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요리문답공부 20(20030420)
소요리문답공부 20(20030420)
이름 : 오용익(IP:59.3.201.241)
소요리문답공부 제 20강 (이 근호목사, 2003년 4월 20일, 우리교회)
제 24과 구원의 순서
제 29문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값 주고 사신 그 구속에 참여자가 됩니까?
답) 그리스도께서 값 주고 사신 그 구속에 참여자가 되는 것은 그의 성령으로 우리에게 구속을 효력 있게 적용함으로 말미암아 됩니다.
제 24과 구원론에 대해서 함께 공부해 봅시다. 문제 29번에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값 주고 사신 그 구속에 참여자가 됩니까?’ 답변은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리스도께서 값 주고 사신 그 구속에 참여자가 되는 것은 성령이 우리를 불러 믿음으로 효력 있게 그리스도에게 연결하여 주시는 일입니다.’(*역본마다 약간씩 차이가 나는 것을 감안할 것)
아주 답변이 잘된 것 같지요? 왜 답변이 잘 되었느냐 하면, ‘우리가 어떤 행동을 취하면 우리가 구원받습니까?’에 대한 답변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를 불러서 효력 있게, 능력 있게, 효과 있게 그리스도와 연결시켜 줌으로써 우리가 구원이 됩니다’라고 답변이 되어 있는 거예요. 정말 제대로 답변이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구원론에 있어서 우리 인간의 행함은 완전히 배제가 되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인간을 어떤 식으로 구원하느냐, 에 관한 것이 구원론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되는 겁니다. 관련 성구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지요?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 불쌍히 여김으로 말미암아, ‘…긍휼하심을 좆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딛 3:5) 구원하신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에 나와 있으니 망정이지 제가 만약에 사람들한테 이런 소리를 하면 안 그래도 욕을 얻어먹는데 사람들이 많은 욕설을 듣게 될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욕설을 하느냐 하면,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가 우리의 구원에 보탬이 되느냐 마느냐?’ 그 문제 아닙니까?
‘우리의 의로운 행위가 자기를 구원하는데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느냐, 없느냐?’ 그 문제인데 성경은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행위가 우리의 구원을 뒤에서 받쳐 준다든지, 떠밀어 준다든지, 박차를 가하게 해 준다든지, 그런 힘이 될 수가 없다고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에 대해서 일반 목회자들은 반발을 하지 않을 수 없지요.
왜냐하면 목회자들은 생각하기를 자신이 스스로 사람들을 구원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만약에 인간의 의로운 행위를 말하지 아니할 경우에는 분명히 이 이야기를 듣고는 교인들이 제멋대로 생활할 것이 분명하다’고 짐작을 제멋대로 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나는 ‘제멋대로 사는 사람이 있다’는 이것을 인정하지를 않습니다.
인간이 신입니까? 제멋대로 살게. 사람들은 제멋대로 못살아서 환장하고 있는 거예요. 자기 맘대로 안 되어서 미치고 팔짝 뛰는 겁니다. 사람이 제멋대로 살지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제멋대로 살고 싶은 것은 제 마음이고 그 마음과 실제 상황은 같지를 않아요. 아침에 일어나서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 하는 희망사항은 가질 수 있어요.
자기의 상상 속에서는 뭐든지 제멋대로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심지어 꿈속에서도 자기 맘대로 못해요. 막상 하루를 지나면 내 원대로 된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마치 우리는 자기 인생에 대해서 스스로 감독이라고 생각하거든요. 프로야구나 축구팀의 감독이 있는데 그 감독이 선수들을 길러놓고 훈련시켜 놓았지만 막상 그 선수들이 게임에 임하면 감독 마음대로 되지를 않거든요.
분명히 작전대로 나갔는데 작전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되도록 하려고 하는데 자꾸만 우발적인 사태, 돌발적인 사태가 벌어져서 도중에 일이 꼬여서 자기 맘대로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의 대안은 뭐냐 하면 ‘시키는 대로 살아라’입니다. 인생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정답은 ‘시키는 대로 살아라’입니다.
‘시키는 대로 살아라’가 무슨 뜻이냐 하면 ‘너는 네 인생의 주인공이 아니고 네가 감독자가 아니고 너는 나의 종이다’라는 겁니다. 제 29문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값 주고 사신 그 구속에 참여자가 됩니까?’ 대한 답변이 ‘그리스도께서 값 주고 사신 그 구속에 참여자가 되는 것은 그의 성령으로 우리에게 구속을 효력 있게 적용함으로 말미암아 됩니다’라고 합니다.
여기 ‘값 주고 샀다’는 이것은 더 이상 우리가 우리 주인노릇을 못한다는 뜻입니다. 주인노릇을 못하니까 그 다음부터는 종이 되는 겁니다. 신분상은 양자지만 기능상은 종의 기능을 해야 됩니다. ‘시키는 대로 해라’, 시키는 대로 살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그래서 참된 값을 주고 산 사람들이 제일 괴로운 것이 뭐냐 하면 주님이 시키는 대로 안하고 싶은 내 마음의 또 다른 생각, 이것 때문에 본인들이 상당히 고통스러워합니다.
예를 들어서 성경에 ‘범사에 감사하라. 항상 기뻐하라’를 분명히 시켰어요. 그런데 사람이 바보도 아니고 항상 기뻐할 수가 있습니까? 어쩔 때는 짜증을 내고 싶어요. 부부싸움이라는 것이 왜 일어나느냐 하면 자기성질을 자기성질로 가두어 놓는 것이 아니고, 내 성질을 상대방에게 토해놓는 데서부터 시작되거든요.
사람이 토하면 ‘왜 더러운 것 토해놓느냐’ 하잖아요. 마찬가지로 자기 속이 상한 것을 털어 놓으면 ‘네가 왜 나에게 시비를 거느냐’ 하고 나옵니다. 제가 드라마 보니까, 늘 본다는 것이 아니고 화장실 가는 도중에 슬쩍 보는 것인데, 그 드라마에서 아내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내 아들을 망쳐놓으면 내가 당신을 가만두지 않겠다.’
그런데 그 소리는 많이 들어 왔어요. 그런 소리를 듣는 남자는 무슨 느낌이 드느냐 하면 ‘과연 부부가 한 몸 맞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부부가 한 몸인데 아니면 남자가 자식을 키워주는 머슴인지 잘 분간이 안돼요. ‘내가 난 자식을 네가 건드리면 달려들어서 물겠다’는 말이거든요. ‘아하, 부부가 한 몸인줄 알았더니 한 몸이 아니었구나!’ 특히 운전을 미친듯이 하는 사람은 그런 소리를 더 많이 듣겠지요.
결국 ‘부부가 한 몸이다’라는 들은 풍월이 있어서 이론상 그렇게 시키는 대로 지켜봤겠지요. 그러나 평안할 때는 한 몸 비슷하게, 그냥 은근슬쩍 걸치고 살아가는 거예요. 어떤 계기가 닥치면, 자식이 잘못된다든지 할 때는 한 몸이고 뭐고 죽이겠다는 식으로 손보겠다는 식으로 덤벼들지요.
그래서 여기서 저한테 반대하는 사람들의 논쟁이 뭐냐 하면, ‘성경에 하라, 가 나오면 그냥 목사는 하세요, 라고 설교하면 그 뿐이지 괜히 나서서 시키는 대로 못한다는 토를 왜 다느냐’는 겁니다. 저에 대해서 불만이 그겁니다. 자기 딴에는 시키는 대로 했지요. 예를 들어 ‘항상 기뻐하라’를 시키는 대로 하겠지요. 이것이 어렵습니다. 잘 들어보세요.
구원이란 성령께서 하십니다. 그런데 저한테 반대하는 사람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성령은 없고 이제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 믿고 난 뒤에는 하나님께서 시키는데 하나님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할 수 있다고 보는 거예요. 예를 들면 ‘부부는 한 몸이다’ 라고 할 때 그것을 시키는 대로 하면 될 줄로 알았지요.
목사가 그렇게 말하니까요.
(목사) “예수 믿고 새 사람 된 사람은 하나님 말씀대로 제대로 지킬 수 있습니다. 어떤 집사님 부부는 한 몸으로 참 행복하게 잘 삽니다.”
(교인) “아, 그렇구나.”
(목사) “그러니까 여러분도 말씀을 외면하지 말고 성경에서 한 몸 되라고 하면 한 몸 되면 됩니다.”
(교인) “아, 그렇구나 열심히 살아야지.”
(목사) “만약에 열심히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하나님의 징계가 내립니다.”
(교인) “아, 그렇구나. 하나님의 징계를 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살아야지.”
이렇게 생각했었는데 그렇게 모범적이라고 생각했던 이 집사가 ‘당신 죽인다’고 나오니까 그 사람은 그 이전까지 목사의 그런 가르침으로 인해서 그동안 깜빡 자기 자신이 속아 온 거예요. ‘한 몸 되라’ 고 한 그것은 성령께서 하실 때만 되는 것이지 ‘한 몸 되라고 하니 한 몸 되는 것이 뭐가 어렵겠나. 한 몸 되었다. 한 몸 되었습니다’라는 식으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할 수 있을 것 같으면 구원론이 엉터리가 됩니다. 성령께서 하신다는 것이 말짱 거짓말이 되어 버려요. 이런 경우 굉장히 많습니다. ‘우리교회 김 집사님 같은 경우는 돈을 사랑하지 않았다. 성경에 있는 대로 돈을 사랑하지 말라고 했고 돈은 일만 악의 뿌리라고 했기에 그 집사님은 돈이 생기는 대로 다 교회에 헌금하면서 돈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살았는데 여러분은 집사아닙니까? 왜 그 사람처럼 안합니까? 그 사람 본받읍시다.’
이렇게 나온다고요. 그러니까 ‘아, 내가 그동안 믿음이 없었구나. 같은 인간인데 왜 저 사람은 믿음이 좋고 나는 믿음이 나쁘나? 나도 오기가 있지. 나도 믿음좋은 사람이 되련다. 그래 좋다. 나도 돈 사랑하지 않는 사람 되고, 헌금 많이 하는 인간 되어야지.’ 다들 그렇게 맘 먹은 대로 될 줄 알지요.
그런데 어떤 계기가 탁 터져버리지요. 교회 그런 일 참 많지 않습니까? 정수기 팔러 온 사람을 비롯해서 그런 사람 굉장히 많거든요. 경상도 사람이 서울 말씨 쓰면서 접근해서 돈 다 꿔서 도망가 버린다든지 그런 일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믿음이 천하에 좋고 새벽기도까지 나오면서 누가 보더라도 제대로 된 사람인데 그 사람 보증 섰다가 돈 다 날리는 일들,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성령께서 ‘시키는대로 하라’ 그 말은 우리는 하는데 성령께서 반드시 회개시켜서 성령의 열매로서 우리는 한 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거예요. 이렇게 설명하니까 사람들이 날 보고 욕을 하는 거예요. ‘왜 하나님이 인간보고 하라고 주시는 명령을 이목사 당신은 왜 성령께서 하신다고 슬쩍 미루는 식으로 하는가? 그러니까 교인들이 성령께서 하신다는 핑계를 대고 아무것도 안하겠다고 나오잖아. 그러니까 그것은 잘못된 신앙이고 신학이다’ 라고 공경을 해 대는 겁니다.
칸트가 ‘도덕률’을 말했는데 그것은 ‘거듭난 인간, 하나님의 형상을 담은 인간이, 구원받고 있는 과정속의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절대적인 목적인 선, 혹은 의를 행할 수 있느냐’에 대한 연구입니다. 여기에 대한 칸트의 주장은 첫 번째로, ‘인간이 하나님의 선을 행하려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반드시 자유의지를 줘야 한다’고 말합니다. 두 번째는 ‘인간이 선과악을 분간할 수 있는 분별력을 줘서 자유의지를 가지고 해 낸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인간이 선이 무엇인지, 악이 무엇인지 압니까? 조선에서 태어나서 오늘날까지 살아온 어느 할머니의 자서전에 보니까 자기 나름대로 선도 알고 악도 안다고 했지만 제가 보기에 전부 다 엉터리입니다. 자기 딴에는 양심대로 평생 살아 왔는데 지금 보면 다 엉터리입니다.
그 할머니는 부자가 되는 것은 부처님의 은덕이고 하나님의 축복인줄 알았습니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부자란 가난한자의 노동력을 착취한 것입니다. 자기에게 돈이 들어오니까 그 돈이 누구의 노동에 의해서 생겨난 돈인가 하는 것은 생각도 안하고 무조건 그 할머니는 ‘내가 착하게 살고 시어미를 잘 모셨더니 부처님이 감동해서 이런 복을 주셨구나’라고 하더라는 말이죠.
그러다가 자식들 다 좋은 대학 가는데 그중에 한 자식이 남들 보기에 좀 못한 대학에 들어갔다고 하면 ‘아이고,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내 귀한 아들이 그 대학밖에 못 갔나?’ 하면서 전부 자기가 매긴 선악의 기준가지고 하는 다 그런 것들입니다. ‘나랏님은 욕하면 안 돼. 여자가 배우면 안 돼’ 이런 것들이 거기 나와요.
여자가 왜 배우면 안 되느냐 하면, 민비가 배워서 똑똑하더니 말로가 좋지 않다는 예를 들면서 여자는 배우면 안 된다고 하는 거예요. 게슈탈트 심리학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선과 악이라는 기준 설정이 그냥 자기 양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주위에서 배우고 들은 것, 가정에서 자라면서 배운 것들이 어울려서 나름대로 세워놓은 선악기준이기에 자유의지도 없을뿐더러 자유의지를 줘도 선악을 판별을 할 수 없습니다.
제가 봉화에 있는 학교에서 교사를 했습니다. 주로 탄광촌에 있는 애들이 많이 그 학교에 다녔어요. 그 애들이 담배를 많이 피웠어요. 제가 그 애들에게,
(선생님) “어이, 담배피우지 마라. 술 먹지 마라.”
(학생) “담배 피우는 것이 왜 나쁜데요? 우리 아버지도 어릴 때부터 담배 다 피웠는데요.”
(선생님) “진짜 뭐가 나쁜지 모르겠나?”(그리고는 패 버렸죠)
이슬람교는 합법적으로 네 명의 아내를 둘 수 있어요. 사우디든 이란이든 관계없어요. 네 명을 둔 남자가 다섯 명의 아내를 둔 남자에게 ‘나쁜 놈’ 합니다. 인간의 선악 판별이라는 전부 인간의 자기 합리화입니다. 진짜 의인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따라서 성령께서 예수님의 마음을 새로 집어넣어서, 전에는 몰랐는데 예수를 믿고 나니까 세상에, ‘경대 나왔다. 영대 나왔다’고 편견을 갖는 것 자체가 ‘내가 아주 나쁜 인간이구나’라는 것을 깨달아야 될 판입니다. 그러니까 마지막 심판 때에는 용서받은 자가 구원받는 겁니다. 인간이 내세우는 선함, 이것 평생을 가면서 우리는 교정 받아야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