

사단의 동네에 교회 많습니다. 이 지역에도 온통 교회가 널려 있습니다. 밤이 되면 빨간 십자가 레온사인이 사방에서 보입니다. 밤마다 천국이라. 교회는 다녔는데 성령을 못 받았기 때문에 결국 교회 한 10년 다니고 하는 이야기가 “나는 교회에 대해서 다 안다. 목사 설교 초반만 들으면 끝이 어떻게 될지도 다 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령에 대해서 이야기하라고 하면 할 말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을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몰라요.

그래서 성령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그들이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교회가 어떻게 활성화되고 즐겁고 화목한 교회 만드는가?’ 그런 것에 관심이 있지요. 우리는 이러해야 합니다. 교회 망해서 성령을 주신다면 우리는 당장 교회 망해야 됩니다. 그 정도로 성령 받은 것이 내가 다니는 교회보다 더 중요합니다. 이제부터 제가 이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이제부터 꽤 어려울 거예요. 오늘 본문 5장 17-18절을 보겠습니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군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

이걸 보고 여러분들이 어렵다고 느낄 거예요. 저도 어려워요. 왜 어려우냐 하면, 17절과 18절 말씀이 연결이 안 되기 때문에 어려운 겁니다. 17절에 ‘잘 다스리는 장로에게 존경하라.’는 것과, 18절에는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는 말씀이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아무 관련성이 없어 보이거든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것은 목사를 소에 비유한 것이다.’ 라고 하는데, 목사를 소에 비유했다면 목사에게 ‘소’라고 부르면 굉장히 기분 나쁠 거예요. 왜냐하면 농사지을 때 소는 결코 주인이 아닙니다. 소는 짐승이지요. 그것도 사람이 부리는 짐승. 부려먹는 짐승으로서 “우리교회 소 있다.” “어떤 소?” “우리가 부려먹어도 되는 소 있거든.” “누군데?” “목사.”

만약 이런 관점으로 목사를 보게 되면 무엇이 빠져버립니까? 17절의 “배나 존경하라.”가 빠져버려요. 우리 교회 소 있다. 소에게는 막말을 하는 겁니다. “이랴!” 막말을 합니다. “이리와 주세요.” 이러지는 않지요. 소는 부리는 짐승입니다. 소는 애완동물이 아닙니다. 요즘 개 키우는 사람들을 보면, 우리교회 강 장로님 집에도 그렇습니다만, 원래 사람이 가축을 키우는 법인데 장로님 댁에 보면 개가 상전이 되어 있어요. 장로님이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고 개가 스스로 그렇게 행동해요.

짐승은 기능성입니다. 부려먹을 것이 없으면 잡아야 돼요. (일 못하는)늙은 소는 잡아먹어야지 살려두면 사료만 축을 냅니다. 따라서 배나 존경하는 소는 없어요. 그런데 배로 존경할 것 같으면 그분을 감히 소라고 하면 안 되지요.

그러니까 17절을 택하든지 18절을 택하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해야지, 둘 다를 취해서 연결시킬 수가 없는 겁니다. 이것은 쉽게 말해서 “엄마, 우리 담임선생님은 참 존경스러워.” “어떤 분인데?” “소거든.” 얼른 생각하면 납득이 되지 않지만 가만히 따지고 보면 납득이 되는 구석도 있어요. 뭐냐? 존경을 받으려면 어떻게 살아야 된다? 소처럼 살아야 된다.

장로 직이라는 것이 원래 이 사단의 세계에는 없는 거예요. 성령 안에서의 장로 직이라는 것은 이게 원래 장로 될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성령이 임하니까 장로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없는 장로 직이 있음으로 바뀌었지요. 그러면 그 장로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없음에서 있음으로 머물면 안 되고, 있음에서 없음으로 내려가 줘야 합니다. 어떻게? 희생과 봉사로. 이럴 때 이 장로(혹은 목사)를 소와 연결시킬 수 있단 말입니다.

“난 목사다. 당신들이 날 목사라고 했잖아. 그런데 왜 내 말을 안 들어?” 이렇게 나오면 이것은 배나 존경을 강요하는 것이죠. 배나 존경 받으려고 하면 목사직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그 목사 되시는 분이 어떤 식으로 나가야 되는가 하면 ‘이 일 감당하다 죽을래요.’ 하는 그냥 소처럼 “여러분을 위해 나는 희생해야 됩니다.” 이렇게 나와야 됩니다.

이렇게 희생과 봉사의 모습을 보일 때 이런 사람이야 말고 성령에 의해 생긴 진짜 목사, 장로기 때문에 배나 존경을 받지요. 이것이 말로는 간단한데 막상 ‘그런 사람 나와 봐!’ 라고 하면 찾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이런 사람이 있다면 이것은 기적이라고 보면 됩니다.

“난 목사야!” 하는 것은 협박, 공갈이지 배나 존경이 나오려야 나올 수가 없습니다. 누구를 위한 목사냐를 늘 목사가 잊지 말아야 합니다. 목사 자신을 위한 목사는 이미 목사가 아닙니다.

목사는 ‘소’입니다. 소는 결코 소 자신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에요. 소는 일하기 위해 있는데, 그 일은 그냥 설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희생과 봉사의 모습으로 일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목자의 원천은 뭐라고 합니까? 베드로전서에 나오지요. “우리의 큰 목자”라고 하지요. 누구십니까?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원형이 되고 모델이 되어서, 큰 목자가 그러하면 작은 목자도 희생과 봉사의 길로 가야겠지요. 한 알의 밀알이 떨어져 죽어야 열매를 맺습니다.

이번에 새로 나올 책 제목이 [피]인데 그곳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성도의 마음가짐은 “내 죽고 너 살아라.” 이것입니다. 이것이 한 알의 밀알입니다. 남편은 예수 안 믿고 아내는 믿는다면, 그 때에 예수 믿는 아내가 남편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내 죽고 너 죽자!” 이러면 안 되고, “내 죽고 너 살아라.” 이렇게 해야 됩니다.

지금까지 한 것은 쉬웠지요?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어렵게 갑니다. 어떤 점이 어려우냐 하면, 이렇게 연결이 안 되는 것을 왜 사도바울은 어떤 신학 이론에 의해서 연결을 시키는가? 만약 이 연결점을 안다면 사도바울이 구약을 어떤 식으로 해석 했는가 하는 전모가 드러나지요.

그러니까 우리에게 어렵다는 말은 하나의 기회가 될 수 있는 겁니다. ‘아하, 사도바울이 구약을 볼 때 우리가 보는 것처럼 상식적으로나 문자적으로 안 보고, 다른 특별한 해석 방식을 주입시켜서 구약 전체를 해석했구나.’ 따라서 제대로 그 해석 고리를 파악하면 우리도 바울처럼 구약을 해석할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자, 그렇다면 5장 18절을 봅시다.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이 대목이 구약에 나오는데요, 구약에 나오는 이 대목을 어떻게 신약 교회에 목사의 위상과 어떤 논리적 고리를 가지고 해석을 하느냔 말이지요.

신명기 25장 4절에 나오는 말씀인데,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어려운 부분으로 돌입합니다. “곡식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지니라.” 이 구절과 신약의 목사 설교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난감하지요? 엄청나게 난감해요.

도대체 사도바울이 ‘말씀을 잘 가르치는 목사를 배나 존경하라.’는 말씀을 설명하면서, 그 많은 성경구절 가운데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신명기 25장 4절을 거론한단 말이지요. 그래서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영문학을 공부해서 문학에 대해 박식하고 정통한 문학자들도 성경 해석에 대해서는 깡통입니다. 아무것도 몰라요.

그야말로 성경은 영적으로 해석하는 것이지 문학적으로 어원적으로 아무리 연구해도 안 풀립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이 이것을 해석할 때 바울 본인만 알고 있는 비밀이 있었는가? 어떤 원리에 의해서 풀었는가? 그러면 우리는 모른 채 그냥 넘어가야 되는가? 천만의 말씀. 우리도 사도바울의 해석을 알 수가 있습니다.

도대체 어떤 원리에 의해서 신명기 25장 4절(곡식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지니라)과 디모데전서 5장 17절(잘 다스리고, 말씀을 잘 가르치는 자를 배나 존경하라) 말씀이 연결이 되는지 그 내막을 한번 풀어 봅시다.

그 힌트가 신명기 25장 5절부터 나옵니다. 여기에서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 하면, 8절에 보면 “그 성읍 장로들은 그를 불러다가 이를 것이며 그가 이미 정한 뜻대로 말하기를 내가 그 여자 취하기를 즐겨 아니하노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신명기도 그렇고 민수기도 그런데, 이런 대목이 있어요. 어떤 집안에 아들이 있는데, 그 아들이 부모 말을 너무너무 안 들어요. 그럴 때 그 부모가 아들을 어디로 데려가는가 하면, 이스라엘 공동체 내의 장로들에게 데리고 갑니다. 그렇게 해서 장로들 앞에 다시 한 번 다짐을 하지요. ‘너 부모 말 잘 들을래, 안 들을래?’ 그렇게 해도 그 아들이 부모를 거역하면 그 아들을 죽여 버려라(신21:18-21).

예를 들어, 김 집사님이 자녀분이 계신데, 만약에 자녀들이 부모 말을 안 듣는다. 그러면 집사님이 자녀를 화평교회에 데리고 옵니다. 교회에서 목사님이 타이릅니다. 그래도 안 들으면 죽여 버려라. 그런 대목이 나와요.

이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근대 국가의식이나 가정 상황에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내용입니다. 남들이 우리집안 일에 왜 간섭하는데? 전혀 납득이 되지 않는 그런 말씀이잖아요. 그리고 아까 신명기 25장 8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집안이 대를 못 이었을 때 형제를 대신해서 다른 형제가 대를 잇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요즘 같으면 부모가 그 자식을 장로들에게 데리고 가지를 않습니다. 아무리 방탕한 자식이라도 자기 자식을 다른 사람들의 돌에 맞아 죽도록 내놓는 부모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성경해석 자체가, 구약의 성경 해석을 신약 교회에 연결시키려면 우리가 생각하는 상식적인 그러한 모든 인식을 완전히 부숴야 돼요. 왜냐하면 그것은 사단에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단에 속한 자는 개인주의입니다. 그러나 성령 안에 들어오면 개인주의가 사라지고 공동체주의가 됩니다. 공동체 위주로 갑니다. 개인에서 공동체주의로 갈 때 ‘개인을 스스로 부정하고 공동체 속으로 들어간다.’ 이런 식의 공동체는 아니에요. 그런 것은 사단의 세계에서도 할 수 있어요. 그것이 아니고, 개인에서 공동체로 가려면 이 공동체는 개인이 단합한다든지 개인의 의지로 뭉쳐서 공동체로 가는 것이 아니고, 여기에 홍해가 있어요. 홍해 이전에는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가 있었지요.

홍해를 건너는 것은 하나님이 문설주에 발린 피를 보고 죽음의 사자가 넘어가는 것과 같은 거예요. 그렇다면 여기서 개인적인 의도에 의해서 “야, 우리 혼자 살면 힘드니까 이스라엘 만들어서 단합해서 살자.” 라는 식으로 단결해서 홍해를 건널 수 있습니까? 못 건너지요. 홍해바다에 뭔가가 빠져야 됩니다. 모든 개인적인 것은, 다시 말해서 내가 구상하는 나의 공동체는 하나님께서 일체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는 희한하게도, 이미 용서받은 공동체는 하나님이 직접 여기에 관여해야 그 공동체가 하나님이 인정하는 공동체가 됩니다. 하나님이 함께 있는 그러한 집단이 됩니다.

언제 대구강의에서 사르트르 이야기하면서 집합과 집단을 나눠서 이야기 했어요. 집합은 그냥 무작위로 숫자만 모았다 뿐이고, 집단은 하나의 같은 생각을 가지고 모인 것을 집단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생각이란 것이 서로가 끄집어낸 생각이 아니고 예상치 못한 주님께서 집게로 각자를 골라내는 거예요. 성령이 오고 난 뒤에 철수하는 것이 아니고 계속 성령께서 집게로 우리의 목덜미를 쥐고 있어요. 쥐면서 우리가 예상 못한 그러한 인간상으로 설명, 해석을 가해주지요.

왜 그렇게 되는가 하면, 천국에서 살려면 지상에서 사는 것과 생활 방식이 달라요. 그래서 여기서 뭔가 고쳐져야 돼요. “목사님은 늘 주장하기를, 죄에서 구원 받았다고 했지 않습니까? 모든 죄에서 구원 받았기 때문에 ‘네 마음대로 살아라.’고 해놓고 뭘 고칩니까?” 라고 하는데, 성경에 보면 죄와 죄가(罪價)를 나누고 있어요. 죄라는 것은 All(전부) 아니면 Nothing(아무것도 아닌) 이 돼요. “모든 사람이 죄인이매 의인은 하나도 없다.”

그래서 죄라는 것은 구조적인 것입니다. 어떤 범위 내에 속했으면 전부가 의인이에요. 그리고 저쪽에 속했으면 전부가 죄인이고. ‘도’ 아니면 ‘모’입니다(윷놀이). 죄는 구조적인 것이기에 그래요.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인간의 죄의 경중에 따라서 조금 감해주고, 많이 감해주고 그런 것이 아니라 피가 있으면 모든 죄는 다 사라집니다.

그 다음에, 이 구조를 사람은 하루아침에 알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이것은 죄가에 있어서는 경중이 있겠지요. 개인적으로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이 있겠지요. 특히 젊은이들 보면 자기 행동에 대해서 “내가 뭐 잘못 했는데?” 라고 하잖아요. 늙은이들도 마찬가지지만.

그러나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아하, 그것도 죄구나.” 알잖아요. 죄는 객관적이지만 죄가(罪價)는 주관적인 요소가 많아요. 그렇다고 해서 이 사람이 구원 안 받은 것이 아니고, 이미 자가가 소속되어 있는, 이미 자가가 자기에게 주고 있는 그것을 자기가 잘 모를 때가 있다니까요. 또 알았다고 해놓고 돌아서면 잊어버릴 때가 있어요.

그래서 죄가라는 것은 뭐냐 하면, 죄책이라고 보면 됩니다. 죄의식으로 생각하면 쉬워요. 이것은 상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요소가 많아요.

우리가 보고 있는 디모데전서의 이야기가 뭐냐 하면, 개인적인 죄가에 대해서 언급을 하고 있는 겁니다. “네가 구원 안 받았으면 내가 이런 소리 하지 않는다. 네가 이미 구원 받았는데 그런 행동을 해서 되겠느냐?” 하는 차원에서 개인적으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다른 사람들 봐라. 너는 왜 그렇게 행동하는데?” 라고 할 수 있단 말이지요. 그런 일을 잘 가르치는 사람이 누구라고요? 잘 가르치는 장로(목사). 이런 사람에게는 배나 존경해라.

지난번에 공부했지요. 집사 된 자는 어떻게 하라? “술에 인박이지 아니하고 ---” 나오지요. 감독은 “잘 가르치고, 돈을 사랑하지 않고 ---” 쭉 나오지요. 이 말은 완전하라는 말이 아니고, 우리가 지금 소속해 있는 성령 안에서 그런 짓이 나쁜 짓이라는 것을 개인적으로 알아가라는 말이지요.

공동체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개인에서 출발해서 개인의 다수가 모여서 공동체 되는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공동체로 시작해서 공동체로 끝나는 세상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여호수아 7장에 보면 다른 사람은 열심히 싸우고 있는데 아간 혼자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했지요. 그러니까 그 영향력이 다른 사람한테 미쳐서 다른 사람이 많이 죽잖아요. 그럴 때 하나님께서 ‘분명히 변절자가 있다.’고 해서 뽑아내니까 아간이 걸려서 돌에 맞아죽지요.

이것은 누구는 살고 누구는 죽고 그런 문제가 아니고, ‘현재 우리가운데 누가 계시느냐?’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과연 같은 전세버스, 천국으로 가는 전세버스의 분위기가 어떠냐?’ 이 분위기 파악을 하라는 겁니다. ‘나 잘났어요, 못났어요?’ 그런 것이 아니고, 우리가 지금 놓여있는 이 동네가 성령 안인데, 성령 안에 있다는 것이 과거 사단에 놓여 있을 때와 어떤 차이가 나는가를 통해서 우리가 성령 안에서 인도함을 받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거예요.

예를 들면, ‘말씀 듣기를 게을리 하지 말고 부지런히 하라’는 말씀이 있는데, 신자이면서 말씀 듣기에 열심 없는 사람은 지옥 간다는 뜻이 아니고, 아직까지 자신의 죄가 얼마나 큰가를 잘 모르는 거예요. 그럴 때는 찾아가서 권하기를 ‘아무리 바빠도 말씀 듣기를 소홀히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라고 일러주는 그 역할을 누가 해야 된다? ‘소’ 장로들이 해야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목사 너는 잘났나?’

‘그것이 아니라 나는 말씀 소홀히 하는 것이 죄인 줄은 안다. 그런데 너는 바쁘다는 이유로 말씀 등한히 하는 것을 당연히 여기고 있다.’

사도바울은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나는 죄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없다.’는 말도 됩니다. 그래서 결국 이 죄가는 어디로 모아지게 됩니까? 하나의 죄로 모아지겠죠. 죄가를 가지고 ‘네가 잘났네, 내가 잘났네.’ 이러면 안 됩니다. 우리 모두는 죄인이다. 라는 쪽으로 모아지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죄인 중의 괴수다.’ 라는 말이 얼마나 신앙의 깊이가 있는 말입니까. 신앙에 대해서 제대로 알기 때문에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죄인 나오라고 하면 제가 손들고 먼저 나가겠습니다.’ 라고 이야기 할 정도로 그 사람은 세상을 넓게 봅니다. 어디까지? 사단의 세계까지.

사단의 세계는 개인주의 세계이기 때문에 “내가 뭐 잘못 했는데?” 이런 식입니다. 공무원들 뇌물 받다가 잡히면 하는 말 있지요? “나만 잘못했나? 나만 쌀 직불금 받았나? 나는 아니지만 우리 아버지는 농사짓는다. 털어서 먼저 안 나는 사람 누가 있는데?” 이러거든요. 그러나 목사는 그러면 안 되지요. “다른 사람들 다 그런데 목사는 뭐 별다른 사람인가?” 이러면 안 돼요.

목사는 자기 변명하라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목사는 ‘소’이고, ‘소’는 희생과 봉사를 위해 있습니다. 희생과 봉사라는 것은 남들이 안 하는 것을 해야 된다는 겁니다. 남들은 살고자 할 때 자신은 죽고자 하고, 남들은 있고자 할 때 자신은 없어지고자 하고. 이럴 경우에만 배나 존경해야 됩니다. 그런데 자기 죄가를 모르는 사람들은 이런 목사를 보면 배나 무시하지요. “우리 목사는 바보 멍청이다.” 이런 식으로 무시하지요.

이것이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는 말씀과 무슨 연관이 있는가? 신명기 25장 4절에서 “곡식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지니라.” 하고 이어서 “형제가 동거하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 이렇게 나오지요. 1절부터 보면, 재판하는 이야기가 나오다가 4절에 농사짓는 이야기가 왜 나오느냔 말이지요. 이게 농사에 관한 이야기냔 말이지요.

앞뒤 문맥으로 볼 때는 이것이 농사짓는 이야기가 아니고, 소의 입에 망을 씌우면 소의 감정표현이 안 나타나고 모르게 되지요. 망을 씌워 소가 해야 될 일을 못하면 그 소는 있으나 마나한 것이 됩니다. 망을 안 씌울 경우에만 소 값을 다 빼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게으른 소 같으면 망을 씌우든지 해서 잡아먹으면 되는데, 소가 열심히 곡식을 떨고 있는 때 그 일에 방해가 되는 어떤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망을 씌움으로 곡식 떠는 일에 방해가 된다면 소에게 일을 시키는 그 본래의 기능을 다 발휘 못하게 되는 그런 사태가 발생한단 말이지요.

결국 여기서 이 소는 어디에 소속된 소냐 하면, 공동체를 위하여 있는 소가 되어야 합니다. 사도바울이 보기에 이 소는 공동체를 위한 소지 소를 위한 소는 아닙니다. 소 잘 대하라고 있는 소가 아니고 이 공동체에 얼마나 쓸모가 있느냐 하는 것이 망을 씌울거냐, 말거냐 하는 결정 요인이 된다는 겁니다.

곡식을 떠는 것이 소 자신이 먹으려고 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소를 부리는 자들이 먹으려고 하는데, 소의 입에 망의 씌워 능률이 안 오르면 손해는 공동체가 본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대목을 듣는 순간 ‘아하, 소도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구나.’

자, 그렇다면 이 공동체라는 것이 소를 통해서 공동체가 공동체다운 면모를 보여야 되지요. 소가 열심히 곡식을 떪으로 말미암아 이 공동체는 하나님에 대한 공로, 하나님에 대한 감사, 하나님에 대한 은총, 구원에 대한 기쁨 이런 것을 공동체가 보여줄 책임이 있는 거예요.

제가 이런 주장을 할 수 있는 근거가 뭐냐? 그 뒤 구절에 어떤 집안에 자식이 없이 죽었는데, 며느리가 시동생과 결혼해야 하는데, 시동생이 반대하든지 혹은 며느리가 개인적인 입장에서 반대한다면 이것은 결코 개인의 문제가 될 수 없다. 이 공동체의 어떤 가정이라도 개인의 문제로 끝나는 경우는 없다. 마치 소처럼.

곡식 떠는 소만 공동체가 아니라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는 모든 개개인 가정도 각 가정의 명예나 영광이 아니라 이스라엘 공동체는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있습니다.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모시는데 있어서 개인의 사정을 봐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소라는 것은 사적으로 볼 때는 짐승이기에 마음대로 무시할 수 있는데, 그러나 이 소가 공동체를 위해서 곡식을 떨 때는 사적인 감정으로 소를 무시하거나 망을 씌운다거나 학대하거나 절대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신명기 25장 범위 내에서 그렇게 되지요.

이 의식, 이 생각을 그대로 디모데전서 5장 17-18절에서 가져온 거예요. 가져 올 때에 신명기 25장 4절을 가지고 오니까 몸통인 구약 전체가 다 딸려오지요.

본문을 다시 봅시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 그 다음에 “성경에 일렀으되”라고 나오지요. 그러면 이 신명기 25장 4절이 방금 읽었던 17절 ‘배나 존경하라’는 것과 부합된다는 말입니까, 안 된다는 말입니까? 부합이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어떤 식으로 이게 딱 연결됩니까? 라고 묻는다면, 장로나 일반교인이나 전부 뭘 위하여? 바로 하나님이 세운 공동체 교회를 위하여 일해야 하고 개인적인 것은 버려라. 그렇게 되는 겁니다.

성경 어느 구절도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는 해석이 안 됩니다. 반대로 말하면, 성경 어느 구절도 자신의 이익을 생각한다면 그 성경해석은 다 엉터리입니다. 제가 방금 교회를 위해서 라고 할 때 개개인의 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죠. 이 교회는 그리스도 몸을 이야기하죠.

그래서 개개의 교회 부흥을 위해서 이 본문을 적용한다면, 또는 목사가 자기 권리 회복을 위해서 이 말씀을 적용한다면 그것은 사기죠. 목사가 이 구절 펴놓고 월급을 제때 안 주니까 ‘월급을 잘 챙겨줘야 일을 하지.’ 이런 식이로 나옵니다. 그러면 교인들은 ‘복 받으려고(돈 많이 벌려고) 교회 나왔는데, 복이 안 오니 헌금을 못했지요.’ 이렇게 나오고.

조현창 성도가 하신 명언 “예수 믿기 싫은데 잘 됐다.”는 말이 떠오릅니다. 기독교 2,000년 역사에 이런 명언이 없습니다. ‘그동안 억지로 믿는 척 했는데 목사 당신이 그런 식으로 나오니 잘 됐다.’ 이게 오늘날 교회의 모습입니다.

교인들이 언제 성경 말씀이 좋아서 교회 왔습니까? 혹시 교회 왔다 가면 하나님이 돈 보따리 채워줄 줄 알고 교회 온 거지요. 돈 주는 하나님께 누가 헌금은 안 하겠습니까? 하나님 쪽에서 먼저 돈을 안 주니까 헌금을 못하지, 돈 주는데 갈라먹기도 못할까.

그러니까 그 목사는 성경 구절을 인용해서 자기 욕망 채우려고 하다고 오히려 된통 당한 것이지요. 성경에 관심도 없는 교인에게 성경구절을 들이대니 그것은 아주 치명적인 오류를 범한 것입니다. 조심해야 돼요. 이 악한 세대를 잘 분별해서 해야지 그런 분별도 없이 성경 들이대다가는 ---

심지어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어요. “목사님, 평소에 뭐라고 설교했습니까? ‘저는 복음 전하는 것만으로도 영광입니다.’ 라고 했지요. 그런데 왜 이제 와서 딴소리 합니까?” 라고.

이 본문은 어떻게 보아야 하느냐? ‘과연 우리가 공동체를 바로 봅니까? 과연 우리는 사단의 세계에 있었는데 이제 성령에 속한 자가 맞습니까?’ 라는 확인 차원의 말씀입니다. 이 본문 뿐 아니라 성경 전체가 그렇습니다. 사도바울이 이 본문을 이야기할 때 이런 것입니다. “여러분, 당신들 교회 맞아요?” 이걸 묻는 겁니다. “당신들이 아직도 성도 맞습니까?” 라고 묻는 거예요. Who are you? 라고 묻는 겁니다.

그런데 아까 그 목사의 경우에는 뭐가 잘못 되었어요? 공동체를 위한 말씀을 목사 개인에게 적용시킨 거예요. 이것은 개인주의입니다. 이런 목사는 굶어 죽어야 마땅합니다. 목사는 희생과 봉사로 큰 목자 되시는 주님을 본받아서 없음으로 내려갈 때 진짜 성령 받은 사람에게는 배나 존경 받을 것이고, 성령 못 받은 자들은 배나 무시할 겁니다.

잠시 쉽시다.

(2008. 11. 3. 16:24 녹취 마침)

목록으로

이근호 목사 · 8,422건 중 305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