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8장 22-26절 제목 : 무엇이 보이느냐
막 8:22-26 (무엇이 보이느냐)
이름 : 우리교회(IP:220.81.176.150)
본문 : 마가복음 8장 22-26절
제목 : 무엇이 보이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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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08-10-26 13:26
무엇이 보이느냐?
2008년 10월 26일 본문 말씀: 마가복음 8:22-26
막 8:22)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소경 하나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 대시기를 구하거늘』
(막 8:23) 『예수께서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막 8:24) 『우러러보며 가로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막 8:25)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저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만물을 밝히 보는지라』
(막 8:26)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가라사대 마을에도 들어가지 말라 하시니라』
장애자란 비정상인이라고 사람들은 간주합니다. 재수 없는 자라는 평판을 받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장애자가 예수님과 함께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과연 이 소경이 재수없는 자일까요 아니면 복받은 자일까요? 사람들이 소경을 예수님에게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을 제 3자로 남습니다. 자신들은 장애가 아니며 단지 예수님께서 멋진 솜씨를 보여줄 때에 환호성만 올리면 되는 건강스러운 자로 여깁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기대한 방식대로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지는 않습니다. 소경을 데리고 마을을 떠납니다. 이제 소경과 예수님, 예수님과 소경 단 둘이 남아있습니다. 이 단 둘이서 무엇을 하시려는 겁니까? 예수님의 모든 일들은 원초적인 사건을 되풀이 하는 것입니다.
처음의 시간, 처음의 공간, 처음의 사건으로 되돌려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이 소경된 자는 단지 본인에게만 적용되는 일을 당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저주받은 인간의 대표자로 예수님과 함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왜 나만 소경되어야 하는 지를 모릅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과 더불어 있게 되므로서 만물을 밝히보는 자가 될 것입니다.
스스로 건강하다고 여기는 자는 소경의 처지를 불쌍히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의 처지가 아니라고 단정해버립니다. 인간에게는 자신이 장애인이 아닌 것을 다행스럽게 여깁니다. 하지만 자기 집안 가족 중에 장애인이 있으면 늘 골치 아픕니다. 그래도 아직 자기 자신은 장애인이 아니기에 견딜만 합니다. 하지만 막상 본인이 장애인이 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절망 그 자체입니다. 절망이란 그동안 자신의 힘으로 자기 처지를 변경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다 해보았지만 결국 실패로 끝났으며 자신의 처지를 영원히 고정적이다는 사실이 확정되었을 때 오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래야 제대로 된 절망입니다. 약간의 희망이 있어도 절망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소경이 예수님 앞에 설 때에 과연 기쁠까요? 사람은 과거가 쌓아서 오늘의 나를 생각하게 마련입니다. 과거 세월동안 아무리 노력해서 소경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비록 그가 예수님 앞에 서 있어도 절망감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법입니다. 희망을 갖는다고 해서 절망에서 벗어났다고 볼 수 없습니다.
이 알 수 없는 공포와 두려움은 모든 이들에게 있어 운명처럼 붙어 있습니다. 사람이 사는 보람이란, 자신이 잘 할 수 있고, 또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될 때 생깁니다. 하지만 장애가 온다든지 죽음이 온다든지 하면 그 모든 보람도 일시에 다 무너져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이 무서운 겁니다.
하지만 아직도 인간이 뭔가 공포를 느낀다는 것은 만물에 대해서 제대로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른다는 것은 공포의 여지가 항상 남아 있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곧 지금의 자기 생각이 온전히 자신과 일치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 일치되지 않는 여분의 자리에게 자꾸만 공포가 밀려오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최소의 시간, 최초의 공간과 최초의 사건에서 멀어져버렸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나는 저주받았다”라는 말을 할 수 있는 자만이 비로소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처지가 일치되는 사람입니다. 이런 자만이 만물을 익히 아는 자입니다. 예수께서 오신 것은 모든 것을 이 본래의 상황으로 되돌려놓기 위함입니다.
삼손이나 세례 요한은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으로부터 예언받아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만큼 사람들의 기대감으로 한 몸을 받는 운명으로 태어난 겁니다. 분명 하나님에게 큰 일과 업적을 남길 사람으로 여김받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에게 쓰임받는 것은 사람들이 좋게 기대하는 것처럼 사람들로부터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 사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도리어 사람들이 예상못한 비참한 팔자의 길을 가게 됩니다.
세례 요한이 옥에 갇혀 있으면서 예수님의 활동을 ‘조용한 활동’으로 여기서 과연 예수님이 메시야 맞는지를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이럴 때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답변을 내놓았습니다. 마태복음 11:4-6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나태하거나 쉬고 계신 것이 아니라 오직 소경이나 앉은뱅이나 문둥이나 귀머거리나 가난한 자는 죽은 자에 한해서 참으로 소중하고 필요하고 큰 능력을 행하시는 분으로 크게 다가오게 되어 있습니다. 소위 현재 자력으로 살만하다고 여기는 사람에게는 예수님은 실족하게 만드는 분으로만 작용하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는 장애자는, 모든 자로 하여금 현재 본인들이 장애자임을. 앞을 보지 못하고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자들임을 드러내는 대표자로 쓰임을 받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소경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갑니다. 그동안 그 소경은 마을 안에서 사람들 앞에서만 살아왔습니다.
따라서 소경에게는 사람들의 안목과 생각들이 몰려온 것입니다. 이제 그 마을 떠납니다. ‘마을의 시선’을 버리고 ‘예수님의 시선’으로 바꿔지게 됩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무엇이 보이느냐?” 소경이 말하기를 “나무가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는 삐뚤어 나무, 짧은 나무, 긴 나무. 뚱뚱한 나무, 홀쭉한 나무, 병든 나무, 실한 나무, 아름다운 꽃을 피어내는 나무 등 각종 나무들이 있어도 모두 한꺼번에 ‘나무’로 묶어서 말할 수가 있습니다.
사람을 나무로 보는 것은 실은 소경의 안목이 아니요 생각이 아니요 시선이 아닙니다. 소경과 함께 계시는 예수님의 시선이요 세상 보기입니다. 한번 더 안수해주니 만물이 보였습니다. 그동안 이 소경은 마을에서 사람들의 평가와 시선을 받기만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부터 소경은 마을 밖에서 도로 세상 사람을 원초적인 안목으로 바라볼 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가 보는 시선이 곧 예수님의 ‘세상보기’입니다. 인간은 그저 나무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건방지게 살면 안됩니다. 이미 저주받는 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과 더불어 살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한없이 건방지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시선이 아니라 예수님의 시선을 우리를 만원경으로 사용하여 뿜어낼 때, 세상 사람들은 그저 나무일 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로 하여금 매일 절망케 하시고 그래서 매일 예수님의 십자가 덕분과능력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