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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04칠곡강의(뒤에서본한국교회)23-하나님의고통,다니엘1(묵시개념)(강의정리)자유게시판다니엘

04칠곡강의(뒤에서본한국교회)23-하나님의고통,다니엘1(묵시개념)(강의정리)

이름 : 구득영(IP:203.223.97.224)

04칠곡강의 [뒤에서 본 한국교회] 21 - 하나님의 고통, 다니엘서(묵시개념)1

04,10,30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하나님의 고통'에 대해서 !!

아마 한달 정도 쉬었던 것 같은데, 또 우리가 자꾸 잊어버리니 반복을 할 수밖에 없고 말이다. 성경의 핵심이 무엇이냐고 하면, '하나님의 고통' 이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 부모님이 아파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파하신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울고 계신다", 혹은 "하나님이 죽었다" 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이 성경의 핵심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아파하시는가? 바로 그런 아픔에 관심이 있고, 그 아픔을 알아야 신자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 아픔만 알고, 하나님의 그런 아픔과 고통에는 관심이 없다고 하면 전혀 신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이전에 들었던 것이 회상이 좀 될 텐데, 그런데 성경공부를 오래 동안 하지 않으면 무엇을 제일 먼저 잊어버리는고 하니, "내가 도대체 무엇을 믿지?" 라고 하는 점인데, 성경의 핵심을 제일 먼저 놓쳐버린다는 것이다. 짜투리(?)는 그대로 남아있는데 말이다.

◈ 하나님의 고통을 아는 자가 곧 신자 !!

여러분이 길을 가다가 기존 교인들을 만나게 되면, 그들이 무엇이라고 하겠는가? "아니, 새로운 복음, 복음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도대체 뭐요? 이근호 목사가 있는 우리교회에서 복음을 뭐라고 하던가요?" 라고 말이다. 물론 대부분이 속으로 그렇게 질문하겠지만 말이다.

그러면 우리는 뭐라고 답하면 되는고 하니,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의 고통을 아는 사람이 신자래" 라고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간단한가? 왜냐하면, 기존교회는 자기 아픔을 가지고 교회에 오는데, 그러니 하나님은 아프지 않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아파하시는데, 그것을 안다고 하면 자기 아픔을 가지고 징징거리겠는가?

그러니 사람들을 하나님을 어떻게 여기는고 하니, 마치 우리나라 전래동화 등에 나오는 바둑을 두는 신선처럼, 그렇게 느긋하고 포만감에 충만한 분으로 안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픈 것은 인간들인데, 즉 이 세상에서 살다보면 여러 가지 일들을 많이 경험하게 되는데, 실연도 당하고 사업에 실패도 하고 말이다. 그렇게 자기 희망대로 되지 않아서 꿈이 깨어지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프기는 누가 아픈가? 하나님이 고통스럽고 아픈 것이 아니라, 이 땅의 인간들이 아프다는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러한 자기들의 고통과 아픔을 좀 달래 달라고 교회에 나오는데, 물론 교회에서는 목사가 소위 위로와 치유의 목회를 통해서, 적당한 대가를 챙기고서 그들의 고통과 하소연을 들어주면 되고 말이다.

◈ 하나님, 저는 아프지 않습니다 ??

하지만 제대로 된 교회라고 하면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그런 자기가 아프다고 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모임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기는 아프지 않은데(?), 설령 조금 아파도 참을 만한데, 간혹 마음이 괴롭든지 고통이 찾아오면 소주나 한잔하든지, 아니면 돈까스에 맥주나 한잔하든지 하고 말이다.

그러니 자기가 아프다고 하는 인간들이 아니라, 그것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나온 사람들은 자기의 아픔이 아닌 하나님의 아픔과 고통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아픈 게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픔과 고통을 전혀 헤아리지 못했음을 깨닫고 회개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신자의 모습이고 말이다.

◈ 서 목사님은 혼자 입니까? 아닙니까?

제가 지난 금요일에 우리교단(?) 서경수 목사님의 아버님 장례식에 가서 입관예배를 드렸는데, 거기 새순교회 교인들도 있는데 말이다. 제가 어떤 설교를 했는고 하니, 흔히 "천국에 가셨습니다. 그러니 염려하지 말고 어쩌고 저쩌고" 라고 하는데, 저는 그것이 아니라 죽은 사람은 염두에 두지 않고, 이미 우리가 염려할 바가 아니니 말이다.

그래서 저는 그 교인들을 향해서 "과연 누가 여러분들을 이 세상에 보냈습니까?" 라고 말이다. 아니, 사람이 꼭 죽을 때가 되어서 자기가 혼자가 아니라고 하면서, 즉 "아하, 자기를 만드신 분이 있구나. 나를 구원하시고, 기다리는 분이 있구나" 라고 할 것이 아니라, 평소에도 과연 그러한 생각을 하는지 말이다. 평소에 바쁠 때는 자기 혼자라고 여기고, 그렇게 설치지 않느냐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를 이 땅에 던져주시고, 지금도 우리와 동행하시고, 우리의 뒷덜미를 잡고 가시는 분은 전혀 의식을 하지 않고, 우리는 자기 혼자 잘나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으로 여기지 않느냐는 말이다. 그런데 이제 죽을 때가 되어서 자기 몸이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으니, 비로소 "나를 누가 이 세상에 내보내었지?"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계속해서 설교하기를, "지금 죽은 분이 문제가 아니라, 여기에 앉아 계시는 여러분들은 도대체 누구 때문에 있는 것입니까? 그러니 우리가 나중에 병들어서가 아니라 지금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천국에 갈 생각은 하들들 마세요" 라고 했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뭐라고 했는가? 그는 고린도후서 5장 8절에서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니라" 라고 했는데, 그것이 그날 설교 본문이기도 했고 말이다. 사도바울은 자기가 비실비실할(?) 때가 아니라, 그야말로 팔팔 살아있을 때 그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고후 5:6)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고후 5: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고후 5: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니라
(고후 5:9)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 성도는 하나님의 고통으로 들어가야 !!

물론 장례식 때에 유족들과 교인들에게 그런 설교를 했지만, 그것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역시 동일하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러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도대체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시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성도는 하나님의 고통을 아는 쪽으로 들어가게 되면, 빠져 나올 때는 어떻게 나오는고 하니, 즉 들어갈 때는 하나님의 고통으로 들어갔는데, 나올 때는 "야,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구나" 라는 쪽으로 나온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쪽으로 말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고마움이 나오게 되는데, 그러니 성도에게 이런 감사와 고마움이 없다면, 그것은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돈이 일 천억이 있어도, 그러한 감사와 고마움이 없다면, 그것은 결코 아무런 버팀목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냥 천억을 쥔 채로 죽음의 나날들을 보낸다는 말이다.

◈ 감사와 고마움이 자기 고통에서 시작이 되면, 꽝 !!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감사와 고마움이, 자기가 몸이 건강해졌다고, 돈을 좀 벌었다고, 그렇게 해서 생기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하나님의 고통으로 들어가서 감사와 고마움이 생겨야 하는데, 그런 것은 다 빠져버리고, 그만 자기의 그러한 건강과 돈을 좀 벌었다는 것을 통과해서 감사와 고마움이 생겨버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다시 말해서, "성도는 감사와 고마움이 있어야 됩니다" 라고 목사가 설교를 하면, 교인들은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다 무엇을 집어넣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 동안에 적금을 무사히 탄 것, 아이들이 공부를 잘한 것, 몸이 건강한 것, 그리고 사업이 잘 된 것 등등, 그런 것을 마구 집어넣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감사와 고마움이 나오게 되면, 그렇다면 그런 것을 나중에 다 잃어버리게 되면 어떻게 할 것이냐는 말이다. 마치 욥처럼 말이다. 욥기가 괜스리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때는 아마도 감사와 고마움이 아니라 땡깡(?)을 치지 싶다는 것이다.

◈ 하나님의 고통에서 나온 감사와 고마움은 천국에 !!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의 고통을 통과해서 나온 감사와 고마움은 천국에 이르도록 하지만, 그러나 스스로는 성도라고 하면서도, 자기 몸이 건강하고, 돈을 잘 벌고, 교회가 부흥되고 하는, 그런 것들을 통해서 감사와 고마움이 나오게 되면, 결국에는 하나님을 원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자기가 노력한 만큼 그렇게 자기에게 복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책임은 하나님이 알아서 져야만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 그런 사람이 갈 곳은 지옥밖에는 다른 곳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 질문 -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가장 고통스러워하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그것을 이제 다니엘서를 통해서 이야기하려고 하는데, 아무튼 그렇게 하나님의 고통을 통과한 사람에게는 감사와 고마움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의 고통이 무엇인가?" 라는 것인데, 하나님의 고통이 말이다.

이것을 예를 들면 조금 쉽게 설명이 되지 싶은데, 회사에 다니는 사람들이 회사에서 일이 많을 때는 가끔씩 집에 와서 할 때가 있는데, 차트를 작성하든지 자료정리를 하든지 말이다. 그런데 집에 와서 일을 하면 마누라와 아이들이 그냥 가만 두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차트를 만드는데 매직이 없어지고, 자료가 이리저리 뒹굴고 말이다.

◈ 여봉, 지금 뭐해용?

저도 그런 경험이 좀 있는데, 집에서 책을 좀 보려고 하면 어린아이인 진주가 옆에 와서 같이 놀아달라고 때를 쓴다는 것이다. 가끔 마누라도 와서 "여봉, 뭐해?" 라고 하면서 안아 달라고(?) 찡찡거리고 말이다. 그러면 일이 되는가? 전혀 진행이 안 된다는 것이다.

방금 집사님이 "하나님의 고통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었는데, 지금 하나님께서 열심히 일을 하시는데 누가 방해를 하는고 하니, 소위 성도라고 하는 우리들이 그런 주님의 일을, 즉 복음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무엇을 좀 그리려고 하면 잉크를 쏟아버리고, 어깨에 올라타고, 마구 뒹굴고 말이다. 마누라도 같이 합세를 해서 방해를 하고 말이다.

◈ 하나님의 고통은,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 때문에 !!

그러니 하나님의 고통이 무엇인고 하니,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기밖에 모르는데, 즉 자기가 꾸미고 있는 그런 자기 소꿉놀이에만 관심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소꿉놀이가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 짜증은 하나님께 낸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뭐하시나? 내가 하는 일이나 좀 도와주면 안 돼나?" 라고 하면서 말이다.

사실 지금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일을 시키고 있는데, 어떤 사람은 자기 재산과 시간과 건강까지 바쳐서 봉사하게 하시고 말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그런 것도 모르고서, 조그마한 자기 소꿉놀이에 빠져서, 마치 하나님은 아무 것도 아닌 분으로 여기는데, 즉 믿어도 그만 믿지 않아도 그만인 분으로 말이다.

◈ 문제는 바로 '너'와 '나' !!

그렇게 하나님을 비방함으로 말미암아서, 하나님께서 전 우주에 벌리시고 있는 그 원대하고 장엄한 복음을 인간 스스로가 방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고통을 받고 계시는데, 그러니 얼마나 안타까우냐는 말이다. 즉 우리는 좁게 보고, 하나님은 넓게 보시는데, 바로 그런 차이에서 오는 우리의 짜증냄을 하나님께서는 받아주신다는 것이다.

◈ 예수님을 좀 이용하세요 ??

어떤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는데, 참 일리가 있다 싶어서 소개를 해드리는데, "예수님을 좀 이용하세요" 라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예수님에게 잘 보이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즉 "예수님, 제가 여기에 헌금을 가지고 왔습니다. 제가 봉사와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라고 하지만 말고 말이다. 그렇게 예수님에게 재롱을 피우려고 하지 말고, 제발 예수님의 용서하심을 좀 퍼가라는 것이다.

참으로 중요한 내용인데, 예수님은 이렇게 자기의 용서하심을 한 대접이나 만들어놓았는데, 전부가 다 자기 잘난 체만 하기 때문에 그런 용서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자기 잘남의 경쟁에 바쁘지, 주님의 바닥에 고인 피를 퍼가서 자기를 씻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이야기인가? 인간은 이렇게 항상 "저는 이번에도 실수하지 않았어요. 얼마나 완벽한지 몰라요" 라고 하면서, 자기 잘남을 자랑하기에 분주했지, 주님께서 이미 모두 만들어놓은 용서하심의 그 은총을 퍼가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 어휴, 더워 더워라 !!

그것은 마치 무더운 한 여름철에 옆에 물이 한 통이나 있는데도, "아이쿠, 더워라" 라고 하면서 헥헥거리고 있는 것과도 같은데, 그냥 그 물을 퍼서 덮어쓰면 되는데 말이다. 그렇게 해서 끝에 시원하게 되면 감사와 고마움이 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따구로 살아도 구원을 받는구나" 라고 하면서 감사와 고마움이 나와야 하는데, 그런데 그런 감사와 고마움이 넘쳐나는 주님의 용서하심을 퍼담을 생각은 하지 않고, "나는 오늘도 완벽하게 살아야지" 라고 하는데,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완벽하게 살아지는가? 길거리를 걸어가는 여자만 봐도 스텝이 꼬이는 것이 인간인데 말이다.

◈ 성도는 날카로운(?) 인생을 살면 안 돼 !!

그리고 또 "저 집사님은 저렇게 말씀대로(?) 잘 사는데, 나는 왜 그렇게 안 될까?" 라고 하는, 그러한 날카로운(?) 경쟁심, 그런 것이 항상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도는 날카롭게 살면 안 되는데, 그런 일들이 바로 인생을 너무 좁게 보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들이란 말이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말이다.

* 질문 -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셨나요? 스스로 아픔을 느끼기 위해서 그런가요?

물론 인간이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고, 하지만 죄를 짓고 난 다음부터는 인간배후에 누군가가 있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마귀인데, 그런 마귀가 인간을 장악한 상태에서는 인간의 얼굴을 악마가 자기 얼굴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악마의 특징이 무엇인가? 처음부터 하나님께 대드는 존재인데, 그렇게 덤벼드는 이유가 무엇인가? 한 마디로 말해서, 자기가 잘났다는 것인데, 즉 자기 의로움이라는 말이다.

◈ 하나님은 용서함으로 악마의 정체를 !!

조금 어려운 이야기이지만, 욥기나 스가랴서 등에 보면 마귀가 어떻게 등장하는고 하니까, 평소에는 가만히 있다가 꼭 하나님으로부터 누군가가 용서를 받으면 나타나서 시비를 건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 한다는 소리가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 저런 놈을 용서하면 안 됩니다" 라고, 그렇게 시비를 건다는 말이다.

왜 그런고 하니, 하나님은 누군가를 용서함으로서 숨어있는 악마의 정체를 드러내게 하신다는 말이다. 즉 그런 방식으로 악마의 정체를 폭로시킨다는 것이다. 여호수아의 경우에도, 시커먼 옷을 벗기고서 새 옷으로 갈아 입히려고 하면 악마가 튀어나오고 말이다.

그런 악마가 뭐라고 하겠는가? "하나님이 그렇게 일방적으로 용서해주면 안 됩니다. 아니 그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그들의 행위를 물어서 반드시 책임을 지울 것은 지워야 합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마치 '전설의 고향'에서 저승사자가 사람을 데리고 가면, 옥황상제가 물을 것은 묻고 해서, 그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을 하듯이 그렇게 해야 한다는 말이다.

◈ 누가 택한 자들을 송사하리요 !!

하지만 여기에 사도바울은 뭐라고 하는가? 로마서 8장 33절에서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라고 하는데, 그러므로 결코 하나님께서는 마귀가 요구하는 데로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롬 8:33)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롬 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 하나님과 악마의 줄다리기 ??

그러니 이렇게 사람을 하나 두고 양쪽에서 서로 다른 법칙이 마주치는데,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용서를 해주겠다고 버티고, 마귀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버티고 말이다. 즉 하나님께서 그렇게 용서를 해주어도 그 사람이 하나님의 용서를 알지도 못하고, 오히려 거부한다는 것이다. "하나님, 그렇게 하면 제가 미안해서 안 됩니다" 라고 인간이 말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그러한 용서를 그냥 받아들여서 감사하다고 하는 인간은 없다는 것이다. 마귀가 볼 때는 말이다. 그것이 또한 사실이고 말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하시는가? "내가 나의 열심으로 그냥 감사하는 인간을 만들어내겠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마귀는 또 뭐라고 하는가? "하나님, 세상에 그런 인간이 어디 있습니까? 저하고 내기를 한번 할까요?" 라고 해서, 또 다시 여러 가지 작업을 벌리고 말이다. 그렇게 양쪽에서 줄다리기를 하는데, 그 중간에 인간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예수님이 제일 먼저 당하셨는고(?) 말이다.

◈ 악마가 보는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

오늘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하나님의 고통' 이라는 것이 결국 십자가인데,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사실 예수님 옆에 악마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을 이해할 때 우리가 생각하는 예수님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악마가 보는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 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정확하게 보는 정답이라는 것이다. 평소에 우리 인간들이 생각하는 예수님, 즉 우리가 희망하는 예수님은 말고 말이다.

악마는 이미 예수님에 대해서 다 알고 있는데, 십자가를 지시고 그 피로 말미암아 자기 백성을 깨끗하고 완전하게 하시는 예수님인 줄 악마가 먼저 알고, 그 예수님에게 접근을 하지 못하도록 사람들의 마음을 헷깔리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런 악마가 우리에게 소개하는 예수님이 아니라, 이미 악마가 알고 있는 예수님을 그대로 알면 된다는 것이다.

* 질문 - 그런데 마귀는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도록 그냥 내버려두었을까요?

◈ 인간은 자기 성질대로 살아갈 뿐 !!

왜냐하면, 악마는 하나님의 전제적인 계획을 모르는데, 악마는 그렇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자기가 승리한 줄로 알았다는 것이다. 악마도 타락한 천사, 즉 피조물이기에 자기 고집대로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도 반드시 자기의 성질대로 사는데, 제 아무리 성경말씀을 곱빼기로 가져다주어도 자기 성질대로 행동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 성도는 자기 성질 속에서도 주님의 용서함이 !!

그렇다면 모두들 자기 성질대로 그렇게 살아가는데, 구원을 받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그것은 바로 그러한 자기 성질대로 살아가는 과정 속에서 가끔(?) 주님의 용서하심이 삐쳐 나오면, 그 사람이 바로 구원받은 성도라는 것이다. 성도라고 해서 자기 성질대로 살지 않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런 인간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자기 성질이 고쳐졌다고 하는 것이 백발백중 마귀의 시험인데, 인간의 성질이 고쳐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목사들이 그렇게 사기를 치는 것이지, "거듭난 이성이 어쩌고 저쩌고"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요?

◈ 부부싸움은 필수조건 ??

부부생활을 해보면 그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데, 초창기에는 몰랐던 성질들이 10년, 20년을 살아가면서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그런 더러운 성깔들이 점점 더 공개되는 것이지 고쳐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특히, 자기 성질이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 엉터리인데, 차라리 성깔을 부리고 자기가 못난 놈인 것을 알면 되는데, 스스로 참을성도 많고 괜찮다고 여기는 것이 더 문제라는 말이다. (여성분들이 주로 이런 경향이 많은데, 아닌가??)

물론 이런 것은 있는데, 과거에 자기는 이런 것을 성질을 부리는 것이 아니고 괜찮은 자기 모습이라고 여겼던 것이 나이가 들면서 "아하, 그런 것이 다 나의 철없던 시절의 모습이었구나" 라고 하면서, 그런 것이 자기의 성질대로 사는 모습임을 깨닫는다는 것이다.

◈ 자기 성질이 아니라, 삐쳐 나오는 은혜 때문에 !!

그렇다고 해서 나이가 들어서 자기의 성깔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인간은 죽을 때까지도 자기 성질대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런 과정에서 구원받은 백성은 어떠한가?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하심과 군데군데 삐쳐 나온다는 것이다.

* 질문 - 마귀가 인간의 양심과 같은 것을 많이 자극하는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마귀가 시도하는 고도의 심리전술인 것 같기도 한데 말입니다.

물론 마귀는 그런 인간의 양심에 대해서 자꾸만 격려를 해주는데, 그렇게 해야 예수님의 공로로부터 멀어지니 말이다. 성경에 보면 마귀가 인간보다 더 지혜롭다고 했는데,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인간은 결코 마귀를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그렇게 평생 마귀의 종노릇을 하는 것이 정상인데, 그런데 주님께서 벗어나게 해주신다는 말이다.

* 질문 - 그러면 하나님은 인간을 손대지 못하는 입장이고, 마귀만 그렇게 하는가요?

에베소서에 의하면 마귀는 이미 죄를 가지고 인간을 장악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장악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 자신을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즉 아무리 자기 성질을 자기가 고치려고 해도 안 된다는 것이다.

◈ 인간은, 자기 자신을 어떻게 할 수가 없어 !!

아니, 자기의 그 더러운 성질이 좋아서 계속해서 자기 성질을 가지고 싶어하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하지만 안 된다는 것이다. 억지로 하려고 하면 당연히 마귀가 도와주는데, 하지만 마귀가 누구인가? 거짓말을 하는데는 도사가 아니냐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아이가 말을 잘 듣지 않아서 매로 때렸는데, 그렇게 해서 그 아이가 말을 잘 듣는 착한 아이가 되었다면 그것이 맞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 아이는 때리지 않아도 착하게 될 아이라는 것이다. 부모나 교사가 자기 성질대로 때리는 것이지 말이다.

* 질문 - 인간은 자기 자신을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것, 그것이 어떤 성경적인 근거가 있나요?

당연히 성경적인 근거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인간이 자유로운 게 아니라, 어디에 갇혀있다는 말이다. 그것이 어디인고 하니, 인간은 율법 속에 갇혀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즉 인간은 아담 안에서 율법에 갇혀있다는 말이다. 물론 우리가 살아가면서 자기 성질을 억지로 그렇게 참을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 질문 - 하지만 인간은 복음과 상관없이 자기 힘으로 살아왔다고 여기지 않나요?

그것이 모두가 다 핑계인데, 그래서 자기의 열심과 노력과 수고들을 그런 핑계로 만들어서 더덕더덕 가져다 붙인다는 것이다.

* 질문 - 공부의 경우에, 열심히 공부를 하면 성적이 오르고, 공부를 하지 않으면 오르지 않는 것은, 그런 것은 이미 정해진 게 아닌가요?

그것도 정해진 것이 아닌데, 물론 공부는 열심히 하면 하지 않는 아이보다는 성적이 오르겠지만, 하지만 그것도 다 자기 성질대로 공부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누가 열심히 하고 하지 않는 것은 겉으로 그렇게 판단할 문제가 아니고, 어떤 아이는 열심히 해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고, 어떤 아이는 그냥 마구 노는 것 같은데 열심히 하는 아이가 있다는 것이다.

아이 자신의 경우도 자기를 좋게 보는 경우가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는데, 정작 열심히 하는데도 하지 않는 것으로 여기는 아이가 있고, 열심히 하지 않으면서도 열심히 하는 것은 여기는 아이가 있다는 것이다. 아이가 거짓말로 일부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러니 선생님도 속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다 똑같은데 말이다.

◈ 공부도 자기 성질대로 할뿐 !!

그러니 공부를 잘하고 못하는 법칙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자기 성질대로 공부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제일 효율적이고 말이다. 그러니 인간은 결국에는 자기 성질대로 산다는 것이다. 공부를 하든, 운동을 하든, 그 무엇을 하든지 간에 말이다.

그렇다면 자기 성질을 누가 아는가? 그것은 외부에서는 잘 모르고 자기만이 아는데, 왜냐하면 본인이 그렇게 습득해왔기 때문에 말이다. 그러므로 2시간을 공부하고 4시간을 노는 것이 자기 성질에 맞는 아이가 있고, 어떤 아이는 그렇게 놀라도 하면 짜증이 나서 놀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아이는 4시간을 공부하고 2시간을 놀아야 자기 성질에 맞다는 말이다.

그런데 선생님은 그 아이를 보고 뭐라고 하는가? "성질대로 공부한다" 라고 하지 않고, 착하고 성실한 아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소위 '우등생' 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 그것이 그 아이에게는 자기 성질에 맞다는 것이다.

◈ 교육학은 기능적인 역할만 할뿐 !!

하지만 교육학에서는 그렇게 말할 수가 없는데, 다만 교육학은 나름대로 그 목적이 있으니, 그런 것을 두고 잘한다고 장려할 필요는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2시간을 공부하고 4시간을 노는 것이 자기 성질에 맞는 아이는, 선생님이 아무리 다그쳐서 2시간만 놓고 4시간을 공부하게 해도, 그것이 자기 성질에 맞지 않으니, 당연히 효율성이 떨어지고 성적이 오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같이 열심히 공부해도 등수가 매겨진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만들어낸 법칙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적합한 사람을 뽑아내는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선생님이 "여러분,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공부하는 게 좋습니다" 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거기에 적합한 학생들을 뽑아내는 기능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학생들이 모두 그렇게 하면 좋은 것이 아니고 말이다.

◈ 여기 여기 다 모여라 !!

이것을 조금 더 이야기해보면, 여기 A 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이 자기 그물망을 던져서 걸리는 사람이 있으면 그런 사람들은 모두 A 라는 사람의 친구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서 빠져 나온 사람들은 어떠한가? 그들은 그만 적이 되어버리고 마는데, "당신은 인생관이 틀려먹었어"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인생관이 틀려먹었으면 외로워야 하는데, 그런데 그 사람은 그런 사람들대로 또 친하게 노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여기에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고 하니, 인간이 내뱉는다고 하는 것은, 결국은 그것에 적합한 것을 찾아내는 하나의 주칭(?)에, 즉 게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 여기에 다 모여라. 우리 함께 놀자" 라고 하는 게임에 말이다.

* 질문 - 가장 학문적인 요소가 많은 것이 법칙화가 되어있다고 하는 것은 어떤가요?

학문의 가치가 바로 거기에 있는데, 그것은 말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그렇게 하면 무엇이 된다" 라는 것이 말이다. 예를 들어서, "수학공부는 이렇게 이렇게 하시면 좋습니다" 라는 것은 말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이야기를 했는데, 왜 내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아?" 라고 한다면, 그런 것은 곤란하다는 말이다.

* 질문 - 제가 학습상담을 해주면, 그것도 역시 그물망을 던지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물론 그러한데, 하지만 그물망 중에서도 노하우가 많이 축적된 그물망에는 많이 걸려든다는 것이다. "아이쿠, 지금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이 제가 평소에 생각한 것과 같네요" 라고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전부를 다 건지지는 못한다는 말이다.

◈ 주님의 완벽한 그물망이 !!

방금 우리가 한 이야기가 쓸데없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데 주님은 망을 던진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용서' 라는 것인데, 그야말로 완전한 용서라는 말이다. 즉 "너희들이 구원을 받는데는 내가 아무 것도 묻지 않고, 그냥 나의 완전한 용서로서 구원해주겠다" 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것을 주님이 영생을 주기로 작정된 자만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두고서 자기 능력으로서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것은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전혀 인간의 자기 능력이 아닌데, 왜냐하면 아까도 말했지만, 인간은 자기 힘으로 도저히 자기 자신을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 질문 - 그러면 지금 하나님께서 진행하고 있는 일에 마귀의 활동도 일조를 하는 것인가요?

물론 그러한데, 반드시 마귀의 활동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저는 용서가 필요 없습니다. 저는 제 힘으로 할 수가 있습니다" 라고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마귀가 활동한 결과임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 질문 -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잖아요? 빈틈없이 모든 것을 다 자기 생각대로 해나가시니 말입니다.

◈ 인간과 하나님의 고통은 달라 !!

그것이 바로 인간들이 생각하는 고통인데, 인간들의 고통은 자기 범주 내에서만 돌아다니는 고통이란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인간은 자기가 아무리 아프고 괴로워도, 남들이 그것을 대신해서 느낄 수는 없다는 것이다. 물론 남에게 호소는 할 수가 있겠지만 말이다. 즉 "타인은 타인이고, 나는 나다" 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자기 손에 가시가 들어가면, 물론 그것을 말로는 표현할 수 있지만, 그러나 다른 사람이 그것을 대신해서 아파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의 손은 전혀 자기 손처럼 그렇게 아프지 않으니 말이다.

◈ 왜 예수님을 대상화시키는가?

아무튼 하나님께서는 마귀를 때려잡기 위해서 예수님을 대상화시켰는데, 즉 예수님 안에 모든 고통을 다 담아놓았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는데 있어서 인간이 당하는 모든 고통을 감내하는 식으로 말이다. 사실상 이미 인간은 고통 속에 있는데, 그런데 마귀는 그것을 두고서 어쩔 수 없다고 하면서, 그것을 당연시하는 분위기 속에 있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이렇게 이야기하면 좀 쉽지 싶은데, 지금 우리 인간들이 아무리 고통스럽다고 해도 그것이 지옥의 고통은 아닌데, 왜냐하면 지금 당장은 이 세상이 지옥은 아니니 말이다. 하지만 장차 인간들은 모두가 다 지옥에 갈 수밖에 없고, 그래서 반드시 그 지옥의 고통을 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영원토록 말이다.

하지만 이 지옥불의 고통은 사람이 살아있는 한 느낄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인간은 살아서 지옥에 갈 수는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인간은 죽으면 반드시 느끼게 되어있는데, '부자와 나사로'의 그 부자처럼 말이다. 부자가 얼마나 고통스러웠든지 손가락에 물 한방울을 찍어서 자기에게 달라는 것이다.

아무튼 이러한 지옥의 고통은 살아있는 사람은 도저히 동참할 수가 없는데, 그래서 당장 이 세상이 지옥의 고통이 아니기 때문에 마귀는 인간에게 격려를 하면서, 이런 고통을 해소하는 방법을 자꾸만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니가 잘만 하면 벗어날 수가 있어" 라고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지옥의 고통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닌데 말이다.

◈ 예수님의 십자가는 곧 지옥의 고통 !!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는 무엇인고 하니, 이 세상의 고통이 아니라 지옥의 고통이라는 말이다. 마태복음 27장 46절에 보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라고 했는데, 이것이 바로 신비라는 것이다.

(마 27:46)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 십자가는 마귀가 흉내도 못내 !!

이것이 왜 신비인고 하니, 마귀가 다른 것은 다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바로 이것은 흉내조차도 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마귀는 자기가 아는 범위 내에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고, 거기에 인간을 집어넣어 버리지만, 그러나 이것은 전혀 경험하지 못한 사건이라는 말이다.

마귀는 인간을 항상 이기는데, 왜냐하면 인간이 무슨 경험을 하고 생각을 하는지 모두 다 알고 있기 때문에 말이다. 그러니 단 하나 알지 못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지옥에 받는 그 저주의 고통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직까지 영원한 유황불에 가지 않았으니 말이다. 물론 나중에는 지겹도록(?) 경험을 하게 되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마귀는 피조물이니 아직 그런 고통을 모른다는 것이다. 오직 예수님만이 알지 말이다. 그래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최후로 결정한 그 미래의 모든 결정은 예수님이 홀로 독점적으로 가지고 있는데, 그러니 외부에 있는 마귀나 인간은 아무도 그러한 고통을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그 고통을 맛보고 싶어도 볼 수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마귀가 피조물이라는 것은, 그리고 인간도 역시 피조물인데, 그러면 이런 피조물이 왜 있는가? 제 아무리 폼을 잡아도 피조물들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도구로 사용되기 위해서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처음부터 천국과 지옥을 만들어놓았는데, 하지만 그 지옥의 최후의 고통은 마귀도 맛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런 최후의 고통을 예수님으로 하여금 맛보게 하셔서, 그러니 전혀 그 누구라도, 마귀도 전혀 예상치 못한, 그런 아주 독특하고 낯선 것을 집어넣어서 마귀의 술책을 완전히 박살내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 백성에게는 그 고통을 미리 알게 함으로서, 구원받은 자의 은혜와 감사함이 항상 넘치게 하신다는 말이다.

◈ 피조물과 창조주는 노는(?) 세계가 달라 !!

지금 우리는 피조물과 창조주의 세계가 다르다는 것을 구별해야 하는데, 그래서 피조물이 창조주의 세계에 들어가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단 하나, 피조물이기 때문에 말이다. 피조물이란 말은, 피조세계에 갇혀있다는 의미인데, 그래서 창조주의 세계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만 창조주의 세계에서 철근(?)과 같은 것이 '죽' 하고 튀어나와서, 그것이 심어지고 꼽혀져서 뽑혀져 나온 사람에게는, 그때 그 사람에게 그곳은 곧 천국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피조물의 세계는 그만 지옥으로 변하게 되고 말이다. 그런데 피조물들은 아직도 그것을 모르는데, 마귀든, 천사든, 인간이든 말이다.

◈ 불심판과 은혜에 무지한 피조세계 !!

아무튼 모든 피조물들은 이러한 무서운 불심판의 저주와, 그리고 주님의 놀라운 은혜에 대해서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만의 계획이기 때문에 말이다. 물론 피조물들은 피조세계 안에서는 조금 안다고 까불겠지만, 그러나 바깥 세계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피조세계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들어오니, 그 십자가를 믿을 인간이 있는가? 당연히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십자가에 대해서 대항할 수 있는 악마도 없고 말이다. 물론 천사도 없고 말이다. 마귀가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요한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은 스스로 자기 목숨을 버린다고 했고 말이다.

(요 10:17)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요 10: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된 것인데, 그런데 예수님은 이 십자가에서 피조물이 상상도 못하는 지옥의 경험을 했는데, 그래서 예수님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라고 했고, 또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에도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그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주소서"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 고통이었으면 그렇게 하셨느냐는 말이다.

◈ 하나님의 고통과 성령 ??

그러니 그 어떤 인간도 그 고통의 경험을 공유할 수 없는데, 그래서 누가 임하시는가? '성령' 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안 되기에 말이다. 주님의 성령께서 임하시게 되면, 자기 택한 백성을 천국까지 데리고 가시는데, 그렇게 해서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으로 가게 된 그 고마움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그것을 제대로 모르는데, 왜냐하면 철없는(?) 피조물이기 때문에 말이다. 그런데 그러한 피조물이 천국에 가면 놀랄 수밖에 없는데, "천국이 이렇게 좋을 줄이야"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것은 "지옥이 이렇게 무서울 줄이야" 라는 것과 정반대로 생각하면 되고 말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삼층천에 올라가서 그것을 경험하고 하니, 그만 더 이상 이 세상에 있기가 싫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몸을 떠나서 주와 함께 있고 싶다고 했다는 말이다. 그것이 그냥 빈말(?)로 하는 소리가 아니라, 정말로 그렇다는 말이다. 피조물은 이것을 모르는데, 그런데 이제 성령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 질문 - 인간이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고마움이 어떻게 되나요?

그것이 항상 있는 것이 아니라 삐져나오는데, 마치 샌드위치에서 크림이 그렇게 삐져나오듯이 말이다. 그렇게 전혀 예상치 못한 기쁨으로 나타난다는 말이다. 전부가 다 드러나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조금씩 삐져나온다는 것이다. 물론 천국에 가서는 모든 것을 다 알겠지만 말이다.

* 질문 - 그런데 자기가 인위적으로 그런 감사와 고마움을 찾으려고 하는 사람도 있지 않나요?

그것은 마귀의 유혹이고, 곧 실망감으로 변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가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이미 주께서 모두 해놓으셨다는 감사와 고마움이 있는데, 그것이 평소에 항상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전혀 예상치도 못한 상황에서 돌발적인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느끼게 하신다는 것이다.

* 질문 - 그러면 그런 예상치도 못한 감사와 고마움을 느끼면 성도라고 할 수 있네요? 그런데 자기는 항상 느낀다고 하면요?

◈ 성도에게는 날마다 예상치도 못한 일들이 !!

자기가 예상치도 못한 감사와 고마움을 느끼면 성도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데 자기는 항상 느낀다고 하면, 그것은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물론 성경에 "범사에 감사하라" 라는 말씀이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이 성령을 통해서 그렇게 지시할 때, 그 사람은 전혀 예상치도 못한 사건을 통해서 감사하게 된다는 것이다. 전혀 감사할 일도 아닌데 말이다.

◈ 진정한 감사는 십자가 앞에서 !!

그런데 그렇게 감사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무엇인고 하니, 언제 자기를 십자가 앞에 세울 때 감사가 터져 나온다는 것이다. 평소에는 십자가의 존재가 그렇게도 미미했는데, 그런데 갑자기 그 십자가가 그렇게 엄청나게 자기에게 다가온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자기가 그동안 고민했던 그런 문제들이 그 십자가의 피 앞에서 그만 아무 것도 아닌, 정말이지 고민거리도 아님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하루에 몇 대밖에는 버스를 그만 한 겨울에 눈앞에서 놓쳤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서 하나님께 깡탈을 부리는데, 왜 그렇게 하셨냐고 말이다. 그것 때문에 지금 자기가 추운데서 얼마나 고생을 하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것이 십자가에서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말이다. 그렇게 주님께서는 우리가 예상치도 못한 상황에서 십자가 앞에서 우리 자신을 다시금 바라보게 하신다는 것이다.

◈ 오잉, 그것이 성령님의 과제 ??

그것이 바로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나오는데, 그런데 여기서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라는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성령님에게 예수님께서 주신 과제라는 말이다. 우리가 아닌 성령님의 과제라는 것이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 질문 - 그러므로 성령님은 우리에게 십자가의 그 고마움을 느끼게 한다는 것이죠?

우리 인간은 범사에 감사하는 흉내는 낼지 몰라도 그 십자가의 은혜는 전혀 예상치도 못한 것인데, 그런데 성령님께서 그 십자가의 은혜를 느끼고 믿도록 인도해주신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도 그때그때 다르고 말이다. 그렇게 예상치도 못한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것을 또 인위적으로 연장하려면 안 되고 말이다.

* 질문 - 그렇다면 어떻게 보면 자기는 항상 감사하면서 산다고 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그것이 바로 가식된 삶이 되어버리지 않겠습니까?

물론 그러한데, 물론 성령께서 그렇게 범사에 감사하도록 노력하게 할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자기가 범사에 감사하려고 하는 것은 자기 욕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 질문 - 이것은 오늘 공부와는 상관이 없지만, 왜 이전에 목사님께서 믿지 않는 자는 죽으면 영혼이 없어진다고 하셨다고 말씀하신 것 같은데요? 영혼이 믿는 자에게는 있어서 천국에 가지만 불신자는 없다고 말입니다.

그것은 집사님이 잘못 기억한 것 같은데, 그렇게 되면 여호와 증인처럼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아마 불신자에게 성령이 없다는 표현을 오해했지 싶은데, 아니면 기존교회에서 주장하는 '영혼 불멸설'은 이방종교의 것이라고 비판한 것을 오해했던지 말이다.

사실 저는 영혼이라는 표현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데, 과연 육체가 영혼에 포함이 되는지 안 되는지, 그런 문제가 있기 때문에 말이다. 보통 사람들이 사용하는 영혼이라는 말은, 반드시 거기에 육신과는 다른 요소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 영혼은 육신까지 포함해서 !!

그런데 제가 가끔 영혼이란 말을 사용할 때는 육신까지도 포함해서 영혼이라고 하는데, 즉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장소(?)를 영혼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저는 "인간은 육신과 영혼으로 구성되어있는데, 그런데 하나님과 만나는 것은 영혼입니다" 라는 말은 거부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철학이고, 인간이 만들어낸 사고방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튼 제가 "하나님과 만나는 것은 영혼입니다" 라고 할 때는 육신까지도 포함해서 하는 이야기라는 말이다. 그래서 저는 영혼을 그냥 인간의 '자아' 라고 보고 싶은데, 그렇게 되면 불신자이든 신자이든 다 자아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아가 있으니, 지옥에서 지옥불의 고통을 받는 것이고, 또 천국에서는 영생의 기쁨을 맛본다는 말이다.

◈ 이제 다니엘서를 !!

오늘 우리가 다니엘서를 공부하려고 하는데, 제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하나님의 고통이 이 다니엘서와 결코 무관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사실은 이 다니엘서가 너무나 어렵기 때문에 서론격으로 그러한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이제 다니엘서를 한번 살펴보자.

◈ 묵시세계와 역사세계가 동시에 !!

이 다니엘서가 어려운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이 다니엘서에는 두 종류의 세계가 있는데, 하나는 묵시세계이고, 또 다른 하나는 눈에 보이는 역사세계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세상학문에서는 이렇게 묵시세계와 역사세계를 나누는 법이 결단코 없다는 것이다. 철학이나, 법학, 또는 사회학 등에서 말이다.

그들은 묵시의 세계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데, 오직 성경에서만 이러한 묵시의 세계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묵시적 관점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만, 그러나 이러한 묵시세계의 존재에 대해서는 결단코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아니, 인정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는 영적인 것이 전혀 없고 물질적인 것밖에 없는데, 그래서 물질과 물질이 그냥 그렇게 이어져간다는 것을 찰떡같이 믿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적인 것은 모두다 의도적으로 삭제를 시켜버리고 말이다.

◈ 선생님, 천사를 가르쳐주세요 ??

예를 들어서, 학교에서 어디 천사가 있다고 가르치던가요? 만약 천사에 대해서 가르치려고 하면 모든 학교에 천사를 전공한 교사가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해야 천사가 있는 현실을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모두 다 학생들에게 가르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천사를 전공한 교사가 없다는 것은, 그렇게 천사를 가르치지도 않고 이 세상을 하나도 빼먹지 않고 모두 가르칠 수가 있다고 장담을 하기 때문에 말이다. 그래서 그것을 전공한 선생님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니 묵시세계는 없다는 말인데, 그렇지 않다면 천사가 수능시험에 나오고, 천사를 전공한 학원도 있어야 하고 않느냐는 것이다.

◈ 어, 여기 천사가 있네 !!

하지만 문제는 그런 천사가 없는 것이 아니라 사도행전에 보면 분명히 나오는데, 즉 베드로가 감옥에 갇혀 있는데 누가 옥문을 열었는가? 그리고 사도요한이 밧모섬에 있는데, 누가 와서 그 말씀을 가져다주었는가? 예수님이 성령으로 천사에게 전달하고, 또 그 천사가 사도요한에게 전달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천사가 직접 와서 사도요한에게 이야기를 해주니, 바로 그것을 받아 적어서 요한계시록이란 책이 만들어졌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제대로 공부하려면, 천사가 그렇게 직접 전해주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다니엘서에는 누가 나타나는가? 역시 천사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니엘이 천사에게 절을 하니, 천사가 다니엘을 보고 뭐라고 하는가? 자기에게 절하지 말라고 하고 말이다. 그러니 이런 다니엘서와 같은 구약을 문자적으로 보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보통 신학자들이 이야기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문헌적 방법, 역사적 방법, 문법적 방법, 그리고 언어적 방법 등등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모두 소용이 없는데, 결코 하나님께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 다니엘서를 공부하려면, 먼저 묵시세계를 !!

그러므로 적어도 다니엘서를 공부한다고 하면, 그렇게 공부를 같이 하는 사람이 묵시적인, 즉 영적인 세계도 함께 수용을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목사님, 이 역사세계만 공부합시다" 라고 하면서 아무리 열심히 해도 소용이 없는데, 그러니 역사적 세계를 영적인 세계와 함께 결합을 시켜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가정주부들이 매일같이 무슨 생각을 하는가? 자기 아이들의 학원비나 장바구니의 돼지고기나 콩나물 값 등을 고민하는데 말이다. 물론 영적 세계를 그렇게 칼로 잘라버리면, 그런 남편의 직장이나 아이들의 공부나 오늘 저녁 반찬거리를 걱정하게 되는데, 그리고 시댁의 제삿날이 언제인지 말이다. 왜냐하면, 영적인 세계를 자르면 역사세계만 남으니 말이다. 하지만 영적인 세계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게 역사세계만 알게 되면 반쪽 짜리 인생인데, 그러니 현실세계에 살면서도 전혀 비현실적으로 살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생의 절반밖에 모르니 말이다. 그러니 그야말로 멍텅구리 같은 삶을 사는데, 이 세상 사람들처럼 그냥 눈에 보이는 것만 쫓아서 살아가니 말이다. 매일같이 고지서로 날아오는 카드요금이나 공과금 등을 보면서 걱정이나 하고 말이다.

그런데 이런 역사세계와 묵시세계, 즉 영적인 세계를 같이 결합을 해서 짬뽕으로(?) 일을 하시는 분이 누구인고 하니,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란 것이다. 그러니 그러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로 그것은 역사세계와 묵시세계를 다 함께 믿는다는 말이다.

◈ 당신은 다니엘이 믿었던 하나님을 믿습니까?

그것이 바로 다니엘서가 보여주는 것인데, 즉 역사세계와 묵시세계가 혼합이 되면서, 그렇게 살았던 자가 다니엘이고, 즉 그렇게 합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다니엘이 믿었다는 말이다. 바로 그런 하나님을 지금 여러분도 믿고 있느냐고, 지금 이 성경말씀이 우리에게 묻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도 역시 자르면 안 되는데, 다니엘은 역사세계만의 인생이 아니라, 묵시의 세계가 관여한 인생인데, 바로 그런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지, 그것을 이 다니엘서가 우리에게 진지하게 묻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얼른 대답하기가 상당히 어려운 문제임에 분명하지만, 하지만 성도는 반드시 그러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 아하, 차이가 나기는 나는구나 !!

그러므로 이 다니엘서는 그만큼 우리가 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넓혀주는데, "아하, 우리와 이 세상 사람들이 차이가 나는 것이 있기는 있구나" 라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는 말이다. 즉 이 세상 사람들은 묵시가 빠진 체로 그것을 현실로 보고, 그에 반해서 성도는 묵시를 집어넣어서 현실로 본다는 것이다. 이 묵시의 세계가 자기를 이끌고 있다는 것을 현실로 여긴다는 말이다. 그러니 보통 심각한 차이점이 아니라는 것이다.

◈ 인자(人子) - 사람의 아들 ??

그렇다면 이 다니엘서에서 합쳐서 나타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을 신학자들도 알아야 하는데, 바로 그것이 그 유명한 '인자(人子)' 라는 것이다. 이문열씨처럼 그것을 풀이해서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면 좀 곤란하고 말이다. 너무너무 중요해서 다시 강조하는데, 역사세계와 묵시세계를 합친 것을 두고서 '인자' 라고 한다는 것이다. 고유명사로서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 그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과연 어떻게 바라보고 대했는가? 그들은 정작 예수님을 '인자' 라고 부르면서도, 역사만 보았지 묵시를 빠트린 인자로 보았는데,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그만 십자가게 못박아 죽여버렸다는 것이다.

◈ 묵시세계와 역사세계가 결합된 예수님을 !!

좀 더 쉽게 말하면, "지금 제가 예수님을 열심히 믿는데, 그런데 예수님은 왜 저를 힘들게 합니까?" 라고 했을 때, 그 사람은 절반을 잘라서 그만 내버렸는데, 그러면 무엇을 빼버렸는가? 그 사람이 믿는 예수님은 역사 세계의 예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정말 묵시세계와 연결된 예수님, 즉 '인자'로서의 예수님을 믿었다고 하면, "맞아. 지금은 내가 힘이 들어도 예수님을 만나면 행복할거야" 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묵시를 결합시킨 예수님을 믿는 자가 바로 성도라는 것이다. 반쪽만의 예수가 아니라 말이다.

그래서 스데반 집사는 예수님을 믿어도 반쪽이 아닌 몽땅(?)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돌맹이가 자기에게 날아와도 뭐라고 했는가? "예수님, 지금 저 사람들은 아무 것도 모릅니다. 그러니 용서해주세요" 라고 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역사뿐만이 아니라 묵시의 예수님으로 믿었기 때문에 말이다. 그것이 바로 성도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 손성식 목사님은 왜 절규하는가?

이것을 손성식 목사님이 그렇게 애타게 여기면서 크로스빌리지에 글을 올리고 있는데, 왜 예수님을 묵시적 존재로 보지 않고 역사적인 존재로만 보느냐고 말이다. 그렇게 하니 자꾸만 "예수님처럼 살자. 바르게 살자. 착하게 살자. 희생하며 살자. 봉사하며 살자" 라는 소리가 나온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예수님을 반쪽으로만 보느냐는 것이다. 묵시의 세계를 무시하고 말이다.

* 질문 - 그러면 역사는 인자를 공격하는 식으로 나옵니까?

물론 예수님은 인자인데, 역사세계와 묵시세계가 다 포함된 인자라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의 피는 진짜 피이고,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음은 진짜 죽음이라는 말이다. 손과 발에 박힌 못은 진짜 못이고, 예수님에게 뱉은 침도 진짜 인간의 침이라는 것이다. 옷벗김과 수치스러움도 역시 그렇다는 말인데, 즉 그런 것들이 모두가 다 역사세계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란 말이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것을 묵시적 관점에서 해석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죽음은 내 아버지의 뜻입니다. 주여, 내 영혼을 받아주소서" 라고 하는데, 이것이 어떻게 역사적 관점에서 해석이 되느냐는 말이다. 하지만 성도는 그것이 해석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아하, 오늘도 주께서 낚시를 하게 하시는구나 !!

집사님의 경우에도 회사에 출근도 해야하고 공부도 해야하니 얼마나 바쁘냐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집사님의 역사인데, 그런데 그것을 묵시적으로 해석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오늘도 주님이 직장을 주셔서 일을 하게 하시는구나" 라고 말이다. 물론 꼭 일하는 것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낚시를 가는 것도 주님의 인도하심이구나" 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예수님, 여기까지만 오시고, 그 다음부터는 저의 개인적인 역사입니다" 라고 할 입장이 못되는데, 왜냐하면 주님이 하늘에서 늘 지켜보고 계시니 말이다. 사실은 그것이 성도에게 주어지는 주님의 은혜이고 말이다.

* 질문 - 그러면 '인자'와 '성도'를 같은 선상에서 보면 안 되나요?

사실은 같은데, 왜냐하면 다같이 성령이 계시니 말이다. 하지만 성도는 어디까지나 인간인데, 그런데 인간은 언제나 묵시는 따로 떼서 내버리고는 자기가 용서받을 것만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역시 연약하기 때문에 말이다.

◈ 주님, 마누라가 무서워요 ??

그래서 인간은 벌벌 떨면서 묵시가 아닌 역사로서만 해석하려고 하는데, 또한 겁이 나기 때문에 매일같이 짜증을 내는데, "주님이 저에게 해준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라고 하면서 말이다. 주님이 바라보라는 십자가는 보지 않고서, 그렇게 역사만을 바라보기에 겁만 내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 질문 - 그러니 예수님이 보는 묵시적 관점으로 우리도 그렇게 보아야 한다는 말씀이지요?

그렇게 되면 예수님 속의 역사가 있고, 또 예수님 밖의 이런 악한 역사가 있는데, 물론 주님도 역사적 존재이기 때문에 그분 나름대로의 역사가 있고 말이다. 물론 주님의 역사를 무시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주님을 바라보는 것 자체가 악한 역사이니, 결국에 인자의 역할은 "이 역사는 악한 역사이며 멸망을 당해야 될 역사이다" 라는 것이다. 즉 인자의 역사를 가지고서 고발하고 정죄한다는 말이다.

* 질문 - 그러면 역사가 인자를 공격하는 게 아니라, 결국 인자가 역사를 고발한다는 말입니까?

물론 예수님께서 먼저 공격하지 않으면 역사도 공격하지 않는데,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한번 생각을 해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왜 죽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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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