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7:13-18 (들어가는것과 나오는것)
막 7:13-18 (들어가는것과 나오는것)
이름 : 우리교회(IP:220.81.176.150)
본문:마가복음 7장 13-18절
제목:들어가는것과 나오는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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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08-09-21 13:47
들어가는 것과 나오는 것
2008년 9월 21일 본문 말씀: 마가복음 7:13-18
(막 7:13) 『너희의 전한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하시고』
(막 7:14) 『무리를 다시 불러 이르시되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막 7:15)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막 7:16)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하시고』
(막 7:17) 『무리를 떠나 집으로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그 비유를 묻자온대』
(막 7: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제자들이 못 알아먹었다는 점을 우리가 의아해하면 안됩니다.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퍼붓는 질문 자체가 해답을 어느 정도 조정하는 압력으로 행사할 수가 있습니다. 즉 자신이 납득할 만한 해답이 주어질 것이라고 예상한다는 것입니다. 이 생각은 오산입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사람들이 자력으로 깨닫지 못하는 요소 위에서 제공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질문한 것은, ‘왜 입에 들어가는 것이 우리를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이 우리를 더럽게 하느냐’하는 겁니다. 여기에 답변은 20-23절에 나와있습니다. “또 가라사대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알았다고 답을 얻었다고 여길 공산이 큽니다. 그러나 진정한 답은 이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이 대답을 예수님에게 얻어내어도 그들은 예수님이 죽었을 때, 다들 자기 살 길 찾아 도망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지식의 양이 늘어난 것이지 예수님이 원하시는 ‘깨달음’에는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진정한 답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답변을 가지고 다시 자기 자신에게 적용시켜 봐야 합니다. 즉 왜 제자들이 처음에 그런 질문을 해야만 했는가 하는 점입니다. 도대체 제자들의 심성에 무엇이 들어있기에 그런 질문이 나와야만 했는가를 되물어 봐야 합니다. 제자들은 답변을 들었어도 처음 질문할 때와 조금도 달라진 바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답변은 항상 질문자의 근원을 다시 돌아보도록 하는 대답입니다. 사람들이 하는 질문들은 답변마저 임의로 규정지어버리는 경향을 보입니다. 즉 자신이 원하는 답변이 아니면 답변이 아니라고 단정하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인간들이 무슨 질문을 하든지 무슨 답변을 듣든지 무슨 행동을 하든지 모든 관심사가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쏠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은 주관심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정말 하나님에 대해서 궁금해서 질문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바로 인간들의 이러한 죄성을 폭로시키시는 답변입니다. 즉 “너희들은 나의 답변을 듣고서도 너희 자신만을 챙길 위인이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답변과 행위와 기적 속에는 오직 하나님만 생각하는 자이기에 나오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만을 생각하신 예수님께서 앞으로 하실 일은 자신이 아버지의 뜻에 의해 죽어야만 되는 일이 담겨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모든 발언과 행위 안에서 예수님의 죽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에게 진지할 수밖에 없는 답변입니다. 하지만 인간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게 되면 예수님만큼 진지하지를 못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기 죽음과는 무관하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지금 세상에서는 폭력이 여기저기서 터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관심없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친척이나 나의 가족에 그 사건과 무관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자신과의 연관성이 떨어지면 별로 진지한 일이 아닙니다. 무심해져 버립니다.
인간은 자기를 벗어날 수 없고 자아를 뛰어넘을 수 없습니다. “이웃을 사랑한다고요?” 자기 자신도 못넘어가는 주제에 무슨 이웃을 사랑한단 말입니까! 인간의 행위는 생물체로서 본성이 그대로 실리게 됩니다. 아메바를 보세요. 아메바가 살아있다고 하는 것은 그냥 홀로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주위의 것을 점령하고 삼키려고 애쓰는 모습으로서 살아있는 것입니다.
사람도 생물체입니다. 생물체의 본성은 자기 영역 확장 본성입니다. 자기 영역을 확장한다는 것은 필히 삼키고 삼킴을 당하는 관계를 만들 수밖에 없음을 말해줍니다. 따라서 목사가 교인을 많이 확보했다는 말은 그만큼 삼켰다는 행위를 말해주는 겁니다. 누구를 사랑한다는 소리는 “나는 당신을 삼키고 싶소, 잡아먹고 싶소”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예수님의 죽음까지를 파악해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한 예수님의 말씀을 알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죽음에 대해서 진지할 수 밖에 없지만 타인의 죽음까지 진지하게 생각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 어떤 인간도 자력으로 예수님의 믿고 사랑할 자는 없습니다. 인간은 자아 밖으로 못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때, 어떤 전략으로 구원해내시는 겁니까? 자신의 죄밖에 없는 자리에서 만약에 감사가 나온다면 이는 그 사람 속에 중대한 변화, 신적인 변화가 일어났다는 증거입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보내신 의의가 있습니다. 사람이 못하시는 것을 예수님은 해내십니다. 열왕기하 2장에 보면, 엘리야 선지자가 불말과 불수레 타고 하늘로 승천합니다. 불말과 불수레의 왕림은 인간의 능력으로 불가능합니다.
불가능하다는 말은 결코 있을 수 없다는 말이 아니라 인간의 능력으로는 될 수 없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엘리야가 불수레 타고서는 세상 것에 미련 두지는 않을 것입니다. 자신은 불수레 타고 하늘로 승천하면서 여전히 세상 사람과 다투거나 안 지려고 하지는 안할 것입니다. 다 부질없는 짓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수평적으로 자아 확장과 발전을 시도하지만 성도의 운명은 수직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이러한 불수레와 불만이 주어져야 자기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불수레와 불말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제공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최종 약속으로 오기 전에 이미 약속은 아담을 통해서 들어왔습니다. 따라서 아담의 존재 의의가 무엇이냐를 알아야 왜 예수님께서 인간의 속에 들어있는 것이 더럽다 하셨는지가 밝혀집니다.
아담은 선악 열매가 예수님과 관련된 것이지를 알지 못하고 자신의 것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그 열매를 따먹고 신처럼 되고자 했습니다. 이것은 본디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신 목적에 위배됩니다. 인간의 존재 이유는 오직 예수님을 위함입니다. (골로새서 1:16-18)
아담은 죽음을 몰랐던 저주도 몰랐고 약속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아담 내외에 이런 것들을 다 알았습니다. 자신이 저주받는 상태 속에서 비로소 ‘여자의 후손’이 가져다 주는 복이 ‘생명’임을 알고 자기 아내 이름을 ‘생명’ 즉 ‘하와’라고 지었습니다. 바로 자신이 저주받아 마땅함을 알고 그 속에 하나님의 약속이 주는, 예수님께서 가져다 주시는 그 생명을 사모하는 자가 바로 성도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죄밖에 없는 우리의 내부 자리에서 감사가 터져나오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약속이 함께 있으매 이런 놀라운 현상이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