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10월 3일 창세기 39장
울산 10월 3일 창세기 3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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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1003 창세기 3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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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10-12 10:52
울산081003a창세기39장a
20081003a 울산강의-창세기 39장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창세기 39장 이야기할 차례입니다. 39장인데 하기 전에 한번 봤습니다만 시편 105편을 다시 한번 봅시다. 시편 105편 17절에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 그래 돼있지요.
여기 방금 읽었던 이 대목을 그림으로 그리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한 사람을 앞서 보냈습니다. 이 말 자체가 좀 난해하지요. 여기 하나님이 계신데 하나님이 한 사람을 앞서 보냈다. 앞서 보낸 사람이 쭉 일을 하면서 일한 모든 것을 총 모아보면, 앞서 간 이 사람이 요셉이죠. 물론 요셉입니다. 앞서 간 사람이 하는 일을 집합해서 모아보면 이것이 바로 말씀의 내용이 되겠지요.
앞서 보냈다니까 한 사람을 앞서 보냈으니까 뒤 따라 오는 사람도 있겠다. 뒤 따라 오는 사람은 한 사람이 아니고 여러 사람이 되겠지요. 그 여러 사람이, 한 사람은 앞서 보냈으니까 앞서 보내서 말씀을 이뤘으니까 그 여러 사람은 가는 코스 정해져있겠지요. 앞서 보내서 했는데 그것이 말씀대로 되니까. 뒤 따라 가는 사람은 닦아놓은 그 하나님 말씀대로 가겠지요.
그렇다면 앞서 간 사람을 하나님이 보냈으니까 이 말은 뭐냐? 뒤 따라 가는 여러 사람도 누가 보냈느냐? 하나님이 보내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것은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확 달려들어서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한 사람을 앞서 보내놓고 그 사람이 이뤄놓은 하나님의 모든 일들의 집합이 말씀성취니까, 이 말씀성취에 뒤 따라가는 사람이 여기에 참여하는 식으로 그렇게 하나님께서 전체 구원의 약속을 이루시는 겁니다. 간단하죠.
간단한데 뭐가 어려우냐 하면, 한 사람을 앞서 보냈는데 그가 말씀을 성취했다고 돼 있잖아요. 시편 105편 몇 절이죠? 방금 읽었던 17절이죠. 그런데 18절에 보면 뭐라 돼 있느냐 하면,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니라”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려면 여기 어떤 요소가 들어가느냐 하면, 발에 착고가 차이고, 그 다음에 또 뭐가 있죠? 몸이, 다른데 보면 혼이라 돼있지요. 몸 또는 혼이 쇠사슬에 매여야. 발을 착고에 차하고 몸과 혼은 쇠사슬에 매여주는 형식으로 그러한 내용을 가지고 말씀은 이뤄지는 거예요.
다시 할게요.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앞서 보낸다는 것은 뒤 따라 그 길을 가야 될 사람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한 사람을 앞서 보냈습니다. 그 한 사람을 앞서 보내서 하는 모든 일을 다 모아놓은 그것이 ‘말씀에 응하게 하리라’ 말씀성취죠. 말씀성취의 방법이 발이 착고에 차이고 혼과 몸이 쇠사슬에 매여야만 말씀이 성취된다는 거예요. 이것이 하나님께서 말씀성취의 방식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비해서 인간들이 신을 생각하고 인간들이 종교를 생각하는 것은 전혀 발에 착고 차이고 몸에 쇠사슬, 이런 방식은 전혀 아니에요. 빌면 빈대로 복 오고, 열심히 하면 축복 주는 그것이 뭔가 발에 착고 차이고 몸이 상하는 그런 분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보다 앞서 보내신 사람이고, 이게 없으면 메시아가 아니죠. 우리의 구원자가 될 수 없는 거예요.
그런데 세상 종교의 특징이 뭐냐 하면, 구원자가 필요 없어요. 누가 구원자냐 하면, 구원받으려는 자기가 구원자가 돼버려요. 본인이 자기 구원자가 되고, 본인이 구원받는 사람이 돼버리고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혼자 다해버려요. 자기가 자기를 구원하는 거죠.
이것은 오늘날 교회가 귀 담아 들어야 됩니다. 처음에 예수 이야기하다가 나중에 십 년, 이십 년 예수 믿고 이러면 누가 구원받느냐? 자기가 자기를 구원해요. 메시아고 뭐고 없어요. 지 열심 따라 복 받고 열심 따라 천당 가는 기라. 이런 엉터리 같은 교회가 어디 있습니까? 대부분 다 그렇지만.
그러나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자기가 자기를 구원하는 구원자가 아닙니다. ‘나, 교회 왔다. 나, 구원해도.’ 이런 구원은 없습니다. 구원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이 완성될 때 구원인데, 그 완성되는 걸 가지고 신약에선 ‘의’라 하고, 구약에선 뭐냐 하면, ‘거룩’이라 하죠.
하나님의 의와 거룩은 우리 인간이 스스로 구원자 되어서 자기가 의를 이루고, 거룩을 이루어서 이룬 당사자만 천당 가고. 이런 참된 복음이란 게 없어요. 다 거짓된 복음이고, 진짜 복음은 하나님께서 우리보다 앞서 보낸 사람이 있고, 뒤에 있는 사람은 앞서 가신 그 길을 참여하게 도와줌으로 말미암아 이 한 사람의 공로를 항상 유지하면서, 그걸 어려운 말로 ‘예수 안’이라 하지요. 한 사람의 공로, 예수님의 공로를 유지하면서 예수님 하신 것에 풀장에 뛰어들 듯이 풍덩 뛰어들어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되지요. 이거는 교회 처음 나올 때나 오십 년을 믿을 때나 이거는 한결 같아야 돼요.
그래서 지금 창세가 39장을 하려고 하는데 방금 우리가 본 것은 시편 105편 17절이고. 39장 들어가기 전에 진짜 하나님은 바로 이런 구조로 하는데 여기서 어려운 게 뭐냐 하면, 어떻게 말씀성취할 대 우리 자신의 열심히 구원하면 되는데 왜 발에 착고가 차이고 몸에 쇠사슬을 매야 되느냐? 이 대목을 창세기 39장 요셉을 통해서 알아야 됩니다. 우리가.
어떻게 발에 착고 차이고 몸에 쇠사슬 하는지 왜 이렇게 돼야 되는 그 원인을 찾아내야 되죠. 이 앞서 가신 분이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느냐 하면, 이 분은 죄가 없어요. 죄가 없는 분이 발에 착고 차이고 몸에 쇠사슬 매였다는 것은, 죄가 없는 의인이죠. 의인의 주변의 상황이 이게 뭐냐 하면, 악하죠. 앞서 보낸 사람은 의롭기 때문에 의인이 가는 곳마다 악함이 자기 본색을 드러내는 그런 계기가 돼야 돼요.
만약에 의인이 앞서 안 보냈으면 악은 자기가 악인 줄 모르고 있어요. 의인이 떴다 하니까 악이 악에 받쳐서 이 사람을 착고 차여서 몸에 쇠사슬 매이게 하는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우리 인천에 계시는 구득영 목사님 글에 보면 이런 글이 있어요. “인간이 제일 잘 할 수 있는 게 하나님께 반항하는 것이다.” 참 잘 지적한 거예요. 그리고 어떤 분이 댓글 가운데 댓길 같은 댓글이 있어요. 뭐냐 하면, “오늘날 교회 모습들이 예수 믿기 싫은데 잘됐다” 하는. 조현창 성도님이 쓴. 얼마나 인간의 심리를 잘. 예수 믿기 싫은데 잘~ 됐네. 안 믿으면 되겠네. 무슨 핑계대고.
바로 그러한 인간성, 아까 구득영 목사님은 인간은 신에게 반항한다. 이게 가짜 신들은 안 드러나요. ‘신이시여, 받으소서. 조상신이여, 받으소서.’ 하기 때문에 반항한다든지 이런 게 없어요. 그런데 진짜 하나님이 보낸 자가 오게 되면, 우리 속에 있던 하나님께 반발하고 싶고, 대들고 싶고, 신에 대해서 격분하는 그런 요소를 끄집어내게 돼있어요.
여러분 기분 좋은데 자살하는 사람 봤습니까? 없어요. 속에 격분이 일어나서 술 먹고 죽고 하지요. 그럴 때 우리는 누가 죽었다, 어떤 사람이 죽었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우리는 왜 격분하느냐, 왜 분노를 갖게 되었느냐? 그 점을 우리가 파악을 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그런 분노가 그 사람이 성질이 더러워서 아니라 누구나 그런 상황에 맞닥뜨리면 그런 분노와 격분이 나올 수가 있기 때문에.
그런데 그런 분노와 격분이 나오는 걸 인하여 누가 피해를 보고 누가 발에 착고가 차이고 누가 몸에 쇠사슬에 상하느냐 하면, 바로 진짜 하나님이 보내신 의인되시는 분이 우리의 더러운 성질 때문에 피해를 입는다는 사실을 이제 우리가 요셉을 통해서 알아야 됩니다.
창세기 39장에 보면,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시위대장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그를 사니라”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 뒤에 2절 말씀에 뭐라 돼있어요? 하나님이 누구와 함께 있습니까? ‘요셉과 함께’ 있어요. 야, 이 대목이 바로 오늘날 한국교인들이 정말 오해를 안 했으면 좋겠어.
‘하나님이 함께 있으매 복이 넘친다.’ 그 말은 맞아요. 그 복이 어떤 복을 두고 하는 거냐 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말씀이 응한다는 것을 본인이 알게 되는 복, ‘아, 하나님께서 나에게 뭔가 말씀대로 되게 하시는구나’라는 것을 아는 복, 그걸 깨닫고 감사하는 복, 그 복이 그 복인데 그게 아니고 말씀을 관계없이 자기가 평소에 기대했던 게 있잖아요.
‘기대’가 이게 바로 죄입니다. 모든 분노와 격분은 기대하는데서 나와요. ‘이랬으면 좋겠다. 이래 되었으면 좋겠다’라고 기대하는 것, 이게 전부다 그게 나에게 숨겨진 죄가 탁탁 튀어나오는 계기가 됩니다. 아하, 이거. 대충 됐습니다. 기대가 죄에요. 뭔가 기대한다는 게 죄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말씀대로 인도하는데 우리는 내 뜻이 기대로 나와서 나를 이걸로 끌고 가려고 하고, 주님께서는 말씀대로 끌고 가려 하는 거예요.
어떤 분이 저한테 질문하기를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사람 어떻게 돼요. 성경 보면 나오잖아요. 염소와 양이 갈라지고. 한쪽은 영원한 생명에, 한쪽은 영벌에. 뭐가 어려워요? 뭐가 어렵습니까? 사람은 어떻게? 말씀대로 되는 거예요. 사람은 잠시 피어나는 자기가 기대했던 것은 풀의 꽃 같아서 대단한 것 같지만 풀도 말라지면 덩달아 자랑하던 꽃도 같이 시들어지거든요. 하지만 영원히 가는 것은 뭐냐? 영원히 남는 것은 ‘하나님 말씀이다’ 했습니다. 영원히 있는 것은.
이 기대가 뭐냐? 누구 기대냐 하면, 자기만의 기대거든요. 자기만의 기대 아닙니까? 그러나 성경에서 하는 말씀은 너의 기대가 아니고, 그리스도 몸으로써 주는 기대가 되는 겁니다. 이거는 울산 등대교회 강의 두 번째 시간에 했지요. 문어 이야기합니까? 문어 들어와서 우리 것 들어내 버리고 우리 속에 자신의 뜻만 집어넣어요.
사명 없는 성도는 없습니다. 그 사명이 뭐냐 하면, 말씀대로 되는 사명입니다. 저는 안재환 씨나 최진실 씨나 성도라 하거든요. 무슨 성도의 사명이 자살입니까? 자살이 무슨 성도의 사명입니까? 난 이해가 안 돼. 성도의 사명이 무슨 자살입니까?
사람은 사명 없이는 못 살아요. 사료만 먹고 사는 게 아닙니다. 떡으로 사는 게 아니고 말씀으로 산다는 말이 뭐냐? 다른 말로 하면 말씀이 허락한 사명,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사명이 있어요. 말씀대로 살아가라. 말씀을 보여줘라. 다른 말로 하면 너와 함께 있는 하나님을 보여줘라. 노아가 하나님과 뭐 했습니까? 동행했지요. 전부다 성도의 공통점이 뭐냐? 동행한다는 거예요. 모세가 누구와 동행했습니까? 하나님과 동행했을 뿐더러 모세뿐만 아니고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과 동행했어요.
하나님과 동행할 때는 자기만의 기대, 자기만의 포부 이걸 증거하기 위해서 동행하는 게 아닙니다. 그걸 꺾어버리고 그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 말씀을 드러내는 그런 목표로 하나님은 동행하는 거예요. 동행하는 목적이 다 알아야 됩니다.
어린애들, 여섯 살 먹은 다섯 살 먹은 애하고 시장 가면 애가 좋다 하죠. 그거는 지 기대대로 물건 살 줄 알지만 엄마는 그게 아니죠. 엄마는 생각한대로 물건 사지, 자기 기대대로 안 해주지요.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린애라면 세상물정도 모르는 우리를 주님께서 동행하는 것은 이 못나고 못난 우리를 가지고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그것도 완성된, 완료돼버린 더 이상 보탤 것도 없는 완전한 구원의 말씀의 성취를 위해서 못난 우리를 데리고 다니십니다.
다닐 때 우리는 거기서 뭘 발견하느냐? ‘아하, 내 대신 누가 착고 차이고, 내 대신 이 못된 성질 때문에 누가 쇠사슬에 매였구나.’ ‘참 죄송하고 미안스럽다’ 하는 그걸 느끼게 하지요.
요셉이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요셉이 의인이라면, 의인을 투입한 것은 앞서 보낸 것은 그 주변이 뭐하다? 악하다. 요셉과 악한 세계 속에서 인간 같으면 못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악한 세대에서 바로 요셉과 관련된 자기 가족들, 앞서 보냈으니까 뒤에 남아 있는 언약백성들이 악한 세대에서 어떻게 구원되는가 보라 이것이죠.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일어안 일을 동일하게 너희에게 일으켜서 하나님께서 구원해내는 겁니다.
구원할 때 그냥 ‘고맙습니다’ 구원하는 게 아니고, 이런 구원관점을 통해서 앞서 간 요셉이 우리들 때문에 얼마나 직싸게 고생했는가를 완전히 절감하도록 깊이 느끼도록 하는 겁니다. 요셉을 팔아먹은 사람들이 누굽니까? 형들이죠. 결국 형들과 그리고 이 애굽의 사람들과 같은 레벨의 사람이죠. 같은 레벨의 사람인데 요셉 때문에 요셉과 관련 있다는 이유 때문에 형들과 아버지, 엄마는 언약으로 인하여 구원받고, 여기 있는 애굽 사람들은 그냥 좋은 일 하다가 요셉 국무총리 만들어주고, 지는 지 할 일 하고 끝나버리고 지는 저주 받고 그렇습니다. 세상이 그래 흘러가요.
그래서 우리가 오늘 이 시간에 요셉에 대해서 공부할 건데 요셉만 보지 마시고 요셉 주변이 얼마나 악하냐? 악이 뭐냐? 이걸 요셉을 통해서 새로 규명을 해줘야 됩니다. 오늘 39장 들어가기 전에 일러둘 게 있어요.
일러둘 게 뭐냐 하면,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님은 고유명사의 하나님이 있고, 추상명사의 하나님이 있어요. 고유명사라 하는 것은 이름이 있는 하나님이 고유명사죠. 이거는 어떤 존재있다는 하나님. 추상명사라 하는 것은 뭐 전능하시고 자비로운데 대자연 자체가 신이 되어서 뚜렷이 누구 하나가 등장하지 않는 하나님.
그래서 보통 사람은 조물주 하나님, 추상명사죠. 일종에. 그런데 요셉에서는 아까 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앞서 요셉을 보냈잖아요. 제가 이 대목이 어렵다는 게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누굴 보냈다? 앞서 어떤 인물을 보냈다는 말은 결국은 그 인물이 뭘 보여주느냐 하면, 그 인물과 같은 어떤 어르신, 고유명사를 갖고 있는 하나님의 모습을, 뜻을 앞서 간 사람이 다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앞서 보냅니다.
그래서 요셉에게 일어난 일이 곧 누구의 뜻이다? 하나님 뜻이다. 그래서 이거는 함께 동행하는 사이. ‘내가 너와 함께 할게.’ 이 말은 ‘이건 네 일 하는 게 아니야. 하나님, 내 일 하는 거야’ 이게 사명이라고. 사명감이 없으면 자살합니다. 백 살 먹더라도 자살해요. 왜냐하면 사명감 없으면 백 살 먹더라도 스무 살 동일하거든요. 백 살 먹었다는 의미가 없어요. 백두 살 먹어도 스물두 살 하고 차이 없습니다. 왜? 여전히 동행이 아니고 자기 혼자만 있기 때문에.
그러나 동행을 하게 되면 사십이 되도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하나님 은혜요, 육십이 되도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 은혜요. 지금까지 못난 인간을 쭉 이끌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게 되고 말씀대로 되니까 앞으로 가야 될 천국이 있다는 것을 말씀대로 믿으니까 그 말씀이 열어주려고 하나님께서 이것도 깨닫게 하셨구나 하는 것을 보여줘요. 그게 바로 사명입니다. 하나님이 늘 이렇게 날 만들었다는 걸 인정하는 것, 그게 사명이죠.
인간은 원래 흙입니다. 흙으로 만들었어요. 흙으로 사람 된 게 이걸 하나님께서는 기적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뭘 기적으로 보느냐? 사람이 흙 된 걸 기적이라고 보는 거예요. 잘못 된 거지. ‘내가 왜 죽나?’ 이러거든요. 그게 기적이 아니고, ‘내가 어떻게 사람이 되었지? 개가 아니고 왜 사람이지’ 이게 더 기적 아닙니까? 생각해 보세요. ‘내가 왜 여기 있지?’ 이게 더 기적 아니냐 이 말이에요. ‘내가 왜 사람이 되었지?’ ‘바퀴벌레 안 되고 사람이 되었지?’ 얼마나 놀라운 기적이에요. 흙인데. 모든 것이 흙 아닙니까? 바퀴벌레도 흙이고 전부다 흙으로 돌아가거든요.
흙에서 사람 되었다는 기적만 알아도 감사하며 살아요. 자살은 왜 자살해요. 감사하기도 바쁜데. 그것도 술 먹고. 왜 그래요? 술 안 먹었으면 죽겠습니까? 감사하기 바쁘지요. 자기 뜻밖에 하나님 동행이 없으니까. 자기만 있으니까. 자기만 있는데서 자기 기대만 나와요. ‘나는 이렇게 욕 얻어먹으면 안 되는데. 나는 악플 대상이 아닌데.’ 만날 자기가 생각했던 어떤 기대, 이게 충족되지 않으니까 속에서 불이 나는 거예요. 천불나는 거예요. 따로 지킬 사람 없으니까 자기가 자기를 지켜야 되고.
방금 제가 하는 이야기가 어떤 누굴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애굽의 사람들 이야기. 지금 딴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성경이야기 진도 나갔어요. 벌써. 요셉이 풍덩 뛰어든 애굽 사람들, 주변 인물들 전부다 그리고 형들까지, 아버지까지 전부다 요셉은 동행했고 나머진 동행 안 한 사람들이에요.
동행 안 한다는 말은 결국 뭐냐 하면, 자기가 관리하지 않으면 자기가 살 도리가 없고, 내가 날 위하지 않으면 누가 날 위하리요? 아무도 없어요. 여러분도 아니에요. 끝까지 나를 제일 챙겨주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이 말이죠. 나 외에는 믿을 놈이 없어요. 자식 놔두고 어떻게 죽느냐? 얼마 전만 해도 그런 소리했어요. 자식 놔두고 죽잖아요. 어떻게 자식 놔두고 죽겠습니까?
제 아내가 최진실 죽었을 때 하루 종일 멍하니 손에 아무것도 안 잡힌다 하는데. 젊은 사람들은 그게 이해가 안 되는 게 왜 그러냐 하면, 이게 라캉의 이론에 나와요. ‘나’라는 것이 ‘나’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타인의 욕망이 내 안에 이만큼 점령하고 있어요. 전두환 죽었다고 그렇게 멍하니 하지 않습니다. 박정희 죽을 때 눈물도 나지 않고. 이거는 짧은 오 년 또는 십 년 이잖아요. 최진실은 이십 여 년 동안 나라는 것을 만들어 형성하는 타인의 욕망으로써 이미 차지하고 있는 거예요. 그게 뚝 떨어져나가면 갑자기 내 일부가 뚝 떨어져나간 거예요.
왜 부모가 자식 죽을 때 밥맛이 없고 살 기력이 없느냐 하면, 자식은, 자식 생각하기에는 자기 몸만 전부인 줄 알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부모가 부모라는 자아를 형성하는데 있어서 이미 50% 이상이 자식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게 말을 안 들으면 마치 자기 몸에 중풍 든 것과 똑같아요. 이게 왜 말을 안 듣나, 팔이? 모든 인간은 타인이 나를 만들어요. 타인을 주워 모아서 나가 형성돼요.
사람이 사랑하면 좋아 보이죠. 사랑하면 내 속에 타인이 와서 말뚝 박는 겁니다. 그 타인이 내 곁을 떠나버리면 사랑보다 더 아파요. 얼마나 아팠으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김광석의 노래에 나옵니다. 왜? 소유였어요. 그런데 그 인간은 뭐든지 소유하지 않으면 인식이 안 되거든요. 내가 좋아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따로 두고 좋아할 수 없어요. 이미 일부가 내 것 만들어놓고 좋아해요. 사람이 자기 것 만들어놓고 좋아하지, 자기 것 안 돼있으면 좋아하지 않아요.
나를 뜯어보면 내 것 별 것 없어요. 전부다 남의 것이에요. 남의 것인데 내 것이라고 여기면서 살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이 만약에 내 기대와 다르게 행동한다든지 갑자기 자살해서 죽어버리면 뻥하고 구멍이 뚫어져서 이게 없어져서 그 미흡함을 뭐로 채웁니까? 술로 채워야지.
그래서 이혼이 그렇게 아픈 거예요. 이혼이 그렇게 괴로운 거예요. 특히 남자보다 여자한테는 거의 치명적이죠. 한 남자를 위해서 몸 바치는 보람으로 창세기 3장에 나오니까. 한 남자를 사모하는 그 재미로써 평생을 보장받았다고 해서 자기 안을 텅텅 비워놓고 남자의 것으로 자기 몸을 다 채워버렸는데, 그 남자가 세상에 자기를 사랑하지 않고 다른 여자를 사랑해서 떠나버리면. 지금까지 완전히 허해 버린 그걸 뭐로 채웁니까? 약으로 채우고, 우울증으로 채우고, 술로 채우고 채울 수가 없어요. 아무리 새 남자 해도 그때를 잊지를 못합니다.
이거는 라캉의 이론에 의하면, 결손가정의 자식들이 바로 엄마의 사랑으로 채워서 엄마의 사랑으로 먹고 사는데. 애들은 엄마, 아빠가 싸우는 게 문제가 아니고, 싸우는 동안 자기한테 관심을 안 가지는 게 더 큰 문제에요. 저거 둘이 싸우든 말든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자기한테 관심이 없다는 게 중요해요. 싸우면서도 자기한테 관심 좀 가져주면 괜찮아요. 하여튼 둘이 싸우든 어떻게 하든 간에 ‘엄마, 나 백 점 맞았어’ 해도 싸운다고 바빠서 그게 안 알아주면 그 다음부터는 집에 안 들어오지요.
그래서 인간은 참 불쌍한 게 타인 없으면 못 산다. 남이 없으면 못 살아요. 혼자 똑똑하고 자립했다고 큰소리치지요. ‘나는 촌에 가 혼자 살란다.’ 촌에 하루 이틀 놀러갈 땐 좋지요. 토함산에서 야영할 땐 참 기분 좋지요. 한번 살아보세요. 사흘을 못 견딥니다. 재미없어 못 살아요. 토함산 가도 티비 껴안고 가야 되지. 티비 속에 타인이 나오잖아요. 휴대폰 보니까 티비 나오데. 인터넷 되는데 그런데 가 살지.
혼자 바다 좋다, 한번 살아보지요. 늘 바다 쳐다보면 진짜 바다에 뛰어들고 싶어요. 바다가 나를 채워 줄 수 없어요. 왜 채워 줄 없느냐? 바다는 나의 욕망의 대상이 안 되거든요. 인간은 참 불쌍해. 욕망이 채워지지 않으면 못 살아요. 돈으로 사는 게 아닙니다. 채워지는 욕망 때문에 살아요. 쉽게 말해서 자극적인 재미없이 없이는 못 살아요. 오늘은 무슨 뜻의 새로운 자극. 복음만 있어서 재미없게 전하는 교회는 목사는 싫잖아. 자극을 줘야 돼. 새로운 자극이 없이는 사람은 살 재미를 못 느낍니다.
젊은 아들이 술집에 가는 이유가 그거 아닙니까? 일상을 일탈해서 평소의 답답함을 일탈해서 벗어나면 거기는 자극이 가득 찬 그런 세계가 있으니까 거기서 하루의 스트레스를 푸는 거예요. 억눌렸던 욕망을 채운다 말이죠.
그러니까 인간이란 뜯어보면 전부 애굽 사람 이야기, 형들 이야기 아닙니까? 요셉 빼놓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전부다 뭐냐 하면, 자기 속에 끌어 오르는 타인이 갖고 있는 욕망, 쉽게 이야기합시다. 남처럼 되고 싶은 나, 그런데 그게 일치 되지 않은데서 오는 그 괴로움. 따라 잡아야 하는데 따라 잡히지 않은 그 괴로움. 100억은 벌었는데 1000억은 못 벌었어. 900억의 미흡 때문에 괴로워하는 거예요. 정몽헌도 자살했잖아요. 500억 끌어 모았는데 5000억 못 끌어서 자살했어요.
아무리 아무리 해도 인간이라 하는 것은 도대체 내가 되고 싶은 나와 현재 나하고 자꾸 벌어져 있으니까 자기만족이 될 수 없는 거예요. 그리고 벌어져 있는 것을 메우기 위해서 또 새로운 타인을 찾아가야 돼요. 여자들이 자꾸 애 낳는 것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예쁘다고 낳고 또 낳고 또 예쁜 것 치우고 또 낳고. 그런데 손자 키우라고 하면 안 키웁니다. 왜? 그건 자기 소유가 아니기 때문에. 나를 거기다 대체 욕망이 아니거든요. 내 몫 채울 수 없거든요. 손자는 소유주가 있잖아요. 자기 아들이 소유주 아닙니까.
이제 요셉이 만나야 될 상황이 방금 이야기한 이런 상황들을 만납니다. ‘요셉, 니는 뭐 잘났노?’ 요셉도 마찬가지에요. 잘한 건 없는데 요셉과 동행하는 분이 잘났지요. 그분이 바로 말씀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이 동행을 합니다. 요셉은 바로 타인들 때문에 발에 착고에 차이고 점점 더 상황이 나빠지는 모습으로 가지요.
요셉이 여기 3절에 보면,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 요셉이 그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으로 가정 총무를 삼고 자기 소유를 다 그 손에 위임하니”
보디발의 입장에서는 요셉이 자기의 이상형입니다. 사람은 자기를 사랑하지 자기만을 사랑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남을 사랑할 때는 자기가 되고 싶은 요소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그 이상형을 찾아서 그 인간을 사랑하게 돼있어요. 아, 내가 갖고 싶은 것을 갖고 있을 때 사랑하는 겁니다.
어떤 초등학교 애들 둘이 가다가 갑자기 옆에 애가 ‘나, 니 좋아한다.’ 하는 건 분명히 지 갖고 싶은 걸 걔가 갖고 있을 경우에 그렇습니다. 장난감이라든지 만화책이라든지 인형이라든지 이럴 때 ‘나, 니 좋아한다. 그런데 그 인형이 같이 놀아도 되지.’ 이래 되거든요. 반드시.
소꿉놀이 할 때 보세요. 남매간에 나이 많은 누나하고 어린 남동생하고 같이 소꿉놀이 하면 누나는 평소에 해보고 싶은 살림, 다 시킵니다. 장사놀이 할 때는 옷도 입혀보고 다 끄집어내고. 그 남동생은 죽어나는 거지. 심지어 병원놀이 할 때는 환자 되고 의사 다 되고. 티비 보면 나오데 자기 동생을 보고 ‘위암 걸렸습니다’ 동생이 그러지요. ‘희망이 있겠습니까?’ ‘가망 없습니다.’ 어디서 본 건 있어서. ‘그럼 어떻게 합니까?’ ‘내 숙제 해주면 낫습니다.’
어떤 인간이든 내가 되고 싶은 걸 갖고 있을 때는 사랑한다는 거짓말로 접근해요. 사랑한다는 것은 내게 미흡해서 원했던 바인데 그 원했던 바를 타인이 갖고 있으니까 자기가 원했던 것을 사랑하기 위해서 그 타인을 임시방편으로 일시적으로 사랑한 거예요. ‘내 아. 낳아 둬.’ 여자가 기계입니까? 참, 남자들은 바보라. 아 낳아주면 자기 아 되는 게 아니고 여자 아 되는 걸 모르고.
그래서 생물에서 짝짓기에서 수컷은 만날 아만 낳아주다 지는 차이고. 여자는 다 준 것 같지만 사실은 자식을 낳기 위해서 수컷을 이용했고. 이게 생물에 보면 짝짓기에 보면 나와요. 암컷은 다 준 것 같지만 절대로 하나도 안 빼앗겼어. 상대방을 통해서 낳은 거예요. 그래서 정자가 난자를 향해서 헤엄쳐 가잖아요. 난자는 느긋하게. ‘내 아. 낳아 둬.’ 하고 달려들지만 백 날 해봐도 이건 꼬리 끊고 도망치고 여자 아가 돼요.
이걸 억압하기 위해서 이러한 생물적 본성을 억압하기 위해서 윤리가 들어가는데 이게 바로 유교죠. 인간의 본성을 거슬러서 남자 위주로, 강력한 남자 우월위주로 나가는. 그래야만 남자는 약간 건질 건 건진다고 하는데.
보디발은 바로 요셉에게서 뭘 발견하느냐 하면, 만사형통하는 걸 찾았어요.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정말 원하고 원했던 바입니다. 하는 일마다 복을 받고, 하는 일마다 형통하고. 집안 일이 그래 잘 돼. 그런 동시에 보디발에게는 그것이 하나의 점점 더 자기 내부에 요셉의 요소가 많이 잠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디발은 몰랐었지요. 많이 잠식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때 보디발은 이렇게 했어요. 정말 자기가 원하는 것을 갖고 있는 요셉을 이용하면서 요셉에겐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지요. ‘내가 니 키워줄게. 말 잘 들어. 내가 이만큼 배려했으니까. 니도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내 시키는 대로 해야 돼. 배려해줄게.’ 마치 사장님이 사원들한테 하듯이 마치 큰 혜택을 주는 것처럼 하지요. 사실은 뭡니까? ‘나는 니 아니면 회사 안 돌아간다.’ 이래 되는 거예요. ‘니 같은 인간 못 찾았다.’ 그 말을 차마 할 수 없잖아요. 차마 못 하니까
부모도 그렇게 이야기하죠. 부모도 자식한테 그런 너스레를 떨지요. 허풍을 떨잖아요. ‘내가 니 다 키웠다.’ 애들은 그 말이 옳은 줄 알지요. 크면 알지요. ‘아하, 내가 예뻐서 날 먹였고 키워줬구나.’ 그래서 어릴 땐 모르지만 크면 부모의 마음을 알지요. ‘철저하게 자식을 이용했구나’ 하는 걸 알지요. 얼마나 예뻤으면 자진해서 그렇게 했을까. 그래놓고 키웠다고 효도하라고 강요하죠. 이거는 전말이 역전된 잘못 된 거예요. 솔직해야 돼요.
9절에 봅시다.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이게 요셉이 이야기했지요. 6절에 보면, “주인이 그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임하고 자가 식료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요셉의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하였더라” ‘아담하였더라’ 했는데 영어로 smart, ‘머리가 뛰어나다’ 그런 뜻이거든요. ‘준수하고 아담하였더라’ 꽃미남 쯤 되는 모양이죠.
“그 후에 그 주인의 처가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하니 요셉이 거절하며 자기 주인의 처에게 이르되” 여기 보세요. 갑자기 요셉을 두고 두 자아가 요셉이란 타인을 놓고 서로 자기 자신 속에 많이 포함시키려고 경쟁을 벌입니다. 일단 요셉을 누가 잡아먹었습니까? 일단 남자가 남편이 보디발이 잡아먹었어요.
‘모든 소유를 맡겼다’ 하는 것은 보디발이 혜택을 준 것 같지만 철저하게 더 확실하게 ‘니는 내 것이야’라고 소유를 준 게 아니고 사실은 소유를 주는 척하고 몽땅 요셉 전체를 내 것으로 삼았습니다. 삼았을 때 요셉은 하나님과 함께 했기 때문에 자기의 역할, 자기의 일만 생각했어요.
새삼스럽게 ‘내가 어떤 존재를 되겠다’ 하는 그런 입장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자아가 있으면 노예가 안 돼요. ‘내가 살다가 어떻게 되지?’ 이런 것 생각하면 노예가 아닙니다. 노예는 하나의 기계에요. 기계가 언제 우울증 걸리는 것 봤습니까? 기계는 우울증이라는 게 없어요. 기계는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거예요. 기계한테 뭘 묻는 게 아닙니다.
백설공주 쫓아낸 계모가 바보같이 거울한테 왜 물어요. ‘거울아, 거울아. 누가 예쁘냐?’ 거울은 그냥 하나의 기계라니까. 그 동화에게 의미하는 것은 뭐냐? 거울은 아무 말도 못해요. 계모가 자기 보고 질문하고 자기 보고 답변한 거예요. 이게 인간의 진솔한 모습이라고. 큐티할 때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성경아, 성경아. 나는 오늘 우에 되겠노?’ ‘아, 이거 은혜구나.’
성경에서는 튀어나오는 게 뭐냐 하면, 바로 착고에 차인 발과 우리 죄 때문에 고생하신 쇠사슬이 나오지요. 여기서는. 십자가에서 뜻이 나옵니다. 성경은 십자가 안에서 모든 걸 다 이루었다 하지요. 십자가를 통해서 다 이룬 거예요. 희생과 고난 없이는 이룸이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성경을 못 이뤄요. 우리가 언제 희생하고, 언제 봉사하는 사람 누굽니까?
여기서는 지금 요셉이 노예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희생을 하던 봉사를 하던 노예는 노예대로 뭐가 되던 해야 돼요. 그래서 요셉은 현재 보디발의 소유니까 이 (보디발의) 아내가 주인이 아니잖아요. 자기 주인은 누굽니까? 보디발이지 처가 아니잖아요. 처가 와서 보디발의 처가 지금 주인은 엄연히 있는데 뚝 떼어서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할 때 이거는 거부할 수밖에 없는 거죠.
9절에 보면,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요” 요셉의 입장에서는 뭐로 보느냐 하면, 요셉의 입장에서 이런 고백이 나오기 어려운 게 뭐냐 하면, 노예 생활하는 걸 만족한다는 게 있을 수 있습니까?
그런데 요셉은 뭡니까? 자길 노예로 볼 때 ‘니, 뭐야?’ 이게 아니고 자아가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노예하고 주인 자체도 뭐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내가 수용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머리 둘 것 없을 때 예수님은 뜻을 수용했어요. ‘언제 전세 살아보나.’ 이런 것 아니거든요.
언젠가 그런 이야기했지요. 안재환 씨가 서른여섯 살에 죽었을 때 그래 했잖아요. 예수님은 서른셋밖에 안 살았다고. 삼 년이나 더 살았어요. 그걸 생각해보면 예수님께서 얼마나 일찍 돌아가신 걸 알지요. 그렇다고 예수님이 더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한 적도 없고, ‘모든 것을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하고 그냥 끝내버렸다 말이죠.
그걸 보면 철저한 하나님의 소유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세상을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입니까? 그걸 제가 미리 했잖아요. 인간은 흙이다. 흙이 바퀴벌레 안 되고 인간 된 것도 하나님 뜻인데 하나님 기적인데 여기 이 신비와 이 기적에 대해서 얼마나 우리가 감사했습니까? 내가 인간이 된 것을. 인간이 아프고 골치 아프다 이게 아니라 아예 인간이 될 때 골치 아픈 것도 있고, 벌에 쏘인 것도 있지, 지금 당장 흙이라도 우린 할 말 없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아직 흙이 덜 됐잖아. 이게 얼마나 감사할 일입니까? 얼마나 고마운 일이에요. 이게 어떻게 술 처먹을 일입니까? 내가 흙인데 손이 있다니, 팔이 있다니 얼마나 이게 감격인데.
자기 기대, 자기 기대가 죄에요. 자기 나름대로의 기대와 그 뜻 때문에 자기 손으로 죽는다는 것. 참, 그것은 하나님께 보여줄 성도의 사명이 아니라고 봅니다. 앞으로 궁금하죠. 안재환이 하고 최진실하고 어디서 만나느냐? 하늘 어느 다방에서 만날지. 만나 결혼하면 조져 놔버려. 정선희가. 이걸 가지고 악플이라 합니다.
제가 고인을 모독하기 위함이 아니고, 현재 있는 몸에 대해서 내가 사람 자체가 됐다는 것에 대해서 사실은 엄청난 감사를 끄집어내도 끝없이 나오는데 이런 판에 이것도 감사할 판에 어떻게 우리가 괴로워하면서 사느냐 이 말이죠. 하나님 책임지라고. 괴로워하는 게 뭐냐? 하나님 책임지라고. ‘내가 뭘 잘못했기에 이런 수모를 당하냐고. 내 이런 모독을 받느냐고.’ 요셉한테 일절 그게 없습니다. ‘아, 내가 노예만 아니면 저 아내 꼬시는데.’ 이런 게 없었어요.
그냥 ‘이것은 내 분수에 어긋나는 겁니다. 현재 내 자리에 합당치 않는 겁니다. 현재 내 자리는 당신과 관계할 수 있는 그런 자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마련한 자리는, 이 자리는 여기까지가 내 자리고, 이것은 주제넘게 내가 당신과 함께 어떤 관계를 맺을 그런 입장이 안 됩니다’라고 해서 도망친 거예요.
그러니까 ‘이 여자, 나쁜 여자’ 이런 뜻 아닙니다. 지금 요셉의 입장에서 당신은 나쁜 여자 그럴 입장이 못 되고, 그냥 자기 자리만 지키는 거예요. ‘이 여자가 감히 종 무시하노?’ 이리 안 했습니다. ‘이러시면 안 돼요’ 하고 옷 빼앗기고 그냥 도망친 거예요.
그 다음에 10절에 보면,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이 여자의 마음을 우리가 이해해줘야 될 것이 뭐냐 하면, 사람은 요셉을 만나기 전에 이 보디발의 여자가 남자 밝혔다. 그렇다고 볼 수 없어요. 사람은 남자를 밝히는 여자 따로 없습니다. 안 밝히고 싶어도 갑자기 타인의 욕망이 나한테 없는 어떤 새로운 게 등장하면 밝히게 돼있어요.
그리고 ‘이러면 안 돼. 이러면 안 되는 거야.’ 하고 은장도 가지고 찔러도 소용없습니다. 날마다, 에브리데이 매일같이 이랬다는 이 말은 얼마나 보디발의 아내가 고생했겠습니까? 그 애틋한 심정을 이해해줘야 돼요. ‘니가 없었으면 내가 이렇게 밤잠을 홀로 지 샐 수 없지.’ ‘니가 없었으면 괜찮은데 니가 등장해서’ 아담했지요. 준수하지요.
배용준하고 이병헌이 옆집에 살아보세요. 창문 열고 목욕해 보세요. 그냥 밥 잘 할 수 있는가?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가 목욕하는 걸 봤잖아요. 다윗이 여자 밝힘증이 있는 남자가 아닙니다. 아무 여자가 옷 벗었다고 다 하는 게 아니에요. 예뻤다니까. 안 예쁜 여자가 뭐하면 신고할 겁니다. 신고할 것도 없이 ‘명하노라. 체포하라. 법을 어기다니.’ 그때 지는 그래야지 얼마나 자기가 높다는 걸 과시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예쁜 것한테는 법도 소용없어요. 에스더 보세요. 에스더 앞에 나라 법을 정해놔도 소용없어요. 에스더가 예쁘니까 ‘그래, 그래. 오너라.’ 법이고 뭐고 없어요. 법을 초월해요. ‘피부는 권력이라’ 안 합니까? 미모가 권력이에요.
참, 보디발의 처가 요셉 때문에 얼마나 마음이 괴로웠느냐를 헤아릴 줄 알아야 됮니다. ‘이 나쁜 사람.’ 이렇게 욕할 게 아니에요. 니도 그래 돼봐라. 에브리데이지, 뭐. 매일같이 들볶죠. ‘니, 내 어떻게 생각해?’ 매일같이 찾아왔을 것 아니냐. 결론은 ‘우리 주인님 아내로 생각합니다.’ ‘이 무정한 사람’ 하고 훌쩍훌쩍 울고 있을 것 아니냔 말이죠.
“그러할 때에 요셉이 시무하러 그 집에 들어갔더니 그 집 사람은 하나도 없었더라”(11절) 왜 하나님께서는 그 집 사람을 없게 만듭니까? 그러니까 하나님도 책임 있어요. 선악과 심어놓은 게 하나님 책임 있다는 주장처럼 왜 하필 사람이 없느냐 말이죠. 좀 여러 명 놔두지 않고.
“그 여인이 그 옷을 잡고 가로되 나와 동침하자 요셉이 자기 옷을 그 손에 버리고 도망하여 나가매”(12절) 참, 숫기도 없지. 숫기가 없는 게 아니고 뭐냐 하면, 요셉의 입장에서는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가 아닙니다. 오랜만에 좋은 소리 한번 했다. 요셉은 요셉일 뿐이죠. 보디발 아내가 아니잖아요.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이 타인의 욕망의 대상이 되지만 요셉은 보디발 아내가 절대로 자기 욕망의 대상이 안 돼요.
그러니까 여기서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죄를 짓지 마라, 말씀대로 살자 하지만 사람이 하나님의 사명과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 있어 버리면 다른 것들은 남들 보기는 실수다, 어쩌다 하지만 죄도 실수도 아무것도 아니에요. 왜? 관심사가 이쪽이니까. 근데 보디발의 아내는 관심사가 뭡니까? 관심사가 요셉에 있는 동시에 뭡니까? 자기의 비워진 욕망을 채우려 하니까 결국 누구한테 있습니까? 관심사가 자기 자신에게 있지요. 이게 문제입니다.
요셉은 하나님께 있잖아요. 하나님의 뜻에 득죄하리요. 요셉은 욕망이 하나님께 있지만 보디발의 아내는 뭡니까? 하나님께 없으니까 그것이 바로 신자와 불신자의 확연한 차이점이에요.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은 안 믿는 정도가 아니고, 관심은 누구에게 있다? 자기 욕망의 결핍을 채우는 식으로 행동에 나섭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복음을 전해야 될 이유가, 복음을 안 전하면 교인들이 어디에 욕망이 모이냐? 교회 자체가 자기의 욕망의 대상이 돼버려요. 교인들이 보디발이 되고, 목사는 요셉이 돼버리잖아요. ‘당신이 와서 우리 교회가 부흥되고.’ 교회 부흥되고 누구 욕망입니까? 자기 기대 아닙니까? 그게 죄잖아요.
복음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의 아픔과 고생과 희생이 들어있는데 예수님의 고생과 아픔, 그것에 관심이 없으니까 사람들은 교인들은 어디에 관심 있느냐 하면, 내가 헌금하고 봉사한 교회부흥, 크게 되면 내가 잘 믿는 것처럼 남들 앞에 ‘나는 큰 교회 장로다. 나는 큰 교회 목사다’ 이걸 자랑하니까 그게 바로 욕망의 화신이 아니고 뭐예요? 그게 이단이잖아요.
그래서 제가 수십 년 전부터 지적했다고요. 교회를 믿는 것은 이미 그거는 이단이라고. ‘한쪽으로 치우쳤다.’ ‘균형감이 없어서. 한쪽으로 치우쳐.’ 전부다 그런 소리해요. ‘너무 한쪽에 치우쳤다.’ 그쪽이 뭔지 말 안 해요. 사람들이 이상하죠. ‘이근호 목사가 치우친 게 뭡니까?’ 물으면 말을 안 한다니까. 십자가 뭐란 말을 차마 못해.
용감하게 관계들을 끊으려면 하죠. ‘이근호 목사는 십자가만 이야기했다. 성경에는 십자가 외에 딴 게 있다.’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죠. ‘십자가 외에 딴 게 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나는 십자가로서는 절대로 만족함이 없고, 십자가로서는 영 기쁘지 않다. 딴 게 있어야 기쁘겠다.’ 딴 게 뭔데? 자기 기대, 자기 포부 아닙니까? ‘우리 교인들은 착해야 돼. 우리 교인들은 훌륭해야 돼.’ 그게 자기 뜻이잖아요. 지 교인 어디 있습니까? 다 주님의 교인이지. 자기가 구원합니까? 주님이 구원하지.
아이고, 이야기하다가 정신 봐라. 나의 기대가 지금 어디 가있지? 십 분 쉽시다.
우리교회(IP:220.♡.176.150)
08-10-12 10:54
울산081003b창세기39장b
20081003b 울산강의-창세기 40장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14절에 “집 사람을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보라 주인이 히브리 사람을 우리에게 데려다가 우리를 희롱하게 하도다 그가 나를 겁간코자 내게로 들어오기로 내가 크게 소리 질렀더니”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이 자기 소유가 될 수 없으니까 빈 곳을 자신의 것으로 채워야 되거든요. 채우기 위해서는 자기의 의로 채워요.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에게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시도하다가 자리를 마련해주죠. ‘당신이 들어올 자리는 있습니다.’ 하다가 요셉이 그 자리에 안 들어오니까 이 빈 곳을 반드시 뭐로 채우느냐 하면, 자신의 의로움으로 채워야 되는 거예요.
의로움으로 채우려면 자기 뜻대로 안 되는 걸 뭐로 만드느냐 하면, 악한 자로 만들어야 이게 의로운 거거든요. 세상 사람들이. 핑계죠. 핑계 없는 무덤 없다고 핑계죠. 상대적으로 저쪽이 나빠야 저 사람이 내 소유가 될 수 없는 것은, 나는 너무나 의롭기 때문이 저 악한 것은 자기 의로움을 증명하는 식으로 자기 앞에 자기보다 나쁜, 악한 자들을 세울 수밖에 것이 인간의 요셉을 통해서 밝혀지는 이 세상 인간들의 하나의 본성이 드러나는 거죠.
요셉으로 함께 있음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어떤 식으로 버티느냐? 인간은 결국 자기 의로 버티는 거죠. 자기 의로움으로 버틸 수밖에 없죠. 이것은 바로 뭐냐 하면, 인간은 처음에 아담이 에덴동산에 있을 때는 그냥 존재했었지요.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존재’로써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가치’로써. 그러니까 선인과 악인이냐, 악인이냐, 선인이냐? 이런 가치를 뒤집어쓴 존재가 되고 맙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원했던 게 아니에요. 하나님 한 분만으로 그냥 영생이고 생명인데 인간이 독자적으로 ‘나는 선인이다’ 하고 주장하고 나가는 것 자체가 선악적인 구조 속에 들어가는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원래 내가 인정한 그 인간은 아닌, 이제는 흙이 되는 것도 아니고 나쁜 인간 되죠. 악한 인간. 그야말로 하나님 보시기는 하나님께 저주 받게 되는 악마에 속한 악한 인간들입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범사에 감사하면 될 텐데 ‘나는 꼭 이래이래 하기 때문에 감사하고 의롭고 가치있고, 이래이래 하기 때문에 나 혼자 훌륭하고’ 꼭 이렇게 가치를 자기에게 부여한다면 이거는 원래 만든 하나님의 진면목은 아닙니다.
그런데 현재로서는 요셉 빼놓고는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형들도 그렇고. 그런 인간 또 나옵니다. 뒤에 보면 보디발 아내뿐만 아니고, 또 요셉을 만났던 사람이 나옵니다. 40장 들어가면. 누굴 만나느냐 하면, 여기 40장에 “그 후에 애굽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 둘 중에 누가 나쁜 사람입니까? 먼저 문제부터 드려야지.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 둘 중에 더 나쁜 사람이에요? 요셉한테. 누가 더 힘들 게 했어요?
그게 너무 어려우면 술 맡은 사람은 살았고, 떡 굽는 자는 죽었잖아요. 근데 사실은 죽었던 사람은 그냥 사흘 만에 죽었지만 술 맡은 관원은 누구 덕분에 살았습니까? 요셉 덕분에 살아놓고 잊어버렸지요.
이것은 바로 앞에 있는 보디발이 나쁩니까, 보디발 아내가 나빠요? 보디발은 진짜로 요셉이 자기 아내를 겁탈한 줄 알았기 때문에 추방했고, 보디발 아내는 분명히 자기가 이거는 자기 자신도 알지요. 알면서도 그렇게 이야기했고. 여기서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요셉이 처해 있는 위치마다 악이라는 것이 얼마나 각가지 악들이 튀어나오는가를 요셉이 가는 곳마다 보여주는 거예요. ‘세상만사 이런 놈도 있고 저런 놈도 있다. 이해해라.’
하나님과 함께 가게 되면 한번 세상 끌고 가면 예쁘게 포장됐던 것이 한번 확 긁어버리면 그 안에 온갖 더러운 것들이 지나간 자국에는 온갖 것들이 다 까발려서 뒤집어져서 다 튀어나옵니다. 요셉이 가는 곳마다.
첫 번째 요셉이 만났던 것은 뭐냐 하면, ‘억울하다’ 이 말이에요. 억울하죠. 참 억울해요. 예수님 가신 것도 억울하지만 억울하다. 이거는 뭐냐 하면, 죄는 누가 지었고? 보디발의 아내가 지었는데 그 죄를 누구한테 뒤집어씌웠습니까? 요셉에게 뒤집어씌우니까 뒤집어씌우는 과정에서 요셉은 억울한 자가 되고 그리고 바깥사람들은 뭡니까? 악한 자가 되고. 그걸 보여주죠.
두 번째 요셉이 만난 사람은 술 맡은 관원과 떡 맡은 관원 만나서 이건 뭐냐 하면, 저쪽은 은혜를 잊어버렸지요. 그리고 요셉은 맨 그 자리에 있고. ‘잊어버렸다’는 말은 더 이상 남남이 돼버렸죠. 이게 또 악함이라.
예수님 믿은 사람이, 예수 누구죠? 몰라요. 출애굽기에 나오죠. 요셉의 은혜를 잊어버린 바로 왕이 이스라엘을 히브리인들 괴롭히잖아요. 아까 제가 이야기했지만 내가 이렇게 살아있다는 자체가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살아있는데 이게 나의 사명이고, 그게 우리가 보여줄 감사인데 이걸 우린 평소에 잊어버리죠.
둘 다 봅시다. 보디발의 아내하고 그리고 여기 술 맡은 관원, 이 둘의 공통점은 뭡니까? 뭐밖에 모른다? 자기밖에 모른다. 그러니까 결론은 뭡니까? 하나님의 메시아가 앞서 보낸 자가 오게 되면 사람들은 악한 자가 되는데 그 악함의 특징은 공통점은 뭐냐? 자기밖에 모르게 되고, 자기밖에 모르게 되면, 자기 의로움을 지키기 위해서 남들을 억울하게 만들고 그리고 은혜는 은혜대로 받으면서도 잊어버리고.
마태복음 5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햇빛과 공기를 주시잖아요. 다 잊어버리죠. 햇빛과 공기를 줄 때 어디 돈 받고 줬습니까? 그냥 참새 키우듯이 은혜를 주잖아요. 참새도 은혜를 알고 들풀도 은혜를 아는데 인간들은 주님의 은혜를 도무지 몰라요. 자기가 고생해서 지 힘으로 사는 줄 알고 있어.
산다는 게 두 종류가 있어요. 밥을 먹고 사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밥을 먹고 사는 경우 같으면 처음에 에덴동산에서 존재가 있을 때는 밥 먹고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선악과 따먹고 자기 가치를 논할 때는 사람은 밥을 먹고 사는 사람에게 이게 산다고 할 수 없죠. 왜냐하면 밥을 먹으면서도 계속 ‘나 잘났다, 나 잘났다’ 하게 되죠.
그래서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생명나무를 따먹으면 안 되는가? 그 이유를 사람들이 잘 몰라요. 왜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생명나무를 못 먹게 하느냐 하면, 이미 인간이 뭡니까? 처음에 인간 존재가 아니고 뭡니까? 자기 가치, 아까 인간은 자기밖에 모르니까. 지밖에 모르는 인간을 계속 살려줘서 살리면 누구 영광입니까? 마귀만 좋지. ‘역시 마귀는 옳았어. 마귀는 탁월했어. 악마가 시키는 것이 진리였어.’ 이것이 퍼지면 이게 온통 우주에 퍼질 건데 하나님이 용납하시겠습니까?
‘마귀가 한 짓은 잘못이야. 그거는 너무 잘못됐어.’ 그걸 지적하기 위해서라도 인간들을 살려내야죠. 살려내고 저주해야죠. 그거는 생명나무가 있는 취지와 다르다 이거죠. 생명나무는 우리 같은 인간 영원히 살리려고 있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은혜를 아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생명나무 있는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생명의 떡’이라 했잖아요. ‘너희들이 먹는 떡은 네 잘남을 과시하기 위한 떡이고, 내가 주는 떡은 하나님의 일로서의 떡이다. 영생을 얻는 떡이다’ 이 말이죠.
결국은 내가 내린 결론은 뭐냐?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 이 속에서 인간은 온갖 죄란 죄는 죄다 나오게 돼있습니다.
그러면 39장 끝에 봅시다. 요셉이 이제는 옥에 넣었으니까 왕의 죄수를 가두는, 39장 20절. 참 억울하죠. 그러니까 ‘억울하다’, ‘요셉이 옥에 들어갔다’ 이것이 아까 이야기한 말씀을 응하게 함이라. 그 하나님께서 앞서 보낸 거예요. 그래서 성도가 세상 악한 사람한테 억울함을 당해도 ‘하나님이여, 왜 접니까?’ 이러지 마시고, ‘아, 내가 이렇게 옆에 악한 놈들 배치해서 나로 하여금 내가 잊어버렸던(잊어버린 건 술 맡은 관원이죠) 내가 술 맡은 관원처럼 요셉의 은혜를 잊어버렸던 나로 하여금 다시 요셉의 은혜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나도 똑같이 억울한 일을 당하게 한다’ 이래 생각해주셔야 합니다.
심판하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라 했잖아요. 우리가 심판해버리면 그거는 하나님 뜻이 아닙니다. 심판하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세요. 그러니까 요셉은 옥에 그대로 있거든요. 요셉은 옥에 그대로 있고 술 맡은 관원 살아나서 지는 좋았지. 요셉은 아직도 옥에 갇혀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나만 편하면 되지. 누가 갇히든 말든 무슨 상관 있노’ 이래 돼버리면 안 된다 이 말이죠.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았다’ 하고 예수님 잊어버려요. 사람들은. ‘예수님, 구원해줘서 고맙습니다’ 하고 예수님 빠이빠이 돼버렸어요. 다시 예수님을 기억하는 사람이 드물 정도로. 성령을 받아야 생각나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뜻대로 안 되는 일을 통해서 우리가 잊어버렸던 예수님의 희생과 아픔을 다시 기억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여러 가지 일들이 배치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해주시기 바랍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이 세상은 내 뜻대로 절대로 안 되고, 고맙게도 주님의 뜻대로 십자가의 뜻대로만 진행됩니다.
‘그러면 목사님, 우리는 어떻게 살까요?’ 니 마음대로 사세요. 니 마음대로 사시면 주께서 니 마음대로 안 살도록 동행해주셔서 니 마음대로 사는 것이 말씀대로 되도록.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말씀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큰 일 납니다. 그러면 사도행전 28장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30장, 50장 막 나갑니다. 그게 아니고 우리는 내 마음대로 살면 그게 이래서, 이래서 죄라는 걸 알려주는 주의 뜻대로 알려주는 그렇게 해서 우리로 하여금 내가 죄인임을 깨닫게 하는 식으로 살아갑니다. 결론은 간단하잖아요.
“전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은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이거 비슷한 영화 있었잖아요? 무슨 영화입니까? 감옥소에서 은행원이 억울하게 갇혔다 탈출한 영화 있었는데. [쇼생크 탈출] 그런 영화와 비슷한데.
그런데 한번 보세요. 요셉의 입장에서는 기분 좋은 일입니까? 여기서 요셉을 우리가 본받아야 돼요. 요셉은 하나님의 형통, 이런 형통 아니잖아요. 감옥소 죄수인데 잘 되더라. 이걸 빨리 빼내줘야지. 여기서 형통한 게 뭐, 본이 안 돼. 결국 요셉은 뭐가 없습니까? 자아가 없고. 다른 주위 사람들은 뭐가 있다? 계속 자아가 있는 거예요. ‘뭐, 하나님 뜻대로 하면 되지.’ 이런 식이고 요셉은.
물론 요셉이 그런 것이 왜 없겠습니까? 있었지요. 있으니까 요셉이 나중에 뭐라 합니까? 술 맡은 관원 보고 ‘당신이 회복되거든 날 좀 빼내 달라’고 이야기하지요. 물론 있었지만 어쨌든 되어지는 환경 속에서 요셉은 일절 요셉 본인이 좋은 식으로 하나님께서 인도하지 않는다는 것. 하나님과 동행함은 맞습니다. 동행하는 건 맞는데 요셉이 기대했던 것은 일체 안 된다는 거예요.
이걸 그림으로 그리며 이래되는 거예요. 색깔 넣어서 그려볼게요. 요셉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요셉이 현재 있는 상황에서 탈피해서 더 나은 상황을 생각합니다. ‘여기서 벗어나서 이렇게 됐으면 좋겠다.’ 이걸 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벗어난 건 맞는데, 동행하면. 어디로 벗어나느냐 하면, 이렇게 되게 한다고. 근데 이것은 요셉을 이걸 생각하는 동안에 이것은 가려져 생각이 안 나요. 예상 밖의 일이에요. 요셉은 A를 원하는데 하나님은 B를 만들어버려요. 이거는 요셉한테는 없는 거예요, 지금. 있을 것 같으면 A 대신 B를 생각하겠죠.
하여튼 하나님은 인간이 구상하지 못하고 생각지도 못한 대로 이끌어냅니다. 깜짝깜짝 놀래요. 뭐든지 그래요. 전혀 예상치도 못한. 내가 짠 시나리오는 하나님이 보지도 않고 읽지도 않습니다. 내가 인생 시나리오는 안 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매일같이 짭니다. 시나리오를 내가 써요. 안 쓸 데가 없어요. ‘오늘 하루는 이렇게 돼야지. 오늘 하루는 이렇게 되기를 원한다.’ 하면서 계획을 잡지요. 절대로 안 됩니다. 실제로 그대로 되더라도 나중에 재미 하나도 없어요. ‘주여, 내 뜻은 이걸 되게 하는 건데 막상 되면 재미 하나도 없습니다.’ 기대한 대로 된다 해서 그게 행복하지 않습니다. 슬퍼요. 참, 허무해요. ‘아이고, 고작 내가 이거 되려고 했나? 아이고, 참. 더러워라. 이왕 될 것 같으면 더 큰 것 원할 걸. 이거 할라고’
요새 부산에 부산 갈매기 때문에 난리입니다. ‘가을에도 야구하자.’ 요새는 안 그럽니다. 우승입니다. 처음에 할 때는 가을에 야구하자지 ‘4강만 되도 더 바랄 게 없습니다’ 했잖아요. 요새는 ‘4강 가 만나 일등 해야지. 한국시리즈 우승해야 돼.’ ‘고작 3등 하려고 그리 애썼나? 3등 하려고 비닐 봉다리 만들고. 아이고, 창피스러워라. 3등은 그냥 되는 건데.’ 처음에 할 때는 만날 꼴찌할 때는 3등 그냥 되는 게 아닌데 막상 되고 난 뒤에 ‘3등 그냥 되는 건데 괜히 내가 용 썼네’ 이러죠.
요셉의 입장에서는 바로 그런 것조차도 하나님 뜻이 아닌 인간의 기대가 죄라는 것을 다 밝혀주지요. 어쨌든 하나님이 약 올리는 것 나와요. 얼마나 약을 올리는가 보세요. “전옥이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23절) 이게 약 올리는 게 아닙니까? 기껏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게 죄수.
이것은 요셉으로 하여금 더 이상 옛날 꿈 있잖아요. 옛날 자기가 꾼 꿈 있잖아요. 전혀 그거는 더 이상 불가능한 그러한 일인 것을 깨닫게 하는 겁니다. 옛날에 내가 꿈 꿨던 것 물 건너갔구나. 그 점은 우리의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생각했던 구원은 물 건너갔어요. 주님의 말씀의 위력으로 구원하는데 우리는 구원받아놓고 시나리오 짜기 바빠요. 구원에서 구원을 이루는 시나리오를 짭니다. 구원받고 난 뒤에 전도 한 이천오백 명 정도 하고, 돈도 많이도 아니고 45억 정도. 이러다 죽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