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철학과 서양철학의 차이점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의 차이점
이름 : 이근호(IP:117.55.144.99)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의 차이점
동양철학을 대하면 참 편하다. 농담으로부터 시작해서 농담으로 흘러가기 때문이다. 어차피 세상은 농담이 아니냐는 것이다. 여기에 비해서 서양철학은 참 진지하고 심각하다. 신(神)의 뜻과 어긋나면 비진리라고 심판받아 절단 나는 수가 생기기 때문이다. 당하는 인간만 손해다. 따라서 진리를 캐고 또 캐나가는 식이다. 동양철학은 그게 아니다. 풍류를 즐기면 그만이다.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세상이다. 누가 자기를 심판할 자가 없다.
교회는 서양철학이라면 절은 동양철학에 기초로 하고 있다. 중이나 절에 다니는 불자들이 화를 내는 이유는, 자신들이 분류당하고 있다는 점이다. 쉽게 말해서 “예수 안 믿으면 지옥행”이란다. 풍류를 여유 있게 즐기고 있는 자신들을 악한 자라고 몰아세우니 기분이 더럽다. 아니, 그 누구로부터 분류당한 것 자체가 괘씸한 상황이다. 절 쪽에서 교회를 우대하고 같은 종교인들이라고 친하게 지내고 싶어도 저 교회 쪽에서 이미 자신들을 분류시켜 놓은 채로 대화하겠다니 이게 무슨 공평한 대화가 되겠는가! 차라리 꼼짝 말고 내 설교나 일방적으로 들으라는 식으로 항복을 강요당하는 느낌일 것이다.
동양철학은 누구를 대하든지 분류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분류할 만한 절대적인 기준 자체가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인간이냐? 그러면 그것으로 족하다”이다. 인간이 곧 진리요 인간이 곧 신이다. 따라서 같은 신과 신끼리 만나면서 상대를 존중하면 그만이지 무슨 새삼 분류작업이 필요하단 말인가! 동양철학에 있어 완벽이나 우수나 훌륭함이란 딴 게 아니라 자아를 상대에게 들이대지 않고 미리 자연스러움 속에다 자아를 녹여 없앤 상태에서 상대를 대하는 고매한 인격을 말한다. 즉 도를 많이 닦으면 자연에서 오는 자연스러움으로 충만하기에 누구를 대해서 자기 위주의 ‘분류하기’, ‘심판하기’는 나올 수 없다는 것이 동양철학의 모토다.
즉 “우리 서로 분류하지 맙시다.”라는 식으로 다가오는 것이 동양철학 쪽이라면, 서양철학은 “비진리를 제거하기 위한 사명으로 만납시다”라는 식으로 나온다. 즉 서양철학에서 사람이 그리운 것이 아니라 진리가 그립다. 그렇고 그런 사람 만나봤자 서로 이용할 건수만 챙기는 수완들이 이제 지겹기만 한 것이다. 서양철학 하는 동양철학 하는 사람을 만나봤자 진리가 나올 건덕지가 없고 그냥 늙기 전에 세상이나 실컷 즐깁시다 는 식으로 나올 게 뻔하다 때문에 만나고 난 뒤에는 “쓸데없이 시간만 낭비했다”는 죄책감이 휩싸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서양철학 하는 자들은, 상대가 과연 진리를 아는데 쓸모 있는 구석이 있는지 미리 측정하고 판단하고 분류한 다음에 만나게 된다. 부질없이 시간을 낭비하면, 그 낭비된 시간만큼 자신이 진리에 좀 더 가까이 갈 기회를 늦춘 게 속상한다.
요즈음 불교계가 화를 내는 것은, 자신들이 더불어 존경받을 인간이기도 전에 먼저 분류당하고 심판당하는 대상이 되어버렸다는 점에 있다. 즉 공직 사회에서 불교신자로 행세하는 것이 조직 융합 차원에서 장애요소가 되는 것으로 분류당할 수가 있기에 주류 노선에서 배제될까봐 노심초자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중에게 직접 피해가 오는 것이 아니라 절 유지에 자금줄이 되는 일반 불자들의 사회적 처신이 좁아져서 결국 절 유지가 안 된다. 풍류를 즐기려면 자기 대신 힘들게 돈벌어주는 자와 연줄이 닿아 있어야 한다. 이렇게 되면 즉 돈 버는 자들에게 있어 현실 자체가 무척 진지하지만 정작 돈쓰는 자에게는 세상 모두가 다 농담일 뿐이다. 이 농담을 농담으로 이어가기 위해서는 ‘현실 속에서 생존’이라는 진지함을 결코 농담으로 생각하지 않고 심각하게 생각하는 자들의 앞선 포진이 필요했던 것이다.
따라서 중들은 말한다. “제발 분류하지 말자!”이고 여기에 더 적극적 의미를 담는다면 “단결!”이다. 분류하면 단결이 안 된다는 것이다. 즉 아직도 진리를 운운하면 자연적으로 분류가 일어나니 참으로 기분 나쁘다는 것이다. 따라서 진리를 외치지 않는 그런 기독교가 되어서 상생하자는 것이 불교계의 주장이다.
이게 어디 종교 대 종교의 만남에서만 일어날 현상인가. 소위 기독교라는 내부에서도 그러하고 소위 복음만을 외친다고 자부하는 인사들에게도 마찬가지로 늘 일어나는 현상이다. 관심사가 복음이라는 진리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온 신경을 써야함에도 불구하고 풍류를 즐기는 동양철학적인 기분으로 “감히 나를 분류하려들지 말라”고 외친다면 절의 중과 다를 게 뭐가 있는가.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줄기차게 미끌어진다. 자력으로 가까이 가려다가 말씀에 의해서 늘 발길질 차인다. “너는 인간도 아니다!”고. 그리고 성령께서는 그 죄인을 긍휼로 인도하여 십자가가 보이는 곳으로 되모아주신다. 이로서 성도는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밀물과 썰물을 통해 세상을 향해 예수님의 공로만을 증거 하게 된다. 이것은 성도의 분류가 아니라 예수님의 분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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