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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081003b 울산강의-창세기 40장자유게시판창세기

20081003b 울산강의-창세기 40장

이름 : 한윤범(IP:59.6.189.196)

20081003b 울산강의-창세기 40장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14절에 “집 사람을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보라 주인이 히브리 사람을 우리에게 데려다가 우리를 희롱하게 하도다 그가 나를 겁간코자 내게로 들어오기로 내가 크게 소리 질렀더니”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이 자기 소유가 될 수 없으니까 빈 곳을 자신의 것으로 채워야 되거든요. 채우기 위해서는 자기의 의로 채워요.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에게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시도하다가 자리를 마련해주죠. ‘당신이 들어올 자리는 있습니다.’ 하다가 요셉이 그 자리에 안 들어오니까 이 빈 곳을 반드시 뭐로 채우느냐 하면, 자신의 의로움으로 채워야 되는 거예요.

의로움으로 채우려면 자기 뜻대로 안 되는 걸 뭐로 만드느냐 하면, 악한 자로 만들어야 이게 의로운 거거든요. 세상 사람들이. 핑계죠. 핑계 없는 무덤 없다고 핑계죠. 상대적으로 저쪽이 나빠야 저 사람이 내 소유가 될 수 없는 것은, 나는 너무나 의롭기 때문이 저 악한 것은 자기 의로움을 증명하는 식으로 자기 앞에 자기보다 나쁜, 악한 자들을 세울 수밖에 것이 인간의 요셉을 통해서 밝혀지는 이 세상 인간들의 하나의 본성이 드러나는 거죠.

요셉으로 함께 있음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어떤 식으로 버티느냐? 인간은 결국 자기 의로 버티는 거죠. 자기 의로움으로 버틸 수밖에 없죠. 이것은 바로 뭐냐 하면, 인간은 처음에 아담이 에덴동산에 있을 때는 그냥 존재했었지요.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존재’로써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가치’로써. 그러니까 선인과 악인이냐, 악인이냐, 선인이냐? 이런 가치를 뒤집어쓴 존재가 되고 맙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원했던 게 아니에요. 하나님 한 분만으로 그냥 영생이고 생명인데 인간이 독자적으로 ‘나는 선인이다’ 하고 주장하고 나가는 것 자체가 선악적인 구조 속에 들어가는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원래 내가 인정한 그 인간은 아닌, 이제는 흙이 되는 것도 아니고 나쁜 인간 되죠. 악한 인간. 그야말로 하나님 보시기는 하나님께 저주 받게 되는 악마에 속한 악한 인간들입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범사에 감사하면 될 텐데 ‘나는 꼭 이래이래 하기 때문에 감사하고 의롭고 가치있고, 이래이래 하기 때문에 나 혼자 훌륭하고’ 꼭 이렇게 가치를 자기에게 부여한다면 이거는 원래 만든 하나님의 진면목은 아닙니다.

그런데 현재로서는 요셉 빼놓고는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형들도 그렇고. 그런 인간 또 나옵니다. 뒤에 보면 보디발 아내뿐만 아니고, 또 요셉을 만났던 사람이 나옵니다. 40장 들어가면. 누굴 만나느냐 하면, 여기 40장에 “그 후에 애굽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 둘 중에 누가 나쁜 사람입니까? 먼저 문제부터 드려야지.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 둘 중에 더 나쁜 사람이에요? 요셉한테. 누가 더 힘들 게 했어요?

그게 너무 어려우면 술 맡은 사람은 살았고, 떡 굽는 자는 죽었잖아요. 근데 사실은 죽었던 사람은 그냥 사흘 만에 죽었지만 술 맡은 관원은 누구 덕분에 살았습니까? 요셉 덕분에 살아놓고 잊어버렸지요.

이것은 바로 앞에 있는 보디발이 나쁩니까, 보디발 아내가 나빠요? 보디발은 진짜로 요셉이 자기 아내를 겁탈한 줄 알았기 때문에 추방했고, 보디발 아내는 분명히 자기가 이거는 자기 자신도 알지요. 알면서도 그렇게 이야기했고. 여기서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요셉이 처해 있는 위치마다 악이라는 것이 얼마나 각가지 악들이 튀어나오는가를 요셉이 가는 곳마다 보여주는 거예요. ‘세상만사 이런 놈도 있고 저런 놈도 있다. 이해해라.’

하나님과 함께 가게 되면 한번 세상 끌고 가면 예쁘게 포장됐던 것이 한번 확 긁어버리면 그 안에 온갖 더러운 것들이 지나간 자국에는 온갖 것들이 다 까발려서 뒤집어져서 다 튀어나옵니다. 요셉이 가는 곳마다.

첫 번째 요셉이 만났던 것은 뭐냐 하면, ‘억울하다’ 이 말이에요. 억울하죠. 참 억울해요. 예수님 가신 것도 억울하지만 억울하다. 이거는 뭐냐 하면, 죄는 누가 지었고? 보디발의 아내가 지었는데 그 죄를 누구한테 뒤집어씌웠습니까? 요셉에게 뒤집어씌우니까 뒤집어씌우는 과정에서 요셉은 억울한 자가 되고 그리고 바깥사람들은 뭡니까? 악한 자가 되고. 그걸 보여주죠.

두 번째 요셉이 만난 사람은 술 맡은 관원과 떡 맡은 관원 만나서 이건 뭐냐 하면, 저쪽은 은혜를 잊어버렸지요. 그리고 요셉은 맨 그 자리에 있고. ‘잊어버렸다’는 말은 더 이상 남남이 돼버렸죠. 이게 또 악함이라.

예수님 믿은 사람이, 예수 누구죠? 몰라요. 출애굽기에 나오죠. 요셉의 은혜를 잊어버린 바로 왕이 이스라엘을 히브리인들 괴롭히잖아요. 아까 제가 이야기했지만 내가 이렇게 살아있다는 자체가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살아있는데 이게 나의 사명이고, 그게 우리가 보여줄 감사인데 이걸 우린 평소에 잊어버리죠.

둘 다 봅시다. 보디발의 아내하고 그리고 여기 술 맡은 관원, 이 둘의 공통점은 뭡니까? 뭐밖에 모른다? 자기밖에 모른다. 그러니까 결론은 뭡니까? 하나님의 메시아가 앞서 보낸 자가 오게 되면 사람들은 악한 자가 되는데 그 악함의 특징은 공통점은 뭐냐? 자기밖에 모르게 되고, 자기밖에 모르게 되면, 자기 의로움을 지키기 위해서 남들을 억울하게 만들고 그리고 은혜는 은혜대로 받으면서도 잊어버리고.

마태복음 5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햇빛과 공기를 주시잖아요. 다 잊어버리죠. 햇빛과 공기를 줄 때 어디 돈 받고 줬습니까? 그냥 참새 키우듯이 은혜를 주잖아요. 참새도 은혜를 알고 들풀도 은혜를 아는데 인간들은 주님의 은혜를 도무지 몰라요. 자기가 고생해서 지 힘으로 사는 줄 알고 있어.

산다는 게 두 종류가 있어요. 밥을 먹고 사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밥을 먹고 사는 경우 같으면 처음에 에덴동산에서 존재가 있을 때는 밥 먹고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선악과 따먹고 자기 가치를 논할 때는 사람은 밥을 먹고 사는 사람에게 이게 산다고 할 수 없죠. 왜냐하면 밥을 먹으면서도 계속 ‘나 잘났다, 나 잘났다’ 하게 되죠.

그래서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생명나무를 따먹으면 안 되는가? 그 이유를 사람들이 잘 몰라요. 왜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생명나무를 못 먹게 하느냐 하면, 이미 인간이 뭡니까? 처음에 인간 존재가 아니고 뭡니까? 자기 가치, 아까 인간은 자기밖에 모르니까. 지밖에 모르는 인간을 계속 살려줘서 살리면 누구 영광입니까? 마귀만 좋지. ‘역시 마귀는 옳았어. 마귀는 탁월했어. 악마가 시키는 것이 진리였어.’ 이것이 퍼지면 이게 온통 우주에 퍼질 건데 하나님이 용납하시겠습니까?

‘마귀가 한 짓은 잘못이야. 그거는 너무 잘못됐어.’ 그걸 지적하기 위해서라도 인간들을 살려내야죠. 살려내고 저주해야죠. 그거는 생명나무가 있는 취지와 다르다 이거죠. 생명나무는 우리 같은 인간 영원히 살리려고 있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은혜를 아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생명나무 있는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생명의 떡’이라 했잖아요. ‘너희들이 먹는 떡은 네 잘남을 과시하기 위한 떡이고, 내가 주는 떡은 하나님의 일로서의 떡이다. 영생을 얻는 떡이다’ 이 말이죠.

결국은 내가 내린 결론은 뭐냐?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 이 속에서 인간은 온갖 죄란 죄는 죄다 나오게 돼있습니다.

그러면 39장 끝에 봅시다. 요셉이 이제는 옥에 넣었으니까 왕의 죄수를 가두는, 39장 20절. 참 억울하죠. 그러니까 ‘억울하다’, ‘요셉이 옥에 들어갔다’ 이것이 아까 이야기한 말씀을 응하게 함이라. 그 하나님께서 앞서 보낸 거예요. 그래서 성도가 세상 악한 사람한테 억울함을 당해도 ‘하나님이여, 왜 접니까?’ 이러지 마시고, ‘아, 내가 이렇게 옆에 악한 놈들 배치해서 나로 하여금 내가 잊어버렸던(잊어버린 건 술 맡은 관원이죠) 내가 술 맡은 관원처럼 요셉의 은혜를 잊어버렸던 나로 하여금 다시 요셉의 은혜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나도 똑같이 억울한 일을 당하게 한다’ 이래 생각해주셔야 합니다.

심판하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라 했잖아요. 우리가 심판해버리면 그거는 하나님 뜻이 아닙니다. 심판하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세요. 그러니까 요셉은 옥에 그대로 있거든요. 요셉은 옥에 그대로 있고 술 맡은 관원 살아나서 지는 좋았지. 요셉은 아직도 옥에 갇혀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나만 편하면 되지. 누가 갇히든 말든 무슨 상관 있노’ 이래 돼버리면 안 된다 이 말이죠.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았다’ 하고 예수님 잊어버려요. 사람들은. ‘예수님, 구원해줘서 고맙습니다’ 하고 예수님 빠이빠이 돼버렸어요. 다시 예수님을 기억하는 사람이 드물 정도로. 성령을 받아야 생각나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뜻대로 안 되는 일을 통해서 우리가 잊어버렸던 예수님의 희생과 아픔을 다시 기억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여러 가지 일들이 배치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해주시기 바랍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이 세상은 내 뜻대로 절대로 안 되고, 고맙게도 주님의 뜻대로 십자가의 뜻대로만 진행됩니다.

‘그러면 목사님, 우리는 어떻게 살까요?’ 니 마음대로 사세요. 니 마음대로 사시면 주께서 니 마음대로 안 살도록 동행해주셔서 니 마음대로 사는 것이 말씀대로 되도록.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말씀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큰 일 납니다. 그러면 사도행전 28장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30장, 50장 막 나갑니다. 그게 아니고 우리는 내 마음대로 살면 그게 이래서, 이래서 죄라는 걸 알려주는 주의 뜻대로 알려주는 그렇게 해서 우리로 하여금 내가 죄인임을 깨닫게 하는 식으로 살아갑니다. 결론은 간단하잖아요.

“전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은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이거 비슷한 영화 있었잖아요? 무슨 영화입니까? 감옥소에서 은행원이 억울하게 갇혔다 탈출한 영화 있었는데. [쇼생크 탈출] 그런 영화와 비슷한데.

그런데 한번 보세요. 요셉의 입장에서는 기분 좋은 일입니까? 여기서 요셉을 우리가 본받아야 돼요. 요셉은 하나님의 형통, 이런 형통 아니잖아요. 감옥소 죄수인데 잘 되더라. 이걸 빨리 빼내줘야지. 여기서 형통한 게 뭐, 본이 안 돼. 결국 요셉은 뭐가 없습니까? 자아가 없고. 다른 주위 사람들은 뭐가 있다? 계속 자아가 있는 거예요. ‘뭐, 하나님 뜻대로 하면 되지.’ 이런 식이고 요셉은.

물론 요셉이 그런 것이 왜 없겠습니까? 있었지요. 있으니까 요셉이 나중에 뭐라 합니까? 술 맡은 관원 보고 ‘당신이 회복되거든 날 좀 빼내 달라’고 이야기하지요. 물론 있었지만 어쨌든 되어지는 환경 속에서 요셉은 일절 요셉 본인이 좋은 식으로 하나님께서 인도하지 않는다는 것. 하나님과 동행함은 맞습니다. 동행하는 건 맞는데 요셉이 기대했던 것은 일체 안 된다는 거예요.

이걸 그림으로 그리며 이래되는 거예요. 색깔 넣어서 그려볼게요. 요셉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요셉이 현재 있는 상황에서 탈피해서 더 나은 상황을 생각합니다. ‘여기서 벗어나서 이렇게 됐으면 좋겠다.’ 이걸 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벗어난 건 맞는데, 동행하면. 어디로 벗어나느냐 하면, 이렇게 되게 한다고. 근데 이것은 요셉을 이걸 생각하는 동안에 이것은 가려져 생각이 안 나요. 예상 밖의 일이에요. 요셉은 A를 원하는데 하나님은 B를 만들어버려요. 이거는 요셉한테는 없는 거예요, 지금. 있을 것 같으면 A 대신 B를 생각하겠죠.

하여튼 하나님은 인간이 구상하지 못하고 생각지도 못한 대로 이끌어냅니다. 깜짝깜짝 놀래요. 뭐든지 그래요. 전혀 예상치도 못한. 내가 짠 시나리오는 하나님이 보지도 않고 읽지도 않습니다. 내가 인생 시나리오는 안 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매일같이 짭니다. 시나리오를 내가 써요. 안 쓸 데가 없어요. ‘오늘 하루는 이렇게 돼야지. 오늘 하루는 이렇게 되기를 원한다.’ 하면서 계획을 잡지요. 절대로 안 됩니다. 실제로 그대로 되더라도 나중에 재미 하나도 없어요. ‘주여, 내 뜻은 이걸 되게 하는 건데 막상 되면 재미 하나도 없습니다.’ 기대한 대로 된다 해서 그게 행복하지 않습니다. 슬퍼요. 참, 허무해요. ‘아이고, 고작 내가 이거 되려고 했나? 아이고, 참. 더러워라. 이왕 될 것 같으면 더 큰 것 원할 걸. 이거 할라고’

요새 부산에 부산 갈매기 때문에 난리입니다. ‘가을에도 야구하자.’ 요새는 안 그럽니다. 우승입니다. 처음에 할 때는 가을에 야구하자지 ‘4강만 되도 더 바랄 게 없습니다’ 했잖아요. 요새는 ‘4강 가 만나 일등 해야지. 한국시리즈 우승해야 돼.’ ‘고작 3등 하려고 그리 애썼나? 3등 하려고 비닐 봉다리 만들고. 아이고, 창피스러워라. 3등은 그냥 되는 건데.’ 처음에 할 때는 만날 꼴찌할 때는 3등 그냥 되는 게 아닌데 막상 되고 난 뒤에 ‘3등 그냥 되는 건데 괜히 내가 용 썼네’ 이러죠.

요셉의 입장에서는 바로 그런 것조차도 하나님 뜻이 아닌 인간의 기대가 죄라는 것을 다 밝혀주지요. 어쨌든 하나님이 약 올리는 것 나와요. 얼마나 약을 올리는가 보세요. “전옥이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23절) 이게 약 올리는 게 아닙니까? 기껏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게 죄수.

이것은 요셉으로 하여금 더 이상 옛날 꿈 있잖아요. 옛날 자기가 꾼 꿈 있잖아요. 전혀 그거는 더 이상 불가능한 그러한 일인 것을 깨닫게 하는 겁니다. 옛날에 내가 꿈 꿨던 것 물 건너갔구나. 그 점은 우리의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생각했던 구원은 물 건너갔어요. 주님의 말씀의 위력으로 구원하는데 우리는 구원받아놓고 시나리오 짜기 바빠요. 구원에서 구원을 이루는 시나리오를 짭니다. 구원받고 난 뒤에 전도 한 이천오백 명 정도 하고, 돈도 많이도 아니고 45억 정도. 이러다 죽으면 교인들 운다고. 아까운 사람 죽었다고. 이근호 기념관 세워주고. 이거 없습니다. 이거 다 깨졌습니다. 점점 다른 방향으로 교도소 가야 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요셉이 이랬다고.

그런데 왜 그러냐 하면, 이게 가는 길이 하나님은 땅굴 좋아해요. 하나님은 이렇게 가는 것이 아니고 땅굴 파서 가요. 이게 뭐냐 하면, 남들이 찾지 못하는 좁은 길. 좁은 길로 가야 영생 나옵니다. 우리는 넓은 길로 가도 영생 나오는 그런 넓은 길을 원하잖아요. 좁은 길로 가야 하는데 좁은 길은 아무도 안 갈라 하죠.

그래서 신학생들, 전도사님들 보면 ‘나는 사창가에서 어려운 사람들, 불쌍한 여자들, 못 사는 사람들 위해서 목회하겠다’ 하나님 같으면 목회 해봐라. 이 년 쯤 지나면 큰 교회에서 부르겠지. 천만에 말씀. 이 년 지나도 맨 그거. 십 년, 맨 그거. ‘니, 원한다며?’

제가 신학교 때 안동에서 문경, 기찻길 서울 갈 때 문경 소백산 기슭에 진짜 조그마한 교회, 진짜 조그마한 교회, 교인수 많이 돼야 2,30명 되는 작은 교회인데. 제가 이랬어요. ‘하나님이여, 큰 교회 안 바랍니다. 그림 같은 조그마한 교회 거기서 평생을 내 무덤 세우고 평생을 살겠습니다.’ 교인 2,30명 할머니들 있는 교회. 지금 목사들 거기 가라 하면 다 튀어나옵니다. 주위에 아는 사람들 시골 갔다가 개척한다고 다 튀어나왔어요. 애 공부시킨다고 다 튀어나오고. 답답해서 못 견디죠. 직장 옮기는 것도 마찬가지고 뭐든지 마찬가지죠.

남자들 여자하고 결혼할 때 뭐라고 합니까? ‘나, 당신 같은 여자만 있으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하거든요. 육 개월도 안 되서 다. ‘뭐, 참신한 것 없나?’ 지 늙어가는 것 생각 안 하고 참신한 것 없나. 그래서 나이 많은 남자들이 꼭 젊은 여자들 선호하죠. 처음에 능력 있는 여자 하다가 나중에 지 능력 생겨 보세요. 이제는 능력 필요 없다. 전부다 예쁜 여자. 예쁜 여자라 하면 적어도 스무 살 차이 나야 돼요.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모르잖아요. 모르니까 그런 착오, 오류가 평생 계속 따라다니는 겁니다. 결국은 뭐냐? 구원받는 것은 우리가 총기가 많아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구원받는 것은 엉뚱하게 말씀대로 되니까 구원받는 거예요. 주 예수를 믿으니까 구원받는 거예요. 우리가. 놀랍게도. 예수 믿고 뭘 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처음에 믿었던 그 사랑 있잖아요. ‘예수님이 구원자다’ 그것 때문에 구원받는 거예요. 아무리 전도를 천 명 해도 소용없습니다. 그냥 예수 믿고 구원받는 거예요. 예수 믿고 오늘밤 죽어도 구원받는 겁니다. 오늘밤에 낙원에 가는 겁니다.

십자가 옆에 강도는 우리가 평생 살 것을 압축해서 다 보여주는 거예요. ‘봐라. 강도라도 구원받으니까 오늘밤에 주님 간 낙원에 가잖아.’ 압축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그 사이에 무슨 이야기가 들어가도 그건 다 삭제해버려요. 쓸데없는 것 다 뽑아내버리고 남는 것은 ‘예수님 믿습니다’ 그것만 남아요. 제가 이런 소리 하니까 다른 사람이 ‘너무 치우친다’ 이러거든요.

햄버거는 빵이 있어야 햄버거지 고기만 있다고 햄버거 아니에요. 고기만 있으면 고기 굽는 거지 무슨 햄버거에요. 햄버거는 빵이 있어야 그게 햄버거 아닙니까? 예수 믿는 게 있어야 구원이고 천국 백성이지 안에 무슨 내용물이 있느냐? 그거는 빵 두 개 있으면 누구나 햄버거라 보지요. 주님께서 동행하면 되는 겁니다.

그 후에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어려운 게 뭐냐 하면, 요셉의 꿈하고, 전에 있던 요셉이 꾼 꿈이 뭡니까? 곡식 집단이 와서 자기한테 절하는 것 하고, 해와 달과 별 열한 개가 절했지요. 그 꿈하고 이런 게 어려워요. 이 꿈이 요셉은 누구 꿈이라 했습니까? 자기 꿈이죠. 글쎄 요셉이 그게 오해한 거라니까요. 하나님이 이룰 꿈이지 자기 꿈이 아닌데.

요셉은 꿈을 꾼 자지요. 꿈을 소유할 순 없는 겁니다. 요셉은 자기 꿈을 자기가 이뤄나가는 게 아니에요. 요셉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해요. 꿈을 꾼 자지요. 그러면 요셉은 꿈을 꿨지요. 꿈을 꿨지만 소유 못합니다. 꿈을 꿨을 뿐이지 요셉을 통해서 꿈이 생겨났지만 생겨난 그 꿈을 요셉은 ‘내 것’ 하고 가질 순 없다 이 말입니다.

그리고 요셉 앞에 누가 등장했습니까? 꿈을 꾼 사람이지요. 두 사람 꿈 꿨지요. 두 사람도 꿈을 꾼 사람이지. 요셉 입장에서 자기 꿈 있잖아요. 곡식 절하고 그리고 하늘의 별이 자기한테 절하고, 이것과 이 꿈을 자기가 연관시킬 고리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꿈을 해석해야 되느냐 하면, ‘이 꿈은 제가 이루는 게 아닙니다.’ 그러면 내가 이룰 수 없는 꿈을 하나님께서 꾸게 했다 말이죠. 이게 중요하죠.

‘요셉을 본받으라’ 하는데 요셉은 약만 살짝 올릴 뿐이죠. 내가 이룰 수 없는 꿈을 하나님이 꿨잖아요. 결국 그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떠나버리면 그 꿈도 떠나버리죠. 그러면 꿈이 중요한 겁니까, 하나님이 중요한 겁니까? 하나님이 중요한 거예요. 하나님 붙들고 살라고 꾼 거예요.

지금 우리한테는 성경이라는 꿈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을 안 보는 사람이 있어요. 목사라도 성경을 외면해버립니다. 이것은 곧 뭡니까? 하나님을 외면하는 거예요. 자기 꿈 따로 있는 거예요. ‘성경 더 이상 안 볼 란다. 성경 관심 없다’ 이 말입니다. 이젠 목회에 관심 있고, 교회에 관심 있다. 그것은 하나님을 버린 겁니다.

요셉을 꿈을 해석할 때 ‘당신네들은 이 꿈을 성취할 수 능력이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죠. 이 이야기는 결국은 그 사람 이야기가 아니고, 누구 이야기입니까? 요셉 자신의 이야기에요. 왜? 자신은 지금 절 받을 입장이 아니고, 옥중에서 죽을 날만 기다린다. 그런 입장이기 때문에 만약에 그 꿈이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은, 잘 들어보세요.

요셉이 이 두 사람 꿈의 해석이 가능하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이 꿈대로 요셉을 결국은 두 사람의 경우처럼 나에게도 꿈을 이룬다. 하지만 조건이 있다. 그것은 뭐냐? 내가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하나님이 이루시니까 나는 하나님을 포기할 수 없다. 하나님을 떠날 수 없다. ‘꿈을 포기할 수 없다’가 아니라 결국은 이루시는 분은 내가 아니고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나는 버린다는 건 있을 수 없다.

지금 이 성경책이 우리의 꿈입니다. 마지막에 요한계시록에 천국이 오고 예루살렘 성이 내려옵니다. 천국에서 생명나무 따먹습니다. 이 꿈을 우리는 포기할 수 없습니다. 내가 잘나서? 아니에요. 내가 훌륭해서? 아닙니다. 내가 이걸 지키니까? 아닙니다. 이거대로 이루시는 분이 따로 있음을 우리는 믿기 때문에. 예수를 믿기 때문에 성경을 포기 못 해요. 예수는 믿는다 하고 성경은 버리고. 이게 무슨 짓입니까? 이건 있을 수 없어요. 예수님은 성경대로 이뤄지기 때문에. 내 꿈이 아니고, 주님의 꿈이기 때문에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성경을 생각하고 보는 거예요. 우리의 모든 희망과 여기 다 있지요.

그래서 요셉이 두 사람의 꿈을 하는데 사람들 좋으라고 할 것 같으면 이럽니다. 제가 만약에 꿈 해석이라면 ‘아이고, 떡 굽는 사람은 사흘 만에 진급 되지요. 아이고, 당신도 진급 되지요. 둘 다 진급 될 때는 날 잊지 마세요’ 이렇게 했을 거예요. 그러나 요셉의 꿈의 해석은 똑같은 구조요 꿈 해석인데, 구조나 봅시다.

6절에 보면, “아침에 요셉이 들어가 보니 그들에게” ‘그들에게’니까 한 사람입니까, 두 사람입니까? 두 사람. 둘 다 꿈에 대해서는 이미 자기는 관계없지요. “그들에게 근심 빛이 있는지라 요셉이 그 주인의 집에 자기와 함께 갇힌 바로의 관원장에게 묻되 당신들이 오늘 어찌하여 근심 빛이 있나이까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꿈을 꾸었으나 이를 해석할 자가 없도다”

요셉이 뭐라고 합니까?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컨대 내게 고하소서” 하나님께 있다 하면서 자기한테 고하라 하느냐? 이때 이미 요셉은 뭘 생각하느냐 하면, 자기에게 줬던 그 꿈이 이미 자기 힘으로 자력으로는 더 이상 내 힘으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 이 성경책 우리 새순교회나 우리교회 저나 절대로 못 이룹니다. 이걸 기뻐해야 돼요. 이 성경을 아무리 지키려 해도 못 지킨다는 점을 기뻐해야 돼요. 감사해야 됩니다. 그러면서 우린 잊지를 말아야 돼요. 못 지키는 것, 잊어버리자. 이게 아니고 못 지키기 때문에 우리는 포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날 통해서 이뤄지게 하는지 그걸 보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못 이룬다면 만약 어떤 사람 만나 ‘이 목사님, 성경 어떻게 지킵니까?’ ‘못합니다.’ 내가 해석할 수 있는 거예요. 그게 해석이에요. ‘못하는데 왜 이게 있습니까?’ ‘주께서 하실 겁니다.’ 그게 바로 예수를 믿는 사람이에요. ‘못할 것 같으면 나도 안 볼란다.’ 이래 되면 그 사람은 처음부터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이죠. 예수를 증거하는 게 간단해요. 읽어놓고 못합니다. 주께서

어떻게 하시는가 봅시다. 왜 못하느냐? 우리는 죄가 나오기 때문에. 어떤 해석도 항상 내 기대와 내 포부가 들어가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해석을 봅시다. 정답을 모른다고 치고, 저와 여러분들이 요셉입니다. 요셉에게 이 꿈을 줄 때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해석할까 보세요.

9절에 “술 맡은 관원장이 그 꿈을 요셉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가 꿈에 보니 내 앞에 포도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에 세 가지가 있고 싹이 나서 꽃이 피고 포도송이가 익었고 내 손에 바로의 잔이 있기로 내가 포도를 따서 그 즙을 바로의 잔에 짜서 그 잔을 바로의 손에 드렸노라” 이게 왜 근심할 수 있는 꿈입니까? 누가 이야기해보세요. 이게 왜 근심할 수밖에 없는 꿈입니까?

결국 뭡니까? 술 맡은 관원의 꿈은 뭡니까? 자기 죽는 것이 누굴 기쁘게 한다? 바로 왕을 즐겁게 하는 거예요. 자기는 뭡니까? 포도주 관리 아닙니까? 포도주 관리하는 것은 포도가 으깨지고 즙이 될 때 기쁨은 누가 가져간다? ‘아이고, 포도주 맛있다.’ 누가 가져갑니까? 왕이 가져가죠. 자기 입장이 어디 있다? 옥에 갇혔죠. 지금 옥에 갇혔다는 것은 임금의 분노를 사잖아요. 바로 왕의 분노를 사서 둘 다 옥에 갇혔잖아요.

그렇다면 사람의 해석이라 하는 것은 항상 자기 입장에서 출발하잖아요. 임금의 분노다. 거기다 꿈을 꿨다. 그 꿈은 무슨 꿈이겠습니까? 나는 옥에 갇혔고, 바로 왕이 왜 분노했는가를 보여주는 꿈이잖아요. 지금 술 맡은 관원장의 입장에서. 그렇다면 그 꿈의 내용은 뭡니까? 아하, 내가 죽어야 누가 기쁘다? 바로 왕이 기쁘지. ‘저놈이 죽어야 내가 기뻐. 저 술 맡은 놈, 아직 안 죽었어? 빨리 사형시켜. 그래야 내가 기뻐.’ 이것이 함축해서 뭡니까? 포도주가 맛있게 익어서 바로 왕의 입만 맛있게 포도주는 옥에 갇힌 대로 죽기를 기다리다가 죽을. 그것도 세 가지니까 이건 사흘 만입니다. 이렇게 계산해서 할 수 있겠죠.

지금 우리가 옥에 갇혔다고 생각해보세요. 입장이 옥에 갇힌 겁니다. 옥에 안 갇힌 상태가 아닙니다. 지금 맛있게 바로 임금님 드세요. 이런 입장에서 이 꿈을 꿨다면, ‘야, 내가 승진하겠네’ 이래 되겠는데, 지금 입장이 뭐냐 하면, 현재 자기가 처한 입장에서 해석할 수 있잖아요. 엉터리 해석이지만.

인간의 꿈의 해석은 항상 자기의 실존에서부터 출발해요. 자기 현실을 자기가 생각했던 자기 해석에서 출발하거든요. 해석의 선입관을 가지고 꿈을 해석하기 때문에 아무리 꿈을 해석해서 자기 선입감을 옹호하고 그걸 옳다고 뒷북치는 그런 해석밖에 안 나옵니다. 그러니까 근심할 수밖에 없지요. 일단은 술 맡은 관원은 근심합니다.

두 번째 16절 봅시다. “떡 굽는 관원장이 그 해석이 길함을 보고 요셉에게 이르되 나도 꿈에 보니 흰 떡 세 광주리가 내 머리에 있고 그 윗광주리에 바로를 위하여 만든 각종 구운 식물이 있는데 새들이 내 머리의 광주리에서 그것을 먹더라” 보세요. 이 꿈하고 앞에 꿈하고 구조가 너무 유사하지요. 그렇잖아요. 너무 유사하단 말이죠.

흰 떡이 광주리가 몇 개입니까? 세 개죠. 여기 그러면 앞에 있는 포도송이가 몇 개입니까? 세 가지죠. 그러니까 앞에 해석이 어때요? 잘 됐잖아요. 자기가 죽는다고 생각했는데 뭡니까? 잘 됐다고요. 그러니까 이 사람도 똑같은 구조니까 잘 될 거라고 생각한 거죠. 이 해석 가지고 얼마든지 좋게 나올 수 있다 말이죠.

내가 무릎팍 도사 같으면 ‘야, 임금님 궁전에 새들이 많은데. 임금님이 새 잘 키우는데 어디 맛있는 떡 없나? 옳지. 내가 실수해서 떡 굽는 관원 갑자기 너무 충동해서 감옥에 보냈구나. 빨리해서 맛있는 떡으로써 내가 키우는 새들을 맛있게 해서. 회복해서 더 승진시켜야지.’ 얼마든지 이런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요셉의 꿈 해석은 결국은 요셉에서 나온 게 아니라는 겁니다. 요셉 본인도 두 사람의 운명에 대해서는 지가 관여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구조로써 해석을 한다, 못한다? 꿈은 꿈이요, 해석은 해석이지. 꿈에는 예상문제라는 게 없습니다.

프로이드가 이야기했어요. [인간의 꿈 해석은 과거의 집합체이다.] 여러분 꾼 꿈 다 기억해보세요. 전부다 과거에 한두 번 일어났던 일들이에요. 안 일어났던 일들이 이게 모자이크 식으로 어디서 동원했는지 섞여서 문제지, 그 섞인 것 하나하나 분석해서 뽑아내 보세요. 전부다 과거에 있었던 일입니다. 새로운 일은 없어요. 전부다 한 번씩 과거에 있었던 것, 또 되풀이 된 여러 가지 것들, 이게 낄 때 안 끼고, 안 맞을 때 맞고 이렇게 해서 문제지만 전부다 파편들은 뭐냐? 한 번씩 경험한 거예요. 과거의 산물이에요. 여기서 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걸 인간이 과거로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꿈을 가지고 계시하는 것이 아니고 꿈을 통해서 계시하죠. 꿈 자체는 의미 없어요. 그냥 인간의 꿈을 이용할 뿐이지 꿈이 무슨 신기한 게 있고 그런 거 없습니다. 개꿈을 꿔보세요. 전부 돼지꿈으로 만들어버리지. 해석은 하나님 마음대로에요. 어떻게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뭘 해도 해석은 다 맞아요. 이것은 뭐냐? 결과를 미리 알기 때문에 결과를 미리 알고 꿈을 줌으로 말미암아 인간들로 하여금 자기의 포부, 자기의 기대는 이것이 하나님 뜻이 아님을 알리기 위해서 꿈을 사용하는 겁니다. 왜?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자, 그러면 술 맡은 관원이 어떤 혜택을 받는지. 13절에 보면,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들고 당신의 전직을 회복하리니 당신이 이왕에 술 맡은 자가 되었을 때에 하던 것같이 바로의 잔을 그 손에 받들게 되리이다 당신이 득의하거든 나를 생각하고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고하여 이 집에서 나를 건져내소서 나는 히브리 땅에서 끌려온 자요 여기서도 옥에 갇힐 일은 행치 아니하였나이다” 요셉이 솔직하게 자기의 처지를 잘 되거든 잘해 달라 하죠. 이 마지막 기대를 술 맡은 관원이 안 들어줬을 때 이야기가 요셉은 압박붕대에 자살했다. 이야기가 이렇게 돼야 됩니다.

결국 하나님의 뜻은 뭐냐? 요셉으로 하여금 꿈은 이뤄지게 절대로 네가 기대한 대로는 이뤄지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기대했던 구원의 방식, 우리 인생관으론 절대 구원하지 않습니다. 그냥 예수님으로만 구원합니다. 그걸 믿는 자가 성령이 임해야 그걸 믿을 수 있어요.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그걸 못 믿습니다. 성령으로 구원받지 내가 예수님 이모저모 생각해서 구원되는 법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늘 우리한테는 실망만 줄 뿐이죠.

‘아이고, 하나님 믿다가 큰 코 다치겠다.’ 진짜 큰 코 다치라 안 하드나. ‘내가 사람 믿으면 나쁜 놈이지.’ 이러면서도 그 자아 속에는 타인의 욕망이 들어있다니까. ‘나는 너 같은 자식 둔 적 없다. 호적에서 빼낸다.’ 빼내보세요. 빼지는가. 자식 없으면 자기 형성이 안 되는데. ‘난 당신 잊었습니다.’ 못 잊습니다. ‘잊었습니다’ 해도 그 다음날 꿈에 나타나요. 자기 과거의 일부기 때문에.

그래서 인간은 조립품입니다. 조립품이지 내 것이라는 게 전혀 없습니다. 온갖 것 여기저기서 다 끌어 모아서 만들어낸 자아에요. 그게 낮에는 잘 추려져 있다가 밤에는 그게 해이해져서 온갖 것 끌어 모았는데 미처 못 챙긴 자아가 튀어나와요. 고물상하는 자아가 튀어나오고, 꽁지머리한 자아가 튀어나오고. ‘내가 왜 이런 짓 하지.’ 목사들 꿈에는 교인들이 차고 넘쳐서 예배당 비좁아서 서서 듣고 이런 것도 나오고. 어떤 꿈에 보면 설교 들어가려 하니까 장로가 ‘당신, 쫓겨났는데 왜 들어오려 해’ 밀어내고. 온갖 파편들, 상상들이 다 있는 겁니다. 이제 요셉 꿈 꿨으니까 요셉 꿈을 꿔야 될 건데.

옥에 갇힌다는 것이, 여기서 왜 이렇게 요셉을 힘들게 하느냐 하면, 착고에 차이는 게 하나님 뜻이에요. ‘하나님 말씀이 응할 때까지 착고에 차인다’ 이 말은 본래 생각했던 요셉 본인과 옥에 갇힌 본인 사이에 뭐가 있습니까? 갭이 있는데 이 갭을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꿈으로써 채우고 있습니다. 이게 바로 성도의 모습이죠.

불신자는 뭡니까? 자기와 자기 사이를 뭐로 봅니까? 하나님 은혜가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그냥 자기 기대가 들어가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전혀 몰라요. 요셉의 생각 전혀 잊어버립니다. 왜냐하면 자기 소유, 자아 팽창인데 부풀어지는 것. 팽창이죠. 신의 은혜? 없어요. 인생 지가 된 것은 자기가 다 된 거예요. 그래서 누굴 고마워 할 수가 없습니다. 잠시 고마웠다가 다시 그것은 왜냐? 내 것이 되었으니까.

그런데 요셉 같으면 자기 게 없어요. 내가 나 된 것은 자기는 하나님 것이라 말이죠. 하나님 것이니까 하나님께서 알아서 해줄 거예요. 그러나 불신 세계, 악한 세계에서는 뭐냐 하면, 전부다 내 인생은 내 것으로 꽁꽁 묶어놨어. 뭐든지 내 것이라. ‘인생 뭐 있어? 한 방이지.’ 부어라, 마셔라.

18절에 “해석이 이러하니라” 하고 뒤에 해석이 나오잖아요.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끊고 당신을 나무에 달리니 새들이 당신의 고기를 뜯어 먹으리이다” 세상에 떡을 굽는 사람은 새들이 뭘 먹어야 돼요? 떡을 먹어야 되잖아요. 한번 보세요. 흰 떡 세 광주리가 네 머리 위에 있잖아요. 그러면 새들이 와서 머리를 먹습니까, 떡을 먹습니까? 꿈에는 떡을 먹는다고 돼있는데 해석은 누구 떡을 먹는다? 이런 엉터리 같은 해석이 어디 있어요. 일관성이 없잖아요.

참, 세상만사가 불공평해요. 처음부터 좋게 된 해석을 먼저 하는 게 아니고, 나쁜 해석을 뒤에 있으면 두 번째 떡 굽는 관원이 꿈을 이야기 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안 하려 할 겁니다. 앞에 좋으니까 지도 좋은 줄 알고 했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세상만사가 악함이 있어줘야 잘된 놈이 있고, 잘된 놈이 있어야 못된 놈도 안 있습니까? 양과 염소는 같이 있어줘야 돼요. 양이 있어야 염소 값을 하고, 염소 있어야 양 값을 해요. 이게 하나님 뜻입니다.

그렇다면 요셉의 꿈도 결국 요셉 혼자 잘 되는 꿈이 아니고 자기 출세하는 꿈이 아니라 악은 악대로 드러나고, 하나님 의는 의대로 드러나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과 언약 백성이 아닌 사람을 구분해주는 그 중심가에 말씀을 미리 응하게 하기 위해서 앞서 보내기 위해서 요셉이 와 있는 거죠. 아직 요셉이 그걸 몰라요. 모르고 자기 생각하죠. ‘나 좀 어떻게 해 달라.’ 하지만 말씀이 응할 때까지는 계속 잡혀 있어야 됩니다.

그 말씀이 응하는 그게 뭐냐? 또 꿈 꾼 사람 등장해요. 꿈이 벌써 세 번째, 한 번 더 남았어요. 이번 꿈은 누가 꿉니까? 바로가 꿉니다. 바로가 꿔서 해석을 누가해요? 요셉이 하는 걸로 이렇게 시나리오를 짬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모든 악한 자는 결국은 요셉을 통해서 내려온 어떤 법칙, 세상에 대한 섭리, 그 밑에 전부다 굴복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이 바로 세상의 빛입니다.

제가 얼마 전에 글 쓴 것 있지요. 최진실 죽고 난 뒤에 그 날 쓴 글이 있지요. 뭡니까? 돈 없는 세상이 있다. 돈 없이 살 수 있는 세상이 있는 거예요. 거지 나사로가 하늘나라 VIP가 파견 근무하는 겁니다. 그냥 거지로, 환자로. 요셉 같아. 욥 같아. 요셉 같고. 천사들이 받들어 올라갔잖아요. 최진실이 왜 죽었습니까? 사채 때문에 돈 때문에 휘말려서 죽었잖아요. 안재환도 돈 때문에 죽었잖아요. 자살했잖아요. 왜 자살하는가? ‘나’라는 속에 뭐가 들어 있습니까? 돈, 돈, 돈. 내가 이걸 뭐라 했습니까? 돈 송이라. 눈송이는 눈사람이나 만들지. 돈 송이에요.

목사가 월급 적어 보세요. 한이 맺혀 있어요. ‘저 목사는 얼마짜리인데 나는 왜 이것밖에 안 되노.’ 그러니까 그 목사 자체도 돈 송이라. 거지 나사로하고 비교 안 하는 거예요. ‘요셉 이겼다’가 아닙니다. 요셉은 이긴 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이겼지 요셉이 이긴 게 아니에요. 말씀이 응해야 돼. 말씀이 응했고 이겼고. 모든 것은 어디 지배 하에 있다? 세상만사 전부다 하나님 말씀 안에 있어요. 하나님 뜻 안에 있고, 꿈 안에 있어요.

성도는 뭐냐? 꿈의 해석을 해야 됩니다. 간단합니다. 세상만사 성경말씀대로 세상천지는 변해도 내 입에서 나오는 내 말은 그대로 이루리라. 내 말대로 다 이루리라. 천하는 다 없어져도 예수님께서 하신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대로 이루리라. 그런 느긋함이 있어야 됩니다. 하나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두 사람이 했던 꾼 꿈의 해석을 인간적인 지혜로 아무리 해봐도 해석이 같이 나오려면 같이 좋게 나오든지, 나쁘게 나오려면 같이 나쁘게 나올 건데 똑같은 구조인데 하나는 좋게 나오고, 하나는 나쁘게 나온 것은 바로 그 꿈의 해석에 대해서 인간의 선입감은 본인의 해석은 말짱 도루묵이고 소용없다는 거예요.

그야말로 우리의 꿈 해석은 다 개꿈이에요. 우리는 이미 정답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영생을 얻는다.] 그 정답 아래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개꿈이 개꿈인 줄 아는 그런 축복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요셉을 앞서 보낸 것처럼 오늘날 저희를 빛의 사자들로 보냈습니다. 느긋하게 하면서도 안정되게 기죽지 말고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큰 은혜와 사랑을 받고 있는지를 남한테 자랑할 수 있는 예수님의 공로만 나타내는 주님의 증인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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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572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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