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요리문답공부 19(20030413)
소요리문답공부 19(20030413)
이름 : 오용익(IP:59.3.201.241)
소요리문답공부 제 19강 (이 근호목사, 2003년 4월 13일, 우리교회)
제 24과 구원의 순서
제 29문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값 주고 사신 그 구속에 참여자가 됩니까?
답) 그리스도께서 값 주고 사신 그 구속에 참여자가 되는 것은 그의 성령으로 우리에게 구속을 효력 있게 적용함으로 말미암아 됩니다.
구원론을 공부할 차례입니다. 그것을 하기 전에 진도가 많이 나갔기 때문에 처음부터 요약을 해보면 제 1과에서 ‘우리 삶의 목적은 뭡니까?’라고 물었어요. ‘삶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는 목적은 사실은 ‘예수님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 어떤 목적을 제시할 자격이 없다고 했습니다.
두 번째(제 2과)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을 지시하는 것이 성경이라고 해서 성경을 이야기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슨 규칙을 주사 어떻게 자기를 영화롭게 하고 즐거워하기를 지시했습니까?’ ‘성경을 주셨다’고 했는데 이것은 ‘성경 외에 다른 것은 진리가 아니다’ 하는 것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성경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지 아니하면 자꾸만 자기 뜻이 틈새로 막 기어 들어와서 왜 그 뜻대로 안 해주느냐 하고 하나님 앞에 불평할 수가 있습니다. ‘성경의 중심사상과 성경의 중심된 교훈이 뭡니까?’(제 3과) 여기에 답변이 되어 있는데 사실은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 하는 것이 성경’입니다.(요 5:39) 다른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증거 하는 것이 성경이다.’
제 4과에서 하나님,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하나님은 예수님의 아버지가 하나님이죠.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들이 전부다 뭐가 들어갑니까? 항상 예수님부터 출발을 하게 되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은 신이신데 그의 존재하심과 지혜와 권능…’ 이런 것은 다른 종교도 다 이야기 하는 것 아닙니까?
다른 종교에서 다 이야기 하는 것이라면 신은 같은데 같은 신을 믿는 것인가? 성경에 보면 그것을 우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이 아버지가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그 말은 ‘예수님을 모르면 하나님을 모른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모르고서는 전혀 하나님을 모릅니다.
‘그러면 신을 믿는다 할 때 그 신은 신이 아니냐?’ 예, 그것은 신이 아닙니다. 그것을 이방인들의 우상이라고 하지요. 그 다음에 삼위일체(제 5과)가 나오는데 ‘하나님은 삼위로 계시고 하나님은 하나이시다’라는 것이 삼위일체의 논리입니다. 삼위라는 것은 성부, 성자, 성령 세분이 인격체로 계신다고 해서 삼위라고 합니다.
일체라는 것은 그 세분이 갈라지는 것이 아니고 한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한분이라는 뜻이 아니고 한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한분’이라는 말과 ‘한 하나님’이라는 말이 좀 달리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고 제 6과는 예정론인데 드디어 예정론에 있어서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요.
예정론 때문에 기가 막힐 일이 벌어지는 거예요. 하나님 믿고 예수님 믿고 다 좋은데 예정론 딱 들이대면 ‘불합리하다’ 해서 거절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예정론에 다 걸려 넘어지고 자빠지고 엎어지고 엎어진데 또 엎어지고, 그렇습니다. 예정론을 인정하려면 무엇이 함께 인정되어야 하냐면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하지 말아야 된다는 겁니다.
인간이 자기 자유의지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보통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지요. ‘자유의지를 나는 포기 한다’는 그 말은 ‘내 머리카락도 세시고 내 발걸음도 세시는 분은 따로 있다’는 말인데 ‘세기는 누가 세? 발걸음 한번 몇 걸음인지 세어봐라. 머리카락 몇 개 뽑았는지 알아 맞춰봐라’ 라는 식으로 우습게 여기죠.
‘하나님은 그냥 계시고 우리가 그냥 찾아갈 테니까 간섭하지 마세요.’ 이게 인간본성에 맞지요. ‘일일이 발걸음도 세시고 머리카락도 세시고’ 할 때 숨이 턱 막히지 않습니까? 세상에 이렇게 감시와 사찰(査察)을 받는다는 것은 후세인독재국가 같아요. ‘어떻게 발걸음을…, 어이구 답답해라. 그런 하나님 같으면 숨이 턱 막힌다. 숨 좀 쉬자.’ 그런 생각이 안 들겠어요?
예정론에서 사람들은 전부 다 거부의 몸짓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이 예정론을 기쁘게 받아들이냐 하면 ‘주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저는 희망 없습니다. 주께서 건져주시면 저는 건짐받습니다’ 라고 하는 자에게 ‘네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고 내가 너를 택하여 세웠나니….’(요 15:16, 요 요일 5:19)
‘황공무지로소이다. 이 변변치 못한 것을 택하여 주시다니, 그것도 창세전부터 택하여 주시다니, 이게 웬 은혜인고!’ 라고 하는 자에게만 예정론이 부딪히지 않고 수용이 되겠지요. 그래서 ‘종교라는 것을 하나 고르기는 해야 되겠는데 뭘 고르지?’라고 나온다면 대번 예정론과 충돌이 되어 버립니다.
‘무슨 종교를 고르든 다 부질없는 것이고 예정된 자에게만 구원이 돌아간다.’ 칼빈은 이것을 아주 강하게 이야기 했습니다. 제 7과 창조에 대한 겁니다. 창조에 대해서는 모든 종교가 다 이야기를 하니까 다 엉터리겠지요. 성경에서 창조라는 것은 ‘모든 것이 창조되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누구 때문에 창조되었고 누구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누구로 말미암아 창조되고 있느냐, 하는 것을 네가 아느냐?’ 라고 묻는 겁니다.
‘창조되었다. 신이 있으니까 만들었겠지. 아름다워라! 인간의 솜씨로는 식물세포 하나 못 만든다.’ 맞지요. 인간은 아직도 식물세포 하나, DNA 하나 조립 못합니다. 제일 단순하다고 하는 초파리의 DNA 하나도 만들 수 없어요.
게놈프로젝트라고 해서 1억개로 알려진 인간의 유전자 지도를 풀었습니다만 아직까지 난시는 어느 유전자 때문이고 혈우병은 어느 유전자 때문인지 그것을 밝히는 데는 수십 년이 더 걸릴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거 알아서 뭐하냐? 그것을 알면 아이를 맞춤으로 생산해 내겠다는 뜻이겠지요.
그래서 ‘창조, 신이 만들었겠지. 우리가 만들었겠나?’ 이러면 안 되고 ‘왜 만들었으며 누구를 위해서 만들었으며 무엇 때문에 만들었는가? 그것은 순전히 나사렛 예수, 예수라는 청년, 그분을 위하여 만들어졌으며 그분으로 말미암아서 통일된다’ 라는 것을 인정할 때 그것이 제대로 창조를 인정하는 것이 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그 창조물중의 하나인 우리가 사는 것은 바로 예수님을 위해서,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살아야 된다.’ 논리가 그렇게 되겠지요. 그 다음에 제 8과 사람을 지으심. ‘하나님이 사람을 어떻게 지었습니까?’ 지은 것이 맞기는 맞습니까? 하나님이 사람을 지었다고 한다면 아마 불평할 사람 많이 나올 거예요.
‘만들려면 불평 없이 균등하게 만들지 왜 누구는 잘생기고 누구는 못생기고 누구는 눈이 나쁘고 누구는 눈이 좋고, 이런 식으로 불공평하게 만들어 놓았는가?’ 제가 읽은 책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청도 서면에서 4-5대를 죽 살아 내려온 양반 집안, 유교에 절여진 옛날분이 며느리에게 하는 말, ‘얘야, 불쌍한 네가 여자로 태어난 죄로 이런 고생을 하니까 감수해라’고 하는 거예요.
여자로 태어난 죄, 하 리수한테 귀때기 맞을 소리죠? 여자로 태어난 게 죄입니까? 그러면 남자로 태어난 동시에 남자라는 이유 때문에 잘난 존재가 되지요. 남자라는 이유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잘난 존재가 되고 여자라는 이유 때문에 날 때부터 상대적으로 죄인이 된다는 거예요. 세상에, 유교에 통달해서 그 당시에 학식이 있다는 사람이 ‘여자로 태어난 것을 죄로 본다,’
이것은 제가 보기에는 유교가 아니고 불교 같아요. 왜냐하면 개는 개로 태어난 죄, 바퀴벌레는 바퀴벌레로 태어난 죄. 죄라는 것은 남자를 중심으로 해서 남자만이 의롭고 남자의요소가 결핍된 것, 남자보다 못한 것은 전부 다 그 폭만큼 죄가 된다고 생각했던 그 사람들, 그래서 그 사람들에게 반발하지 못하고 여자로 태어난 것이 죄인 줄 알고 벙어리 삼년, 귀머거리 삼년, 이래가면서 ‘고추 맵다 해도 시집살이처럼 매울까?’ 그런 식으로 버티는 거죠.
사랑도 아니고 오기로 시집살이를 버티는 거죠. 거기서 남자는 하늘이 되고요. 남자는 하늘이 되고 여자는 땅이라는 말입니까? 여자로 태어난 이유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여자로 태어난 것을 죄라고 규정하는 남자를 죄라고 규정하기 위해서 여자로 태어났어요. 말이 좀 어렵지요. 여자로 태어난 것을 안됐다고 측은하게 보는 그 교만함이 죄인 것을 들추어내기 위해서 여자로 태어난 겁니다.
약한 자를 강자가 돕는데서, 강자가 그 강한 힘을 강자를 위해서 쓰는 것이 아니고 약한 자를 배려하기 위한 강한 힘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남자에게 여자가 있는 겁니다. 여자는 강한자로부터 혜택을 누림으로써 비로소 존재의 완성이 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여자로 태어나는 겁니다.
그래서 남자는 여자를 보듬어 주는 임무고 여자는 남자로부터 보호받는 의무를 갖고 있어요. 물론 저부터 제대로 못하니까 할 말이 없습니다만, 그래서 유구무언입니다만 제가 하고 안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정답은 그렇습니다. 얼마나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나중 문제고 남자라는 것은 예수그리스도로서 여자를 위해서 희생하게 되어 있어요. 원리가 그렇고 정답이 그래요.
진도 계속 나갑시다. 제 9과 하나님의 섭리를 봅시다. ‘하나님의 섭리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에게는 섭리라는 것은 사실 없습니다. 성경에는 창조가 있지 섭리라는 말은 없습니다. 흔히들 알고 있는 섭리라는 것은 창조 속에 포함되는 겁니다. 머리카락도 세시고 발걸음도 세시는데 그것은 섭리라고 하지 말고 창조행위 중에 하나입니다.
그 다음에 제 10과 생명의 언약, 세상에 약속가운데서 생명을 주는 약속은 하나님만이 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새 언약이라고 하지요. ‘내 살과 내 피를 마시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으리라.’(요 6:54) 다른 것은 영생이 없어요. 오직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야 영생을 받습니다. 그것이 생명의 언약입니다.
인간들의 약속, 인간들의 맹세 ‘제가 적금 부어서 교회 짓는데 얼마를 바치겠습니다’ 하는 그런 것은 다 내도 소용없고 원래 부도나야 정상입니다. 혹시 여러분이 목요일 밤에 부흥사가 와서 눈감으로 시킨 후에 ‘교회 짓는데 돈 낼 사람 손들어 봐라. 외상도 좋다’ 할 때는 손드세요.
“집사님, 얼마나 하시겠습니까?”
“80억 하겠습니다.”
어차피 농담인데 뭐, 너도 농담이고 나도 농담인데 피차 농담인데 ‘80억 하겠습니다.’ 그 옆에 장로님이 손들고 ‘여기 85억 있습니다.’ ‘예, 85억 낙찰 되었습니다.’ 맘대로 하세요. 어차피 인간들의 장난이기에 장난에는 장난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어요. 언약만 있으면 구원받습니다. 그런 돈 안내도 천당 갑니다.
제 11과 죄와 타락, ‘죄가 무엇인가?’ 죄란 예수님 앞에서 우리가 죄인입니다. 다시 이야기해서 죄란 뭐냐? 예수님만큼 거룩하지 못한 것이 죄입니다. 예수님만큼 거룩하지 못한 것, 그게 죄에요. 타락은 뭐냐? 타락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형상을 입게 하는 하나의 과정으로서 인간이 선악과의 범죄의 시작, 선악과로 끝난 것이 아니고 범죄의 시작입니다.
오늘 교독문 할 때 했지요?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났다.’(시 51편)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났다’는 말은 ‘태어날 때만 죄인이라는 말이 아니고 그 다음에 크면서 살아가는 모든 새각들이 그것이 아닌 것을 네가 알고 있어라’ 그 말입니다. ‘네가 좋다, 옳다, 하는 것도 그것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미리 짐작해라’ 그 말입니다.
그래서 어떤 인간도 의인은 없습니다.
제 12과에서 원죄, 사실은 원죄라는 말은 성경에 없는 말입니다. 인간이 죄밖에 없지 무슨 원죄가 있습니까? 원죄라는 말을 쓴 것은 자범죄를 말하기 위해서, 원죄와 자범죄 두 개로 죄를 잡기 위해서 그렇게 했는데, 이렇게 두 개를 잡아 놓으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는 원죄를 씻었습니까, 아니면 자범죄를 씻었습니까?
원죄는 씻었는데 자범죄는 안 씻었다고 하면 ‘원죄는 용서받았지만 자범죄는 그냥 남아 있기 때문에 내가 지옥 가네’ 이렇게 되지요. 그렇지 않고 원죄도 자범죄도 다 씻었다고 하면 ‘그럼 이제 내 맘대로 살아도 되겠네’ 이렇게 나오고. 그러면 괜히 둘로 나눠놓고 사람에게 미끼를 놓은 셈이 되지요. 변명거리를 일부러 준 셈이 돼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원죄를 용서한 겁니까? 자범죄를 용서한 겁니까? 원죄만 용서한 것이라면 그 뒤에 예수님한테 용서받고 또 지은 죄는 그것으로 인해서 지옥 갑니까? ‘애고, 이일을 어떻게 하나? 어찌하면 내가 지옥을 면할 수 있나?’ 그래서 천주교에서는 원죄는 예수님의 십자가피로 자범죄는 성 베드로 성당에 헌금내서 속죄 받게 한다고 면죄부가 나왔어요.
자기가 자기꾀에 빠졌다니까요? 죄는 우리가 처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는 예수님이 처리하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예수님을 믿어야 되지요. 너무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제 13과 전적부패(인간의 본성), 전적부패라는 것은 인간이 죄를 짓는 것이 아니고 죄가 인간으로 죄짓게 만드는 그 상황에 우리가 놓여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오늘 낮에 이야기 했지요? 내가 원하는 것을 이성적으로는 알지만 나보다 앞장서서 불쑥 튀어나오는 것이 있어요. ‘이것이 옳은가, 그른가?’ 내가 그것을 따지는 것보다 먼저 툭 튀어 나오는 것이 뭐냐? 인간의 감정입니다.
글 쓸 때도 남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들어봐야 하는데 대충 감 잡고 막 대드는 경우도 많이 있어요. 그 다음에 제 14과 죄의 결과, 죄의 결과는 간단합니다. 사망입니다. 늙고 병들고 죽고, 생로병사, 그것이 죄의 결과에요. 이거 아직도 과학적으로 해명이 안 됩니다. 사람이 왜 죽는지 해명이 안돼요.
현재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새롭게 등장하는 병원체, 예를 들어 사스(SARS)같은 것을항생제가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 다음에 15과 은혜와 무조건적인 선택, 이것은 아까 했지요?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제 16과 구속자, 구속자에 대해서는 성육신, 그리스도의 세 직분, 선지자, 제사장, 왕, 이것은 전부 다 이미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예정하신 분을 보냈다는 사실, 우리 쪽에서의 아이디어가 전혀 첨가 안 된다는 사실, 순수하게 하늘에서 육신이 되어서 오신 그 분, 그래서 우리는 그분의 행함에 우리의 선행을 보탤 필요조차 없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분명히 아셔야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