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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080902b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삶자유게시판[신학]

20080902b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삶

이름 : 한윤범(IP:59.6.189.226)

20080902b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삶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을 하겠습니다.

래드가 이 대목에서 중요한 이 단락에서 중요한 것을 이야기했어요. 그게 뭐냐 하면,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삶] 제목 제일 마지막 대목에 보면, 대목 한번 봅시다. 제가 적어볼게요. 래드가 알고 이야기했는지 모르고 이야기했는지 얼마나 중요한 이야기인지. [바울은 죄가 죽었다 말하지 않고 믿는 자들이 죄에 대해서 죽었다고 말하고 있다.]

적어볼게요. ‘죄가 죽었다’고 이야기하지 않고,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이야기한다. 끝에서 한 30줄 더 위에 올라가면, 제일 마지막에서 밑에서 30내지 40 보면, 거기 에베소서 4장 22절 나오거든요. 4장 22절 밑에서 네 번째 줄에 보면, [바울은 죄가 죽었다고 말하지 않고 있으며 믿는 자들이 죄에 대해서 죽었다]고 하는 거예요.

왜 이 이야기가 중요하냐 하면, 이게 뭐냐 하면, 예수 믿는 사람은 성도는 더 이상 죄 짓지 않는다 하는 건데 그러니까 성도는 죄한테는 무조건 이긴다. 왜? 성도 앞에서는 죄가 죽어 있으니까. ‘형님, 잘못됐습니다. 다시는 죄 지라고 이야기 안 할게요.’ 죄가 살살 빈다는 거예요. 왜? 성도는 죄에 대해서 죽었기 때문에 이 말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성도는 모든 죄를 이겼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하는 거예요. 성도는 절대로 죄 짓는 법이 없다는 거예요.

죄에 대해서 죽었다는 말은 그들은 뭐라고 표현하느냐 하면, 보통 K1 하는데 보면, 한 대 때려서 뻗었잖아요. ‘이게 어디 쪽도 못 쓰는 게. 너 이제 죽었어.’ 이러잖아요. 그때 의미는 뭡니까? ‘너는 아무리해도 나한테는 안 돼’라는 그런 뜻이거든요. 사도바울이 죄에 대해서 죽었다는 말은 그렇게 이해하는 거예요. ‘이제 죄는 나한테는 쨉도 안 돼.’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내가 순종하기만 하면 죄는 안 달라붙고, ‘아이고, 형님 알아 모시겠습니다. 이제는 착한 일만 하이소’라고 죄가 슬슬 물러가준다 이래 보는 거예요. 그런데 래드는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반대로 이야기해요. 뭐냐? 성도는 죄에 대해서 죽었다는 거예요. 뭐냐 하면, 성도는 죄에 대해서 죽었다는 말은 성도가 죄 앞에서 어디 죄가 까불어. 라고 사는 행세를 할 수 없는 입장에 있다는 겁니다.

어느 게 맞는지 상당히. 둘 다 반대로 이야기하는데 둘 다 틀릴 수 있겠지요. 다시 말해서 뭐냐 하면, 죄가 나타나면 ‘엄매 기죽어.’ 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에요. 왜? 성도는 죄에 대해서 죽은 자기 때문에. 죄가 이야기하기를 ‘어이, 성도.’ 죄가 골목 강패고, 나는 새로 전학해온 초자. ‘어이, 새로 전학해온 놈 이리 나와. 너 성도야?’ ‘성도야.’ ‘나 죄야. 돈 내놔.’ ‘돈 여기 있습니다.’ 다 갔다 내. ‘너 왜 강패한테 돈 주노?’ ‘나 죽었거든.’ 죄에 대해서 죽은 자기 때문에 죄를 이길 수 없다 이 말이죠. 죽은 자거든요. ‘그러니까 있는 대로 다 갖다 줘야지. 어떻게 해.’ 둘 중에 어느 게 맞느냐 이 말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래드가 앞에 대목 뒤에 성경구절 쭉 보게 되면, 그 앞에 보면 이게 참 어려운데요. 에베소서 4장 22절 찾았습니까? 그 대목부터 읽어볼게요. 제일 끝에서 한 40째 줄 위에 돼요. [옛 사람은 회개하지 않는 죄 많은 존재를 가리킨다. 주목해야 될 중요한 것은 서술과 명령 안에 긴장이다.] 이 말은 더 어려워요.

여기 세 가지 다 나와요. ‘서술’, ‘명령’ 그 다음에 나오는 용어가 뭡니까? ‘긴장’ 그 중에 제일 어려운 게 긴장이란 용어에요. 무슨 말인지 몰라요. 긴장이 뭐냐? 당기고 미는 거잖아요. 서술과 명령과 그 다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긴장이라 했잖아요. 긴장이 뭔 뜻입니까? 긴장은 줄다리기 아닙니까? 한 쪽은 이리 밀렸다고 한 쪽은 뭡니까? 저리 밀렸다가. 누가 왔다갔다 당깁니까? 서술이 당겼다가 한 쪽은 뭐가 당깁니까? 명령이 당겼다가.

다른 말로 하면 로이드 존스 주장에 의하면 서술은 뭡니까? ‘이미 너는 구원받았다.’ 명령은 뭐냐 하면, ‘구원받도록 바르게 살아라.’ 이거 아닙니까. ‘넌 이미 구원받았다. 아직 구원 덜 받았어’라는 이 명령, 이 사이에 한 쪽은 이리 갔다가 한 쪽은 이리 갔다가, 이게 바로 서술과 명령 사이에 긴장이라 하잖아요.

사도 바울이 그렇게 표현했다는 겁니다. 로이드 존스도 그래 이야기했고. 래드도 그리 이야기한다는 거예요. 도대체 이 말이 무슨 말인지 그러니까 이미 구원됐다 하는 갑자기 바깥에 눈이 와 있는 ‘아’라는 이건 없어져버렸지요. 지금 어디에 초점이 맞춰있습니까? ‘나’라는 인간이 어떻게 하면 구원받을까 여기에 와 있지요.

지금 긴장 속에 있잖아요. 긴장 속에 있다는 것은 긴장이 풀려버리면 완전히 구원받은 거죠. 근데 래드는 뭡니까? 긴장 속에 있다 했지요. 지금 현재 총신이고 장신이고 모든 신학생 주장이 이거 아닙니까? 긴장 아닙니까. ‘이미, 아직’ 긴장이잖아요. 긴장이 왔다는 말은 아직까지 구원이 완전 방면은 없다 아닙니까.

그렇다면 여기 두 가지지요. 긴장에서 긴장이 풀리는 시간, 긴장에서 긴장이 없어지는 완벽한 구원이 되려면 1번, 행함입니까? 2번, 행함이 아닙니까? 어느 쪽입니까? 행함이냐, 행함이 아니냐? 어느 쪽이냐 말이죠.

그들은 지금 긴장이란 말을 했기 때문에 그 다음에 독자들에게 또는 신학생들에게 또는 교인들에게 뭘 이야기해야 되느냐 하면, 그러면 목사님, 긴장이라면, 왔다갔다 줄다리기 한다면, 난 신학교 때 신성종 교수가 이 긴장이란 말해서 긴장이란 말이 무엇인지 몰라서 수십 년 동안 고생했어요.

긴장이란 말만 하면 안 되거든요. 긴장이 풀리는 방법을 이야기해야 될 것 아닙니까? 목사가 됐으면, 신학자가 됐으면. 푸는 방법에 사람들에게 뭘 이야기해? 행함을 이야기할 거요, 아니면 행함을 이야기 안 할 거요? 이 문제 나온다 말이죠.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부다가 긴장을 이야기한 사람치고 그 다음에 반드시 ‘행함’을 이야기하게 돼있어요. 그러니까 그 다음부터는 뭐뭐 열심히 하란 말이죠. 그럼 열심히 하면 그 행함은 어디 속합니까? 서술과 명령 가운데 어디 속하지요? ‘행하라’ 했으니까 이게 어디 속합니까? 명령이죠.

그러면 서술과 명령 가운데 긴장이 있는 가운데 다시 기준이 어디로 갑니까? 서술로 가는 게 아니고 어디로 갑니까? 다시 긴장에서 명령으로. 결국 남는 건 뭐예요? 명령밖에 없죠. 박영선 목사 설교 이거잖아요. 명령밖에 없다는 것은 바로 바리새인의 행함, 명령밖에 없죠. 결국은 행함밖에 없지요. 기껏 서술을 이야기했지만 서술이라 하는 것은 중간에 끼어들어가다 빠져버리고 결국 남는 것은 행함밖에 없다. 인간의 행함밖에 없다 이 말이죠. 옛 사람을 벗어버려라. ‘벗어버려라’ 명령이잖아요. 행함밖에 없다 이 말입니다.

그 다음에 이 긴장을 푸는데 긴장이 만약에 긴장이 있다면 푸는데 행함이 없는, 행함이 아닌 방식으로 긴장을 푸는 방식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이게 모순돼요. 행하지 않고, 지금 순종과 행위를 주장하는 사람이 뭐라 합니까? 앞에 무슨 말 있어요? ‘가만있으면 안 되고’ ‘너희들이 가만있으면 안 되고 반드시 행해야 된다.’ 이거 아닙니까?

그러면 ‘가만있으면’ 어디에 해당됩니까? 가만있는 것은 서술에 해당된다는 거예요. ‘너는 이렇게 구원받았단다. 가만있으면 안 되고 행해야 된다.’ 이래 이야기한다고. 결국 긴장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가만있으면 안 돼’라는 말은 서술을 꺾어버리고 제거하고, 서술은 이제 생각하지 말고, 명령만 순종하란 이것만 해야 되지 만약에 그냥 서서 앉아 있으면 이것은 구원이 안 돼버려요.

그러면 애초부터 서술이 빠져버리면 뭐가 빠지는 겁니까? 긴장 자체가 처음부터 없어지지요. 그렇다면 이 문장은 서술과 명령의 긴장이 아니고, 결국 뭐냐 하면, 구원이 안 된 상태에서 구원이 되려고 애쓰는 사이의 뭡니까? 긴장인데 이건 오직 인간의 행함과 명령밖에 통하지 않는다 이 말입니다. 십자가가 뭔 필요 있습니까? 십자가 아무 필요 없잖아요.

성경적으로 보면 복음적으로 보면, 아까 이야기한 이러한 사고방식이 무슨 상태냐 하면, 이건 바로 죽은 상태다 말이죠. 하나님의 언약이 끼어들지 아니하면, 인간은 지가 착하게 애써도 그건 죽은 상태에요. 구약에서 산다는 것은, 제가 어느 설교에 그랬죠. 사람 사이에 제발 하나님의 복음을 집어넣으라고. 누구 만날 때 복음을 집어넣고 이야기하라고. 그냥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나지 말고.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나서 자아이야기, 자꾸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영광을 가리잖아요.

하나님의 복음이 들어와 버리면 살라고, 구원받으려고, 바리새인처럼 열심히 하려 하는 이것 자체가 언약 안에 뭐가 들어있어요? 들어있는 것 아무 거나 해보세요. 언약 안에 생명이 들어있다. 언약 안에 거룩이 들어있다. 언약 안에 의가 들어있다. 이 세 가지만 합시다. 대표적인 거니까. 그렇지요.

생명과 거룩과 의는 없지요? 일단 없지요. 성령이 오기 전에는 없잖아요. 생명나무를 우린 맛도 못 봤잖아요.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는. 예수님 자신이 생명나무 아닙니까? 나는 생명나무라. 생명이 없지요. 거룩도 물론 없지요. 내가 어느 설교할 때 그런 기억나는데, 세상에 인간들끼리 거룩을 논한다고 누가 잘났냐고. 네가 모세처럼 돼봤나? 모세는 사십일 동안 밥도 안 먹고, 물도 안 마셨단 말이죠. 거룩 되려면 그 정도 거룩 돼야지.

사람이 밥 먹고 사는데 거룩한 놈 누가 있습니까? 돈 버는데 무슨 거룩이 있어요. 돈 벌면 사람이 졸지에 뭐 되느냐? 치졸하게 치사하게 되고. 지가 안 되려고 해도 돈 버는 사람 있지만. 치사하고 더럽고 그리고 온 몸에 땀 냄새가 돌고 그리고 피곤에 대한 반발로 하나님께 원망하고. ‘주여, 꼭 내가 이래 살아야 되겠습니까?’ ‘진짜 내가 이 짓해야 되겠습니까?’ 우리 목사님들 많이 느끼지요. ‘꼭 내가 이 짓해야 되겠습니까?’ ‘더러운 짓을 내가 동참을 해야 돈이 나옵니까?’

세상에 모세처럼 물도 안 마시고 밥도 안 먹어도 사십일 동안 얼굴에 건강한 정도가 아니고 빛이 날 정도 같으면 거룩하지 말래도 그게 거룩하잖아요. 이게 뭡니까? ‘아’ 눈 덮인 것 여기에 명령이고 서술이 어디 있습니까? 그냥 아, 뭔 뜻입니까? 문 여니까 폭설 내렸잖아요. 내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고 나를 지배하고 있는 환경 자체가, 아! 거룩하고 생명스럽고 하나님의 의가 거룩하고. 모세가 사십일 동안을.

지금 하나님이 주시려고 하는 거룩이 어느 상태냐 하면, 그 상태라고. 예수님의 십자가 성령이 오게 되면, 지금 우리는 만날 돈, 돈 하지만 사실은 우리를 걸치고 있는 그것이 모세가 경험했던 그 세계보다 더 완벽한 생명과 거룩과 의가 지금 지배하고 있다고. 우리가 삶에 바빠 그걸 모독하고 있고, 무시하고 있기 때문에 맛을 못 느끼고 있는 거예요.

십자가 진 강도나 개 같은 여자, 그 여자 같으면 알지요. 개입니다. 개 맞습니다. 사는 게 평생 죄 짓는 것밖에 더 있습니까? 저요, 십이 년 동안 피 흘려도 마땅합니다, 이거. 십오 년 동안 흘려도 괜찮아. 그 사람이 십이 년 동안 피 흘렸다고 주님께 원망합니까? ‘주여, 어찌하여 나에게 이런 형벌을. 전생에 무슨 업보가 있어서.’ 이렇게 했습니까? 뭐라고 합니까? ‘맞습니다. 저, 개 맞습니다.’

뭘 봤기에, 뭘 느꼈기에 자기 자신에 대해서 원망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창녀, 창녀인지 아닌지 논쟁이 있습니다만, 어쨌든 간에 막달라 마리아, 행세 나쁘다고 소문난 여자, 울면서 주님 앞에 그 비싼 자기 시집가려고 한 향수를 탁 한꺼번에 깨버렸잖아요. 주님의 장사를 보여주기 위해서 증거하기 위해서.

도대체 뭘 했기에 그 비싼 것 깹니까? 요새 교인들 돈 만원 하는 것도. 참, 목사로서 진짜 어디 직장만 다닌다고 이래 살아야 되는 줄 아십니까? 목사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돈 만원 헌금하면서 생색 다 내고. ‘더러워 이 돈 없으면 내 자식 못 먹고 사나’ 생각 들고. 그 비싼 향수를 최소한 얼마였다고? 그 전 재산을 예수님 발 앞에 울면서 할 때 도대체 뭘 봤느냐 말이에요. 뭘 봤기에 무슨 폭설을 봤기에 어떻게 그런 행동이 나오느냐 말이죠.

지금 생명과 거룩, 의는 우리한테는 없어요. 발광을 해봐도 없어요. 없는데 언약이 들어오게 되면 이 전체가 뭐냐? ‘없다’가 돼요. 언약에 들어왔을 때만 없다가 돼요. 개 같은 수로보니게 여인이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네가 날 믿는구나.’ 믿음으로 구원받는. 어떤 행함도 여기 있을 수가 없어요. 그걸 또 사람들은 여자가 겸손했잖아. 또 겸손을 끄집어내고, 다가갔잖아. 만졌잖아. 뭐 자꾸 하는데 바로 이 왜 없느냐를 알아야 돼요.

왜 없느냐 하면, 바로 구원이 아닌 상태에서 구원되려고 하는 이 긴장은 이거는 인간이 기어 나와야 돼요. 지금 래드는 모르는데. 이게 바로 뭐냐? 네가 어디에 속하지 않고? 육신에 속하지 않는다 했거든요. 성도는 육신에 속하지 않습니다. 어디에 속하느냐? 영에 속하거든요. 그러면 영에 속한다 하면 영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뭘 이야기해야 돼요? 육신이 뭔지 알아야 될 것 아닙니까? 이게 바로 육신에 속하는 거예요.

육신에 속하지 아니하고 너는 이미 영에 속했기 때문에 그때부터 육신이 뭔가를 이제는 아는 것이 아까 이야기한 성경에서 말하는 주의 명령으로써 아는 거예요. ‘이게 육신이다. 이게 육신이야. 육신을 벗어버려라.’ 사람들은 ‘육신을 벗어버리라’ 하니까 육신을 안 벗어버리면 구원 안 되는 줄 알고 있다고. 새삼스럽게 육신을 벗으려면 그건 구원 안 된 사람입니다. ‘육신이 뭔지 알라’는 뜻이에요. 육신이 뭔지 알아야 ‘아, 이런 게 벗겨질 것이구나’ 아는 거예요.

여러분, 병아리가 껍질을 깨야 닭 됩니까? 아니지요. 병아리가 병아리 되기만 하면 뭐가 깨집니까? 껍질은 깨지게 돼 있잖아요. 헤르만 헤세가, 이 미친 인간이 중 비슷한 놈인데 헤르만 헤세가 뭐냐 하면, 그 [데미안]이란 책에서 뭘 해야 되느냐 하면, 청소년이 자기가 자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자기가 뭘 깨는 거예요. 나의 육적인 굴레를 깨야 된다고. 쉽게 말해서 도 닦는 거예요.

젊은 아들 우리 클 때 [데미안] 한두 번 다 읽어봤어요. 맞아. 계란을 껍질을 깨야 돼. 계란 깨는 거나 불교나 오늘날 기독교 성화론이라 다른 점이 뭡니까? 내가 계란 껍질을 깰 필요가 없어요. 다만 뭘 알아야 돼요? 이게 계란 껍질인 걸 알아야 돼요. 야, 참 중요한 거예요. 그게 바로 계란 껍질이 있다 여기는 육신이에요. 껍질 깨서 구원된다는 사고방식 자체가 육신이라니까.

다시 이야기할게요. 참 너무 어렵다. 지금 우리가, 하나님이 입혀주지 않은 다른 껍질을 내가 만들었어요. 자아를 내가 만들었어요. 그게 육신이 만든 거예요. 주님께서는 아까 이야기한대로 제가 설교합니다. 이근호라 하는 게 없어요. 주님한테는 아예 없다고. 주님께서 그냥 들어 썼고, 필요 없으면 버리면 그만이어요. 진짜 개 같은 인간이에요. 그런데 꼭 나는 내가 설교했고, 이근호가 설교했고. 꼭 나를 집어넣어야 이게 내가 된다고. 이게 육신이라고.

그러나 살아있다는 것은 바로 이런 육신 덩어리 같은 나를 주께서 나를 사용할 때 이게 살아있는 거예요. ‘관계’가 살아있는 겁니다. 언약, 관계. 모세는 단독적으로 살았습니까, 죽었습니까? 죽은 겁니다. 모세가 모세 언약을 받을 살았습니까, 죽었습니까? 살은 거예요. 모세는 모세 언약대로 지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돼요, 안 돼요? 안 돼요. 그래서 모세가 지옥 갔습니까? 변화산에 엘리야와 함께 모세와 함께 예수님 이야기했잖아요. 모세가 지옥 안 갔잖아요.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갔는데? 그 사람은? 못 들어갔잖아요.

아까 에베소서 3장 5절 말씀처럼 사도와 선지자에게는 장차올 미래가, 성령의 시대가 모양으로 맛보기 식으로 집어넣으면 모세는 다른 사람과 똑같아요. 자기라는 게 있지만 무언가 갑자기 들어오게 되면 이게 지 마음대로 되질 않아요. 내 마음대로 되는 정도가 아니고 다른 생명과 거룩과 의가 이걸 증거하는 사람으로서 똑같은 육신 속에 침투돼있지요.

이제부터 어렵게 하겠습니다. 지금 래드가 완전히 오해하고 있습니다. 래드가 이 구조, 자기도 헷갈리는 기라. 로마서 8장 3절 봅시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여기 보면 할 수 없는 자가 누굽니까? 인간이죠. ‘너’지요. 참, 이 말이 어려운데 하여튼 참고 해봅시다.

지금 ‘너’라고 지적했으니까 주님께서 나보고 어이, 이근호. ‘너’라고 했으니까 이근호 내가 나라고 하는 것은 정당합니까, 정당하지 않습니까? ‘주님이 나보고 ‘너’라고 했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나’라고 하는 게 정당합니다’라고 지적할 수 있느냐, 없느냐 이 말입니다. 어느 게 옳아요? 있어요, 없어요? 없다 이 말입니다. 사람들이 그걸 모르는 거예요. 신학자들이 그걸 몰라요.

주님께서 ‘너’라고 했으니까 그래 ‘나’란 존재를 인정했잖아. 아니에요. 우리가 ‘너’라고 했을 경우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일시적으로 ‘너’라고 했을 뿐이에요. 너는 육신이고, 너 때문에 예수님이 너와 같이 뭐 됐다? 육신으로 몸으로 죽어야 되는 그걸 이야기하기 위한 너다 말이에요.

우리는 주님이 나보고 너라고 했데. 그래 나는 나보고 나라고 하는 게 정당하데. 따라서 난 챙길 거야. 아니에요. 주님께서 나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너’라고 한 게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가 뭐 때문에 죽었는가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나라고 쓰여질 때 그게 바로 나란 말이죠. 그러니까 ‘나’라고 할 때는 ‘아이고, 나는 걸렸구나’ 이래 해야 돼요. ‘이젠 더 이상 나는 ‘나’라고 주장할 수 없는 처지에 있구나’를 새삼 알면 돼요.

그 다음에 그건 어렵지 않아요. 더 어려운 게 뭐냐 하면, 이겁니다.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그 다음에 뭡니까?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참, 어렵다.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이것 때문에 12세기부터 14세기까지 중세에 신학적 논쟁이 크게 일어났습니다. ‘죄 있는 육신의 모양’ 이것 때문에 예수님, 마리아의 문제, 예수님 엄마 문제, 천주교의 기본적인 그 자체가 부정하느냐, 안 그러면 긍정되느냐? 큰 문제였어요.

예수님 육신의 모양, 과연 예수님이 죄가 있는가, 없는가? 더 나아가서 예수님 몸이 아담에 속한 것이냐, 아담에 속하지 않는 몸이냐? 예수님이 죄 있는 모양이라 할 때 이 죄는 예수님이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십자가 죽을 때까지 살아왔던 모든 죄가 있는 것이냐? 아니면 죄가 없는데 처음부터 죄가 있었기 때문에 죄 있는 것이 되느냐? 아니면 처음부터 죄 없는 몸인데 십자가 달릴 때만 돌아갈 때만 잠시 죄 있는 모양으로 죽는 그 몸이냐? 여러 가지 논쟁들이 벌어지는데 그 논쟁들의 배경에는 바로 인간들의 교회권력과 정치 이런 게 엮여져 있어요.

여기 해답은 이겁니다. ‘죄 있는 육신으로’ 그 다음에 뭡니까? “정하사” 정한 게 뭡니까? 지정한 거죠. 그 지정을 주님이 지정한 것을 우리가 그 과정을 내용을 파악할 수 있느냐? 안 됩니다. 주님께서, 이거 물 아닙니까? 물을 예수님께서 피라고 하면, 우리는 여기서 피라고 아는 정도가 아니고 뭐까지 알아야 하느냐 하면, 이걸 물이라고 여겼던 이것이 바로 죄라고 인정해야 돼요. 그게 어렵다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달리신 몸이 육신의 몸이 돼버리면, 이건 마리아가 아니라 이근호, 누가 와도 우린 육신이란 죄인이 돼버려요. 내가 죄인인 것을 알기 위해서 내 죄 진 것을 펼치면 안 돼요. 그것은 자기가 중립적인 위치에서 죄가 뭐냐를 탐색하는 건데 그래 봤자 탐색하는 과정만큼은 이게 의가 된다고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주여, 제가 죄인 맞습니다. 제가 회개합니다’라고 할 때 회개하는 그 자체는 졸지에 뭐로 빠져버려요? 죄가 안 돼버리고, 회개하고 반성하는 것은 어디 포함되느냐 하면, 의에 포함된다고. 다윗이 주께서 원하는 것은 상한 심령이라 하니까 설교초점이 ‘다윗은 위대했다’ 이래 돼버려요. 왜 다윗이 위대합니까?

자기는 상한 심령이라 하니까 주님을 바라볼 생각 안 하고 다윗은 정말 위대합니다. 갑자기 상한 심령을 외친 다윗이 위대해져버렸어요. 다윗이 상한 심령이 된 것은 자기가 죄를 반성해서 그런 게 아니고, 다윗은 선지가기 때문에 뭐가 왔습니까? 십자가. 십자가 앞에서 죽었던 달렸던 그 몸뚱이는 무슨 몸뚱이냐 하면, 육신이에요. 육신이 뭡니까? ‘육신=죄’ 아닙니까?

여기에 래드는 말하기를 육신은 뭘 말하느냐 하면, 회개하지 않는 걸 육신이라 하지요. 아니에요. 회개하면 죄가 아닌 게 돼버려요. 회개해서 구원받으라 하니까 성령 받으라 하니까 회개한 것은 죄가 아닌 줄 알고 있어요. ‘회개하라’ 이 말은 육신의 범주에서 어떤 해결책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걸 말합니다. 그게 로마서 7장에 나와요. 8장 들어가기 전에 7장에 나오는 겁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 곤고한 사람이라고 외쳤기 때문에 구원받는 건 아닙니다. 곤고한 사람이기 때문에 자기는 이미 훌륭한 사람 되는 게 아니에요.

사도 바울이 제시하는 구원됐다는 것은 뭐냐 하면, 내가 어떻게 행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떻게 했느냐가 그게 근거가 돼요. 하나님께서 나 같은 죄 있는 육신을 내 대신 예수님,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몸으로 이미 정해버렸단 말이죠. 정해버렸으면 하나님의 의는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정하사’에서 뭐가 떨어집니까? ‘정하사’에서 뭐가 흘러나오는가? 하나님의 의가 나오고, 생명이 나오고, 거룩이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의 의와 거룩과 생명이 우리 육신 속에 흐를 때 우리 속에서 뭐가 발현돼야 됩니까? 정하사, 정하사, 정하사. 하나님이 정했다는 이 사실만 발현돼야 됩니다. ‘주께서 그렇게 정했데.’ 이것만 자꾸 튀어나와야 돼.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까?’ 이게 나오면 안 돼요. ‘주께서 정했단다.’ 이것만 자꾸 발현돼야 돼요.

네가 성령을 좇지 않고 육신대로, 로마서 8장 뒤에 나와요.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6)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5) “육신대로 .... 행세를 죽이면 살리니”(13) 이게 전부다 뭐냐 하면, 이미 영 쪽에 속한 사람은 주님께서 ‘정하사’가 십자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가 성령을 통해서 드디어 내 속까지 밀려들어오는 거예요.

피가 그물그물 확산된 겁니다. 이 삼다수가 피라면, 제가 피를 강단에 뿌려버리는 거예요. 피가 여기 머물지 않고 피가 그물그물 내려오지요. 내려와서 적셔서 이게 속도가 가해져서 여러분 몸속까지 들어가죠. 피가 점령하는 거예요. 어떤 공간을. 피가 점령할 때 그게 바로 영에 속한 사람이다 이 말입니다.

피가 점령하게 되면 우리는 피 속에서 헤엄치면서 손가락을 내밀면 피고, 발가락을 내밀어도 피 묻은 손이 나오지요. 뭔가 움직이면서도 나를 위한 움직임이 아니고 하나님이 정하사 십자가에서 정한 그 몸이 움직이게 되면 그것이 바로 영에 속한 사람들의 모습이고, 비록 그 사람은 죽어도 그 속에 성령이 있으면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이래 되는 겁니다. 피가 벌겋게 덮어버립니다.

그러면 그 예수님의 피 안에 뭐가 들어있다 했습니까? ‘정하사’죠. 그러면 봅시다. 이게 마지막 대목 어려우니까 잘 들어보세요. 십자가 봅시다. 로마서 8장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십자가를 뭐로 보느냐 하면, 이걸 풀이해 놨어요. 육신의 몸을 정한 것, 이게 십자가 아닙니까? ‘육신의 몸을 정하사’ 그러니까 이게 죄, 저주 아닙니까? 이 저주를 정하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가 되지요.

그러면 이 십자가 피가 우리 속에 그물그물 침략하게 되면 우리 속에서 뭐가 일어납니까? 육신의 몸을 저주스럽다고 정해버렸지요.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하는 이것이 뭐가 돼요? 이게 바로 의가 돼버린다 말이죠. 이게 바로 영에 속한 사람이다 말이죠. 영에 속한 사람은 ‘내가 뭘 해도 죄입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그 자체가 바로 주께서 우리한테 뭔가 덮어씌웠다는 증거가 된다 이 말이죠. 살았다는 증거가 돼요. 이게 하나님의 의가 되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그 점에서 바울은 말하기를 죄가 죽었다고 말하지 않고, 죄가 죽은 게 아니죠. 죄가 살아있죠. 죄가 죽었다고 하지 않아요. 죄가 살아있죠. 믿는 사람이 죄에 대해서 죽어버렸다. 죄가 없어진 게 아니고, 죄는 엄연히 살아있는데 믿는 사람은 그 죄 앞에서 뭐가 된다? 날마다 죽은 자가 되죠. 죄 값은 사망이니까.

죽은 자 돼있으니까 이게 뭐냐 하면, 죄가 더 이상 주장하지 못하죠. 그 말 맞잖아요. ‘주장하지 못한다’ 이 말은 다른데서 주관하죠. 우리가 죄가 주관하지 못해서 죽어있어야 되는데 하나님이 우리 보고 살았다고 한 것은, 살았다는 근거가 우리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고, 바깥에 있는 주님의 십자가의 의가 ‘너, 죽었지.’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너는 살았다고 또 정해버린다. 확정해버렸다 말이죠.

주께서 십자가에서 예수님 육신의 몸을 정한 것처럼 이제는 예수 믿는 우리를 주께서 정해버린 거예요. 따라서 우리는 의인이 되어서 영원히 산 사람이 되는 겁니다. 여기에 무슨 긴장이 있습니까? 여기 무슨 미완료가 있어요. 사도 바울이 미완료라 하는 것은 뭐냐? 자꾸 이걸 쳐다보니까 미완료가 여기서 발생될 수밖에 없다 말이죠. 너희가 구원을 다 이뤘다 함이 아니고, 이 말은 뭐냐 하면, 자꾸 이걸 쳐다보니까 여기서 미완료가 나온다 말이죠.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미완료가 있더라도 그건 어디까지나 내 육신이 발생된 미완료, 내가 구원이란 것을 쳐다보지 않을 때 발생되는 미완료기 때문에 그런 미완료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도리어 뭡니까?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완료된 것을 또 찬미할 수 있는 계기가 되죠. ‘아, 이러니까 참, 주님 고맙습니다’라는 감사가 나올 수 있는 그런 미완료죠.

아이고, 초조, 불안 이런 미완료가 아니라 느긋한. ‘감사합니다. 육신 쳐다보니까 아직 난 멀었어요.’ 나 다 이루었다함도 아니고, 거뜬하게 십자가 지고, 거뜬하게 부활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 부활에 참여하고 있으니까 지금의 미완료가 부활을 위한 미완료가 되는 거예요. 나의 육신의 성깔을 아니까. 육신이라 하는 것은 미완료밖에 모르니까.

여기 페이지 수가 좀 다른데, [주는 영이시다]라는 대목을 찾아보세요. 제목이 뭐라고 돼있지요? 그냥 [영 안에] 그래 돼있습니까? 그 다음에 [그리스도의 내주하심]. [주는 영이시다 ] 그 대목에서 약 40 줄 내려가면, 로마서 1장 4절 찾았습니까? 여기에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으로 나셨고 순결의 영으로써는 죽은 자 가운데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셨다”라는 이 대목을 래드가 주목을 했는데 왜 그랬느냐 하면, ‘주는 영이시다’ 이걸 설명하기 위해서 한 거예요.

‘주는 영이시다’라는 말은 참 곤란하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성령이 또 있잖아요. 성령이 있고 예수님이 영 돼버리면 예수님 빠지고 ‘주는 영이시다’ 하니까 ‘영은 곧 예수님이시다’ 이렇게 될 공산이 있죠. 여기서 래드가 깊이 있게 본 게 뭐냐 하면, ‘주는 영이시다’라는 말하고 우리가 구원받는 것 하고 무슨 관계가 있느냐 지금 그 관계를 따지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성령을 거론한 겁니다.

여기서 성령을 거론한 이유가 어디 나오느냐 하면, 래드가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주님이 영이 아니면 우리가 왜 구원 못 받습니까? 여기에 대해서 [주는 영이시다] 아까 봤던 로마서 1장 4절, 그 다음 페이지에 보면, 이 사람이 제대로 이야기했어요. 고린도후서 3장 17절 찾았습니까? 그 위에서 일곱 번째 줄에 이래 돼있어요. 지금 래드가 옳은 소리해요. 자기도 옳은 소리 해놓고 지금 헷갈리고 있는 거예요.

[영이 되었으면 그의 새로운 존재방식에 의해서 육신으론 불가능했던 것 인간에게 생명을 줄 수 있는 영이 되었다.] 이 말 아닙니까? 지금 이 말은 뭐냐? “육은 무익하니라” 요한복음 어디에 나옵니까?(요6:63) 지금 래드가 옳은 소리 해놨다니까. 왜 지금 예수님이 영이 되어야 하느냐 하면, ‘육은 무익하다’는 말을, 본격적으로 말은 안 했지만 그런 뜻으로 했어요. 그 이유가 그 이유를 알아야 돼요.

래드는 예수님이 영이 되어야 될 이유가 뭐냐 하면, 우리의 육신은 ‘당신 죄인입니다. 회개하라’ 이래서도 안 된다는 거예요. 뭐가 와야 돼요? 예수님이 영이 되셔서 우리 속에 쏙 들어와야 된다는 겁니다. 이 관점 맞아요. 들어오게 되면 그래서 예수님의 존재방식이 이제는 뭐냐? 우리 안에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글에 보면, 하나의 비유를 들었지요. 자기 비유가 아니지만 어떤 학자의비유가 뭐냐 하면, 예수님의 영은 마치 뭐와 같으냐 하면, 공기와 같아서 내 바깥에도 공기가 있듯이 내 안에 공기가 있으니까 사도 바울의 편지에 보면, 어떤 때는 우리가 예수 안에 있다고 이야기하고, 또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이 우리 안에 있다고 이야기하자 이 말이에요.

근데 이것은 기존의 존재방식으로 공간, 그렇게 이해하면 안 된다. 그렇게 되면 뭐냐? 신비주의 되고, 그노시스 되고 안 되고. 오늘 목 다 쉰다. 한번 보세요. 안과 밖을 기존의 공간방식으로 해버리면 예수님 안에 우리 들어있고, 예수님 바깥에 우리, 이 말 자체가 성립이 안 돼요. 안에 있다는 말은 우리보다 작아야 되고, 밖에 있으면 우리보다 커야 되는데, 어떻게 큰 것이 안에 있습니까?

그러니까 공간적으로 존재하는 방식으로 하면 안 되고, 주님의 존재방식은 이런 식이 아니라 하나의 기능과 활동으로 가능한데 기능과 활동이 되려면 예수님이 계신 하늘나라, 존재방식으론 안 되고, 이게 무슨 방식으로? 성령 방식으로. 영의 방식이 돼야 어떤 위치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도 될 수 있는 방식이 된다. 지금 이것까지는 이야기했다고, 래드가.

여기서 더 한 걸음 나가면, 예수님 계신 곳에 ‘내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너희와 함께 있다’ 할 때에 모토는 성령에 의해서 함께 있으면 우리가 교도소에 있거나 어디 있건 항상 주와 함께 있는 건 맞습니다. 맞는데 래드가 그 다음부터 이야기를 안 하고 있어요. 자기는 옳다고 생각하는데 이야기 안 한 게 뭐냐 하면, 주와 함께 있다는 그 증거가 뭐냐? 이야기를 안 하고 있다고.

제가 이야기할게요. 영이 함께 있으면 아까 자기 예수님의 존재방식이잖아요.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로 있잖아요. 십자가로 계신다고요. 그러면 예수님이 계시다. 다른 말로 하면 영이 함께 계시면, 반드시 뭐가 나와야 되느냐? 육은 뭐하다? 무익하다가 나와 줘야 됩니다.

실제로 사도 바울에 보면 육신은 무익하나 자꾸 하는 게 뭐냐 하면, 지금 네가 영 안에 있으니까 육에 대해서 기대하지 마라. 백날 해도 소용없다. 왜? 주와 함께 있을 때는 영적인 기능으로 한다. ‘육은 무익하다’ 이게 나와 줘야 돼요.

그런데 육은 무익하다가 나와 줘버리면 뭐가 성립 안 되느냐 하면, 명령 있잖아요. 사도 바울의 명령, 그 명령에 대해서 이런 오해를 할 수 있어요. 뭐, 육은 무익한데 안 지켜도 된다. 그런 말을 할까 싶어서 사도 바울이 말을 못하는 거예요. 육은 무익하다. 안 하면 되겠네요, 래드님. 이런 소리 나올까봐 겁이 나서 ‘육이 무익하다’를 말을 못한다 이 말이죠.

이것하고 마치겠습니다. ‘육은 무익하다’는 말은 어떤 때 하느냐 하면, 인간이 감출 수 없는 육신이 터져 나오면서 하는 거예요. 터져 나오려면 이건 뭐냐? 말씀이 들어가게 됩니다. 술 취하지 말고 성령에 취하라. 성령에 취하라면 성령에 비틀거리잖아요. 술 취하는 것은, 술 먹으면 된다 말이죠. 성령에 취하라는 것은 비틀거리게 돼요. 사람들은 성령에 취할 수 없어요. 취하면 잘 잊어버리니까. 이 말씀을 통해서 ‘나는 안 하면 되겠네’ 하지만 안 할 수 없이 계속해서 육이 나와요.

그래서 말씀이 우리의 살과 뼛조각을 쪼개고 하듯이 날카로운 그 말씀이 성령께서 예수님의 영이잖아요. 예수님 영께서 뭘 사용한다? 말씀을 사용해서 우리로 하여금 내부를 쪼개면 우리가 뭐 텅 하니 있더라도 우리 속에서 뭐가 나오느냐? 육신이 나오게 돼있어요. 나오면 나올수록 우리는 ‘이래서 육신은 무익하구나. 이래서 육신은 무익하구나. 이래서 설교한다고 구원받는 건 아니구나’ 늘 이렇게 말씀 봐야 이게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그럴 때 더욱더 주께 감사하고 ‘아, 주께서 십자가 지신 것만 아니고, 그 십자가의 영이 지신 분이 영으로서 지금도 우리 외부에서 장악하기 때문에 내가 무익하다. 나는 육신에 속했구나. 육신에 속한 인간을 십자가에서 정하듯이 나를 의롭다 정했기 때문에 구원받았구나’ 이게 늘 나온단 말이죠.

나오게 되면 그 다음부터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환란을 이기라. 이기지 뭐. 범사에 감사하라. 감사할 수밖에 없지요. 너는 십자가에 가야 된다. 가지 뭐. 고난을 받으라. 받지 뭐. 우린 육신인데 뭐. 만약에 이게 아니고, 자기가 하게 되면 조금만 환란 와도 하나님에 대해 뭐 합니까? 원망하고 불평할 겁니다. ‘제가 열심히 하는데 이것밖에 안 도와줍니까?’ 만날 이런 소리 할 거란 말이죠.

그런데 말씀이 성령이 함께 하게 되면, 남들은 환란이라 하지만 환란 가운데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뭘 바라보고? 소망을 바라보고. 이 세상은 나의 세상이 아니고 천국을 바라보게 되고. 환란 가운데 있을 때 소망은 더욱더 크게 느껴지지요. 사도 바울이 하는 말이 그대로 다 되잖아요. 가만있으면 안 돼요. 자꾸 쑤셔야 돼. 주께서. 주께서 쑤시면 육은 무익하고 주께서 행하신 대로 언약 가운데 구원받았다는 걸 알게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새 생명의 삶이란 딴 게 아니라 십자가에 주님 육신의 몸을 죽었을 때 이미 단번에 다 이뤄진 그것이 우리에게 삶이 되고 말았습니다. 나의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삶이 본격적으로 개시하는 그러한 발현체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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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576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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