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8장 27-31절 제목 : 나는 누구냐
막 8:27-31 (나는 누구냐)
이름 : 우리교회(IP:220.81.176.150)
본문 : 마가복음 8장 27-31절
제목 : 나는 누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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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08-11-02 13:16
나는 누구냐?
2008년 11월 2일 본문 말씀: 마가복음 8:27-31
(막 8:27) 『예수와 제자들이 가이사랴 빌립보 여러 마을로 나가실새 노중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막 8:28) 『여짜와 가로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이니다』
(막 8:29)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막 8:30)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계하시고』
(막 8: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
오늘날 교인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할 이야기가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그만큼 자기 문제로 겹겹이, 층층히 붕대 감듯이 살아오고 있습니다. 자기 속에 뭐가 감추어져 있고 자기 안에 어떤 괴물이 자리 잡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채 교회 와서도 온갖 좋다는 윤리나 도덕이나 선함으로 자신에게 콘트리트 타설 작업을 부지런히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자신이 이해하는 예수는 그저 덧대기 용으로 활용될 뿐이고 참으로 주님 쪽에서 쳐들어와서 묻는 물음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먼저 예수님에게 질문을 하신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구원에 대해서 정답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이점에 대해서 정확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묻습니다. 우리가 도대체 신의 나라에 대해서 뭘 알고 있는지, 어떻게 곡해하고 있는지 물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속을 몰라서가 아니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마음속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마음속을 모른다는 그 증거는 바로 예수님께서 질의하시고 관심 갖는 것에 대해서 우리 자신들은 얼굴을 돌리며 살고 있다는 바로 그 점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어서 인간 대 인간을 대하듯이 하십니다.
우리 인간들은 타인을 대하면서 물건대하듯이 하지요.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께서 먼저 아담에게 말을 건네시면서 다가오시는 그 방법이 바로 구원방식의 시발입니다. 즉 하나님 쪽에서 인간 쪽으로 건네시는 말이 있어야 그 말씀 위에서 구원의 능력이 흐르게 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9장에서 사울이라는 사람은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말을 건네받습니다. 사울이 말하기를 “주여 누구십니까?”라고 했습니다. “주여”라고 하기는 했지만 그 ‘주님’을 채워질 실내용은 사울 자기 쪽으로 전혀 만들어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고 말입니다.
즉 양파껍질 안에 놓여있는 우리 인간 속에는 ‘예수를 핍박하는 나’가 들어있었습니다. 이것이 출생 이후에 한 번 알지 못했던 자기 자신의 참 모습입니다. 이런 자아를 모르는 채 포장과 덧대기를 반복하면서 신에게 자신을 드리고자 한 것이 얼마나 헛된 짓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불신자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제자들의 입을 통해서 건네받습니다. 이것은 곧 12제자와 다른 이와 사이에 달리 대우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보이시고자 한 것입니다. 불신 세계에서도 예수님은 존경과 존중의 대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해석은 자신의 죄를 모르는데서 비롯된 예수 관점이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을 향하여 말씀을 건네십니다. “너희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식으로 물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갖고 있는 모든 개성과 차이를 완전히 철거해버리시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 앞에서 세상 모든 인간들의 다양한 인물들의 구별과 차별은 소용없는 것이 됩니다. 남여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그런 차이성은 완전히 철거됩니다. 우리는 정확한 하나님의 질문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교회 안에는 인간이 신을 찾는 방식과 하나님이 자기 사람을 찾아내는 방식에 있어 충돌이 빚어지게 됩니다. 그 충돌을 오늘 본문은 이렇게 보여줍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
우리는 이 본문을 대하면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던진 그 질문의 코스를 이탈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코스를 이탈하면 부정확한 구원을 아는 셈이 됩니다. 즉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질문에서부터 시작해서 “인자는 버림받아 죽어서 다시 부활해야만 한다”는 귀결까지 필연적으로 이어져주어야 ‘정확한 구원’을 아는 자가 됩니다.
이 코스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코스의 끝부분인 부활에서부터 시작해서 처음으로 소급하는 식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들은 애초부터 관심사가 자기 자신에서부터 출발해주기를 원하는 오류를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은 아무도 부활될 수 없습니다. 인간들은 기껏 자신이 영원히 안 죽기를 바랄 뿐입니다.
하지만 ‘영원히 안 죽음’은 결코 ‘부활’의 성격과 다릅니다. 인간들이 원하는 것, 즉 ‘영원히 안 죽음’은 도리어 하나님으로부터 정죄 받을 사고방식입니다. 베드로의 본성은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잡히시는 그 날 밤에 다 들통나고 말았습니다. 베드로는 그동안 예수님께 받은 모든 것이 다 자기에게는 껍질에 불과한 것을 공개 선포하고 말았습니다.
자신은 예수님을 모른다는 겁니다. 저주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런 발언조차 예수님의 예안에 갇혀있는 행위였습니다. 예언대로 닭이 울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12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비로소 자신의 본색을 처음으로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사람을 대신하여 홀로 죽음과 저주의 틀로 들어가셨습니다.
아무도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단독으로 받으시는 처벌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대신 죽으심이십니다. 이 대신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성도는 구원되는 겁니다. 따라서 자신이 영원히 살고 싶어서 믿겠다는 메시야관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다 인간들이 타고난 이기주의의 반복에 불과합니다.
불신자들은 교회를 세우고 그 안에서 신 앞에 드릴 예물과 거룩한 품성을 생산해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십자가를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건사한 자기 인생에 생채기가 나면 안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이야기를 자신들의 정신표면을 긁고 지나가면 자기만이 손해라고 생각을 하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뜻은 그것이 아닙니다. 기존 있는 인생에 상처를 내는 식이 아니라 아예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조립해버립니다. 12제자들이 바로 그런 대상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희생이 얼마나 귀하고 아픈 것인지를 대외적으로 보이기 위해서 예수님으로 의해서 만들어진 인물이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이들은 죽을 때까지 외칩니다. “나의 본성을 예수님을 핍박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필이요 이런 죄인까지 용서하셨다”고 말입니다. 왜 저입니까?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미처 몰랐던 하나님의 엄청난 복음의 깊이에 풍덩 빠지게 하옵소서. 그래서 아예 우리 자신을 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