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칠곡강의(뒤에서본한국교회)21-아가,이사야1(강의정리)
04칠곡강의(뒤에서본한국교회)21-아가,이사야1(강의정리)
이름 : 구득영(IP:203.223.97.243)
04칠곡강의 [뒤에서 본 한국교회] 21 - 아가, 이사야1
04,10,30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선희야, 사랑한다 미치도록 사랑한다 ??
* 질문 - 성도도 살아가면서 긴장을 하게 되나요? 의식적으로 긴장하는 것이 아니고 말입니다.
물론 억지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긴장을 하게 되는데, 그 증거가 사도바울의 서신서에 나오는데, "내가 복음을 전해놓고 내침을 당할까 하노라" 라는 것과, "내가 스스로 보기에 자책할 것이 없지만, 그러나 그것 때문에 내가 의롭다고 할 수는 없다. 의롭다고 하시는 분은 따로 계신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만큼 사도바울이 완벽하게(?) 살았다는 것인데, 당연히 예수님을 믿고 난 뒤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 이전의 것은 모두가 다 엉터리이고 말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그 얼마나 좋은 말인가? 우리도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고전 4:3)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고전 4:4)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 아가(雅歌) - 사랑에 마음을 담아 !!
지난 한 주만 빠졌는데, 몇 주를 빼먹은 것 같아서 제가 좀 초조해졌는데, 오늘은 '아가서(雅歌書)'를 한번 해보자는 것이다. 이 '아가' 라는 것은 우아한 노래, 아름다운 노래 등의 의미인데, 물론 우리의 한글성경에는 그냥 줄줄이 쓰여있지만, 그러나 원래는 '주고받고', '주고받고' 하는 노래라는 것이다.
그렇게 주고받으면서도 항상 무엇을 염두에 두고 있는고 하니, 사랑에 대해서 관심을 두자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이 사랑은 넘지 못할 선이 없는데, 여기에 반해서 사회에서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사랑은 그러한 선을 지워버렸다는 말이다.
왜 선이 없다고 할 수 있는고 하니까, 만약에 선이 있으면 둘로 쪼개지는데, 그렇게 전과 후로 양분이 된다는 것이다. 선이 바로 그런 역할을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사랑은 모든 것을 용납하는데, 그래서 넘지 말아야 할 선 자체를 사랑의 세계에서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보통 넘지 말아야 할 선이라고 하면, 즉 "여기까지는 하나님께서 봐 주시는데, 그 다음부터는 안 돼" 라고 하는데,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무엇을 깔고 있는고 하니, 이 세상이 돌아가는 것은 자기 행동여부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즉 자기의 행동이 그 선을 넘어가고, 혹 넘어가지 않고 하는 것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식이 깔려있기 때문에, 넘지 말아야 할 선이라는 표현을 한다는 것이다.
◈ 인간은 나름대로 항상 선을 그으면서 !!
예를 들어서, 고스톱을 쳐도 나름대로 선을 정하는데, "나는 잃은 돈이 만원을 넘어가면 그만 할거야" 라고 말이다. 그런데 그런 결심이 그 자리에서는 몰라도 다른 자리에서는 2만원이 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런 것은 얼마든지 임의로 조정이 가능한데, "나는 자식을 때려도 3대 이상은 안 때릴 거야" 라고 해도, 성질이 나면 3대가 6대로 얼마든지 늘어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늘어나도 항상 "그래도 7대는 넘지 않았어" 라는, 그러한 선은 그대로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선을 왜 자꾸만 정하는고 하니, 자기 행동의 결정권은 자기에게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렇게 자기 행동을 스스로 제한하기 위해서 선을 자기 마음대로 긋는다는 말이다.
◈ 사랑인가? 자제력인가?
그러니 이런 것은 사랑인가? 아니면 자기의 행함인가? 외부에서 주어져서 받는 사랑이 아니라, 자기 행함에서 나오는 '자제력'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여러분은 어떠한가요? "사랑을 받기 원하는가? 그게 아니면 자제력을 원하는가?" 라는 말이다.
정말 신앙인이라면 사랑으로 살아야지, 자기 자제력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사랑을 받는 것보다는, 자기의 자제력이 어느 정도까지 발휘가 되는지, 항상 그것이 더 궁금하다는 것이다. 즉 그러한 자기의 멋진 솜씨를 보고싶어하는 유혹을 받는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것을 마귀가 모를 리가 있는가? 그런 방면에는 도사인데 말이다.
* 질문 - 인간의 자제력에 대해서 조금 더 설명을 해주시면요? 의(義)를 추구하는 사람도 이 자제력 속에 들어있다고 볼 수 있는데, 너무 광범위한 것은 아닌지요?
이 자제력이라는 것은 자기가 악의 영역에 넘어가지 않으려는 자제력인데, 그런데 악이란 것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마치 빛이란 것이, 어둠이 있어야만 빛이 있듯이 말이다. 그런데 인간이 선과 악을 알고 부터는, 선을 추구하고 악에는 넘어가지 않으려고 하는데 말이다.
◈ 인간은 왜 패배자일 수밖에 없는가?
이것이 바로 로마서 7장에 나오는데, 그래서 사도바울은 "나는 악을 원하지 않는데, 그런데 내 안에 또 다른 뭔가가 있는데, 그것이 악을 원하는데, 그것이 나를 이긴다" 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항상 자기를 두고서 "오호라, 나는 패배자로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롬 7:16)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롬 7:17)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롬 7: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롬 7: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 악은 인간의 자제력으로 막을 수가 없어 !!
그 이유가 창세기 4장에 나오는데, 가인의 경우에 자기 동생인 아벨이 미운데, 그런데 그런 미워하는 마음을 하나님께서 미리 아시고 가인에게 당부를 하시는데, 즉 "가인아, 지금 악을 너를 침범하려고 문지방에 엎드려있다. 그러니 악을 막아야 돼" 라고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가인이 하나님의 그런 충고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하지만 자기 자제력으로는 그 악이 자기에게 들어오는 것을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은 그만 자기 동생을 죽이고 만다는 것이다.
(창 4: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창 4: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 4:8)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
* 질문 - 그럼 여기서는 전혀 가인의 자제력이 발휘되지 않았나요?
물론 가인이 나름대로는 자제력을 발휘하는데, 물론 동생은 죽였지만 동생의 친구는 죽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이유가, 인간의 자제력은 항상 자기 핑계로 계속해서 귀속이 된다는 말이다. 동생은 죽여도 동생의 친구는 죽이지 않았고, 또 설령 동생의 친구는 죽여도 그의 애인은 죽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 질문 - 그럼 핑계라는 것은, 자제력을 발휘해서 자기 의를 자랑한다는 것인가요?
그렇지요. 하나님께서는 자제력으로 주의하라고 미리 경고를 했는데, 그것이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 자제력 뒤에는 뭔가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선악과를 따먹은 자기의 존재를 좀 인정해달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을 하나님은 용납할 수가 없기에,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에서 추방을 시켰다는 말이다.
하지만 인간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아니라, 이왕 따먹은 선악과인데, 그래서 인간이 선과 악의 지식을 알게 되었는데, 그것을 좀 이해하고 한번쯤은 덮어주고 용서해달라는 것이다. 즉 선악과를 먹은 자기 존재를 인정해달라는 말이다.
* 질문 - 그러면 선악의 선이 좌우로 왔다갔다하는 것인가요?
그래도 왔다갔다만 하면 모르겠는데, 그것이 계속해서 악에 거하면서도 점점 더 새로운 보이지 않는 악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가니까 산 넘어 산이라고, 또 다시 도전할 수 있는 악이 등장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거기에 비해서 자기는 착한데, 그렇게 악하지는 않으니 말이다. 예를 들어서, 자기가 사람을 두 명을 죽였다고 해고 유영철보다는 나은데, 그 인간은 22명인가 죽였으니 말이다. 즉 그런 인간보다는 자기가 착하다는 것이다.
* 질문 - 그러면 인간의 모든 욕구도 자제력으로 표현이 가능한가요?
물론 그러한데, 그것이 바로 선악체제라는 말이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보고 공격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고 말이다. 바리새인들의 경우에, 그들은 무슨 행동을 해도 자기 의가 되는데, 즉 구제를 하고, 금식을 하고, 또 십일조를 하고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이렇게 조롱했는데, "너희들 중에서 의가 바리새인들보다 낫지 않으면 결코 천국에 못 간다" 라고 말이다. 물론 제자들에게 말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모든 인간은 그 누구라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아무리 설치고 까불어도 말이다.
* 질문 - 인간은 자기 욕구를 분출하면서 살아가는데, 그러면 이런 자제력으로 조절이 가능한가요? 선을 그으면서 말입니다.
그것이 전혀 불가능함을 보여주는 것이 창세기 4장인데, 물론 그러한 자제력의 선을 긋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것도 자기 변명에 불과하고, 상황이 바뀌면 또 그런 짓을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가인의 얄미운(?) 점이 무엇인고 하니까, 동생을 죽인 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니가 동생을 죽였기 때문에 살던 곳을 떠나야 한다" 라고 하니, 가인이 뭐라고 하는가? "하나님, 안 됩니다. 제가 다른 곳에 가서 그들이 낯선 사람이 왔다고 함부로 대하면 어떻게 합니까?" 라고 하는데, 즉 자기가 동생을 죽인 것은 온데간데없어지고, 자기 자신을 방어하기에 정신이 없다는 것이다.
◈ 가인을 죄의 모델 케이스로 !!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가인에게 표를 주어서, 만나는 사람마다 가인을 죽이지 못하도록 해주시는데,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시는가? 이상하지를 않는가? 그것은 바로 가인의 그따위 사고방식은 보호할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인간의 전형적이 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게 하신다는 말이다. 죄의 모델 케이스이기 때문에 말이다.
(창 4: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
(창 4:10)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창 4:11)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창 4:12)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창 4:13) 가인이 여호와께 고하되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창 4:14)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 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 4: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시니라
* 질문 - 그런데 지금 이 시대에는 그런 모델 케이스가 없잖아요?
굳이 모델 케이스라고 하면 '성도' 라고 할 수가 있는데, 왜냐하면 그들만이 자기 죄를 알기 때문에 말이다. 성도는 "이것이 죄입니다" 라고 이야기하니 말이다. 물론 역설적이지만 말이다. 다른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변명하지만 말이다.
* 질문 - 하지만 모델은 남들이 인정해주어야 하지 않습니까? 이 땅에서는 말입니다.
성경은 그렇지가 않은데, 성경은 사람들이 인정하고 말고 하는 것과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 땅에서는 변하기 때문에 종잡을 수가 없는데, 히틀러가 그렇게 살인마로 불려지지만, 하지만 자기 자식은 얼마나 사랑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 당신은 히틀러보다 더 나빠 ??
그러니 이렇게 되어서 '나쁘다', 혹은 '좋다' 라는 기준이 그만 애매 모호해지는데, 무슨 말인고 하니까, "히틀러가 자식을 사랑했다. 그래서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놈들은 히틀러보다 더욱 더 나쁜 놈이다" 라는 논리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요즘 이야기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이란 것인데, 즉 "절대적인 기준이 없다" 라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구조주의에서 나오는데, 이런 문제는 지금 여기서보다는 다음에 강의할 기회가 있으면 다시 다루기로 하고 말이다.
그러므로 결국 이것은 선과 악의 기준 문제인데, 그런데 사랑은 이런 선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선이 없기에 모든 것을 용납해준다는 말이다. 그 어떤 짓을 하더라도 용납을 해주는데, 설령 살인과 강도의 경우에도 말이다.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이다.
◈ 사랑은, 자제력을 높이기 위한 도구가 아니기에 !!
그래서 제가 여러분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다음과 같이는 생각하지 말라는 것인데, "나는 주님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한 놀라운 사랑을 받았으니 이 선을 넘어서야 되겠는가?" 라고 말이다. 그렇게는 여기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은 사랑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사랑을 주물럭주물럭해서 만들려고 하는 건방진 이야기라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사랑이 자기 자제력을 높이기 위한 하나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아가서의 주제 - 사랑은 우리 맘대로 못해 !!
하지만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사랑은 아예 우리를 쓰나미처럼 외부에서 마구 덮친다는 말이다. 그러니 자기가 알아서 사랑을 한다고 한들,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오늘 공부하고 있는 이 아가서의 주제인데, 즉 우리 인간은 그러한 사랑을 쥐었다가 놓았다가, 그렇게 자기 마음대로 사랑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 '뽕' 먹은 솔로몬 ??
그래서 오늘 우리가 공부하려고 하는 이 아가서에도 보면, 오히려 사랑이 이 솔로몬 왕을 끌고 다닌다는 것이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이 임하니 솔로몬 왕이 전혀 감당을 하지 못하는데, 마치 약에 취한 사람처럼 말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내가 주님의 사랑에 미쳤다" 라고 했는데, 돈이나 여자에 미친 게 아니라 주님의 사랑에 미쳤다는 것이다. 그것이 고린도후서 5장에 나오는데, 그 표현이 얼마나 간결하면서 명확한지, 복음을 간단명료하게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떤 사람이 복음을 모르는고 하니, 사도바울처럼 주님의 사랑에 미치고 도취되지 않은 사람인데, 그런 자에게는 복음에 대한 강도가 전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후 5:13)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고후 5: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 질문 - 그러면 성도는 이것을 느끼나요?
물론 느끼게 되는데, 사도바울이 그렇게 고린도후서 5장에서 자기는 주님의 사랑에 미쳤다고 했는데, 그것이 사도바울 개인에게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 그 말씀을 성령께서 쥐고서, 성령을 받은 모든 사람에게 그 말씀에 준해서 성도를 한 사람 한 사람 다루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때로는 주님의 사랑에 마치 약을 먹은 것처럼 도취가 되도록, 그런 현상들이 일어나도록 조치를 취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러한 것을 보면서, "아하, 이것은 내가 한 것이 전혀 아니구나.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 잠시나마 주님의 사랑에 취하도록 하셨구나" 라는 것을 깨닫고, 그 순간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게 된다는 것이다.
* 질문 - 그러면 느끼는 느낌과 이성의 차이점은 없나요?
물론 차이가 없다고 볼 수 있는데, 왜냐하면 느낀다고 하는 것이 이성에 포함되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 반대도 가능한데, 물론 양(量)으로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말이다. 그것은 "언약이 큰가요? 아니면, 약속이 큰가요?" 라는 것과도 비슷하다고 볼 수 있는데, 약속 안에 언약이 있고, 또 언약 안에 약속이 있으니 말이다.
* 질문 - 인간이 스스로 판단해서 이성적으로 결론을 내리지 않나요? 또 선교단체 등에서는 거듭난 '지정의(知情意)'를 강조하고 하는데 말입니다.
그렇지 않고, 거기에도 감정이 개입되는데, 그러니 그것이 감정 때문인지, 이성 때문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선교단체가 하는 말은,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해도 믿을 것이 하나도 없는데, 순전히 모두가 장사꾼들이라는 말이다.
◈ 어, 저기 김밥이 꾸물꾸물 움직이네 ??
우리가 어떤 순간이든지 주님의 사랑에 도취가 되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는고 하니, 이 세상이 자그마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처럼 삼층천에 올라가면 이 세상이 얼마나 작아 보이겠느냐는 말이다. 높은 산에서 기차가 가는 것을 봐도 마치 김밥이 움직이는 것 같다는 것이다. 그 큰 기차가 그렇게 작아 보인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그렇게 크게 생각했던 것도, 주님의 사랑 속에 들어가 버리면 아주 작게 여겨진다는 것이다. 토요일까지 그렇게 이 세상에서 시달리다가 다음날 교회에 와서 말씀을 듣게 되면, 즉 그러한 말씀의 세계에 들어가게 되면, 그 말씀의 세계가 얼마나 넓은지, 자기가 크게 보고 고민했던 것들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집에 돌아가면 또 다시 크게 보이겠지만 말이다. 왜냐하면, 말씀 속에서 그 사랑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말이다.
◈ 솔로몬은 스토커 ??
지금 아가서에 나오는 솔로몬의 행동을 보라는 것이다. 정상이 아닌데, 그야말로 미친 짓이란 말이다. 여자가 싫다고 하면 싫은 것이지, 왜 악착같이 따라다니면서 그렇게 스토커(?) 짓을 하느냐는 것이다. 남의 귀한 집 딸에게 말이다.
그러니 아가서는 솔로몬이란 정신나간 스토커의 이야기라고 할 수가 있는데, 그런데 솔로몬이 하는 말이 "내가 너에게 미쳤거든"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솔로몬이 예수님인가? 아니면, 신부가 예수님인가?" 라고 따지면 해결이 안 되고, 여기에서의 분위기가 "아하, 사랑에 도취가 되면 그렇게 맛이 가는구나" 라고, 그렇게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제가 어느 분에게 편지를 쓰면서 이렇게 말했는데, 뭐라고 했는고 하니, 어느 손님이 냉면집에서 냉면을 한 그릇 먹었는데, 너무나도 국물 맛이 좋아서 어떤 재료를 사용하기에 그런 국물이 나오느냐고 물었다는 것이다. 사실 실제로는 절대 가르쳐주지 않겠지만 말이다.
* 손님 : 주인장, 냉면국물에 어떤 재료를 사용했습니까?
* 주인 : 예, 이런 이런 것을 넣었습니다.
* 손님 : 저도 그렇게 하면 됩니까?
* 주인 : 글쎄요. 아마 될 수도 있겠지요.
* 손님 : (며칠 뒤에 다시 와서) 그런데 저는 왜 그런 맛이 나지 않지요?
* 주인 : 예, 수천 번의 시행착오를 겪어야만 합니다.
* 손님 : 정말로 그런가요?
* 주인 : 예, 정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성경말씀을 볼 때, 기능적으로(?) 어떤 구절을 보아야 은혜가 되는가? 또 어떤 찬송을 불러야 은혜가 되고 말이다. 그런 것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를 믿는 사람은 이런 행동을 해야 한다" 라고 하는데,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사고방식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 모방은, 자기 행동에 기초한 것 !!
그런 것은 일종의 모방에 불과한데, 하지만 이런 모방은 자기 행동에 기초한 것이기에 결코 성도가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남들이 새벽기도 시간에 나가서 은혜를 받는다고 해서 자기도 그런 것은 전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신앙은 강요해서 될 문제도 아니고, 또 따라한다고 해서 될 문제도 아니라는 것이다.
* 질문 - 그런데 우리교회는 왜 예배순서를 바꾸지 않지요?
예배순서를 바꾸자고 여러 사람이 이야기를 하면 얼마든지 바꾸겠는데, 그러나 그것은 작은 문제이기 때문에, 즉 그렇게 신경을 쓸 문제가 전혀 아니라는 말이다. 물론 시행착오고 뭐고 간에, 그런 것을 할 필요도 없는 말이다.
아무튼 우리가 이렇게 아가서를 보면서, 그렇게 서로가 주고받고 주고받고 하는데, 마치 닭살커플(?)처럼 말이다. 그렇게 주고받는 주제가 무엇인고 하니, 바로 '사랑' 인데, 그러한 사랑의 커다란 주제 속에 들어가 버리면, "저 사람의 행동은 윤리적이다. 혹은 아니다" 라는 것을 묻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즉 넘어야 할 어떤 '선' 같은 것이 없다는 것이다.
◈ 꿀물, 제발 문 좀 열어주세요 !!
하지만 이 세상은 그렇지 않은데, 즉 "니가 남자라면 여자가 문을 잠갔으면 찾아가지 말아야지" 라고 하는데, 그것이 바로 넘지 말아야 할 선인데, 즉 이성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이 사랑 앞에서는 그런 것조차도 무시가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남자가 밖에서 "제발, 문을 좀 열어주세요" 라고 사정을 하고 또 사정을 하는데, 그런데 안에서는 "제가 지금 옷을 벗었기 때문에 나가지 못하니, 제발 좀 가주세요" 라고 하고 말이다. 바로 그것이 이 아가서에 나온다는 것이다.
* A : 제발 문을 좀 열어주세요.
* B : 안 됩니다.
* A : 왜요? 제가 미운 거죠.
* B : 지금 자려고 옷을 벗었기 때문에 나가지 못합니다.
* A : 그러면 어떻게 손이라도 좀 안 될까요?
* B : 참 끈질기네요.
* A : 제발 부탁합니다.
* B : 그러면 여기 손을 내밀 테니 잡으세요.
* A : 정말 감사합니다. 쪽~(?)
* B : 그럼, 잘 가세요.
* A : 내일 또 올게요.
* B : 그건 알아서 하세요.
◈ 주인공이 바뀌었는데 ??
정말 그러한지 아가서 5장에 보면 잘 나오는데, 그렇지요? (목사님, 내용이 좀 각색이 된 것 같은데요. 그리고 남자와 여자의 역할이 바뀌었잖아요. ㅋㅋ)
(아 5:1)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내가 내 동산에 들어와서 나의 몰약과 향재료를 거두고 나의 꿀송이와 꿀을 먹고 내 포도주와 내 젖을 마셨으니 나의 친구들아 먹으라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아 마시고 많이 마시라
(아 5:2)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 열어 다고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 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
(아 5:3)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으며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랴마는
(아 5:4) 나의 사랑하는 자가 문틈으로 손을 들이밀매 내 마음이 동하여서
(아 5:5) 일어나서 나의 사랑하는 자 위하여 문을 열 때 몰약이 내 손에서 몰약의 즙이 내 손가락에서 문빗장에 듣는구나
그러므로 아가서를 제대로 공부하려고 하면 지독한 연애시절이 있어야 하는데, 도저히 용기가 없어서 술을 진딱 마시고 와서 사랑을 고백하던, 그래서 그 여자 오빠에게 얻어맞아서 여자 집에서 쫓겨나고 말이다. 또 여자는 남자에게 "튕기는 맛이 있어야 여자이지" 라는, 그런 경험을 요구하고 말이다.
* 질문 - 그러니 사랑은 쌍방통행이 아니라 일방통행이라고 할 수 있네요?
지금까지 집사님이 하신 질문 중에서 최고의 히트작인데, 즉 사랑은 우리가 달라고 할 조건이 되지 않는데, 그냥 은혜로 주신 것인데, "니가 그 어떤 짓을 해도 용서해주겠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일방적으로 주셨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그 어떤 짓을 해도 말이다. 넘지 말아야 할 선도 전혀 없고 말이다. 그러니 마음대로 돌아다녀도 된다는 것이다.
◈ 사랑은 원웨이 티켓 !!
그런데 여기서 "이 사랑을 저에게 주세요" 라고 하면 안 되는데, 왜냐하면 이 사랑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서 주신 것이지, 자기 이름으로 하나님께 달라고, 그렇게 기도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가서에서 말하는 사랑이 말이다. 그러니 아무리 우리 이름으로 기도해도, 그것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 참 사랑은, 하나님과 예수님 두 분이 !!
쉽게 말해서,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주고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은 그야말로 완전히 다 빼버리고 예수님이 아버지와 둘이서 속닥속닥해서(?) 얻어낸 사랑인데, 그 사랑이 난데없이 우리에게 쏟아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그 어떤 짓을 해도 예수님이 대신해서 갚아주시기 때문에, 그래서 용납이 된다는 말이다. 전적으로 예수님 때문에 말이다.
◈ 정말 저를 진지하게 사랑하시렵니까?
여기 아가서에는 나오는 신부는 "저를 좀 사랑해주세요" 라는 것이 아니라, "진짜 저를 사랑하세요? 제가 이런 꼬라지(?) 인데 말입니다. 혹시 농담이 아니지요? 정말로 저를 진지하게 사랑합니까?" 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 아가서의 전체 흐름이라는 말이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고 하니, 이 아가서에 나오는 여자가 흑인인데, 그러니 남들이 보기에는 그렇게 예쁘지 않다는 것이다. 자기 눈에 안경이라고, 그러니 이 여인이 솔로몬의 눈에 그대로 맞았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 여인은 솔로몬이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을 믿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연애를 조금이라도 해 보았다면 이런 경우가 이해가 되는데, 남자가 아주 적극적으로 대시를 하는데, 하지만 여자는 자기와는 격이 맞지 않는 남자가 그렇게 구애를 하니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저것이 내 몸만 만지고 차버리는 것은 아닌가?", 혹은 "양다리를 걸치다가 그냥 가버리는 것은 아닌가?"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런 경우들이 엄청나게 많은데, 하지만 이 남자의 경우에는, 자기보다 조건이 좋은 다른 여자들을 다 제쳐두고 자기에게 접근하는 것이 정말이지 진지해 보일 때, 아 여자는 "야, 정말로 이 남자가 나를 사랑하는가보다" 라고 여기게 된다는 것이다.
◈ 어느 알바생의 희비 쌍곡선 !!
제가 아는 어떤 학생이 아르바이트로 여자 유니폼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을 했는데, 그 회사가 대구 미도백화점 14층인가에 있었는데, 그런데 그 공장에는 전부가 여자 직원들뿐이고, 남자는 자기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남학생은 사실 외모나 여러 가지 이미지가 남들에게 호감을 주는 스타일은 아니었고 말이다.
하지만 남자가 하나밖에 없으니, 이 여자 직원들이 다 자기에게 잘해주고 라면을 끓여도 먼저 자기를 챙겨주고 말이다. 그런데 나중에 옆에 빈 상가에 컴퓨터 회사가 들어왔는데, 거기에는 남자직원들이 많으니 그때부터는 그만 자기를 본체만체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사랑이 아니라 희소성의 가치인데, 즉 가치가 일시적으로 올라갔다는 말인데, 사실은 인간들의 사랑은 다 이러한 희소성의 사랑이라는 것이다. 많을 때는 시시해 보이고, 없을 때는 아쉽고 말이다. 그러니 인간들의 사랑은 믿을 것이 못되는데, 대중가요 가사들이 다 이런 내용인데, "믿었다가 발등 찍혔다" 라고 말이다. 그래서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고 하고 말이다.
◈ 법 자체가, 우리가 죄인이란 증거 !!
애초부터 인간의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부부사랑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그런 것은 믿을 것은 못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믿지를 못하기 때문에 먼저 동원하는 것이 바로 '법' 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인간은 왜 법에 민감한가?" 라는 것에 대해서 조금 했고 말이다.
우리 인간들이 법에 대해서 그렇게 민감한 이유가, 그것은 바로 우리 인간들의 모든 것이 완벽하지 않다는 증거라는 말이다. 법이 있다는 것 자체가 말이다. 그러므로 이런 법이 있다는 것 자체가 바로 우리가 죄인이라는 증거라는 것이다.
이것이 참으로 중요한데, 율법이 주었다는 것 자체가 바로 우리가 죄인이라는 말인데, 그러니 "지키면 착하다" 라는 것이 아니라, "니가 법 앞에 한번 서봐라. 니가 잘난 것이 있는가?" 라고 말이다. 하지만 분명히 말하지만,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버리면 안 된다는 말이다.
◈ 오직 예수님만이 지독한 사랑을 !!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이 아가서의 경우에, 우리가 이 아가서에서 말하는 사랑 앞에 서면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과연 이런 사랑을 할 수 있는가?" 라는 것이다. 못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이 아가서를 보면서 무슨 말을 할 수 있는가?
바로 아가서에 나오는 이런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분은 오로지 예수님밖에 없다는 것을 또 다시 확인하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밖에는 말이다. 그러니 예수님 말고는 그런 지독한 사랑을 아무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 질문 - 그러면 인간의 사랑은 지독한 그 사랑을 흉내내는 것인가요?
물론 그러한데, 인간의 모든 사랑은 다 자기 중심이고, 그래서 마지막에는 항상 "싫으면 치워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나름대로 흉내를 잘 내다가 말이다. "자기야 열쇠를 3개 줄게. 그리고 결혼을 하면 곧 바로 분가하자" 라고 하다가, 하지만 그것이 잘 안 되면 결국에는 "싫으면 모두 때리 치워라" 라고 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사랑한다면 정말이지 그렇게 하면 되겠는가? 오히려 "그래, 당신이 원한다면 놓아줄게. 그리고 나는 이제 당신의 행복만을 빌면서 살겠어" 라고 해야하지 않겠는가? (에이, 목사님은 농담도 잘하셔. 혹시 목사님의 가슴 아픈 경험담? ㅋㅋ)
◈ 아, 어쩌란 말인가? 부흥이 안 되는데 !!
그러므로 인간의 사랑은 분명히 한계성이 있고, 즉 "나는 최선을 다했다. 어쩌란 말인가?" 라고 하는 '선'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이런 "나는 최선을 다했는데, 어쩌란 말인가?" 라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알아야 하는데, 특히 개척교회 목사들이 이런 소리를 입에 달고 살지 않는가? 그렇게 최선을 다해도 교회가 부흥이 안 되는 것을 어떻게 하느냐는 말이다.
물론 개척교회 목사뿐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은 그렇게 계속해서 하나님에게 앵겨 붙는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 대든다는 말이다. 그냥 달라고 하면 기복신앙이지만, 그러나 자기는 그런 희생을 했는데, 왜 대가가 없느냐는 것이다. 즉 일종의 노동의 대가라고 할 수가 있는데, 자기는 그렇게 노동을 제공했는데 왜 대가가 없느냐는 말이다.
* 질문 - 노가다를 하면 돈이 더 되는데요? 그런 체면 때문에 가난한 것이 아닌가요?
그런데 목사들은 이런 노가다와 같은 것은 주의 일이 아니라고 여기는데, 그러니 너무 잘못되었다는 말이다. 사실상 뭐가 제대로 맞는 게 하나도 없는데, 그리고 소위 자기가 배웠다고 하는 위신과 체면 때문에 그런 일들을 꺼리고 말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힘들게 사는 것은, 게으른 탓이 아니라 에덴동산에서 쫓겨났기 때문이고 말이다.
◈ 이제 아가서 8장 6절을 ??
이제 여기서 아가서 8장 6절을 살펴보겠는데, 지금 아가서에 나오는 것이 이미 앞에서 이야기 것인데, 하여튼 밀어 부치기이고 무작정 사랑이라는 말이다. "왜 왔습니까? 그냥 가세요?" 라고 하면, "아니야, 나는 와야만 돼. 아이쿠, 내 술람이 여인아 어디 있는가?" 라고 하면서 말이다. 자기 눈에 안경이라고, 지금 계속해서 그 여인을 찾고 있는데, 즉 아가서의 흐름이 그렇다는 말이다.
◈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
우리가 크리스마스 때에 즐겨 읽은 본문인데, 누가복음 2장에 보면 천사들이 어떻게 찬양을 하는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기뻐하심을 입은' 이라고 하는데, 자기가 기뻐하고 싶어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분에 의해서 기뻐하심을 당했다는 말이다.
바로 그런 사람에게는 하늘로부터 평화가 내려오는데, 즉 "너는 나와 한편이다" 라고 하는 말이다. "이제 너는 내 자식이다" 라는 것인데, 바로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친히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 백성을 자기가 찾아낸다는 말이다. 그렇게 자기 양을 회수하려고 오신 것이 바로 크리스마스라는 것이다.
(눅 2:13)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눅 2: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제발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괜찮은 폼을 잡지 말라는 것인데, "이렇게 하면 예쁜가요? 저렇게 하면 예쁜가요?" 라고 하는, 제발 그런 폼을 좀 잡지 말라는 말이다. 그러면 마귀가 얼마나 좋아하겠는가? 그러니 제발 "이렇게 하면 더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지?" 라고 폼잡지 말라는 것이다.
* 질문 - 하나님께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끼리 그렇게 하는 것은 어떤가요?
그것은 서로를 속이는 짓인데, 물론 이 세상자체가 그렇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런 것을 적극적으로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아무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제가 예쁘지요?" 라고 할 필요는 없다는 말인데, 본성상 그것이 튀어나올 때는 할 수 없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것을 잘했다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 죽음보다 지독한 사랑 !!
아무튼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사랑으로 우리를 일방적으로 모든 것을 다 용납해주셨는데, 물론 우리의 그런 잘난 체 하는 철딱서니 없음도 용서해주셨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주님의 자기 사랑이 어느 정도로 지독한지를 아가서 8장 6절에서는 무엇으로 보는고 하니, '죽음'으로 본다는 것이다.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라고 하면서 말이다.
(아 8:6)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같이 잔혹하며 불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사실상 우리는 이 죽음이 어느 정도 지독한지 죽어보지를 않아서 모르는데, 하지만 죽지 않아도 그런 죽음이 주는 두려움은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계속해서 동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간단히 이야기해서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는 사랑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가?" 라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죽음이 주는 공포가 나에게 떨어질 정도로 강하다" 라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딩동댕' 정답인데, 즉 주님이 주시는 사랑이 그 정도로 지독하냐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죽음이 주는 공포가 우리를 떠날 정도로 지독하다는 말이다. 원래 죽음의 공포는, 우리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언제나 밀착이 되어있는데, 그런데 놀랍게도 주님의 사랑은 더욱 더 밀착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말이다.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덮친 죽음의 공포를 !!
그 예를 하나 들라고 하면,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경우인데, 오빠 나사로와 함께 그들이 평소에 예수님을 위해서 얼마나 잘 대접을 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그 사랑하던 나사로가 병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예수님은 찾아가지도 않고, 이미 죽고 난 뒤에서야 찾아가셨다는 말이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그때 그녀들은 주님에 대한 사랑보다는 자기 집안에 죽음이 덮쳤다고 하는 그 두려움 때문에 어쩔 줄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자 주님이 뭐라고 하시는가? "너희들의 죽음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보다도, 내가 여기 있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곧 부활이고 생명임을, 그래서 나의 사랑을 바로 이 죽음의 공포가 덮친 현장에서 보여주겠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일부러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난 다음에 그를 찾아가셨고, 그것이 바로 이미 죽은 나사로를 살리심으로 말미암아서, 죽음보다 더 강한 것이 바로 주님의 사랑임을 그 죽음의 현장에서 보여주셨다는 것이다.
(요 11:23)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요 11:24)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요 11: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요 11: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그래서 로마서 8장에서 무엇이라고 하는가? "내 아들을 죽이기까지 너희들을 사랑했다" 라고 하는데, 그것은 바로 그런 지독한 사랑을 어떻게 더욱 다르게 표현할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 라는 것을 천 번을 하는 것보다도, "내 아들을 죽이기까지 너희들을 사랑한다" 라는, 바로 그 한마디면 족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롬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그래서 로마서 8장 마지막에 보면,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라고, 즉 사랑은 끊어지지 않는다고 했는데,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버리기까지 사랑했으니 말이다. 어떻게 그런 사랑을 끊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해가 되지요?
(롬 8: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롬 8: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주님의 사랑을 드러내기 위해서 성도는 죽어야 !!
다시 말해서, "내가 죽어도, 그것이 바로 당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라는 것을, 그런 사랑을 자기의 죽음을 가지고 보여주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죽어야 하는데, 즉 주님의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서 성도는 죽어야 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주님이 주신 사랑은 우리의 죽음보다 더 강하기 때문에 말이다. 그 사랑을 드러내기 위해서 성도는 죽어야 한다는 말이다.
* 질문 -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까지 하셨나요?
그것은 바로 주님 자신의 속성 때문에 그러한데, 주님의 사랑이 그런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 질문 - 그러면 그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서 우리를 이렇게 창조하시고 살게 하시나요?
바로 그렇다는 말인데, 거기에 하나를 더 첨가하면, "하나님은 처음부터 사람을 사랑으로 만드셨다" 라는 것이다.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말이다. 사랑으로 사람을 만들었는데, 바로 그 사랑의 속성이 어떠한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것이다. 좀 어려운 말이지만, 신학적으로 들어가면 '사랑' 대신이 '하나님의 형상' 이라고 하고 말이다.
* 질문 - 그러면 결국 하나님께서 자기 약속을 지키는 것밖에 되지 않잖아요?
그것이 바로 제가 그렇게 강조하는 하나님의 '자기 맹세' 라는 것인데, 그것을 가지고 크로스 빌리지에서 답변을 하면 알아듣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으로 만들지 않았으면 이렇게 까지 할 필요가 없지만 말이다. 그런데 보통 기존 교회에서는 "하나님은 우리가 아쉬운 것을 요구하면 채워주신다" 라고 하는데, 그러나 그것은 기독교가 아닌 일반종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맹세밖에 몰라 !!
기독교의 하나님은 어떤 분인고 하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이전에 먼저 그분이 우리를 사랑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자기 아들을 희생시켜 가면서까지 말이다. 그래서 그런 사랑을 받은 사람은 두려움이 없는데, 넘어야 될 선이 없기에 말이다.
마치 넓은 운동장과 같아서, 제 아무리 뛰어다녀도 누가 간섭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모든 것이 다 용납이 되니, 두려움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배시간에 20분이 늦어도, 헌금을 전혀 하지 않아도, 교통사고가 나서 사람을 두 명이나 작살을 내도, 그래도 떳떳하게 교회에 다닌다는 것이다.
* 질문 - 그런데 인간들이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오해하니, 그 사랑을 직접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을 오해해서 말입니다.
그러한 오해는 이 땅에서 어떻게 나타났는고 하니까, 예수님이 메시야로 왔을 때 사람들이 예수님을 초라하게 보았는데, 즉 예수님은 메시야답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 오해와 관련이 있는 것이 바로 인간 배후에 있는 악마인데, 즉 인간은 그렇게 오해했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통해서 악마를 영원한 저주의 불구덩이 속에 집어넣는다는 것이다.
이유는 단 하나, 주님을 사랑하지 않기에 !!
그러므로 지금도 지옥으로 가는 사람들은, 판사가 뇌물을 받아먹고 판결을 엉터리로 해서 가는 것도 아니고, 교사들이 농땡이를 쳐서 가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목사가 교인들에게 사기를 쳐서 그런 것도 아니고, 근본적으로 주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저주를 받아서 지옥으로 간다는 것이다. 즉 사랑을 모르기 때문에 말이다.
이것을 로마서 9장에서는 진노의 그릇과 긍휼의 그릇으로 이야기하는데, 그것을 간단하게 표현하면 "한 쪽은 사랑을 알게 되어있고, 그렇지 않은 쪽은 모르게 되어있다" 라는 것이다. 즉 한쪽은 사랑을 받게 되어있고, 다른 쪽은 받지 않도록 되어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미 끝난 이야기라는 것이다.
(롬 9: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롬 9:22)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롬 9:23)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이근호, 인간을 너무 무시하지마 !!
그런데 사람들이 아무 잘못도 없는(?) 저를 공격하면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 "이근호, 당신은 인간을 너무 무시해" 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저는 성경에 있는 예정론을 이야기한 것이지, 결코 인간을 무시한 것이 아닌데 말이다.
그러니 하나님은 인간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저말로 인간을 사랑했는데, 물론 예정적으로 사랑했다는 말이다. 하지만 인간은 욕심이 넘쳐서 더욱 더 많은 것들을 요구하게 되는데, 즉 구원의 문제를 자기들의 결정에 의해서 되도록 해달라고 말이다. 그러니 그것이 악마의 소리밖에는 더 되느냐는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인간은 원래 토대가 없어 !!
다시 말해서, 악마가 사주해서 그러한 현상들이 생긴다는 것이다. 악마가 인간의 입을 빌어서 말이다. 원래 인간은 자기 토대가 없는데, 오직 주님께서 준 것에 한하여 생기는 것인데, 그러니 원래 인간의 모습은 그냥 흙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 질문 - 그러니 하나님의 그 사랑은 은혜로 덮어주는, 즉 그저 공짜로 주시는 사랑이란 말이죠?
물론 그러한데, 그것이 바로 원래 인간을 사랑으로 만들 때의 그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어떻게 했는가?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그냥 '쭉쭉' 빠는(?) 왜곡된 사랑으로 바꾸어놓았다는 말이다. 참 사랑을 엉터리 사랑으로 말이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아가서에 나오는 사랑을, 즉 죽음보다 더 지독한 사랑을 살펴보고 있는데, 그러니 이 사랑을 말릴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까 본 8장 6절에서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같이 잔혹하며 불같이 일어나니" 라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투기는 사랑과 같은 의미이고 말이다. 그러니 지금 솔로몬이 완전히 이 술람미 여인에게 맛이 갔다는 것이다.
(아 8:6)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같이 잔혹하며 불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 질문 - 신명기 6장에서 "질투하는 하나님이다" 라고 할 때, 바로 그 질투가 지금 여기에서 말하는 이 질투라는 말씀이죠?
물론 그러한데, 그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는 천국으로 보내고, 그렇지 않는 자는 지옥으로 보내는데, 그것을 어떻게 사람들이 이해를 하겠느냐는 것이다. 대자대비(大慈大悲)하신 하나님인데, 그런 하나님께서 무슨 질투를 하느냐는 말이다.
하나님은 대자대비하신 분이 아니라 !!
하지만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약속의 하나님은 전혀 대자대비하신 분이 아닌데, 이 세상에서 말하는 부처가 그렇지 말이다. 오히려 하나님은 너무나도 잔혹하신 분인데, 대자대비는커녕 질투를 해도 아주 심하게 하시는 분이란 말이다.
* 질문 - 어차피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없으니까, 그 사랑을 집적 하나님이 인간에게 집어넣어서,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이고, 그것을 통해서 죽음보다 더 넓은 것이 사랑임을 깨닫게 하신다는 것이다. 물론 그런 사랑에 해당이 되지 않는 놈들은 지옥으로 가고 말이다. 그러니 사람들이 이렇게 법을 만들어서 지키고 선을 넘지 않으려고 하는 이유가 다 있는데, 죽음이 두려워서 그렇다는 것이다. 즉 "내가 이런 짓을 하면 벌을 받아서 죽는다" 라고 말이다.
◈ 인간은 왜 죽음을 두려워하는가?
그렇다면 도대체 죽음이란 무엇인가? 여기에 대해서 미처 이야기하지를 못했는데, 결국은 죽음이란, 자기 자신이 해체되어 없어지는 것인데, 그러니 인간은 당연히 자기가 없어지는 이 죽음을 제일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죽음을 말이다.
사랑 안에서 다시 만들면 되는데, 그것을 믿지 못하니 자기 몸을 자꾸만 자기가 간수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법을 지키려고 하는 것이고 말이다. "그래도 저는 이 선을 넘지 않았으니, 괜찮지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꾸만 자꾸만 선을 긋는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돈에 욕심이 나서 고스톱을 쳐도, "하나님, 다른 사람들은 1점에 1000원 짜리를 하는데, 저는 그래도 100원 짜리를 했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무슨 뜻인가? 자기는 그래도 다른 사람들보다 10배나 착하다는 말이다.
바로 그런 경우가 "테레사 수녀를 봐라. 그 얼마나 착한가?" 라고 하는 것인데, 그것은 자기가 테레사 수녀만큼 착한 일을 하지 못해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인데, 그것이 자기에게는 하나의 이상적인 선으로 여겨진다는 말이다. 하지만 막상 테레사 수녀처럼 해보면, "아하, 테레사 수녀가 이런 이런 짓거리를 했구나" 라고 하면서, 그 내막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 질문 - 그러면 사랑과 질투는 언제나 공존하는 것인가요?
공존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같은 말인데, 즉 "사랑이 질투이고, 질투가 사랑이다" 라는 것이다. 사랑의 하나님이 곧 질투의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국어사전적인 그런 반대의 뉘앙스를 풍기는 의미가 아니고 말이다. 즉 "아내가 마누라이고, 마누라가 아내이다" 라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나는 하나님의 질투의 대상이다" 라는 것인데, 오히려 사랑보다도 어감이 더 강렬한데, 민수기와 시편에 보면, "내가 얼마나 너를 사랑하는지 아는가?" 라고 하는데, 물론 다른 성경에서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그 정도로 하나님은 자기 백성만 사랑했지 다른 놈들은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이기까지 말이다.
◈ 사랑을 받은 자는, 전혀 자기 자랑이 없어 !!
그러니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자들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 자랑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니, 도저히 할 수가 없는데, 즉 자기 착함은 전혀 염두에 두지도 않는다는 말이다. 그냥 언제 "감사합니다" 라고 하지 말이다.
* 질문 - 그러니 우리 자신에게는 사랑의 당위성이 없다는 말이죠?
당연한데, 왜냐하면 그것이 자기가 사랑을 받을 만해서 받은 것이 아니기에 말이다. 즉 자기가 법을 잘 지키고, 선을 잘 그어서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에 자기가 사랑을 받을 만한 짓을 했다면, 그런데 자기가 죽어버리면 그 행한 짓도 사라지기 때문에 사랑의 대상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자꾸 말이 반복되는데, 그러니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말이다.
◈ 오직 주님의 짓거리(?) 때문에 !!
그러니 온전한 사랑의 특징은, 그 사랑의 근거가 자기 짓거리에서 나와서는 전혀 안 된다는 것이다. 즉 "내가 사랑을 받을 만한 짓을 했지" 라고 하면 안 되고, 오히려 주님의 짓(?) 때문에 우리가 그런 사랑을 받았다는 것이다. '주님의 짓' 이라고 하니 표현이 좀 떨적지근(?) 한데 말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주님의 십자가 외에는 자기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했는데, 즉 주님의 행위인 그 십자가 외에 다른 것은 알지 않기로 했다는 것이다. 즉 자기는 예수님의 그 사랑에 미쳤다는 것이다. 그때 사도바울의 심정은 무엇인가? "그래, 나는 주님의 사랑에 미쳤다. 왜 떫어요?" 라는 말이다.
* 질문 - 그러면 아내를 사랑한다면 무슨 짓거리를 해도 사랑해야 하나요?
물론 가끔 그런 일이 발생하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마구 쥐어박고 싶다는 것이다. 물론 흉내를 내어서 그런 척할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주님이 너무나 좋아서 눈물이 나면서 아내를 사랑할 때가 있는데, 그런데 2분(?) 정도가 지나면 앞에 한 것을 그대로 흉내를 내는데, 왜냐하면 그렇게 흉내를 내면 앞의 그 은혜가 담기는 줄 착각을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껍데기만 남는 것이지, 알맹이는 모두가 날아가고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다음에는 마누라에게 당장 "내가 그렇게 해주었는데, 니는 뭐를 해줄기고?"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일종의 흐름인데, 파도가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 하듯이 말이다. 울릉도 트위스트라고나 할까?
* 질문 - 그러니 인간은 여전히 사랑이 담겨있다고 착각을 한다는 말씀이지요? 그래서 자꾸만 같은 행동양식을 취하려고 하고 말입니다.
당연한데, 자기가 그렇게 똑같이 하면 동일한 은혜가 올 것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이것을 가지고 교회에서 이용하는데, 즉 모방을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야, 장로님은 저렇게 기도를 잘 하시는데, 나는 언제 저렇게 할까?" 라고 해서, 그렇게 따라한다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 모방한다고 될 문제가 아닌데 !!
심지어 목사도 똑같이 설교를 모방하는데, 하지만 조용기 목사의 설교를 모방한다고 그게 되겠는가? 과거에 신학생들에게 곽선희 목사가 인기가 꽤나 있었는데, 그 다음시대가 박영선 목사였고 말이다. 설교집을 아예 그대로 가지고 설교를 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럼 이근호 목사는 언제? ㅋㅋ)
그리고 식당을 하든지 뭘 하든지 장사를 해도, "야, 이렇게 하니 손님이 팁을 주고 가네" 라고 해서, 다음에 또 그렇게 똑같이 해보라는 것이다. 손님들이 나가면서 뭐라고 하는지 말이다. 팁은 고사하고 잘못하면 "야, 이 미친놈아" 라는 소리를 듣기에 딱 좋다는 것이다.
◈ 이 세상은 우발성, 우발성, 또 우발성 !!
이 세상에서는 그것을 가지고서 '우발성' 이라고 하는데, "인간은 왜 행동하는가?" 라는 글에 나오는 라이프니치, 그리고 스토아학파의 주장이란 말이다. 즉 인간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울렁울렁 울릉도 트위스트인데, 그러니 항상 사람은 무슨 일이 들이닥칠지 예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화이트헤드나 앞에서 언급한 라이프니치나 스토아학파 등의 철학에서 주장하는 공통점인데, 그런데 여기에 반해서 데카르트는 '딱' 라고 고정되어 있다고 보았다는 말이다. 하지만 인간은 그것이 아니라, 우발적으로, 즉 필연성이 아니라 우연성인데, 그러니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 혹시 '효용체감의 법칙'을 아세요?
경제법칙에 보면 '효용체감의 법칙' 이라는 것이 있는데, 혹시 들어보셨나요? 이것이 무슨 법칙인고 하니, 예를 들어서, 아이에게 처음에는 사탕을 하나를 주면 울음을 뚝 그쳤는데, 그 다음에는 하나를 가지고는 안 되고, 두 개를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같은 사탕인데도 그 가치가 그만 절반으로 떨어졌다는 말이다.
그리고 똑같은 옷인데도 어떠한가? 유행이 지나고 철이 지나버리게 되면 가치가 줄어든다는 말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복고풍이라고 해서, 과거의 옷이 유행하고 말이다. 요즘은 다시 우리가 촌스럽게 생각했던 레이스가 달린 옷이나 뜨개질한 옷이 유행한다고 하는데, 그것이 곧 인간이라는 것이다.
◈ 성경은 완벽한 필연성 !!
하지만 성경은 무엇인가? 완벽한 필연성인데, 모든 것이 다 '패스', '패스'이고, 또한 '예스', '예스' 라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데, 이 땅에서 그 어떤 일이 발생하더라도 하늘나라에서는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말이다. (녹취한 놈 - 물론 성경을 우연성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필연성이라고 말하기도 좀 무리인 것 같은데요?)
예를 들어서, 집사님이 "아이쿠 하나님, 제가 마시지 않던 술을 마셨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라고 하면, 하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그래도 내가 하는 일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어"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니가 뭔데 니가 술을 먹었다고 그렇게 걱정을 하는가?" 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그것은 바로 "나는 술을 마시면 절대 안 돼" 라고 하는 자기의 필연성이 자기를 땡겨서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우연히 깨어지고 말았는데, 즉 우연히 열을 받아서 술을 그만 마시고 말았다는 것이다.
◈ 하늘의 필연성을 모방하는 인간 !!
그런데 이렇게 그만 자기 일이 깨어지니, 그것을 두고서 주의 일이 깨어졌다고 착각을 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인데, 사실은 아무런 문제도 없는데 말이다. 우리가 그 어떤 짓을 해도 주님 안에서는 그것이 모두 '예스'가 되는데, '노'가 아니라 말이다. 주님에게는 "아이쿠, 너 때문에 일이 꼬였잖아" 라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 질문 - 그러니 인간은 자기 속에 또 다른 예수를 만들어놓은 것인가요?
그것이 바로 계속해서 이야기한 '모방'이고 '흉내냄' 인데, 즉 하늘의 필연성을 당겨와서 자기 것으로 만들어놓았는데, 그런데 알맹이는 그만 줄줄 다 빠져버린다는 것이다. 2분도 가지 못해서 엉뚱한 것이 담겨있고 말이다. 또 간증집회 등에 돌아다니는 놈들은 뭐라 하는가? "주여, 저는 그런 간증한 괜찮은 인간이지요?"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런 놈이나 년들은 간증이 아니라 가증한 인간이라는 말이다.
인간은 이렇게 언제나 울렁 울렁거리며 움직이는데, 그러나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움직이지 않는 필연성을 믿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믿음이라는 것은 무엇이 포함될 수 없는고 하니, 결코 그런 울렁거리는 자기 자신을 믿지 않는 것이고 말이다. 그러니 이 아가서는 그야말로 하나님의 지독한 사랑에 관한 표현이라는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