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상 3:19- 4: 1 (말씀과 선지자의 운명)
삼상 3:19- 4: 1 (말씀과 선지자의 운명)
이름 : 우리교회(IP:220.81.176.150)
본문 : 사무엘상 3:19- 4: 1절
제목 : 말씀과 선지자의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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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08-09-14 16:00
말씀과 선지자의 운명
2008년 9월 14일 본문 말씀: 3:19-4:1
삼상 3:19)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 말로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
(삼상 3:20)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의 온 이스라엘이 사무엘은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우심을 입은 줄을 알았더라』
(삼상 3:21)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다시 나타나시되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자기를 나타내시니』
(삼상 4:1) 『사무엘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전파되니라 이스라엘은 나가서 블레셋 사람과 싸우려고 에벤에셀 곁에 진 치고 블레셋 사람은 아벡에 진 쳤더니』
선지자를 하나님께서 만들어서 이 세상에 보내시는 이유는 ‘분류’ 때문입니다. 새삼스럽게 하늘에서 사람들을 일일이 지목해서 분류하지 않더라도 선지자 쪽으로 몰리는 경향이 생겨버리면 나머지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분류된 게 되어버립니다. 따라서 선지자의 존재 그 자체로만 이미 축복과 저주의 기준으로 작용해버립니다.
그런데 여기에 가짜 선지자가 등장하게 됩니다. 가짜 선지자들도 진짜 선지자와 똑같이 ‘나는 하나님의 분류 기준으로 작용한다’고 나서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일반인들을 헷갈리게 됩니다. 요약해서 말씀드리면,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선지자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그의 임에서 나온 것이 하나도 누락없이 성취된다’라는 말을 외치고 다니는 가짜 선지자들을 어떻게 구분 짓느냐 하는 겁니다.
참 선지자인 줄 따랐다가 저주쪽으로 분류될 수도 있고, 가짜 선지자라고 배척했다가 도리어 하나님으로부터 배척받는 자로 고정될 수 있고, 또한 처음에서 가짜 선지자로 시작했다가 나중에 진짜 선지자로 거듭 태어날 수도 있고, 혹은 참 선지자로 시작했다가 나중에 가짜 선지자로 전락할 수도 있는 겁니다.
어쨌든 선지자의 존재 의미는 ‘분류’입니다. 선지자가 개입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분류는 진행되지 않습니다. 고요하고 조용한 동네에 선지자 나타나면 그 때부터 분류작업으로 잠시 요란스럽게 됩니다. 하지만 분류가 끝나고 나면 다시 무슨 일이 있었나 라고 의아해할 정도로 평온을 되찾게 됩니다.
선지자가 말씀을 몰고 다니면 가짜 선지자입니다. 하지만 말씀이 선지자를 몰고 다니면 참 선지자입니다. 그래서 사무엘 말고 다른 선지자나 가짜 선지자들의 사례를 통해서 참 선지자와 가짜 선지자의 구분 지어봅시다. 민수기 22장에 보면 발람 선지자가 나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발람이 발락의 신하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발락이 그 집에 은금을 가득히 채워서 내게 줄지라도 내가 능히 여호와 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어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민 22:18)
참으로 대단한 신앙가로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일종의 기능인으로 자처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저 남들에게 전하기만 하면 그만이다는 직업 근성이 있습니다. 흔히들 이 사회에서는, 종교 지도자가 갖추어야 될 덕목과 이상적 윤리적 품성을 요구합니다. 겸손해야 하고, 진실되어야 하고, 돈을 밝히지 말아야 하고, 온유해야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목회자로서 밥 먹고 살려면 무슨 짓인들 못하겠습니까. 남들 앞에서 보란 듯이 이런 정도의 품위유지는 얼마든지 해냅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본심을 알아채지 못하도록 얼마든지 과도한 행위를 할 수 있고, 이 행위가 되풀이되면 버릇으로 자리잡아서 타인들의 심령을 속이는데 한 몫을 담당하게 됩니다.
하지만 발람과 함께 한 당나귀는 압니다. 자기 주인이 어떤 인물인지를 말입니다. 하나님은 당나귀와 함께 있는 발람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즉 이 점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중간에게 전달만 하면 그만인 줄 아는데 하나님은 결코 말씀 전파에 있어 인간들과 조금도 타협하시지 않습니다.
만약에 당나귀가 그 자리에 서지 않았다면 발람 선지자는 죽었습니다. 이처럼 선지자는 늘 죽어야 마땅한 죄인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고 해서 본디의 가치가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도리어 선지자는 남들에게 말씀을 전하기도 전에 자기 집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내려앉게 됩니다. 그래서 선지자로 하여금 ‘나도 죄인 맞습니다’라는 심정으로 증거케 합니다.
에스겔 선지자의 경우나 호세아 선지자의 경우도 모두 남들에게 하나님의 지식을 전하기에 앞서 그들의 가정이 풍지박산이 됩니다. 이것은 장차 유다 나라에 들이닥칠 무서운 재앙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이 소식을 전하는 그 선지자 가정부터 심판이 미리 들이닥치게 하십니다.
이로서 ‘선지자와 하나님과의 함께’한 의미는 ‘자기 파괴’가 선지자부터 일어나는 겁니다. 그런데 가짜 선지자는 이 ‘자기 파괴’ 현상이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자기 파괴를 피하기 위해 선수칩니다. 그렇다면 자기 확대가 있을 수 있다는 기회가 주어지면 다시 활동하면서 천하의 겸손한 선지자로 자처하고 나섭니다.
결코 힘과 돈과 권력이 말씀 성취가 아닙니다. 에스겔 선지자의 경우, 자기 부인을 잃게 됩니다. 그것은 장차 유다 나라에 들이닥칠 재앙을 미리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실제로 자기 아내가 죽었다는 이 슬픔을 그대로 반영하면서 에스겔 선지자는 말씀을 전합니다. 그러니까 선지자 속에는 두 개의 상반된 현실이 다 들어있는 겁니다.
하지만 가짜 선지자에게는 ‘자기 잃음’을 거부하고 ‘자기 세움’에 연연합니다. 호세아 선지자의 경우, 그는 아내조차 자기 마음대로 고를 수 없었습니다. 결혼 전부터 남자 관계가 복잡한 여인이 호세아 선지자의 아내가 되어야만 했습니다. 이처럼 말씀이란 지식으로 남발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중들은 의식해서 전할 수가 없습니다. 선지자 가정에 먼저 들이닥친 그 무서운 ‘하나님의 함께 하심’은 선지자로 하여금 자기 욕망에 의해서 선지자 노릇한다 라는 소리를 못하게 합니다. 선지자들은 억지로, 부득불 선지자 노릇을 하게 됩니다. 자신이 기피할 수 있는 내용의 말씀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참 선지자들이 어떤 내용의 말씀을 전하기를 그들은 하나님에게 노출된 상태로 유지되어야 할까요? 요한계시록 2:4-5에 보면,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사랑을 받은 그 초심으로 늘 돌아가서 유지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어떤 무서운 사태를 선지자 가족과 인생에 떨어지게 하더라도 그 선지자는 그 처음 사랑으로 만족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어떤 노인분이 아침 산책을 하면서 늘 똑같은 노래 소절을 되풀이 합니다. “울 밑에선 봉선화 ... 아, 이 노래 참 좋다”를 되풀이합니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도 다른 레파토리를 끄집어내지 않습니다. 줄기차게 ‘울 밑에선 봉선화’입니다. 이 노인네야 말로 정말 ‘봉선화 전도사’ 자격입니다. 이처럼 오늘날 우리 성도들은 모두 선지자들입니다. 한결 같이 첫 사랑, 초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죄인임에도 구원하시고 사랑하신 그 사랑만 바라보면서, “그 사랑 참 좋다!”를 되풀이해주 주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첫 사랑 잃어버리면 촛대를 옮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염두에 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