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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08대구강의11-인간구원을위한신학2자유게시판미가

08대구강의11-인간구원을위한신학2

이름 : 구득영(IP:203.223.97.224)

08 대구강의 11 - 지옥의 하나님 31 - 인간구원을 위한 신학2

08,09,09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세상을 지옥과 직결시키는 예수님 !!

오늘은 우리 교재 '지옥의 하나님' 123페이지부터 시작하겠는데, 소제목이 '세상을 지옥과 직결시키는 예수님' 인데, 분위기가 좀 섬뜩하지만 그래도 한번 살펴보자.

** 이 세상은 인간들만이 사는 동네가 아니었다. 그 모든 것이 인간들의 손에서 결정이 되는 세상도 아니요, 그렇게 움직여지는 세상도 아니다. 예수님은 천국의 주님만 아니라 지옥에서도 주님이시다.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세상은 이렇게 폐쇄가 되어있는데, 물론 그것은 우리 인간들의 경우지만 말이다. 이 세상의 밖에는 두 가지밖에는 없는데, 하나는 밑으로는 지옥이고, 그리고 위로는 천국이란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바깥에 있는 천국과 지옥을 위험천만하게도(?) 그만 이 세상 안으로 들여다 놓았다는 말이다.

◈ 아니, 예수님이 무슨 짓을 ??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은 우리 인간들끼리 사는 막혀있는 곳인데, 그래서 인간들은 그 장벽을 벗어나지 못하는데, 그런데 주님은 자유로이 바깥에 있는 것을 안으로 가지고 들어오셨는데, 그것이 바로 주님의 말씀과 행동과 기적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러한 주님의 언어가 인간세계 안에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바깥의 것이기 때문에, 즉 인간들이 모르는 낯선 세계의 것을 실어서 말, 말, 말로서 말씀을 하시니까, 이런 천국과 지옥을 모르는 이 세상에 속한 인간들은 이런 주님의 말, 말, 말, 즉 주님의 행동과 기적과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언어라고 하는 것은 폐쇄된 우리끼리의 의사소통을 위한 것인데, 굳이 언어뿐만이 아니라 다른 것도 마찬가지인데 말이다. 이렇게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사회 구성원들끼리 통하기 위해서 서로 묵인하는, 즉 "이것은 우리끼리의 약속이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이렇게 폐쇄된 사회에서의 언어에는 무엇이 실리는고 하니, 당연히 바깥에 있는 세계는 없고 안에 있는 세계만 들어있다는 것이다.

◈ 초코파이 - 情이 커갑니다 !!

그렇다면 이러한 안에 있는 인간세계에는 무엇이 있는가? 일종의 '정(情)' 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즉 사람은 정으로 살지 정이 없으면 살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정은 본드와 같아서 서로서로 연결하는 역할을 하는데, 그래서 의지하도록 하고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정이 모자란다고 여기면 추상적인 개념을 동원시키는데, 그것이 곧 하나님이고, 예수이고, 석가모니라는 말이다. 천국개념도 동원시키고 말이다. 그렇게 인간은 자기 입장에서 정으로 살아가면 되니, 그것이 모자라면 그때 좀 추가하면 되고 말이다.

그러니 "예수님이 누구인가?" 라는 것은 구태여 검사하고 탐색할 필요가 없는데, 그냥 '정(情) 하나'로 살아가면 족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사랑을 주신다고 하니, 그것을 받으면 되고 말이다. 그러니 굳이 예수님을 믿고 의지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알고 싶지도 않고 말이다.

◈ 정(情) 하나로 살아온 세월 !!

그냥 예수 이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끼리 마음을 맞추어서 교회에 나오고, 그렇게 교회에 다니는 재미와 즐거움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이 누구인지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냥 자기들은 예수를 믿는 형제이니, 서로 아쉬울 때 커피나 한잔하면서 그렇게 서로 의지가 되면 된다는 것이다.

* A : 이번에 내가 힘든 일이 있는데, 기도를 좀 해도.
* B : 그래, 알았다. 나도 있는데...
* A : 어려워말고 부탁해라.
* B : 그런데 돈 문제라서...
* A : 목사님, 이번에 기도 좀 부탁합니다.
* B : 알겠습니다. 뭐 다른 부탁은 없어요?
* A : 있기는 한데, 다음에 말씀드리지요.
* B : 그렇게 하세요.

그렇게 서로서로 의지가 된다는 것이다. 어떤 여 집사들은 자기 남편보다도 자기 교회의 목사얼굴을 보는 시간이 더 많다고도 하는데, 아무튼 그렇게 힘들 때 서로 위로해주고 도와주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살아가는 재미가 아니냐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정'으로 사는 것이고 말이다.

◈ 하지만 정과 복음은 양립할 수 없어 !!

그렇게 인간은 정으로 살아가는데, 그러한 자들에게 십자가의 피나 복음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런 것은 너무 과격하고 냉정하고 싫은데, 그러니 상당히 낯설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언제나 따끈따끈한 정이 그립지 말이다.

그런데 신출내기 목사들은 그것도 모르고, "목사님, 복음대로 말씀을 전했는데, 왜 목회가 안 됩니까?" 라고 하는데, 사실은 주님의 목회는 제대로 되는데 사람들이 모이지 않는 것을 두고 그렇게 말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언제 복음을 좋아한 적이 있는가? 없었다는 말이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사람들이 사는 세계는, 이런 자기들만의 이런 폐쇄된 공간에서 자기들이 내뱉은 것이 부딪쳐서 되돌아오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이렇게 사람은 벽에 부딪치면 벽에 영상이 생기는데, 즉 이미지가 생긴다는 말이다.

◈ 아, 꿈같이 포근해 !!

여기서 이미지가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되고 싶은 희망사항인데, 바로 그런 것들이 벽에 부딪치는데, 그렇게 해서 자기의 꿈들이 그렇게 줄줄이 늘어서 있다는 것이다. 물론 사람들은 이런 것에 의해서 둘러 쌓여서 사는 포근함을 느끼고 말이다.

그래서 보통 여자들의 경우에는, 자식은 이렇게 되고, 또 남편은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희망사항들이 이미지로 있다는 말이다. 목사의 경우에는, 교인들은 잘살아야 하는데, 그래야 교인들이 헌금을 많이 하니 말이다. 그렇게 되면 교회당을 다시 크게 짓게 되고, 자기의 노후가 편안해진다는 것이다.

◈ 인생은 스쿼시 게임과 같아서 !!

예를 들어서, 왜 '스쿼시' 라는 테니스 비슷한 게임이 있지요? 공을 치면 벽을 맞고서 그 공이 다시 되돌아오는데, 다른 공이 아니라 바로 자기가 친 공이 돌아온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가 슬픔으로 때린 공이 기쁨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는데, 그래서 "꿈을 버리지 말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이미지들이 다 꿈이니 말이다. 물론 폐쇄가 되어있는 말이다.

그런데 바로 이런 자리에 주님이 눈치도 없이(?) 들어오신다는 것이다. 그것도 빈손이 아니라, 밖에 있는 천국과 지옥의 세계를 가지고 말이다. 그렇게 되니 당연히 인간들은 이런 예수님을 배척할 수밖에 없는데, 그래서 예수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요 18:35)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요 18:3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이것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충격적인지, 아니 시골교회의 할머니가 언제 이런 것을 생각이나 한 적이 있었던가? 도시로 간 자식놈들이 몸 건강히 성공하게 해달라고 새벽마다 기도를 했지 말이다. 언제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주님의 나라를 기억이나 한 적이 있는가?

물론 그 교회의 목사도 그런 설교를 한 적이 없었는데, 교회는 끈끈한 정으로 뭉쳐진 곳이니 말이다. 그래서 암웨이가 이것을 알고, 우리나라에서 제일 먼저 교회를 타깃으로 삼았다고 하지 않는가? 사람들은 정에 약하니 말이다. 그러니 어떻게 성공하지 않을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 세상은 요지경, 요지경 속이다 !!

그래서 오늘 성경공부 제목이 '세상을 지옥과 직결시키는 예수님' 인데, 물론 그 증거를 대라고 하면 한 마디로 '불' 이라고 할 수 있는데, 즉 '불바다' 라는 것이다. 이것은 북한의 김정일만 쓰는 표현이 아니라, 원래 예수님이 그 원조라는 말이다.

마태복음 10장에서도 예수님은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라고 하셨고 말이다. 그래서 앞으로는 "이 세상보다도 차리리 과거의 소돔과 고모라가 더 견디기가 낫다"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마 10: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마 10: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마 10: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지금까지는 좀 쉬웠지만 앞으로는 어렵게 하는데, 아무튼 "인간은 정으로 산다" 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는데, 복음이고 예수님이고, 그것은 그 다음문제이고 말이다. 그래서 "그 예수가 나에게 뭘 해주는데? 나를 사랑한다는 말이야, 아니란 말이야?" 라고 하면서, 그 알맹이만을 챙기려고 한다는 것이다. 즉 자기를 사랑해주고 뭔가를 챙겨준다면 굳이 거부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 본질은 차이를 통해서 나타난다 !!

이것을 좀 어렵게 말해보면, "본질은 차이를 통해서 나타난다" 라고 할 수가 있는데, 엄청 어렵지요? 최 간사님이 조금 어려운 말로 십자가마을에 리플을 달아놓은 것을 보았는데, 라캉 이론을 동원해서 말이다. 그래서 제가 본인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대충 감을 잡아서 풀이를 해놓았는데, 틀리면 할 수 없고 말이다.

◈ 나는 레모나는 좋지만, 석류는 싫어해 !!

이것도 마찬가지인데, 무슨 말인고 하니, 예를 들어서, 여기에 이렇게 마시는 음료가 레모나와 석류가 있는데, 물론 이것들은 저에게 마시라고 주었으니 제가 그냥 받았지만 말이다. 그런데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가?" 라고 했을 때, 그냥 말을 하지 못하고, 이렇게 레모나와 석류음료가 있으면, 그것을 비교해서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레모나는 좋지만 석류는 싫어해" 라고 판정을 내리는 가운데서 "내가 누구인가?" 라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이렇게 서로 대비되는 개념을 동원시켜야 자기가 누구인지를 안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요?

◈ 예, 저는 기아 타이거즈가 좋습니다 !!

또 예를 들면, "당신은 야구를 좋아합니까?" 라고 하면, 그냥 "예, 저는 야구를 좋아합니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특정 팀을 가지고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삼성과 롯데가 야구시합을 하면, 롯데 편을 들고 싶어" 라고 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렇게 사람은 자기 의사를 표현할 때, 반드시 그 반대되는 의사를 어디에서인가 끌고 와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끌고 와서는, "그래서 나는 저쪽이 아니라 이쪽이야" 라는 식으로 자기 의사를 표현한다는 말이다. 바로 그것을 두고서 "본질은 차이를 통해서 나타난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 인간은 판단을 하면서 자기 정당성을 !!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자기가 끄집고 올 때에, 즉 A와 B를 끌고 와서는, "A는 선하고 B는 악하다" 라고 하면서 자기를 파악하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자기는 심판관이 되는데, 왜냐하면 인간은 이렇게 심판관이 될 때 자기의 절대성이 보장되니 말이다. 자기는 그렇게 판정을 내릴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자기가 이렇게 A와 B를 끌고 오기는 했는데, 과연 A와 B를 제대로 파악해서 데리고 왔느냐는 것이다. 즉 서로 대비가 될 만한 것을 제대로 연결시켜서 말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문제가 무엇인고 하니, 바로 그 문제에 대해서 인간은 장담할 만한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 어, 내가 보기에 기독교나 불교나 샘샘인데 ??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은 불교와 기독교가 반대라고 여겨서 서로 연결시켜서 비교를 했는데, 그런데 저 같은 경우에는 그것이 서로 반대가 아니라 오히려 똑같다고 본다는 것이다. 그 사람의 경우에는 "기독교는 선하고, 불교는 악하다" 라고 해서, 그렇게 해서 비교를 하고, 그리고 그 판정까지도 자기가 내리고 말이다.

그러나 저의 경우에는 어떻게 여기는고 하니, 기독교나 불교나 다 그 밑바닥에는 '자아 불멸' 이라고 하는 동일한 '자아 절대성' 이라고 하는 같은 것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즉 같은 종류의 종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기독교를 믿는다고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니 말이다.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복음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은 이렇게 두 개를 끌고 와서는 거기서 심판을 내리는데서 자기 존재의 자아를 확인하고, 즉 "나는 살만한 인간이야. 나는 충분히 살만한 가치가 있어" 라고 말이다. 그렇게 해서 흐뭇해하면서, 선과 악을 구별하는 그런 과정을 통해서 살아가는 보람을 느낀다는 것이다.

사실상 인간은 무엇이든지 다 그러한데, 만약에 자기 몸이 아프다고 한다면, 몸이 아플 때와 아프지 않을 때를 대비시켜서 이야기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몸이 아픈 것은 싫어, 건강한 것이 좋아" 라고 한다는 것이다. 지금 제 말이 이해가 되지요?

◈ 하지만, 인간이 심판관의 자격이 되는가?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인간이 이렇게 무엇인가를 끌고 와서 서로 비교하면서 어느 것이 옳고 그른지를, 그렇게 심판하는 심판관의 자리에 있을 만한 자격이 되는지, 정작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인간 자신들도 침묵하고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라고 하는가? 우리가 본질이 아니라, 우리와는 전혀 다른 자기의 아들인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에게 잘해주려고 하는데,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와 같이 손을 잡고 잘하자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우리 자신을 지적하신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 자신과 인간 사이에 있는 그 틈을 벌려버린다는 말이다.

◈ 예수님 - 심판은 내가 한다. 여기 '불' 받아라 !!

그렇게 되면 기존의 우리 인간들이 알고 있는 본질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본질이 결코 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주님께서 지적하시는데, 그 예가 바로 조금 전에 제가 말한 것으로서, 즉 이 세상은 폐쇄가 되어있는데 그런데 그것이 '불바다' 라는 것이다. 그 이전에는 물바다였는데, 앞으로는 물이 아닌 불바다가 된다는 말이다.

이것을 베드로전서 3장에서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그 이전에 물로 심판하신 것은 앞으로 불로 심판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이다. 즉 과거의 물심판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앞으로 불심판이 있음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는 말이다.

(벧후 3:6) 이로 말미암아 그 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벧후 3:7)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떠한가? 이 세상 말고는 다른 세상은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지옥과 연결시킨다는 것이다. 그렇게 연결시킴으로서, 이 세상 말고 전혀 다른 세상이 있다고 하는 것을 알려주신다는 것이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 라고 하시면서 말이다.

◈ 왜 인간세상은 불바다이고, 예수님은 천국인가?

이렇게 다른 세계가 있으면 서로 본질의 차이가 나게 되는데, 즉 이 세상과 저 세상이 다르니 말이다. 그렇다면 다른 세계의 본질과 현재 불바다가 되어야 할 '나'의 본질이 어떻게 차이가 나느냐는 것이다. 즉 "도대체 어떻게 다르기에 나는 불바다이고 예수님은 천국인가?" 라는 것인데, 바로 그것을 알려주는 방식으로 성경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사람들이 왜 허탈감을 느끼는고 하니까, 이 세상 사람들이 무슨 짓을 하든지 간에 이 세상 모든 것이 말씀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교재 124페이지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평소에 잘 듣지 못하던 내용인데 말이다.

◈ 지옥에 간 놈들도 영광을 !!

** 지옥과 관계없는 주님은 있을 수 없다. 지옥이 있기에 주님이 오히려 주님답다. 왜냐하면 주님은 자신이 행하신 '지옥처분'으로 인해서 지옥에 간 그들을 통해서도 영광을 받으셔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천국에 간 사람들은 영광을 돌리지만 지옥에 간 사람들도 영광을 돌린다고 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생소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만약에 지옥에 가서 주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면, 그들을 지옥에서 건져주어야 하지 않느냐는 말이다. 비록 때가 늦었지만 그래도 주님께 영광을 돌리니 말이다.

그런데 교재 바로 밑에 보면 출애굽기 14장 17장과 18절의 말씀이 나오는데, 거기에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 17절 하반절에서 "내가 바로와 그 모든 군대와 그 병거와 마병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리니" 라고 한다는 것이다. 바로와 그 모든 군대로 인해서 영광을 얻는다고 말이다.

그리고 18절에도 보면, "내가 바로와 그 병거와 마병으로 인하여 영광을 얻을 때에야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라고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애굽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는가? 그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여호와에게 영광을 돌리고 여호와를 안다고 해서 말이다.

(출 14:17) 내가 애굽 사람들의 마음을 강퍅케 할 것인즉 그들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갈 것이라 내가 바로와 그 모든 군대와 그 병거와 마병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리니
(출 14:18) 내가 바로와 그 병거와 마병으로 인하여 영광을 얻을 때에야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시더니

◈ 어디, 판사를 믿는다고 감옥에 안 가는가?

예를 들어서, 법정에서 판결하는 판사를 자기가 안다고 해서 자기가 범죄를 저질렀는데도 교도소에 가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 양반이 판사임을 믿는다고 해서 자기가 한 도둑질이 어디 가느냐는 말이다. 그래도 곧장 감옥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무나 예수님을 알고 믿는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심지어 가룟유다나 마귀도 예수님을 알았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 세상 사람들이 아무도 모를 때에 마귀가 먼저 예수님을 알고 보고 소리를 쳤고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야단(?)을 맞았고 말이다.

◈ 그리스도 안과 밖의 차이점은?

그렇다면 그들은 예수님이 심판자이고 구원자임을 아는데도 왜 구원을 받지 못하는가?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그리스도 안과 밖의 차이점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밖에서 대상으로 남아있으면 아무리 그것을 믿어도 소용이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그 피가 우리 내부에서 빗물(?)이 되어야만 하는데, 그렇게 빗물이 우리 몸을 적시듯이 적셔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빵에다 버터가 줄줄 흘러낼 듯이 그렇게 예수님의 피가 성령을 통해서 우리 내부로 깊숙이 들어와서는, 즉 예수님의 피가 우리의 피로서 흘러내려야만 한다는 것이다.

◈ 피가 자기 내부에 흘러내리지 않으면?

이러한 예수님의 피에 대해서 신학교 교수들이나 거기에서 배운 신학생들은 설명을 기똥차게 하는데, 물론 싱싱한(?) 목사들도 그렇고 말이다. 대속과 구속과 속죄 등에 대해서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피가 정작 자기들 내부에는 흘러내리지가 않는데, 그러니 예수님의 희생에 대해서 아픔이 없고, 미안함도 전혀 없다는 것이다.

◈ 이근호 목사, 당신처럼 가르치면 방종이 !!

저에게 목사들이 줄기차게 비난하고 대드는 것이 바로 이런 점인데, "이근호 목사, 당신처럼 가르치면 우리 속에서 방종이 일어난다" 라는 것이다. 즉 "예수를 믿고 구원받으면 끝(?)" 이라고 하면, 그 다음부터는 말씀대로 살지를 않고 방종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목사라면 교인들이 방종을 하지 않도록 성경을 계속해서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의 피가 밖에 있으면 피는 피대로 흐르고, 자기가 행할 것은 열심히 행해서, 즉 '구원=피+행함' 이란 것이다. 하지만 제가 주장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그 피가 자기 안에 흐르게 되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옆집 아저씨가 아니고, 예수님은 바로 우리집 아버지이고 큰형님이라는 것이다. 즉 같이 동거생활을 한다는 말이다.

◈ 만약 예수님이 우리 옆집에 살면은?

그런데 만약 예수님이 옆집에 살면 예수님을 우리가 본받아야 하는데, "야야, 예수님이 이렇게 착한데, 그러니 우리가 방종하면 안 돼" 라고 말이다. 그렇지만 그들이 왜 그런 공격을 하는가? 제거 보기에 정작 본인들에게는 예수님의 피가 흐르지 않으니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즉 본인에게 주님의 희생과 거기에 대한 미안스러움이 없기 때문인데, 아니 미안함을 아는 놈이 어떻게 그렇게 방종을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자기 엄마는 시장의 길거리에서 생선장사를 하는데 아들은 나이트클럽이나 다니고 개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밤중에 술을 처먹고 오다가 길에서 생선을 팔다가 집으로 오는 엄마를 만났다면, 그런 엄마를 보고 얼마나 미안해하겠느냐는 것이다. 그런 미안함을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뭐라고 하겠는가? 나이트에서 춤추던 행세를 하는 것이 아니라, "엄마, 미안해. 이것 내가 들어줄게" 라고 하지 말이다.

◈ 차라리 방종을 하세요 ??

그러니 예수님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고 하면 설령 방종을 하라고 해도 방종이 일어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그 아들이 그 다음 날에 춤추고 돌아다니는 것은 그때 문제이고 말이다. 아무튼 그 순간만큼은 방종이, 즉 방탕함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때는 망나니 같은 자기 모습을 자기를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 엄마의 애틋한 희생으로 말미암아서 자기의 방탕함이 밀리게 되는데, 그래서 그 자리에서 까불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예수님이 없이 이 세상을 살다가 남에게 패배감을 느낀다든지, 이번에 자살한 누구처럼 빚을 40억 정도 졌다고 하면 한(恨)이 맺히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어떤 식으로든지 폭발을 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40억이나 빚을 진 사람에게 예수님을 믿으라고 한다면, 그 양반이 반번에 무엇이라고 하겠는가? "우리 마누라는 예수를 잘 믿는데, 그런데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닥치는가?" 라고 하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 결국은, 예수님의 의가 아니라 자기 의가 !!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가 어떤 분인지 마누라를 통해서라도 다 들었는데, 물론 자기도 교회에 다녔다고 하는데 말이다. 하지만 그 사람 마음속에는 한이 있기 때문에, 그러니 그리스도 안이 아니라, 그냥 자기 안에 자기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겹겹이 둘러치고 있다는 말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흉내는 낼 수 있을지 몰라도, 결국은 예수님의 의가 아니라 자기 의만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성화론을 비판하면서, 이러한 방종을 이야기한 그들의 '자기의 의'를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그쪽에서는 분노를 하면서 "또 그래도 교인들이 방종하면 안 된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렇게 복음을 전하게 되면, 자기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다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자기가 들어있는지, 주님이 들어있는지 말이다.

◈ 목사는 설교하는 기능인인가?

하지만 그렇게 복음을 전하려고 하면, 복음을 전하는 본인부터 먼저 주님의 희생에 대해서 정말이지 미안함 마음을 가지고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목사들은 자기가 열심히 복음을 전했는데도 교인들이 자기 말을 듣지 않는다고 화를 내고 하는데, 그렇게 되면 자기가 갑자가 설교하는 기능인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증거자가 아니고 말이다.

당연히 그런 사람은 아무리 예수님을 이야기해도 자기 안에 자기가 있는데, 전혀 주님이 계시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러니 그리스도 자체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라는 지식을 전하게 되는데, 즉 자기가 그만큼 똑똑하다는 것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러니 주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증거하는 것이란 말이다. 그렇게 되니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 목사의 말은 맞는 것 같은데 기분이 너무나 더럽다는 것이다. 권위주의적인 느낌을 받게 되고 말이다.

◈ 다시, 본질은 차이를 통해서 나타난다 !!

아무튼 "본질은 차이를 통해서 나타난다" 라는 것이다. 물론 그 '차이' 라고 하는 것은 '갈라짐' 인데, 물론 이것도 어려운 말인데 말이다. 즉 '나'와 예수님의 갈라짐을 통해서 무엇이 깨어지는고 하니까, 아까 우리가 사는 세계는 폐쇄된 세계이고, 그런 벽에 영상, 즉 이미지에 의해서 자기가 되고 싶은 것을 튕기고 또 튕기고 한다고 했는데, 마치 스쿼시를 하듯이 말이다.

◈ 그런데 예수님 때문에 화목이 갈라져 ??

그런데 이러한 인간들만의 폐쇄되고 막힌 공간에, 지옥과 직결시키는 주님의 불바다 말씀이 들어와 버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당연하게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즉 '갈라짐'이 발생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갈라짐이 생기면서 그만 자신의 평화가 깨어지는데, 여기서 평화보다는 성경적인 용어로 '화목'이 더욱 적합하지 싶은데, 즉 갈라짐이 발생함으로서 화목이 깨어진다는 것이다. 그것도 신과의 화목이 깨어진다는 말이다.

◈ 오직 예수님의 '피'로서만 화목이 !!

그런데 로마서 3장 25절에 보면 신과의 화목에는 무엇이 필요한고 하니까, 오직 '피'로서만 가능한데, 그것은 신학교 1학년생도 아는 간단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피로서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거기에 피 대신에 자기의 평화로운 마음을 집어넣는다는 말이다. 즉 자기는 이제 예수님을 믿고 나니 마음이 평화롭다는 것이다.

(롬 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그러니 그런 인간적인 평화는 당연히 깨어져야 하는데, 그리고 그렇게 깨어진 갈라짐 속에 예수님의 희생이 들어와야 하는데, 즉 '피'만 들어오면 그것이 바로 '화목' 이란 것이다. 주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진정한 평화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말이다.

◈ 설교는 인간의 평화를 고발해야 !!

그러므로 설교자는 인간이 가지고 있던 그런 평화를 철폐시키고, 거기에는 항상 갈등과 긴장이 항상 있고, 그것을 자기 힘으로 메우려고 하는데, 바로 그것을 지적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만 평화가 유지됨을 전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는 저주가 없으리니" 라고 하는, 그렇게 피로 인하여 화목을 이루는 작업을 주님께서 하신다는 것이다.

(계 22:3)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 예수님은 유령인가 ??

어제 오전설교시간에 '예수님은 유령인가?'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는데, 사실은 방금 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그만 빠져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설교제목에 있는 유령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오직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서 평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기존의 우리 마음이 요구하는 그런 평화는 모두가 다 짝퉁이고, 참된 평화는 그런 기존의 가짜 평화가 다 깨어져야 들어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참된 평화를 이야기하려면 당연히 지옥을 이야기해야 하는데, 그렇게 해야 차이, 즉 갈라짐이 생기고 말이다.

이제 다시 교재로 돌아와서, 124페이지를 계속해서 살펴보자.

** 그런데 인간들의 머릿속에 지옥이란 없다. "설마, 내가 거기에 들어가게 될까?" 라는 감정에 묻혀 산다. '지옥'에 관한 생각, 그 자체만 해도 광신도라고 지목을 받을까 두려워 겁을 낸다. 오로지 평범한 생각만이 정상적인 생활을 만든다고 여긴다. 그러면 이들이 말하는 정상적인 생활은 무엇인가? 그것은 죽기 직전에 지옥보다 천국을 선호하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여기고, 지금은 무관심하게 살아가는 생활을 말한다. 그러나 이들은 이미 자신의 운명이 확정된 채 진행된다는 것을 모른다.

◈ 인간은, 자신의 운명이 확정되었음을 몰라 !!

이렇게 인간들의 머릿속에는 지옥은 없는데, 그러니 그냥 그냥 평범하게(?) 살아가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자신의 운명이 확정된 채 진행된다는 것을 모른다" 라는 것을 이야기해야 되는데, 이것을 조금 어렵게 설명을 한번 해보자는 말이다.

◈ 꿈과 현실의 차이점은?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꿈과 현실의 차이점이 어디 있습니까?" 라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을 할 수가 있는데, 꿈은 선택이 전혀 불가능하지만, 그러나 현실은 자기가 필요한 것만 골라서 선택하면서 살아갈 수가 있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생활은 선택생활이고, 그것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꿈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오늘밤에 이런 꿈을 꾸어야지" 라는 것이, 즉 선택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냥 꿈꾸어지는 데로 주어진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꿈은 지금 자기의 위치에서의 하나의 영상이고 스크린인데, 그렇게 스크린에 있는 것들이 가만히 있어도 위에서 두둑둑 떨어지는데, 바로 그것을 주워 모은 것이 꿈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사건의 시간적인 순서도 맞지 않는다는 말이다.

◈ 이놈의 독일군들, 탕탕탕 !!

저의 경우에는, 여기서 제 꿈을 이야기하기는 좀 그렇지만, 아무튼 제가 연합군이 되어서 독일군들을 마구 조지는데, 그것이 아마 제가 중학교 때인가 아주 재미있게 본 '나바론 요새' 라는 영화가 있는데, 그것이 수십 년 동안 저의 천장에 붙어 있다가 수시로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렇게 연합군이 되어서 독일군을 신나게 잡다가, 그런데 갑자기 10년 전에 한번 가서 놀았던 에버랜드가 나타난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니 자기가 논리적으로 짜맞출 수 있는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한 꿈이 바로 묵시라는 말이다. 그러니 꿈은 전혀 자기가 짜맞추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자기가 있는 폐쇄된 현실은 무엇인고 하니, 매일같이 따지고 싸우고, 그렇게 할까말까 라고 하면서, 철저하게, 완벽하게, 최선을 다해서, 그렇게 살아가는데, 그러니 우리 인간이 살아가면서 선택이 없는 행위는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 하지만 성경은? 꿈, 꿈, 꿈 !!

그런데 성경은 뭐라고 하는가? "니가 백날을 선택하고 요령을 부리고 철저히 해도, 나중에 니가 죽게 되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한 순간의 꿈이었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이 아무리 "철저했습니다, 바르게 살았습니다, 성경대로 살았습니다" 라고 해도, 그것이 모두 주님께서 뒤에서 하신, 즉 주님의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즉 확정된 운명이었다는 말이다.

그러이 이 세상은 완벽하게 성경말씀대로 진행되는데, 그것이 바로 "구원을 받아야 될 사람은 구원을 받아야 한다" 라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성경은 그야말로 한 치의 빈틈도 없이 그대로 정확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 혹시 민수기 18장 7절을 아시나요?

여기서 성경구절을 한군데 찾아보겠는데, 그렇게 말씀대로 완벽하게 진행되는 구절을 말이다. 아직까지는 저는 이 구절을 가지고 시비를(?) 거는 신학논문이나 책을 보지를 못했는데, 그것이 바로 민수기 18장 7절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민 18:7) 너와 네 아들들은 단과 장 안의 모든 일에 대하여 제사장의 직분을 지켜 섬기라 내가 제사장의 직분을 너희에게 선물로 주었은즉 거기 가까이 하는 외인은 죽이울지니라

여기에 보면, "내가 제사장의 직분을 너희에게 선물로 주었은즉" 라고 하는데, 그러니 신약개념으로 보면 이것이 바로 '은사' 개념이란 것이다.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 먼저 그 앞에는 있는 18장 3절의 말씀을 한번 보자.

(민 18:3) 레위인은 네 직무와 장막의 모든 직무를 지키려니와 성소의 기구와 단에는 가까이 못하리니 두렵건대 그들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 제사장은 행함이 아닌, 오직 '은사'로 !!

이 말씀은 제사장과 레위인들을 구별하는 것인데, 그러니 제사장이 된다고 하는 것은 인간의 행함이 아니라 '은사' 라는 것이다. 즉 선물로 주어진다는 말이다. 그런데 신약시대의 성도의 별명이 무엇인고 하니, '왕 같은 제사장' 이라는 것이다. 즉 신약시대의 성도가 곧 제사장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신약시대의 성도의 위상에 대해서는 이 민수기 18장 7절의 말씀보다 더 확실하게 밝혀주고 있는 곳이 없다는 말이다. 이 말씀으로 그야말로 완전히 끝이 나는데, 즉 "선물이 없으면 거룩이 없고, 거룩이 없으면 죽는다" 라는 것이다. 그러면 누구를 만나면 죽는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면 바로 죽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거룩은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선물로 주어지는데, 그러니 거룩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 안에 들어와서도 계속해서 선물의 성격을 유지한 체로, 그렇게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성도가 되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장 8절에 보면,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성도라는 것이다.

(고전 1:8)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

그런데 베드로전서 1장에서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라고 하니,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는고 하니, 즉 일단 구원은 받았으니 그것은 우리가 반드시 해야만 될 일로, 그렇게 여분이 남아있는 미진한 일로 여긴다는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전서 1장의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의 신분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이 아니라면, 우리는 도저히 이러한 신분을 받지 못한다는 말이다.

(벧전 1: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벧전 1:16)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하셨느니라

그래서 레위기 18장 7절에 보면, "거기 가까이 하는 외인은 죽이울지니라" 라고 하는데, 즉 하나님께서는 그런 선물을 받지 않은 인간들과는 가까이 하지 말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그냥 허무하게(?) 죽는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지금 그들이 레위인이 되었다고 까부는데, 물론 레위인도 대한 것이지만, 그러나 레위인들이 모두 제사장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직 제사장만이 성막 안의 물건들을 만질 수가 있으니, 그런 선물을 받지 않고 만지면 그냥 죽는다는 것이다.

(민 18:3) 레위인은 네 직무와 장막의 모든 직무를 지키려니와 성소의 기구와 단에는 가까이 못하리니 두렵건대 그들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민 18:4) 레위인은 너와 합동하여 장막의 모든 일과 회막의 직무를 지킬 것이요 외인은 너희에게 가까이 못할 것이니라
(민 18:5) 이와 같이 너희는 성소의 직무와 단의 직무를 지키라 그리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다시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미치지 아니하리라
(민 18:6) 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너희 형제 레위인을 취하여 내게 돌리고 너희에게 선물로 주어 회막의 일을 하게 하였나니
(민 18:7) 너와 네 아들들은 단과 장 안의 모든 일에 대하여 제사장의 직분을 지켜 섬기라 내가 제사장의 직분을 너희에게 선물로 주었은즉 거기 가까이 하는 외인은 죽이울지니라

◈ 거룩의 기능은 대속 !!

그렇다면 제사장의 거룩이 무엇인가? 그것이 민수기 18장 15절에 나오는데, 즉 제사장의 거룩은 선물인데, 그 선물은 기능이 있다는 것이다. 그 기능이 곧 '대속(代贖)' 인데, 즉 "거룩의 기능은 대속이다" 라는 말이다. 이 대속은 "대신해서 죄를 씻어준다" 라는 의미인데, 그러므로 죄를 씻어주면 거룩하게 된다는 것이다.

(민 18:15) 여호와께 드리는 모든 생물의 처음 나는 것은 사람이나 짐승이나 다 네 것이로되 사람의 처음 난 것은 반드시 대속할 것이요 부정한 짐승의 처음 난 것도 대속할 것이며

그러므로 이러한 대속으로 인해서 거룩하게 된 자는 다른 엉뚱한 소리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물론 목사든 누구든 간에 가난한 자를 도와주고 보살피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그러나 그런 것은 얼마든지 인간의 양심으로도 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도라고 하면 어떤 일을 감당해야 하겠는가? 지금 당장 사람들이 굶어서 먹지 못하는 것이 큰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이 거룩한 하나님을 만나서 죽게 되었음을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우리 인간에게 당면한 문제가 무엇인고 하니까, 한 끼의 배고픔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 그것이 바로 중요하다는 말이다.

◈ 거룩을 선물로 받은 사람은?

그런데 놀랍게도 이 거룩을 선물로 받은 사람은 어떠한가? 자기 안에서 거룩이 튀어나와서 죄를 씻어주게 되는데, 그렇게 해서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증거하는 것이 성도의 역할이고 말이다. 성도는 바로 그런 일을 감당하라고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자기 혼자 천국에 가라고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고 말이다.

이것이 바로 '대속' 이라는 것인데, 그렇게 죄를 씻어주는 방법(?)이 분명히 있는데, 왜 그것을 이야기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물론 그런 것을 이야기를 해주어도 상대방이 너무 화를 잘 내어서 선뜻 이야기하지 못하겠다는 사람도 있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것이 어디 그렇게 한다고 해서 이야기하지 못할 내용인가? 그야말로 대속의 문제인데,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 있느냐는 것이다.

◈ 목사님, 저는 부모님을 공경합니다 !!

어떤 사람이 술에 취해서 교회에 왔는데, 그래도 목사는 자기 역할을 다 감당한다고 복음을 전하니까, 그 사람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저는 부모님을 공경합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자기보다 더 효도를 잘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부모님께 효도한다고 해서 자기 죄가 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가 이렇게 성경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진 것이 남의 영향력도 없이, 인간의 그 어떤 행함에도 전혀 요동하지 않고, 선물이 선물답게 우리를 그대로 통과해서 이 세상에 전달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참 재미(?)가 있는데, 성경말씀을 보는 재미가 바로 그러해야 한다는 것이다.

◈ 성경은, 지키는 재미가 아닌, '내' 속에 흐르는 재미로 !!

보통 사람들이 성경을 보면서 힘이 드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목사님, 이것을 다 지켜야 합니까?" 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지키는 재미가 아니라 자기 속에 흐르는 재미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흐르는 재미가 말이다.

이번 우리교회 문경수련회에서 제가 컵에다 물을 따르는 퍼포먼스(?)를 하면서, "사랑과 공의가 흐를지어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그렇게 컵을 물을 붓듯이 부어주면 되는데, 그게 도대체 무엇이 어려우냐는 것이다. 어차피 우리는 빈 그릇이었는데 말이다.

◈ 목사님, 여기 8번 문제가 어떻게 됩니까?

이번에 우리교회에서 세례식을 하는데, 그래서 그것을 가운데 제가 알레르기 때문에 병원에 갔는데, 마침 그 의사가 세례를 받기로 되어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난데없이 치료는 하지 않고서 갑자기 "목사님, 여기 8번 문제가 어떻게 됩니까?" 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설명을 해주었는데, 물론 밖에서는 환자들이 기다린다고 난리가 났고 말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생명이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 혹시 '배뱅기(?)'를 아세요?

이 생명 앞에서 생존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데, 생명이 이륙하는 비행기라고 하면, 생존은 '배뱅기(?)' 라는 것이다. 저는 이 배뱅기를 이번에 처음 알았는데, 사전적인 의미가 제 자리에서 뱅글뱅글 도는 것을 의미한다고 우리교회에 국어 선생님이 한 분 계시는데, 그분이 가르쳐주었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 '배뱅기' 라고 하는 것은, 폼이 비행기는 비행기인데 뜨지를 못하고 제자리에서만 그냥 뱅글뱅글 돈다는 것이다. (사전에 없던데??)

그러므로 매일같이 교회에 왔다갔다하면서 폼은 그야말로 성도인데, 그런데 하루종일 '생존', '생존', '생존' 만을 그렇게 외쳐댄다는 것이다. 물론 생명을 향해서 뜨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이륙하지 못하는 비행기가 활주로만 왔다갔다하듯이, 그렇게 교회만을 왔다갔다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탈출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중요한 것은, 생존이 아니라 생명 !!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생존이 아니라 생명인데, 이 생명은 하늘로 뜨는 것이고, 그러나 생존은 매일같이 밑바닥에서 기어다닌다는 것이다. 그렇게 교회만 왔다갔다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생명이 되어버리면 생존의 무게에서 벗어나게 되는데, 즉 생존의 중력에서 해방이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거룩이기 때문에 말이다.

이제 교재 125페이지를 보겠는데, 124페이지 제일 마지막 줄부터 살펴보자.

** 아니, 더 솔직하게 말해서 인간에게는 신에게도 밀리지 않도록 계속 반항하고 싶고, 신조차도 이기고 싶어하는 오기가 작동한다. 신마저 꺾는데서 오는 쾌감을 갖고 싶어한다. 신도 자신에 대해서 어쩔 수 없었노라고 포기하게 하고 싶다. 스스로 선을 행함으로서 꼭 신을 믿을 필요가 없음을 증명하고 싶어한다. 스스로 선의 주체자로 본인을 추천하고, 그렇게 해서 더 이상 신의 과도한 간섭에서 해방되고 싶어한다.

교재를 계속해서 살펴보자.

** 신의 자문보다 독자적으로 바른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으로 점검하고 싶어한다. 자립되는 길이라면 뭐든지 하고 싶어한다. 약간의 일탈적인 악을 행사함으로서 신 앞에서 반발할 수 있는 자율권이 있음을 시위하고, 그 잘못을 스스로 반성하고 회개함으로서 자신의 오류를 자체적으로 수정할 수 있는 자정능력이 있음을 신 앞에서 으스대고 싶은 것이다. 바로 이러한 자율성을 시험하고 그 능력을 측정하고자 모험하기 위해 세워보는 것이 곧 교회이다.

이렇게 인간의 자율성을 시험하고 그 능력을 측정하고자 모험하기 위해서 세워보는 것이 곧 교회라고 하는데, 그러니 여기서 말하는 교회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바로 인간의 얼마나 위대할 수 있는가를 점검하는 곳이란 말이다. 그러니 그런 교회가 무슨 교회이겠느냐는 것이다. 차라리 '바알의 제단' 이라고 하면 몰라도 말이다.

◈ 이스라엘은 누가 세웠는가?

그렇다면 이제 "이스라엘은 누가 세웠는가?" 라는 것인데, 질문이 아주 간단명료하지 않는가? 사실은 이스라엘은 누가 세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아들'이기 때문에, 그래서 교회는 세우는 것이 아니라, 낳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부부가 아무리 금술이 좋아도 자기 집에 있는 진흙들을 모아서 자식을 만들지 못하는데, 마치 하나님처럼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낳는다' 라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먼저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의 소유가 될 수가 없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이스라엘이 아들로서 낳음을 입었고, 그 이름이 바로 '이스라엘' 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아들로 낳았을 때 이름이 '이스라엘' 이라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여기서 '이름'은 앞으로 해야할 기능을 보여주는 것인데, 업무, 혹은 직무를 말이다. 그러니 '이스라엘' 이라고 하는 것은 앞으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에게 시킬 일들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이' 라는 말이다. 아브라함의 경우에도, 자기가 지은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어주셨는데, 왜 그렇게 하셨는가? 그것은 바로 앞으로 아브라함이 무슨 일을 해야할지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 예수님은 '살려주는 영' !!

예수님의 경우에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예수' 라는 이름의 뜻이 무엇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라는 것이다. 즉 예수님은 '살려주는 영' 이라는 것이다. 성도는 어떤 사람인가? 말 그대로 거룩할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예수님 때문에 말이다.

(마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 아들은, 아들을 있게 한 아버지의 소유 !!

이렇게 아들을 낳음으로 말미암아서, 이렇게 되면 '이스라엘' 이라는 아들은 아들을 있게 한 아버지의 소유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들을 이야기할 때는 아들이 아니라 먼저 아버지를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 아버지는 이렇습니다" 라고 이야기할 때만 아들이 된다는 말이다.

주기도문을 어떻게 시작하는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고 하는데, 그렇게 아버지가 처음에 나온다는 것이다. 즉 "나에게는 아버지가 있다" 라는 것인데, 그것이 억수로 편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아버지가 있는데, 그런데 이 세상에서 이야기하는 그런 하나님 아버지는 희생과 피가 없는데, 그러니 가짜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짜 아버지는 어떠한가?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있는 곳에 아버지도 계신다" 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존재론적으로 보면, 즉 신학적으로 "예수님도 존재하고 아버지도 존재한다" 라고 하면 틀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에는 무엇이 있는고 하니까, 그것이 곧 '피' 라는 것이고, 또한 '말씀성취' 라는 말이다. 즉 말씀성취가 안 되면, 제 아무리 아버지라고 불러도 아버지가 아니라는 말이다.

◈ 진짜 아버지는 '피'를 통해서 !!

그러므로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는 어떻게 되는고 하니, "당연히 하나님이 아버지니 나의 아버지이다" 라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진짜 아버지는 피를 통해서, 즉 말씀성취를 통해서 아버지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십자가를 통해서 말이다.

다시 말해서, 진짜 하나님 아버지는 "아하, 우리들을 살리려고 자기 아들을 버리신 그 아버지가 진짜 아버지이구나" 라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다른 아버지를 찾으면 모두가 다 가짜인데, 즉 피가 없는 아버지는 진짜 아버지가 아니라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는데, 그렇게 죽는 하나님이 아니라면 진짜 하나님이 아니고 말이다.

그것이 우리 교재에 나오는데, 일단 125페이지를 보자.

** 그러나 하나님이 제공하는 새로움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죽음'이다. 거짓이냐 아니냐 하는 판정은 자신들이 희망하는 것이 무엇이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결판날 사항이다.

그러므로 '죽는 하나님' 이라는 말씀이 새로운 것이지, 다른 것들은 전혀 새롭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사람들은 "아니, 하나님이 죽다니" 라고 놀랄지 몰라도, 하지만 그렇게 죽는 하나님이 되어야만 진짜 하나님이고, 그런 죽음이 없는 하나님은 짝퉁이라는 것이다.

◈ 십자가의 죽음과 빈 무덤 !!

사람들이 제 아무리 하나님을 부르고 찾아도, 하나님께서 보여준 흔적은 두 가지 밖에 없는데, 첫째가 '십자가의 죽음' 이고, 둘째가 '빈 무덤' 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흔적이라고 보여준 것이 바로 흔적이 없음을 보여주었다는 말이다. 그러니 하나님은 십자가의 죽음과 빈 무덤을 남기고 달랑 떠나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십자가와 빈 무덤에서 찾아야 하는데, 다른 곳에서 찾으면 안 된다는 말이다. 바로 그런 십자가와 빈 무덤에서 찾을 때, "아하, 하나님은 죽으셨구나" 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십자가와 빈 무덤을 배제해버리면, 하나님은 그냥 존재하시는 하나님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가짜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 그러면 하나님은 왜 죽으셨는가?

그렇게 죽음에서 하나님을 찾으면, 그 다음에 궁금한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은 죽지 않아도 되는데, 왜 죽으셨는가?" 라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하나님의 죽음과 자기의 실존을 연관시키면, 그것이 바로 복음이라는 것이다. "아하, 나 대신에 죽으셨구나" 라고 말이다. 그렇게 되면, 그 다음이 질문이 무엇인고 하니, "왜 나는 버림을 받아야 할 존재인가?" 라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나는 죄인이기 때문에 버림을 받아야 하는구나"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 사도바울 - 내가 괴수라면 너희들은?

여기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뭐라고 했는가? 온 천하가 모두 죄인들인데, 그런 죄인들 중에서 괴수가 누구인고 하니,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자기 자신이 죄인 중에서 괴수라고 한 이유는, "내가 괴수라고 하면, 너희들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라는 것이다.

(딤전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사도바울은 자기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나는 의인 중에도 의인이다" 라고 했는데, 그것은 바로 사람들마다 의인의 계층이 있고 모두가 다 수준이 있는데, 그런 중에서 자기는 톰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런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는 어떻게 되었는가? 이 세상 사람들이 몽땅 죄인이고, 그런 죄인 중에서 우두머리를 하나 뽑으라고 하면, 그것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말이다.

◈ 예수님 - 나는 '빛'이다 !!

여기에 비해서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빛' 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자기 자신을 두고서 '빛' 이라고 했을까요? 그것은 바로 "너희들은 어둠이다. 그것을 알라"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흔히들 철학자들이 하는 것처럼 "나는 존재한다" 라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빛으로 왔다는 것은, 이 세상은 그야말로 어둡다는 말인데, 그것이 요한복음 1장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5절에서 뭐라고 하는가?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라고 말이다.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 1: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요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 1: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이 세상이 얼마나 어두운고 하니, 빛을 깨닫지 못할 정도로 어둡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야말로 완전히 장님인데, 장님은 무엇이 낮이고 밤인지 모른다는 말이다. 물론 불을 켰는지 껐는지도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니 신학을 하는 사람들과 철학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장님인지, 복음을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인간의 자율성과 선택성만 강조하지 말이다.

◈ 과연 '빛' 앞에서 수녀와 창녀의 구분이?

물론 철학자들만 뿐만 아니라 거리를 걸어 다니는 인간들이나, 또한 교회에 있는 인간들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특히 천주교의 경우에 얼마나 이런 것이 심한지 모른다는 것이다. 과연 빛 앞에서 수녀와 창녀가 구분이 되겠는가? 전혀 구분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우리가 만약에 태양을 만질 수가 있다면 얼마나 뜨겁겠는가? 그런데 이 태양보다 더 뜨거운 주님이 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수녀가 만지면 덜 뜨겁고, 창녀가 만지면 더 뜨거운가? 그런 것은 없다는 말이다. 모두가 다 죄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해야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죽으셨다는 사실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교재 125페이지를 한번 살펴보자.

** 이로서 인간은 '하나님의 죽음'에 입각해서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고 해석해야 하는 요구를 받게 된다. 이 '하나님의 죽음'을 보지 못한 척 한다든지 우회해버리면, 결국 인간에게 남게되는 의식이란 자신의 발전적 창조력이 하나님의 일에 보탬이 될 수 있다고 믿는 신념뿐이다.

◈ 사람이 언제 허무해지는가?

이것이 바로 '허무' 라는 것인데, 이 허무에 대해서 좀 이야기를 해보면, 사람이 언제 허무해지는가? 이것을 공식(?)으로 한번 적어보면, 아까도 공식이 하나 있었는데, "본질은 차이를 통해서 나타난다" 라고 말이다. 여기 허무에 대한 공식은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의 지시가 끊어지면 자기가 재생된다" 라는 것이다.

◈ 하나님의 지시가 끊어지면 자아가 재생된다 !!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면, 하나님의 지시가 철수해 가버리면 단박에 자아가 그만 다시금 살아난다는 것이다. "나는 무엇인가? 인생을 어떻게 살지? 인생은 왜 이리 허무한가?"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인생이 허무하고 허무하지 않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갑자기 자기의 자아가 돋보인다는 사실 자체가 곧 허무하다는 말이다. 즉 자아에 대해서 돋보이고 있다는 것 자체가 허무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지? 진짜 하나님이 계시는 것일까?" 라고 하는데, 이것도 일종의 병인데, 이런 병이 수시로 도진다는 것이다. 물론 성도에게 말이다. 그런데 이런 자기에게 하나님의 지시가 오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게 된다는 것이다. 성도는 그렇게 감사할 뿐이라는 말이다.

◈ 취하기는 취해야 하는데, 과연 어디에?

저는 이것을 어떤 자리에서 '취했다' 라고 표현했는데, 왜 그런 표현을 했는고 하니, 그것이 에베소서 5장에 나오는데, 지금 한번 살펴보자. 18절에 보면 술꾼들 사이에서는 아주 유명한 구절이 나오는데, "술 취하지 말라" 라는 것이다.

(엡 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엡 5:19)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엡 5:20)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엡 5:2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 성도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 !!

그런데 이 "술 취하지 말라" 라는 것과 대비되는 개념이 무엇인고 하니, 곧바로 뒤따라 나오는 말씀으로서,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성령의 충만함의 결과가 바로 20절에 나오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서 범사에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는 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성령을 받은 성도의 모습이란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감사하는 자가 되어버리면, 그야말로 '허무' 라는 것하고는 담을 쌓게 된다는 것이다. 즉 정반대의 대립되는 개념이라는 말이다. 감사하는 사람이라면 허무를 모르게 되고, 또 허무한 사람에게서 감사가 나올 리가 없다는 것이다.

◈ 혹시, 천 목사님은 술에 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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