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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광주 강의(08. 9. 25) 1강자유게시판디모데전서

광주 강의(08. 9. 25) 1강

이름 : 서경수(IP:116.37.101.23)

광주 강의(08. 9. 26) 41-1

디모데전서 4장 14-15절 봅시다. 신약성경 340페이지.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으로 말미암아 받은 것을 조심 없이 말며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여기 두 가지 중요한 용어가 나옵니다. 상당히 무서운 용어죠? ‘은사’와 ‘예언’입니다.

‘은사’라는 말이 어렵기 때문에 ‘예언’부터 먼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예언이라는 것은 사람의 능력을 초월하는 겁니다. 사람은 내일 일을 모르니까. 예언이란 말의 뜻은, 만약 예언이 먹구름이라고 한다면 먹구름이 저 서쪽에서 동쪽으로 불어오면 여기에 있는 사람들이 아무리 선풍기 켜놓고 부채질을 해도 밀려오는 먹구름을 저지할 수 없지요? 먹구름이 오겠다는데 땅에서 부채질하고 입으로 불어서 먹구름이 다른 곳으로 가겠어요?

먹구름이 몰려오면 땅에서 인간들이 쫓으려 해도 먹구름이 멈출 리 없습니다. 이 먹구름이 바로 ‘예언’입니다.

이 ‘예언’이란 것은, 인간들이 무슨 짓을 하든 상관없이 오는 먹구름을 막을 수 없고, 가는 먹구름을 붙잡을 수 없습니다. 그냥 와서 먹구름에서 빗줄기가 쏟아지는데, 이것은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먹구름이 퍼붓는 빗줄기를 맞아야 돼요.

여기에서 비가 올 때 우산을 준비하는 사람이 있겠지요. 이게 바로 ‘은사’라는 겁니다. 은사는 무엇과 만날 때 은사 값을 하느냐 하면, ‘무엇이든지 예언한 대로 됩니다.’ 라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에게 예언에 합당한 은사를 준비하게 되지요.

예를 들면, 노아가 방주를 만들었지요. 방주 만들 때 비 왔습니까? 전혀 안 왔습니다. 그런데 방주는 무슨 용도냐 하면, 장차 비가 왔을 때 필요하지 비 안 오면 방주는 아무 쓸모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여기에는 노아 식구 외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방주가 언제 효과를 봤습니까? 온 지면이 물로 덮일 때 방주가 그 값을 했단 말이지요. 이처럼 은사라는 것은 장차 올 예언을 대비해서 미리 주어진 어떤 선물입니다. 그런데 이 선물은 지금은 소용없어요. 예언이 예언대로 이뤄질 때 필요하지요. 먹구름이 덮이고 비가 올 때에 우산 준비하면 괜찮습니다. 그런데 우산 준비 없으면 비를 흠뻑 맞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예언을 이야기하면서 그 전에 반드시 은사를 주어서, 은사와 예언이 만나도록 조치를 하는 겁니다. 제가 지금 예언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오늘 주제에 바로 들어가겠습니다. 예언 전체를 이야기하는 것이 주제가 아니고 뭐가 주제냐 하면, 이 예언 안에 어떤 것이 들어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가족 만들기가 이 예언 속에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 말은 예언이 없으면 하나님의 가족이 만들어 진다, 아니다? 안 됩니다. “나는 하나님의 식구 되고 싶어”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됩니다. 하나님의 식구는 예언대로 하나님의 은사가 내려와야 하나님의 식구가 됩니다. 만약 은사가 없으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식구가 안 됩니다.

자, 여기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의 식구가 아닌 것은 결국 사람의 식구죠.

오늘 디모데전서 5장을 살펴 볼 텐데 1-2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비에게 하듯 하며 젊은이를 형제에게 하듯 하고 늙은 여자를 어미에게 하듯 하며 젊은 여자를 일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 하라.”

여기에 보면 늙은이가 나오고, 늙은이는 아비와 어미. 젊은이는 형제와 자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예언 속에 들어 있는 새로운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을 근거로 해서 단호히 이야기합니다. 개인 구원은 있다, 없다? 개인 구원은 없습니다. ‘나 혼자 구원 받았다.’ 이런 것은 성경에 없습니다. ‘저 구원 받고 싶습니다.’ 해도 하나님은 구원 안 해줍니다. 왜 그런가 하면 ‘내가 구원 받겠습니다.’ 라는 것은 하나님의 예언에 해당이 안 돼요.

내가 삼성그룹에 취직하고 싶다고 넣어 줍니까? 안 넣어줍니다. 인사 담당자에게 “이번 달 사원 모집 계획 있습니까?” “없습니다.” “아니, 제가 삼성그룹에 입사하고 싶다니까요.” “아, 계획이 없습니다.”

“나, 죽어서 천당 가고 싶습니다.” “넣어줄 계획 없다.”

성경에 구원의 원리가 뭐냐 하면, 계획 없는 구원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획 없는 구원은 없습니다. 자기 혼자 도 닦고, 혼자 교회 다니고 주께 기도한다고 해서 구원 되는 게 아닙니다. 반드시 채용 계획이 있어야 됩니다. “이번에 T.O 몇 명?” “3명” 그러면 3명이 입사할 수 있습니다. 3명 떨어지면 3명 구원 받습니다. 4명 안 됩니다. 예언 속에 있는 3명만 되는 거예요.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구원은 반듯이 예언된 대로만 됩니다.’ 이게 현재까지의 요점이에요. 구원은 예언된 대로 됩니다. 내가 요청한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구원은 인간들의 희망사항이지 하나님은 그렇게 구원하지 않습니다.

이유가 뭔가? 하나님의 식구는 하나님이 책임지고 만들기 때문에 사람의 뜻은 제거됩니다. 주기도문에 보면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라는 말씀처럼, 우리 뜻은 소용없습니다. 하나님의 예언, 하늘에서 몰려오는 구름, 예언 덩어리 구름, 하나님의 예언에 의해서 하나님의 가족이 구성되지, 내가 하나님의 식구에 편입하고 싶고, 가담하고 싶고, 합류하고 싶다고 해서 하나님이 허용하는 법은 없습니다.

그림으로 그려보겠습니다. 세상의 종교들은 진리가 산꼭대기에 있죠. 그래서 남쪽으로 올라가든 북쪽으로 올라가든 올라가면 돼요. 사람마다 다양성이 있어서 개성에 따라, 성장 과정에 따라, 부모가 누구냐에 따라서 다 달라서 “진리에 이르는 길이 여러 갈래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막상 위에 올라가면 한 지점에 도착하기 때문에 결국은 한 진리에 합류된다.” 이걸 가지고 종교라고 합니다.

이 종교에 놀랍게도 기독교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엉터리입니다. 기독교만 주장하면 안 됩니다. 불교도 있고 다른 종교도 있기에 그렇습니다. 밑에서는 종교 간의 차이가 있지만 정상에 올라가면 진리가 있을 뿐이지 종교 간의 차이는 없지요. “아하, 이게 진리구나. 하나뿐인 진리를 가지고 괜히 싸웠네. 지금 생각하니까 후회스럽다. 우리가 다 한 형제인 것을 모르고 서로 싸웠네.” 이렇게 된다면 지금 서로 다르다고 한 것이 나중에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이게 바로 세상 종교입니다.

좀 더 상세히 말하면, 종교는 어디 위에 있느냐 하면 바로 철학 위에 있습니다. 철학 위에 종교가 있어요. 칸트는 이것을 가지고 ‘경외’라고 했어요. 인간의 이성보다 더 뛰어난 것이 ‘경외’, 이것을 다른 말로 ‘숭고의 미학’이라고 합니다. “숭고는 말로 표현되지 않는다. 인간의 언어로 표현되는 것은 철학이지만 그것보다 더 높은 것은 숭고의 미학인데 그것은 바로 종교만이 할 수 있다.”

신, 영혼, 자유 이 세 가지는 인간의 모든 언어를 초월해서 있다고 했지요. 초월해서 있든 없든 간에 중요한 것이 이거예요. 지금 여기 있으면서 인간이 비록 우주를 지배하지는 못하지만 우주가 넓다는 것을 안다는 그 자체가 인간이 얼마나 대단하냐는 거지요. 인간이 저 하늘의 별을 따지는 못하지만 별이 있다는 것은 인간 외에 누가 알겠습니까? 개가 알겠습니까, 사슴이 알겠습니까? 그것을 안다는 자체는 이미 어느 순간 그 별과 나 사이에는 끊으려야 끊어질 수 없는 그런 사유의 연결고리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연결되어 있다는 말은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연속성은 안 끊어진다는 겁니다. 안 끊어지면 차츰차츰 나아가면 결국 도달하게 된다는 거지요. 어떤 사람은 산 정상으로 올라가다 죽는 사람도 있지만 죽고 난 뒤에도 영혼으로 가면 되니까. 이게 바로 세상의 모든 종굡니다.

그런데 방금 제가 강의한 것은 뭡니까? 이것은 밑에서 위로 올라가는 것 아닙니다. 이것이 시내산인데, 시내산에 누가 오지요. 누가 왔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오시지요. 하나님이 오시면서 모세한테 뭐라고 했습니까? “나는 내 뜻(예언) 대로 내 백성(식구)을 만든다.” 이렇게 여호와께서 말씀대로 백성을 만들면 방향이 위에서 내려오죠? 종교는 밑에서 올라가지요?

방향성이 다르다는 것은, 여호와 종교는 한마디로 해서 ‘폐쇄되었다.’ 뭔가 대화가 안 되고 단절된 거지요. 출애굽기에서는 이것을 ‘선택’이라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시내산에 강림하사 모세를 통해서 말씀하시기를 우리(이스라엘)만 택한 백성이레.”

여기 같은 떡이 있는데, ‘누가 잘났나?’ 싸울 필요 없어요. 어떤 보이지 않는 손이 와서 “나는 까만 이것을 선택했다”고 잡으면 자동적으로 한쪽이 남는데 그것을 개기로 해서 선택 안 당한 쪽과 선택 당한 쪽, 이쪽과 저쪽의 차별화가 생깁니다.

둘이 경쟁을 시켜서 “누가 더 잘하나? 한 번 경쟁해 봐라. 이기는 놈 내가 선택할 게.” 이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하나를 뽑으면 나머지는 자동으로 안 뽑혔다는 이유 때문에 그냥 그 자리에 있지요. 이쪽에 뽑힌 사람은 “누가 나를 뽑았다.”고 이야기 하고, 저쪽 사람들은 “누가 나를 안 뽑아 주더라.” 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그냥 그 자리에 있지요.

결국 차이점은 뭔가 하면, 누가 훌륭하나, 누가 착하나, 누가 공부를 많이 했나? 이런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와서 일방적으로 선택했다는 하나님의 자유, 하나님의 액션에 의해서 갈라지죠.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해 보면, 하나님은 예언대로 일하신다. 그 예언 속에 어떤 내용이 있느냐? 그 중 하나가 하나님의 식구 만들기다. 그 식구 만들기의 의미가 뭐냐? 개인의 요구나 요청에 의해서는 절대로 구원 되는 법은 없다. 우리 요청으로 구원이 안 되다면 하나님의 식구는 없나? 있다. 인간의 요청에 의해 식구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으로 식구가 만들어진다. 하나님이 선택한 경우가 그 전에 있었는가? 있다. 어디에? 출애굽기에서 여호와가 이스라엘에게 찾아오셨는데, 그 방식대로 오늘날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시켜서 선택이란 것을 통해서 하나를 뽑아 세우고 나머지를 배제함으로 말미암아 자동적으로 구분되는 그런 방식을 사용하십니다.

자, 여기서 조금 어려워요. 그러면 당신 주장에 의하면 인간의 요청으로 되지는 않고 하나님의 선택으로만 된다고 했는데, 그러면 어떻게 하면 선택 받을 수 있는가 하는 그 문제가 남을 것 아닌가? 이게 어려워요.

왜냐하면 ‘내가 여호와를 선택하면 될 것 아닌가? 하나님이 날 선택하기 이전에 내가 하나님을 선택하면 되지 않겠느냐?’ 김을수 집사님 답변해 보세요. 하나님이 날 선택하기 전에 내가 여호와를 선택하면 구원 받지 않습니까? 이게 성경에서 굉장히 어려운 문제에요.

제 이론대로, 여호와께서 선택해서 자기 백성 만들면, 이 방법을 내가 알잖아요. 그러면 내가 이 방법대로 ‘하나님이여, 저를 선택해 주세요. 저도 하나님 백성 되고 싶습니다.’ 라고 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이게 안 돼요. 왜 안 되느냐 하면, 여호와께서 선택한 사람은 없어요. 이게 문제라. 여호와께서 선택한 사람이 없다니까요.

최 장로님 하고 저하고 있는데, 여호와께서 최 장로님을 선택했다고 하면, 나는 옆에서 봤기 때문에 “‘최 장로님 선택하는데 나도 선택해 주세요.’ 라고 요청하면 나도 선택 받겠지.” 라고 하는데, 주님께서 최 장로님을 선택 안 했어요. 여호와께서 선택한 것은 최 장로님이신데, 최 장로님은 본인이 본인인줄 알고 있다니까. 이 말 굉장히 어렵지요? 하나님께서 오 목사님을 선택했는데 오 목사님은 착각하기를 오 목사님 본인인줄 안다니까.

하나님 식구로서 하나님은 미지의 인물(점선으로 합시다)을 선택했는데, 아브라함과 사라는 자기 자식을 선택한 줄로 알았어요. 하나님은 누구도 선택하지 않아요. 하나님은 선택할 사람을 본인이 만들어 놓고 선택해요. 만들어놓고 선택하는데 아브라함, 사라는 뭐냐? ‘이왕 있는 아이니까 선택해 주세요.’ 이렇게 나와요. 오 목사님 경우를 예로 들면 “하나님, 저 오용익입니다. 저는 이미 태어났으니까 저를 선택해서 천당 넣어 주세요.” 하나님은 이미 생긴 인간은 선택 안 해요. 없는 오용익을 새로 만들어서 오용익 되게 해서 되어진 오용익을 선택하지, 있는 오용익을 선택해서 구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마다 금요 철야기도 하면서 “주여, 선택해 주세요. 구원 받기 원합니다.” 이거 다 소용없는 짓입니다. “왜 하나님 저를 무시하십니까? 저 사람은 구원하고 저는 왜 버리십니까?” 하나님 뭐라고 하십니까? “나는 다 버렸다. 너희들이 구원 받았다고 하는 그 사람도 나는 버렸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버려요. 도무지 선택 받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로서는 선택해 달라고 요청할 수 있는 어떤 근거도 박탈돼요. 그러니까 “너는 선택 안 됐지? 나는 선택 됐다.”고 촐랑대는 것은 전부 거짓말입니다.

‘그러면 목사님 이론에 의하면 아무도 구원 받을 사람 없고, 아무도 하나님 식구 없고, 아무도 하나님 백성 안 되네요?’ 바로 그것입니다. 아무도 안 되고, 아무도 하나님 백성 없습니다. 그런데 천국 가면 하나님 백성 있어요. 아무도 하나님 백성 없는데 왜 천국에는 백성이 있습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솜씨입니다.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데서 살리는 이것이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없는데서 있게 하는 솜씨를 발휘합니다. 그 능력이 바로 예언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예언이 왔다. 오직 선택된 자만 구원한다. 개인 자격으로는 안 돼요. 구원은 식구로 합니다. 그런데 그 선택된 자는 이 땅에 없다. 없는데 어떻게 있게 했는가? 없다고 여기는 곳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을 집어넣어서 다시 있게 만드는 그 사람만 하나님께서 선택하는 방식으로 빼간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것을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지요. 헌 피조물은 구원 못 받습니다. 새 피조물만 구원 받습니다.

제가 잘 못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농사를 짓는데 이런 방법이 있다고 해요. 농부가 원하는 열매를 못 얻으니까 다른 식물 가지를 잠시 이용(접붙이기)해서 결실을 하고, 그 가지는 얻는 게 하나도 없고 나중에 열매 맺으니까 농부가 몽땅 가져가고, 일종의 ‘씨받이’지요. 씨받이는 아이만 낳고 아이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지 못하고 떠나가는 거예요. 돈 몇 푼 받고.

자기가 애 낳았는데 전혀 자기 아이가 아닌 것. 그것이 바로 이삭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낳기 위해서 누구 배를 이용했습니까? 사라의 배를 이용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 이 부부는 하나님의 약속 “네 씨가 하나님의 식구가 될 것이다.”라고 하니까 착각을 했어요. ‘아, 우리 부부에게서 날 자식이 하늘의 별 같이, 바다의 모래같이 많아서 그들이 구원 받는 백성이 되는구나. 하나님 참 감사합니다.’ 이렇게 생각했는데, 막상 하나님이 원하는 자식은 이들 부부의 생각은 깡그리 무시하시고, 현재 있는 아이가 이스마엘이죠. 이 이스마엘은 너희들이 생각했던 그런 자식이기에 아니고 없는 자식 만들어 내죠.

없는 자식 만들어 내려고 하면 이 사라는 임신할 수 없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라의 태가 죽었다고 했습니다. 태가 죽어서 ‘아기 끝, 더 이상 아기 없음, 우리 능력으로는 아기 못 낳음.’ 이것이 확정된 상황입니다.

그런데 죽은 태에 하나님의 씨가 들어가지요. 하나님의 예언, 다른 말로 하나님의 약속이 들어가면 태가 죽었는데 배가 불러와요. 그래서 태어난 자식이 누구입니까? 이삭이죠. 이런 이삭의 계열, 이런 식으로 태어나야 하나님의 식구가 되는 겁니다.

왜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자기 백성을 만드느냐 하면, 아까 그림 다시 그리겠습니다. 산이 두 개 있는데 이쪽 산은 인간이 벌떼같이 기어오르는 산입니다. 성실한 사람은 많이 올라 간 상태고 게으른 사람은 조금 올라가 있고, 그런데 저쪽은 그냥 내려와 버려요. 원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내려올 때 이스라엘 이 사람들도 여기 있는 이 사람들과 사고방식이 동일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도 사고방식이 틀립니까? 똑 같아요. 같은 몸을 가지고 있기에 몸을 유지하기 위한 생활방식이나 사고방식이 똑 같아요.

사고방식이 어디서 나옵니까? 사고방식은 자기 신체 보존용입니다. 이것이 물리학에서는 에너지인데, 세포는 탄수화물과 단백질이 올라가야 에너지가 되거든요. 자기 몸 보존을 위한 수단과 수법은 그 사람이 복음을 알든 종교인이든 관계없이, 동일한 몸의 생리를 보여준다면 그 몸을 부지하고 지탱하는 사고방식도 똑같은 사고방식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배부를 때 종교가 있지, 배가 불러야 이웃에 구제하고 사랑을 베풀지 배고프면 못합니다. 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고요? 자기가 배고파 쓰러질 지경이 되면 남 생각 못합니다. 인간은 자기를 탈피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자아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남을 사랑한다고 해도 자기가 확장된 것, 풍선처럼 커진 것일 뿐이라고 제가 주일 설교시간에 이야기했어요. 인간은 아무리 사랑을 한다고 해도 자기가 자기 덩어리로 다가가는 것이지 자기를 포기하고 남을 위하는 그런 인간은 없어요. 인간은 자기 자신을 못 벗어나요.

사람이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삼키는 행위입니다. “너는 내거야.” 자기 소유로 만드는 것입니다.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 줄 알아?” 이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내가 너를 삼키기 위해서 투자한 에너지가 얼마나 많은 줄 알아?’ 라는 뜻입니다.

들뢰즈가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사랑이란 말보다 더 큰 거짓말은 없다.” [프루스트와 기호들] 이란 책이 보면 나와요. 사람은 거짓말을 감추는 방법 중 하나로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잠자리에서 “나는 너를 사랑한다.” 사랑이란 말이 나왔다는 것은 “이제는 너 사랑하기도 힘들어 죽겠다.”는 소리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이란 말은 감추기 위한 마무리 용도이니까. “내가 너를 떠난다 할지라도 날 원망하지 마라. 나는 끝까지 너를 사랑했다.” 뭐 이런 의미가 됩니다. 아주 비열한 짓이지요.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자기를 벗어날 수 없어요. 그 이유가 뭐냐? 몸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에요. 몸은 200조 개의 세포가 있고, 이 세포가 밥 달라고 난리를 쳐요. 자기 몸이 밥 달라고 난리를 치는데, 자기 몸부터 밥 줘야지 어디 남을 먼저 생각합니까? 성경공부도 밥 먹고 해야지. 밥 안 먹으면 힘이 없어서 못 합니다.

문제는 그것이 신체만 그런 것이 아니고 신체가 만들어 낸 활성화 된 에너지의 모든 정신세계. 인간의 정신세계는 그 기초가 얼마나 내 몸이 편하냐? 내 몸이 편하면 기분 좋습니다. 술 한 잔 마시고 기분 좋으면 팁 막 뿌립니다.

인간의 모든 진리가 뭐냐? 내 몸이 편하면 그게 곧 진리입니다. 어떤 학자의 연구 결과 몸이 편안한 상태를 위해서는 기온이 섭씨 18도에 시원한 바람이 불고, 그리고 배는 적당히 부를 때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고 합니다. 이런 환경에는 휘파람이 절로 나와요. 그러다가 치통이 오면 행복 다 깨져요.

행복이란 뭐냐? 내 몸의 컨디션이 최적의 상태일 때 이것을 두자로 ‘행복’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옆에서 누가 잔소리를 한다. 그러면 내 몸의 편함의 균형이 깨져요. 그럴 때 버럭 화를 내지요. “내 행복을 왜 깨는 거야.” 라는 반발입니다.

그런데 저쪽에서 잔소리 하는 이유는, 자기 행복을 얻기 위해서 화풀이를 해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 화풀이 하는 상대와 그 화풀이를 듣고 화나는 내가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해야 됩니다. 여기서 몸이 편한 것을 상상계라고 하고, 타협하는 것을 상징계라고 합니다. 그래서 상징계는 반드시 법과 질서가 있습니다. 법은 타협책입니다. “너도 좀 양보하고, 나도 좀 양보하자.” 이것이 법입니다. 법은 진리가 아닙니다. 서로 양보하는 거예요. 그래서 법은 항상 유동성이 있어요.

신자냐, 불신자냐 하는 것과 상관없이 모든 인간의 사고방식은 다 이런 식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 중심이에요. 어느 인간도 자기중심 아닌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자기중심에서 변해서 하나님 중심이 된다. 이렇게 해서 구원 받는 인간은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중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죠.

논리를 따라가 보세요. ‘나는 내 중심이다. 내 중심에서 벗어났다. 나는 남을 위해 산다.’ 라고 했을 때, 이런 인간. ‘전에는 나밖에 몰랐다가 내 중심에서 벗어난 인간.’ 그 인간 누굽니까? 역시 나지요. 그러니까 나에서 못 벗어났잖아요? 논리가 그렇잖아요.

“나는 나 중심에서 벗어나서 남을 위해 산다.”고 하는 그 훌륭한 나. 그는 누구입니까? 역시 나지요. 그럴 때 다른 사람이 와서 “당신은 왜 이웃을 위해 안살아?” 라고 하면, “나는 나를 벗어났어. 남을 위해 사는 나를 보고도 모르나?” 라고 화를 내지요. 화낸다는 자체가 뭡니까? 이미 더 큰 나로서 철조망을 친 거예요.

“나는 날 위해 살지 않고 남을 위해 산다.”고 했는데, 남들이 약을 올리니까 갑자기 순간적으로 화가 났단 말이지요. 화를 냈으면 인간은 반드시 반성을 합니다. 그렇게 반성하고 난 뒤의 그는 누구입니까? 역시 나지요. 무한소급. 이런 반성을 하면서 생긴 나는 건사한 나. 또 나지요. 거울을 10개 보세요. 거울 속에 거울이 들어있지요. 얼마만큼 들어있습니까? 거울의 숫자만큼 들어 있지요. 그 거울에서 우리가 못 빠져 나오잖아요.

따라서 절대로 나에게서 벗어날 생각은 하지 마세요. 나에게서 벗어나서 구원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반성이 아니라 회개를 해도 소용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있는 그대로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식구, 구원 받은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있는 그대로 구원 받아요. 나로부터 벗어나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그냥 생겨먹은 대로, 부모로부터 태어난 그대로, 욕망 덩어리인 그대로 있는데, 여기에 하나님의 예언이 덮치지요. 곡성에 살면 곡성에 사는 그대로, 대구에 살면 대구에 사는 그대로 덮쳐버리면, 구름이 덮쳐오면 빗방울이 떨어지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예언대로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 받은 사람의 특징은 나를 못 벗어나지만, 나 외곽에 하나님의 예언이 주어짐을 아는 것, 이것을 믿음이라 하고 믿음으로 구원 받습니다. 하나님의 식구들의 특징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더러워서 이야기 못합니다. 왜냐하면 내 행위를 이야기하면 믿음으로 구원 받은 것이 아니고, 행함으로 구원받으려고 시도하는 사람이죠. 이런 방식은 산 위를 내가 올라가서 구원 받으려는 옛날 방식입니다. 이것이 아니고 위에서 내려올 때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뭘 줬습니까? 말씀을 주셨지요. 주어진 말씀은 우리보고 지키라는 것이 아니고, ‘네가 지키든 안 지키든 간에 이 말씀은 하등의 자질이 없다.’ 말씀 성취에 네가 순종을 10개 했느냐, 20개 했느냐 상관없이 말씀은 말씀 그대로 될 뿐입니다.

우리가 방해한다고 해서 말씀이 우리에게 안 오는 것이 아닙니다. 쉽게 말하면, 내가 예수 안 믿겠다고 발악을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나는 이제 예수 안 믿겠습니다. 교회 안 가겠습니다.” 그러면 주님은, “어쩌라고? 언제 네가 네 열심 때문에 구원 받았나?” 이게 바로 ‘자유’입니다.

“나는 이제 마음껏 타락할거야.” 마음껏 타락해 보세요. 마음껏 타락에서 지옥 갈 것 같으면 예초에 구원하지도 않았습니다. 기쁜 소식 아닙니까? 내가 마음껏 타락해서 지옥 갈 것 같으면 그 사람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가족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가족은 예언대로 되지 내 행동 여하에 따라서 취소되는 법은 없습니다.

예수님 옆에서 십자가에 달린 한 사람은 살인 강도였습니다. 그래서 사형 당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말씀에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했어요. 이런 말씀 듣고 강도가 뭘 생각했겠습니까? ‘내가 사람을 몇 명 죽었지?’ 이런 생각 하겠어요? ‘아하, 구원이란 것은 내가 강도짓 하나 안 하나 상관없이 예수님의 말씀 성취 대가로, 그 공로로, 그 은혜로, 그 사랑으로 내가 구원 받았구나.’ 하는 것을 비로소 알지요. 그게 바로 하나님의 식구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렇게 된 사람이 자기만 그렇게 된 것이 아니고 자기와 똑같이 주님의 사랑으로 구원 받는 사람이 있단 말이지요. 그러니까 그들끼리 모였을 때 그들이 뭘 자랑하겠습니까? 자신의 행위를 자랑하겠습니까? 아니지요. “너나 나나 똑같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식구입니다.

이제 본문 이해하시겠지요?

‘그러면 그 믿음은 어디서 오는 겁니까?’ 라고 물으면,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선물로 받게 된 믿음, 소망, 사랑으로 인하여, 이것은 내 행동을 믿는 것이 아니고 내 외곽을 믿지요.

믿음, 소망, 사랑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예언 속에 포함된 선물이죠. 그래서 이 선물이 오게 되면 무엇을 느끼느냐 하면, ‘아하, 내가 구원받고 싶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구원시켜 주셔서 구원받았기 때문에 나처럼 구원받기 싫어도 이미 하나님 백성 삼은 사람이 있다.’

만약, A와 B란 사람이 그렇다면 A와 B가 만날 때 같은 식구인지 어떻게 압니까? 이것이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이것만 하고 첫째시간을 마치겠습니다. A도 B도 구원 받았다면, 같이 구원받은 사람의 공통점이 있을 건데, 뭔가 통하는 것이 있을 것인데 그것이 뭐냔 말이지요.

이것이 5장 1절에 나옵니다.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비에게 하듯 하며 젊은이를 형제에게 하듯 하고” 이게 뭐냐 하면, 그 사람은 육신적으로 집에 아버지가 있지요. 있는데, 교회 가니까 늙은 남자가 있단 말이지요. 그런데 그 사람은 분명히 아버지가 아니에요. 그런데 아비같이 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집에 있는 식구 따로 있고 교회에 식구가 있을 때, 교회 왔다. 이것이 아니고 우리는 한 가족이 모였네. 라는 인식을 A도 가지고 B도 가질 때 그 사람은 가족으로서 서로 대화가 되는 거예요.

대화가 되는데, 문제는 분명히 나는 가족으로 생각했는데 최 집사님은 ‘왜 날 무시합니까?’ 이렇게 나오더란 말이지요. ‘아니, 최 집사님. 나는 집사님을 무시한 적 없고 집사님은 기도할 때 너무 짧게 해서 다음에 기도할 때는 좀 길게 하라고 했는데--’ “그래, 당신은 기도 길게 할 수 있다고 자랑하나? 나는 배운 게 없어서 짧게 한다. 어쩔래?” “아니, 그런 뜻이 아니고, 우리는 한 식구란 점에서 짧게 하나 길게 하나 상관없이 구원받은 것에 대해 감사하니까 좀 더 길게 했으면 하고 한 식구라는 점에서 그런 말씀 드렸습니다.” “당신은 나를 식구로 보지만 나는 당신에 대해 잘 몰라.” 이렇게 나왔을 때는 한쪽은 자아를 주장하고 “왜 날 무시하나?” 이쪽은 주님의 가족이란 의미에서 하니까 둘이 같이 교회에서 만났는데 서로 어긋나는 거예요.

“왜 날 무시하나?” 이것은 ‘왜 나의 존재 가치를 무시하는가?’ 라는 말이지요. 이런 말은, 하나님의 식구가 아니고 일반 세상 모임, 낚시회, 볼링 동호회 이런 곳에서나 할 말이지요.

“기도 좀 길게 하세요.” 라고 했다면, “내가 말주변이 없어서 짧게 했는데, 다음에는 좀 더 길게 해 볼게요.” 이렇게 웃으면서 넘기면 될 일을 “왜 날 무시하나?” 라고 갑자기 자아가 나왔단 말이지요. 그렇게 나오면 상대가 멀쑥하게 되지요. 이럴 경우에는 그 늙은이를 아비 대하듯 못하지요. 아, 저 사람은 옆집 아저씨지 우리 식구가 아니네.

교회에서는 한 식구처럼 편하게 대하세요. 그런데 편하게 대하는 그것이 화근이 되어서 “왜, 날 무시하나?”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갑자기 분위기가 썰렁해지면서 ‘내가 지금 어디 와 있지? 내가 하나님의 집에 왔나, 아니면 세상 계모임에 와 있나?’ 혼동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 결론이 뭐냐 하면, 디모데전서 5장 1절에서 3절까지의 말씀은, 교회 된 사람들은 교회 되게 하라는 말이 아니고, 이것대로 하게 되면 가짜를 쏙쏙 뽑아낼 수 있는 기준입니다. 이런 뜻입니다. 구원도 못 받은 주제에 식구인 냥 섞여있는 것을 뽑아낼 수 있는 하나의 방편이 되는 겁니다. 교인 한 사람 줄었다고 너무 아쉬워하지 마세요.

이걸 들통 나게 함으로 말미암아 나머지 사람들로 하여금 “아하, 하나님의 식구는 ‘왜 날 무시하나?’ 그런 소리 하는 것이 아니고 무시하든 말든 구원은 주님께 달려 있다.” 라는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고백한 사람 중에 2년 후에 또 삐쳐서 “왜 날 무시하나?” 그렇게 나오면 그 사람 또 빠져나갑니다. 그러니까 인위적으로 교회로 사람을 모으려는 노력은 하지 마시고, 평소 하는 대로 ‘나는 당신을 내 아버지로 보고, 나이 많은 여자를 어머니로 여기고, 같은 연배에 있는 사람을 형제, 자매로 보겠습니다.’

“오늘 전어무침 맛도 없고, 그것도 손님 대접이라고” 이렇게 해도, 조 집사님은 “전어 회 못 무쳐도 나 구원 받았습니다.” 그런 식으로 해서 ‘자유’ 이것을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첫째시간 마치겠습니다.

(2008. 10. 7. 10:26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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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8,422건 중 306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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