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9월 19일 에베소서 4장
서울 9월 19일 에베소서 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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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919 에베소서 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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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9-20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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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10-29 18:31
서울080919a엡4장a
에베소서 제 19강 (이 근호목사, 2008년 9월 19일-a, 서울의존교회)
에베소서 4장부터 할 차례입니다. 4장을 보기 전에 3장 마지막 부분 20절에,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능력대로’라고 되어 있지요? 능력이란 힘입니다. 제가 안경집을 들고 있는데 이 안경집을 들어 올릴 때 무엇이 필요할까요? 힘이 필요하겠지요. 만약에 힘이 없으면 이 안경집을 들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못 들지요?
바닥에 있는 안경집을 위로 들어 올리는 데에도 힘이 필요하듯이 이 땅에 사는 우리가 천국에 올라가려면 힘이 필요한 거예요. 놀이동산에 가서 청룡열차 있는 높은 곳에 올라가려면 본인이 폴짝 뛴다고 해서 올라갈 수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청룡열차를 타고 올라가는 거지요. 그처럼 하늘나라 올라가는데는 하늘에서 힘이 와야 됩니다.
하늘에서 능력, 힘이 오게 되면 이 땅에 있는 우리가 하늘로 올라갈 수가 있어요. 스데반 집사님이 죽어서 어디에 갔느냐 하면 예수님 계신 곳에 갔어요. 엘리야라는 선지자가 죽을 때에 하늘에서 전용차가 왔어요. 하늘에서 전용마차가 왔는데 그 마차가 불로서 장식이 되어 있어서 그 수레를 불 수레라고 했어요.
그 불 수레를 누가 끌겠습니까? 불말. 끄는 말도 불 말입니다. 불 말이 끄는 불 수레가 와서 하늘로 엘리야를 끌어 당겼습니다. 그 능력이 에베소서 3장 20절에 나오는 그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 일하게 되면 그 힘의 일에 의해서 우리는 구원을 받고 천국에 간다는 이야기가 에베소서 3장 20절에 나옵니다.
그래서 저는 방금 본 성경을 통해서 두 가지로 나눠보겠어요. 헛된 믿음과 진짜 믿음이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은 진짜 믿음을 좋아할까요, 헛믿음을 좋아할까요? 헛믿음을 좋아하지요. 그러면 여러분은 헛믿음을 좋아합니까, 진짜 믿음을 좋아합니까? 만약에 헛믿음만 있다면 사람들은 아주 맘이 편안합니다.
왜? ‘교회 다녀봤자 헛것이요, 예수 믿어봤자 헛것이요, 예수 10년 믿은 너나, 교회 한번도 안간 나나 똑같이 되었으니까 그 헛믿음 참 좋다.’ 이렇게 됩니다. 헛믿음일때는 사람들이 마음에 부담이 없습니다. ‘나도 헛되고 너도 헛되고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 교회 안가도 괜찮아. 하나님 안 믿어도 괜찮아. 교회 가기 싫으면 교회 안가면 되고 천국 가기 싫으면 천국 안가면 돼지.’ 이게 돼지송이잖아요.
지옥가고 싶으면 가면 되고 안가고 싶으면 안가면 되고 본인이 하고 싶으면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안하고 싶으면 안하고 싶은대로 안하고. ‘이 세상은 전부 다 헛믿음만 있었으면 좋겠다’ 하고 세상 사람들은 학수고대하고 있어요. ‘교회 30년 다닌 인간이나 교회 한번도 안간 인간이나 결국은 똑같이 돼대? 교회 안가도 아무 일도 없대! 별 상관없대! 죽은 뒤에는 천국이 있다고 하는데 천국은 개코나 천국이 어딨어? 아무것도 없는걸. 이 불쌍한 인간들아! 뭐, 예수 피를 믿으면 구원 얻는다고? 봐! 나 안 믿잖아. 안 믿어도 편안하게 죽잖아.’
이렇게 되기를 불신자들은 간절히 고대하고 있습니다. 저는 의존교회 올 때마다 걱정이 하나 있어요. 이렇게 의존교회라고 사람들이 많이 모였는데 전부 다 헛믿음 같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의존교회 교인들이 전부 다 헛믿음이라면…. 천하의 이미아 성도의 믿음도 헛믿음이라면….
전부 다 믿음이 헛것이라면 그동안 금요일마다 저녁에 애들까지 불러 모아서 이렇게 성경공부 한 것도 다 헛수고였고 부질없는 짓이었다. 이렇게 결정이 난다면 여러분의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목사님, 그럴 리 없습니다. 우리 믿음은 진짜입니다.’ 이렇게 큰소리 치고 싶어서 근질근질 하지요?
‘진짜 믿음 같으면 진짜 믿음의 증거를 내어 보라고요. 증거를!’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이 진짜 믿음은 아예 없다고 보는 거예요. 강의를 처음부터 새로 해 봅시다. 처음에 제가 뭐라고 했던가요? 여기 땅에 있는 안경집을 위로 들어 올라갈 때 무엇이 있어야 올라갔다? 힘이 있어야 올라가죠. 마찬가지로 스데반 집사가 하늘로 올라갈 때는 하늘에서 올라온 힘, 능력이 있어서 올라갔다고 했지요.
엘리야가 불 말과 불 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갈 때 그것도 힘이 있어야 올라가지요. 이게 참된 믿음이 아닙니까? 그러면 참된 믿음이라면 믿는 사람안에서 무엇이 움직이고 무엇이 활동해야 됩니까? 뭔가 하늘에서 온 능력에 의해서 들썩 들썩 거리는 식으로 그런 힘이 있을 때 그것이 참된 믿음 맞지요? 엘리야처럼, 스데반처럼, 그렇지요?
그런데 의존교회 교인들은 만 날 참된 믿음이라고 말만 해놓고는 들썩 들썩은 커녕 만 날 땅만 바라보고 살고 세상만 바라보고 산다면 뭐가 들썩 들썩 인데요? 뭐 들썩 들썩 하는 것이 있어야죠. 만날 땅만 쳐다보고 있는데. 땅만 쳐다보면서 ‘쟤가 날 미워해요. 저애가 나를 놀려요. 어쩌면 좋아요.’
저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누가 미워하든지 싫어하든지 본인이 지금 들썩 들썩 하고 있으면 그 힘, 세상에서 얻은 것이 아니고 하늘에게 직접 주어진 그 힘에 의해서 산다면 세상 사람들이 무식하다고, 돈 없다고 놀리는 거, 그게 뭐가 그리 대수이며 중요한 문제이겠습니까? 들썩 들썩 하는 능력이 없으니까 ‘쟤가 나를 미워해요, 싫어해요, 놀려요’ 그런 것 가지고 고자질 하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제 말이 틀렸어요? 엘리야가 불 말과 불 수레를 타고 가면서 신나게 타고 간 것처럼 그렇게 신나게 타고 올라가면 될 텐데, 지금 신나게 올라가고 있는데 ‘하나님, 쟤가 제 등 뒤에서 나를 쳤어요’ 라고 할 필요까지는 뭐가 있느냐는 겁니다. 아마 엘리야가 ‘하나님, 저 애 좀 혼내주세요. 꿀밤 좀 주세요. 제가 쟤 때문에 한동안 혼났어요.’
이러면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냥 놔둬라. 그렇게 너한테는 힘들게 해도 그 애한테는 힘이 없잖아. 능력이 없잖아. 그냥 팔짝 팔짝 뛰기나 하지 위로 천국으로 갈 수 있는 불 수레와 불 말이 없잖아. 너에게는 그게 있잖아. 그게 있는데 네가 그 애를 갋으려고 새삼스럽게 그럴 필요가 뭐가 있느냐?’
이것은 교인들뿐만이 아니고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나는 목사 월급이래야 80만원 받고 자기는 500만원 받는다고 나는 목사도 아니라면서 막 놀려요.’ 그러면 주님께서 뭐라고 하겠습니까? ‘80만원 받든 500만원 받든 너는 지금 불 수레와 불 말이 있는데 ….’ 그러면 500만원 주고 마차 빼앗아 버리면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 땅에 헛된 믿음들을 많이 두시는 이유가 참된 믿음이 있느냐를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 주변을 쫙 포위하듯이 헛된 믿음들을 쫙 깔아 놓은 거예요. 바라기는 지금 의존교회 강의하는 이 두 시간이 참된 믿음이 쏙쏙 나오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에베소서 4장 들어가기 전에 3:20에 ‘하나님의 힘이 너희가운데서 일하고 있구나. 좋다 정말! (이것은 우리 판소리 할 때 나오는 소리 그 정도 이상입니다.) 정말 좋구나. 세상에 하늘에서 내려온 힘이 변변치도 않은 너희들 가운데서 역사해서 너희들로 하여금 들썩 들썩 위를 보고 살아가게 하니 야, 참 좋구나. 이런 참된 믿음을 어느 누가 선물로 받으리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도 했지만 에베소서 2:8,9에 보면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이 선물을 받은 사람은 누구든지 자랑치 못할 것이니 자랑하려거든 예수님으로 선물 받았다고 예수님만 자랑하는 여러분들이 되기 바랍니다’ 라고 나와 있습니다.
지나갔다고 못 본체 하면 안 되고 이렇게 성경에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면 우리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느냐, 거기에 대해서 에베소서 4장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4절부터 보면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으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여기 하나가 몇 번 나옵니까? 몸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요, 부르심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하나요, 하나가 일곱 개 나왔어요. 헛된 믿음이 아니고 참된 믿음 같으면 바로 여기 나온 ‘일곱 가지의 하나’(‘일곱 개 중에서 한 가지’라는 뜻이 아님)를 이야기 하게 된다는 겁니다.
진짜 믿음 같으면 ‘목사님, 하나입니다. 몸도 하나고 소망도 하나고 …’ 라고 하나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 때 ‘그 사람은 들썩 들썩 하는 하나님이 주신 힘을 받은 사람이구나’ 라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이야기 한 것 이해 되셨습니까? 그렇다면 헛된 믿음은 뭐가 아니냐? 믿음도 하나가 아니요, 주도 하나가 아니고, 하나님도 하나가 아니요, 몸도 하나가 아니요 …, 헛된 믿음은 사적이고, 개인구원, 개별 구원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힘이 안 오고 가짜로 하나님께 받았다고 주장하는 인간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개인적인 구원과 개인적인 자기 믿음을 자랑하려고, 자기 득보려고 하나됨을 굉장히 싫어하고 미워하는 현상이 있습니다.
이게 좀 어렵지요? 제가 ‘진짜 믿음은 몸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요, 부르심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하나다’고 이야기 하니까 굉장히 쉬운 것 같은데 ‘헛된 믿음은 이렇습니다’라고 할때는 갑자기 여러분이 어려운 눈치, ‘어렵도다. 이래서 누가 믿겠는가?’ 하는 눈치를 보였습니다.
이제부터 어떻게 해서 헛믿음인가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어린이들에게는 어려운 이야기가 되겠지만 헛믿음을 이야기하려면 할 수 없이 어려운 이야기도 해야겠습니다. 헛믿음이란 내 개인적인 능력으로 예수를 믿을 때 그게 헛믿음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믿게 한 것이 아니고 내 개인적인 결심이나 다짐이나 열성을 내세워서 ‘나 이제 예수 믿는다! 오랫동안 믿는다! 예수님 오실 때까지 천국 갈 때 까지 믿는다’라고 ‘내가 믿는다’라고 했을 때 이게 바로 헛믿음입니다. 진짜 믿음은 ‘하늘에서 주신 선물로 내가 믿어졌다.’ 이게 진짜 믿음입니다.
이게 너무 어렵기 때문에 쉽게 해 보겠습니다. ‘내가 재원씨를 찾아간다. 내 힘으로 재원씨를 찾아냈다!’ 이것이 헛 믿음입니다. 그런데 ‘송 재원씨가 나는 가만히 있는데 어느 날 나를 찾아왔다.’ 이것, 진짜 믿음입니다. 이해되십니까? '당신은 재원씨를 어떻게 압니까?' 할 때 '그분이 날 찾아왔어. 내가 찾아 간 것이 아니고 그분이 찾아왔어.' 그게 바로 진짜 믿음입니다.
‘내가 열심히 찾아다녔더니 결국에는 찾아냈어.’ 이것은 거짓 믿음이고 가짜 믿음입니다. 그래서 ‘내가 찾으려고 애쓰기 전에는 먼저 주님이 나를 안 찾더라. 주님이 나를 찾아온 적이 없어요.’ 그때는 이러면 돼요. ‘예수 믿기 싫으면 안 믿으면 되고 천당 가기 싫으면 안가면 되고, 누가 뭐랬어? 열심히 찾으려고 찾으려고 해도 안 찾아지거든 안 찾으면 되고, 누가 뭐라고 했어? 맘대로 하세요. 맘대로.’
에베소서 2:8에 창세전에 예정된 자는 하나님께서 믿음을 선물로 줘서 에베소서 2:9에 보면 오직 예수에게만 영광 돌리고 주님의 공로만 드러내게 되어 있다고 되어 있어요. 만약에 내가 예수를 찾아 버리면 이것은 선물이 아니고 내 애씀이고 내 노력이고 내 희생으로 구원받기 때문에 이것은 에베소서에 의하면 창세전에 예정되지 않은 사람입니다.
이것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고 헛믿음입니다. 믿으려고 애쓰면서 한 20년 믿다가 결국에는 나자빠지지요. 이것은 교인들뿐만이 아니고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고, 내가 이렇게 애쓰고 수고하는데 주님이 안 받쳐 주는데 내가 무슨 목회를 하나. 나는 이제 예수와 바이바이 해야겠다. 나는 할 도리 다 했고 성의를 다 표했는데 하나님이 묵묵 응답이다. 할 수 없지 뭐.’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이 이렇게 합니다. ‘누가 뭐래? 제 풀에 제가 열광 내놓고.’ 성경에 보면 ‘두드리라 열릴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구하라 얻을 것이라’(마 7:7,8)고 되어 있잖아요. 똑같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창세전에 예정된 사람들이 찾으면 찾아지고 구하면 구해집니다. 그러나 예정되지 않은 사람은 백날 찾아도 안 찾아집니다.
문 안열어줘요.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의 뜻은 사람들의 자력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앞장세우는 분이 있어요. 그분이 누구냐? 예수그리스도가 하신 일, 그 공로로 인하여 구원받아야 주도 하나요, 예수님의 공로가 하나로 모이게 됩니다.
각자의 노력으로 구원받으면 각자의 자랑거리가 쫙 퍼지겠지만 각자의 자랑거리를 몽땅 일소해 버리고 주님이 주님 되게 주님의 공로가 되려면 주님의 공로 앞에서는 ‘어떤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받았다’ 하는 것을 주님께서는 허락할 수가 없어요. 사람이 잘나서 구원받을 것 같으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낼 이유가 없습니다.
적어도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보냈으면 모든 사람들의 입을 막고 ‘오직 예수님의 공로로만 구원받는다’는 공식이 성립될 때 그 때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영광이 되는 거예요. 자기 아들로 인하여 영광받는 겁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3:21에도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 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이라고 합니다.
항상 예수님 안에서 영광 받지요. 항상 예수로 말미암아 영광 받지요. 에베소서 1장에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영광돌리죠. 예수님의 공로 예수님피로 말미암아 영광 돌립니다. 하늘의 힘의 모든 원천은 그냥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거쳐서 우리에게 주어지기 때문에 진짜 하나님의 힘을 받는 사람 같으면 하나님을 먼저 보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먼저 보게 되어 있어요.
‘어? 나는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어떻게 내가 구원되었지? 예수님이 크게 보이는구나. 예수님의 희생과 예수님이 하신 일로 내가 구원되었구나.’ 그것을 새언약이라고 합니다. 새언약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행할 수 없었는데 예수님께서 새 언약을 이루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는데 사람들이 못이룬것을 예수님이 이룬 이유가 새언약안에 나와 있어요.
그 이유가 ‘피와 살’입니다. 이 말은 뭐냐? 인간들이 왜 하나님께 영광을 못돌리냐 하면, 인간 속에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 속에 죄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했는데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고 살이 찢어질 때 비로소 왜 인간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고 예수님의 피와 살만이 영광을 돌리느냐, 그 이유가 밝혀지는 겁니다.
그래서 그냥 예수님이 아니고 예수님의 살이 찢기고 피가 흘린 십자가를 통해서 비로소 인간은 죄인이 되면 모든 구원의 공로는 오직 찢어진 예수님께 돌아갔다는 것이 확실해 지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십자가외에는 내가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다’(고전 2:2)고 했어요.
주님께서 우리 이마에 십자가를 들이댈 때 비로소 우리가 드라큐라 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름을 고쳐야 돼요. 이 근호가 아니고 이 드라큐라. ‘너 때문에 내가 죽었다. 너 때문에 내가 죽었어’라고 우리 이마에 십자가를 마구 들이대야 됩니다. 마늘도 필요 없어요. 십자가를 들이대서 ‘너 때문에 내가 죽었다’고 하는 그것이 바로 하늘에서 내려온 불수레와 불말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안 오면 내가 전적으로 죄인인 것을 알지 못해요. 약간 어설픈 죄인인줄 알아요. 그러나 내가 뭘 해도 죄고, 뭘 해도 죄가 되는 이유는 바로 십자가를 들이댈 때 ‘아, 나는 아무것도 내 세울 수 없는 완벽한 죄인이군요’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완벽한 죄인으로 드러내는 이유는 바로 이미 빛이 어둠인 우리에게 비추었기 때문에 어둠이 어둠인줄을 아는 겁니다.
여기 피아노 뒤가 어둡습니다. 그런데 피아노는 자기 뒤가 어두운지 몰라요. ‘나는 피아노, 내 뒤가 뭐가 어두워?’ 이러고 있습니다. 그래서 손전등을 들고 ‘피아노, 네가 어두운가 안어두운가 보자. 피아노 네가 한번 봐라. 어두운가 안어두운가?’ ‘무지 어둡네요.’ ‘어떻게 알았어?’ ‘빛이 비추니까 되게 어두운지 알지요.’
이처럼 십자가라는 그 빛이 비추니까 우리는 그 십자가라는 눈부신 빛 앞에서 내가 말도 안 되는 죄인인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는 날 위해 죽으신 십자가만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나는 십자가 안에 있구나!’ 이것이 바로 창세전에 예정된 자의 진짜 믿음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고 헛똑똑이, 헛믿음은 ‘내가 믿는다’ 이렇게 나와요.
‘내가 믿는다’ 이렇게 되어 버리면 백 명이면 백 명 전부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예수님이 다 달라요. 백 명이면 백 명 다 자기가 믿으니까 하나 될 수가 없어요. ‘네가 나에게 굴복해라.’ ‘내가 네 시다바리가?’ 이러고 있어요. 전부 다 자기가 최고이고 자기가 돛대입니다. 여기서 돛대라는 말은 배의 중심부를 차지하는 기둥을 말하는데 제일 으뜸을 일컫는 말입니다.
자기가 최고이고 으뜸인줄 알고 ‘네가 나에게 굴복해라’ 다 이러고 있다는 말이지요. ‘내가 이 믿음을 이루는데 얼마나 애쓴 줄 아나? 15년동안 기도했다.’ 이러고 있어요. 그게 헛믿음 아닙니까? 지금까지는 다 아신다고 보고 이제부터 약간 어려운 이야기가 나옵니다. 제가 지금까지 가짜 믿음과 진짜 믿음을 설명했습니다.
가짜믿음, 헛믿음은 이기주의고 자기밖에 모르는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지금부터의 이야기가 왜 어려운가 하면 어떤 인간도 자기생각만 하지 남생각하는 인간은 아무도 없거든요. 사람치고 어떤 사람도 자기생각에만 몰두하지 남 생각은 못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엄마나 콩나물을 무치면서 딴에는 맛있게 무쳤다고 했는데 식구가 다섯식구 같으면 그중에 네 식구가 코를 막으면서 다 못 먹겠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엄마가 ‘내가 요리를 잘못했는가?’ 하면서 다시 먹어 보니 자기 입맛에는 괜찮아요. 자기 입맛에 맞춘 것이니까 그 밖의 사람들이 먹으면 짠 거예요. 그럴때 엄마가 뭐라고 할까요? ‘얘들아, 미안하다. 내 입맛에만 맞추다 보니 그리 되었구나. 다음부터는 너희들 입맛에 맞출게’ 라고 할 줄 알았지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내 입에 맞춰! 끝! 반찬 하나 만드는 것이 쉬운 줄 알아?’ 요즘 주부들 같으면 ‘돈벌어와. 반찬까지 만들어. 내가 하녀인가? 아니면 기계인가? 남자들 뭐하는데? 마냥 놀면서 뭐하나?’ 추석 때가 되면 여자들이 할 말이 많아요. 남자들은 빈둥빈둥 고스톱 치면서 놀고 있고 남자들은 부엌에서 종일 일하고 파김치가 되고요.
대개들 그렇게 하는데 앞으로는 그렇게 하지 말고 다 시켜서 드세요. 중국집에서 시켜서 먹으면 되지요. 모든 사람들은 남의 입맛을 맞출 수가 없습니다. 기껏 안 것이 자기 입맛 알았을 뿐인데 어떻게 남의 입맛까지 다 알아서 그것을 맞춥니까? 말이 안 되지요. 사람은 자기를 건널 수가 없는 존재에요.
내가 아는 것이 전부고 나한테 맞는 그것이 진리이고 자기 편하면 그것이 좋은 세상이고 자기 오래 살면 남들은 안 죽는 줄 알고 있고 자기 좋은 대로 남들이 다 따라 해야 되고 사람은 자기 밖으로 벗어날 수 없어요. 그러면서도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뭘 내 몸같이 사랑합니까? 자기 사랑하기 바쁘지. 어렵다는 말이 바로 그 말입니다.
지금부터 어렵다는 말이 그 말입니다. 에베소서 4장에 보면 ‘너희들이 성령 안에서 하나 되어라’고 분명히 나옵니다. 그런데 그것이 안 된다는 말을 지금 하고 있는 겁니다. 왜 안 되는가? 인간은 남을 사랑해도 자기가 풍선처럼 늘어나서 사랑하는 것이지 자기를 떠나서 남을 사랑하지는 않아요. 자기가 부풀어지는 겁니다.
내가 부풀어져서 남에게 사랑한다고 나오지 뻥하고 터지면 본래의 자기로 돌아가 버려요. 사람은 자기 자리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애들이 엄마보고 하는 소리가 뭡니까? ‘엄마가 내 맘 알아?’ 우리 의존교회 학생들은 엄마에게 그렇게 항의하지 않지요? ‘엄마가 내 맘 알아? 왜 엄마는 엄마밖에 모르고 내 맘은 왜 안 알아줘?’ 이런 소리 하면서 대들다가 한 대 더 맞곤 하죠.
사람은 왜 자기밖에 모르는가 하면, 선악과를 따먹을 때 큰 일이 있었어요. 이때 큰 오류가 벌어졌어요. 선악과를 안 따먹은 상태에서 있을 때에는 이 선악과와 생명나무는 장차 오실 예수님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있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따먹지 말라고 한 겁니다. 이것을 따먹으면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속성이 나오기 때문에 마귀도 그것을 알아요. 그래서 마귀가 따먹으라고 했지요.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는 갑자기 선악과가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저 선악과 때문에 내가 고생하게 되었다’ 라는 식으로 선악과하고 자기입장하고만 결부를 시켜요. ‘원인은 선악과이고 그것을 따먹은 결과로 내가 죽게 되었고 이마에 땀 흘리면서 살도록 저주받게 되었다’고 하는 겁니다.
아담과 하와도 그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찾아왔을 때 ‘저 여자가 따먹으라고 해서 제가 따 먹었습니다’ 하고 그 선악과의 이유를 자기신세 망친 것과 결부를 시키는 거예요. 이게 어려운 이야기인데 제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가 되십니까? 무슨 이야기냐 하면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의 인간들은 어떤 일이든 그게 나에게 무슨 이익이 있느냐, 무슨 손해가 있느냐, 전부 다 최종적으로 나로 연결시켜서 세상을 하나하나 해석하는 거예요.
원래 선악과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도록 되어 있는데 그렇게 보지 않고 모든 것을 원인과 결과로 봐가지고 ‘선악과 때문에 내가 당했다.’ 그러면 선악과 심은 분이 누구란 말입니까? 하나님이죠. 그러면 결국 자기 잘못된 것이 누구 책임이다? 하나님 책임 아닙니까?
하나님이 아예 선악과 심지도 않았고 심어 놓더라도 저 한구석에 심어 놓든지, 가운데 둘 거면 신경 별로 안 쓰이도록 만들어 놓든지 아니면 못 따먹게 철조망을 쳐놓든지 고압선을 흐르도록 해서 접근을 못하게 해야 하는데 아무런 대책도 안 해놓고 그냥 말로만 ‘따먹지 마라. 죽는다’고 해놓으니까 따먹고서 ‘선악과 때문에 신세 망쳤으니까 책임져. 선악과 아니었으면 우리가 이렇게 되지 않았으니 책임져’ 하고 나옵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께서 기다리고 기다렸던 드디어 들통 난 인간의 근원적인 죄입니다. 죄가 뭐냐? 죄란 나밖에 모르는 것. 세상 모든 것을 나와 결부시키고 나와 연결시켜서 나에게 무슨 이익이 있느냐를 계산하고 나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 이게 바로 우상입니다.
구약에서는 나라는 것이 그렇게 문제성 있는 것으로 안 드러나지만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육신의 몸으로 오셔서 하나님아버지께서 예수님의 육신의 몸을 죄 있다고 저주함으로 말미암아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이 몸 자체에 문제가 있구나. 이 내 몸 중심으로 사는 이것이 문제가 있구나. 내가 바로 아담의 몸, 저주받을 몸을 지니고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하는 거예요.
사람이 ‘나’라는 것이 어디서 발생되는가? 자기가 갖고 있는 신체를 보고 ‘나’라고 생각하거든요? 이것은 하나의 예니까 상상해보세요. 제가 한 윤범 목사님의 몸에 들어갔다. 또 한 윤범 목사님이 제 몸에 들어왔다. 그러면 이 근호 제 몸은 어디에 있다고 봅니까? 한 윤범 목사님의 몸에 있다고 보지요?
그래서 어떤 사람이 바뀐지도 모르고 ‘저, 한 목사님!’하고 부르니까 한 목사님의 육체를 가지고 있는 인간이 ‘왜요?’ 이러고 있어요. 그러니까 그 사람이 듣고 있다가 ‘당신은 한목사님이고 내가 찾은 것은 이 목사님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이목사인데요?’ ‘그러면 증거를 대 봐라.’ ‘어? 몸이 다르네? 몸은 내 몸이 아닌데 나는 나다.’
그동안 나, 나 이것은 습관이었고 그냥 지어낸 거예요. ‘나’라는 것이 없어요. 하나의 생명체만 있을 뿐이지 ‘나’라는 것이 없다고요.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생명체를 이름을 붙여요. ‘이제부터 나는 너를 나, 라고 부른다.’ 자기가 자기 맘대로 ‘나’라고 부르는 거예요. 그런데 이 생명체는 누구의 것입니까? 이 생명체는 누구를 증거 하기 위함입니까?
예수님을 증거 하라고 예수님이 만든 몸인데 우리는 그것을 빼앗아서 누구를 증거 한다? 허망한 나를 증거 하기 위해서 내 신체가 있는 줄로 그렇게 여기고 있는 겁니다. ‘나 잘났다. 나 훌륭하다. 나 똑똑하지?’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것이 헛된 믿음, 불신자들의 생각이 아닙니까?
(질문) “당신은 누구거죠?”
(답변) “나는 내거지.”
(질문) “그러면 그 ‘나’는 어디에 있습니까? 당신이 나라고 여기는 그 ‘나’가 어디에 들어 있습니까?
(답변) “…….”
할 말이 없어요. 그 사람들은 할 말이 없다고요. ‘이 몸이 바로 나인데….’ 그것은 물질 덩어리이고 ‘나’가 어디 있어요? ‘글쎄, 없네.’ ‘나’라는 것이 없어요. 고린도전서 6장에 보면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이제는 누구의 것이다? 주님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처음부터 우리는 창세전부터 예수님의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것이었는데 자꾸 뭐라고 우기는가? 예수님의 것이었는데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마귀가 들어가서, 귀신이 들어가서, 귀신이라는 것이 죽은 영혼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악마의 졸개들이에요, 악마의 졸개들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네 몸은 네 것이다. 잘 챙겨라. 빼앗기면 안 돼. 빼앗기면 안 돼. 네 몸은 네 꺼야’ 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만 날 시합을 하죠. ‘네 몸이 좋은가, 내 몸이 좋은가? 내 몸에는 왕(王)자가 있다.’ ‘어? 내 몸에는 똥배뿐인데, 아이고 부끄러워라.’ ‘음메, 기살아!’ 모든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해도 자기와 결부된 것만 행동을 해요. 그러니까 얼마나 큰 죄입니까? 자기와 결부된 것만 하니까 얼마나 큰 죄입니까?
지금 부산은 난리입니다. 롯데자이언트가 한국시리즈에서 2등하고 있다는 거예요. 부산에서 홈경기 할 때는 부산갈매기 노래 부르고 난리입니다. 전부 다 한 마음 되었어요. 제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느냐 하면, 부산 사람들한테는 LG도 안중요하고 대구의 삼성 라이온즈도 안중요하고 전라도의 기아도 안중요하고 오직 롯데자이언트가 최고라.
이처럼 모든 인간은 자기와 연관되어 있을 때만 그것이 최고이고, 그것만 사수하고 그것이 진리이고 생명인줄 알고 있어요. 이게 바로 하늘에서 주는 힘, 구원의 능력이 안 올때 일어나는 현상이 그 현상입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자기밖에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한테도 ‘하나님이여, 왜 나를 이렇게 고생시키십니까? 내 인생 왜 이렇게 망가뜨리십니까? 전생에 나한테 무슨 업보가 있어서 내 팔자를 더러운 팔자 만들었습니까?’
전부 다 하나님을 이야기할 때 이것을 집어넣어요. 이것이 무슨 자입니까? ‘나’를 집어넣어요. 몸도 하나요 주도 하나인데 무슨 그런 이 다 있어요? ‘나를 구원해주소!’ 이것 참!! 주님께서 그럽니다. ‘네가 뭔데?’ ‘나는 교회도 잘 다니고 성경공부도 잘 참석했으니까 날 구원해 주소.’ ‘네 마음대로 하세요. 그런데 네가 아무리 찾아와도 너는 나 있는 곳에 못온다.’(요 7:34-36)
나를 흡수시켜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주님은 나 이전에 주님의 것, 주님의 몸을 영화롭게 만들어요. 주님은 나 빼고 자신의 몸인 우리의 몸을, 흙으로 된 몸을 하늘의 형상으로 만드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자기 것 자기가 가지고 가요. 저기 신발장이 있어요. 어떤 마음 나쁜 아이가 신발장에서 좋은 신발을 보고 예쁘니까 자기 이름, ‘김 효실의 것’이라고 썼어요. 그 옆에 보니까 구두가 좋은 것이 있네요. 그것도 ‘김 효실의 것’이라고 써놓고 전부 다 자기 것이라고 이름을 써놓았어요.
전부 다 이름 적어놓고는 ‘가져가기만 해 봐라’ 그랬는데 ‘어, 내 구두 여기 있네. 그런데 누가 다른 이름을 적어놓았지?’ (이름을 쓱쓱 지워버리고) 가져가 버립니다. ‘어? 그거 내 구두인데….’ 자기 것? 자기 것은 없는 거예요. 예수님의 것을 가지고 전부 다 ‘김 효실, 나의 것, 이 안경도 내 것, 코도 내 것 귀도 내 것….’ 전부 다 자기거래요.
아니, ‘나’라는 것 자체가 없는데 무슨 자기 것이 있습니까? ‘나’라는 것이 언제부터 있다고요? ‘나’라는 것은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자기 몸이 죽어가니까 ‘신이시여, 나를 왜 저주하십니까?’ 하고 그때부터 ‘나’라는 것이 발생되었어요. 처음부터 우리의 몸은 주님의 것이었지 창세전부터 내 것은 없어요.
예수님은 자기 것 찾아갈 뿐입니다. ‘어…? 내 것! 내 것!’ 이러면 안돼요. 그래서 진짜 믿음을 선물로 받은 사람은 이런 고백을 해야 합니다. ‘주여, 나는 내 몸이 내 것인 줄 알았는데, 내 방식대로 구원받으려고 했는데 주님께서는 새치기로 와가지고 예수님 자신의 필요와, 너는 네 것이 아니고 내 것이야, 라는 식으로 나를 주님의 것으로 가져가시는군요.’
구원은 소유가 아니고 편입, 또는 소속됨입니다. ‘네가 내 속에 편입되었다. 네가 내 속에 들어와라. 너는 이제 네 것이 아니야. 이제는 내 것으로 합류해.’ 소유가 아니고 합류입니다. 합류되니까 합류된 이 마당이 무슨 마당이냐?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라고 하는 겁니다.
자연적으로 하나에 합류되는 겁니다. 우리 남자들은 나이 스무 살이 되면 어디 갑니까? 군대에 가죠. 군대 가기 좋아요, 싫어요? 솔직하게. 군대 가기 싫으면 집에서 혼자 군대생활 하면 안 될까요? 집에서 인터넷 보면서 군대생활 하면 안 되겠어요? 요새 교회도 인터넷 교회잖아요. ‘저, 군인아저씨, 저는 군대체질이 아니에요. 그래서 군대 짬밥 같은 것도 잘 못 먹으니까 그냥 집에서 혼자 군대생활(병정놀이)하겠습니다.’
이게 허락이 됩니까, 안됩니까? 허락이 안 되지요. 우리 집을 떠나 어디로 가야합니까? 합류해야 되지요. 그 합류하는 곳이 어디라고 했습니까? 그게 바로 ‘군대’, 합류하는데, 내 것을 버리고 심지어 내 머리카락도 머리고, ‘부모님 안녕히 계십시오’ 인사하고 아름답게 기르던 머리 홀랑 깎고 논산훈련소 들어갈 때, ‘친구들아, 잘 있거라. 나는 고생하러 들어간다’ 이렇게 합류해야 돼요.
군에 가서 남들 다 아침 새벽 5시 30분에 구보하기 위해서 일어나는데, 혼자 침상에 누워 있습니다. 중대장이 와서 ‘야, 일어나라’ 하니까 ‘나는 아침 10시에 일어나는 타입입니다.’ 이게 됩니까, 안됩니까? 그 때 그 중대장이 뭐라고 합니까? ‘군대는 하나야!’
교회 오는 사람이 나이가 다르고 직업이 다르고 성별이 다르고 직분이 다르고, 다 다르더라도 주님께서는 그것을 완전히 무시하고 교회를 뭐로 봅니까? 몸도 하나요, 교회도 하나요. 하나로 보는 거예요. 제가 아까 강의하면서 뭐라고 했습니까? 인간은 자기를 타넘을 수 없다고 했지요? 인간은 나를 타넘을 수 없어요.
그래서 어떤 인간도 자기가 자기를 비워서 구원받는 방법은 없습니다. 왜? 인간은 어떤 식으로도 자기자신을 타넘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참된 믿음을 보니까 ‘몸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어째서 사람은 도저히 안 되는 이런 놀라운 일이 벌어지는가? 10분 쉬고 계속하겠습니다.
우리교회(IP:220.♡.176.150)
08-10-29 18:34
서울080919b엡4장b
에베소서 제 20강 (이 근호목사, 2008년 9월 19일-b, 서울의존교회)
둘째시간 시작합시다. 첫째시간에 제가 중요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람은 자기밖에 모르는데 구원받은 사람, 참된 믿음은 자기를 벗어나서 ‘몸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자기생각을 하지 않는 그런 사람들로 되어 있더라는 겁니다.
나밖에 모르는 인간이 어떻게 ‘몸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그처럼 자기를 포기하고 전체가 하나라는, ‘나’ 하나가 아니라 ‘나’말고 다른 하나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가 있느냐는 겁니다. 인간은 자기가 전부인데. 첫 시간에 이야기했잖아요. 인간은 자기 밖으로 못 벗어난다고요. 그래요. 못 벗어납니다.
글쎄, 못 벗어나는 사람이 어떻게 ‘내 몸은 주님의 몸이고…’ 라는 이야기가가 억지로가 아니고 아주 당연히 그렇다는 식으로 술술 나올 수가 있느냐,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하는 이야기란, 우리가 구원받는 능력이 천지 창조한 능력, 홍해가 갈라지는 능력, 예수님이 구름타고 오시는 능력, 같은 큰 능력이 임해야 구원받습니다.
구원, 하니까 아무나 개나 소나 구원받는 줄 아는데 주님의 천지창조, 해와 달을 다 만든 그런 능력이 퍼부어져야 우리가 구원받아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서 못 벗어나요. 지난시간 끝부분에 한 것을 다시 정리해 봅시다. 나밖에 모르는 인간이 구원에 합류됩니다. 합류될 때는 ‘나’를 그냥 합류시키는 식으로 넣어주지는 않습니다.
나를 죽이고 합류될 때 나 말고 ‘어? 이미 하나가 있네’라는 말을 할 수 있거든요. 나는 이미 죽은 자로서의 나, 죽은자가 되어서 여기에 합류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내가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누가 찾아오지요. ‘합류해. 이제 네 몸은 네 몸이 아니고 나, 예수님의 것이야’ 라고 이야기하면서 찾아오지요.
찾아오게 되면 우리 보통 인간들은 나라는 것이 최고의 권력을 가지고 어떤 경우에도 안 지려고 악을 쓰지요. 사람이 자살하는 이유가 뭡니까? 바보 등신은 자살을 안 합니다. 자기생각에 몰두하는 사람이 자살하는 거예요. 자기 생각에 몰두하니까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자살하잖아요. 그 정도로 인간은 자기가 자기를 스스로 깨기가 힘들어요.
유명한 소설가 헤르만 헷세가 지은 소설 중에 『데미안』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옛날에 고등학생들이 좋아하는 유명한 소설입니다. 거기에 보면 ‘어른이 되려면 알이 껍질 깨고 나오는 것처럼 그렇게 해야 된다’는 말이 나오거든요. 그런데 그 껍질이 너무 두껍습니다. 이게 알이고 이 속에 병아리가 있다고 칩시다.]
이 속에 든 병아리가 자기 스스로 날개 짓을 해서 이 껍질을 깨고 나와 버리면 그대로 닭이 되듯이 사람도 그렇게 된다고 하는 것인데 사실은 이 껍질이 너무나 두꺼워서 어떤 인간도 자기라는 껍질을 벗을 수가 없어요. 이것을 키우면 키웠지 이것을 깨고 나올 수는 없어요. 따라서 외부에서 ‘구원받으세요. 탈출 하세요’ 라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자기가 살아 있는 이상은 이 바깥으로 나갈 수가 없어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교회 10년 20년 다니고 심지어 장로가 되고 목사가 되어도 자기자존심 상했다고 교회 안 나오는 사람도 있어요. 교회에 그런 사람이 한 둘이겠습니까? 심지어 어떤 목사는 예배를 드리다가도, 예배가 뭡니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경배하기 위해서 모인 것이 예배시간인데, 자기 자존심 건드렸다고 삐져서 ‘오늘 예배 안 드립니다’ 하고 치워버리는 경우도 있어요.
저는 하나님을 안 섬기는 사람을 정상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어떻게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모르고 그것을 어떻게 정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해도 정상이 될 수 없어요. 왜? 하나님을 섬길 때 자기를 깨고 섬겨야 되는데 자기를 깨지 못하고 자기를 키우면서 섬기니까 ‘하나님, 제가 하나님을 섬기니까 나를 판사 만들어주세요. 나를 재벌이 되게 해주세요’라고 자기를 점점 더 키우면서 하나님께 가려고 하는 거예요.
자기는 안 깨지는 거예요. 그리고 자기 뜻대로 안되니까 ‘나 하나님 안 믿는다’고 하면서 교회도 안가고 ‘하나님은 나를 실망시켰다’고 하면서 절에 가요. ‘하나님은 코도 없고 눈도 없는 분이다’라고 하면서 비난하고 욕하고 자기라는 껍질을 못 깨고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네가 네 스스로 탈출해서 하나님을 만나라’가 아닙니다.
탈출이 안돼요. 안되니까 하나님이 그 속에 침투하는 식으로 들어옵니다. 하나님이 침투하게 되면 나의 절대영역, 나만의 영역, 다른 것은 다 놓아도 이것만은 놓지 않겠다는 것, 그것마저 박살나 버립니다. 그것마저 깨뜨리고 그것이 깨지면 여기서 뭘 느끼는가? 자기의 죽음을 느낍니다. ‘내가 이렇게 죽는구나. 내가 하나님한테 얻어맞아 죽는구나. 내가 믿는 하나님한테 이렇게 얻어맞아 죽을 줄이야.’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네가 죽어야 산다.’ 그것을 달리 이야기하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마 16:24) ‘너는 죄인이야. 네가 죄인인 것을 알아야 구원받아. 네가 그동안 구원 못 받은 것은 네가 죄인인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죄인인 것을 모르고 자꾸 자기 자신을 안 버리기 때문에 엉터리 예수를 찾게 되는데 네가 자기 십자가를 지면서 내가 십자가에 저주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아는 그 순간이 바로 네가 산 순간, 네가 너 바깥으로 빠져나온 순간이 된다’는 겁니다.
바로 이런 면을 구약에서는 집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애굽에 살던 히브리사람들이 약속의 땅을 향하여 나갈 때 무슨 바다가 앞을 가로막았습니까? 홍해바다였죠. 홍해바다가 갈라진다는 것을 미처 몰랐다고 치고 뒤에는 애굽 군대가 밀어닥치고 앞에는 건널 수 없는 깊은 바다가 있다고 했을 때에 여러분 같으면 원망 안 하겠습니까?
거기서 그들은 뭘 느꼈겠습니까? 진퇴양난 속에서 ‘아, 우리가 여기서 이렇게 죽는구나. 그것도 한꺼번에 집단적으로.’ 그들은 모세에게 원망했습니다. 심지어 그들이 홍해를 건너와서 광야에 갈 때 그들은 무려 열 번이나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민수기 21장을 볼까요? 민수기 21장 5절입니다.
민수기 21:5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여기서 그들은 뭘 느꼈습니까? 죽음을 느꼈지요. 여기서 그들이 뭘 느꼈습니까? ‘내가 좋아하는 것이 없다’는 겁니다. 그들은 죽는 순간이 올 때 비로소 하나님을 원망하게 된 이유가 뭡니까? ‘배고프면 안 먹으면 되고 죽으면 죽으면 되지’라고 한 것이 아니고 기어이 반발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 안에 뭐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까? ‘나’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하나님께 대들 수 밖에 없고,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 하는 식으로 하나님을 되받아 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다른 것은 다 포기해도 마지막 무엇은 포기 못하겠다? ‘나, 나는 포기 못하겠다.’ 하나님은 이야기합니다. ‘그 나를 뒤집어라. 그 나 뒤에 천국이 있다. 천국은 바로 네 뒤에 있다. 너만 치워버리면 네 뒤에 바로 천국이 있는데 그 천국을 네가 가로막고 있다.’
다 왔는데 자기 때문에 못 들어가는 거예요. 통과 될까요, 안될까요? 통과 안 됩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통과하는 방법을 하나님 쪽에서 제시해주었습니다. 그게 뭐냐? ‘놋뱀을 보라’입니다. ‘나’라는 것이 왜 생기는가 하면 과거가 누적이 되어서 생기거든요. 이 사람들이 옛날에 어디서 살던 사람입니까? 애굽에서 살던 사람 아닙니까? 민수기 20장 5절을 누가 읽어보세요.
민수기 20:5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 이 악한 곳으로 인도하였느냐 이곳에는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
민수기 11장 5절도 다른 분이 읽어보세요.
민수기 11:5,6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도다 하니.”
‘나’라는 것은 자기 과거의 축적된 경험이 쌓여서 나가 됩니다. 옛날에 애굽에 있을 때는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 정력 좋다는 것, 몸에 좋다는 것은 다 먹었는데 어떻게 이꼴이 되었느냐고 하는 겁니다. ‘♬~내가 살던 고향은 꽃피는 애굽….’ 우리가 세상 살아가는 것이 신자나 불신자나 관계없이 다 같이 출세하려고 애쓰는 그런 세상에서 습관화되어서 탄생된 나로 살아갑니다.
부모도 애들에게 그렇게 가르치고, 모든 교회당 새벽기도회 시간에 가르치는 것이 뭐냐? ‘너는 이 애굽에서 출세해라. 이 애굽에서 성공해라. 애굽에서 대장질해라.’ 우리는 그래서 항상 그 교육을 받고 애굽 사람, 이 세상사람 되는 것을 우리는 잊어 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했습니까?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다’(요 18:36) 무슨 이야기입니까? 제가 언제 그런 설교를 했지요. ‘비행기가 떠야 되는데 고장이 나서 하루 종일 활주로를 돌아다니면 그게 비행기냐?’ 그렇게 했습니다. 그것은 비행기가 아니고 애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 비행기입니다. 뜨지를 못하는 거예요.
그게 중심이 나예요. ‘신이시여 내가 원하는 내가 되게 해 달라’ 그것 때문에 교회 갑니다. 그것 때문에 예수 믿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거예요. 여기서 경상도 사투리가 하나 들어갑니다. 수금포. 표준말로는 삽입니다. 삽으로 푹 떠서 인간이 가지 못하는 천국, 예수님이 구름타고 가신 그 천국, 불수레를 태워서 올려 보내려고 하는 거예요.
그것을 누가 방해하는가? 애굽적인 사고방식으로 무장된 ‘나’가 바로 반대하는 거예요. ‘주님, 일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제가 한수 가르치겠습니다. 내가 뭣 때문에 교회 나오는데 이렇게 나오시면 저 교회 안 나옵니다. 저 교회 발 끊습니다.’ 주님은 노래를 불러요. ‘교히 나오기 싫으면 안 나오면 되고 천당 가기 싫으면 안가면 되지. 뭐든지 맘대로 하면 그만이지.’
교회? 한국교회? 전부 다 가짜입니다. ○○교회 빼놓고. 한국교회 전부 다 이단입니다. 어떤 분이 하신 말씀이 있어요. 저는 그 말씀을 표구해서 우리 집에 걸어놓고 싶다고 했어요. ‘예수 믿기 싫은데 잘되었다.’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면서 주님을 사랑한다고 교회 올 때마다 거짓말을 해 대고 있어요.
저는 그렇게 말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하나가 되어 있어요. 당회장부터 어린아이까지거짓말로 하나가 되어 있어요. 자기를 사랑하면서 주님을 사랑한다고 거짓말로 하나가 되어 있어요. 그래서 복음 전하는 교회 갔다가 다른 교회 가는 이유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을 포기 못하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제 갈 길로 가야 되는 거예요. 그쪽도 하나로 다 모여요.
자기 사랑 포기 못하는 사람 다 한쪽으로 모으고, 주님 사랑하는 사람 한쪽으로 다 모으고 결국은 천당 지옥은 이 땅에서 이미 분류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애굽(나)으로 돌아가려는 관성 때문에 안 되는것을 어떻게 하나님은 되게 하시는가? 그게 바로 놋 뱀이었습니다.
놋 뱀을 설명하겠습니다. 놋 뱀에 담긴 비밀이 얼마나 어려운지, 놋 뱀이 무엇이며 왜 놋뱀을 들라고 했는가? 그 비밀을 이 한글자에 들어 있습니다. ‘벌.’ 하나님의 말씀, 곧 법은 벌을 받는 사람이 있을 때 비로소 그 법으로 살아나게 되어 있어요. 학교 선생님이 얼마나 마음이 순한지 ‘학생 여러분, 숙제를 꼭 해주세요. 숙제 검사 꼭 합니다.’
애들이 진짜 숙제검사를 하는지 알고 코피 터져가면서 숙제를 했어요. 그런데 숙제검사를 안하는 거예요. 또 선생님이 ‘어린이 여러분, 숙제 꼭 해주세요. 내일 숙제검사 합니다.’ 어떤 애들은 ‘숙제검사 또 안한다’ 고 했는데 또 다른 어떤 애들은 ‘이번에는 한다’ 하면서 열심히 숙제를 했더니 또 숙제검사를 안합니다.
그러고 나서 또 ‘어린이여러분, 내일 숙제검사 꼭 합니다. 숙제 꼭 해오세요.’ 애들이 일제히 말합니다. ‘에~이! 숙제 검사 하지도 않으면서.’ 그 다음날, ‘여러분, 숙제 했습니까? 지금부터 검사 하겠습니다.’ 그래서 애들 다 얻어맞았어요. 꼭 선생님이 양치기 소년 같아요. ‘늑대가 온다’고 했는데 안 오고 ‘늑대가 온다’고 했는데 안 오고 진짜 세 번째는 늑대가 와버렸어요.
아프게 벌을 받을 때 ‘아하, 진짜 선생님의 말씀이 맞구나’하는 것을 알지요.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벌을 내리십니다. 어떤 벌을 내리는가? 말씀대로 안하고 원망했을 때 무서운 불 뱀이 와서 어떤 사람들은 물려 죽어가고 있기 어떤 사람은 이미 죽었을 때, 사람들은 생생히 느꼈어요.
‘아, 말씀이 헛말이 아니고 진짜 벌을 받는구나’ 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 때 주님께서 내 놓은 해결책이 뭐냐? ‘놋 뱀, 백성들을 물려죽게 한 그 뱀, 회초리죠, 그 뱀을 높이 들어라.’ 높이 들 때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는 하나님이 맞습니다. 옳습니다. 나는 벌주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잘하겠습니다’ 라고 쳐다보는 그 사람은 용서를 받아서 깨끗하게 나아서 구원을 받고 그 하나님의 벌주심에 대해서 외면할 때 그 사람은 영원한 형벌을 받아요. 영원한 지옥에 가는 겁니다.
그게 바로 놋 뱀에 담긴 비밀입니다. 벌주시는 하나님을 통해서 하나님은 살아 있고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다는 것, 하나님의 약속은 살아 있다는 것을 벌을 통해서 아는 거예요. 그런데 그 벌을 요한복음 3장에서는 누가 받습니까? 예수님이 받지요.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무엇처럼? 마치 모세가 놋 뱀을 든 것처럼.(요 3:14,15)
마치 오뎅에 작대기가 꽂힌 것처럼 누가 작대기에 꽂혀서 올라간다? 예수님 본인이 벌 받는 모습으로 높이 들릴 때 ‘저 벌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벌이다’라고 그 독생자를 믿는 사람은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되어 있습니다.(요 3:16) 그게 바로 자아로부터 통과하는 하나님의 방식이었습니다.
벌을 내리시는 하나님, 그 벌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그냥 매를 몇 대 때리시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나’라는 그 자체, 인간 육신이라는 그 자체를 벌주는 거죠. 다시 이야기 하겠습니다. 인간이 왜 ‘나’, 자아를 주장하느냐? 처음에 하나님께서 왜 인간을 만들었느냐 하면 하나님이 심어놓은 선악과와 생명나무를 존중하고 하나님이 심어놓는 그 나무들을 존대해서 그 생명나무를 따먹고 영생하라고 인간을 만들어 놓은 거예요.
인간은 인간을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이 심어놓은 선악과의 생명나무를 통해서 나타내는 예수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인간이 있는 겁니다. 골로새서 1장에 나오지요? 만물은 누구를 위해서 만들어 놓았다고요? 예수님을 위해서 인간 만들어놓고 예수님을 위해서 선악과와 생명나무 있는데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는 이 선악과가 누구를 위해서 있느냐,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나를 망쳤다는 점에서 갑자기 자기 자신이 주인공으로 등장한 겁니다.
그러니까 주님 입장에서는 누구를 치워버려야 됩니까? 가로막는 누가 있습니까? 나를 치워야 돼요. 어떤 식으로 치웁니까? 벌을 줌으로써.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함으로써 나를 걷어치우고 내가 없어질 때 비로소 ‘나는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하는 사실을 아는 거예요. ‘나는 이 땅에서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내 몸은 내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이다.’
주님께 가져다 바치라는 몸으로, 주님께 헌신하는 몸으로 내 몸이 존재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벌을 주시고 벌주시는 하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 자체는 어디서 생겨났습니까? 이들은 원래 이 벌을 통과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게 유월절이라는 겁니다.
유월절 날 이스라엘이 구원받을 때 그들이 뭐 해서 구원받았습니까? 자기들이 열심히 찬양해서 구원받았습니까, 기도해서 구원받았습니까? 무엇 때문에 구원받았습니까? 자기 몸을 어떻게 해서 구원받았습니까? 자기들 몸은 아무 관계없었지요. 그냥 가만있었지요. 가만있었는데 하나님은 뭘 쳐다보고 이스라엘을 구원했습니까?
이스라엘의 몸짓? 행동? 아니지요. 이스라엘의 문 앞에 발려 있는 뭘 보고? 피, 그냥 피가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된 어린양의 피를 보고 그냥 넘어가는 거예요. 우편배달부가 와서 ‘계십니까? 사인하세요’ 하고 배달하는 경우도 있지만, 우편배달부가 턱 보고 난 뒤에 ‘어? 이 집이 맞네.’ 하고 물건을 놓고 그냥 가버리죠.
그러면 ‘어? 택배(소포)가 왔네. 이 사람들이 뭘 보고 이렇게 배달했지? 아하, 밖에 걸려 있는 문패를 보고 왔구나.’ 그런데 그 문패가 누구의 문패입니까? 내 이름은 이근호인데 이근호문패가 아니고 뭐가 있습니까? 어린양의 피, 주의 이름이 문패가 되어 있으니까 이 집, 이 집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누구의 소유, 누구에게 편입, 누구에게 합류되었다?
예수님, 어린양의 피에 합류되었다는 것 때문에 생겨난 것이 무슨 나라?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은 개인구원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예수님께서 집단적으로 끌어 모은 자기백성들이 이스라엘입니다. 에베소서 4장을 봅시다. 7절과 8절입니다.
에베소서 4:7,8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예수님의 자식이 한명이 아니고 집단적으로 여러 명이 됩니다. 여러 명이 될 때 그들을 자기 사람 만들기 위해서 우리가 예수에게 뭘 바친 것이 아닙니다. 여기 포도가 있는데 예수님이 포도 받으시고 구원해준다고 하면 저는 포도농사 짓겠습니다. 목사 할 필요 없어요. 포도농사 지으면 구원받잖아요. 우리가 바친 것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준 게 있어요. 그 선물로 준 것이 뭐냐 하면 우리의 호적을 바꾸는 겁니다.
지금까지는 우리 호적의 주인이 누구였습니까? 내가 우리 집 주인이었는데 호적이 바뀝니다. 누가 주인입니까? ‘주도 하나요’, 예수님이 우리의 주, 주님이 되는 겁니다. ‘나의 주인이시여, 주 예수여, 나의 임금이시여.’ 어떤 사람이 우리의 구세주가 따로 있는 것을 아느냐하면 예수님 자신이 선물로 준 사람이 있습니다.
그 선물은 은혜로 줍니다. 그냥 선물로, 공짜로 주는데 자기 사람들에게 나눠 준다고요. 나눠줘서 선물로 받은 사람은 자기 공로로 얻은 것이 아니고 누구로부터 얻었습니까? 그냥 주님으로부터 얻었지요? 주님한테 받은 것이 있으면 그 사람은 성도가 되고 주님의 소유의 합류가 되는 겁니다.
이런 방식으로 구원받았어요. 이것, 주님한테 받았잖아요. 어떤 사람은 이것을 받았고 어떤 사람은 이것을 받았어요. 이것을 서로 자랑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이게 더 나으냐, 이게 더 나으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게 더 좋다, 혹은 이게 더 나쁘다, 가 아니라 주신 것은 전부 다 ‘주도 하나요, 몸도 하나요, 하나님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소망도 하나요’ 다 하나에 이미 합류되어 있음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 선물로 준 거예요.
선물로 안 받으면 경쟁이 됩니다. ‘네가 잘났어? 내가 잘났어?’ 그런데 선물로 받게 되면 누가 잘나서 받은 것이 아니고 주님이 잘났고 주님이 우리 주님이 되기 위함입니다. 주님은 한분뿐임을 우리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우리를 뽑아 세운 겁니다. 제가 새벽마다 한 시간씩 산책을 하는데 그날도 산책 중에 한 30대중반쯤 되어 보이는 아주머니를 봤어요.
그분이 그 시간대에 산에 오니까 저하고 마주치게 되는가본데 그 분이 늘 입고 오는 티셔츠에 무늬가 있어요. 등 뒤에는 ‘2학년 7반’이라고 되어 있고 앞에는 ‘야! 신난다. 다시 만나자. 우리 잊지 말고 또 만나자’ 이런 것이 있어요. 그리고는 테두리가 쳐져 있고 그 안에 잔뜩 이름들이 씌어 있어요. 아마 졸업할 때 기념으로 맞춘 셔츠 같아요.
제가 하도 그 셔츠를 봐서 거기 씌어져 있는 이름을 거의 외웠어요. 거기 이름 씌어져 있는 사람은 그 테두리 밖을 안 벗어나지요. 이름이 어디에 적혀져 있습니까? 여기 2학년 7반, 이 안에 들어 있지요. 2학년 7반 이 사람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느냐와 관계없이 한번 2학년 7반은 영원한 2학년 7반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구원한 거예요.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할 때 ‘너만 구원 받아라’는 식으로 달랑 구원한 적이 없습니다. 개인 구원 없습니다. 어떤 구원만 있다? 집단구원입니다. 개인구원 받아서 그 다음에 모여서 하나 되라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 된 것을 힘써 지키라’입니다. ‘이미 너는 하나야. 하나 된 것을 잊지 말아라. 절대로 잊지 말아라.’
하나 된 것을 잊어버리고 만약 개인 구원으로 나간다면 ‘주님, 저 사람에게는 복주고 왜 나에게는 복을 안줍니까? 저 사람에게는 기도하는 응답되는 복 주고 왜 나에게는 안줍니까?’ 경쟁하는 거예요. 지금 너와 나의 자질 문제가 아닙니다. 누가 더 성화되었나, 그 문제 아닙니다.
처음에 강의한 내용을 다시 하고 싶어요. 저는 그 말을 할 때마다 너무 감격스러워요. 엘리야가 불 수레 타고 한 10킬로미터 올라갔는데 저 땅 밑에 보니까 2학년 7반의 못된 아이가 있단 말이죠. 자기는 천당 가고 있으면 ‘주님, 쟤가 나 놀렸어요. 혼내주세요.’ 이럴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지금 괴롭힘 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