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칠곡강의(뒤에서본한국교회)12-사무엘상1(강의정리)
04칠곡강의(뒤에서본한국교회)12-사무엘상1(강의정리)
이름 : 구득영(IP:203.223.97.243)
04칠곡강의 [뒤에서 본 한국교회] 12 - 사무엘상1
04,08,07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십일조와 장자개념 !!
물론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성화론은 문제가 있고, 그리고 누군가가 십일조와 장자개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달라고 해서 제가 글을 써서 올렸는데, 오늘은 그것을 먼저 이야기하고자 하는데, 양자가 아닌 장자, 즉 맏아들 개념이란 것이다. 이렇게 맏물과 연관되어서 십일조가 대표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할 때 유월절의 밤에 첫째는 모두 죽었지만 둘째나 셋째는 죽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첫째 아들은 아버지가 죽으면 마치 아버지가 살아있는 것처럼 행동을 해야한다는 말이다. 즉 집안에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그 아버지의 대표성을 둘째도 아니고 셋째도 아니고, 첫째가 지닌다는 것이다. 즉 아버지의 속성을 그대로 닮는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아버지가 누구인가? 바로 하나님인데, 그러니 아버지가 아무리 늙어서 죽어도 장자가 그것을 닮듯이, 하나님을 속성을 닮는 자가 곧 '장자' 라는 말이다. 바로 그런 장자가 유월절을 넘기면서 만들어져서 각 가정마다 심겨져있다는 것이다.
이 장자는 일년에 3번씩 세미나에 참석을 해야하는데, 제사장이 주최하는 말이다. 그래서 제사장은 "너희들이 지금 살아있는 것은 너희들이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각 가정마다 하나님의 은총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있는 것이니, 그러니 너희들이 잘해야 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장자개념이고, 곧 맏물개념이라는 말이다.
◈ 레위지파가 곧 맏물 !!
각각의 가정에서 그렇게 되는데, 그렇다면 이스라엘 전체로 보면 어떻게 되는가? 레위지파가 장자가 된다는 것이다. 원래는 이스라엘 지파가 12지파인데, 그런데 지금은 13지파라는 것이다. 그들 중에서 한 지파가 대표지파가 되는데, 그것이 어느 지파이겠는가? 레위지파가 다른 지파들을 대표하는 장자지파라는 말이다.
그래서 이 레위지파에게 십일조가 쏟아지는데, 여기서 십일조는 얼마나 많이 내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도대체 어디로 가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과거의 십일조는 화살과 같은 것인데, 즉 "도대체 누가 우리를 구원했다는 말인가?" 라는 것을, 마치 화살을 따라서 추적하듯이 그렇게 한다는 말이다. 도대체 그 화살이 어디로 가서 꽂히는지를 보자는 말이다. 바로 그 화살역할이 십일조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십일조를 백성들은 레위지파에게 내고, 레위지파는 제사장에게 내고, 제사장은 대제사장에게 내고, 대제사장은 하나님께 내고 말이다. 그러니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십일조를 받으시니, 구원자가 바로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 십일조는 오직 예수님만이 !!
그런데 신약에 오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이 십일조를 제대로 내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돈이 없어서 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의와 인과 신이 없어서 말이다. 이러한 의와 인과 신을 제대로 겸비해서 십일조를 제대로 내신 분은 예수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십일조를 내고, 또 십일조를 받는 분이 되니까, 결국 구세주는 예수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것을 설명해주기 위해서 이 십일조를 받는 레위지파가 그만 '휙'하고 날아가 버리는데, 바로 그것이 히브리서 7장에 나온다는 말이다. (7장 어디에 ??)
다시 말해서, 구약에서 이 십일조를 내는 지파가 있어야 하고, 또 받는 지파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데 신약시대에 오면 이 십일조를 받는 레위지파가 그만 사라져버리고 없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도대체가 이 십일조를 받을 놈(?)이 없다는 말이다. 물론 십일조를 할 놈도 없고 말이다.
단순하게 자기 소득의 10%를 내는 것은 십일조가 아닌데, 왜냐하면 의와 인과 신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십일조를 제대로 할 인간도 없고, 그것을 챙길 놈도 없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그러한 엉터리 십일조를 받으시겠는가?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요?
* 질문 - 그러면 말라기에 나오는 십일조는 무엇인가요?
말라기에 나오는 그 정신을 본받을 사람이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말라기에 나오는 그대로 이루어지는데, 창고에 넘치도록 가득 채워주신다는 말이다. 물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말이다. 우리로서는 도저히 감당하지 못하도록 채워주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말라기의 그런 축복이 요한계시록 21장에 나오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다 있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던지 그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고, 새 하늘과 새 땅에 가면 신구약 성경이 완성된 채로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말 3: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말 3:1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을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말 3:12) 너희 땅이 아름다와지므로 열방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 그러면 사도바울은 어떻게 살았는가?
이렇게 보면 쉬운데, 믿음이 좋았던 사도바울이 어떻게 살았고, 또 베드로가 어떻게 살았는지 보면 된다는 말이다. 얼마나 간단한 문제인가? 주님께서 사도바울에게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라고 했던, 그래서 천사가 와서 옥문을 열어주었던, 그런 주님이 함께 한 사도바울이 도대체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복음을 제대로 알고 믿음이 좋던 사도바울이 결국은 감옥에서 쓸쓸히 죽고 말았는데(?), 물론 살아있을 때도 여기서 얻어맞고 저기서 욕을 들어먹고, 사실상 어떻게 보면 살아도 산 것이 아니라 죽은 것과 같았다는 말이다. 그 얼마나 비참하게 살았는지 말이다.
(고후 11:23)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뻔 하였으니
(고후 11: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번 맞았으며
(고후 11:25) 세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고후 11:26)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고후 11: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 질문 - 교회에 가면 목사들이 교인들의 약점을 이용해서 헌금을 얼마나 강요하는지, 또 교인들은 그 말을 듣고 아닌 줄 알면서도(?) 십일조와 감사헌금을 바치고 말입니다. 목사들이 교인들의 취약한 부분을 골라서 그렇게 하는데 말입니다.
아무튼 인간의 소유욕이 사람을 모두 망쳐놓는데, 그러니 제가 항상 강조해서 이야기하지만, 목사가 목사가 아니라 마귀의 종이라는 것이다. 물론 여러분은 과장법(?)으로 듣지만 말이다.
* 질문 - 천국은 어떤 세계라고 상상할 수 있지요? 예수님은 계시고 나머지는 다 똑같은가요?
그것은 바로, 애초부터 예수님의 은혜로 살아왔다는 것을 고마워하는 상태가 바로 천국이라는 것이다. 당연히 예수님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가 다 똑같고 말이다. 그러니 상급의 차등이라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것이다.
* 질문 - 그러면 사도는 어떤 사람인가요?
사도는 특별히 사명을 받은 사람인데, 즉 자기들이 해야할 일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천국에서 특별한 자리가 있는 것은 아니고 말이다. 그리고 천국에서의 장로는 순교자들인데, 특별히 대우해주는 것이 아니라, 특별히 그 자리에서 해야할 일이, 즉 기능이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니 순교자라는 자리는 '자기 자리' 라고 하는 소유개념이 아니라, 일을 하기 위한 자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들이 받은 면류관을 어린양에게 반납하고 말이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내용인데, 그래서 24장로들이 둘러앉아서 예수님을 찬양하는데, 그것은 마치 성도들이 천국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대표해서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렇게 천국에서 차등이 없는 이유는, 자기들이 구원받은 것이 자기들의 의가 아니라, 주님이 주신 의인데, 그러니 자기들은 전혀 그런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계 4:10) 이십 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 질문 - 교인들이 상상하는 천국과,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천국이 너무 다른데요?
그것은 소유 때문에 그러한데,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답다' 라는 것은 그 얼마나 돈을 가졌느냐에 의해서 결정이 된다는 것이다. 그 사람의 사람됨됨이를 연봉이 얼마인가에 의해서 결정하는데, 제가 전에 그것을 설교시간에 애굽적인 사고방식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바로 과거 애굽의 것을 그대로 답습해서 그렇다는 말이다.
아무리 사람들 사이에 통용이 되어도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고 하면 되는데, 그런데 그것이 좋아 보인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도 좋은 분이라고 하니, 그 예수님에게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달라고 하는데, 좋은 분이니 당연히 자기에게 좋은 것을 주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그런데 이것이 무엇과도 같은고 하니까, 예를 들어서, 아이가 약국에 가서 감기약을 달라고 했는데, 그런데 그만 마귀가 독약을 주었다는 것이다. 엄마는 보면 기가 찰 노릇인데, 그런데 아기는 그 약이 좋다고 떼를 쓴다는 것이다.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니 말이다. 그래서 악마의 종들이 와서 "그래, 줄게" 라고 해서 독약을 주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증거하지 않으면 교회가 아니라는 것은 기본 중에 기본인데, 하지만 교인들은 예수님을 증거하지 않아도 교회라고 보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마귀가 준 독약을 해독하는 것은 예수님의 피밖에 없는데, 그래서 그분의 피가 아니면 안 되는데, 같은 독약을 마시면서도 천국에 간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답답하냐는 것이다.
* 질문 - 그런데 사람들은 말은 천국이라고 하는데, 실제로는 이 세상의 복에 관심이 있던데요?
그것은 방금 말을 했지만, 독약을 마셔서 영혼이 병들었기에 그렇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얼마나 기가 차느냐는 것이다. 영혼이 병들었기에 말이다.
* 질문 - 그러면 이 세상과 천국에서의 인간성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천국에서는 오직 예수님에게 감사하는 것만 있는데, 우리가 가졌던 이 세상에서의 더러운(?) 인간성은 천국에 가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완전히 새 사람이 되기 때문에 말이다. 즉 선악체제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러면 당연히 기쁨과 감사만 남는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것이 결코 우리 힘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에게 은사로 천국에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주신다는 것이다. 은사로, 즉 선물로 말이다. 그래서 그 선물을 받은 사람에게는 있고, 받지 못한 사람에게는 없다는 것이다. 잘나서 있고, 못나서 없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아까 제가 예를 들었지만, 독약을 마신 사람은 계속해서 독약을 찾는데, 마치 마약처럼 중독성이 강해서 말이다. 진짜로 그것을 해독할 수 있는 사람은 예수님의 '피' 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들은 해독제를 갖다 대어도 얼굴을 돌려버린다는 것이다. 독약을 주면 좋아서 마시고, 해독제를 주면 싫어서 돌려버리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들은 그렇게 지금 자기는 절벽에 떨어져서 죽어가면서도 주님이 주시는 해독제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마치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뱀에 물려서 죽어가면서도 들린 놋뱀을 쳐다보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 질문 - 그럼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예수님과 자기 백성들을 위한 '들러리' 인가요?
물론 그러한데, 그것이 에베소서 1장 10절에 나오는 말씀인데, 모든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이 되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이다.
(엡 1: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예를 들어서, 여기에 이렇게 소용돌이가 있다면, 바로 그 중심부위의 핵이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핵이 아니고 말이다. 모든 사람들이 다같이 휘돌리게 되는데, 그렇게 휘돌리면서 중심부위로 가면 갈수록 주님께 대한 감사가 넘쳐난다는 것이다. 그렇게 돌려가면서 예수님이 우리 가정보다 더 중요한 분임을 알게 되는데, 그래서 가정에 아무리 어려움이 와도 오직 주님만 바라보게 된다는 것이다.
요즘은 나이가 들면 국민연금이 나오는데, 그런데 내일 모레 죽을 사람이라면 연금이 좀 적다고 섭섭해하겠는가? 그런 현상이 젊었을 때도 나타나야 되는데, 그것이 안 되니 좀 더 살면서 고생을 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비참해지면 비참해질수록 그리스도의 은혜가 더 크다는 말이다.
◈ 이것이 인생이다 !!
얼마 전에 돌아가신 분인데, 그분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것이 인생이다' 라는 TV프로가 생각나는데, 그것도 비교도 안 된다는 것이다. 60세도 안 되어서 암으로 돌아가셨는데, 남들에게 실컷 이용만 당하다가 버림을 받고 말이다. 물론 자식들도 없고, 그래서 남들을 데려다가 키웠는데, 그들에게도 이용을 당했고 말이다. 한 평생을 그렇게 살았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분이 복음을 제대로 알았다는 것이다. 차비가 없어서 우리교회까지는 못 오고 가까운 복음을 아는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돌아가셨는데, 그분이 천국에서 다시 와서 우리교회에서 설교를 한다고 하면, 과연 우리가 제대로 앉아있을 수가 있겠는가? 그분이 보기에 우리의 행세가 그 얼마나 기가 차겠느냐는 것이다. 현재 우리들이 고민하고 걱정하는 것들이 과연 그럴만한 가치가 있겠느냐는 말이다.
이렇게 가난한 동네인 대구에서도 제일 빈민으로 살았으니, 교회에 헌금을 했으면 얼마나 했겠으며, 구제를 했으면 얼마나 했겠느냐는 말이다. 일정한 직업도 없이 쓰레기를 주우면서 살았는데, 그것도 중풍에 걸려서 똥오줌도 가리지 못하는 시어른의 뒷바라지도 다 하면서 말이다.
우리들은 자기 자식을 잘 키우는 재미로 사는데, 피아노를 친다고 있는 돈 없는 돈 다 털어서 뒷바라자리를 하고 말이다. 하지만 이런 분은 그런 소박한 꿈조차도 꿀 기회가 없었다는 것이다. 복음을 알고 돌아가실 때까지 10년 동안 늘 하는 이야기가 주님이 보고 싶다는 것이었고 말이다.
우리교회 김을수 집사님이 그분을 잘 알아서 가까이 하면서 도와드리기도 했는데, 그런 분을 보면서 우리가 평소에 얼마나 자기 중심으로 살아가는지를 알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살아가면서 남과 비교하면서 경쟁을 하려고 하는데, 그것이 얼마나 피곤한데 말이다.
◈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어떻게 다루시는가?
오늘부터 우리가 사무엘상을 공부할 것인데, 이 성경말씀을 보면서 두고두고 알아야 할 것은, 성경에 어떤 인물이 나오면, 그 인물 자체를 보지 말고 그 인물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다루시는지, 그 원칙만 알면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사무엘 같으면 "사무엘이 얼마나 훌륭한가?" 라는 것을 보지 말고,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어떻게 다루시는가?" 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면 된다는 것이다.
◈ 한나와 마리아 !!
사무엘상 1장에 보면, 한나가 나오는데, 이 한나가 제법 어렵다는 것이다. 왜 어려운고 하니, 한나가 불렀던 사무엘상 2장에 나오는 찬양을, 누가복음 1장에 보면 그것을 거의(?) 그대로 예수님의 모친인 마리아가 이 본문을 당겨서 찬양을 부른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리아가 표절(?)한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두 사람을 그렇게 놓고서는, 한나가 부른 찬양이 단순한 찬양이 아니라, 장래의 계시이고 예언이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태어나는 바로 그 지점에다 떨어뜨려 놓았다는 것이다. 마리아의 입에 말이다.
그러므로 이 마리아의 경우에, 배는 예수님을 임신하고, 입은 사무엘을 낳았던 한나의 찬양이 터지게 만들고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이 마리아의 입에서 나오는 찬송과, 마리아의 배 안에 들어있는 예수님의 장래 일과 결부가 된다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원칙을 가지고 말이다.
사무엘상에 나오는 이 한나를 가볍게(?) 여기면 안 되는데, 즉 울면서 기도해서 아들을 얻은 자식에 욕심이 많은(?) 여인이라고 말이다. 이 사무엘상 2장에 나오는 찬송이, 바로 한나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장래의 일을, 즉 인류의 역사를 미리 앞당겨서 계시했다는 점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제가 질문을 하나 하겠는데, 만약에 이 한나처럼 여러분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계시가 되어서 장래에 실현이 된다면 기분이 좋겠는가? 나쁘겠는가? 물론 기분이 좋지 싶은데, 왜냐하면 자기 말이 먹혀드니 말이다. 사실은 그렇게 기분이 좋은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하나님의 사람임이 확정되니 기분이 좋아야 한다는 것이다.
◈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된 나, 바울은 !!
제가 질문을 하나 더 하겠는데, 사도바울이나 사도요한의 말씀대로 인류의 역사가 그렇게 끝이 나는데, 그렇다면 그들은 기분이 어떠했겠는가? 당연히 기분이 좋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이야기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된 나, 바울은" 라고, 항상 그렇게 말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울에게 얼마나 감격스러운 표현이겠는가?
(엡 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그야말로 이 세상에서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그러나 사도바울 본인은 너무나 잘 안다는 것이다. 자기가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성도들에게 편지를 하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하고 있는 일을 하고 있음을 말이다. 이것이 얼마나 귀한 직분이냐는 것이다.
◈ 주님의 종들은 왜 고생을 덮어쓰는가?
그렇다면 또 하나 질문을 하겠는데, 이들이 과연 편안하게 살았는가? 전혀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다. 그러면 왜 그렇게 고생을 해야만 하는가? "내가 그리스도의 종이다" 라는 것은, 어느 정도까지도 이겨내어야 하는고 하니, "이 세상에 있는 고생이란 고생은 나에게 다 와라. 하지만 그런 고생은 아무리 몰려와도 내가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그러한 기쁨과 감격을 손상시킬만한 고생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라는 것이다.
바로 이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종들을 직사게(?) 고생을 시키는데, 사도 베드로가 죽을 때 어떻게 죽었는가? 물론 이것은 전설이지만, 십자가에 그냥 매달리지 않고 거꾸로 매달려서 죽었다고 하지 않는가? 요한복음에는 자기가 원하지 않는 길로 간다고 되어있고 말이다. 아무튼 자기 인생이 거꾸로 그냥 쳐박혔다는 것이다.
하지만 베드로의 인생이 망한 인생인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베드로후서의 경우에, 베드로가 이런 환란 가운데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니 베드로가 가지고 있는 신앙은, 이 세상의 그 어떤 풍파라고 해도 결코 그 기쁨을 건드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영화 '쿼오바디스'에 보면, 베드로가 사람들을 모두 다 떠나보내고 자기 혼자 돌아가서 십자가를 지는 장면이 나오는데, 물론 영화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 사도요한 - 외로움은 사치에 불과 !!
사도요한은 밧모섬에서 일생을 마감하는데, 그 섬에 누가 있었는가? 요한 혼자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 무슨 오락거리(?)가 있겠는가? 물론 수영장은 있었겠지만 말이다. 바다에서 수영을 하면 되니 말이다. 인간적으로 보면 얼마나 외로웠겠느냐는 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외로움도 주께서 주신 계시 앞에서 사치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신앙은 그 어떤 환란이 닥쳐와도 결코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그런 신앙은 본인이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말이다. 주님께서 그때그때마다 감당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신다는 것이다. 그것이 고린도전서와 히브리서 등에 나오고 말이다.
(고전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 이제 사무엘상을, 먼저 한나 !!
오늘 우리가 사무엘상을 시작하겠는데, 하나님께서 한나에게 어떤 차원에서 계시를 주셨는지, 그것을 먼저 살펴보자는 것이다. 성경을 찾기보다는 제가 설명을 해드리겠는데,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한나가 자식이 없는데, 신랑은 '엘가나' 이고 말이다. 이 엘가나는 제사장인데, 제사장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라 대물림을 하는데, 그것도 아들에게만 말이다. 이 엘가나에는 아내가 부럽게도 두 명인데, 한나와 브닌나, 그렇게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엘가나의 이웃집에 산다고 하면, 한나에 대한 선입견이 없이 말이다. 그 당시 제사장은 제사만 드리는 사람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역할을 했는데, 요즘 말로 하면 목사의 역할이라고 보면 된다는 것이다. (그럼 의미에서 요즘 목사가 자기는 제사장이라고 우기는 것은 말이 되는가? ㅋㅋ)
우리가 엘가나의 옆집에 사는데, 그런데 이 집에는 이미 아들이 하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제사장은 누가 되겠는가? 딸도 안 되고, 조카도 안 되고, 아들만 되는데 말이다. 제3자가 볼 때, 당연하게 그의 아들이 제사장이 되는데, 그런데 그 아들은 한나가 아닌 브닌나의 자식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웃집에서 볼 때, 한나가 아닌 브닌나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이웃집뿐만 아니라 그 집안에서도 당연히 그렇게 여겼을 것이고 말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축복에서 누가 탈락되었는가? 당연히 한나라는 말이다.
◈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
이런 경우가 이미 창세기에 나오는데,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그랬다는 말이다. 이삭의 아내 리브가도 그렇고 말이다. 이것을 갈라디아서 4장에서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이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다" 라고 했는데, 이상하지 않는가? 어떻게 남편이 없는데, 즉 씨(?)가 없는데 자녀가 많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자녀를 많이 낳으려면 혼자 있으면 곤란한데 말이다.
(갈 4:27) 기록된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이것은 바로 창세기 3장 15절에 나오는, 즉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을 이기는 원칙이 그대로 적용이 되는데, 하나님은 그 원칙을 단 한번도 잊어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여러분이 자꾸 잊어버려서 반복을 하는데, 여기에 한나가 있다면, 하나님께서 이 한나를 다루시는데, 그 다루는 원칙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다루는 원칙이 말이다. 그 원칙이 바로 창세기 3장 15절에 나오는데,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을 치는 원칙이라는 말이다.
◈ 투쟁 없이는 안식도 없다 !!
무슨 말인고 하니, "투쟁이 없이는 안식이 없다" 라는 것이다. 즉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치열한 투쟁이 있고 난 다음에 안식이 있다는 말이다. 지금 우리도 역시 싸움을 하고 있는데, 복음을 가지고 말이다. 그러니 피곤한 것이 당연한데, 예수님도 그렇고 예수님을 믿는 자들도 역시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렇게 투쟁을 하는 가운데서 자기가 누구의 자녀인지가 분명하게 드러난다는 말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그 투쟁을 누가 한다는 말인가? 한나가 바로 그 투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대목이 제일로 어려운데, 다시 이야기를 하자면, 여러분이 이것이 왜 어려운지도 모르지 싶은데, 지금 이 제사장 엘가나 집안의 경우에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누가 복을 받은 여자인고 하니, 브닌나 라는 것이다. 한나는 자식도 없고 말이다.
그런데 한나의 경우에 한나 스스로가 생각하기를, 자기는 분명히 하나님을 믿는데, 저 브닌나는 믿지 않는 것 같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나님을 잘 믿는 자기에게는 자식이 없고, 저 개뿔도 아닌 여자에게는 자식을 주어서, 그렇게 주위 사람들로 하여금 복을 받은 여자로 여기게 하느냐는 것이다.
◈ 하나님께서는 왜 한나에게 이런 고통을 주시는가?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한나가 울면서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말이다. 흔히들 말하는 것처럼, 아들을 달라고 간절히 기도한 것이 아니고 말이다. 즉 "왜 하나님께서는 저를 이러한 투쟁과 갈등의 장 속에다가 두셨나이까?"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한나에게 이런 고통을 주시는가? 그냥 브닌나 말고 한나에게 바로 아들을 주어버리면 되는데 말이다. 그것은 바로, 그런 이유도 모르는 상태에서 아들을 주게 되면, 그 아들은 브닌나의 아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 바치기는커녕 자기 아들로 삼을 것이 분명하고 말이다.
◈ 아, 제 자식이 아니군요 !!
그러므로 한나가 응답을 받는 시점이 언제인고 하니, 자기가 낳은 자식은 저 브닌나가 낳은 자식과 싸워서 이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즉 자기가 낳은 자식은 자기의 개인 소유물이 아니라, 신앙이 없는 이스라엘을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친히 주신 제사장임을 알 때, 그때에 비로소 자식을 준다는 것이다. 그것을 깨닫기 이전까지는 브닌나에게 시달리면서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결코 손해를 보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 조금 어려운데, 그래서 좀 더 쉽게 하면, 예를 들어서, 다른 사람들은 다 사과를 가지고 있는데 자기에게만 없다고 하면, 그렇다면 분명히 기도하기를, "하나님, 왜 저에게는 사과를 주지 않습니까?" 라고 할 것인데, 그러면 하나님은 응답을 하시기를, "내가 사과를 줄 테니, 가지고 가서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줘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 한나에게 자식이 없게 함으로서 !!
사람들은 모두가 다 자식을 자기 소유로서 여기고 그것을 자랑하면서 살아가는데, 그래서 하나님은 한나로 하여금 자식이 없게 함으로서 더욱 더 큰데 눈을 뜨도록 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전략이었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신앙을 허락할 때 나타나는 공통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비단 한나 한 사람뿐만 아니라 오고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말이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하나님, 왜 저에게는 남들처럼 비싸고 좋은 아파트를 주지 않습니까?" 라고 하면, 하나님은 뭐라고 하시는고 하니, "그래. 내가 아파트를 줄 테니, 그 아파트가 너의 것이 아님을 알겠는가?" 라고, 그렇게 응답을 내린다는 말이다. 물론 우리는 그래도 한번 그런 비싼 아파트에서 살았으면 하겠지만 말이다.
더욱 더 쉬운 예를 들면, 마리아가 예수님을 임신하게 되는데, 그러면 예수님은 마리아의 소유인가?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은 하나님에게 빼앗겼는데, 하지만 마리아는 하나님께 빼앗겨도 그런 빼앗겼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낳고 싶어서 낳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를 잠깐 도구로 사용하셨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이 있었지만 하나님은 이삭을 도로 빼앗아버렸는데, 그때 아브라함이 화를 내었는가? 아니라는 것이다. 창세기 3장 15절에 의해서, 즉 악마와의 싸움에서 하나님께서 잠시 아브라함과 이삭을 이용했다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기도의 응답이라는 말이다.
◈ 주여, 이 학원에 아이들을 보내주소서 !!
여러분이 기도원이나 교회에서 기도를 하지 않는가? 수학학원을 하니까, "주여, 아이들을 보내주소서" 라고 말이다. 아닌가? 아마도 아이들이 떨어지면 하지 싶은데, 그렇게 기도를 한다면 이 학원이 자기의 소유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이 학원은 하나님의 소유인데, 자기는 이 학원에서 잠시 일하는 일용 근로자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서 채용되었는데, 그래서 수학을 가르쳐야 되고, 청소도 해야되고, 관리를 해야 되고 말이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도 값 주고 샀기 때문에, 자기 자신도 자기 소유가 아니라, 자기의 주인은 따로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까지, 그때까지 응답을 주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 다음 일을 그 일대로 추진을 하고 말이다.
◈ 한나의 자식은, 자식이 아닌 싸움꾼 !!
이것이 바로 사무엘상에 나오는 한나의 기도에 대한 비밀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여러분들이 일단 여기까지는 이해를 해주셔야 하는데, 앞으로 더욱 더 어려운 것들이 나오기에 말이다. 제가 다시 묻는데, 지금 한나가 왜 자식이 없다구요? 다시 한번 더 강조하지만, 한나의 자식은 인간의 자기 소유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창세기 3장 15절에 나오는 악마와의 싸움을 위해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현재 이스라엘은 신앙이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약속을 스스로 포기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믿음이 있는 사람을 따로 그곳에 심어서, 그렇게 해서라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스라엘이 되게 하신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러한 일을 하기 위해서 뽑힌 사람이 바로 한나이고, 그래서 한나는 그 일을 위해서 아직까지도 자식이 없다는 말이다. 이러한 한나가 낳은 자식이 아버지의 대를 이어서, 사실 아버지의 대를 잇는 정도가 아닌데, 그 당시의 최고 제사장인 엘리 제사장을 대신해서 이스라엘을 몽땅 책임을 지는 제사장이 된다는 것이다.
◈ 제사장은 제사와 말씀을 가르쳐야 !!
사실 그 당시 이스라엘에는 제사장이 한 두 명이 아닌데, 이 사무엘의 아버지인 엘가나는 그런 제사장들 중에서 지방에 파송된 일개 제사장에 불과한데, 사실 그런 자의 뒤를 이어서 제사장이 되어도 그렇게 별 볼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이스라엘에 제사장이 많은 이유는, 제사를 항상 드리니 순번제로 돌아가면서 제사를 드려야 하는 점도 있지만, 제사장들은 그 당시 백성들을 가르쳐야 하기 때문에, 그래서 각 지역으로 파견근무를 나가야 하기 때문에, 숫자가 많아야 한다는 것이다.
◈ 분위기가 뜨거운데, 지금 에어컨이 안 됩니까?
그 다음 이야기를 하기 전에 다음과 같은 것을 한번 생각해보아야 하는데, 우리가 기분이 좋을 때는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해서 "이런 모두가 제 것이 아니고 하나님 것입니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하지만 자기 형편이 어려울 때는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고, 거두시는 분도 하나님입니다" 라고 알고는 있지만, 그러나 차마 "거두시는 분도 하나님입니다" 라고 고백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일단 자기 호주머니에 들어가면 자기 것이 되니 말이다.
이런 모습은 마치 집에 키우는 개와도 같은데, 먹을 것을 줄 때는 좋아하지만 도로 빼앗으려고 하면 인상을 쓴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런 짐승보다도 더 못한 경우가 너무나 많은데, 그만큼 우리 인간이 타락했다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진도를 나가기 전에 우리가 우리 속에 있는 이런 점들을 정리하고 지나가야 하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종이라면 기쁜데, 하지만 진짜 하나님의 종들은 어떻게 살았느냐는 것이다. 사도바울을 비롯해서 말이다. 외롭고 힘들게 살았다는 것이다.
◈ 여기서 한나가 보여주는 것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이 사무엘상에서 한나를 통해서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했느냐는 것인데, 바로 그런 점이 성경에서 어려운데, 그것이 사무엘상 2장에 나온다는 것이다. 바로 이 한나를 통해서 장차 다윗왕이 태어난다는 것이다.
◈ 원수를 대적하게 !!
알다시피 한나의 아들이 사무엘인데, 이 사무엘은 엘가나 계통의 제사장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를 대표하는 제사장으로서 하나님께 바쳐지게 되는데, 그리고 나서 한나는 그 뒤에 계속 자식을 낳게 된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본전을 뽑고 남았는데(?), 아무튼 그렇게 해서 원수를 이기게 되는데, 그러면 이 '원수'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는데, 여기서 사무엘상 1장을 한번 보자.
(삼상 1:4) 엘가나가 제사를 드리는 날에는 제물의 분깃을 그 아내 브닌나와 그 모든 자녀에게 주고
(삼상 1:5) 한나에게는 갑절을 주니 이는 그를 사랑함이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니
(삼상 1:6)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므로 그 대적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동하여 번민케 하더라
여기 6절에 보면, 브닌나가 대적으로 나오는데, 즉 원수라는 말이다. 브닌나가 한나에게 자식이 없을 알고 살살(?) 약을 올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대적은 약 올리는 작은마누라(?)의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수로서 악마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 그분은 다윗의 자손 !!
그리고 2장에 보면 한나의 찬송이 나오는데, 그 찬송은 신약에서 누가 했다고 했는가? 바로 마리아의 찬송이라는 것이다. 그 내용대로 마리아가 신약에서 그대로 했다는 말이다. 그러니 마리아가 그렇게 찬양했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을 찬양한 것인데, 그런데 예수님은 누구의 자손이라고 하는고 하니까, '다윗의 자손' 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정말로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면, 이름만 다윗의 자손이 아니라 다윗의 자손다운 그 이름 값을 해야하는 것인데, 즉 그냥 이름만 걸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합당한 일을 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모든 일의 청사진이, 사무엘을 낳았던 한나의 입에서 동일하게 먼저 앞서서 제시가 되었다는 말이다.
◈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는 하나님 !!
그렇다면 사무엘상 2장에 있는 한나의 기도내용이 무엇인고 하니, 6절과 7절을 보면 그야말로 뜨끔뜨끔한 장면이 나오는데, 어떻게 여기서 저 혼자만 그런 생각이 드는 지도 모르겠는데, 정말 왜 그렇지? 아무튼 여호와 하나님은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고, 또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는 분이라는 말이다.
(삼상 2:6)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삼상 2:7)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왜 그런고 하니,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모든 것이 내 하기 나름이다" 라고 하는 사고방식에 뿌리가 박혀있는 상태에서, 이러한 말씀을 겁대가리 없이 읽고, 그리고 그것을 믿는다고 하는 것이 그야말로 뜨끔뜨끔하기 짝이 없다는 것이다.
◈ 바꿔, 바꿔, 다 바꿔 !!
왜 그런가? 그것은 바로 자기의 모든 것을 다 교체를 해야 하니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리시는 하나님만 좋아할 것이 아니라, 죽이시는 하나님도 좋아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부하기도 하시지만, 가난하게도 하시는 하나님을 말이다.
이번 여름 수련회에서 성경공부 스케줄이 어떻게 되는고 하니, 첫째 날에 욥기, 둘째 날에 잠언, 셋째 날에 전도서, 그리고 넷째 날에 아가서, 그렇게 되어있는데, 아무튼 그 많은 것을 다 하겠다는 것이다. 무조건 하면 다하는 것인데, 하지만 걱정도 되는데, 왜냐하면 성경대로 해야 하기 때문에 말이다.
성경대로 하지 않아도 된다면 얼마든지 좋은(?) 말로서 적당히 시간을 보내면서 웃고 즐기면 되는데, 그러나 말씀대로 하면 얼마나 찔리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번 수련회는 음성뿐만이 아니라, 동영상으로 녹화도 되는데, 참석하지 못한 분들에게도 혜택을 드려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 다윗의 자손이 곧 하나님 !!
아무튼 성경말씀은 우리에게 모든 것이 다 뜨끔한데, 그리고 지금은 이 여호와의 자리에다 예수님을 집어넣어야 하는데, 그래서 이 찬양을 누가 하는고 하니까, 예수님을 잉태하신 마리아가 하고, 또한 그 다윗의 자손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이것도 역시 어려운데, 다윗의 자손이 하나님이라는 것이 말이다. 왜냐하면, 그 여자의 후손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러한데, 그 여자의 후손이 창세기 3장 15절에 나오고 말이다. 바로 창세기 3장 15절의 이 원칙이 한나를 다루고, 사무엘을 다루고, 심지어 예수님까지도 다루신다는 것이다. 바로 이 원칙은 하나님께서 결코 포기한 적이 없는데, 오늘날에도 하나님은 이 창세기 3장 15절의 원칙을 가지고서 우리를 들어서 사용하신다는 말이다.
◈ 이 세상 역사는 하나님이 악마를 !!
여기서 여자의 후손이 바로 하나님인데, 그래서 이 세상의 역사는 하나님이 악마를 이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이 요한계시록 12장에 보면 그 전모가 모두 다 나온다는 것이다. 큰 용이 하늘에서 내어 쫓기는데, 그것을 옛 뱀, 혹은 악마라고 하는데, 물론 꽃뱀(?)은 아니고 말이다.
(계 12:7)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쌔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계 12:8)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계 12:9) 큰 용이 내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
여기서 옛 뱀이라고 하면 생각나는 것이, 바로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즉 아담과 하와를 유혹했던 바로 그 뱀이라는 것이다. 그 옛 뱀이 바로 바로 악마이고, 그것이 다니엘서 7장에 보면 나오는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인데, 그것이 노리는 것이 바로 여자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단 7:1) 바벨론 왕 벨사살 원년에 다니엘이 그 침상에서 꿈을 꾸며 뇌 속으로 이상을 받고 그 꿈을 기록하며 그 일의 대략을 진술하니라
(단 7:2) 다니엘이 진술하여 가로되 내가 밤에 이상을 보았는데 하늘의 네바람이 큰 바다로 몰려 불더니
(단 7:3) 큰 짐승 넷이 바다에서 나왔는데 그 모양이 각각 다르니
이 짐승이 노리는 것이 여자의 후손인데, 그런데 그만 그 여자의 후손인 예수님을 떨자부고(놓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만 열을 받아서 이 마지막 때에 그 예수를 믿는 자들을 공격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를 믿지 못하도록 말이다.
* 질문 - 하지만 이미 선택되었는데, 마귀가 공격한다고 해서 됩니까?
그것이 문제가 아니고, 악마는 자기 할 일을 해야 하는데, 즉 선택된 자라도 공격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난과 핍박을 주게 되고,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선택된 자에는 믿음이 더욱 더 강하게 되는, 즉 더욱 더 예수님만 바라보게 한다는 것이다.
악마의 역할이 곧 그런 악역이라는 것인데, 교회부흥을 빙자해서 예수를 믿지 못하도록 하고 말이다. 그렇게 해서 결국은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확연하게 드러나는 되는데, 그러한 가운데서 성도는 자기 목숨보다도 주님이 주신 생명이 더욱 더 귀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는 말이다.
* 질문 - 그러면 성도에게 순탄하게 가는 것은 없네요?
원래 우리가 말하는 순탄함은 애굽에서의 순탄함인데, 즉 돈이 수십 억 정도는 통장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자식이 있고 말이다. 왜 그렇게 돈이 전부인고 하니까, 돈이 없다는 것은 자기 목숨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자연히 돈을 밝힐 수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여자가 아니라 말이다.
그런데 그러한 유혹들을 자기 힘으로 버틸 수 있는가?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거대한 물결을 이루고 오는데 말이다. 그때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깨닫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지롱!" 라고 해서, 이기게 하신다는 말이다.
이것이 결단코 우리 자신의 자생력이 아닌데, 기도를 많이 한다고 이기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경우는 오히려 더 위태롭다는 것이다. 마귀가 어디 우리의 기도를 무서워하겠는가? 하나님에게도 덤빈 놈인데 말이다. 얼마든지 우리 기도에 침투해서 엉터리 응답을 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 이제, '다윗의 자손'이 누구인가?
이제 다윗의 자손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겠는데, 제가 예수님이 아니라 왜 하나님이라고 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즉 마리아가 하나님을 잉태했다는 것인데, 이 다윗의 자손이 하는 일이 무엇인고 하니, 뱀의 후손과 무엇을 하는고 하니, 투쟁이 없으면 안식이 없다고 했으니까, 전쟁을 해서 안식의 세상을 만드는 것이란 말이다. 창세기 이전의 세상으로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고 하니까, 바로 이 다윗의 자손이 하는 역할인데, 그것이 실제로 오늘날 우리들에게나, 아니면 그 당시의 사무엘에게나 어떻게 작용을 하느냐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이 어렵다는 것이다.
그것을 제가 아까 잠시 말했는데, 첫째가 죽이기도 하시고, 둘째가 살리기도 하시고, 셋째가 가난하게도 하시고, 그리고 넷째가 부유하게도 하신다는 것이다. 물론 그 이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지만, 바로 이 4가지를 가지고 다윗의 후손인 예수님이 쥐었다 놓았다 하신다는 것이다.
◈ 예수님을 믿으면 가난하게 하시는가?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궁금한 것은 무엇인고 하니까, 하나님은 아무리 돈이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가난하게 하시느냐는 점이다. 물론 그건 아닌데, 그것이 바로 누가복음 1장에 나오는 마리아의 찬송에 보면 나온다는 것이다.
물론 누가복음의 마리아의 찬송은 앞에서도 말했지만, 구약 사무엘상 2장에 나오는 한나의 찬송에서 리바리벌(?) 한 것이지만, 일단 여기서 누가복음 1장 51절에서 53절의 말씀을 한번 살펴보자. 도대체 마리아가 무슨 찬양을 했는지 말이다.
(눅 1:51)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눅 1:52)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눅 1:53)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이것이 바로 마지막 심판 때의 모습인데, 그러니 마리아가 잉태한 분이 그분이 바로 심판주가 된다는 뜻이란 말이다. 그 심판주의 심판하는 기준이 무엇인고 하니, "교만한가, 그렇지 않는가?" 라는 것인데, 그러니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이다.
◈ 교만이란,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제가 이것을 왜 어렵다고 말하는고 하니, 요기서 '교만' 이라고 하는 것이, 단순히 이 세상에서 말하는 교만이 아니라, 성격이 더럽고 건방진 것 말이다. 그런 것이 아니라, "당신은 예수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라는 것인데, 바로 그것을 가지고 교만한지, 그렇지 않은 지를 따진다는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예수님을 주로 받아들이면 교만하지 않은 것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교만하다는 것이다. 즉 "예수, 니가 뭔대" 라고 나오면 교만한 것이 되어서,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가지고 심판을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한 교만함이 없는 자들에게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주어질 것이고, 그렇지 않는 자들은 이 세상과 함께 불로서 멸망을 당한다는 것이다.
저는 지금까지 예수님을 믿으면서 무엇을 느꼈는고 하니, 예수 믿는 사람을 난데없이 비난하고 공격하는 것은, 그것은 그냥 예수 믿는 사람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공격하고 싶은 자기 의사를 간접적으로 표출하는 것으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 마귀는, 복음을 이야기하면 자기 본색을 !!
어떤 사람이 크로스빌리지에서 저에게 질문을 하기를, "이 십자가 마을에서는 십자가를 모독하면 안 되지요?" 라고 적어놓았는데, 그래서 제가 답변하기를, "십자가는 이 십자가 마을뿐만 아니라, 그 어느 마을에서도 십자가를 모독하시면 안 됩니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아주 명쾌한 답변이지 싶은데, 왜냐하면 그 사람의 의도는 "아니, 십자가를 좀 모독하면 어때?" 라는 것이 분명하니 말이다.
다시 말해서, 마귀가 우리 언제 눈에 보이는고 하니까, 예수님을 증거하고 이야기를 할 때, 그때 자기 속내를 참지 못하고 자기 모습을 언뜻 언뜻 드러내어 보인다는 것이다. 마귀는 그렇게 복음을 이야기할 때에 자기 성깔을 감추지 못하고 '팍' 하고 터트리게 된다는 것이다. 교회가 아니라 십자가의 복음을 이야기하면 말이다.
그러니 "한국교회는 썩었다. 목사의 꼴이 저게 뭐냐? 우리가 올바른 교회를 만들어보자" 라고, 그런 것은 제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오냐. 니 말이 맞다" 라고 하면서 맞장구를 쳐주는데, 막상 예수님의 복음을 이야기하면 안색이 변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태도가 바뀌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교만이라는 말이다.
◈ 나는, 누가 뭐래도 심판주 !!
여기서 마태복음 10장 말씀을 한번 살펴보자. 32절과 33절을 말씀인데, 어떻게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자신 있게 하실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제가 읽습니다.
(마 10:32)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마 10: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자신 만만하게 하시는 것은,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 '심판주' 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심판주를 엉뚱하게 찾지 말고, 지금 이렇게 죽을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는, 그런 권세가 있는 자기가 곧 '심판주' 라는 것이다.
그렇게 인간을 살리기도 하시고, 죽이기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고, 가난하게도 하시는, 그분이 바로 석가모니도 아니고, 공자도 아니고, 부시도 아니고, 노무현도 아니고, 도대체 누구인가? 예수님 자신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 자신이 곧 심판주이니 말이다.
◈ 이 바보야, 그게 아니야 !!
하지만 스데반 집사는 이것을 믿고 죽었는데, 아마 예수를 모르는 사람 같으면 스데반 집사를 보고 미쳤다고 하지 싶은데, "이 바보야, 예수의 말을 믿나?" 라고 말이다. 그렇게 젊은 나이게 그것도 돌에 맞아서 비참하게 죽느냐고 말이다. 버틸 때까지 버티는 것이 인생인데, 그러니 얼마나 어리석은 인간이냐는 것이다. 우리가 만약에 예수님을 믿지 않은 채로 그 자리에 있었다면, 우리도 그런 이야기를 하고도 남았다는 것이다.
물론 예수님을 믿었다면, 스데반이 부러워서 어쩔 줄 몰라 했을 것인데, 아닌가? 사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왜 그렇게 강하게 부딪쳐서 꼭 죽어야만 했던가?" 라고 핀잔(?)을 주고 싶은 마음도 있다는 것이다. 스데반에게 말이다.
사람이 남을 공격할 때는, "내가 믿지를 못하는데, 니가 어떻게 믿나?" 라는 것이 있는데, 그래서 상대방을 이상한 놈으로, 즉 '짜가(?)'로 취급하고 말이다. 즉 "내가 예수님이 믿어지지 않는데, 건방지게 니가 왜 믿어?" 라는 식으로 공격을 한다는 것이다.
◈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면 망한 인생입니다 !!
저도 그렇게 수십 년 동안을 그런 공격을 받고 있는데, "이근호, 당신 말은 맞는데" 라고 하는 것은, 말은 맞을지 몰라도 믿을 것은 못된다는 의미인데, 그러니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는가? "마지막 때에 믿음을 보겠는가?" 라고 했는데, 정말이지 요즘은(?) 이런 말씀이 실감이 난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머리로 따지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라, 따진다고 해서 믿어질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제가 어느 교회에 기서 설교를 하면서, "여러분이 복음을 믿는다고 하면, 이제 여러분은 망했습니다" 라고 했는데, 즉 때려죽어도 천당에 갈 팔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아이고, 오래 살았으면 지옥으로 가야지, 어떻게 천당을 가게 되었는가?" 라고 하는 것이 정상인데 말이다.
그만큼 이 복음은 위험스러운 것인데, 그야말로 폭탄이라는 말이다. 친구와도, 형제와도, 또 사랑하는 부모와도 대화가 되지 않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좋아하던 TV 드라마도 재미가 없어지는데, 물론 웃기는 하겠지만, 도대체 저게 무슨 짓이냐고 하면서 말이다.
◈ 한나의 찬송은, 예언인데 !!
그러한 인생을 누가 살았는고 하니, 바로 '사무엘' 이라는 것이다. 이제 사무엘에 대해서 살펴보겠는데, 여기서 어려운 점이 무엇인고 하니, 한나는 분명히 사무엘을 낳았는데, 그런데도 한나는 이 사무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니라, 사무엘이 어떻게 어떻게 해서 만나게 되는, 바로 그 미지의 인물을 예언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나가 예언은, 그것이 곧 한나의 찬양인데, 그 찬양 속에는 "사무엘은 이렇게 됩니다" 라고 하는 사무엘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이 사무엘이 손가락을 내밀어서 지목하는 어떤 미지의 인물을 예언했다는 것이다. 바로 그 인물이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즉 '메시야' 라는 말이다.
여기서 사무엘상 2장 35절을 살펴보자.
(삼상 2:35) 내가 나를 위하여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리니 그 사람은 내 마음 내 뜻대로 행할 것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리니 그가 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영구히 행하리라
(삼상 2:36) 네 집에 남은 사람이 각기 와서 은 한 조각과 떡 한 덩이를 위하여 그에게 엎드려 가로되 청하노니 내게 한 제사장의 직분을 맡겨 나로 떡 조각을 먹게 하소서 하리라 하셨다 하니라
이 부분은 하나님의 사람이 엘리 제사장에 말한, 즉 하나님이 말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무슨 내용인고 하니, 장차 새로운 가문, 즉 왕의 가문이 등장하는데, 그렇게 되면서 이 세상의 왕가와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왕가가, 그렇게 이 가문을 통해서 선이 맞닿게 됨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
◈ 사무엘을 통해서, 어떤 미지의 인물과의 조우 !!
다시 이야기하면, 아무튼 한나가 기도해서 사무엘을 낳았다고 할 수 있는데, 이 사무엘을 통해서 앞으로 어떤 미지의 인물과 접촉이 되는데, 그렇게 접촉, 결합이 되면서 장차 다윗의 자손 역할을 해야 될 사람이 이 사람 속에, 또 그 사람 속에, 그런 식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즉 사무엘 속에 다윗, 그 다윗 속에 또 누구, 이런 식으로 말이다. 그러므로 '예언' 이라는 것은, 장래에 일어날 일들이 함께 모으고 모아져서 가득히 담겨있다는 것이다.
◈ 우리의 예언은 자기 소원에 불과 !!
이것이 진짜 하나님의 말씀에 있는 예언이라면, 오늘날 우리가 기대하는 예언을 어떤 것인가? "7월에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8월에 주식이 올라갑니까?", "제가 땅을 하나 사놓았는데, 어떻게 됩니까?" 라고 하면서, 우리가 생각하는 기도의 내용들은 장래에 일어나는 차원이 아니라, 지금 자기가 아쉬워하는 것을 다 끌어 모아서 거기에 집어넣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예언내용과 우리의 기도내용이 도저히 같을 수가 없는데, 우리는 그야말로 기도할 바를 전혀 모르고, 오직 성령께서 기도하셔서 모든 것을 다 이룬다는 것이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도 역시 성령님의 기도덕분이고 말이다.
◈ 이단은, 전도를 해도 사랑이 아닌 자기밖에 몰라 !!
어제 안상홍 집단에 속한 어느 인간과 싸움(?)을 좀 했는데, 4시간 동안을 말이다. 하도 우리교회에 나오는 어느 교인을 애를 먹여서 말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전도를 하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고 생각하는데, 전도의 대상이 아니고 자기 자신이 말이다.
그것은 기존 교회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그러니 상대를 사랑해서 전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살기 위해서 전도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렇게 목회자들도 그렇게 부추겨줘야 한 명이라고 더 꼬드겨서 교회로 데리고 오니 그렇게 동조를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안상홍이나, 안식교, 여호와 증인들이 얼마나 악마적이냐는 말이다. 전도를 해도 사랑이 아닌 자기 자신밖에 모르고 말이다. 여호와의 증인의 경우에는, 전도를 하지 않으면 144,000명에 속하지를 못하니 기를 쓰고 한다는 것이다. 몰몬교도 역시 그렇고 말이다.
이 악마라는 것이, 말 그대로 악랄하기 때문에 악마인데, 그렇지 않은가? 그들의 모든 것이 이렇게 다 그렇게 자기가 살기 위한 몸짓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희생에 의한 구원이 아니라, 자기들의 행동여하에 따라서 구원이 판가름된다는 것이다.
* 질문 - 요한계시록에 보면 144,000명이 나오는데, 그것을 상징이라고 하던데요?
그것이 참 어려운 말인데, 사실은 '상징'이 아니라 '알레고리' 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알레고리는 비유라고 할 수 있는데, 비유와 상징은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상징은 그야말로 허구이고, 알레고리는 의미가 숨겨져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144,000명은 예상외로 많은 숫자라고 할 수 있고 말이다.
구약의 엘리야의 경우에, 자기는 혼자 남았다고 여겼는데, 나중에 보니 하나님께서 7000명이나 남겨두었다는 것이다. 물론 선지자는 엘리야 홀로 남게 되었는데, 그 많던 기존 선지자들을 국가에서 왕이 모두 매수하고, 또 협박해서 내쫓아버리고 말이다.
◈ 세미한 음성 가운데 계신 하나님 !!
사실 엘리야도 살아남기 위해서 그릿 시내가로 도망을 치는데, 그래서 까마귀가 와서 음식을 물어다주고 말이다. 그리고 엘리야가 40일을 밤낮으로 걸어서 호렙산에 왔을 때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는데, 그런데 하나님은 폭풍 속에서도, 지진 가운데서도, 불 가운데서도 계시지 않고, 그 후에 세미한 음성 가운데서 나타나신다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까, 어떤 신비로운 자연현상과 같은 것 가운데서 하나님을 찾지 말고, 말씀 가운데서 찾고 믿으라는 말이다. 7000명이라면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닌데, 그런데 엘리야는 자기 혼자 남았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없다고 여기면 많고, 많다고 생각하면 없다는 것이다.
제가 이것을 여러 번 이야기를 했는데, 성도가 없다고 생각하면 많고, 많다고 생각하면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없다고 여기면 좋은데, 만약에 있으면 기적이니 말이다. 전혀 돈이 되는 것도 아닌데,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이 그야말로 기적이라는 것이다.
(왕상 19:11)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가서 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섰으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의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