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8장 1-10절 제목 : 배고픔과 창조
막 8: 1-10 (배고픔과 창조)
이름 : 우리교회(IP:220.81.176.150)
본문 : 마가복음 8장 1-10절
제목 : 배고픔과 창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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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08-10-12 13:31
배고픔과 창조
2008년 10월 12일 본문 말씀: 마가복음 8:1-10
(막 8:1) 『그 즈음에 또 큰 무리가 있어 먹을 것이 없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막 8:2)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막 8:3) 『만일 내가 저희를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도 있느니라』
(막 8:4) 『제자들이 대답하되 이 광야에서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
(막 8:5)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가로되 일곱이로소이다 하거늘』
(막 8:6) 『예수께서 무리를 명하사 땅에 앉게 하시고 떡 일곱 개를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그 앞에 놓게 하시니 제자들이 무리 앞에 놓더라』
(막 8:7) 『또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는지라 이에 축복하시고 명하사 이것도 그 앞에 놓게 하시니』
(막 8:8)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 일곱 광주리를 거두었으며』
(막 8:9) 『사람은 약 사천 명이었더라 예수께서 저희를 흩어 보내시고』
(막 8:10) 『곧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달마누다 지방으로 가시니라』
기적이라는 것을 현대인들이 대하면 참으로 허망해보입니다. 진리처럼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헛된 눈 속임수 같이 느껴질 것입니다. 이 과학시대에 있어 진리란 되풀이해서 같은 결과물이 나와야 합니다. 똑같은 조건 하에서 똑같은 결실이 나와야 비로소 진리로 인정해주게 됩니다.
그런데 기적이란 그때 뿐이라서 신빙성이 떨어집니다. 과학에서 말하는 진리와 예수님의 기적과의 차이점은, 과학이란 인간이 그저 관찰자의 입장에서 머물러 있지만 예수님의 기적 현장에서는 모두다 그 기적의 대상으로 가담이 된다는 점에 있습니다. 즉 오늘 본문과 같이 7개의 떡으로 4000명을 배불리 먹는 기적을 멀리서 구경하는 사람에게는 예수님의 일이 그냥 여흥거리에 불과한 마술입니다.
하지만 직접 그 현장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위기로 들이닥친 일입니다. 즉 예수님의 기적이란 인간에게는 위기가 조성되는 순간입니다. 망해버린 것입니다. 4000명이나 되는 사람이 너 나 할것없이 다 배고파있습니다. 여러분, 병이 생기고 난 뒤에 기적적으로 병 낫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아예 병이 안 생긴 것이 좋습니까? 당연히 애초부터 병이 없는 것이 낫습니다.
막상 죽을 병이 생긴다든지, 양식이 떨어지면 사람들로서는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됩니다. 속이 쓰린다든지, 관절이 아프다든지 하는 것은 신앙이나 종교니 도덕이니 하는 것보다 훨씬 시급하도 다급한 실제 현실로 다가오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겉으로 종교기술이나 선행으로 커버하려고 하지만 진짜로 아픈 그 아픔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육제적으로 아픈 것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아픈 것도 예외가 없습니다. 참으로 사랑하는 자가 아프거나 죽거나 하면 갑자기 입맛이 달아나고 같이 죽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됩니다. 만약 이런 아픔을 예수님이 베푸시는 기적의 절차 중의 하나라고 한다면 화내시겠지요. 하지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람들은 실제로 그들은 배고픔을 느껴야했습니다.
이것은 굴욕적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에게는 사는 공식이 있습니다. 먼저 자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그 ‘있다’는 자신을 위해 본인이 나서서 손질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실적을 계산하게 됩니다. 이 공식에서 벗어나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자아를 지키기 위해 뭐라도 하게 되고, 그 노동하게 된 결실을 따져서 더 살 것인가 아니면 자살해 버릴 것인가를 고려하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기적 앞에 서면, 분명 자기 자신이 있으나 더 이상 자기가 자기에게 해 줄게 없게 됩니다. 오늘 문 같은 경우에는 먹을 양식이 없는 경우이지요. 배고픈 줄을 잘 알지면 먹을 양식이 없는 겁니다. 이것은 자기에 대한 모독이요 굴욕이요 모멸스러운 상황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보내신 이유가, 인간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제대로 밝혀내기 위함입니다. 인간들은 대책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공식은 이러합니다. “경건치 않는 자를 의롭다 해주기”입니다.(로마서 4:5)
이 원리는 평소에 인간들이 행동하는 습성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이는 곧 인간들은, 자신이 자기를 만들어가는 식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원리는 참 인간, 새로운 인간, 새롭게 만들어지는 인간,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이란 자신이 만들어 나가는 식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인간형을 두고 말합니다.
이것은 곧 더 이상 인간이 자신을 위해 해줄 것이라는 것은 없음을 뜻합니다. 이 ‘없음’을 알려주는 기적이 예수님의 기적입니다. 인간들로 하여금 난처하고 당황스럽게 만듭니다. 그래서 더 이상 자신이 자기에 대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게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모델은 따로 있습니다. 빌립보서 1:20-21에 보면,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고백은 전적으로 인간들의 타고난 본성과 어긋나는 겁니다. 인간은 살고 싶어하면 살아가게 마련입니다. 죽고 싶어하면서 살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아무리 다급한 지경에서라도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런 성경적 고백이 나오기 위해서라면 인간 본인들도 미처 알지 못하는 자신의 근원이 뒤집어져서 공개되어야 합니다.
인간들의 살고자하는 의지로 인하여 인간 내부에 불경건이 차곡차곡 쌓여있습니다. 죄 값은 사망입니다. 그냥 숨 끊어지는 정도가 아니라 영원한 저주가 주어집니다. 하나님께서 버림받게 됩니다. 바로 이런 상황을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보여주셨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 외침은 곧 우리의 외침을 대변하신 것입니다.
즉 우리들이 이대로 살다가는 저주받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경건과 거룩은 생산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4000명은 일관적으로 굶게 됩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는 차등과 차이와 변별력에 준해서 삶의 즐거움을 획득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자아만이 부각하고 싶어들 하기 때문입니다. 경쟁이나 비교는 자아의 우월성을 포기하지 않을 때 발생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도 십자가를 제대로 만나게 됩니다. 일괄적으로 자신이 버림받아 당연한 자로 알게 됩니다. 자신의 근원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런 자들이 어떻게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라는 놀라운 고백을 쏟아놓을 수 있을까요?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오늘 기적입니다. 떡 7개로 시작한 예수님의 일이 하나님의 축복으로 인해 떡 일곱 광주리로 남게 되었습니다. 4000명 앞에서 예수님은 남은 일곱 광주리에 주목하게 합니다. 이 일곱 광주리의 떡에 대해서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의 노동이나 애씀이 담겨있다고 주장할 수 없게 됩니다.
이처럼 참된 성도란 ‘남은 자’입니다. 스케너처럼 예수님께서 자신을 덮고 지나가면서 생겨버린 새로운 피조물이 곧 ‘남은 자’입니다. 경건치 않는 자마저 의롭게 하신 것은 예수님의 피흘리심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의가 그 피 안에 가득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주시는 말씀의 떡으로만 새롭게 살아가는 자, 이자들이 성도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버림받아야 마땅한 자인 줄 알게 해주시고, 오직 우리 안에는 ‘경건치 않는 자를 의롭다 하심’의 원칙만 남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