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칠곡강의(뒤에서본한국교회)11-사사기2(강의정리)
04칠곡강의(뒤에서본한국교회)11-사사기2(강의정리)
이름 : 구득영(IP:203.223.97.243)
04칠곡강의 [뒤에서 본 한국교회] 11 - 사사기2
04,07,24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
* 질문 - 고린도전서 12장 31절에 보면,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라고 했는데, 여기서 말하는 더욱 큰 은사가 무엇인가요?
물론 '사랑' 인데, 그것이 그 뒤의 13장 2절에 보면 이것이 나오는데,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어도 뭐가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는가? 그것이 곧 '사랑' 이라는 말이다.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니 얼마나 큰 믿음인가? 하지만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고전 12:3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고전 13: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고전 13:2)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 질문 - 겨자씨 만한 믿음이 있어도 나무가 뽑혀서 바다에 심겨진다고 했는데요?
그런 쪽으로 크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하지만 믿음은 그런 양적인 크기가 아니라 사랑이 있는 믿음이 진짜 믿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에서 제일은 사랑이라는 말이다.
(눅 17:5)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눅 17:6)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 질문 - 그 사랑의 대상이 땅에 있는 것은 맞지요?
물론 그렇게 땅에 있는데, 왜 이런 이야기가 나왔는고 하니, 그 당시 사람들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어느 것이 더 큰지 경쟁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은 그것들은 서로 비교할 것이 아닌데 말이다. 하지만 이 지상에서 비교를 한다면 그래도 사랑이 되어야, 그것이 온전한 사랑이라는 것이다.
* 질문 - 하지만 인간에게는 그런 사랑이 없지 않나요?
물론 없는데, 그렇게 없으니 그것이 은사이고, 즉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이라는 말이다. 그 사랑은 대상은 이 땅의 사람이지만, 그 출처는 결코 이 땅에서 나올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고 태어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에게 사랑은 불가능한데, 혹시 그런 사랑이 있으면 하나님의 은사인 줄 알라는 말이다.
물론 믿음과 소망도 마찬가지인데, 그래서 그 세 가지는 다 은사라는 것이다. 이것을 좀 더 깊이 들어가게 되면, 갈라디아서에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 "나는 죽을래" 라는 것이 기초가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가 일단 살면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행하면서 산다고 하면, 그것은 결코 믿음도, 소망도, 사랑도 아니라는 말이다.
◈ 자기가 살아있는 한, 인간에게 사랑은 없어 !!
하지만 "나는 이제 그만 살고, 죽고 싶어" 라고 하면, 그것이 안 나오려고 해도 도저히 안 나올 수가 없다는 것이다. 자기가 살려고 하면서 제 아무리 억지를 부려도 그것은 억지에 불과하지, 결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아니라는 말이다. 인간에게 사랑은 없는데, 인간은 상대방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용할 뿐이지 말이다. 엄연히 자기가 이렇게 있는데, 미쳤다고 타인을 사랑하느냐는 말이다.
우리가 이런 것을 좀 알아야 하는데, 남자가 여인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자기의 모든 욕망과 감정이 그만 자기를 지배해서 나오는 형태에 불과한 것이라는 말이다. 여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것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아무튼 이것이 인간의 욕망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남을 사랑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데, 즉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 면에서는 하나님의 사랑과도 비슷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 인간의 사랑은 자기 욕망의 발산에 불과 !!
하지만 문제는 인간의 그런 감정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이 전혀 아니라는 말이다. 물론 '사랑' 이라는 같은 단어를 사용할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그러니 그런 인간의 사랑은, 사실 사랑이라고 하기보다는 인간의 '욕망의 발산' 이라고 보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자의 경우에, 여자가 만약에 자기의 그런 사랑에 대해서 반응이 없다고 하면, 당연히 화가 난다는 말이다. 그러니 욕망이라는 말이다. 순수한 그 무엇이 아니고 말이다. 정말로 순수하다면 그런 화가 나는 감정이 생기겠는가? 특정한 개개인에게 국한되는 것도 그렇고 말이다. 사랑을 줄려고 하면 뚱뚱하든 예쁘게 생기지 못했던 간에 골고루 다 주면 되는데, 왜 하필이면 김태희 같은 여자에게만 몰리느냐는 말이다.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도 역시 그러한데, 부모가 자식에게 아낌없이 다 주는데, 하지만 남의 자식에게 그렇게 아낌없이 다 주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런 사람은 없다는 말이다. 자기 새끼이니 주는 것이지 말이다. 자기 자식은 못생겨도 얼마나 예쁜지 말이다. 눈이 작고 코가 낮아도, 그것이 부모에게는 미의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 욕망은 제거가 불가능 !!
그러니 그런 것이 다 욕망인데, 이렇게 욕망이라는 말은 인간은 없앨 수가 없다는 말이다. 인간에게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물론 자기가 죽으면 없어지는데, 바로 그러한 느낌이 순간이 곧 사랑이 폭발하는 때라고 보면 된다는 말이다.
참으로 희한하게도, 그렇게 자기 자신을 향해서 "이렇게 욕심만 내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지" 라고 여기는 순간에 그만 얼굴빛이 환해지면서, 주위 사람들이 이전처럼 부담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편안함을 느끼게 되는데, 또 남편과 자식들도 잘해주고 말이다.
물론 그것이 약 5초(?) 정도 지속되는데, 그렇게 되면 "야, 이렇게 사랑을 받으니 좋네. 더 살아야지"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또 다시 자기 욕망이 꿈틀거리고 말이다. 그런 것을 반복하면서 평생을 살아가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라는 말이다.
◈ 날파리는 본인의 책임도 !!
크로스빌리지에 보면, 김기동, 류광수 등에 대해서 글을 쓴 것이 있는데, 목사는 떼강도인데 교인들이 즐겁게 돈을 쓰는 꼴을 보지 못한다고 말이다. 자기들은 강단에서 이 세상보다 하늘나라가 더 좋다고 사기를 쳐놓고는, 교인들이 그렇게 즐기면 자기들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고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질투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뒷구멍으로 다 즐기지만, 아무튼 적나라한 목사들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교인들 본인이 복음에 정립이 되어있지 않으면, 온갖 날파리들이 다 달려드는데, 그러니 본인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목사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하니 그런데, 교회에 나오면 당연히 주님을 바라보아야 되는데 말이다.
* 질문 - 저는 고등학교 때에 학교는 빼먹어도 교회는 빼먹지 않을 정도로 열심히 다녔는데요?
우리교회에도 그런 분이 계시는데, 중국에 선교사로 가려고 준비도 했던 분인데, 하지만 한국교회의 실체를 알고 나서는, "한국교회는 어떤 교회이든 교회가 아니다. 나보고 교회에 다니라고 하지 마라" 라고 하고는, 그 다음부터는 교회에 발길을 끊었다는 것이다. 그 양반은 나름대로 자기가 그렇게 해도 할 말이 있는 것이, 그 동안 교회에 너무나 충성을 다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방황을 하니 온 가족들도 다 힘들고 했는데, 그러다가 그 양반의 부인이 어떻게 우리교회에 아는 분이 있어서 연결이 되었는데, 물론 처음에는 긴가민가하다가 지금은 말씀을 듣는 자세가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는 말이다. 나온지가 8개월 정도 되었는데 말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런 상황들을 만들어서 겪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냥 재미로 다니면 평생을 다녀도 갈등이 없지만, 그러나 구원받은 자들은 이런 과정들을 통해서 복음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도록 하시지 않느냐는 말이다. 만나서 이야기를 한번 나누어보면 참 좋은데, 나이가 48세인가 그렇고 말이다.
* 질문 - 은사 중에서 '예언' 이라는 것이, 선지자들이 하는 설교를 두고 말하는 것인가요?
그것이 분화되어 나오는데, 신약성경은 그 틀이 구약에 있는데, 그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살리는 주도권이 사실상 예언에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 시대의 예언에 의해서 구원이 되는 것도 있지만, 후기 선지자들을 보면, 앞으로 있을 일에 대한 예언에 의해서 지금 미리 당겨서 구원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 예언은 종말론적 용어 !!
이러한 점이 예언서에 있어서 난해한 것인데, 왜 그런고 하니, 예수님께서 예언을 할 때도 그 시대에 당장에 이루어지는 것도 있지만, 재림할 때의 일들을 미리 당겨서 예언한 것도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서로 겹치고 섞이니까, 사람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특히 종말에 대해서 정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압축을 시켜서 말씀하시는데, 듣는 사람들의 시간은 너무 느리니 말이다. 즉 모든 시간순서대로 다 예언이 되어야 하는 것으로, 특히 요한계시록을 그렇게 잘못 이해를 했다는 것이다. 마치 1대 대통령은 누구이고, 2대는 누구이고 하는 식으로 말이다.
구약의 예언에 의하면, 예언이 판을 치는(?), 그런 말씀이 지배하는 시대가 온다고 되어있는데, 하지만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물론 두 증인이 있으니 말씀이 통치하기는 하는데, 이 부분이 참으로 어렵다는 것이다. 지금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용어가 구약의 예언서에서 따온 것이란 말이다.
예를 들어서, 이 '두 증인'의 경우에도 요한계시록 11장에 나오는데, 이게 이사야나 에레미야, 다니엘, 에스겔 등에 보면 나오는 고난받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바로 연결을 해버리면 해석이 되지 않고, "아하, 그때 그 당시에 이스라엘 배후에서 종말의식이 있었구나" 라고 해야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비해서 신약은 무엇인고 하니까, 구약처럼 이스라엘이란 제한된 국가 범위 안에서의 종말이 아니라, 범 우주적인 종말임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그래서 '두 증인' 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만이 아닌 우주적인 종말 말이다.
◈ 요한계시록의 '두 증인' - 너희들은 끝났어 !!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에서 구약의 에스겔 등에 나오는 두 증인이란 말을 사용한다는 것은, "너희 이스라엘은 끝났어. 이스라엘에 희망을 두지마" 라고 하는 취지인데, 그러한 의미로 두 증인을 주었다면, 스가랴도 그렇고 말이다. 그렇게 되면 이제 둘 다 똑같은 취지가 되는데, 즉 "더 이상 이 세상에 대해서는 기대를 걸지마" 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이제는 두 증인의 예언에 희망을 두어라" 라는 것이다.
(계 11:1)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
(계 11:2)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 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계 11:3)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 이백 육십일을 예언하리라
그러니 "예언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으시면, 저는 "종말론적 개념입니다" 라고 답변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굉장히 어려운 말인데, 즉 예언이란 종말이 있을 때, 종말답게, 종말처럼, 그렇게 완전히 망하게 될 때 등장하는 용어라는 것이다. 이 예언이 말이다.
◈ 아하, 예언이 등장하는 것을 보니 !!
그러니 예언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미래에 일어날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점쟁이가 돈을 벌려고 하는 짓거리이고 말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하는 예언은, "아하, 예언이 등장하는 것을 보니 이제 끝났구나" 라는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구약의 아모서 선지자의 경우에 뭐라고 하는가? 어떻게 사자가 부르짖지 않고 망할 수가 있고, 또한 나팔을 불지 않고서 적들이 오겠느냐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나팔은, 예언자들이 예언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말이다.
(암 3:4) 사자가 움킨 것이 없고야 어찌 수풀에서 부르짖겠으며 젊은 사자가 잡은 것이 없고야 어찌 굴에서 소리를 내겠느냐
(암 3:5) 창애를 땅에 베풀지 아니하고야 새가 어찌 거기 치이겠으며 아무 잡힌 것이 없고야 창애가 어찌 땅에서 뛰겠느냐
(암 3:6) 성읍에서 나팔을 불게 되고야 백성이 어찌 두려워하지 아니하겠으며 여호와의 시키심이 아니고야 재앙이 어찌 성읍에 임하겠느냐
그래서 성경을 보면서 이런 개념들이 너무 어렵기 때문에 설명을 좀 들어야 하는데, 아무튼 성경에서 예언이 나오면, 손 틀고 나갈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세상은 끝났다" 라고 하는 것이 밑에 까려있으니 말이다.
◈ 성경의 종결에 대해서 !!
이렇게 예언이 지배하는 세계이니 종말 때 예언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도의 말들은 예언에 다 집중이 되는데, 그러면서 종결이 된다는 것이다. 즉 사도시대가 끝나면서 성경이 종결된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확정된 성경이 되는데, 더 보태지도 빼지도 말아야 하는 말이다.
왜 이렇게 성경이 종결되는고 하니, 내용이 다 정리가 되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 당시의 사도가 곧 예언자인데, 구약의 예언자 역할을 그대로 인수인계를 받았다는 말이다. 목회자의 설교는 예언은 아니지만 예언자적 기능이라고 하고 말이다. 예언은 성경자체이니 말이다.
* 질문 - 말씀과 예언은 틀린다고 하던데요?
물론 사용하는 용어는 서로 다르지만 그 내용은 같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예언은 마지막 때에 나오는 희한한 현상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경이 아닌 이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예언은 일종의 점치는 것인데,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예측하는 말이다.
왜 그것이 예언이 아닌고 하니, 설령 미래에 일어날 일이라도 해도 전혀 종말과는 상관이 없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점쟁이가, "당신은 6월에 좋은 사람을 만날 것입니다" 라고 말해도, 그것이 지구의 종말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말이다. (지구가 아닌, 우주의 종말이 아닌가?)
* 질문 - 예언이 종말이라구요?
예언이 되면 종말이 아니라, 이미 예언이 나온다는 것 자체가 종말이라는 말이다. 그것이 제 주장이 아니라, 구약에 보면 이미 그렇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보통 사람들이 평소에 사용하는 말과는 전혀 다른 개념이라는 말이다.
* 질문 - 그렇다면 은사는 사도시대에 이미 종결이 된 것인가요?
그러니 모든 은사는 성경의 판정을 받아야 하는데, 예언이 제일 위쪽에 있으니 말이다. 물론 지금도 방언과 같은 것은 있을 수는 있지만, 지금 제가 하는 말은 '판정관(判定觀)'이 종결되었다는 것이다. 판정의 기준이 말이다.
이것이 하도 어려워서 제가 목사님들에게 강의를 할 때 그림으로 그려서 하는데, 여기 이것이 구약의 땅덩어리인데 여기서 불쑥 화산이 폭발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화산처럼 폭발하기를 원하는 것이 바로 구약 성직자들의 사고방식이라는 말이다. 물론 오해를 했지만 말이다.
◈ 세례요한 - 당신이 오실 메시야가 맞습니까?
그것이 곧 세례요한이 생각했던 것인데, 그것이 아모스에 의하면 마지막 때가 되면, 캄캄한 날이요, 심판의 날이요, 졸지에 모든 것들이 다 망하는 날이라는 것이다. 마치 창세기의 소돔과 고모라처럼 말이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사람을 보내어 물었는데, "정말 당신이 오실 메시야가 맞습니까?" 라고 말이다.
왜 그런고 하니, 지금 분위기가 화산이 폭발하기는커녕 너무나 조용하다는 것이다. 흔히 하는 말이, 교회에 다니면 복을 받고 만사형통을 한다는데, 왜 조용하냐는 식으로 말이다. 왜냐하면 세례요한에 의하면, 자기가 구약에 의해서 아는 식으로는 메시야가 오면 모든 것을 다 뒤엎어버려야 하는데, 왜 이렇게 조용하냐는 말이다.
(마 11:2)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마 11:3)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마 11: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마 11:5)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마 11:6)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 화산폭발 이전에 십자가 사건이 !!
세례요한이 왜 그런 질문을 했는고 하니, 그가 무엇을 몰랐는고 하니, 화산이 대폭발을 하기 이전에 십자가로 불쑥 튀어나온다는 사실을 말이다. 물론 나중에 알았겠지만 말이다. 즉 구약의 폭발이 십자가에게 나와서, 이 십자가에서 폭발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은사' 라고 하고 말이다.
그러니 그 사람이 방언을 하든 무엇을 하든지 간에, 결국에는 "그것이 십자가를 증거하는가? 그렇지 않는가?" 라는 것이란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설교를 제 아무리 유창하게 해도 소용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면 왜 십자가인가? 이 십자가가 마지막 종말임을, 즉 이 세상이 마지막 때임을 증거하는 최종적 판정기준이 바로 이 십자가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 십자가를 믿으면 천국이고, 그렇지 않으면 지옥이라는 것이다.
◈ 결국 십자가로 귀환 !!
그렇게 이미 판정이 나버린 상황이기 때문에, 설교를 하든 병을 고치든 간에, 그 무엇을 해도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고 오직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받는다는 말이다. 설교를 잘한다고 해서, 병을 고쳤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게 아니라, 오직 십자가라는 말이다. 그런 쪽으로 되돌아오지 않으면 그것은 십자가에서 나온 것이 아닌, 즉 하나님의 뜻이 아닌 사이비한 것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은사는 그렇게 십자가로 귀환이 된다는 말이다.
* 질문 - 은사는 왜 필요한가요? 박영선 목사는 은사가 하나님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고 하던데요?
모든 은사는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한 것인데,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왜 죽였는가?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만 쳐다보는 사람들인데 말이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철저히 연구를 했는데, 세례요한도 연구하고 말이다. 여기에서 그들이 세례요한과 한 대화를 한번 들어보자.
* 유대인들 : 당신, 제사장이야?
* 세례요한 : 아니요.
* 유대인들 : 당신, 선지자야?
* 세례요한 : 아니요.
* 유대인들 : 아닌데 당신이 왜 세례를 주지? 세례는 메시야가 오기 전에 선지자가 주는 것이지?
* 세례요한 : 어, 내가 주는 것이 맞는데 ??
유대교 지도자들은 구약성경의 도사들인데, 그들은 세례는 메시야가 오기 전에 예레미야와 같은 선지자가 준다는 것을 다 알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어디에 태어나는지 누가 아는가? 이미 그들이 다 알고 있다는 말이다. 알기에 동방박사들을 비롯해서 다 죽이려고 했고 말이다. 그들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고 하니, 예수님 중심이 아닌 하나님 중심으로 나아갔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 질문 - 제가 왜 고린도전서 12장 31절의 더 큰 은사를 질문했는고 하니, 박영선 목사님은 그것을 사랑이라고 딱히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든지 하나님 쪽으로 포커스를 맞추어서 하나님을 이롭게 하는 어떤 것들이라고 하면서, 그것이 직분이라도 괜찮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모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인데, 사람들은 이렇게 십자가를 모르면서도 나름대로 올바르게 목회를 하려고 하는데, 그것이 인간의 한계라는 것이다.
* 질문 - 저는 더 큰 은사가 분명히 사랑이고 보았는데, 바로 뒤에 나오니 말입니다. 그런데 박영선 목사님은 그러한 이야기를 하지 않아서, 혹시 고린도전서 12장과 14장의 은사의 용도가 서로 다른가 싶어서 살펴보고 했는데, 그리고 복음서에도 은사가 나오는데, 예언과 기도 등이 말입니다. 그런 은사들의 용도가 다 틀립니까?
물론 틀리는데, "구약, 예수님의 공생애, 사도시대", 이렇게 구분이 되는데, 여기서 사도시대에 나오는 용어인 은사와 같은 것을 알려고 하면, 먼저 구약을 살펴야 하고, 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어떤 일을 하셨는지, 예수님의 공생애를 살펴보아야 하는데, 즉 예수님 자신이 은사 속으로 '폭' 들어갔다고 보면 된다는 것이다. 박신양이 그렇게 말했는가? "니 안에 내가 있다" 라고 말이다. 장동건?
* 질문 - 은사는 예수님을, 즉 십자가의 은혜성을 드러내기 위함이라고 보면 된다는 말씀이죠?
당연한데, 예수님이 하신 일이 곧 십자가인데, 그것을 드러내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마지막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마지막 때라는 것은 그야말로 이판사판인데, 즉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라는 말이다.
그때는 하나님을 백날 찾아도 소용이 없고, 예수님을 모르면 그것으로 '땡' 이라는 말이다. 바로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살리는데, 무슨 특별한 일을 시키려는 게 아니라, "야, 니가 예수님을 아나?" 라고 하기 위해서 말이다.
* 질문 - 마지막 질문인데요, 박영선 목사님은 세례를 예수님이 준 세례와 성령이 준 세례를 구분하는데 말입니다. 예수님은 구속의 역할이고, 성령은 교회가 되게 만든 것이고 말입니다.
제가 성령세례에 대해서 쓴 그 책을 보았는데, 그 사람은 자기는 아니라고 할지는 몰라도 아름다운 교회를 만들려고 애를 쓴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인데, 그런 교회 만들기(?)는 예수님께서 하시고, 그런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모이면 교회인데 말이다.
* 질문 - 그렇다면 세례를 어떻게 정리해야 합니까? 굳이 박영선 목사님처럼 예수님이 주는 세례와 성령님이 주시는 세례를 구분해야 합니까?
세례는 그렇게 구분하면 안 되고, '하나됨'으로 끝이 났다는 것이다. 그 양반은 자기의 그런 아름다운 교회 만들기가 한국의 쓰러진 교회를 개혁할 수 있는 바탕이 된다고 보았는데, 사실 아름다운 교회라기보다는 아름다운 집단(?)이라는 말이다.
* 질문 - 자기가 믿고자 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니고, 알고자 해서 알아지는 것도 아니지요?
목사들이 그것을 모르는데, 그런 것을 개인적으로 이야기하면 개인이 그 관심사가 되어서 곤란하고, 앞으로는 개인적으로 하지 말고, 마치 종말이 먹구름이 다가와서, 그런 성령의 폭풍이 다른 사람에게 가지 않고 자기에게 왔다고 보면 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는 바로 거기에 포착이 되었다는 것인데, 즉 하늘에서 천사가 '찜' 했다는 말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을 이유도 없고 필요도 없는데, 그러한 분이 계시는 줄 상상도 못했는데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아닌 저쪽에서 '찜'을 했다는 말이다. 우리가 지금 성경공부를 하는 것도 구원을 받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해주신 주님이 도대체 무슨 일을 했는지, 거기에 대한 고마움과 감사를 더욱 더 크게 하기 위함이고 말이다.
예를 들어서, 누구를 사랑한다면 그 사람에 대해서 알고 싶은 것이 당연하지, 그 사람이 무슨 누구이며, 무슨 생각을 하며, 무슨 일을 하며,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말이다. 그런 것에 관심이 없다면 그건 전혀 사랑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누구를 설득할 이유도 없고, 그러면 실망만 할뿐이고 말이다. 하지만 누군가를 만나게 되면 그 만남도 역시 우연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알고 있는 그분을 증거하면 된다는 것이다. "아하, 나는 이런 분을 만났다" 라고 말이다.
* 질문 - 그러니 우리가 이대로 살면 되지 않습니까? 굳이 목표를 정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죠.
물론 그러한데, 그런 과정에서 예상치도 혹독한 일을 당했을 때는 자기의 과거 행세가 튀어나오는데, 즉 "하나님, 이건 너무 하십니다" 라고 말이다. 마치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말이다. 그럴 때 성경말씀을 보게 되면, "아하, 한때 내가 편안하게 살려고 작심을 했는데, 그것도 역시 주님의 은혜였구나" 라고 말이다.
그렇게 은혜를 깨닫는 것이 성경공부를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어떤 감당할 수 없는 일을 경험하게 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말이다. 평소에는 "그것은 기본이지" 라고 하다가도, 어려운 일을 당하면, 평상시에 주신 것에 감사하게 된다는 것이다. 디모데전서 6장 8절에 나오듯이 말이다.
하지만 도대체 그 말씀을 어느 인간이 지키느냐는 것이다. 지금 한국교회에서 그렇게 먹는 것과 입는 것을 족한 줄로 아는 인간이 있으면 나와보라는 것이다. 물론 병원에서 30년을 침대에 누워 있다가 방금 퇴원한 사람이라면 몰라도, 밖에 나와서 걷고 돌아다니는 것조차도 얼마나 고맙겠는가? 그래도 길어야 일주일이지만 말이다.
(딤전 6:7)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딤전 6:8)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 질문 - 지금 이렇게 공부하는 것이, 예수님의 도구로 쓰임을 받기 위해서 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물론 너무나도 당연한데, 처음에는 그런 마음이 들다가도 나중에 바뀌는 수가 있는데, 하나님의 그런 마음이 계속해서 유지되기를 바랄 뿐이라는 말이다.
* 질문 - 저는 어떤 고민을 했는고 하니, "내가 아내를 위해서 있는가? 아니면 아내가 나를 위해서 있는가?" 라고 말입니다. 사실 둘 다 그러한 존재의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닌데 말입니다. 그냥 주께서 쓰시는 데로 따라가면 되는데, 도구로서 말입니다.
◈ 아내와 남편에 대해서 !!
아내 사랑은 주님의 은혜로 주셨다고 하는 고마운 마음이 없으면, 그런 사랑은 지속되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사랑은 언제나 한계성이 있는데, 다른 경우에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그것은 아내가 귀하다는 차원이 아니라, 또 자기의 취향에 맞고 안 맞고 하는 것에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부쳐주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여자와는 구별이 되는, 하나님께서 특수한 사명을 주어서 '나'에게 허락하신, 그래서 같이 살을 맞대고 치고박고 하면서 살도록 허락하셨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아내를 결코 도구로 여기지 않는데, 물론 우리는 하나님의 도구이지만 말이다. 즉 아내를 자기 이익을 위해서 함부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는가? 아내가 이용가치가 떨어지면 다른 여자에게 눈을 돌리게 되고, 그러다가 바람을 피우게 된다는 말이다. 그 여자도 이용가치가 떨어지면, 또 다른 여자에게로 눈을 돌리고 말이다. 그것이 성경과(?) 철학에도 나오는데, '이성의 도구화' 라고 말이다. 즉 사람을 도구화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 질문 - 그러면 일부다처제로 하면 참 좋지 싶은데요? 바람을 피울 일도 없고 말입니다.
성경에도 보면 아브라함을 비롯해서 아내들이 많은데, 솔로몬은 천 명이고 말이다. 자기 아내의 숫자가 문제가 아니라, 10명이든 100명이든 다른 여자들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유가 있어서 자기에게 부쳐주셨으니 말이다. 제가 지금 시비를 거는 것은, 요즘 사람들이 자기 아내가 한 명이든 두 명이든 다른 여자들과 똑같이 본다는 점인데, 그래서 함부로 아내를 바꾸려고 한다는 것이다.
◈ 아내의 숫자가 아니라, 다른 여자와 다름을 !!
그리고 일부일처제라는 것은 근대사회에서의 일종의 약속인데, 사회질서를 위해서 말이다. 옛날에는 그런 것이 없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실제로 아내가 여러 명이면 얼마나 비위를 맞추는 것이 힘드는지 말이다. 물론 돈도 엄청나게 들고 말이다.
또 잠자리를 해도 골고루 해주어야 하는데, 그러니 자기가 특별히 좋아하는 아내가 있어도 마음대로 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런 사람들은 아내가 한 명인 남자를 부러워한다는 것이다. 물론 보통 남자들은 이해하기가 힘들겠지만 말이다. 성경에서도 아내를 사랑하라는 것이지, 한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리고 남자가 바람을 피우는 것은 아내가 한 명이라서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여러 명이라고 해도 자기 아내를 다른 여자들과 똑같이 생각하니까 그렇게 한다는 말이다. 아무튼 '아내' 라고 하는 존재는 하나님께서 특수한 사명을 부여해서 허락하신, 즉 다른 여자와는 다르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설령 다른 여자를 만나더라도 자기 아내와는 다르게 여기기 때문에 자기 아내를 결코 이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이제는 다부다처제(多夫多妻制)의 사회 !!
몰몬교의 경우에는 아내를 10명을 두어도 괜찮은데, 이슬람교는 공식적으로 4명까지 허용하고 말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아내를 버리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사회의 질서상 아내를 한 명으로 제한하니, 한 명이 생기면 기존의 아내를 버려야하니 문제가 된다는 말이다. 아무튼 아내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 버리면 안 된다는 것이다. 10명이든 20명이든 말이다.
요즘은 사회 분위기가 일부일처제가 아니라 '다부다처제(?)' 라고 할 수가 있는데, 남자도 바람을 피우고, 여자도 바람을 피우고, 아무튼 그렇다는 말이다. 그리고 "니꺼 내꺼 서로 섞어서 사이좋게 살자" 라고 해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소위 '스왑핑'도 일종의 그런 것이고 말이다.
◈ 마귀 - 윤리적으로 완벽해라 !!
하지만 그런 것도 복음에 비하면 너무나 사소한 문제라는 것이다. 마귀가 복음을 가리기 위해서 사용하는 방법 중에 하나가 윤리적으로 완벽을 요구하는 경우인데, 바로 그것이 마귀가 사용하는 제일 큰 무기라는 말이다. 복음은 윤리와는 다른데, 복음을 가리기 위해서 윤리를 동원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양심을 통해서 자꾸만 재촉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마귀가 사용하는 최상의 무기라는 말이다.
* 질문 - 그러면 기존 교회의 목사들은 마귀라고 보면 되나요? 다들 윤리를 들고 나오니 말입니다.
너무나 당연한데, 마귀의 종이 아니라면 목사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주의 종들은 견디지를 못하고 모두들 그런 교회에서 나오고 마니 말이다.
* 질문 - 그러면 윤리성에서 자유함을 얻을 수는 없나요?
그런 것은 없는데, 왜냐하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들이 발생하니 말이다. 자기가 예상할 수 있는 것은 윤리로 감당하면 되는데, 하지만 자기가 감당할 수 없는 상황들이 더욱 더 자주 찾아오게 되면, 그렇게 되면 윤리가 아니라 변명으로 일관하게 된다는 것이다.
* 질문 - 흉악범의 경우에는 어떠한가요?
그것은 본인이 결정하기 이전에는 누가 뭐라고 해도 본인은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람을 10명이 아니라 100명을 죽여도, 본인이 자기 잘못을 깨닫고 인정해야 된다는 말이다.
* 질문 - 그런 사람은 자기가 사회의 윤리와 도덕에서는 자유하다고 느끼는 것이 아닌가요?
그렇지 않은데, 본인의 윤리가 또 따로 있다는 것이다. 기존사회의 윤리에서 어긋난 것이 아니라 도피하려고 애를 쓰는데, 그러한 사람도 신호등은 지킨다는 것이다. 유영철인가 하는 인간은 어떤 특별한 여성에 대해서만 적개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런 마음을 가진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저녁에 시끄럽게 떠든다고 해서 죽이는 것도 모두 특수한 경우에 속한다는 것이다.
◈ 사사기 - 왕이 없음으로 !!
이제부터 본문으로 들어가서, 오늘은 사사기를 살펴보겠는데, 먼저 교재 91페이지를 살펴보자.
** 사사기의 특징은, 모세나 여호수아 같은 고정적인 지도자가 없고, 또한 다윗이나 솔로몬과 같은 절대적인 왕도 없던 기간에, 인간들의 행세를 엿보게 하는 책이다.
이것이 참 재미있는 대목인데, 어떻게 이 세상에는 지도자가 없으면 안 되는가? 살아가면서 자기가 지도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과, 살다보니 지도자가 없는 것과는 서로 엄청난 차이가 나는데, 아무튼 이 사시기의 특징은 "지도자가 없다" 라는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희한한 현상인데, 과연 이 세상에 지도자가 없었던 시절이 있었는가? 전 세계의 역사까지는 몰라도 한국의 역사만 보더라도 어떠한가? 그런 시절이 있었는가? 없었다는 것이다. 반드시 가정에는 아버지가 있고, 또 할아버지가 있고, 나라에는 나라님이 있고 말이다. 심지어 각 고을에는 사또가 있고 말이다. 이 고을의 사또가 무슨 일을 하는가? 재판을 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사람들이 태어나서부터 지도자가 없던 시절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사기에 보면 지도자가 없데, 그러니 아주 특수한(?) 시절을 그들은 보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사사기를 보면서 이렇게 중요한 점을 왕창 다 빼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렇게 지도자가 없는 시절을 만들어놓았는가? 사람들에게는 "아, 하나님도 귀찮고, 예수님도 귀찮고, 그냥 내 마음대로 한번 살아보았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이 불쑥 불쑥 떠오른다는 것이다. 그것을 흔히들 "마누라도 자식도 다 귀찮다" 라고 하는데 말이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이유 없는 반항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엄마 아빠가 없으면 안 되는 줄을 자기들도 잘 알면서도, 왠지 귀찮다는 것이다. 그래도 자기는 좀 컸다고 의논도 친구하고 하지 엄마하고는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엄마는 섭섭하다면서 삐쳐서 남편에게 찡찡거리고 말이다.
* 질문 - 그러면 이 지도자에는 왕만이 아니라 다른 족장들도 포함이 됩니까?
꼭 그런 것은 아니고, 사사시대에 왕은 없었음을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아무튼 사사기에서 반복되는 것이 "왕이 없음으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다" 라는 것인데, 마치 음악의 후렴처럼 그렇게 되풀이가 된다는 것이다.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튀어나오는 말이다.
사실 우리들도 살아가면서 그렇게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데, 어릴 때나 청소년 때부터 그런 마음이 있었고, 그런 시기를 거쳐서 어른이 되니 말이다. 어른 속에도 그런 청소년 시기의 반항심이 다 들어있다는 것이다.
(삿 17:6)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삿 21: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그래서 결혼을 해도 후회하고, 하지 않아도 후회를 하는 것이, 결혼을 하면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해서 그렇다는 말이다. 연예인들이 왜 이혼을 밥먹듯이 하는가? 자기 마음대로 날뛰지를 못해서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면서 "이제 좋은 친구로 살기로 했습니다" 라고 변명이나 하고 말이다. 친구는 무슨 친구, 웃기지 밀라는 것이다.
인간은 이렇게 다들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욕망이 있는데, 그렇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했더니만 이렇게 개판이더라" 라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어떤 민족도 보여주지 못하고 성경에서 사사기에서만 이런 내용이 있다는 말이다. 즉 "인간들은 지도자가 없을 이따위로 행동하기 됩니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사사기라는 말이다.
◈ 사사기꼴 - 약자는 항상 강자에게 눌리게 !!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기 마음대로 하는데, 그렇게 해서 나온 결과가 한 마디로 말해서 '사사기꼴(?)'이 되는데, 그러면 사사기꼴이 도대체 무엇인가? 약자는 항상 강자에게 눌리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 약자는 강자가 되면 또 약자를 누르고 말이다. 강자는 약자가 되면 또 눌리고 말이다.
그렇게 인간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했을 때 가만히 놓아두면, 즉 그렇게 마귀가 역사하도록 놓아두면, 마귀가 역사하는 그 현장에는 무엇만 돗대인고 하니, 그것이 바로 '힘' 이란 것이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을 때, 즉 예수님을 믿지 않을 때 말이다.
* 퀴즈 - 예수님을 믿고 난 다음에 포기해야 하는 것은?
여기서 제가 퀴즈를 하나 내겠는데, 이렇게 예수님을 믿지 않을 때 힘이 있는 자가 돗대라고 한다면, 그러면 예수님을 믿고 난 다음에는 어떤 원칙을 포기해야 하는가? 그 이전에는 강자에게 빌어 붙어서 아부하면서 살아가게 되는데, 하지만 예수님을 믿고 난 뒤에는 '힘'을 더 이상 부러워하지 말고, 그런 강자에게 압박을 당하지 않는데, 바로 '자유' 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힘을 가진 것이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자의 모습이 아니라는 말이다.
* 질문 - 하지만 불신자들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그렇게 자유를 누리는 것을 부러워하는데, 그것은 힘이 아닌가요?
그것은 힘이라고 하지 않고, '권세' 라고 하는데, 왜냐하면 '희생' 이기에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늘 위에서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밑에서 희생으로 다스리고 계신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위에서 힘으로 지배하지만 말이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항상 자기 죄를 용서해주시는 그 주님의 사랑으로, 즉 희생의 힘으로 살아가는데, 그렇게 예수님은 밑에서 자기 택한 백성들을 떠받쳐서 데리고 가신다는 것이다.
어떻게 여러분은 이런 말을 처음 듣나요? 제가 여러 번 이야기를 했는데, 천국에서는 어린양의 피를 찬송하는데, 그것이 바로 천국에서의 힘이라는 말이다. 남을 이기고 눌리는 것이 힘이 아니라, 어린양을 찬송하는 것이 말이다.
◈ 예수님의 힘은 자기 희생 !!
아까 처음에 질문하신 것이,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임하게 해주시고" 라는 것인데, 그 말의 의미를 모르면, "야, 기독교는 참 좋네" 라고 하는데, 왜냐하면 자기가 평소에 살아가면서 힘이 없어서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았는데, 주기도문에 보니 그런 좋은(?) 내용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하늘의 힘을 얻고자 교회에 나오고 말이다. 그리고 기존의 권력자들은, 자기 힘을 하늘에서 준 것이라고 오해를 해서 자기 마음대로 하고 말이다.
하지만 사실은 그것이 아니라, 주님은 "니가 나의 희생을 본받을 자세가 되어있는가?" 라고 하는 것을 물어보고 있는데, 그렇게 자기의 희생으로서 밑에서부터 일을 하신다는 것이다. 하늘 위에서가 아닌 낮고 낮은 곳에서 말이다.
◈ 며느리는 바지에 산 똥 !!
예를 들어서,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있다면, 바지에 똥을 산 그 시어머니의 엉덩이를 닦아주는 며느리를 보고 누가 힘이 세다고 하겠는가? "아이쿠, 시어머니보다 힘이 세어서 그렇게 똥도 잘 닦아주네" 라고 누가 말하겠느냐는 것이다. "어쩌면 저렇게 시어머니를 잘 돌보고 보살피는가?" 라고 하지 말이다.
물론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보다는 며느리가 당연히 힘이 세겠지만, 시어미니가 힘이 더 셀 수도 있다구요? 치매에 걸리면 힘이 세어지는가? 아무튼 똥오줌을 받아내고 닦아주는 것이, 희생정신이지 어떻게 힘이 센 것이냐는 말이다. 물론 그 시어머니가 숨겨놓은 돈이라도 있으면 문제가 전혀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 그 당시 '왕'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해도 이해가 안 되면 할 수 없는데, 아무튼 사사기에서 왜 왕을 빼버렸는가? 그 당시 사사시대에 이스라엘의 주변에 있던 왕들, 즉 이 세상의 왕들은 어떤 왕인고 하니까, 전부가 다 하나같이 힘이 센 자들이라는 것이다. 알다시피 힘이 없고 어리버리하다면 누가 따르고, 어떻게 왕이 되겠느냐는 것이다.
우리가 이런 것도 좀 알아야 하는데, 옛날에는 어떻게 왕이 되는고 하니, 물론 처음에는 왕이 없었고, 그래도 나라가 좀 덩치가 커야 왕이 있는 것이고 말이다. 보통 씨족에서 나온 것인데, '씨족 연합체' 라고 있는데, 옛날에는 특정 영역이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물이 있는 곳에 집을 짓고서 농사를 지으면서 머물러 산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쪽 동네는 고씨 집안, 저쪽 동네는 정씨 집안, 그리고 그쪽 동네는 이씨 집안, 그렇게 각자가 대대로 씨족으로 하나가 되어서 뭉쳐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씨족에서 쳐들어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다같이 힘을 합쳐서 막아야 하니, 자연스럽게 가까이 사는 씨족들끼리는 힘을 합치는 연합체가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똑같이 돈을 나눠주어도 한 달 뒤에 보면 돈을 다 날린 놈이 있는 반면에, 더 많이 모은 놈도 있듯이, 같은 씨족이라고 해도 시간이 좀 지나고 보면 힘이 세고 큰 씨족이 있는 반면에, 비실비실한 씨족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냥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 저쪽 멀리 있는 씨족하고 서로 필요에 따라서 물물교환을 하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힘이 있고 덩치가 큰 씨족을 대상으로 하게 되고, 그런 큰 씨족 중심으로 모이게 된다는 것이다.
◈ 역시, 이사금 토마토 ??
그것이 바로 고려를 세운 왕건인데, 궁예나 왕건이 모두가 다 그 지역의 조폭들이라는 말이다. 덩치가 조금 큰 말이다. 그때는 사병을 거느리려면 돈이 있어야 가능한데, 즉 용병들이라는 말이다. 일본의 사무라이가 그런 것인데, 말이 사무라이이지 요즘 나이트 클럽의 깍두기들이라는 것이다. 그런 칼잡이들이 나중에 월급을 받는 용병이 되는데, 전쟁이 나면 대신 나가서 싸워주고 말이다.
그렇게 하다가, 그 씨족 중에서 제일 용병이 많고 힘이 세어지면 자연스럽게 형님이 있게 되는데, 즉 우두머리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 씨족을 호족이라고도 하는데, 아무튼 덩치가 큰 씨족이 그렇게 해서 그렇게 만들어 진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나중에는 세습제가 되는데, 아무래도 먹는 것이나 교육도 잘 받고 하니 말이다. 그렇게 해서 왕이 된다는 것이다. 신라시대의 '이사금'도 그렇고, 점차 규모가 커지면서 왕의 명칭도 바뀌고 말이다.
◈ 왕이 없으니, 이방나라의 밥 !!
우리가 사사기를 보려면 이런 배경정도는 알아야 하는데, 아무튼 사사시대에 이스라엘에는 왕이 없으니까 그들은 이방나라의 밥이라는 것이다. 왕이 없어서 뭉치지를 못하니 개별적으로 무슨 수로 당하겠는가? 물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못해서 그렇게 당하지만, 세상적인 표현으로는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이 힘이 센 것 같지만, 개미도 한 두 마리라면 한 손으로 잡으면 그만이지만, 그러나 뭉쳐서 우리를 덤비면 우리는 도망가야 한다는 것이다. 메뚜기도 한 두 마리라면 잡아서 구워먹을 수 있지만, 그러나 떼거리로 덤비면 피난을 기야 한다는 말이다.
이스라엘이 처음에 가나안 땅에 들어올 때는 그야말로 그 위용이 대단했는데, 따로 따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 모세를 중심으로, 그 다음에는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해서 들어왔으니 말이다. 물론 세상적으로 보면 모세가 위대하고 여호수아가 위대하지만 말이다.
◈ 하나님이 왕인데, 그러나 !!
하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어떠한가? 모세가 하나님의 언약에 순종했고, 여호수아도 하나님이 주신 모세언약에 순종했기 때문에, 그렇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었는데, 즉 바로 그러한 하나님이 왕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모세가 죽고, 여호수아가 죽고 난 다음에, 그들은 완전히 개판이 되고 말았는데, 그것이 바로 사사기에 나온다는 말이다.
* 질문 - 아니, 갑자기 왜 그렇게 되었지요?
이제 그것을 알아보려고 하는데, 사사기 2장 7절부터 한번 살펴보자.
(삿 2:7) 백성이 여호수아의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 일을 본 자의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를 섬겼더라
(삿 2:8)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일백 십세에 죽으매
(삿 2:9) 무리가 그의 기업의 경내 에브라임 산지 가아스산 북 딤낫 헤레스에 장사하였고
(삿 2:10) 그 세대 사람도 다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삿 2:11)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
◈ 여호와를 알지 못하기에 !!
이렇게 여호와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들의 눈에는 여호와는 보이지 않는데, 그들의 눈에는 모세가 보였고, 여호수아가 보였지 말이다. 여호와 하나님을 본 사람은 모세밖에 없다는 것이다. 시내산에서 보았는데, 물론 얼굴을 빼고 뒷모습을 말이다.
여호수아도 하나님을 직접 보지 못했는데, 다만 여호수아는 모세를 따라서 시내산 중턱까지 올라갔다는 말이다. 물론 나팔소리는 들었고, 산이 진동하는 것은 느꼈겠지만, 진짜 거룩한 여호와 하나님의 모습은 전혀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런 하나님을 본 모세가 하는 말이, "우리 속에 누가 계시는고 하니, 여호와 하나님이 계신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자기는 보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은 그것을 믿기가 그리 용이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모세의 말이 아리까리(?) 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광야에서 매일같이 하는 말이 무엇인가? 민수기를 공부할 때 이미 했는데, 틈만 나면 하나님을 원망한다는 것이다. 만나를 주고 메추라기를 줘도, 물론 처음에는 기적이라고 하다가 나중에는 시시해지고 말이다. 마치 우리가 아플 때는 건강한 것이 고마운 것이지, 건강할 때는 그 고마움을 전혀 모르듯이 말이다.
이렇게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으니 그들은 자연적으로 눈에 보이는 이방나라를 돌아보게 되는데, 그런데 거기에 보니까 모세보다 권력을 더욱 더 많이 가진 화끈한(?) 왕이 있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들보다 힘이 더 세고 말이다.
* 퀴즈 - 이방나라가 힘이 센 이유는?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살펴보아야 하는 것은, 제가 퀴즈를 하나 내겠는데, 과연 그 이방나라에 왕이 있기 때문에 힘이 센 것인가? 아니면 지금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않아서 그들이 힘에 센 것처럼 보이는가?
여기서 사사기 2장 21절에서 23절 말씀을 살펴보면, 이것이 엄청나게 중요한데,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데도 역시 그렇고 말이다.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삿 2:21) 나도 여호수아가 죽을 때에 남겨둔 열국을 다시는 그들의 앞에서 하나도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삿 2:22) 이는 이스라엘이 그 열조의 지킨 것같이 나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그들로 시험하려 함이라 하시니라
(삿 2:23) 그 열국을 머물러두사 속히 쫓아내지 아니하시며 여호수아의 손에 붙이지 아니하셨음이 이를 인함이었더라
여러분은 과연 이 말씀이 믿어지는가요? 정말이지 믿기가 힘든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과도 같은고 하니, 다음의 대화를 한번 들어보라는 것이다.
* 교인 : 목사님, 제 아내가 저를 괴롭힙니다.
* 목사 :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당신이 하나님을 잘 믿는지, 안 믿는지를 테스트하는 것입니다.
* 교인 : 예, 테스트요?
* 목사 :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런 말을 안 듣는 아내를 붙여주셨다는 말입니다.
* 교인 : 그럴 수가?
* 목사 : 당신은 그런 하나님을 믿습니까?
* 교인 : ? ? ?
◈ 왜 지금의 남편이고, 또 아내인가?
그러니까 우리는 눈에 보이는 아내와 눈에 보이는 남편이 우선이지, 하나님께서 왜 저런 남편과 저런 아내를 붙여주셔서 같이 살게 주셨는지, 그런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내가 여호와의 도를 지키는가? 그렇지 않는가?" 라는 것을 시험하기 위해서, 바로 그런 이유로 하나님께서 가져다놓은 '교육자재' 라는 것이다. 과연 이러한 사실을 우리가 감히 믿어진다고 말할 수가 있는가? 그러니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문제이냐는 말이다.
그러니 사실은 문제자체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다는 것이 문제라는 말이다. 차라리 어려운 수학문제 같으면 그래도 없는 머리카락을 뽑아서라도 시도라도 한번 해보겠는데 말이다. 박사학위를 딴다고 될 문제도 아니고 말이다. 돈으로도 해결될 문제가 아니고 말이다.
지금도 이러한 원칙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시는데, 흔히 사람들은 "왜 이 세상이 제 마음대로 안 됩니까?" 라고 하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가 예수님을 잘 믿는지 믿지 않는지, 바로 그것을 테스트하기 위해서 그렇다는 말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하나님, 아닙니다. 오해하신 것입니다. 이번 일만 부도가 나지 않도록 잘 해결해주세요" 라고 하는데,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이 했던 "하나님, 이번만 적들을 물리쳐 주세요. 앞으로는 우리가 하나님을 잘 섬기겠습니다" 라고 하는 것과 똑같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도 그렇게 하나님께 하소연하고 싶고 말이다. 바로 그런 것을 수십 차례나 한 것이 바로 사사기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적들을 물리쳐주니까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는가? 뭔가 변화가 있는가? '개코(?)' 라는 것이다. 전혀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어휴, 살았다" 라고 하고서는, 그 다음부터는 또 자기 마음대로 라는 것이다. 그것을 사사기에는 "왕이 없음으로 자기 소견으로 했다" 라고, 즉 그 이유를 왕이 없다는 것에 두고 있다는 말이다.
◈ 우리 소견 - 다급할 때는 찾고, 편할 때는 버리고 !!
다시 돌아가서, 이 사사기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왕이 없음으로, 즉 자기가 믿고 의지하는 구석이 없음으로, 사실상 그렇게 의지할 마음도 별로 없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왕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이 제대로 된 왕인데, 이 세상 왕들은 모두가 다 실패하니 말이다.
아무튼 왕이 없다고 하면서 자기들 소견에 옳은 대로, 즉 자기들 마음대로 했는데, 그런 자기 소견이 무엇인고 하니까, "다급할 때는 하나님을 찾고, 편할 때는 버리고"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소견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인간은 그냥 홀로 두었을 때, 그것이 바로 인간에게 나오는 본성이라는 말이다.
◈ 우리의 소원은 시험 없는 세상, 그러나 !!
제가 어릴 때 소원이 무엇이었는고 하니까, 제발 학교에서 시험이 없었으면 좋겠고, 방학이 좀 길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었는데, 혹시 여러분 지금 시험을 치나요? 그렇게 우리에게 시험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자식이 고등학생만 되어도 가르치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다 잊어버리니 말이다.
그런데 시험을 치는 직장이 있는데, 진급을 할 때 말이다. 왜 그렇게 시험을 치는가? 시간이 남아도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렇게 되면 시험을 치니 반드시 공부를 해야 되고, 그렇게 공부를 하니 그 전문분야에 대해서는 남들보다는 훨씬 낫다는 것이다.
아무튼 사람이 그렇게 시험을 친다고 하는 것은, 자기가 주인이 아니라는 것인데, 아니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시험을 치는 그런 인간이 누가 있는가? 시험을 친다는 것은, 즉 자기보다 높은 어떤 분이 계셔서 그분이 자기에게 인간이 되라고 매일같이 테스트하는 관계로, 그렇게 연결이 된다는 말이다.
◈ 왕이신 예수님, 사사기대로 !!
바로 그런 식으로 연결된 분이 누구인고 하니, 바로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 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왕이신 주님은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시는가? 그것은 바로 사사기에 있는 대로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는가? 우리도 역시 사사기에 있는 대로 움직이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 감사합니다. 이제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그렇게 왕을 버리고 온 종일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 낮에는 친구들도 있고 몸이 가뿐하니 말이다. 그러다가 저녁이 되어서 잠자리에 들려고 하니 뭔가가 찜찜해서 "주여, 오늘도 제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용서해주세요" 라고 하는데, 그것이 매일같이 되풀이되고 말이다.
* 질문 - 그런 사람이 불신자라는 건가요?
불신자가 아니고 신자에 한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믿지 않는 불신자에게는 아예 그런 것도 전혀 없는데, 그냥 내버려두시니 말이다. 오직 택함을 받은 자에 한에서 그렇게 자기 본색을 드러내게 하시고, 계속해서 알도록 하시는데, 자기 '친 백성' 이기 때문에 말이다. 그래서 알게 하시고, 징계를 하신다는 것이다.
이제 사사기 3장을 보겠는데, 1절부터 먼저 살펴보자.
(삿 3:1) 여호와께서 가나안 전쟁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을 시험하려 하시며
(삿 3:2) 이스라엘 자손의 세대 중에 아직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에게 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려하사 남겨 두신 열국은
(삿 3:3) 블레셋 다섯 방백과 가나안 모든 사람과 시돈 사람과 바알 헤르몬산에서부터 하맛 어구까지 레바논 산에 거하는 히위 사람이라
◈ 여호수아의 전쟁을 모르는 후손들 !!
여기 1절에 나오는 '가나안 전쟁'은 여호수아가 한 전쟁인데, 그 여호수아가 지금 살았는가? 죽었는데, 그러니 이스라엘의 후손들이 그 전쟁을 모른다는 것이다. "웃기고 있네. 우리 아버지가 또 구라치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허풍을 떠는 줄 알고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다시 되풀이 된 사건이 무엇인고 하니, 7절 이하에 나오는 내용이라는 말이다.
(삿 3:7)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 목전에 악을 행하여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긴지라
(삿 3:8)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그들을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파셨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팔년을 섬겼더니
(삿 3:9)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워 구원하게 하시니 그는 곧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라
여기에 보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또 다시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게 되는데,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메소보다미아 왕에게 그들을 넘겨버렸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왕 아래에서 8년이나 핍박을 받다가 다시 하나님을 찾게 되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옷니엘' 이라는 구원자를 보내어주신다는 것이다.
◈ 전쟁을 몰라, 알아야 돼, 그래서 방치함 !!
이런 행태가 사사기에서 열 번이 넘도록 계속해서 반복이 되는데, 그 진행되는 순서가 어떻게 되는고 하니, 첫째로 지금 백성들이 여호수아의 전쟁을 모르고, 둘째로는 전쟁을 모르기에 하나님께서는 알게 하시는데, 셋째는 그렇게 알도록 하기 위해서 우상을 섬기도록 방치한다는 것이다. 그냥 그렇게 내버려두신다는 말이다.
◈ 우상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우리가 흔히 우상이라고 하는데, 그 우상이 도대체 무엇인가? 여호와의 언약을 믿지 않는 것은 모두 우상이라는 말이다. 부처를 섬기는 것만이 우상이 아니고 말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하는 우상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모든 것이 모두가 다 우상이라는 것이다. 즉 예수님에게 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