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상 3: 1- 4 (하나님의 부르심)
삼상 3: 1- 4 (하나님의 부르심)
이름 : 우리교회(IP:220.81.176.150)
본문 : 사무엘상 3장 1- 4절
제목 : 하나님의 부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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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08-09-07 15:48
하나님의 부르심
2008년 9월 7일 본문 말씀: 사무엘상 3:1-4
(삼상 3:1)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삼상 3:2)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
(삼상 3:3)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삼상 3:4)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네 번씩이나 부르시는 이유는 사무엘을 어떻게 해보겠다는 것이 아니라 엘리 제사장에 대해서 조치를 취하겠다는 것입니다. 엘리 제사장은 평생토록 제사장 노릇을 했습니다. 그런 제사장이 ‘영원토록 용서받지 못하는 자’가 된다는 것이 참으로 놀라운 일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사장의 직무가 항상 죄용서와 관련된 직무이기 때문입니다. 즉 남들에게 하나님의 용서하심과 구원하심과 인간의 죄에 대해서 언급을 하고 그것을 지적하는 그 당사자가 기어이 구원되지 못하고 용서받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새삼 생각하게 만듭니다.
사무엘상 3:13-14에 보면, “내가 그 집을 영영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이른 것은 그의 아는 죄악을 인함이니 이는 그가 자기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그러므로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맹세하기를 엘리 집의 죄악은 제물이나 예물로나 영영히 속함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노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속함’ 곧 ‘용서함’이란 인간이 그것을 반드시 따 낼 방안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엘리 제사장이 뭐가 죄이며 뭐가 저주받을 짓이라는 것을 본인이 너무나도 잘 알아도 그것을 멈출만한 자질이나 능력이 자기 내부에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단지 엘리 제사장에만 해당되는 사항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들에게 다 해당되는 자질입니다.
자식이란 존재도 결국 타인입니다. 타인의 인생에 관여하는 것도 어느 정도 한계가 있게 마련입니다. 남의 인생을 전적으로 책임일 수 있는 위인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예수님 빼놓고서는 아예 없습니다. 그 어느 인간도 자기 집안 식구 단도리하는데 있어 철저할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 앞에서 점잔 빼는 아이도 친구들하고 만나면 무슨 짓을 하는지는 상상도 안 갈 정도입니다. 집에서 하는 행세하고 바깥에서 하는 행세가 다른 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은 상황에 따로 적절하게 처신할 수 있는 존재들입니다. 일일이 따라다니면서 감시가 불가능합니다. 설사 감시해서 죄를 지적한들 다음도 다시는 그 짓을 안 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아버지로서 자식의 방종을 알면서도 왜 지적을 안했겠습니까. 그럼에도 하나님은 엘리 제사장을 평가하시기를, 자식이 저주받는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방치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더 무서운 일은 다시는 그 어떤 방법으로도 그 죄를 용서받을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못박아버리십니다.
즉 “너의 집안은 용서 불가 집안이다”는 겁니다. 우리 인간들은 이런 사태를 보고 하나님을 두둔해야 할까요 아니면 엘리제사장을 변호해야 할까요? 만약 엘리제사장을 두둔하고 싶다는 것은 엘리보다도 우리 자신들의 신세를 먼저 걱정해서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 자신들도 평생토록 교회 잘 다니면서 하나님을 섬기다가 단지 완벽하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는 평결을 받는다면 그동안 인생을 헛산 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네 인생을 우리가 어떻게 조치해야 할지 난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평소에 우리 생각에 입각해서 하나님을 생각하는 버릇에 조정이 필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입장에서 다시 우리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은 결코 우리 영역에 포섭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회유해서 내 편으로 만들려고 해도 말려들지 않으신 분입니다. 엘리제사장의 집안에게 저주를 내리시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 어떤 누구편도 아니며 누구에게 소속될 수 없는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하십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용서라는 것도 인간이 따 낼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더 쉽게 말해서 죄있는 자를 향하여 하나님께서 죄있다고 지적하시면서 저주하는 것이 뭐가 문제될 이야기입니까? 전혀 문제될 내용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꾸 하나님의 용서를 먼저 염두에 두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인간의 자격으로는 주제넘은 일입니다. 죄 있는 자에게 벌내리고 저주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하나님의 정당한 조치입니다.
여기서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거론하면서 용서해 주십사하는 것은 월권 행위입니다. 우리 인간이 요구할 사항이 아닙니다. 인간이라는 피조물이란 단지 신의 속성을 있는 그대로 표출하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죄 있는 자에게 단호한 하나님의 저주가 임하는 것조차 하나님께서 마땅히 하실 일이라고 여기서 감사해야 합니다.
죄 없는 자에게 벌을 내리시는 것이 아닌 이상,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그 어떤 식으로 대들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어린 사무엘이 세 번씩이나 엘리 제사장 곁에 나타나지 엘리 제사장은,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전령삼아 자기의 운명에 대해서 계시를 내려주시는 일인 줄 알았습니다.
원래 용서가 진정 용서답게 꽃피우는 현장은, 용서받은 자가 자신의 죄에 대해서 충분히 인정하는 경우입니다. 여기서 하나 주의할 것은, 자신의 죄있음을 충분히 인정했다고 해서 그것을 근거로 용서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진정 용서가 도착하면 죄인은 그 은총가 너무 황공해서 어찌 말로 다 할 수 없는 지경이 됩니다.
그래서 용서를 대수롭지 받으면서 용서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용서로 인하여 자신의 죄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본문 이야기의 초점은 엘리 제사장에게 쏠려 있는 것 같지만 실은 “사무엘은 어떻게 다른가?”을 말해주게 됩니다.
어린 사무엘은 전혀 죄 안지었다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여튼 하나님께서는 죄 있는 자를 죄 있다고 지적하면서 저주하는 점에서는 그 어떤 이의를 달 수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마저 제사장의 운명을 통해서 보여지도록 하나님을 일하셨습니다. 이제 이야기 초점은 다시 사무엘로 와야 합니다. 사무엘은 어떻게 엘리제사장과는 달리 용서의 대상이 된 것입니까? 그 근거는 결코 사무엘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민수기 7:89에 보면,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서 여호와께 말씀하려 할 때에 증거궤 위 속죄소 위의 두 그룹 사이에서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목소리를 들었으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심이었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어떤 말씀을 하셔도 그 말씀의 내용 안에는 언약궤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언약궤란 상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야기할 때는 그 중심 센터를 이 상자가 있는 곳으로 삼고 이야기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그 약속 성취에는 이 언약귀가 구현되어야 될 취지가 담기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 언약궤를 달리 ‘속죄소’라고 합니다. 이 속죄소의 방식대로 되어지는 속죄에 대해서 두 천사(그룹)이 책임지고 보장합니다.
바로 어린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부르심을 입었을 때 이 법궤 상자 옆에서 잠을 잤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전개되는 사무엘과 엘리 제사장의 운명은 이 언약궤가 발현하는 의미와 관련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의하면 결과란 오직 축복 아니면 저주, 이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제 3의 여지는 아예 없습니다.
엘리 집안에게 내린 조치는, ‘죄 있는 자가 벌 받는 것은 당연하다’입니다. 따라서 죄 지은 자는 용서를 탐내지 말라는 겁니다. 용서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일방적 결정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사무엘의 가문은 하나님의 용서가 주어지는 가문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참으로 용서받은 자는 참으로 그 마음에 예수님의 핏 물이 흐르는 자입니다. 왜냐하면 그 용서란 죽으심이라는 값을 치르지 않고서는 성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마땅히 저주받아야 할 말없는 저희들이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기에 평생을 두고 예수님의 공로만을 찬미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