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 9월 19일 고후 10장 4절
안산 9월 19일 고후 10장 4절
이름 : 우리교회(IP:124.59.86.24)
080919 고후 10장 4절
우리교회(IP:124.♡.86.24)
08-09-20 12:27
관리자(IP:220.♡.41.203)
10-11-07 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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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080919고후10장4절
2010-11-05 12:15:42 녹취 : 박온정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은 고린도후서10장4절을 보면,『4,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5,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6,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 』4,5,6절 봤는데 이 대목을 하겠습니다.
신약성경은요, 상당히 어려운 이유가 구약은 개인보고 이야기하거든요. 신약은 어떠냐 하며는, 우리 개인이 아무리 뭘 해도 상황을 개선시킬 수가 없어요. 그걸 잘 알아야 돼요. 상황을. 만약에 여기에 모기약을 뿌리면 나는 모기약 싫다고 손으로 헤치면 그 부분은 없어지죠? 근데 전체 모기약은 안 없어진다 이 말이죠.
무슨 말이냐면 아침에 안개가 끼었다. 안개 낀 그것을 내가 입으로 분다고 해서 안개가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요. 신약성경은 뭔가 쫙~ 끼었어요. 뭐가 끼어가지고 사적으로 내가 무엇을 열심히 하면 개선되고… 이런 게 없어요, 신약성경은. 구약에서는 ‘네가 이렇게 하면 내가 복 줄게’ ‘저렇게 하면 저주한다,’ 이런 게 있는데 신약성경은 우리 손을 떠났어요. 이미. 모든 상황이.
우리가 어찌해볼 도리가 없어요. 쉽게 말해서 ‘가치 있다’ 이래야 되는데, 가치 있다는 말도 되고 자욱한 안개 끼었다는 말도 되는데, 어쨌든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이미 벌어진 사태 속에 우리가 이미 놓여있는 겁니다. 예를 들면, 어떤 건물에 불이 났다, 나는 자고 있다 깨보니깐 우리 집 뿐만 아니고 옆집 아파트 전체가 시커먼 연기로 가득 차 있을 때 이거는 내가 어찌할 수 없잖아요.
북북 기어서 탈출 시도하는 거 밖에 안 되죠. 그 때 탈출을 시도할 때 ‘나는 착할 거야, 나는 훌륭할 거야,’ 그게 소용이 없잖아요. 지금 불이 났는데 이쪽 상황에서 저쪽 상황으로 탈출하면 그만이지, ‘나는 얼마나 착했어, 나는 얼마나 훌륭했어,’ 그런게 아무 소용이 없는 겁니다. 이게 신약성경이고 신약시대예요. 신약시대. 신약시대는 뭔가 옴팡 끼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딱 두 자입니다. 「탈출!」탈출해야 돼요. 탈출해야 돼.
저 착하지요? 저 이뿌지요? 그런거 소용이 없어요. 사람들이 탈출 않고 있는 거예요. 이 상태로 죽치고 있으면 뭐가 되겠지…이래 생각하는 거예요. 여기서 생각해볼 것은, 어째서 신약시대에 와서 우리를 어쩌지 못하고 기껏 하는 게 뭐냐면, ‘탈출’ 도망치는 거.「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게 아니다」했거든요 예수님께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게 아니다 말이죠. 다른말로 하면 ‘벗어나라’ 탈출하라 이 말이죠.
여기서 좀 어려운데, 사실은 칠판에 그리면서 해야 되는데 조용하니까 여러분들께 논리적으로 할게요. 그림으로 하면 쉬운데 논리적으로 할게요. 왜 신약성경에는 ‘벗어남’ ‘탈출’ 이것밖에 안 되느냐 말이지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바르게 하겠습니다.’ 이게 아무런 소용이 없이 벗어나야 되는 그런 상태가 됐는가? 이게 상당히 어려운데요. 어렵기 때문에 살살 해봅시다.
선악과 있잖아요. 이게 얼마나 어려운 얘긴지… 선악과를 따먹었더니만 죽었잖아요. 따먹었으니까 죽었잖아요, 아담과 하와가. 그러면 아담의 입장에서는 선악과 따먹은 뒤에 선악과를 어떻게 보냐 하면, 선악과 따먹었다=원인, 내가 죽는다=결과, 어떤 관계냐 하면 원인과 결과의 관계죠. 원인 없는 결과가 없고,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결과가 있다. 선악과를 따먹게 되면 그런 관계에 놓이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선악과가 왜 있느냐,를 알아요 몰라요? 모르죠! 이건 설명이 긴데…지금 바나나우유가 있는데 바나나우유에 독이 들어있다 합시다. 내가 바나나우유를 먹었더니만 내가 독에 취해서 죽었다. 죽을 때 바나나우유가 왜 있느냐에 대해서 압니까? 그건 모르죠? ‘바나나우유를 내가 먹었더니만 내가 죽었다.’ 나로부터 여과되어서 나로 끝나죠? 이게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인간들이 갖고 있는 한계 전부입니다.
애초부터 선악과가 왜 있었는가를 몰라요. 모른다고요. 모든 걸 인간들은 자기의 원인과 결과의 그 선밖에 몰라요. 왜 있는지를 몰라요. ‘욱이는 때리면 울더라.’ 때리면 우는 거예요. 그거는 아는데 아이가 왜 있는지 이유는 없어요. 그냥 있어요. 그냥 있어. -이걸 좀 더 해봅시다. - 나라는 게 어딨어요? 나라는 건 원래 없어요. 나라는 건 원래 없고 생물체가 있어요. 나라는 걸 내가 언제부터 생각했습니까?
모르죠. 그냥 생물체에 불과한 거예요. 어떤 사람은 옛날 기억이지만, 기억을 더듬어 봐도 이게 나라고 생각하는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는 몰라요. 생물체가 늙으면 그냥 생물체가 늙는데 우리는 뭐라고 생각하느냐면 내가 늙는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냥 생물체는 나와 상관없는데 차후에 이 몸뚱아리 생물체를 나라고 붙여 놨는데, 자꾸 이 생물체가 내 말을 듣지 않고 나와 관계없으니까. 생물체는 나와 관계가 없는데,
생물체가 아프면 내가 아프대요. 그거는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이거는 거짓말이에요. 더 쉽게 해볼게요. 욱이가 ‘엄마~’ 하면 욱이는 지 나름대로 놀면 되는데 ‘엄마 밥줘,’ ‘엄마 놀아줘,’ 욱이라는 생물체가 엄마라는 생물체를 자꾸 따라다니면서 자기 인생을 살면 되는데, 자꾸 놀아줘, 잠재워줘, 업어줘, 자꾸 따라다니는 거예요. 귀찮게 한다 말이죠.
심지어 엄마 화장실 가면 화장실까지 따라 가요. ‘엄마 화장실 간다 너 좀 놀아라,’ 하면 ‘시려~시려~’ 한다고요. ‘나’라고 하는 것은 없는데 자꾸 어디에 빌붙냐 하면, 몸뚱아리 생물체에 빌붙어가지고 이게 ‘나’이기를 간곡히 원하고 있어요.(이렇게 수준 높은...) ‘나는 흰머리 나면 안돼,’ 생물체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데, ‘너 좀 나가 놀래?’ ‘내가 흰머리 나는데 왜 네가 간섭해,’ ‘나 아프면 안돼,’ 아프면 ‘생물체가 아프구나,’ 이러면 되는데 ‘나는 아프면 안돼, 그런데 남이 아픈 건 괜찮아,’
무슨 이야기겠습니까. 끝까지 인간은 낯선 물체를 가지고 자꾸 나라고 우기는 거예요. 우기기를 자꾸 나라고 우기는 거예요. 성경에서는 그걸 죄라고 하는 겁니다. 몸은 하나님 것이고요, 나는 하나님 것도 아닌데 죄 짓고 난 뒤에,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내가 지어낸 ‘나’가 나예요. 그러니 나는 허풍선이라. 실체도 없고 근거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그때부터 ‘나’가 생겼는데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선악과의 존재를 모르고 ‘내가 저놈의 과일 따먹어서 죽게 됐다,’ 항상 선악과 볼 때 무엇을 집어넣느냐 하면 ‘나’를 집어넣어서 그것을 다시 반사해서 나한테 해석을 해버려요. 선악과는 원래 예수그리스도를 증거 하게 돼있는데 그런데 인간은 선악과를 누가 증거 하든 누가 심어놨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내가 저놈의 과일 따먹고 죽었다. 자기밖에 몰라요.
심지어 그 후에 하나님이 찾아왔을 때 뭐라 하냐면 ‘하나님, 제가 벗었으므로 숨었나이다,’ 하나님께 누구 얘기 하냐면 자기 이야기해요. 이건 첨부터 그런 인간을 하나님이 만든 적이 없습니다. 그런 인간 당연히 지옥 가죠. 하나님이 그런 인간 만든 게 아니고 하나님이 원했던 그런 인간은 없어요. 지금 세상사람 전부 다 나라고 생각해요.
미국 은행이 넘어갔잖아요. 그 은행과 나와 아무런 상관없으면 아무렇지도 않아요. 근데 펀드 넣은 사람들 반토막 났습니다.(ㅋ) 상관있어요. 그러니깐 뉴스도 큰 뉴스가 되는 거예요. 강원도 할머니 펀드도 모르고 감자만 캐는 할머니 (ㅋㅋ) 미국에 회사 넘어가도 아무 관계없어요. 왜! 나와 연관이 안 되니까. 아픈데도 신경 없으면 안 아프지만 신경이 있으니까 아픈 거예요. 무슨 뜻인지 알겠죠?
마귀는, 선악과 따먹은 인간은 모든 인간은 하나님께서 만든 모든 작용을 인간은 뭘로 보냐면, 가상적인 개념인 나와 결부시킨 채로 모든 것을 해석했습니다. 창세기4장에 보면 가인이 제사 드리죠? 제사드릴 땐 좋았지요. 그 뒤에 뭐합니까. 가인이 누굴 죽여요? 동생을 죽여요. 동생 왜 죽입니까. 지가 동생 만들었습니까? 지가 동생 키웠습니까? 아무 관계 없어요.
동생 죽이고 싶지 않다가도 죽이고 싶어. 왜? 동생이 문제가 아니라 누가 신경질나? 자기가 신경질나. 얼마 전에 인천인가 어딘가에서 자기 아내가 실종됐다고 신고한 사람 있었죠. 나중에 보니까 실종한 게 아니고 누가 죽였어요? 남편이 아내가 이혼해달라고 하니까 죽여서 하수구에 집어넣었잖아요. 그죠? 그 남자, 자기 아내 왜죽입니까. 지가 낳았습니까? 지 소유예요?
그리고 여자가 반찬 잘해주었으면 죽였겠습니까? 안 죽입니다. 무엇 때문에? 이혼해달라고 잔소리 했다는 이유 때문에 자기와 연관이 돼버렸죠. 자기와 연관이 되니까 뭐냐 하면, 저 여자 안 죽이면 내 속에 불이 나겠다, 이래 되잖아요. 인간은 어떤 때 행동하냐면, 모든게 자기와 연관될 때만 행동해요. 욱이도 마찬가지.(어무이 따라온 꼬마친구) ‘욱이야 신문보자,’ 하면 안봅니다. 봐도 무슨 말인지 모르니까.
오늘 본문내용이 뭐냐 하면, 모든 이론과 철학을 다 부수고 어디에 매인다? 예수그리스도 앞에 복종치 아니하면 뭐 준다했습니까? 6절 끝에 보면,「복종치 않는 자에게 ‘벌’준다.」왜 벌주냐 하면, 원래 인간이 아니거든. 원래 하나님 인간이 아니에요. 원래 인간은요 ‘나’라는 것을 끄집어낼 이유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는 게 나예요.
그런데 어느 인간 붙들고 물어보세요. 단1초라도 자기와 무관한 일은 없어요. 다 자기와 연관돼 있어요. 그러면 결국 뭐냐 하면, 심지어 예수 믿고 교회 다니고 삼위일체 거론해도 예수와 거론하는 그 순간 누구와 관련된다? 또 자기와 관련되어 있지요. 예를 들어봅시다. 이 바나나우유가 이게 내꺼 아니잖아요. 바나나우유 통이 내거 아니죠? 그러면 이 몸뚱아리는 내겁니까? 내거 아닙니까? 신앙적으로 봤을 때 내꺼 아니잖아요. 성경에 나오잖아요. 「값 주고 산 것이 되었으니 너는 네 것이 아니라 주의 것이라 」이러잖아요. 그죠?
자, 바나나우유 내꺼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바나나우유 빈 통 가져갑니다. 내가 화납니까? 안 납니까. 화 안 나지요. 빈 통이 내 것 아니잖아요. 그런데 주님께서 내 몸 가져갑니다. 화납니까? 안 납니까? 화나지요. 그러니까 이게 벌 받을 짓이다 말이죠. 이게. 이게 벌 받을 짓이다 말입니다. 가인이 동생을 죽였잖아요. 지가 낳은 것도 아니고 지가 만드는 것도 아닌데 왜 죽입니까.
너 때문에 내가 못살겠다는 거예요. 그게 말이 됩니까?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받았는데 따지려면 하나님께 따지지 동생을 왜 죽입니까. 사실은 하나님 죽이고 싶겠지. 그런데 하나님은 안보이니까 못 죽였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이 땅에 오니까 사람들이 죽였잖아요. 교회가 예수 죽이는 곳입니다. (충격!) 교회가 분명히 성경에서의 교회는 뭐냐, 교회 머리는 누구라 했습니까. 예수님이죠.
이거는 눈에 보이는 교회를 말하는 게 아니고 그리스도 몸을 두고 하는 얘기거든요. 그런데 기존교회에서 예수 얘기하면 대단히 사람들이 싫어합니다. 예수얘기 하지 말고, 예수 얘기를 하되 우리와 관련된, 우리 잘되는, 우리 구원받고 천당 가는, 나와 관련된 예수 얘기 하라는 거예요. 그런데 그런 것이 뭐냐면, 오늘 본문에 의하면 벌 받을 짓이 되는 거예요.
다시 얘기합니다. 쉽게 얘기해봅시다. 이 바나나우유 통이 내꺼 아니면 주님께서 가져가도 화 안 나지요? 마찬가지로 바나나우유 통 같은 나를 주님께서 가져가더라도 화를 안 낼 정도가 돼야 되요. 제가 강의 첨할 때 뭐라 했냐면, 신약성경은, 아파트에 불났을 경우에 불이 내가 질렀습니까? 내가 불 지른 거예요? 하나님 벌이에요. 전에는 물로써 벌주고 후에는 뭘로 벌준다? 불로써.
불을 질러버렸다 말입니다. 이거는 내 외부에서 일어나는 거예요. 내가 불나라, 불나라 해서 불나는 게 아닙니다. 나와 관계없어요. 그러면 진짜 하나님의 사랑은 뭐냐, 불났을 때는 기어서라도 뭐하라? ‘탈출’하라. 이게 신약성경입니다. 하나님 저 어때요? 저 착하지요? 할 때 앞에 뭐가 붙습니까? 저, 또는 나, 가 붙잖아요. 글쎄, ‘나’가 붙으면 안된다니까요. 지금 나가 착하냐, 예쁘냐가 문제가 아니에요. ‘불이야!’ 예요. ‘불이야!’
왜 불을 질러버렸냐 하면, 어느 인간도 자기가 자기라는 것을 벗어버릴 재주가 없어요. 신약성경은 여기서부터 해석이 됩니다. 오늘 해석 시작도 안 들어갔어요. 이것이 신약성경에 나온 내용이거든요. 신약성경 내용은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되요. 어느 인간도 ‘나’에서 나를 톱으로 뭔가 자르듯 자를 수가 없어요. 더 어렵게 해봅시다. -바나나우유 맛나게 드시는 목사님,-
경애 씨, 내 몸은 납니다. 어제도 난데, 작년 나이 때의 나 이근호하고 그 ‘나’가 지금의 ‘나’입니다. 이걸 동일성이라고 하는데, 작년이 나와 지금의 나는 같은 나죠? 나는 욱이엄마 몸속에 들어갔습니다. 욱이엄마는 내 몸속에 들어갔습니다. 어떤 사람이 몸속에 들어가 보니까 어떤 사람이 ‘이목사님~’ 불렀어요. 경애 씨가 ‘왜 불렀어요?’ 했다고요. ‘어? 얼라? 내가 아는 이목사님 아닌데?’ 그런데 경애 씨 안에 들어있는 나는 ‘내가 나야! 내가 이근호야!’ 할 때 그거 다른 사람이 알아줍니까? 안 알아주죠.
‘내가 작년에도 나고 기억한다 말이야.’ 그러면 기억으로 버팁니까? 안 되지요? 기억이 우선이 아니고 뭐가 우선이에요. 몸뚱아리가 우선이죠. 몸이 바뀌어버렸는데 아무리 나라고 우겨도 그건 나가 아니잖아요. 다른 사람 볼 때에. 그런데 그 경애 씨였던 나가 잠시 있다가 왔어요. 또 다른 사람과 헷갈리는 거예요. 나는 ‘나’라는 기억 때문에 계속 나라고 우기는 거예요. 그래서 물었어요. ‘이목사 당신이 나라고 하는 증거 대봐요,’ 증거가 없어요.
그냥 막연한 기억에 지나지 않지 아무런 증거가 없다고요. 결국 나는 나라고 말 할 근거도 없으면서 쭉 이 몸뚱아리 가지고 헬스를 했기 때문에 이건 나다. 이 몸 가지고 고등학교는 어디 나오고, 대학교는 어디 나오고, 계속 해왔기 때문에 그냥 나라고 생각해버리자. 이래 생각한다니까요. 이게 나라고.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예수님 십자가 지셔서 ‘나’라고 하는 그 자체가 곧 짧은 인생을 살면서 우리가 언제적 나를 나라고 한적 없어요. 그건 우리가 몰라요.
그건 어떻게 얘기할 수 없어요. 임시적으로 나를 나라고 이 몸뚱아리를 나라고 조립해 온 겁니다. 조립한 거예요. 조립을 했으면 곱게 조립하면 얼마나 좋아요. ‘나는 이제 늙었구나!’ 이러면 되는데, 조립한 나 속에 뭐가 들어있냐 하면 나의 한 달 수입은 적어도 얼마여야 하고, 나는 평소에 이런 아파트에서 살아야 되고, 나는 남에게 교통사고 안내야 되고, 나는 뚱보가 안 돼야 되고, 나는 날씬하게 빠져야 되고, 나는 남들한테 욕 얻어먹으면 안 되고 내가 드리는 제사는 받아야 되고, 내가 미워하는 내 동생 제사는 하나님이 받으면 안 되고, 이게 딱 떨어져요.
이 못된 나가 무슨 짓을 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내가 드린 제사 안 받고 내 동생 제사 받으면 내가 그놈 때문에 잠을 못 잘 정도로 꼭 저놈은 죽어야 돼, 반드시 죽어야 돼, 이건 어디 콱 죽어야 돼,(ㅋㅋ) 하루에도 몇 번씩 저주성 악함을 발하는 거예요. 결혼해서 아시겠지만, 남편이 속 상해주면 어찌합니까. ‘저 인간 죽어야 돼, 저 인간 땜에 인생 망쳐가지고 시집 새로 가야돼.’
시어머니가 치매 있으면 ‘빨리 죽어야 돼,’ ‘떵 싸고 오줌 싸고 빨리 죽어야 돼, 내가 너무 힘들어 안돼,’ 그런데 그 시어머니 몸뚱아리 누구 것입니까? 시어머니 것입니까 하나님 것입니까. 시어머니 것도 아니에요. 시어머니 죽으라고 외치는 내 몸뚱아리는 내겁니까? 하나님 겁니까. 하나님 것이죠. 나라는 건 없어요. 근원적으로 허망 속에 살고 있어요.
생각에다 신앙으로 도배를 하고 있어요. 교회10년 다니고, 십일조하고, 성경공부하고, 목사가 되고, 신학교 졸업하고, 덕지덕지 도배를 해도 ‘나’가 있는 이상은 전부다 ‘나’ 때문에 남을 미워할 수밖에 없어요. 나 때문에 남을 심판받으라고 저주할 수밖에 없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회개해야 되요. 회개.
사도바울이 성령을 받고난 뒤에 어떤 점이 달라졌는가를 보게 되면,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어요. 고린도후서에 나옵니다만, 사도바울이 성령을 받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 내가 나의 생각에 몰두할 틈을 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틈을 줘도 내가 원하지 않은 내가 된다는 것. 상상해보세요. 내가 원하지 않은 것은 어떤 겁니까? 몸이 아픈 거, 고생한 거, 어디 가서 이단소리 듣는 거, 남에게 배척받는 거, 거짓목사들은 교회를 차지하고 있고, 참된 사도는 사도 값을 못 듣고 이단이라는 소리나 듣는 것.
그래서 더 이상 내가 나에 대한 미련을 못 갖게 하도록 성령께서 역사하게 하십니다. 맨 날 우겨쌈을 당하고. 내 지시에 의해 내가 움직이지 않도록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거예요. 에베소서5장을 보겠습니다.「술 취하지 말라」,고 되어 있죠.「이는 방탕한 것이니.」술 취하지 말라, 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 그 뒤에 반대되는 게 있어요. 뭐냐 하면 성령에 충만하라 되어 있죠? 다른 말로 하면 성령에 취하라, 이 말입니다.
술 취하는 것과 성령에 취하는 것 둘 다 공통점이 있어요. 술 취하면 뭘 잊어버려요.(잡숴보셨어요?) 날 잊어버려요. ‘아이구, 아저씨 거기서 오줌 누면 안 되죠,’(현장 술 취한 액션)‘내가 누고 싶다 와!’ 완전히 이거 필림 끊어진다. 했던 소리 또 하고, 했던 소리 또 하고, 과거 기억이 안 납니다. 나를 잊어버리죠. 성령 받은 자. 나를 잊어버리되 성령을 통해서 날 잊어버릴 때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범사에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쪽으로 자기를 잊어버립니다. 이게 성령에 취한 겁니다.
둘 다 공통점이 있다. 어떤 공통점? 술 취한 공통점이 있다. 자기 생각을 할 수가 없어요. 왜, 하고 싶지가 않아. 이대로 기분 좋아. 술 먹어보세요. 기분 좋다고. 성령에 취하면 그보다 기분 더 좋습니다. 내 집안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심지어 부모가 돌아가도 기분 좋아요. 성령이 함께 있으면. 내가 주님의 자녀가 되다니 …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다니… 그 생각하면 눈물 푹 쏟아지면서 혼자 엉엉 울다가 웃다가 그 정도입니다. 성령에 취하면 너무 좋아가지고.
내가 지금 죽어도 낙원에 가다니, 천당에 올라가다니, 세상에 이런 횡재가…하면서 울고불고 난리가 납니다. 로또 백억 담첨 되어서 차타고 돌아다니면서 ‘여보세요~ 나 이거 됐어요~’ 하고 자랑하고 싶은 것처럼. 사법고시 합격한 뒤에 동네방네 다니면서 사법고시 합격했다고 자랑하는 것처럼. 성령에 충만하면요, 나를 구원하신-내가 구원하고자 애쓴 게 아니잖아요.- 취해서 보니깐 내가 예수 안에 있어요. 취한 거예요. 성령 안에 있는 거예요.
너무 좋아서, 이 상태로 내가 무당이 되어도 좋다고 생각되죠.ㅋ 노력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잖아요. 노력한다는 건 뭘 전제로 한다? 나를 전제로 하거든요. 그거는 구약시대 때지 신약시대는 뭐가 없다? 암튼 나를 잊어버려야 돼요. 내가 어떻게 해서 어떻게 되는 법은 없어요! 그냥 환경이 와서 나를 덮쳐버린 거예요.
덮치게 되면, 안개가 오라해서 온 게 아니잖아요. 아침에 ‘안개야 빨리 와라‘ 이런 게 아니거든요. 제가 노사연의 ’님 그림자‘ 좋아하잖아요. 그 노래 가사를 보면, 달은 내가 아무리 쫓아가도 그대로 있다고요. 어쩔 수 없다는 게 좋아요. 어쩔 수 없다는 게. 구원받은 팔자가 어쩔 수 없다,는 게 거기서도 나와요. 내가 어떤 짓을 해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게 좋아요 이게.
세상의 모든 일은 -강의 처음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세상의 모든 일은 내가 무엇을 해야 실적이 나와요. 손님한테 웃음 띠고 뭔가를 팔아야 돈이 생기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의 모든 일은 자기 일이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를 살리기 위해서 뭘 해야 돼! 그래서 우리는 생각합니다. 제발 내가 아무것도 않더라도 뭔가 주어진 게 있으면 난 감사하겠습니다. 그게 에베소서5장이에요.「범사에 감사하라.」
성령 받으면 왜 범사에 감사할까요? 성령을 받게 되면 내가 뭘 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상황이 예수그리스도 안에 덮쳐지니까 내가 어떻게 변경이 안돼요, 다시 말합니다. 내가 힘주어서 벗어날 수 없는 포획된 이미 갇혀버린 상황이 이미 구원받은 상황이에요. 내가 노동해서 내가 입가에 미소를 띠우면서 한푼 두푼 얻어 와서 받은 구원이 아니잖아요. 이게. 세상에 장사나 노동은 그렇지만 농사지을 때 김 안 매면 곡식 없잖아요. 그죠?
세상의 모든 일은 나와 결부되어 가지고 살기는 살아야 되겠고, 힘들어 죽겠고, 뭘 했다했을 때 기쁨도 잠시고. 남편들이 아내한테 잘하려 해도 잘 할 수가 없어요. 잘해주면 좋아하는 거 알아요. 그 다음이 문제라, 다음에는 더 높은 차원에서 잘해줘야 잘했다 한다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해준 것도 힘든데 나중에 더 힘들게 해보세요. 사람이 지쳐버린다고요. 그래서 첨부터 아예, 안 해줘버리면 안 해준 다음에 약간만 잘해줘도 ‘아이고~ 당신 왠일이야?’ 크게 기뻐할 거니까. 그 작전을 써요 남편들이.
그처럼 이 세상에는 나와 결부되지 않은 일이 없다는 이유 때문에 우리는 불행을 달고 다닙니다. 슬픔을 달고 다녀요. 애가 아파도 문제, 건강해도 문제, 애가 학교 가는데 ‘얘야, 너 아프면 공부하지마라 공부하란 소리 잘못 됐다.’ 몸이 났고 나면 이제 공부 좀 해라, 이럽니다. 이거는 인간은요, 나와 결부된 이상은 어떤 일이 일어나도 슬픕니다. 찬미와 감사가 나올 수가 없어요.
교회서 찬송 부른 소리 백날 해봐야 그때야 하나님께 혜택 받을 걸 염두에 두지만 자꾸 하면요, ‘하나님, 당신 해준 게 뭐있나!’ 이래 나오지 아무리 감사하려 해도 감사할 게 없는데요뭐, ‘왜 내 기도 응답 안 해줘,’ ‘열심히 봉사했는데 복을 안내려줘,’ 오히려 짜증만 나지 특히 개척교회 목사들 보세요, 우리노회 목사들 보세요. 복음 전하려하는데 교회 안 나오잖아요. 교인 없잖아요. 그런데 무슨 감사입니다.
주님은 말합니다. “그 교회 복음 아나?” “복음은 아는데 교인이 없어서 짜증납니다,” “그 교회 누구꺼지?” “주님의 것입니다.” “걱정하는 너는 누구꺼지?” “주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왜 네가 화내는데?”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선악과 따먹기 전에는 예수그리스도 증거하는 겁니다. 선악과 따먹은 뒤에 그리스도 날아가 버리고, 하나님 날아가 버리고“저놈의 과일 땜에 내가 죽게 됐다.” 자기와 연관된 그러한 상황에 놓여있게 된 겁니다.
그때부터 인간은 모든 관심사가 내게 주어진 이 저주를 내 힘으로 어떻게 벗길 수 있느냐, 부질없는 짓을 하는 그 중에 한 몫을 담당하는 게 바로 ‘종교’입니다. 종교. 그게 종교라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서도 봅시다. 모든 철학과 모든 이론들이 다 ‘벌’받을 짓이다. 왜 벌 받을 짓입니까. 그게 무엇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모든 종교와 심지어 신학이 누구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나와 관련된 신학이라 나와 관련된. 내 구호책이 바로 신학이라.
예수그리스도는 뭔가 우리보고 해달라는 소리 않습니다.(안 했습니다.) 그냥 십자가 졌어요. 피 흘렸습니다. 피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덮어버립니다. 덮고 난 뒤에 하는 말이 뭐냐, 「이제부터 네가 관련된 모든 이론들, 철학과 신학과 모든 이론들은 다 부셔버려라.」그런 것은 뭐할 짓이다? 벌 받을 짓이다. 이게 바로 뭐냐 하며는 그겁니다. 『고린도후서10장5절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뭐하니? ‘복종케 하니’…
‘주님이여,「제가」어떻게 복종합니까.’ 또 거기서 뭐가 나왔어요? ‘나’ 내가 나왔지요? 그거 복종 못합니다. ‘내가’ 있는 이상 복종 못해요. 이 이야기는 뭐냐, 신약성경에서는 이 모든 것이 덮쳐진 채로 그 사람에게 어떤 걸 하라는 게 아닙니다. 뭔가 와서 그 사람에게 덮여지고… 덮인 값을 하라는 거예요. 덮인 값. 다시 말해서 네게 덮쳐진 하나님 구원을 철학을 했니 신학을 했니 이 모든 것 다 부셔버리고 오직 누구한테만 복종한다? 나를 일방적으로 구원해내신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것. 이게 바로 ‘감사한 마음’이 스무스하게, 부드럽게, 자연스럽게 나올 수밖에 없는 자가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그걸 묻는 거예요.
그런 자가 누구냐. ‘철학도 않고 신학도 않고 복종해야지’ 라는 게 아니고 신학을 하든지 철학을 하든지 인문학을 하든지 공학을 하든지 운전을 하든지 관계가 없어요. 집에서 애를 보든 공무원생활을 하든 상관없어요. 그러나 그것은 내가 나에게 취하는 하나의 방편들이에요. ‘나 이만큼 잘났다,’ ‘나 이만큼 진급했다,’ ‘나는 부목사도 아니고 전도사도 아니고 우리교회 방장이다, 쒸!’ -이때 쒸가 붙어요 쒸가 -ㅋ
전부다 누구하고 관련 된 거예요? ‘나’와 관련된 거예요. 이게 벌 받을 짓이라는 걸아는 게 성도입니다. 인간은 죽을 때까지 자기밖에 몰라요. 죽으면서도 ‘나 죽거든 대리석으로 관 하래이,’ -ㅋㅋ 이거 진짜 장례식에서 들은 얘기예요 - “뭐할라 죽으면서 그래합니까,” “그래도 자존심이 있지” 죽을 때까지 그래요. 심지어 죽는 것도 자기 알아서 죽는 것인양. 그렇게 남에게 과도하게! 왜곡되게! 가장하는 게 인간입니다. ‘내가 고마 죽을란다,’ㅋㅋ 거기 죽는데 왜 또 ‘나’가 들어갑니까.
여기 고린도후서 10장3절에 보면 성도는 싸워야 한다 했죠? 그러나 육체대로 싸움은 아니죠? 나와 너의 싸움은 아니죠?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나’가 생겼잖아요. 거기에 하나님께서는 너의 한계, 나 자신의 한계를 알려주기 위해서 이웃을 집어넣어줘요. ‘나’가 있고 ‘이웃’ 있으면 그 사이에 뭐가 있냐 하면,「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법이 성사됐습니다. 법이 있는데 그 법을 지킬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무리 지키려고 해도 지킬 수가 없어요. 왜 못 지키느냐면 그 이웃은 하나님이 주신 이웃인데 우리는 그 이웃을 누구와 관련시키느냐면 나의 이익과 관련된, 나의 구원이나 나의 잘남이나 나의 의와 관련된, 그런 왜곡된 이웃으로 간주하니깐 그 이웃을 아무리 도와줘도 살펴주고 해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잘못된 거예요. 그래서 누가복음10장에서 ‘나의 이웃이 누굽니까?’ 라고 문제를 제기했잖아요. 어떤 서기관들이.
이웃은 뭐냐, 이웃은 없는 거예요. 이웃은 하나님께서 붙여줘야 이웃이라. 우리가 골라내고 선택한 이웃은 이웃이 아닙니다. 골라낸 자, 선택한 자가 이웃이 아니라면 그 이웃을 사랑하는 것도 사랑한 것이 아니죠. 법을 지킨 것이 아니다 이 말입니다. 결국 그 이웃을 선택하게 된 원인이 뭐냐, 원인은 나에게 있어요. 결국 나는 뭐냐, 나를 하나의 주체로 보고 ‘나’가 원인이 돼서 그 결과 내가 어떻게 행동하면 됩니까? -이게 성화론 아닙니까 -
‘나’를 포기를 못해요. 나를 근거로 해서 뭔가 거룩이 있다. 그런데 신약성경이 주신 거룩은 뭐냐, 내가 없고 주체가 어디서 옵니까? 예수그리스도 십자가지심이 거룩이에요. 그러면 새 언약 속에 뭐가 포함되어 있습니까? 언약은 약속이잖아요. 약속 안에 뭐가 있느냐 하면 「내 백성에게 내 의를 준다.」이게 약속에 포함돼 있어요. 내가 원하는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내가 갖고 있는 나만의 거룩을 걔한테 줘가지고 걔도 나처럼 거룩하고 의롭게 한다는 내용이 새 언약 속에 포함돼 있다고요.
그 새 언약이 어떻게 왔습니까. 우리가 요청했습니까? 누가 준 것입니까. 예수님이 성령을 통해 준다고요. 이게 신약성경에서의 신약시대 특징이에요. 모든 게 그냥 주는 거예요. ‘포획’이에요. 그냥 덮쳐버린다고요. 그러니까 우리가 신약시대의 신약성경을 보면 ‘나’라는 이야기는 절대로 끄집어내서는 안된다. ‘안 돼야지’가 아닙니다. ‘안 돼’ 하여간 우리가 성경을 보든 안 보든 뭘 하든 간에 반드시 나를 집어넣지요?
아이들 놀아도 놀면서 ‘나는 다섯 시 까지만 놀아야쥐~’ 이런다고. 이때 ‘나’가 포함됐지요? 이미 어릴 때부터 ‘나’가 포함된 거라. 라캉 같은 사람들은 낳은 지 6개월 돼서 소위, ‘상상계’라 해가지고 애는 6개월 후부터 ‘나’가 생긴다는 얘기가 있는데 그것도 분명치 않다 말이지요. 문제는 뭐냐 하면, 왜 거울 보면서 ‘나’라는 것부터 제일 먼저 생겼는지 그 이유는 몰라요. 아직도 해결 안되요. 아기들은 6개월부터 ‘나’를 안다는데 하필이면 왜 ‘나’냐 말입니다. 처음부터. 그 이유는 아직 안 밝혀졌다 이 말입니다. 못 밝히죠. 아담의 천성이니까. 그것도 하나님의 허락 하에 있는 거니까.
신약성경에 와서 예수그리스도가 현재 지 몸뚱아리 예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심장이 뛰고 다 뛰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늘 ‘나’를 만들어 놓고 자꾸 내 몸을 거기에 일치시키죠. 시키는데 짜증이 난다니까! 가을에 밥 많이 먹으면 배나오잖아요. 내가 원하는 이근호는 배가 들어가는 이근호상인데 배 나오는 상은 내가 원하는 ‘나’가 아니거든요. ‘어, 배 나왔네,’ 하면 되는데 그게 아니고 “아~ 왜 배가 나왔을까, 배 나오면 스타일 구기는뎅~”(ㅋㅋ)
그게 자꾸 걱정거리가 되어 살아가는 거예요. 애기 아빠가 늦게 온다. 애 아빠가 늦게 오는 것과 나와 무슨 관계있어요? 늦게 와서 밥 챙겨주는 것도 귀찮아 죽겠는데… 또 나와 결부시킨다고. 그러니까 이게 뭐냐면 신약성경에서는, ‘성도는 그 짓을 않는다,’ 가 아닙니다. 우리는 ‘나’를 안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성도 아닌 사람은 ‘나’를 집어넣는 것이 당연하다고 보고 성도인 사람은 이놈의 인간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매사에 ‘나’를 집어넣는다고 그 죄를 생각하면서 그 죄까지라도 새 언약, 십자가이 피로 그저 거룩케 하신 하나님께, 예수님만 생각하면 감사할 뿐이죠.
바로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소위, 나는 철학을 했네, 신학을 했네, 나는 공학박사 의학박사네, 이 모든 이론들은 예수님 말씀으로 다 부셔버리고 네가 뭘 해도 좋은데 -그건 죽을 때까지 해야 되니깐 - 결국 우리가 감사하고 고마워하는 것은 누구밖에 없다? 예수그리스도 공로, 이 철딱서니 없는, 나밖에 모르는 나에게 어떤 개선의 여지를 묻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그 주님의 공로를「감사하는 마음으로 ‘즐거이 복종’하라」는 게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그리스도의 하심을 우리가 바쁜 가운데서도 잊지 말고, 나를 빼고 우리가 주님을 모실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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