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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081014a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율법자유게시판출애굽기

20081014a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율법

이름 : 한윤범(IP:59.6.189.196)

20081014a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율법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 율법에 대해서. 율법에 들어갔을 때에 두 가지 방향이 있을 수 있습니다. 율법에 대해서 이걸 해석하는 이해하는데 두 가지 방향이 있는데 하나는 유대인들이 율법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과 이방인들이 율법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 제가 지금 두 가지 방향을 이야기하는데 여기에 한 가지 방향이 사실은 있기는 있는데 그건 숨어있습니다. 신약 때까지 숨어 있는 한 가지 또 시선이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 율법 자체에서 율법을 해석하는 것. 이것은 신약 올 때까지 숨어있어요. 율법 자체에서 율법을 해석한다 하니까 다른 말로 하면 율법의 완성되시는 분이 율법에 대해서 어떻게 해석하는가? 그분 누구죠? 바로 그분이 예수님이죠. 결국 몇 가지입니까? 한 가지, 두 가지, 세 가지. 세 가지의 방식으로 율법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조지 엘든 래드는 어느 방향일까요? 이 신학자는 존재적으로 어느 방향이냐 하면, 이방인이죠. 저와 같이. 이방인 방향에서 보겠습니다. 그러니까 이방인 방향에서 또 몇 가지 봐요? 유대인 관점, 예수님 관점 또 자기가 보는 관점 또 세 가지 있을 거고. 또 유대인에서 볼 때도 이방인과 예수님과 자기가 보는 율법이 또 있겠지요.

그렇다면 예수님 빼놓고는 율법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도 이거는 맞다, 틀렸다? 당연히 틀린 거죠. 그래서 [율법]이란 단락을 보면서, 래드의 글 쭉 보면서 ‘내가 본 율법이 어떤 식으로 잘못됐다’ 하는 그러한 느낌이 여기서 안 나와요.

방금 제가 전제하기를 율법에 대해서 제대로 해석하시는 분은 누구밖에 없다? 예수님밖에 없다. 이래 되니까 율법과 예수님을 하나로 묶어버리면 율법을 결국 뭐가 돼버리느냐 하면, ‘폐쇄적’이 되는 겁니다. 폐쇄적이란 닫혀있다. 어느 누구에게도 허용을 하지 않는. 만약에 율법을 제대로 안다면 어떤 경우에 해당되느냐 하면, 예수님이 율법을 제대로 이야기하고 완성하고 난 뒤에 이방인이나 유대인에게 가르쳐줄 때만 율법에 대해서 제대로 해석하겠지요.

그렇다면 어떤 이방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성령을 받아서 예수님의 율법관계를 제대로 알았다면, 이 이방인들은 율법에 대해서 어떻게 고백을 하겠습니까? 두 가지 고백을 하겠지요. ‘내가 생각한 율법을 이래서, 이래서 잘못됐다’는 것을 이야기할 수 있어야 돼요. 그리고 ‘이렇게, 이렇게 해서 예수님만이 율법의 완성이다.’ 이렇게 나와야 된다는 말이에요. 그렇게 나올 때 결국 누굴 증거하는 겁니까? 예수님을 증거하게 되죠.

그런데 일번 봅시다. ‘나는 이렇게 해서 내가 율법에 대해서 잘못된 해석을 내렸다’라고 제대로 성령 받은 사람이 고백한다는 이 말은, 일번, ‘내가 이렇게 해서 전에 율법을 잘못 해석했다’ 이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만약 그 사람이 이방인이라면, 이방인과 율법을, 아까 분명히 율법은 폐쇄적이라 했죠. 예수님만 알죠.

폐쇄적인데 이방인은 처음에 어떻게 했느냐 하면, 율법하고 나하고 안다. 자기와 따로 폐쇄적인 것을 마련한 거예요. 공간을. 이게 깨진 거예요. 이것이 예수님에 의해서 깨져서 ‘아하, 내가 예수님하고 한 통속이 아니고 율법은 예수님하고 한 통속이고 예수님만이 폐쇄적이고 우리는 거기 들어가지도 못 하는구나’라는 그 점을 알려줘야 되겠지요. 이 논리를 이해하시겠습니까? 논리가 그렇게 돼있지요.

그렇다면 설교자가 사람들이 들을 때 어떻게 대중들에게 또는 교인들에게 설교를 한다 할 때 ‘나는 이래, 이래 해서 율법이 나를 위한 율법인 줄 알았더니만 나를 위한 율법이 아니고, 예수님을 위한 율법이었습니다’라고 고백을 하려면 나를 위한 율법해석이 어떤 거냐를 교인들에게 알려줄 의무가 있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서 성경 대목을 가지고 민수기든, 출애굽기든 할 때 ‘저는 성경을 할 때 나는 이런, 이런 식으로 내 위주로 성경을 이렇게 해석을 해왔더랬습니다’라는 것을 이야기해줘야 교인들에게 수정의 기회를 줄 수 있다. ‘아하,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게 잘못된 거구나.’ 수정의 기회를 줄 수 있다 이 말이에요. 물론 교인들 가운데 삐지는 사람도 있지요. 그러면 할 수 없지요. 삐질 사람 있다는 것은 애초부터 교회 문 열고 들어올 때부터 의도가 아주 수상했다 이 말이죠.

이건 결국 뭐냐 하면, 이런 성도된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삐졌다는 말은, 이 사람은 결국 뭘 주장하겠다는 거냐 하면, ‘나의 폐쇄성을 나는 포기 못하겠다. 나는 나를 위해서 교회 왔지 예수님 섬기기 위해서 교회 온 게 아니다’라는 것을 들통 낸 셈이 돼요.

지금까지 설명한 것을 전체 이야기해보면, 결국 율법이란 것은 무슨 기능을 갖고 있습니까? 복음적 기능을 갖고 있죠. 왜냐? 전에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복음이란 것은 반드시 뭘 그림자로 갖고 있습니까? 반대, ‘반 복음’, ‘비 복음’ 그걸 쌍으로 세트로 짝으로 해서 복음이다. 복음은 그냥 나오는 법이 없고, ‘이거는 복음이 아니느니라’ 하는 것을 동반시켜서 같이 나오게 돼있다고. 그게 복음 아닙니까? 다른 복음 외에는, 이게 반드시 들어가야 돼요.

이거는 첫 번째 율법의 계명이 뭐냐 하면,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그것 아닙니까. 보세요. 표현 자체가 ‘여호와’라 하면 그만인 걸 가지고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말을 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에게 무슨 부담을 주느냐 하면, 현재 우리가 두 가지 신을 다같이 알아야 된다는 부담을 주잖아요.

교인들이 교회 올 때 ‘하나님 믿습니다’하고 오는데 네가 알고 있는 하나님과 새로운 하나님이 다르다는 어떤 부담을 주니까 ‘아이고, 자칫하면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이 엉터리일 수 있구나’ 하는 그런 부담을 줄 수 있다 이 말이에요.

‘제가 목사님 시키는 대로 잘할게요. 하나님 잘 섬길게요.’ 아주 순박한 60,70 넘은 할머니가 목사한테 그리 이야기해도 목사는 거기에 흔들림이 없이 흔들리지 말고, ‘하나님이 누구신데요’ 되물을 수 있어야 돼요. ‘아이고, 이렇게 성의를 보이는데. 목사님, 저 못 믿습니까?’ ‘못 믿습니다.’

‘하나님 누구십니까? 도대체.’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죠.’ ‘허어, 그건 당신이 아는 거고. 전에 알던 하나님과 새롭게 예수님을 통해서 아는 하나님과 어떻게 다른가를 설명해. 어떻게 차이 나는가를 설명하라’ 이 말이죠. 본질은 차이를 통해서 나타나는 거예요. 갈라짐을 통해서 본질이 나오니까.

이런 점이 바로 율법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래드가 와장창 빠져 있어요. 이런 게 빠져있다고. 왜 래드가 세계 최고의 신학자가 이런 고백을 못하느냐 하면, 자기하고 율법하고는 한 통속이라고 이걸 전제로 깔아놨어요.

그림으로 그리면 이렇습니다. ‘내가 있다. 내가 여기서 뭔가를 한다. 그래서 어떤 결실이 나왔다.’ 할 때 이 결실은 결국 나에게 귀속되죠. 한 덩어리 되죠. ‘내가 뭘 한다’는 것은 공부하는 것도 되고, 선행도 되고, 구제도 되고. 결국 나를 포기 못하는 거예요. 결국 이거는 뭐냐 하면, 존재론적으로 시작하는 거예요. 신학을 할 때. 십자가로 출발하는 게 아니에요.

십자가는 나는 죽고, 그리스도만 부활하시는 게 십자가잖아요. 같이 부활해도 항상 앞자리는 누가 등장합니까? 예수님이 등장해서 움직이는 것이 십자가다 이 말이죠. 그리고 우리 보고 뒤돌아서서 만날 하는 것이 뭐냐? ‘너는 나를 믿느냐?’ 이게 뭐냐 하면, 나를 믿는 것이 하나님 일이다. 그런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 일 할 수 없어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나갈 때에 하나님이 항상 한 게 있어요. 뭡니까? ‘너는 나에게 순종하라.’ ‘순종하라’는 말은 신약 용어로 하면 ‘믿어라’ 이 말입니다. 왜냐하면 워낙 순종 못할 분위기거든요. 분위기 자체가. 재미있지요.

이스라엘의 순종하라가 에스라, 느헤미야 시대에 보면 집단적 신앙에서 뭐로 변합니까? 개인적 신앙으로 변한다고요. 이거는 집단적으로 구원해놓고, 여기 이 책에도 나와 있어요. 집단적으로 구원한다고 해놓고 율법을 줬던 시대가 지나고, 이제는 이미 이스라엘이 날아간 마당에, 이스라엘 전체가 해체된 마당에 이제는 개인적으로 불러요. ‘너 믿느냐?’ ‘믿습니다.’ 불러낸다.

그러니까 불러내니까 이거는 율법을 가지고 개별적으로 물어서 ‘너 하나님 믿을래, 안 믿을래?’ 이제는 개별적으로 물어요. 집단으로 2학년 7반 전체 구원 이게 아니라 2학년 7반 하나하나 끄집어내서 묻는다 이 말이죠. 물을 때 전제가 바탕이 뭐냐? 율법이고 그 다음에 ‘순종하겠느뇨’ 이래 묻는 거예요. 여기서 ‘순종’이라 하는 것은 그냥 대세에 휩쓸려 가면 그만입니다. 이거는 대세 자체가 날아가 버렸으니까.

개인적 순종으로 나가다가 신약에서는 뭐냐 하면, 개인적 순종해도 이건 소용없죠. 인간이 집단으로 분명히 휩쓸려서 전체적인 분위기가 모르도록 순종하던 그 시절이 지나고, 개별적으로도 순종이 안 된다면 결국은 두 개 합쳐서 뭐라고 합니까? 어느 누구도 순종할 수 있는 인물이 있다, 없다? ‘없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미 이스라엘 나라가 다윗 이후에 순종할 때부터 여기에 무슨 씨앗이 들어갔어요. 무슨 씨앗이냐 하면, 새 언약의 씨앗이 들어갑니다. 이것은 율법으로 순종을 요구한 시대가 아니라 아예 율법을 마음에다가 심어버리고, 새겨버리는. 씨앗을 심어버리죠. 예레미야에선 씨앗이라 보는데 베드로전서에선 이 씨앗을 뭐로 보느냐? 이걸 피로 인한 거룩이라 봅니다. 피로 인한 거룩을 심어버려요.

여기서는 뭐냐 하면 인간의 자아선택이 아주 유효합니다. 물을래? 묻는 겁니다. ‘너 짬뽕 먹을래, 짜장면 먹을래?’ 물을 수 있는 거예요. 신약시대에 오면 주문 받지도 않습니다. 일괄적으로 야끼만두, 야끼우동. ‘처먹어.’ 이리 되는 거예요.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왜 우리 의사를 안 물어보느냐 하면, 우리는 구원받을 자격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사도 바울이 율법이라는 개념을 사용할 때는 이런 전제를 깔고 한다고.

이게 유대인들은 알아요. 그런데 이방인들은 혹독한 유대인들의 시련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이 당했던 것을 이방인에게는 한꺼번에 다 덮치도록 돼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예수 믿으려고 하면 서서히 개 되지만 이방인들은 뭡니까? 아예 처음부터 개, 돼지야. ‘똥 덩어리들.’ [베토벤 바이러스]에 나오는. 그 드라마 안 본 사람 같으면 우리 보고 똥 덩어리라 하면 기분 나빠 할 거야.

처음부터 다시 하겠습니다. 율법이란 것에 대해서 시선이 몇 가지 있다? 유대인이 보는 시선, 이방인이 보는 시선, 한 가지 더 있는데 예수님이 보는 시선. 예수님이 볼 때 율법과 나를 일치시키고 완성된 입장에서 보는 시선이죠. 이렇게 전제해버리면 결국 유대인과 이방인들은 율법에 대해서 제대로 안다, 모른다? 개뿔도 알지도 못하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서도 이방인들이 유대인들이 율법을 해석한다는 말은 이건 뭔 뜻이냐 하면, 일단 ‘나는 율법을 안다. 율법은 나를 위한 것이다’라고 지 마음대로 지 멋대로 생각해서 이미 자기 것인 양 ‘이거는 하나님이 날 천당 보내려고 율법 준 것’이라고 아예 지레짐작을 갖고 본다고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율법을 폐쇄적으로 만듦으로 말미암아 이들은 혼자 되게 오해한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에 의해서 완성해서 와버리면 여기서 이방인들에게 덮치고, 유대인에게 덮치면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둘 다 공통점이 뭐냐 하면, ‘아하, 이래서 율법을 내가 내 것으로 아예 가질 전혀 전제는 잘못된 전제’라는 것을 고백을 하게 된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성령 받은 설교자 성도가 된 설교자 같으면 설교할 때 뭘 해야 돼요? ‘내가 전에 이래, 이래 해서 마치 법이 성경 전체가 나를 위한 성경인 줄 알고 이렇게 돼먹지 못하게 곡해를 했습니다. 어떤 대목을 봐도 다 나 좋으라고 해석했습니다’라는 설교를 해야 되고, 또 어떤 씨앗을 남겨야 되느냐 하면, ‘그런데 이 율법을 예수님을 위한 율법이었습니다’라고 해줄 때 비록 율법을 가지고 설교해도 전체가 뭐가 된다? 복음이 된다.

그런데 삐지면, ‘삐졌다’ 하는 것은 아직도 어느 수준에 있다? 옛날 이방인과 유대인 수준에 그냥 머물러 있습니다. 이렇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래드에서는 그런 점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치 ‘율법을 슬슬 지켜 봐’ 이런 식으로 그걸 유도하는 듯한 인상을 아주 강하게 비칩니다. 여기서.

특히 율법은 로마서 3장 끝에 31절에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이 ‘율법을 굳게 세운다’는 이 해석을 아주 유념 있게 봤어요. 래드는 율법을 굳게 세운다는 말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보니까 지가 앞에서 이야기한 것을 뒤에서 말아먹는 식으로, 죽 쒀서 개 준 꼴이 돼요. 다시 지키자. 이래 나와요.

도대체 이렇게 이중으로 복음과 비 복음을 자기 내부에 안 들어있기 때문에 복음을 지식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여전히 그 사람은 자기 속에 어떤 것이 반 복음이고, 비 복음인가를 이 사람 보니 모르고 있는 거예요. 그런 발언이 바로 복음에 반대하고 적 그리스도적이라는 것을 본인이 모르고 있다고.

래드가 율법을 굳게 세우기 위해서 다시 지켜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도대체 래드가 이런 되도 않은 발언을 하게 된 이유가 어디 있는가? 쭉 다시 살펴봤어요. 다시 살펴보니까 이 사람이 한 발언 가운데 뭘 모르느냐 하면, ‘율법이라 하는 것은 죄를 지적하기 위함이라’ 나와 있거든요. ‘죄’가 뭐냐를 모르는 거예요.

‘율법이 죄를 지적한다.’ 할 때 율법이 폐쇄적이잖아요. 폐쇄적인 율법이 지적하게 되면 뭘 지적하는 거예요? 폐쇄적이 아닌 분은 예수님밖에 없잖아요. 그러면 율법을 가지고 죄를 지적한다는 말은 율법 속에 누가 계시다? 예수님이 계신다. 예수님이 지적하는 죄라는 것은 결국은 바깥쪽에 있는 율법, 폐쇄적이니까 이 폐쇄적 안에 못 들어오는 모든 인간에 대한 그것을 근원적으로 지적하는 게 죄다 이 말이죠.

그런데 래드는 뭐냐 하면, 이 율법을 가지고 예수님을 안 거치고 자기가 그냥 만나는 거예요. 마치 옛날 유대인들이 율법을 만나는 것처럼. ‘아이고, 율법 주셨구나. 최선을 다해야지.’ 만날 최선을 다한데. 다른 말로 하면 순종 아닙니까. ‘순종 못해서 망했는데 이제 순종해야지 최선을 다해야지.’

율법이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폐쇄적인 것이 아니고 개방돼있는 것처럼, 이 말이 중요한데 율법이 마치 자신한테 개방돼있는 것처럼 율법이 죄를 지적하니까 이왕 지적 받을 것, 그나마도 덜 죄를 짓는 쪽으로 나가면 될 것 아니냐? 최선을 다하여. 우리가 부족합니다. 부족하지만 부족하다고 나가떨어지는 게 아니고 나름대로 성의표시를 다해주면 뭔가 예쁘다는 후한 점수를 받을 게 아니냐.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개방돼있다고 보는 거예요.

마치 이런 걸 보면 이런 게 생각나요. 고등학교 때 얘 담배 피운다고 선생님이 ‘종아리를 걷어’ 때린다고. 때리면 선생님 입장에서 그냥 맞고 있으면, 두세 대 때리면 그만 둡니다. 왜냐하면 얘 때리는 것 선생님도 싫어해요. 속에 울분이 나 때리거든요. ‘안 피우면 될 걸 왜 피우느냐’ 울분이 나서 때리지 때리는 자체를 즐거워하는 그런 선생님 거의 없어요. 그건 변태지.

그런데 제일 미운 놈이 뭐냐 하면, 때리니까 매를 잡고 있는기라. 이때는 진짜 ‘너거 아버지 뭐 하시노?’ 나옵니다. 그땐 반 죽여 버립니다. 지금 안 그래도 미안한데. 선생님이 때리는 게 잘하는 것 아니잖아요. 안 때리고 싶은데 진짜 말론 안 되고 의사표시로써 약간 치려 하는데 이게 자기 아픈 것만 생각하고 ‘내가 뭘 잘못했는가’ 생각 안 할 때 화딱지 난다고.

마치 인간들이 율법을 볼 때 성경을 볼 때 주님께서 때리면 맞으면 되는데 이게 ‘최선을 다할게요, 최선을 다 할게요’ 이걸 막는다고. 더 패고 싶어. ‘교회 일찍 나와 줬잖아요. 안 믿는 사람도 있잖아요. 난 믿잖아요.’ 이러고 있다고. 반 죽이고 싶어, 그때는.

율법을 뭐라 생각합니까? 매를 든 선생님 심정을 헤아리는 게 아니고 뭡니까? 자기 아픈 것만 생각하는 거예요. 성경에서 ‘율법은 죄를 지적함이라’ 이래하니까 하나님 왜 때리느냐를 생각해야 될 건데 그 대목을 가지고 뭘 생각하느냐? ‘아, 맞아서는 안 되겠구나. 덜 맞는 방법은?’ 생각 돌아가는 그 사고방식이 기껏 그런 것만 돌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나온 게 성화론 아닙니까.

사람은 혼자 주장하기를 ‘인간 부족하다. 완전하지 않다. 하지만 말씀을 준 것은 자기가 능력껏, 역량껏 순종해서 하나님 영광 돌리라고 준 거다.’ 이거는 때리는 매 쥐고 그저 앞으로 잘할게요. 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그게 자기 마음에 ‘나는 결국 이런 걸 믿습니다’라는 믿음의 폭로에요. 결국 ‘나는 날 믿습니다.’

이런 말이 있어요. ‘신에 대한 해석은 곧 자기에 대한 해석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해석할 때 꼭 신을 경유해서 해석해요. 신을 아무리 탐구해도 결국은 자기 자아를 유지하는 자기 층을 해석하는 것밖에 안 됩니다. 만날 ‘거울아, 거울아. 누가?’ 그것하고 똑같은 거예요. 신의 해석은 자기 해석이에요. ‘아, 내가 이 정도 되는구나.’ 그게 자기 해석이라고.

율법이든 성경이든 해석을 해석자에게 맡겨야 되는데 믿음이 없으니까 맡길 분도 없고 맡긴다는 말을 해도 너무 허황되게 들리고. 역시 믿을 놈은 내가 하는 내 해석밖에 없어. 예수님 해석은 이젠 안 믿어져. ‘예수 믿다간 큰 코 다친다’ 이러거든요.

본문 들어가기 전에 정리해봅시다. 결국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자기 처지 생각하거든 성경 보지 말라.] 왜냐하면 성경은 주님의 처지만 생각해요. 주님은 너무 비정해요. 나는 사채업자 같아, 주님이. 사채업자보다 율법을 더 제대로 해석할 수 없어요. 남이야 죽든 말든 자기는 거룩의 몫을 내 놓으라는 거죠. 이걸 ‘신의 시비’라 하는데. 신의 시비에 그걸 견디는 것을 인내라 합니다. 계속 시비를 걸어요. 하나님은 자기 처지만 알아달라고 계속 시비 걸어요. 우리 처지는 모르겠데. 내가 우에 되던 모르겠데.

우리가 언제 신을 버리느냐 하면, 자기 처지 생각할 때 신을 버리게 됩니다. 자기 몸이 아프다든지, 열심히 하던 교인이 안 나온다든지 그때 우리는 그 순간 깜빡 신을(깜빡만 해도 다행인데 돌아오면 괜찮아요) 잊어버려요. 신세한탄에 들어갑니다. 공부 이만큼 한 것도 소용없어요. 만날 연구한 게 신약신학 탐구했잖아요. 신의 탐구인데 이게 뉴튼의 결국 누구 탐구에요? ‘나’ 탐구에요. ‘어떻게 하면 내가 원하는 내가 될 수 있는가?’ 그 탐구에요.

이게 속에 신의 세계에 들어가야 되는데 정자가 난자 속에 들어갈 때 그냥 들어갑니까? 뭘 잃어버리죠. 꼬리를 떼잖아요. 이거는 수요일 날 예화다. 우리는 꼬리를 떼는 정도가 아니고 다 죽고 들어간다고. 그래서 신약성경, 사도 바울 서신이 어려워요. 꼬리 있고 해서 난자 못 만납니다. 정자가 꼬리를 떼고 가야 돼요. 올챙이처럼 꼬리 떼고 완전히 난자 속으로 블랙홀 속으로 들어가야 돼요.

이번에 서울 강의할 때에 녹음만 돼있기 때문에 그림이 무슨 그림인지 모르지 싶은 생각돼요. 여기 열두 공동체가 있어요. 일, 이, 삼, 사, 오, 육, 칠, 팔, 구, 십, 십일, 십이 전부 열세 지파잖아요. 중앙에 뭡니까? 레위 지파가 있지요. 전부다 이걸 쳐다보는데 위에서 보면 이리 보여요. 옆에서 보면 뭐냐 하면, 레위 지파는 거쳐서 내려가요. 구멍이에요. 이 안에. 블랙홀이에요. 여기서 제사 안 드리면 아무리 농사져도 소용없어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을 때는 전부 이걸 주목하게해서 그리스도께서 죽음 정도가 아니에요. ‘저주 받아 올라가셨다는 것은 내리셨던 것이 무엇이냐’(엡4:8,9) 내려서 챙겨 올라가는 거예요. 그러면 주변의 열두 지파, 하나 같이 뭐만 쳐다봐야 돼요? 내려갔다 올라간 그리스도만 쳐다봐야 된다고. 이게 한 몸이에요. 그러니 여기 있는 사람, 사도나 교사나 세워도 그들이 이야기 할 건 한결 같이 그리스도 십자가와 부활밖에 없어요. 승천. 그들이 뭘 하든. 그래서 그리스도 몸이 이뤄진다.

문제는 우리가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율법이 어떻게 복음과 관련 있는가? 이걸 봐야 율법 해석이 제대로 되는 거예요. 그 율법이 십자가 복음과 관련돼있는가? 여기선 뭐가 빠집니까? ‘나 율법을 지킬까요, 말까요?’라고 묻는 자기 처지는 아예 물음 자체가 허용 안 돼요.

예를 들어서 로마서 3장 31절에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굳게 세운다” 할 때 ‘예수 믿는 우리가 율법을 굳게 세우니까 굳게 세우기 위해서 율법을 지킬까요, 말까요?’ 하는 질문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왜냐하면 믿음 자체가 이미 그 안에 뭐가 포함돼있다? 율법을 굳게 세우는 일환으로 믿음이 주어졌기 때문에 그래요. 믿음이 주어진 그 자체가 굳게 세워진 현상이란 말이죠, 그게. 이걸 래드가 모르는 거예요.

믿음이 선물로 왔다는 자체가 이미 율법이 굳게 세워져있음을 통과하는 겁니다. 네가 믿음 얻고 다시 율법 봐라. 그럼 믿는 자가 어떻게 봅니까? ‘어 굳게 세워져있구먼.’ 그걸 고백하라 이 말이죠. 우리가 못 하는 걸 누가했다? 주님이 굳게 세워놓았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고 ‘믿음은 챙겼고. 이제 우리 할 일은 율법을 그 다음에 굳게 세워야지. 유대인들은 성령 못 받아서 믿음 없어서 못 한 것 이제 믿는 자 우리가 해야지’라고 나서는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의 과제가 뭐냐? 오늘 할 과제는 정해졌습니다.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시는 아까 유대인들이 보는 것도 아니고 이방인이 보는 것도 아니고 예수님이 봤던 그 율법이 어떻게 봤기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이 굳게 세워지게 되는 그런 내용이 어떻게 거기에 들어가게 되느냐? 그게 우리가 오늘 파악하면 되는 겁니다. 간단하죠.

예수님이 율법을 어떻게 완성시켰기에 예수 믿는 우리가 어떻게 율법을 굳게 세워지느냐 이 말입니다. 그걸 한 마디로 말해서 뭐냐 하면, 예수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한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 예수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는 거예요.

지난주일 오후 설교 때 진짜 어려운 이야기했어요. 뭐냐 하면, 언약궤 이야기하면서 언약궤는 자꾸 자기로 돌아가는데 무엇이 어려우냐 하면, ‘여기에 오소서. 우리 집에 오소서’ 할 수가 없는 게 언약궤는 자기가 있을 자리를 자기가 만들어간다는 점입니다. 그걸 또 내가 모르는 거예요. 언약의 자체 내에서 자기 자리를 만들어가요. 조건이 뭐냐 하면, 심판과 사랑, 공의와 사랑 양쪽 다 보여줄 수 있는 그런 조건 하에서 그걸 만들어나가요.

언약궤가 블레셋 진영에서 완전히 박살내잖아요. 박살내는 그것이 무의미한 것이 아니고, ‘아, 언약궤가 이토록 무섭구나’를 보여주면서 그 다음에 언약이 사랑이 있는 자리까지 합치니까 언약궤는 두 가지 다 보여주죠. 뭐냐 하면,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도 있고 그 안에 사랑이 있는데 그게 하나의 상자 형식으로 뚜껑에 피 발렸거든요. 피 발린 뚜껑을 속죄소, 시은좌.

뚜껑이 뭘 누릅니까? 저주. ‘나오지 마.’ 안에 있는 십계명을 누르는 식으로 해서 그게 바로 여호와의 특징이에요. 다른 데는 인간적인 모습이에요. 손모가지, 발모가지 다 부러지는 인간적인 모습이지만 여호와의 신은 상자로 이야기한다고. 물론 그 상자도 예레미야 이후에는 우에 됩니까? 그게 불타버리죠. 그게 사라지죠.

그래서 어떤 분이 하나님의 아픔을 설명할 때 그 영화 있었지요. 굉장히 고통스러워하는 영화, 얼마 전에 나왔던 것, (*THE PASSION OF THE CHRIST), 그런 고난을 가지고 하는데 그거는 옳지 않아요. 그거는 괜히 미안스러워서 하는, 신은 고생하는데, 마치 필리핀 사람 축제하듯이 막 뛰듯이 그거는 자학적인 것은 폭력적입니다. 그냥 상자로 요즘 같으면 그냥 십자가에요. 흉측한 십자가가 아니라 그냥 십자가에요. 아주 메마른 비 감정적이고 비정.

이제부터 본론에 들어가 봅시다. 그림을 다시 그리면 율법은 폐쇄적이다. 누구에게만 해석이 허용됩니까? 예수님만이 완성된다. 그런데 여기에 율법을 들여다보는 두 부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유대인이었고, 하나는 이방인이었다. 이 교재 첫 번째에 보면 래드가 자기의 솔직한 불신앙을 이야기하는 게 있습니다.

[율법에 대한 바울의 사상은 그가 모순된 진술을 상당히 많이 하고 있다. 많이 하고 있는 것처럼 나타나기 때문에 이해하기 퍽 어렵다. 바울은 율법을 행한 사람을 의롭다하심을 받게 되고 율법에 의해서 힘을 얻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와 동시에 어떠한 사람도 율법에 의해서 의롭다하심을 받을 수 없음] 이래 돼있다고.

래드가 학자적인 입장이라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 불신앙적인 입장인데 솔직하게 뭐가 뭔지 중구난방 모르겠다. 하는 거예요. 왜 래드가 이런 소릴 하느냐 하면, 자기 내부에 두 개의 층이 없어서 그래요. 하나는 이방인의 층과 그 다음에 진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층, 두 개가 없으니까 자꾸 나는 나라는 식으로 지식적으로 조화와 균형을 맞추려고 애쓰는 거예요. 마치 샌더스 같아. 샌더스보다는 약간 복음적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만.

그래서 래드는 뭘 모른다 하느냐 하면, 유대인들은 율법을 어떻게 봤느냐 이걸 이야기를 좀 해야 돼요. 유대인들은 이야기 전체 내용은 뭐냐? 세 가지를 이야기한다고. 첫 번째는 뭐냐 하면, 율법시대, 구약시대. 두 번째가 뭡니까? 포로, 중간기에요. 세 번째가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신약시대. 이런 식으로 율법을 세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죠.

신약시대, 메시아 시대를 래드는 이걸 영적 해석시대로 보고. 중간시대는 아까 설명했습니다. 이건 뭐냐? 개별적으로 율법 앞에 놓고 ‘너, 율법 믿을래, 안 믿을래?’ 개별적 순종을 요구했던 시대. 이건 구약 전체 처음에는 뭡니까? 일단 홍해에서 전체를 총괄적으로 구원해놨기 때문에 전체 구원. 전체 구원받았는데 그 다음에 율법을 줬다는 것은 새로운 관계를 유지할 거냐, 말거냐? 하는 거예요.

보세요. 구약의 율법에서 상당히 이게 맞는 것 같은데 엉터리에요. 대부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홍해를 건져주실 때 일단 구원했다. 그것도 뭡니까? 은혜로 사랑으로 했다. 그 사랑이 유지될 거냐, 말거냐는 율법을 줘서 율법을 어기면 취소시키고, 율법을 안 어기면 계속 구원의 관계를 유지된다고 보는 거예요. 이거 이야기 안 한 사람을 못 봤어. 총신의 구약 학자들이나 전부다.

제가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모든 성경은 인간의 자기 입장이 거기에 같이 포함해서 해석이 나오게 돼있어요. 모든 성경해석은 딴 것도 마찬가지지만 모든 해석은 인간을 모가지를 끌고 들어가요. 멱살을 쥐고 들어가는데 이 신학자들은 뭡니까? 자기는 멱살 안 끌리고 자기는 관찰자의 입장에서 성경의 내용을 보는 거예요. 그럴 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결국 구약해석이 한번 구원해놓고는 그 다음에 율법 어겨서 관계 끊어졌다고 해석하는 것은 ‘네가 그러고 싶지. 달리 어떻게 해석이 안 되지.’ 하는 자기 내부성을 폭로하는 것밖에 안 돼요.

지금 이 책에도 보면 어쨌든 간에 래드가 본인도 뭔 뜻인지 모르고 중요한 대목들을 많이 써놨어요. 근데 본인 놓쳐. 그게 아니란 걸. 뭐냐 하면, 갈라디아서 3장 보세요. 분명히 율법 있기 전에 뭐가 있었습니까? 율법이 있기 전에 아브라함에게 뭐로 구원받는다? 믿음으로 구원받잖아요. 그 다음에 430년 후에 율법이 들어간다고요.

만약에 율법이 마치 뭐와 같으냐 하면, 계약할 때 집을 샀다. ‘관리비 안 내면 집 빼앗깁니다.’ 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세상 사람들이 법이라고 생각할 때 항상 어떻게 하느냐 하면, 그 법속에는 아무것도 안 들어있는데 법은 법으로만 주어지는데 잘 들어보세요. 내 쪽에서 하는 양만큼 또는 하는 실적만큼은 법은 나한테 법의 혜택을 준다. 이래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법을 안 본다든지 안 지키면 그 법이 갖고 있는 혜택이 나한테 안 온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생각하기는 하나님께서 율법을 준 것은 아브라함이 갖고 있는 일방적인 은총이 얼마나 더 깊고 넓으냐를 보여주기 위해서 일부러 준 거다. 이래 봐요. 뭘 취소돼요.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간 것은 하나의 역할이고 연극이었습니다. 하나의 역할극이에요. 가나안 땅에 못 간 사람은, 모세도 가나안 땅 못 갔는데 지옥 갔겠네. 천당만 잘 갔네. 예수님하고 이야기하고.

율법 안에 들어있는 그리스도를 볼 줄 알아야 됩니다. 베드로전서 1장에 나오지요. 이미 선지자 속에 뭐가 있다? 이미 그리스도 영이 들어있다 말이죠. 이것도 참 어려운 이야기인데 창조에서 구속까지 시간이 이렇게 흘러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해석은 그게 아니에요. 구속에서 창조로 거꾸로 내려갑니다.

내가 이걸 서울 강의할 때 설명했구나. 거꾸로 내려가는 거예요. 사람들은 이걸 모르는 거예요. 꼭 유대인 같아. 사람이 창조에서 구속으로 내려가 버리면 어떤 오류에 빠지느냐 하면, 지나간 것은 취소된다고 보는 거예요. 마치 홍해를 건너왔잖아요. ‘아이고, 불쌍한 유대인들. 홍해 건너면 뭐 하노? 하나님께 불순종해서 떡 내놔라, 고기 먹고 싶다 해서 멸망 당했는 걸. 아이고, 불쌍한 인간들.’ 이래 되거든요. 그러면 그 해석이 뭐가 문제 되느냐 하면, 홍해를 건너왔다는 게 아무짝도 소용이 없어 버려요. 주님께서 오바해서 주님께서 괜한 사랑을 베풀었어요.

십자가가 지고 난 뒤에 사도 바울의 명령 안 지키면 취소된다. 이래되거든요. 성화론자들. 그렇잖아요. 그러면 십자가는 오바한 거예요. 십자가 필요 없다 말이에요. 그거 괜히 진 거예요. 그러면 십자가 졌다고 의라 하면 안 되고, 의를 보류해놔야 돼요. 뭐냐 하면, ‘십자가 믿어도 이 사도 바울의 명령을 지킬 경우에만 의롭다 해줄게.’ 이래 돼야 된다니까. 그리스도를 믿고 너무 성급하게 의인하면 안 되고, ‘의인될 수 있는 자격증 얻음’ 또는 ‘의인될 수 있는 역량 얻음’ 이래야 된다고. 그래야 그들의 주장이 맞는 말이에요.

그래서 천주교는 노골적으로 죄 많이 짓고 예수 믿는 것은 바로 천당에 못 가고, 거기서 수습기간을 겪지요. 그러니까 비정규직, 연수기간을 거치는 거예요. 연옥 거쳐서 인간 만들어서 올라간다는 거예요. 천구교만 그런 게 아니죠. 한국교회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교회는 쓰레기입니다. 시레기는 그래도 국이나 끊여먹지요.

주님의 아픔을 몰라요. 주님께서 얼마나 똥 덩어리 같은 인간을 진짜 말도 안 되는 배설물 같은 인간을 똥이 냄새나잖아요. 그 냄새나는 인간들 속에 들어와서 똥 같이 뒹굴어 가면서 그들을 천국 보내는 의인 되게 했다고. 그 내막이 어디 포함되어 있느냐? 율법 속에 포함이 돼있어요.

그래서 구약에 있는 성도들은 자신의 실패와 죄를 통해서, ‘죄를 통했다. 아이고, 못 가는구나’ 그걸로 끊지 말고 죄를 통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에 홍해 건너가고 구원하신 은혜가 율법 속에서 어디서 발견되는가? 그걸 찾아보면 되는 거예요. 실패를 통해서 찾아보면 되는 겁니다.

더 이상 우리한테 성공, 성공은 해당사항 없어요. 우린 이 땅에 성공할 이유도 없고 목회 성공할 필요도 없어요. 안 해야 됩니다. 참 오랜만에 바른 소리한다. 우린 목회 성공 안 해야 되고 인생 성공할 필요도 없어요. 이미 죽은 몸, 그건 우리하고 해당아 아니래요. 우리는 주님이 주신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더 크게 알고 증거하면 자동적으로 증거 되니까. 하면 그걸로 되는 거예요.

[구약에서 전체를 구원했지만 그 구원받는 것을 관계를 유지하느냐, 마느냐에 따라서 구약에서는 이렇게 율법을 줬다]라고 래드는 이야기하고, 끝부분에 가서 래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래서 그 율법은 뭐로 되느냐? 명령으로 돼있다. 명령을 뭐라고 돼있더라? 번역을 ‘엔톨라이’ 율법의 성격은 명령이다.

[율법] 제일 마지막에 끝에서 일곱 번 줄에 [엔톨라이 데우를 권하면서 동시에 의식적인 엔톨라이] 돼있습니까? 번역은 뭐라 돼있어요? 그냥 ‘계명’이라 했습니까? 여긴 ‘엔톨라이’라고 그냥 표현해요. 두 가지 엔톨라이가 있는데 하나는 뭐냐 하면, ‘도덕적인 것’ 또 하나는 뭐냐 하면, ‘의식적인 것’ 의식적인 것은 폐지했지만 뭐는 남아있다? 그걸 누가 이야기해요? 지금 래드가 주장하잖아요.

도덕적인 명령 남아서 그거 어디 써먹을 건데? 이게 어디 써먹을 물건인고? 도덕적인 율법 남아서 우에 하겠다는 거예요? 그거 지킬 수 있다 이 말입니까? 예수 믿으면 의식적인 것은 안 지켜도 되지만 도덕적인 것은 지킬 수 있다 이 말입니까? 지켜야 된다는 정도가 아니고 래드한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래드 당신은 도덕적인 율법을 예수 믿고 난 뒤에 지킬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걸 내가 묻고 싶은 거예요. 있습니까? 내가 보기에 미쳤어요.

사랑을 지킬 수 있습니까? 인간은 사랑을 못 지켜요. 왜? 내 사랑이 우선이기 때문에 남 사랑해봤자 내 사랑 팽창이에요. 내 사랑 확장이에요. 내가 누굴 사랑하잖아요. 그 사람이 내 사랑 보지 않으면 반 죽여 버려요. 내가 누굴 사랑한다는 것은 그만큼 미워할 조항이 많아지는 겁니다. 애들 가르쳐보면 알잖아요. 선생님이 열심히 준비해서 떠들면 반 죽이고 싶잖아요. 근데 선생님이 준비 못하고 술 먹든지 해서 아무렇게나 했는데 조용하게 잘 들으면 이 사람이 미안하잖아요. ‘아이씨, 내가 오늘 강의 너무 헷갈렸는데 조용하니 잘 듣네.’ 고맙지요.

그러니 이게 뭡니까? 인간은 자기 행동에 대해서 기준이 누구에요? 율법이 기준이 아니에요. 누가 행동해요? 율법 지키는 자기가 기준인 이상 아무리 이웃을 사랑하고 아무리 해도 그거는 자기 사랑을 팽창시키는 것밖에 안 돼요. 다른 말로 하면 자기 입 냄새 퍼뜨리는 거예요.

그래서 이웃 사랑이라는 것은 결국은 뭐냐? 이웃에 대한 미움을 노골화시키는 겁니다. 그래야 우리 성도 안에 있는 두 개의 층이 있다 했어요. 하나는 뭡니까? 내가 이 정도로 나는 남을 미워할 수밖에 없는 존재도 있어야 되고, 또 한 층은 뭡니까?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 율법의 완성자가 계셔서 율법적으로 잘 들어봐요. 율법은 폐하는 것이 아니고 율법을 굳게 세우는 입장에서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주께서 율법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함을 굳게 세운 거예요.

십분 간 쉽시다.

래드가 어쩌려고 이런 결론 냈는지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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