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상 6: 1- 5 (인간들의 대책)
삼상 6: 1- 5 (인간들의 대책)
이름 : 우리교회(IP:220.81.176.150)
본문 : 사무엘상 6장 1- 5절
제목 : 인간들의 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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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08-10-19 15:38
인간들의 대책
2008년 10월 19일 본문 말씀: 사무엘상 6:1-9
삼상 6:1) 『여호와의 궤가 블레셋 사람의 지방에 있은지 일곱 달이라』
(삼상 6:2) 『블레셋 사람이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을 불러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의 궤를 어떻게 할꼬 그것을 어떻게 본처로 보낼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라』
(삼상 6:3) 『그들이 가로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려거든 거저 보내지 말고 그에게 속건제를 드려야 할지니라 그리하면 병도 낫고 그 손을 너희에게서 옮기지 아니하는 연고도 알리라』
(삼상 6:4) 『그들이 가로되 무엇으로 그에게 드릴 속건제를 삼을꼬 가로되 블레셋 사람의 방백의 수효대로 금독종 다섯과 금쥐 다섯이라야 하리니 너희와 너희 방백에게 내린 재앙이 일반임이니라』
(삼상 6:5) 『그러므로 너희는 너희 독종의 형상과 땅을 해롭게 하는 쥐의 형상을 만들어 이스라엘 신께 영화를 돌리라 그가 혹 그 손을 너희와 너희 신들과 너희 땅에서 경하게 하실까 하노라』
(삼상 6:6) 『애굽인과 바로가 그 마음을 강퍅케 한 것 같이 어찌하여 너희가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겠느냐 그가 그들 중에서 기이하게 행한 후에 그들이 백성을 가게 하므로 백성이 떠나지 아니하였느냐』
(삼상 6:7) 『그러므로 새 수레를 만들고 멍에 메어 보지 아니한 젖 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소에 메우고 그 송아지들은 떼어 집으로 돌려 보내고』
(삼상 6:8) 『여호와의 궤를 가져다가 수레에 싣고 속건제 드릴 금 보물은 상자에 담아 궤 곁에 두고 그것을 보내어 가게 하고』
(삼상 6:9) 『보아서 궤가 그 본 지경 길로 올라가서 벧세메스로 가면 이 큰 재앙은 그가 우리에게 내린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를 친 것이 그 손이 아니요 우연히 만난 것인 줄 알리라』
오늘 본문은 여호와 하나님과 자연인이라고 할 수 있는 블레셋 사람과의 만남입니다. 사람들은 종교 이전에 본인이 자연인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아무 것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살지만 그것마저 자연스러운 평화를 유지하기를 바랍니다. 쉽게 말해서 신이고 뭐고 자신을 건드리지 말고 가만 두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더도 덜도 말고 자연인으로 지내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인간들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개입하게 되었습니다. 개인한다고 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귀신의 형상으로 나타난 온 동네 설치고 다니는 양상이 아니라 그냥 상자 안에 다소곳이 계시는 것 뿐입니다. 즉 아무리 봐도 그냥 상자일 뿐입니다.
따라서 현재 블레셋 지경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염병이라든지 재앙은 그냥 우연일 가능성도 충분히 있습니다. 바로 제 3자가 볼 때에 얼마든지 ‘우연’이라고 단정 내릴 만 한 일에 대해서 블레셋 사람들이 도대체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느꼈는지 그토록 호들갑입니까? 이들의 호들갑은 여호와 하나님을 보다 잘 섬기기 위한 호들갑이 아닙니다.
즉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한다든지, 감사하든지, 존경하기 위함 호들갑이 아니라 어서 자기 지경에서 내쫓기 위해 호들갑입니다. 그래서 원래대로 자연인으로 되돌아가고 싶어합니다. 여호와가 없었던 그 때 그 시절로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을 참으로 이상스럽게 만드는 대목이 이 대목입니다.
도대체 여호와 하나님이 무엇이기에 여호와 하나님에게 공포심을 갖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더욱 더 이상스러운 점은 공포심은 갖되 얼른 그 신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는 점입니다. 아예 무시하면 그만인 것을 무시하지도 않으면서 그렇다고 해서 생존하심을 분명히 인정하면서도 계속 함께 살기는 싫어하는 겁니다.
그들 블레셋 사람들은 알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신 여호와는 자신들을 적으로 간주해서 공격한다는 점을 말입니다. 사사기 3:2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세대 중에 아직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에게 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려하사 남겨두신 열국은” 즉 여호와 하나님은 가만히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계속해서 전쟁을 벌리시는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이로서 그 여호와 하나님을 신봉하는 자들도 필히 전쟁의 본질을 몰라서는 안 되는 운명에 놓여 있습니다. 과연 여호와의 적이 어떤 자들이며 그 싸움의 방식은 무엇인지를 여호와의 백성들은 반드시 알고 있어야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싸움하시는 여호와께서 적들과 어떤 관계에 있으며 적들은 여호와에게 어떤 태도를 갖느냐를 보여줍니다.
여호와와 자연인들의 만남은 이렇게 결별 수순을 밟게 되어 있습니다. 자연인들은 결코 하나님의 백성은 아닙니다. 따라서 어떻게든 여호와 하나님의 흔적을 자기 지경에서 지워버리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여호와 하나님과 친 자기 백성과의 만남은 어떠합니까? 그 점은 민수기 16장-17장에 잘 나와 있습니다.
여기서도 역시 여호와 하나님은 다소곳이 상자 위에 계십니다. 과연 이스라엘 진영 곳곳에 무서운 여호와의 저주가 내려질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내부는 평화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날 드디어 이스라엘 내부에서 하나님의 저주가 떨어지는 경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피조물에서 자연인으로 귀환하고자 할 때에 일어나게 됩니다. 레위지파에 속한 고라 가문에서 모세와 아론의 독점적 지위에 반기를 들고 일어났습니다. 숱한 사람들이 동조했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이러합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애굽에서 나올 때 모두들 동등한 입장에서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의 혜택을 입었다는 겁니다.
따라서 모세와 아론이 자기네들보다 우월한 직위를 행사할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즉 자기네들이 충분히 잘 알고 있는 하나님이 여호와이기에 특별히 모세가 아론이 중간자 역할을 할 더 이상 할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자연인과의 만남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을 내쫓기 위한 제사를 올리지만 여호와 하나님과 친 백성과의 만남에서는 ‘선택’ 문제가 거론됩니다.
즉 왜 꼭 선택한 자가 필요하냐는 겁니다. 이러한 반기에 대해서 모세의 처신은 참으로 옳았습니다. 모든 문제를 모세 본인의 결정으로 처리하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의 일로 일임해 버렸습니다. 고라 편에 속한 사람과 모세와 아론은 각기 자신들의 향로를 들고 여호와의 성막 앞에 집결해 있었습니다.
이제 이 향로의 불을 가지고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모세와 아론은 철저하게 하나님에게 맡겨버렸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불이 나와 무려 250명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땅이 꺼지면서 땅에 파묻히고 말았습니다. 이런 일이 있고 난 뒤 이스라엘 온 회중들이 도리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고 나섭니다. 마치 블레셋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위험스러운 존재로 봐서 물리치려는 취지가 같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떠나려는 마음이 없으십니다. 블레셋 사람들처럼 제사를 받고 그들을 떠나고 싶어하시지 않습니다. 도리어 이스라엘을 다 몰살시키는 경우가 있더라도 다시 갱신하려고 하십니다. 이 점을 안 모세는 황급히 제단의 향로를 가지다가 백성에게 가져가서 그들을 위해 속죄를 해버렸습니다. 그래서 전염병은 더 이상 퍼지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중보자의 효과입니다. 동시에 ‘선택의 효과’입니다.
하나님이 계실 자리는 사람들이 미리 닦아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스스로 만들어나가십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서 ‘선택’이 품고 있는 사랑과 용서의 의미를 알아야만 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하나님의 상자를 소 수레에 실어서 그 수레가 어디로 가는지 지켜보기로 했습니다. 참으로 여호와께서 의도적으로 벌린 재앙이라면 전에 풍문으로 떠돌았던 애굽의 재앙은 그냥 전설이나 풍문이 아니라 현재적 상황으로 지속되고 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실은 수레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법궤가 인도하는대로 본래의 자리를 찾아가야 합니다. 성도의 장래를 성도 본인이 미리 단정 지어서 성공과 실패를 규정짓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무엇이 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무엇이 실렸느냐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택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모세 선택의 의의가 여전히 살아있음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이 이끄시는대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