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9월 23일 실존주의 철학 - 샤르트르
대구 9월 23일 실존주의 철학 - 샤르트르
이름 : 우리교회(IP:124.59.86.24)
080923 실존주의 철학 - 샤르트르
우리교회(IP:124.♡.86.24)
08-09-23 18:18
우리교회(IP:220.♡.176.150)
08-11-12 18:10
대구080923실존주의철학-샤르트르와야스퍼스의사상
08 대구강의 12 - 실존주의 사상가 '사르트르와 야스퍼스'1
08,09,23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하늘 한번, 땅 한번 !!
오늘은 '지옥의 하나님'이 아니라 이 세상의 사상에 대해서 공부를 하겠는데, 지금 대구강의가 이렇게 격주로 진행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한 주는 '지옥의 하나님'을 강의하고, 그 다음 주는 세상의 철학에 대해서 공부하는데, 왜냐하면 교회 밖에 있는 일상적인 사람들이 자기의 삶 속에서 어떤 사고방식에 매여서 살아가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말이다.
그렇게 한 주는 성경에 대해서 공부를 하고, 그 다음 주에는 이 세상에 대해서, 그렇게 공부를 해줌으로서 세상 사람들의 밑바탕에 깔려있는 사상을 알 수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그런 사상이 무엇인지는 모르는데, 하지만 이것을 어떻게 아는고 하니, 성경말씀을 통해서 안다는 말이다.
◈ 성경을 제대로 보면, 예수님만이 짱 !!
그렇다면 여기에 있는 이 성경말씀을 보면서 나온 결과가 무엇인가? 우리가 이렇게 성경을 보는데, 그런데 성경이 문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성경문자를 해석한 결과가 과연 어떻게 되어야 하느냐는 말이다. 그 성경말씀의 주인공이 바로, 베드로후서 1장에도 나오지만 예수님의 영인 성령님께서 쓰신 것인데, 그래서 제대로(?) 해석을 하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벧후 1:20)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벧후 1: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그렇게 예수님이 나오는 것이 정답인데, 하지만 사람들이 성경말씀을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오는 게 아니라 이 세상의 철학이 나온다고 하면, 그것은 바로 그 사람에게는 자기도 미처 몰랐던 자기의 밑바탕에 있는 세상의 습관화된 사상이 성경말씀을 왜곡되게 해석해서 나온 결과라는 것이다.
여기서 고린도후서 10장의 말씀을 보겠는데, 5절과 6절을 제가 읽습니다.
(고후 10:5-6)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
말씀은 아주 간단한 것 같은데, 그런데 엄청난 스케일이 있다는 것이다. 즉 5절에 보면,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위에 그리스도가 계신다면, 당연히 그 밑에 있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지고 있는 사상은 그리스도에게 굴복해야 한다는 말이다.
◈ 벌, 벌, 벌 !!
그런데 만약에 인간들이 그리스도에게 굴복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가? 6절에도 나오듯이,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그냥 한 글자로 줄여버리면 '벌' 인데, 즉 바로 그러한 놈들에게는 벌을 내리겠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에게 복종하지 않는 인간들에게는 말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목사님, 저는 교회에 다니는 취미가 없어서, 이제부터는 그만 다니지 않으려고 합니다" 라고 하는데, 물론 자기가 취미가 없어서 영 그렇게 교회에 다니기 싫어서 다니지 않겠다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는 것이다. 자기가 다니기 싫다는데 말이다. 그러나 벌을 받는데 있어서는 결코 면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생각대로 하면 되고 !!
요즘 이런 유명한 CF가 있는데, "생각대로 하면 되고" 라고 말이다. 그러니 교회에 나오기 싫으면 안 나오면 되고, 천국에 가기 싫으면 안 가면 되는데, 그렇게 무엇이든지 생각대로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어디에 걸리는고 하니, 자기는 자기 마음대로, 즉 자기가 하고 싶은 데로 하면서 살았는데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6절 말씀에서 뭐라고 하는가? 그런 자들은 벌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원래 벌은 누구에게 내리는 것이 맞는가? 벌은 아무런 잘못도 없는 자에게 내리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 어떤 죄를 지은 자에게, 즉 죄인에 벌을 내린다는 말이다. 물론 이 세상에서는 억울한 감옥살이도 많지만 말이다. 왜 감옥에 가면 모두가 다 자기는 억울하다고 여긴다고 하지 않는가?
◈ 우리 성경공부의 방향은?
그러니 우리 성경공부의 방향이 정해졌는데, 이 세상의 사상을 왜 공부합니까? "왜 인간은 죄인인가?" 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 없는 머리카락도 마구 뜯어가면서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세상 철학이나 사상에 대해서 공부를 하지 않으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야 될 성경해석이, 아무리 성경을 보고 QT를 해도 그만 이 세상의 사상 쪽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는 것이다.
흔히들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하는가? "예, 제가 QT를 하는 것은 이 세상사상을 연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예수님께 복종하기 위해서입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모두가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그런데 거기서 그리스도만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정말 그리스도 앞에 무엇이 굴복되는지, 바로 그런 사상도 같이 나와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그리스도를 믿고 무릎을 꿇는 것까지, 그렇게 둘 다를 다 알아야만 제대로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것이 된다는 말이다. 즉 "나는 그리스도만 알아" 라고 해버리면 안 되고, 과연 그리스도 앞에서 어떤 사상들이 복종을 하는지, 그러한 것도 다함께 같이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 저는 제사 때에 찌짐은 굽지만 ??
특히 교회에 다니는 여자들이 뭐라고 하는가? 자랑삼아서(?) "저는 제사 때가 되면 찌짐(?)은 굽지만 절은 안 해요" 라고 하는데,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웃기는 이야기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은 바꾸어 말하자면, "저는 예수님을 믿기는 믿는데, 이 세상의 것도 그냥 따라가요" 라는 것과도 같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드러나는 것은, 즉 무릎을 꿇고 복종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벌을 받는 사람들과 함께 하고, 죄인을 보고서도 죄인이 아니라고 해버린다면, 도대체 그리스도에게 복종해야 하는 이 고린도후서 10장의 의미가 전혀 살아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라고 하면 "나는 믿습니다" 라고, 그렇게만 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어떤 어떤 것들이 복종을 하는지, 그것도 겸해서 같이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 요한복음 3장 - 빛은 어둠과 함께 있어야 !!
요한복음 3장에 보면 상당히 어려운 대목이 나오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빛은 빛으로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빛은 어둠 속에 있고, 또 어둠은 빛 속에 있어야 하는데, 즉 빛은 어둠과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같이 있을 때 어둠은 어둠이고 빛은 빛이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빛은 어둠을 정죄하기에 말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정죄가 무엇인가? "니는 죄인이다" 라는 것인데, 그렇게 빛은 반드시 어둠을 정죄하도록 되어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자꾸만 뭐라고 하는가? "뭐 그리 좋은 것이 좋다고, 나만 알아서 교회에 다니면 되는데, 정죄는 무슨 정죄야" 라고 나오니 말이다. 하지만 다시 말씀드리지만, 빛은 반드시 어둠을 정죄하도록 되어있고, 또한 그 빛은 어둠이 무서워서 반드시 도망을 치도록 되어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빛과 어둠의 구조가 성립이 되어있을 때, 비로소 빛은 빛답게 활동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제가 지금 지어내서 하는 이야기가 전혀 아니고, 요한복음 3장 19절에서 20절 말씀이 바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요 3:19-20)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 미워, 미워, 미워 !!
아무튼 우리가 이렇게 철학공부를 한다는 것에 대해서 미워하고 싫어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데, 특히 목회자들 가운데 시기하고 질투하는 자들이 그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비난을 하면서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무엇인고 하니, "오직 그리스도만 알면 되지, 철학과 같은 것은 몰라도 돼" 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그리스도를 '탁' 하고 깨어보면 성경에 나오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이 세상의 사상에다가 겉에만 그리스도를 색칠해놓았다는 것이다. 즉 가짜 그리스도라는 말이다. 그러니 당연히 이 세상 학문인 철학과 같은 것을 싫어하는데, 자기의 본색이 다 드러나니 말이다.
◈ 이유는 단 하나, 그들은 짝퉁이기에 !!
그렇게 모두가 짝퉁이기 때문에 하는 말이 "열심히만 하면 된다" 라는 것인데, 아무튼 자기들은 매일같이 열심히 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너는 죄인이야" 라고 하는데, "예, 열심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동문서답도 아니고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알아야 하는 것은, 성경말씀이 그리스도를 증거한다고 해서 그리스도만 달랑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마치 빛이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둠과 같이 있듯이 말이다. 그렇게 어둠을 어둠이라고 지적을 하면서 나온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철학을 공부하는 것도 그런 차원이라는 것이다.
◈ 그리스도 앞에 복종되어야 하는 것은?
그렇다면 그리스도 앞에 과연 어떤 것들이 복종되어야만 하는가? 이것이 상당히 중요한 대목이기에 좀 설명을 해야하는데, 여기서 제가 객관식 퀴즈를 하나 낼텐데, 과연 그것이 맞는 이야기인지 한번 들어보고 맞추어 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여기 계시고 우리는 다른 이곳에 있다고 하면, 여기서 "우리는 철학을 통해서 그리스도에게 나아가야 한다" 라고 한다면, 이것이 과연 맞는 말인가? 분명히 틀렸는데, 이것이 바로 중세신학이었다는 것이다. 사실 지금까지의 기독교 신학이 그러했는데, 즉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알려주는데 있어서 철학을 통해서 알려주자고 했다는 말이다. 그래서 철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대한 반발이 무엇이겠는가? 당연히 "그런 철학은 더 이상 필요 없다" 라는 것인데, 하지만 그렇게 철학의 필요성에 대해서 주장하는 것도 틀렸고, 그에 대한 반발심도 역시나 틀렸다는 말이다. 즉 둘 다 아니라는 것이다.
◈ 아버지, 그동안 무엇을 했습니까?
예를 들어서, 아버지와 엄마와 딸이 살아가는 단란한 가정이 있었는데,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서 그만 아버지가 가출을 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머니와 딸은 둘이서 그야말로 고생고생을 하면서 살았는데, 그런데 약 20년이 지난 다음에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머니와 딸이 아버지에게 뭐라고 하겠는가? "아버지 반갑습니다. 어서 오세요"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무엇을 했습니까?" 라고 반드시 묻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다시 새장가를 가서 자식이 있는지 어떤지, 아무튼 그런 것을 묻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냥 문전박대를 할 가능성이 훨씬 더 높지만 말이다.
◈ 예수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나타났다고 하면, 그러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는가? 다음과 같이 반드시 묻게 되어있는데, "당신은 누구십니까?" 라고 말이다. 그러면 예수님은 뭐라고 하시겠는가? "죄인들을 구원하려고 왔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 인간들은 뭐라고 하겠는가? "예,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라고 하는 인간들은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인간들은 반박하기를, "우리가 왜 죄인이며, 왜 우리가 알아서 열심히 노력해서 구원을 받으면 되지 않는가?"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왜 그리스도가 나타나서 자기들을 보고는 죄인이라고 하고, 또 왜 자기의 피와 용서로 구원을 받는다고, 그렇게 자기의 공로로 일방적으로 건져야만 한다고 하느냐는 것이다. 그런 물음이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 너희들은 악마에 빠져있어 !!
인간들이 그야말로 오랜만에 메시야를 만났는데, 아담 이후에 수 천년만에 처음으로 왔다는 것이다. '예수' 라는 이름의 뜻이 무엇인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질 자' 라는 것이다. 여기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죄' 라는 것은, 평소에 인간들이 생각하는 그런 수준의 죄가 아니라, 인간은 죄 속에 아예 갇혀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은 그동안 뭔가에 뒤집어 씌어져 있었는데, 마치 벙커에 들어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것을 예수님은 아주 간단하게 '악마' 라고 하는데, 그런데 이 악마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이러한 악마가 인간에게 뭔가 지시하고 가르친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죄라는 것이다. 곧 이 악마가 죄의 원흉이고, 이 악마로부터 자꾸만 지시를 받아왔다는 것이다. 물론 선악과를 따먹을 때도 그러했지만 말이다.
◈ 메시야를 배척함으로서 인간의 실체가 !!
이러한 죄가 인간세계에 있었기 때문에, 비록 메시야가 왔지만 그 메시야가 명령을 한다고 해서 순종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즉 이러한 죄로 말미암아서 메시야를 배척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렇게 배척하는 것이 하나님의 전략이었는데, 왜냐하면 인간들이 메시야를 그렇게 배척을 해주어야, 인간들이 자기들도 미처 몰랐던 자기 실상을 폭로하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다.
* A : 나는 예수가 미워!
* B : 왜 그렇게 미운데?
* A : 그냥 미워!
* B : 도대체 이유가 무엇인데?
* A : 그건 나도 몰라.
* B : 정말 몰라?
* A : 정말 몰라. 그냥 미워!
* B : ???
그렇게 예수님을 배척하는 계기가 되는데,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가?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모든 말씀 속에는 무엇이 들어있는고 하니, 인간의 죄를 근원적으로 들추어내는, 즉 배척을 받을 만한 것들이 섞여서 쏟아져 들어온다는 것이다.
◈ 성경에서도 자기 의를 끄집어내려는 인간 !!
그러면 여기에 이렇게 성경말씀이 있고, 또 우리 인간들이 이렇게 있는데, 그래서 우리가 성경말씀을 본다고 하면 어떻게 되는가? 이 성경말씀 속에는 우리 인간들이 싫어할 만한 것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성경을 보든 무엇을 하든지 간에, 자기가 무엇을 했으면 자기는 잘났고 의롭고 착하다는 것을 확인하려고 하는데, 그래서 성경을 보더라도 그런 것을 확인하려고 한다는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역시 나는 무엇을 하든지 간에 대단해. 아직도 이렇게 교회에 열심히 잘 다니고 있고 말이야" 라고 하면서, 그렇게 자기를 자랑하고 으시댈 수가 있는 요소를 성경에서 골라 골라서 끄집어낸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남편이 잡채를 아주 싫어하는 아내가 있는데, 그런데 그 여자가 마트에 가서 잡채거리를 골라서 샀다고 하면, 그래서 집에 가서 잡채를 잔뜩 해놓았다고 하면 당장에 부부싸움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저희 형님도 잡채를 아주 싫어하는데, 아무튼 마누라가 그렇게 하면 큰 싸움이 벌어진다는 말이다. 뻔히 자기가 싫어하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렇게 했으니 말이다.
◈ 예수님은 순악질 여사 ??
그런 여자가 일종의 '순악질 여사'(?) 라고 할 수 있는데, 아시죠? 순악질 여사라고, 왜 일자 눈썹의 그 여자 말이다. 그런데 바로 그런 순악질 여사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자기 남편이 잡채를 싫어하는 것이 폭로가 된다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우리 인간들에게 들이대는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 인간들은 이미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입장인데, 그렇게 추방이 되었다는 것은 생명나무를 따먹을 자격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자격도 되지 못하면서 영생을 얻겠다고 우기는데, 즉 생명나무에서 쫓겨났으면서도 다시 따먹겠다고 시도하는, 그런 자기 주제파악이 되지 않는 몰지각함을 지적하신다는 말이다.
그래서 주님은 그러한 우리 인간들의 정체를 폭로하고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나오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예수님을 순악질 여사라고 했는데, 인간의 생존의 모든 것을 다 간섭하고 쥐어박고 야단을 치고 하신다는 것이다.
◈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
그래서 이사야 53장에 보면, "사람들에게 싫어한바 되었다" 라고 하는데, 즉 모든 사람들이 다 그분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이 그야말로 묘수이냐는 것이다. 아무도 그분을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작전인데, 아무도 믿지를 못했다는 말이다.
(사 53:1)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사 53: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사 53: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다시 말해서, 결국은 인간들의 배후 속에 악마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인간이 악마와 결탁이 되어있기 때문에, 인간만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 배후에 있는 악마를 다함께 표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자기를 인간이 도저히 믿을 수가 없도록 해서, 바로 그들을 정죄하기 하는 방식으로 오셨다는 것이다.
◈ 먼저 율법이 오고, 그 다음에 복음이 !!
그래서 이 하나님의 말씀이 처음에는 율법으로 오고, 두 번째로는 그 율법의 기초아래에서 기쁜 소식으로 왔다는 것이다. 즉 율법 하에 복음이 오게 되어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율법을 무시하고 복음을 이야기하면 엉터리라는 것이다. 이 율법의 기능은 정죄하는 것인데, 즉 죄를 죄가 되게 말이다. 모든 자들의 입을 막고, 심판에 이르게 하고, 그래서 저주에 이르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므로 이 성경말씀 속에는 율법적 기능과 복음적 기능, 이 두 가지가 모두 다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두 가지 중에서도 성경전체가 먼저 율법적 기능으로 와야만 십자가가 십자가답게 빛이 난다는 것이다. 순서가 그렇다는 말이다.
◈ 여러분은 과연 믿음이 있습니까?
그래서 저는 설교를 할 때마다 어떤 마음가짐인고 하니, 과연 우리에게 신앙이 있는지, 그것을 밀어버리고 다시 시작하는 기분으로 한다는 것이다. 즉 "처음부터 새로 다시" 라는 것이다. 신앙이 있다고 해버리면, 그런 신앙의 기초 위에다 설교를 해야 하는데, 하지만 그렇게 되어버리면 이 신앙이 어느새 자기 의가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즉 "그건 이미 알고 있으니, 그 다음 진도를 나갑시다" 라고 말이다.
◈ 마귀의 구원론 = 자기 의 + 주님의 의 !!
그러므로 이렇게 되면, '자기 의'에다가 '주님의 의'가 더해져서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배후에 있는 악마가 주장하는 내용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악마의 대변자가 곧 바리새인들인데, 그래서 하나님은 고맙게도 이 바리새인에게 먼저 부딪친다는 말이다.
여기서 참으로 재미있는 것은, 백성들이 귀신 들린 것을 쫓아내어 주시면서도 정작 바리새인이 들린 귀신은 모르는 척(?) 하신다는 것이다. 병든 자와 가난한 자에게는 병도 고쳐주고 귀신도 쫓아주고, 그렇게 자비를 베풀면서도, 그런데 바리새인들에게는 뭐라고 하는가? "너희 애비는 마귀이고, 너희는 바로 뱀새끼이다" 라는 것이다.
◈ 바리새인은 바리새인대로, 가롯유다는 가롯유다대로 !!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고 하니까,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이 해야할 일이 있는데, 그들은 마귀의 역할을 톡톡히 해주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롯유다는 이런 바리새인들과 같은 권력자들과 결탁을 했어야 하고 말이다. 그래야 십자가 사건이 터져 나온다는 것이다. 물론 민중들은 그런 것도 모르고 호응을 했지만 말이다.
이러한 바리새인들의 주장이 무엇인고 하니, 기존의 자기 의가 이렇게 있는데, 거기에 하나님의 은혜를 더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까 말한 "구원 = 자기 의 + 하나님의 은총" 이라는 것이 어디서 나오는가? 그것은 바로 바리새인들이 구약의 출애굽기 등을 살펴보면서, "아,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로 구원을 받았으니 이제는 우리의 행함으로 영광을 돌리자" 라고 하는, 그런 바리새인들의 이성적인(?) 생각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과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그러니 이제 행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자는 말이다. 그러니 아까 말한 마귀의 그 공식이 바로 바리새인들의 공식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무엇인고 하니까, 이런 인간의 행함이 없다면 앞에 있는 것도 그만 무효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 십자가만이 전부가 아니라, 순종을 해야 구원을 받는다 ??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가 아닌가요? 이것이 참으로 중요한 이야기인데, 여기서 제가 퀴즈를 하나 낼텐데, 한번 풀어보라는 말이다. "십자가만이 전부가 아니라, 순종을 해야 구원을 받는다" 라고 했을 때, 에베소서 4장에 보면 믿음은 하나라고 했는데, 우리가 구원을 받은 사람이 맞다고 하면 얼굴들은 각기 다 다르고 성격은 모두 달라도 그러나 믿음은 하나라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십자가가 전부가 아니라 다른 것을 또 해야 한다면 도대체 믿음의 대상이 몇 가지가 되어야 하는가? 십자가가 전부가 아니니, 믿음의 대상이 하나, 둘, 셋, 이렇게 계속해서 늘어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되는가? 십자가를 믿었는데 뒤의 것을 믿지 못한다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말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요? 믿음의 대상이 여러 개가 되니 말이다.
(엡 4:5)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엡 4:6) 하나님도 하니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 과연 누구를 믿어야 하지?
사도신경에 보면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라고 하는데, 사실 여기서부터 모순이 되는데, 왜냐하면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데, 그런데 이 사도신경에 의하면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데, 그 외아들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그리고 여기서 하나를 더해보면, 사도신경 마지막에 보면,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라고 하는데, 그런데 여기서 거룩한 공회를 믿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구원에서 탈락하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 믿음의 대상이며 믿음의 내용이 그만 믿음을 분열시키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 너는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아이들에게 가장 괴로운 질문이 무엇인고 하니, "너는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라고 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엄마는 좋은데 아빠는 싫다고 하면 그 아이는 자식이 아닌가? 반드시 엄마와 아빠를 같이 사랑해야 하는가? 엄마는 용돈을 주지 않는데, 아빠가 만원을 주었다면 그 순간에는 아빠에게 마음이 끌리는데, 그러면 그 아이는 자식이 아닌가?
성경인 로마서 3장 등에서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라는 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까, 믿음의 대상이 두 개나 세 개나 아니라, 즉 그렇게 믿음의 대상은 여러 개가 아니라, 오로지 단 하나라는 것이다. 하나 말이다.
(롬 3: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 주님께서 하신 것을 믿습니다 !!
사도신경에 나오는 모든 것이나, 성경에 나오는 것이 무엇을 모이는고 하니, 그렇게 하나로 모이는데, 그것은 "내가 믿는다" 라고 하는 자기 행함의 차원이 아니라, "주께서 하신 것을 믿는다" 라는 것이다. 즉 "내가 어느 것을 믿을까요?" 라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자기는 세 개나 믿으니 두 개를 믿는 사람보다 믿음이 좋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은 오히려 자기 행함을 부정해버리고, 그야말로 믿음은 주님의 믿음이 자기에게 선물로 왔다는 것이다. 그러니 믿음의 주체가 당연히 주님께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주가 하나이니 믿음도 하나인데, 즉 믿음이란 것이, 자기가 믿는 것이 여러 개 중에서 몇 개를 골라서 믿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것을 하실 줄로 믿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구원을 받고 말이다.
◈ 비밀은 오로지 십자가뿐 !!
이렇게 예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다 이루셨다고 하는 그 증거물로서 나온 것이 곧 십자가인데, 바로 이 십자가가 중심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십자가가 중심인가? 그것은 바로 인간의 이성으로 알지 못하는 것이기에 말이다. 즉 숨겨진 것이고, 비밀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십자가 외에 나머지는 비밀이 아니라는 것이고 말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십자가가 비밀이라고 할 때는, 그 십자가에서 나오는 온유나 자비나 양선이나 화평 등도 모두가 다 비밀이라는 것이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도 역시 비밀이고 말이다. 바로 그런 비밀이 된 것을 믿음으로 말미암아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 바로 새언약 때문에 !!
그런데 이렇게 비밀인 것을 믿는 자들이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바로 이 십자가에게 자생적으로 뭔가가 나오는 것이 있기 때문인데, 그렇게 나오는 것을 두고서 3글자로 '새언약'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새언약' 말이다.
옛언약은 문자가 있으면 자기가 행해야 그 결과가 나오는 것이지만, 그런데 이에 반해서 새언약은 "인간은 입다물고 있어" 라고 하면서 그 주체가 예수님으로서,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 계셔서, 그분이 새언약을 이루시고 적용까지도 직접 다 알아서 하신다는 것이다. 즉 마무리까지도 모두가 예수님의 몫이라는 것이다.
◈ 믿음은 농협 쌀과 같아서 ??
제가 어제 아침에 농협에 가서 쌀을 3포대를 샀는데, 2포대는 교회에서 사용하고 1포대는 제가 먹고 말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누가 운반을 하는가? 물론 제가 쌀을 샀지만 운반은 그 농협에 남자직원이 있어서 집까지 고스란히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인데, 그것이 믿음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믿지 않는 사람은 무엇이라고 주장하는가? 십자가를 지는 것이 주님의 몫이고, 그것을 믿는 것은 자기 몫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십자가가 전부가 아니라, 십자가도 있고, 부활도 있고 말이다. 또 동정녀탄생도 믿어야 하고 말이다. 야고보서에 나오는 행함도 믿어야 하고 말이다. 그러니 믿어야 할 것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경을 법제화시켜서 모든 것을 다 믿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런 여러 개 중에서 하나라도 놓치게 되면 지옥에 가야 한다는 것인데, 왜냐하면 모든 율법을 지키더라도 하나라도 어기게 되면 지옥에 가야 하니 말이다. 물론 워낙에 믿음이 없으니 그러한데, 그래서 그들에게 믿을 것은 자기 행함밖에 없다는 것이다.
◈ 믿음에는 '잘 되지 않더라'가 없어 !!
그래서 그들이 뭐라고 하는가? "십자가를 믿었는데 잘 되지 않더라" 라고 하는데, 하지만 믿음의 특징이 무엇인가? 자기가 믿으려고 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신 믿음이기 때문에, "잘 안되더라" 라는 그 결과 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는 것이 곧 믿음이라는 말이다.
만약에 자기가 하는 것 같으면 "좀 더 열심히 해야지" 라는 것이 말이 되는데, 하지만 믿음의 주체는, 이 믿음의 주체를 다른 말로 하면 행함의 주체인데, 그런 구원시키는 행함의 주체가 주님에게 있기 때문에, 그런 주님이 실패할 수도 있다고 여기는 것이 무슨 믿음이냐는 말이다.
그것은 바로 마귀의 속삭임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니가 예수를 아무리 믿어도 헛방이다. 지금 예수를 믿다가 나가떨어진 사람들이 한 두 명이 아니다. 지금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목사들을 봐라. 얼마나 개판인가?"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해서 확인을 해보면, 어떤 때는 열심히 하면 잘 되는데 어떤 때는 잘 되지도 않고, 그리고 또 어떤 때는 사랑이 넘치다가 어떤 때는 사랑도 식어버리고 하니 실패한 것이라고 여겨버리고 말이다. 하지만 이런 것은 복음의 광채가 비추어지는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하는 자기 모습만 비추어진다는 것이다.
◈ 거울아, 거울아, 누가 제일 예쁘노?
그야말로 거울 속을 보아야 하는데, 그런데 백설공주의 왕비처럼 "거울아, 거울아, 누가 제일 예쁘노?" 라고 하면서, 거울에 비추어진 자기 모습만 바라보려고 하니 어떻게 되겠는가? 그리고 막상 자기가 아닌 백설공주가 나타나니 거울을 깨버리고 말이다. 인간은 그렇게 백설공주의 왕비처럼 자기 자신의 잘남을 확인하기 위해서 열심히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대해서 "목사님, 바리새인들도 그렇고 인간이 어떤 사상을 가지고 있기에 예수님이 와도 배격을 할 수밖에 없는가요?" 라고 질문할 수 있는데, 그것이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와있는데, 그것이 바로 철학인데, 과학도 여기에 포함되고 말이다. 보통 과학을 따로 여기려고 하는데, 그러나 과학도 철학에 포함이 되는데, 즉 과학에 기술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근원적인 진리 찾기도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과학에는 근원적인 진리를 탐구하는 분야와, 또한 기존의 있는 것을 어떻게 편리하도록 할 수 있는 기능적인 측면, 그런 두 가지 분야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과학이라는 것이 그리스도에게 복종을 해야 하는데 그렇게 못한, 그런 벌받을 짓만 하고 있다는 것이다.
◈ 저는 과학을 하는 죄인입니다 !!
물론 과학자들 중에서 신자가 있을 수도 있는데, 하지만 그런 사람은 "저는 과학을 했지만, 과학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공로로 구원을 받습니다" 라고 하는 고백을 한다는 것이다. 왜 그런 고백을 하는가? 자기는 과학을 하는 죄인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한 고백을 하는 사람을 주님이 지옥으로 보내겠는가?
누군가가 "당신의 그런 믿음이 어디서 생겼나요? 과학을 탐구해서 생겼습니까?" 라고 묻는다면, "아닙니다. 성령을 통해서 왔습니다" 라고 하면 되는데, 그런데 그게 아니라 과학적인 방법을 통해서 신을 증명하고 찾겠다고 하면, 그것을 분명히 벌받을 짓이라는 말이다.
그런 과거의 철학이 오늘날에는 과학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그래서 현대에는 모든 진리의 판단을 "과학적인가? 그렇지 않는가?" 라는 것으로 판단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샤르트르'와 '야스퍼스'를 공부하려고 한다는 말이다.
◈ 이제 샤르트르와 야스퍼스를 !!
아무튼 서론을 참으로 길게 했는데, 철학을 공부해보면 철학계에서 사용하는 특수한 용어들이 있는데, 그래서 먹고살기에 바쁜 사람들은 잘 모른다는 것이다. 과학의 특수용어라고 하니 아주 거창해보지만, 꼭 그런 것이 아니라 과학의 특수용어는 수학의 방정식이고, 철학의 특수용어는 그 용어 안에 의미가 함축이 많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일반인들이 한달 동안을 도를 닦아서 알 수 있는 것이 철학책에서는 한 문장으로 끝을 낸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딴에는 "나는 깨달았다" 라고 하면서 '유레카!' 라고 해도, 이미 서점에 가면 철학책 속에서는 한 줄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 과거에 다 나온 것이고 새로운 것이 없는데, 그 정도로 인간이 이미 자력으로 구원을 받고자 노력하고 애를 쓴 흔적들이 역력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에는 그런 방면의 전문가인 샤르트르와 야스퍼스를 초청해서 강의를 듣는다고 여기면 되는데, 그야말로 유명한 철학자들인데, 여기서 유명하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까, 소위 뛰어난 사람들 중에서 뛰어난 자들이라는 말이다.
◈ 아하, 나는 참으로 무식한 놈이구나 !!
그러니 그런 유명한 철학자들은 남들이 아는 것에다가 '+알파'가 있다는 것인데, 즉 자기는 이만하면 이제 모르는 것이 없다고 여겼는데, 그런데 이 샤르트르와 야스퍼스를 들이대면 "아하, 나는 참으로 무식한 놈이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럴 정도로 인생에 대해서 기를 '팍' 죽이는 철학자들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들보다 더 뛰어난 철학들은 없는가? 그 후대에 철학들이 더 뛰어나려고 하면, 앞의 선배들의 모든 주장을 다 끄집어내어서 일일이 다 분석하고, 그들의 약점을 지적하고 극복할 때, 비로소 인정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최근의 뛰어난 철학자들의 주장들은, 앞의 것을 모두 다 포함해서 '최근' 이라는 말이다.
◈ 먼저 '샤르트르'를 !!
먼저 '샤르트르'를 살펴보면, 장 폴 사르트르는 1905년에 태어나서 1980년에 돌아가신 양반인데, 그렇다면 도대체 이 사람이 무엇을 주장해서 그렇게 유명해졌는지 한번 알아보자는 것이다. 이제 교재를 살펴보자.
** 신이 있다면, 정말로 있다면, 인간 됨됨이는 이미 신에 의해서 규정 잡혀있다. 그러니까 '본질이 우선이다'는 말이다.
여기서 '규정' 이라는 것은, 아까 말한 철학의 함축된 특수용어라고 할 수 있는데, 즉 "너는 이거야" 라고 확정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본질이 우선이다" 라는 것은, 인간이 아무리 까불어도 하나님께서 "인간은 이런 것이다" 라고 하면, 거기에서 벗어나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 샤르트르 - 실존이 본질보다 앞선다 !!
그러니 바로 이 한 문장, 즉 "본질이 우선이다" 라고 하는 문장에 신학 3년을 공부한 모든 것들이 다 들어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신이 있기 때문에, 인간은 인간 스스로 자기가 누구인지는 알 수가 없고, 오로지 신이 이야기한대로 고분고분해야, 그것이 곧 인간답다는 것이다.
** 그러나 신이 없이 인간이 그냥 세상에 툭 던져진 채로 존재한다면 확정된 본질이라는 것은 앞으로 본인들 각자가 새롭게 정립하기 나름이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실존이 본질보다 앞선다'라고 말한다.
여기에 보면, 아까 '규정' 이라는 용어도 나왔고, 지금 여기에 '실존'과 '본질'이란 어려운 용어가 나온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실존이 본질보다 앞선다" 라고 해서, 그래서 이 샤르트르를 두고서 실존주의 철학자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 신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반면에, 그러나 '나'는 보인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보이지 않는 분이 "너는 이렇다. 나는 이렇다" 라고 했을 때, 그것을 우리들이 곱게(?) 그대로 받아드리는가? 아니면 정말 그런가 하여 보이는 '나'를 가지고 확인을 하려고 하는가? 도대체 어느 쪽인가? 분명히 후자라는 것이다.
성경에서 "너는 경건하라" 라고 했을 때, "예, 알겠습니다. 경건하겠습니다" 라고 하는 인간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을 두고 "내가 경건할 때만 신의 자녀이구나" 라고 이해하게 되는데, 즉 우리는 그렇게 '경건하라' 라고 하는 하나님의 지시가 눈에 보이지 않는데, 그러한 보이지 않는 '경건하라' 라고 하는 신의 명령이 오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눈에 보이는 자기 자신을 다듬어나간다는 것이다. 자기가 자신을 그렇게 다듬는다는 말이다.
◈ 인간은 항상 자기 자신을 가꾸고 다듬는데 !!
그것이 바로 샤르트르가 말하는 '실존' 이란 것인데, 이러한 눈에 보이는 실존을 잘 다듬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 즉 본질에 맞추려고 애를 쓴다는 것이다. 그래서 실존이 본질보다 더 앞선다는 것이다. 이제 이해가 됩니까? 물론 서양에서는 신과 하나님은 같은 말로 봐도 무방하고 말이다.
이러한 표현이 물론 교회에서 하는 말은 아니지만, 그러나 우리가 실생활에서 그렇게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보려고 애를 쓰다가보면, 신경을 어디에 쓰는고 하니, "하나님, 이만하면 어때요?" 라고, 자꾸만 그렇게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자꾸만 그렇게 자기 자신에 대한 개조, 혹은 변화 등을 추구하다보니,
하나님보다도 자기가 자기 자신을 맞추고 다듬어나가는데 더욱 더 매진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 결국 인간의 모든 관심사는?
그러므로 샤르트르에 의하면, 결국 인간의 모든 관심사는 어디에 있는고 하니,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가꾸고 가다듬고 하는데 초점을 맞추는데, 그것이 바로 인간의 제대로 된 진짜 모습이라는 것이다. 즉 본질이 아닌 실존에 관심이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철학공부를 해보면, 그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 얼마나 구구절절이 맞는 말만 하는지, 그야말로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보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만 샤르트르를 믿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샤르트르를 믿다가도(?) 또 다시 야스퍼스의 세계에 들어가게 되면, 이제 샤르트르는 버리고 이 야스퍼스의 이론에 그만 동조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도대체 인생을 얼마나 살았기에 그런 이야기를 다 할 수가 있는가?" 라고 신기해(?) 하면서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신이 있고 없고 하는 것은 불확실한 사항이요, 또한 인간에게 있어 신을 탐구하는 일보다 더 성급한 일들이 쉴새없이 다가오는 실정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 역시 확실한 것은, 나, 나, 나 !!
그러니 가장 확실한 것은 신이 아니라, 자기 부지런히 움직이고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 바로 그것이라는 말이다. 즉 그런 '나'가 있다고 하는 것은 하늘이 두 쪽이 나도 확실하다는 말이다. "신이 있는가? 없는가?" 라는 것은, 술잔을 기울이면서 몇 날 며칠을 토론해도 결론이 나지 않겠지만, 그러한 논쟁을 벌이고 있는 주둥아리(?)가 달려있는 자기 자신만은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확실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신이 있는지 없는지, 그런 믿음에 대해서는 왔다갔다하지만, 그러나 왔다갔다하지 않는 보다 더 확실한 믿음은 무엇인고 하니, 신이 있는지 없는지, 바로 그것을 따지고 있는 '나' 만은 있는 것이 그야말로 확실하다는 말이다. 물론 그런 인간이 한심하든 아니든, 그것에는 상관이 없이 말이다.
그런 자가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의 도마의 모습인데, 도마가 뭐라고 했는가? 자기는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는 것이다. 아주 훌륭한(?) 말인데, 그것이 바로 샤르트르의 표현대로 하면, "실존이 본질보다 앞선다" 라는 것이고, 좀더 쉽게 말해서, 자기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믿지 않겠다는 것이다.
(요 20: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 질문 - 그런데 그때 본다고 하는 것이 물리적으로 보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보이지 않는 생각까지도 포함하는 것인가요?
눈에 보이는 것과 그런 생각까지도 모두 다 포함하는 것인데, 생각은 자기가 나오라고 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불쑥 불쑥 튀어나오는 것인데, 그렇게 불쑥 불쑥 나오는 것까지도 '나' 속에 집어넣으면, 그렇게 불쑥 불쑥 나오는 것까지도 모두 포함해서, 그것이 바로 '나' 라는 말이다. 그리고 "신이시여, 제가 제대로 살도록 노력은 할게요" 라는 수준이고 말이다. 왜냐하면, 신은 언제나 불확실하니 말이다.
◈ 목사님, 말씀만 하세요 !!
그러므로 교인들은 불확실한(?) 복음을 듣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지시를 받기를 원하는데, 그렇게 해야 실존이 본질보다 앞서는 인간의 본성에 조화가 되는 것이고, 부담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목사가 그것도 모르고는 "무엇을 하세요" 라고 하지 않고, 자꾸만 "믿으세요" 라고 하면, 교인들이 뭐라고 하겠는가? 답답해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인들은 뭔가를 하고 싶어서 엉덩이가 들썩들썩하는데, 그러니 그러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백성이 아니라 샤르트르에게 속한 백성이라는 것이다. 그 이전에는 그것을 전혀 몰랐는데, 불신자인 샤르트르를 공부해보니, 그것이 바로 자기의 생각과 똑같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도 불신자와 전혀 다름이 없다는 것이 발각이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러한 샤르트르에게 뭐라고 하겠는가? 그에게 설득을 하는 것이 아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즉 지혜로운 자에게는 숨기고 오히려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들에게 하는 소리라고 하면서, 그렇게 은폐를 시켜버린다는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삐쳐서(?) 예수님을 믿지 않고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인간은 본질로 모르는 채 우선 존재성부터 품고 살아가게 되었다. 여기서 공포와 불안이 생겨난다.
◈ 하지만 문제는 공포와 불안 !!
무슨 말인고 하니, 인간은 실존을 가지고서 본질에 가까이 가려고 애를 쓰는데, 그런데 그렇게 애를 쓰면 쓸수록 어떤 현상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것이 두 가지 현상으로 나타나는데, 샤르트르는 주장하기를 첫째는 '공포'이고, 둘째가 '불안'이라는 것이다.
지금 진도를 나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이것을 좀 설명하고 넘어가야 하겠는데, 지금 인간이 어떤 노력을 하는고 하니, 신에게 가까이 나아가려고 애를 쓰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제 아무리 노력을 하고 애를 써도 제거가 되지 않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곧 공포와 불안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이렇게 지우개가 있는데 이것을 옮기라고 명령을 하면 그냥 옮기면 되는데, 그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아무리 하려고 해도 안 되는 그런 한계상황이 드러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불안과 공포라는 것이다.
◈ 엄마, 왜 또 전화야?
그것이 어떤 경우인고 하니, 그런 경우가 엄청나게 많이 있는데, 예를 들어서,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었는데, 한 엄마는 느긋하게 잠을 자고 있는데, 그런데 다른 쪽 엄마는 불안해서 어쩔 줄을 모른다는 것이다.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교통사고는 나지 않을지, 학교에서 장난치다가 다치지는 않을지 말이다.
실제로 학교에서 장난을 치면서 놀다가 다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참다가 참다가 안 되어서 아이에게 전화를 하게 되는데, 그러면 아이가 뭐라고 하는가? 반갑다고 좋아하는가? 그것이 아니라 실컷 핀잔만 듣는다는 것이다.
* 엄마 : 야야, 지금 별일 없지?
* 아이 : 엄마, 왜 또 전화야?
* 엄마 : 불안해서 그렇지.
* 아이 : 다른 엄마들은 전화를 안 하는데.
* 엄마 : 그래도 불안해서 말이다.
* 아이 :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엄마는 너무해?
* 엄마 : 나도 그런 줄 알지만, 왜 그런지 나도 몰라.
* 아이 : 정말 그 이유를 몰라?
* 엄마 : 정말로 나도 몰라.
* 아이 : ? ? ?
이러한 불안과 공포가 있는 이상 인간은 본질에 도착해서 안정감을 찾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평생을 통해서 다가오는 이런 불안과 공포, 바로 이것 때문에 인간은 몸살이 날 지경이란 말이다. 요즘 현대인에게 스트레스는 떼어내고 싶어도 도저히 떼어낼 수가 없는데, 이러한 스트레스는 어디서 오는가? 그것은 바로 알 수 없는 공포와 불안에서 나온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샤르트르의 주장에 대해서 어떻게 하겠는가? 그야말로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솔직히 성경을 덮어버리고 샤르트르를 공부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하고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요?
◈ 이제 불안과 공포를 제거해버리면 !!
그렇다면 이제 샤르트르에게 남은 일은 무엇인가? 이러한 불안과 공포를 제거해버리면 그야말로 진짜 '나' 다운 '나'가 된다는 것이다. 본질에 일치가 되는 말이다. 그래서 지금부터는 불안과 공포에 대한 원인을 찾아 나서면 되는데, 문제는 간단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샤르트르는 누구를 비웃는고 하니, 교회에 가는 사람들이 그런 비웃음의 대상이 되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정작 불안과 공포의 원인을 찾아서 제거할 생각은 하지 않고, 그냥 그것을 없애버리려고 교회에 가서 철야기도를 하고 난리를 친다는 것이다.
◈ 어디, 교회에 간다고 해결이 되는가?
물론 하나님을 찾아가서 경배하면 그 순간은 불안과 공포가 사라지고 해소가 되는 것 같은데, 하지만 5분도 지나지 않아서 다시금 불안하게 되는데, 그러니 보다 더 근원적인 해결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러한 해결책도 없이 교회에 가는 것은, 마치 약을 먹었을 때만 효과가 있고, 약 기운이 다 떨어지면 다시 아픈 것과 같다는 것이다.
샤르트르는 서양인이니 기독교 문화에 속한 사람인데, 그런 그가 하는 말이 "예수쟁이들아, 내 말을 들어라. 목사의 말을 듣지 말고 말이다. 그리고 성경도 이제 그만 보고 말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경보다 더 똑똑한(?) 자기에게 와서 배우라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이 양반이 유명한 철학자 되었는데, 그냥 가만히 있었는데 유명해진 것이 아니고 말이다. 아무튼 무조건 도를 닦았다고 유명인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뭔가 설득력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물론 다른 사람들도 같이 공감을 해야 하고 말이다.
◈ 샤르트르가 말하는 불안과 공포의 시작은?
그렇다면 도대체 인간의 불안과 공포가 어디서 시작되는가? 물론 샤르트르에 의하면 말이다. 어떻게 그것이 궁금하지 않나요? 지금부터 그러한 궁금증을 이 샤르트르를 통해서 한번 살펴보자는 것이다. 샤르트르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말이다.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이렇게 인간은 자기가 있다고 하면, 그 인간은 또 이렇게 점선으로 자기가 되고 싶어하는 자기가 또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되지 않아서 불안과 공포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기 자신을 믿지만, 그러나 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되고 싶어하는 자기 자신을 믿는다는 말이다.
◈ 주여, 저는 이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
무슨 말인고 하니, 사람이 교회에 가서 기도를 할 때, "하나님,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라고, 그렇게 현재 자기 상태를 요구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주여, 저는 이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라고 하지 말이다. 즉 현재의 자기 자신이 아니라, 자기가 되고 싶어하는 자기를 염두에 두고서 기도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자기가 되고 싶어하는 '나'를 상정하게 되는데, 그것을 목표로 잡는다는 것이다. 보통 그것을 꿈, 혹은 비전이라고 하고 말이다. 교회에서 하는 이야기가 그런 것이 아닌가? 물론 선교단체는 더 노골적으로 강조하고 말이다. 어려운 철학용어를 사용하다가 오랜만에 교회용어가 나오지 이해가 바로 되지요?
◈ 희망사항에 도달하지 못한 미흡함 때문에 !!
이러한 것을 두고서 샤르트르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그것이 바로 불안과 공포의 요소라는 것이다. 아직까지 자기가 도달하지 못하고 차지하지를 못한 것, 그런 것을 상정함으로서, 즉 그렇게 걸어놓음으로 말미암아서 틈이 생기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바로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 그러한 틈으로 인한, 즉 미흡함이나 모자람 때문에 불안하게 되고, 바로 그러한 불안함을 사람들은 해소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애를 쓰게 된다는 것이다. 즉 '애씀' 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노력하면, 그것은 마치 사막의 신기루와 같아서 분명히 이쪽에 있다고 생각을 했는데, 그래서 이쪽으로 오게 되면 또 그것은 저쪽으로 가버리고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또 따라가면 저만큼 가있고, 또 가보면 또 그렇게 저만치 가버리고 말이다. 그러니 마치 밤에 달을 쫓아가는 것과도 같은데, 아무리 열심히 따라가도 달을 또 저만치 가고 없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불안과 공포는 계속해서 자기와 그런 거리를 유지하게 되고, 따라가면 없고, 따라가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평생을 살아도 실존에 머물게 되는 것이지, 결코 자기 본질에 도착하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그 어느 누구라도 말이다.
◈ 과연 부자가 되면 행복한가?
인간이 돈이 많고 부자가 되면 행복한가? 샤르트르는 거기에 대해서 웃기지 말라고 한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인간은 500억을 벌게 되면, 그제야 1000억을 번 사람이 눈에 들어온다는 말이다. 이전에 자기 집에 50만원 있을 때는 1000억을 번 사람은 전혀 자기 눈에 들어오지를 않았는데 말이다. 1000억을 번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적어도 500억의 고지를 넘어서야 비로소 보인다는 것이다. "아쿠, 이런 동네도 다 있네" 라고 하면서 말이다.
시장에 가보면 3장에 1000원을 하는 팬티가 있는데, 돈이 없는 사람은 그런 것들이 참으로 고맙다는 것이다. 그런데 돈이 500억이 있는 사람은 한 장에 100만원을 하는 팬티를 사 입어도 그렇게 행복을 느끼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 것을 사서 입지 않으면 그들과 같은 동네에서 놀지를 못하니 말이다.
◈ 대자존재와 즉자존재 !!
이렇게 자기가 되고 싶어하는 그런 '나'를 두고서 '대자(對自) 존재' 라고 하는데, 역시 어려운 용어인데, 철학은 이렇게 자꾸만 용어들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규정, 본질, 실존 등등이 계속해서 나왔는데 말이다. 아무튼 이 '대자(對自) 존재' 라고 하는 것은, 한자를 보면 잘 이해가 되는데, '나'와 마주보고 있는, 즉 '나'와 한 쌍이라는 말이다.
◈ 한 쌍의 부부는 과연 몇 명일까요?
우리가 지금까지 샤르트르와 관련해서 공부한 것을 적용을 시켜보면, 예를 들어서, '부부' 라고 하는 것은 두 사람이 사는 것이지만, 그러나 실제로는 4명이 산다는 것이다. 남자의 대자존재가 있고, 아내의 대자존재가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니 부부싸움이 나지 않으려고 해도 안 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남자는 여자의 대자존재를 보고 이야기하는데, 여자는 남자의 진짜 존재(?)를 보고 이야기하니 말이다.
남자의 경우에는, 자기 아내가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밥상을 차려주는 그런 여자가 되기를 바라는데, 그러고 보니 6명이 산다고 볼 수가 있는데, 남자가 생각하는 여자가 따로 있고, 또 여자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남자가 따로 있으니 말이다. 아무튼 남편에게서 그러한 잔소리를 들으면, 여자의 경우에는 자기가 일찍 일어나서 밥을 해주어야 한다는, 그런 대자존재가 또 생기고 말이다.
◈ 아니, 한 지붕에 6명이나 !!
그러므로 이렇게 한 지붕에 6명이 살면 반드시 싸움이 일어나게 되는데, 하지만 서로가 공격대상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누구에게 이야기를 하느냐는 것인데, 자기를 보고 이야기하라는 말이다. 자기가 되고 싶어하는 그 대상이 아니라 말이다.
그러면 남자는 뭐라고 하는가? 자기 아내가 미쳐 그런 사람인 줄 몰랐다는 것이다. 마누라에게 그렇게 이미 질렸으니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말이다. 하지만 여자는 뭐라고 하는가? 자기는 그런 여자가 아니니 제발 지금 있는 자기를 보고 이야기해달라는 것이다.
* 남편 : 자기야, 사랑해.
* 아내 : 나두 사랑해.
* 남편 : 그런데 왜 아침에 밥을 안 하지?
* 아내 : 아침밥? 그건 좀 곤란해.
* 남편 : 나는 당신이 그런 여자인 줄 몰랐어.
* 아내 : 뭐라고?
* 남편 : 나는 그런 당신에게 이미 질렸어.
* 아내 : 뭐야? 당신 지금 누구에게 말하는 거야?
* 남편 : 누구라니?
* 아내 : 나를 보고 이야기를 하라니까?
* 남편 : ? ? ?
* 아내 : AC, AC, AC
◈ 두 사람은 결혼해서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
다시 말해서, 그 두 사람은 자기들이 결혼을 할 때는 두 명인 줄 알았지 6명인 줄은 상상도 못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결혼이 행복의 전부라고 여기고서 결혼을 했는데, 물론 두 사람만 있다면 동화책의 결말처럼 "두 사람은 결혼해서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라는 것이 가능한데, 그러나 동화책에는 결혼을 하고 난 다음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책 내용이 길어지니 말이다.
동화책에 결혼을 하고 이혼한 내용이 나오던가요? 그러니 이런 모든 것이 다 허상인데, 이렇게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본질보다 허망한 것을 만들어내고, 그 만든 것에 얽매여 살아가기에 불안과 공포가 생긴다는 것이다. "내가 저렇게 되어야 하는데, 아이쿠 지금 내 꼬라지야. 지금 이게 뭐꼬?"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것이 바로 대자존재인 인간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교재를 살펴보자.
** 인간은 자신의 삶 속에 완전히 들어가 있지 않고 존재하면서 자신을 의식하고 있다. 이것을 '대자(對自) 존재' 라고 한다. 하지만 돌멩이 같은 경우에, 그것들의 내부는 아주 작은 빈틈도 없이 충만하다. 자아와 자기가 이중으로 분리되어있지 않다. 이런 존재를 '즉자(卽自) 존재' 라고 한다.
◈ 인간과 돌멩이가 왜 다른가?
여기에 '대자(對自) 존재'에 반해서 '즉자(卽自) 존재' 라고 나오는데, 이 즉자존재를 설명해보면, "인간과 돌멩이가 왜 다른가?" 라는 것인데, 즉 돌멩이는 즉자존재 밖에 없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돌멩이가 "내가 저렇게 되어야 하는데, 아이쿠 지금 내 꼬라지야" 라고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즉시' 라고 할 때 바로 그 '卽' 이라는 것이다.
철학은 용어가 이렇게 어려운데, 왜 그런고 하니, 일일이 다 설명을 하라면 너무 길어지지 함축해서 간단 간단하게 함축된 용어를 사용해서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물론 철학을 잘 모르는 읽는 독자들의 입장에서는 엄청 힘이 들지만 말이다.
* 질문 - 그러면 인간만이 '대자존재' 라는 이야기이지요?
바로 그것인데,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인간이나 돌멩이나 공통점이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