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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부산 9월 2일 조지래드21 그리스도 안의 새생명 삶강의[신학]

부산 9월 2일 조지래드21 그리스도 안의 새생명 삶

이름 : 우리교회(IP:220.81.176.150)

080902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삶

우리교회(IP:220.♡.176.150)

08-09-07 17:57

우리교회(IP:220.♡.176.150)

08-09-07 17:58

부산080902a조지래드21신약신학-그리스도안에서의새로운삶a

20080902a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삶
(강의:이근호 목사)

시간됐기 때문에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34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삶] 이런 제목인데, 그리스도 안에서는 새로운 삶이 없어요. 그림으로 그려 볼게요. 신학자들이 잘못인지, 인간 자체가 잘못인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리스도 삶밖에 없어요. 우리 삶이라는 게 없거든요.

없는데 사람이 과거로부터 와서 미래로 가는데 여기에 만약에 그리스도를 만났다. 만났으면 인간을 하나의 수레로 봅니다. 수레를 과거에서 미래로 쭉 지금 밀고 가는데, 과거의 자신의 것이 담기는데 여기 그리스도가 오니까 과거의 것이 안 담기고 그리스도가 담겨서 미래로 나간다 이래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면 수레, 이거는 어떻게 할 겁니까? 과거 것은 청산하고 새로운 것이 담기면 수레, 이거는 아무 문제없고 다만 내용만 바꿔서 미래로 나가서 구원받는다. 이러한 생각들을 사람들이 갖고 있어요. 이건 오해입니다. 성경에 대한 오해인데, 그 오해 중에 하나가 교재에도 나와 있어요. 래드도 그런 오해를 하고 있어요.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삶이란 제목 밑에서 한 페이지만 넘어가 봅시다. 한 페이지 넘어가보면, 로마서 8장 21절 찾았습니까? 있지요. 그 다음에 내가 한번 읽어 볼게요. 번역은 다르지만.

[이 진술은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서 본 새로운 것 가운데서 정의되어져야 한다. 이전 것이 지나갔다는 것은 구세대가 끝이 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구세대는 권능의 보좌에까지 계속된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가 이미 시작되었다고 해서 구세대는 아무런 손상도 입지 않고 고스란히 보존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 돼있지요. 그래서 뒤에 갈라디아서 1장 4절 돼있지요.

래드의 이야기는 이겁니다. 구세대가 끝난 것이 아니고, 구세대도 이어지는데 다만 곱게 가는 건 아니고 여기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서 예수님 보좌까지 나아간다. 권능의 보좌까지 나아간다. 이렇게 래드가 주장하는 거예요.

래드는 지금 뭘 모르고 있느냐 하면, 지난 세대 있잖아요. ‘지난 세대를 지난 세대로 보는 관점에는 아무런 하자가 없고, 문제가 없다.’ 그렇게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지난 세대,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인간의 역사죠. ‘역사를 보는 관점은 아마 별 문제없을 걸.’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바리새인도 그래 생각했거든요. 아브라함부터 모세, 다윗, 이사야 쭉 흘러내려오는 것이 일률적으로 하나의 직선에 있는 점처럼 이렇게 찍어서 가면 계속 갈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흔히 말하는 [구속사]죠. ‘구속사를 역사로 보는 관점에는 아마 별 문제가 없을 걸’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이런 관점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아마 새로운 시대는 이 관점 위에 새로운 것이 추가되어서 영광의 보좌까지 나아간다. 그리고 이 세대는 깨어지는 것이 아니고 유지되는데 새로운 세대에 의해서 변형이 일어나면서 하여튼 가기는 영광의 보좌까지.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이것은 래드가 잘못 본 거예요. 역사에 대해서, 시간에 대해서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겁니다. 새 시대에 대해서 흔히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유명한 게르할더tm 보스나 리델보스는 새 시대를 어떻게 이해합니까? 오스카 쿨만 같은 경우는 직선으로 봤지만. 뭐 하나 얹어지지요. 십자가 그 다음에 뭡니까? 재림이다. 뭐 하나 얹어졌지요. 이걸 가지고 묵시적 세계라 합니까?

그러면 이걸 얹어지려면 밑에 것, 기존의 역사도 그냥 있어야 되고, 얹지는 것도 있어야 되고 둘 다 그대로 보존된다. 라는 인식 속에 이게 가능하죠. 그래서 간다 이래 되는데. 실제로 성경적으로 볼 때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하는 것은, 이런 역사가 선으로 되어간다 하는 이 인식 자체가 새로운 성령에 의해서 이 관점 자체가 죄의 인식이라고 지적을 받게 돼있습니다.

다시 이야기할게요. 차근차근하게 역사, 시간, 그 다음에 시간, 그 다음에 시간, 차근차근 왔다. 그래서 미래로 간다하는 인식 자체는 ‘이건 누가 뭐래도 하자가 없다’라고 굳게 믿겠지만 이러한 시간관조차도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죄악 된 시간관으로 이것이 지적을 받게 돼있습니다. 선 밑에 있고 얹어져서 함께 가는 것, 이게 아니에요.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사람이 십자가 앞에서 인간이 죄라고 할 때 그 죄를 십자가를 통해서 인간의 죄성이 드러나거든요. 인간의 죄성이 하나둘 끄집어낼 때 뭐도 끄집어내야 하느냐 하면, 인간이 그동안 역사를 봤던 관점 자체도 죄에 포함돼있다고 보고 끄집어서 들춰봐야 된다고. ‘죄 안에 뭐가 들어있지?’ ‘오호, 이것도 죄네. 이것도 죄네’라고 들 때 ‘인간이 갖고 있던 죄도 이것도 죄네.’하고 들어내는데 래드는 이건 죄 아니라고 도로 집어넣어버린다 이 말이죠.

한 가지 제가 예를 들겠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볼게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 있지요. 그냥 ‘새 생명의 삶’이라 하자. 쉽게 ‘새 생명의 삶’하고 내 나라는 여기 있지 않다. 하고 어떤 관계에 있습니까? ‘예수님이여, 어떻게 하면 착하게 삽니까? 나는 예수 믿고 바르게 살겠습니까?’라고 할 때 예수님 하신 말씀이, ‘내 나라는 눈에 보이는 이 나라가 아니다’할 때 이 두 개가 연결이 돼줘야 되거든요.

‘나, 예수 믿고 바르게 살았어. 목사님, 저 예수 믿고 참 바르게 살았어. 술 끊고, 담배 끊고 바르게 살았어요.’ 예수님 하신 말씀이, ‘내 나라는 이런 나라가 아니다’라고 했을 때 그 사람은 또 새로운 도약이 필요한 거예요. ‘내가 예수 믿기 전에는 과거에 내 수레에 나쁜 습관들이 있었는데 예수 믿고 난 뒤에는 예수님의 모습, 삶의 모습, 새 생명 이런 걸 담아서 나는 구원으로 간다.’라고 생각하는 사고방식 이것 하고 내 나라는 여기에 있지 않다하고 이것이 과연 붙느냐 이 말입니다. 안 붙거든요.

정말 그리스도 안에서의 인간의 새로운 삶 자체는 없어요. 그건 좀 있다 이야기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는 움직이는 하나의 물체가 있을 뿐이지 삶이란 게 없다니까. 굉장히 어렵지요. 약간 어려운데 따지고 보면 간단해요. 예를 들어 ‘나’라는 게 없어요. 그냥 움직이는 게 있다고. ‘나’라고 하는 구체적, 나는 어느 대학 나왔고, 어느 교회 목회자고. 나라고 규정지은 게 있잖아요. 이건 허구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만약에 지금 내가 길에 죽으면 오십대 어떤 남자가 죽었다 이렇게 하지, 그 사람 직업이 뭐고, 그런 것은 나중 문제지 일단 뭐가 죽었잖아요. 진짜 산 것은 뭔가 꿈틀거리는 물체, 이게 나란 말이죠. 지금 움직이잖아요. 이게 나지요.

우리는 거기서 뭘 끄집어내느냐 하면, 움직이는 나에서 뭘 끄집어내느냐 하면, 학교는 어디 나왔고, 교회는 어디 담임하고, 이걸 자꾸 끄집어낸다고. 자식은 누고? 이름이 뭐고? 아내 이름은 누구고? 키가 몇 센티고, 몸무게 몇 키로고 자꾸 요소를 끄집어내서 ‘이근호’라는 규정을 하는 거예요. 이근호는 없다니까. 이근호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어떤 문어 같은 뭐가 움직이는데 뭐라고 불러야 되지 않습니까? ‘에이, 이근호라 부르자.’ 이래 되는 거예요.

자꾸 여기서 나는 이렇다는 자아 규정이 나와 버리면 여기에 이 자아에 맞는 뭐냐 하면, 자아는 뭐냐? 예수 믿는다. 예수 믿는 자아가 되고, 여기서 예수 믿는 삶이 나온다고요. 삶이 나온다는 것은 그 전제가 뭡니까? 예수 믿는 나는 있다고 본 거예요. 근데 사실은 예수 믿는 나란 삶이란 없고, 뭐냐 하면, 지금 예수님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는 무슨 덩어리, 뭔가 움직이는 덩어리라.

목사가 설교할 때 덩어리가 올라가잖아요. 설교할 때 말을 하지요. 말하는 덩어리 있잖아요. 그 덩어리뿐이라고요. 이근호가 설교하는 게 아니라니까. 어떤 덩어리가 설교해요. 주님께서는 이근호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어떤 덩어리를 사용해서 복음을 전하게 할 뿐이지요. 이해가 안 되는 듯한 얼굴을.

설교 해놓고 ‘이번 설교 잘했다, 안 잘했다’하는 것은, ‘야, 설교 잘했다, 안 잘했다’하는 나 혼자 중얼중얼 설교 잘했다 할 때 주님께선 웃기는 거라. 거기 왜 네가 들어가느냐 말이죠. 내 덩어리, 내 물체 덩어리, 물체라 하지 말고 문어, 자갈치 시장 팔잖아요. 내 문어 덩어리를 가지고 내가 사용해서 복음을 전했는데 이 문어 덩어리가 자꾸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걸 자꾸 자기라 보는 거예요. ‘이번 내 설교 잘했나, 못했나?’ 자꾸 나라고 본다 이 말이죠. 주님 보시기에는 대가리 속에 엉뚱한 발상을 하고 있는 거예요. 전혀 예수와 관계없는.

흔히 제가 이걸 쉽게 한다고 ‘자아’라 하는데 자아라 하면 말이 더 어려운데요. 하나의 움직임뿐이거든요. 나의 삶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나의 삶도 없고, 그리스도의 삶이, 정답을 말해요. 그리스도의 삶이 물컹물컹한 문어 같은 나를 통해서 그냥 발현될 뿐이에요. 그 내용이 여기도 약간 나와요. 이 책의 전체 내용을 다 보셨습니까? 다 보면 약간 나와요.

래드의 문제는 뭐냐? 그게 그리스도가 움직이는 삶인데 그걸 뭐로 자꾸 전환시키느냐 하면, 예수 믿는 새로운 나의 삶으로 전환하니까 그건 아니다 이 말이죠. 그거는 뭐냐? 수레바퀴로 나타나요. 과거에 나는 이런 인간이었는데 지금은 예수 믿고 새롭게 되서 구원받았다. 자꾸 이런 식으로 자아포기가 안 되는 겁니다. 사실은 자아포기 할 것도 없어요. 왜냐하면 처음부터 자아가 있어야 포기하지. 있지도 않은 자아를 자기 마음대로 만들어놓고 ‘나, 자아포기 할게.’ 뭘 포기해. 처음부터 문어뿐인데.

문어보고, ‘문어야, 너 몇 살 살았노?’ 문어 아무 소리도 안 합니다. 쾍쾍 물만 뿜어내지 문어가 ‘저, 한 이십 살 살았습니다.’ 그런 소리도 안 하거든요. 그렇잖아요. ‘참새야, 니 누가 키우노?’ 참새 아무 소리 안 하고 짹짹하고 날아가 버린다고. 하나님의 살려주심에 의해서 그냥 날아가는 거예요.

그러면 시간관 자체가 문제가 된다면, 그러면 그리스도로 인해서 몰고 온 새로운 시간관은 뭐냐? 흔히 ‘묵시’라 하는데 새로운 시간관은 뭐냐? 새로운 시간관은 어떤 제가 직선에다가 위에 뭐 얹어진다 하잖아요. 새로운 시간관을 그림으로 구체적으로 그린다면 이 말이 맞아요. 묵시의 비가 쏟아지지요. 어디를 향하여? 역사라는 땅을 적시잖아요.

래드는 말하기를 역사는 그래도 가고, 약간의 변형이 일어나고, 묵시는 묵시대로 주어진다. 이렇게 하는 것은 리델보스나 게르할더스 보스의 유명한 그림 있잖아요. [already, not yet] 이 그림을 자꾸 염두에 두고 이걸 정답이라고 생각하고 하는 거예요. 근데 제가 시비 거는 것은 뭐냐 하면, 기존 역사에다 하나 더 얹어진다는 자체는 기존 시간관이 잘못됐다 이 말이죠.

예수 그리스도가 오게 되면, 내 나라는 여기 속하지 않지요. 그럼 여기서 ‘역사’라는 것과 ‘묵시’라는 것 두 개가 있을 필요 없어요. 하나만 있으면 돼요. 내 나라, 천국만 있으면 돼요. 천국이 오게 되면, 과거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했던 이스라엘 역사를 어떻게 천국으로 바뀔 것이냐? 천국이 오게 되면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고, 천국이 오게 되면, 과거의 이스라엘 역사가 어떻게 바뀔 것이냐, 과거의 역사에 대한 생각조차도 날아가 버린다니까. 어떻게 역사는 보존될 것이냐가 아니라 그것조차 꿈에 본들 잊어버리게 돼요.

여름에 선풍기 많이 사용했잖아요. 추운 겨울에 선풍기 창고에 넣어버려야 되죠. 창고 넣고 사람들이 선풍기 생각 안 합니다. 왜? 날씨가 더워야 선풍기지, 날씨가 추운데 선풍기 소용없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아요. 바른 소리했지요.

천국이 왔으면 무슨 걱정을 잊어버리느냐 하면, ‘이 세상에서 내 우에 살꼬.’라든지 이것은 자동 생각이 안 나야 된다 이 말입니다. 겨울 됐는데 아직 선풍기 생각한다는 것은 미련이 있어서 그래요. 미련이 있고, 무엇을 모독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복음의 영광, 천국의 영광을 우습게보고, 시시하게 봤을 때나 이런 선풍기 생각해요. 옛날 자기 살았던 것을 자꾸 끄집어내서 생각한다 이 말이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한다는 자체가 천국 아닙니까? 여기도 나옵니다만 로마서 14장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17) 그 아래 들어가면 뭘 잊어버리느냐 하면, ‘난 어떻게 살까요?’라는 자체를 잊어버려요. ‘나는 무엇을 담을까요?’라는 생각이 그게 잊어버린다고.

그래서 제가 [피]라는 책을 쓰면서 이 대목을 한 글자로 써놨습니다. 뭐라고 썼느냐 하면, ‘아’ 한 글자로. 인생 어떻게 살까요? 신약신학 전체를 정답을 내라면, 딱 한 글자. ‘아, 천국이 이렇게 좋구나.’ 이것보다 완벽한 신약신학 없습니다. ‘아, 이렇게 좋을 수가. 이렇게 멋진 세계가.’ ‘아’라는 이것밖에 없다 이 말이죠. 이걸 꼭 구태여 끄집어낸다면 이것이 바로 성도의 새로운 삶이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아! 감탄사에요.

성도의 새로운 삶을 이걸 구태여 이렇게 한다하지만 사실은 ‘아’라고 하는 사람한테는 성도의 새로운 삶이라는 것이 이게 창고에 있는 선풍기를 다시 끄집어내서 그걸 다시 틀어보려고 하는 것처럼, 추운 겨울에 영하 10인데 선풍기 틀어서 우에 하려고? 얼어 죽으려고? 신경 쓴다는 자체가 다시 한번 감탄사를 놓쳐버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그 용서라는 사랑의 포만감, 풍성함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되는 겁니다.

겨울에 오두막집에 부부가 싸움을 한단 말이죠. 되도 않는 걸 가지고 싸웠어요. ‘왜 설거지에 밥알이 남아있는데 하느냐? 왜 양치할 때 물이 튀게 하느냐? 잔소리 그만해라.’ 싸우고 난 뒤에 문을 확 열어보니까 세상에 폭설이 와서 온 천지가 하예. 그럴 때 갑자기 싸우다가 ‘여보, 여보. 눈 왔다.’ 관심사가 완전히 설거지 할 때 밥알이 뭐고, 시시하게 양치 조심해라. 이런 사적인 문제, 개인적인 문제 이것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리고 뭘 보고 있느냐 하면, 바깥에 하얀 눈이 온 천지에 폭설이 와있는데 아름다운 백설의 정경 있잖아요. ‘여보, 눈 왔어요. 우리 뛰어놀까? 한번 뛰어놀아봐.’ 눈에 뒹굴지요. 같이.

교회는 뭐냐 하면, 주님의 용서의 눈밭에 뒹구는 거예요. 용서와 사랑의 눈밭에 뒹군다 이 말이죠. 예수님의 피의 용서 앞에. 그걸 구태여 찝으라 하면, 성도의 새로운 삶이 되겠지요. 성도의 새로운 삶은 과거에서 지금 성도의 새로운 삶으로 전환하는 데는 어떤 이음새가 성립이 안 된다는 거예요. ‘이렇게 열심히 하시고, 이렇게 마음 다지시고, 이렇게 자기 관리하시면 됩니다.’라는 어떤 이음새가 성립이 안 돼요.

왜 이음새가 성립이 안 되느냐? 그것은 바로 지금까지 그 이음새를 찾으려고 지금 여기서 천국의 삶을 살려고 하는 그 내막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바로 시간관에 의한 자아론, 이것이 딱 틀어막고 있기 때문에 시간관에 의한 자아론의 성립, 이걸 자꾸 쥐고 있으면 여기서 아무리 새로운 생명 끄집어내도 귀신 있잖아요. 자아라는 귀신이 계속 들어와서 진짜 ‘아’라는 감탄사를 훼손시키게 만듭니다.

-목사님, 바울이 새 생명을 이야기했을 때 ‘새로운 것’이라고 하는 것이, 옛날과 대비되어서 새로운 생명을 이야기한다

대비는 맞아요. 대비는 맞는데

-그게 전체 시간 속에서 사도 바울이 이야기한 것 아닙니까?

과거에 인간들이 보는 시간하고는 다르다. 다른 시간이다 말이죠.

-시간개념이요?

예. 선이 연결되는 게 아니고 선이 끊어져버렸어. 끊어진 선을 인간은 이으려고 하는 거예요. 잇게 되면 종교가 돼버려요. 신비주의 종교가 된다고. 이게 선이 위에서 내려와야 되는데 지상의 선과 연결시킬 수가 없어요. 따로 내려옵니다. 이 나라는 여기 속한 것이 아니라고 주님께서 따로 내려와서 이걸 교체시켜버려요. 시간관을 교체시켜버리고, 주님의 세계가 내려와 버립니다.

-‘다르다’는 의미에서 ‘새’라는 것은

그게 아까 말씀한 대비죠. 대조, 대립이 더 가깝죠. 대비는 그냥 비교하는 거고. 그래 되는 겁니다.

방금 한 것 잊어버렸어요. 뭘 생각한지 잊어버렸는데. 아, 그 이야기. 바깥에 눈이 왔잖아요. 눈이 와서 둘이 ‘야, 여보. 우리 마음껏 뛰어놀자.’ 같이 뛰놀다가 ‘그런데 아까 당신, 양치질 제대로 하라 했지.’ 갑자기 눈밭에 뛰어놀다가 아까 집구석에서 둘이 싸우던 것 있잖아요. ‘양치질 제발 튀지 말고 제대로 하라고.’ 갑자기 뭐가 사라지느냐 하면, 현재 눈이 주는 아름다운 신비감이 순간적으로 다시 자아로 대체돼버리고 사라져버려요. 그러면 행복, 이런 게 없어져버린다고요. 그야말로 첫사랑을 잃어버린 거예요. 주님 주신 첫사랑을 잃어버리고 다시 자아로 되돌아간 셈이 되죠.

자,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따질 게 있어요. 뭐냐 하면, 기존의 시간관에 의한 자아론을 여기서는 일단 그리스도 안에서는 들어오면 안 돼요. 이걸 들어오지 않기 위해서 예수님 쪽에서 ‘들어오지 마’라고 차단하는 방식이 있습니다. 그 차단하는 방식을 밑에 깔아요. 그러니까 아까 리델보스의 그것하고 지금 나하고 똑같지요. 구조는 똑같아요.

그냥 묵시 오는데 이 밑에 깔리는 게 뭐냐? 래드는 역사가 깔린다고 보고. 역사가 깔리는 게 아니고 뭐냐 하면, 이 역사를 차단해야 되겠다 해서 기존의 역사의 문제점,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죄죠. 죄를 주님의 의가 하늘에서 비 오듯이 내리는 거예요. 의가 등장하면 밑에 이것이 졸지에 뭐가 됩니까? 죄가 돼버리는 거예요. 딴 것은 괜찮지 않지만 시간관은 괜찮다.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예수 그리스도 빼놓고 다 죄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 안에 구조 안에 들어오면서 뭘 갖고 들어오느냐 하면, 자기 나름대로의 죄를 갖고 들어와요. 자기 나름대로의 죄를 갖고 들어오니까 이거는 인간이 죄라고 생각하는 그것이 바로 죄라고 지적해야 될 하나님 의가 또 주어져야 된다 이 말이죠. 인간이 죄라고 생각했던 그것도 사실은 제대로 된 죄가 아니라 네 중심이 생각하는 죄라고 지적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의가 나와야 되죠.

그러면 하나님의 의는 사실은 십자가에서 마지막 재림까지 온다 하는데 사실은 안 그래요. 이 의가 이전부터 있어 왔었어요. 언약을 통해서. 언약을 통해서 의가 인간의 죄가 본색이 하나둘 들어날 때마다 하나님 의는 계속 새로운 관점의 ‘그것마저 죄다, 그것마저 죄다’하는 식으로 계속해서 위에서 여기 죄에 따라서 새로운 의가 같이 대비되어서 새롭게 등장하는 겁니다.

이걸 바리새인들이 끄집어낼 수가 없었어요. ‘아, 아브라함은 참 훌륭하다. 하지만 아브라함도 문제가 있었다. 그런데 모세, 역시 훌륭해. 약간은 문제가 있지.’ 아브라함과 모세, 이 사람들이 자꾸 이 사람들을 끄집어내면서 ‘우리는 그들을 본받지 말자. 이거는 본받고.’라고 본받을 거와 본받지 않을 거를 구분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아브라함 나오고, 모세 나오는데 게 아니고 모세 안에 아브라함이 포함돼버려요. 이게 삼킴을 당한다고. 나중에 이런 방법으로 예수 그리스도 앞에 모든 걸 삼킴을 당하듯이.

성경 한번 찾아봅시다. 에베소서 3장 5절, 누가 한번 읽어 볼까요?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셨으니” 사람한테는 내가 안 알켜 줘.

그러면 다른 사람은 가만있습니까? 아니에요. 다른 사람은 이성을 통해서 성경을 연구해서 역사는 이렇게 진행된다. 나름대로의 뭘 갖고 있는데 사도나 선지자에게 주신 성령, ‘성령’이란 용어는 어떤 용어입니까? 바로 종말적인 용어 아닙니까? 마지막 때 나오는 겁니다. 마지막 때 나오는 그것이 미리 앞당겨서 그들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이 말이죠. 누구한테만 왔다? 선지자와 사도에게만 왔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이건 뭐냐? 쉽게 말해서 미래가 현재를 잡아 삼키는 식으로 하는 거예요. 대식 씨가 잘 표현했는데, 미래가 그냥 오는 게 아니고 잡아 삼키는 식으로, 훅 빨아들이는 식으로 청소기처럼 미래가 현재를 빨아들이는 식으로 하는데, 그 빨아들이는 원천이 등장한 것이 뭐냐? 마지막 때에 ‘아하, 어디서 빨아 당기느냐’가 드디어 미래가 뭐로 바뀌느냐 하면, 미래가 현재로 바뀌지요. ‘아하, 그동안 사도들과 선지자들을 빨아 당긴 게 원천이 십자가를 근거해서 빨아 당겼구나.’

그러면 십자가에 빨아 당기기 전에 그들은 뭐 했나? 그들은 바로 자기 자신의 역사관을 유지하고 있었지요. 그러니까 새 생명 삶이라는 게 사적인 새 생명 삶은 없습니다. 없고 구태여 새 생명 삶을 이야기할 때는 성경에서는 뭐냐 하면, 사적인 새 생명 삶이 아니고 교회, 다른 말로 그리스도의 몸을 입어야 한다는 것, 사적인 그리스도 삶은 없어요.

그리스도의 몸은 이렇다는 걸 이야기하고, 그리스도 몸이라 해서, 교회 아닙니까? 교회는 이렇게 돼야 한다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몸은 안에 누가 들어 있느냐 하면, 우리 몸이 아니고 그리스도 몸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몸을 통해서 자신이 빨아 당긴 것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이걸 ‘발현’하죠.

여러분, 약을 많이 먹으면 두드러기 생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도 그런데. 약을 만약에 정량보다 많이 먹으면 발열되고 벌겋게 돼요. 안에 뭐가 들어갔습니까? 약이 들어가서 나온 거 아닙니까? 그리스도 몸이 뭐예요? 그리스도 몸이 뭐 하자가 아닙니다. 안에 그리스도가 들어가 있으니까 바깥에 벌거니 뭐가 나옵니까? 피가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거는 그리스도의 삶이 있지, 어데 사적인 삶이 어디 있어요? 없잖아요. 그리스도의 삶이 있다고.

‘아이고, 선지자들은 바르게 산다.’ 선지자에게는 이미 성령이 벌겋게 들어있기 때문에 그들은 본인도 원치 않는 삶을 살아요. 발열된 열이 나는 거예요. 어떤 열이? 장차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그 모습이 발열돼 일어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언젠가 그런 이야기했어요. ‘제발 성도보고 완벽하라고 지적하지 말라’ 이 말입니다. 왜냐하면 사적인 경우에는 ‘너는 90점이다, 85점이다’ 되지만 지금 사도나 성도는 뭐냐? 발열체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완벽하냐, 완벽하지 않느냐 따질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연탄불이 시원찮다. ‘에라 연탄불아, 시원찮다.’ 연탄불 때리지 마세요. 조금 있으면 벌겋습니다. 조명이 어두울 때 조명 보고 닦달 댑니까? 아니죠. ‘어, 전구가 다 됐구나.’ 갈면 되잖아요. 그러면 전구만 갈면 전구만 나무랍니까? ‘이 못된 전구, 왜 벌써 빛이 나가는 거야’ 이럽니까? 아무 생각 없이 전구 깨든지 버리지요. 버리고 새 전구 갈아 넣으면 되지요. 그러면 전구는 뭡니까? 에너지는 보여주는 발열체지 전구가 죄를 짓는 건 아니잖아요.

지금 여러분 잘 아시는 에베소서 1장 4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주지요. 그런데 사해주는데 그 앞에 뭐라고 돼 있느냐? 이것이 하나님의 뭡니까? 영광이잖아요. 그렇다면 되도 않는 전구는 우리 몸이고, 이 전구에 뭐가? 예수의 피라는 하나님의 창세전부터 예정된 영광이 들어와 버리면, 우리는 전구가 되어서 술 먹은 것처럼 뭐가 나옵니까? 그리스도의 피가 나오는 거예요. 온 전체에서 벌겋게 피가 나오는 거예요.

저는 이걸 운반체라 했죠. 저는 성도를 운반체, 전달체 다른 말로 매개체. 여기에 무슨 성도의 삶이 어디 있어요? 그래도 성도라는 사적이 있잖아요. 사적이 있다고 여기는 자체가 뭐냐 하면, 이것이 바로 성령이 오기 전에 인간들이 갖고 있던 자기 인식이란 말이죠.

그걸 좀더 다시 설명해보면, 이 인식이 말로 설명하기가 정말 힘들어요. 우리가 오랫동안 습관화 된 게 뭐냐 하면, 날 때부터 인간은 습관화 된 정도가 아니고 죄 때문에 그렇지만. 죄로 인하여 항상 중심을 ‘나’라는 것을 따로 적립해 놔야 그 ‘나’가 하나님에게 뭔가 접선을 시도하고, 그 ‘나’가 이웃 사람에게 접선을 시도하는 거예요. 그래서 율법에 보면 뭡니까?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 해서 내가 분명히 확립돼있지요. 그 다음에 무엇입니까? 이웃이 있지요. 네 이웃을 사랑해라. 분명히 확립된다 이 말이죠. 여기 ‘나’라는 존재가 있고, ‘너’라는 존재가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죄 짓고 난 뒤에 인간이 살아가는 그 행태가 너, 나 이런 것이 성립되는 그러한 형식, 틀을 가지고 사람들은 살아온 겁니다. 이 틀에다가 거룩함이 주어지지요. 이 거룩함이 주어질 때 처음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법 지킨다고 난리쳤습니다.

엘리 제사장 아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엘리 제사장 아들은 부랑자인데 이건 하나님보다 제 배를 채우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엘리 가문을 치지 않습니까? 왜 치느냐 하면, 하나님보다 자기 아들을 더 사랑했기 때문에 그게 이유가 되어서 치잖아요. 자기 자식을 하나님보다 사랑한다. ‘그래서 너의 가문은, 네가 사랑하는 가문조차도 네가 사랑의 대상인 가문조차도 하나님 앞에서 날아간다.’ 이래 된다 이 말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어느 부모가 지 자식 사랑 안 하는 자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그런 줄 알았는데, 사무엘 아들 보세요. 사무엘 아들은 돈 받고 판결을 굽게 했다 했어요. 사무엘 가문은 왜 안 날아갑니까? 사울이라는 왕이 잘린 이유가 뭡니까? 이거는 사무엘 오기 전에 지가 먼저 제사지냈잖아요. 그러면 다윗은 제사 안 지냈습니까?

뭔가 이렇게 하나님의 계시가 신약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인간 대 인간, 사적인 비교 자체가 뭔가 성립이 안 되는 요소가 자꾸 여기 끼어들어요. 흔히 ‘선택’이라 하지요. 이상스럽게 뭔가 사람이 이렇게 했더니만 이런 결과가 나왔다고 단정을 지어서 ‘다음에 꼭 이렇게 해야지’라고 했던 법적인 요소가 그 다음엔 두 번 다시 효과가 없는 거예요.

제사 지내게 해놓고 순종이 뭐보다 낫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이게 무슨 이야기입니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지요. 나중엔 그것도 모자라요. 상한 심령이 제사를 아예 대체해버려요. 뭐보다 더 나은 정도가 아니고 순종 했느냐가 아니라 아예 ‘네가 죄인이냐’를 묻는 거예요. 시편 51편에. 점점 더 이게 극도로 가요. 극단으로 치달아요.

처음에 신명기나 이런데서 보면, 너희들이 안식일을 안 지키고 내가 너희에게 벌 내리리라 했잖아요. 그런데 나중에 이사야, 예레미야에 들어가면 안식일 지키고 해도 소용없어요. 아예 쫓겨나가 버려요. 유월절 크게 지낸 요시아 왕, 백날 해도 소용없고 요시아 왕 지도 전사하잖아요.

분명히 그때 당시에는 인간의 잘못을 지적하기 위해서 그때 방식의 범주 안에서 인간이 갖고 있던 죄의 범주 안에서 범주가 이게 1미터라 합시다. 참, 이런 예까지 들어야 됩니다. 쉽게 하기 위해서. 1미터 내에서 선과 악을 지적해요. 거룩과 속성을 지적한다고. 이게 나중에 2미터 늘어나면, 2미터 치의 새로운 감당할 수 없는 의가 나와 버리고. 3미터 돼버리면, 3미터론 도저히 감당이 안 되는 이해가 안 되고 해석이 안 되는 4미터짜리의 의가 온다고.

그리고 나중에 신약시대 되면 뭐냐 하면, 아예 너는 의가 없나니 하나도 없다. 아예 처음부터 인간은 애초부터 죄밖에 없었고, 더 놀라운 사실은, 네 속에 들어있는 죄를 지적하기 위해서 내가 그동안 법을 주었다는 겁니다. 이건 옛날에는 안 나오는 이야기라니까.

꼭 그것 같아. 이동통신회사 광고문구 같아. 휴대폰 공짜. 막상 가보면 딴소리하고. 자꾸 딴소리해서 속은 것도 아니고, 속은 것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자꾸 뭔가 몰아가는 거예요. 그것은 바로 진짜 하나님이 원하시는 아들은 예수님 외에는 사실은 인간에겐 없다 이 말이죠. 이미 에덴동산에서 선악과 따먹은 뒤에는 선악을 안 이상은 그건 하나님께서 사람 취급을 안 합니다. 그런데 본인들이 사람 취급해서 나, 나 하니까 ‘네가 사람 해봐라. 되나 봐라’ 안 되지요.

이것이 과거에 이랬는데 이제는 법대로 미래로 가자. 과거에서 미래로 가는 게 아니고, 제가 처음에 애기했듯이 뭐냐 하면, 희미하나마 미래에 있는 예수님만 참된 사람이다. 그 미래의 힘이 조금씩, 조금씩 과거에 덮쳐온 거예요. 덮쳐 와서 야금야금 자기 백성을 어디로 몰고 가느냐 하면, 바로 마지막 때, 마지막 때라 하지만 사실은 마지막 때가 아니고 제대로 된 때죠. 왜냐? 그때 천국이 오니까. 처음부터 이제까지 엉터리였고 제대로 된 때에요. 아담은 그냥 흙이고, 여긴 하늘에 속한 형상을 입고. 제대로 모든 게 다 들어있는.

그래서 예수님은 이 나라는 여기 속한 게 아니다. 내 나라는 따로 있다 이 말입니다. 내 나라는 따로 있다 하고 내가 어떻게 살까 하고 이게 매치가 돼야 돼요. 매치가 돼야 되는데 주님의 세상은 따로 있다. 그것이 내 속에 들어올 생각을 한다는 자체는 잘못 된 겁니다. 이미 내 삶이라 하는 자체가 거기는 허용되지 않는, 오직 그리스도의 발열체, 그래서 열만 바짝 나는.

그 선지자들의 모습 보세요. 이사야, 예레미야 설교하다 보면, 뭘 인간이 어떻게 해야 되는 게 아니고, 선지자 본인한테 물어 봐요. ‘당신은 어떻게 이 일을 하느냐’ 하면, 바짝 열이 올라. 주님의 에너지가 장차올 성령이 임해서 성령의 에너지가 바짝 올라오니까 자기도 어쩔 수 없어요. 그렇다고 해서 이사야가 몽땅 다 아는 것도 아니고, 필요한 만큼만 주는 거예요. 만약 이사야가 15와트 필요하다면, 15와트만 주지 신약성경의 백 와트 다 안 줘요.

천국의 어린아이는 구약의 어떤 선지자보다 더 위대하고 더 크다 했어요. 선지자가 아무리 훌륭해도 천국의 어린아이가 아는, 우리 성도지요. 성도가 아는 만큼은 몰라요. 왜? 누가 똑똑한 문제가 아니고, 이미 속해 있는 외부환경이 여기 완성된 환경에 속하느냐, 아니면 부분과 모양으로만 있는 거냐? 이거는 이미 마지막 때는 히브리서 1장 나오지요. 마지막 때는 아들로 이야기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야기하느냐 그 차이라고.

여기는 구약 시대는 아직 예수 그리스도가 안 오셨잖아요. 신약엔 예수님 이미 오셨지 않습니까? 내 나라, 예수님 나라 왔잖아요. 왔기 때문에 예수님과 선지자 이런 걸 비교해 볼 때 그들이 아는 것은 아직까지 초보에 불과하다고요.

그렇게 볼 때 다시 해봅시다. 이것 하고 쉽시다. ‘살아있다’ 걸 다시 봅시다. 뭔가 움직인다, 살아있다. 이 ‘살아있다’는 결정을 확정이 구약 때는 뭐냐 하면, 언약을 통해서 언약이 삽입될 때, 들어올 때 이 관계만 ‘살아있다’ 이래 돼요. 그렇다면 언약이 안 들어오면 뭐가 되느냐 하면, 이거는 죽어있는 거예요. 죽어있는 채로 살아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현재 우리가 ‘살아있다’를 알려면 이것부터 알면 안 되고, ‘죽어있는 채로 살아있다’가 뭐냐부터 알아야 됩니다.

죽어있는 인간이 꼭 뭐라 합니까? 지 살아있다 하거든요. 나도 행함을 한다. 나도 말씀 지킨다. 나는 기도 할 줄 안다. 자꾸 살아있다고 주장한다고. 실체는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죽어있는데 자꾸 살아있다고 주장한다고. 바리새인도 마찬가지고 구약에 보면 그런 게 많잖아요.

구약의 왕들, 선지자 핍박하던 사람들, 광야의 이스라엘 사람들, 그 사람들이 사실은 죽어있는 것을 언약이 와서 살려낼 때 하나님께서는 광야 같은 경우에 너는 죽어있다. 뭘 봐야 된다? 언약을 하나님 말씀, 규례와 율례와 법도를 지켜라 안 합니까? 자꾸 여기를 보라 하는데, 만나라 하는 것은 말씀을 보라 하는데, 우리는 뭐냐 하면, 뭘 봅니까? 죽어있다, 살아있다. 뭐 때문에? 만나 때문에. 고마워라. 이렇게 하고 있다고. 주님 주신 떡 가지고, 주님 주신 메추라기 그것 가지고 우리는 살아있다. 이 구조를 못 버리는 거예요. 이거는 비 언약인데.

‘아, 나 죽으려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살 수 있어?’라고 할 때 죽음이라고 하는 죽음은 사실은 죽음이 아니에요. 자기가 자기를 볼 때 죽음은 잘못된 죽음이라니까. 자기 전체가 죽어있다는 걸 알려면 외부에 뭐가 왔을 때? 율례와 법도와 언약이 주어졌을 때 자아 전체가 죽어있다는 것을 비로소 아는 겁니다. 이것을 바로 홍해와 유월절의 피로써 해줬어요. 하나님이 이야기해줬다고. 피 없이는 안 된다. 매일같이 그들은 제사를 드렸잖아요. 그래도 몰라요. 알지를 못해요. 관심이 바깥에 있는 율례와 법도로 산다는 걸 모르고, 자꾸 자기가 자기를 판단하는 거예요. 살아있다, 살아있다.

그래서 여기서 언약에 의해서 지금 언약이 아닌 살아있다는 것은 사실은 자신의 죽음을 보여주는 죽어있는 인간들이 기껏 살았다는 것이 이 정도 수준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렇게 있는 거고, 그렇다면 여기서 살아있다는 것은 반대로 ‘내가 죽어있어야 돼.’ 이것이 살아있다 속에 포함이 될 때 이걸 가지고 뭘 했느냐 하면, 그게 바로 나는 언약으로 인하여 살아있다. 제대로 살아있는 게 됩니다.

과거에는 나는 지금 죽으려 하는데 어떻게 하면 사느냐? 여기에 법도와 율례를 막 집어넣는 거예요. 내가 뭘 하면 살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복 받을 수 있습니까? 이게 아니라 이것은 내가 어떻게 해야 사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은혜를 주실 때 비록 죽은 내가 살아있는 게 된다.’라는 사실은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이게 바로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 말이라.

그래서 사도바울은 새로운 피조물 설명할 때 반드시 인간의 행함 있잖아요. 이 부분을 꼭 이야기해줘요. 이야기해주는 것은 진정으로 자기가 이미 죽은 인간이고, 언약 때문에 말씀 때문에 산다는 사람이 누구냐를 끄집어내기 위해서 이런 이야기를 자기 힘으로, 자기 행함으로 살려고 하는 사람들을 지적하는 그런 내용을 한다 이 말이죠. 어느 대목이든 다 그래요.

그래서 사도바울 설명할 때 ‘나는 죄인이었다. 이제 예수 믿고 나는 새 사람 살았다.’ 이러한 구조 자체가 어디서 인식이 나오느냐 하면, ‘나는 죽어가고 있는 내가 뭐 하면 살 수 있느냐’ 이런 인식과 같은 인식이기 때문에 이 자체가 뭐냐 하면, 사실은 죽어있는 인간들의 윤리, 도덕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제가 지금까지 래드 책을 쭉 보면서 그리스도의 삶 오기 전까지 래드에 대해서 이 사람이 성화론자가 아닌가 걱정을 많이 했었어요. 그런 요소가 많았고. 그런데 그리스도의 새로운 삶이란 이 중간중간에 보면, 래드가 성화론에서 반대하는 이야기를 많이 해놨어요. 그 중에 하나 보면, 첫 번째 단락이 뭐냐 하면, [그리스도 안에 새로운 삶]이죠. 두 번째 단락이 뭐냐? [그리스도 안에 삶]이죠. 그 제목 위로 열 번째 줄에 보면, 제가 읽어 보겠습니다.

[새 사람이 다시 새로워진다는 것은 성품이 점차적으로 새로워지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아니라 했어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존재하고 있는 새로운 인간성이 그리스도 교회 안에 점차적으로 현실화된다.] 이 말이에요. 아까 이야기한 발현체, 매개체, 전달체 유사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번역도 그렇게 돼있지요.

야, 이거는 한국교회 들었으면 개혁주의 들었으면 돌 맞을 이야기잖아요. 이거는 성품이 새롭게 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면 저쪽 성화론자가 뭐라고 확 달려들겠습니까? 하나의 씨앗이 자라서 열매를 맺듯이 점차점차 자란다. 그리스도 몸에까지 네가 자라나라. 더 커져라. 그러한 사도바울의 인식은 뭐가 되느냐 이 말이죠. 하나의 과정으로써. 성화론자들은 뜯어먹으려고 달려들 거예요.

뭔가 자라나라한 자체는 식물에 비유했기 때문에 식물이 하나의 작은 새싹에서부터 열매로 자라가지, 중간에 끊어짐이 없이 연속성을 이야기하고, 연속성이라 하는 것은 이만큼 자랐나, 좀더 자라라. 뭔가 미래적으로 클 수 있다는 내다보면서 자라나라고 이야기했을 건데, 그렇다면 이거는 누가 뭐래도 여기는 새로운 성품이 자라나는 것을 가리켜야 되는데 여긴 뭐냐? 점차적으로 새로워지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존재하고 있는 새로운 인간성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현실화 된다. ‘발현된다’ 같은 거죠.

래드, 이 말 우에 책임지려고 이렇게.

-제가 보기에 그 말 하면서도 ....

그렇지요. 그래서 궁금한 게 뭐냐? 도대체 래드가, 래드라 하지만 다른 사람도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도 많기 때문에 래드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래드가 이렇게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있는가? 싶어서 근거가 과연 있으면 맞는 이야기인지 봤어요. 근거가 틀렸어요. 그 밑에 봅시다. 뭐냐 하면, [하나님을 따라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권고하고 있는 것을 볼 때에 새 사람을 입는다는 것은 단번에 단 한 번 만에 완전하게 이뤄지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래 돼있어요.

자, 그렇다면 앞에 이야기하고 뒤에 이야기를 내가 래드 입장이 되서 억지로 엮어보자 이 말입니다. 엮어보면 결국 래드는 뭘 이야기하느냐 하면, 하나의 인간이라 할 때 아까 제 이야기하고 유사해요. 성도를 볼 때 ‘성도’라고 이야기하는 ‘나’, 나가 따로 있고 성도 따로 있어서 이 나가 나라는 성도를 새롭게 만들려고 자라나게 하는 이거는 아니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성도는 주님 안에 있는 게 아니고 결국 내가 생각하는 내 안의 성도기 때문에 이것은 바로 사도 바울이 가르치는 게 아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뭐냐? 예수 안에서 성도기 때문에 그 안에 누가 들어있다? 예수님이, 새로운 인간이니까 예수님 아닙니까. 예수님의 새로운 인간성이 안에 들어있어서 이게 발현되는데 다만 발현될 때 또는 현실화될 때 구체화될 때 한순간에 100점 이런 건 없고, 뭐냐? 점차 50점, 점차점차 단 한번이 아니고, 점점 더 이게 나중에 그리스도가 발그스레하게 될 때 그런 과정은 아직도 남아있다 이 말이죠. 시간적 요소가 남아있다는 걸 가지고 아까 이야기한 그리스도에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라든지 씨앗이. 그런 것은 거기다 다 집어넣으면 해석이 딱 맞다. 이렇게 래드가 주장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바로 근거가 문제가 되죠. 단 한번에 이뤄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게 사실은 복음적이고 성경적이 아니에요. ‘단번’이라는 것은 ‘여러 번’에 대비되는 개념에 단번이 아니에요. 성경에서 말하는 단번이. ‘네가 단번에 거룩하게 되었다’라는 단번이라는 개념이. 서서히 풀어지는 여러 번, 여러 번 계속해서 점진적으로냐, 아니면 단번이냐? 이런 식으로 대비되는 단번은 아니란 말이죠.

여기서 만약에 단번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내가 어떻게 될까 하는 그러한 사고방식을 놔버리는 ‘나는 어떻게 하면 점점 더 그리스도 형상을 닮아갈까?’라는 생각조차도 찢어버리는 단번에 그걸 찢어버리는 겁니다. 이걸 휴지 하나 있으면, 참 멋진. 성경이 어려워요.

이 휴지에 보면 뭐라고 적혀 있느냐 하면, 예를 들게요. 내가 적어 볼게요. ‘너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가라.’ 이게 적혀있다 이 말이죠. ‘아, 이거 단번에 안 되는구나. 차츰 해야지’라고 생각하잖아요. 내가 보고 있는 이걸 누가 찢느냐? 주님이 찢어버리면, 이걸 찢는다는 말은 누가 찢는단 말입니까? 내가 이렇게 되고자 하는 누가 찢기는 거예요? 내가 찢기는 거예요.

결국은 뭐냐? 주님은 말이기를 ‘내가 알아서 할게’ 뭐 대로요? ‘그리스도의 분량이 자라 장성할 때까지 내가 알아서 할게.’ 그때 찢겨진 내가 뭐라 합니까? ‘주께서 단번에 이루셨군.’ 이래 이야기하는 거예요. 휴지 아니면 설명이 안 되네. 내가 걱정할 것이 없다 이 말입니다. 왜? 주께서 그 일을 단번에 이루셨기 때문에. 단번이란 말은 한번이란 말이 아니고, 이미 완료된 상태에 놓여있는 거예요.

그래 돼야 뭘 증거하느냐 하면, 그 성도는 뭘 증거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된다고. 만약에 래드처럼 돼버리면 인간은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또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될 나에 대한 뭘 해야 된다 이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아직도 내가 해야 되기 위해서 미진한 것이 남아있는 거예요. 내가 아는 십자가는 내가 해야 할 미진한 것은 아직 남아있지 않다고 봅니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왜? 단번에 이루셨기 때문에.

만약에 내가 미진한 것을 내가 못 이루면 내가 지옥 가는 그런 법은 십자가 안에서는 있을 수 없다.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미진한 것을 마무리 못 했기 때문에 지옥 가는 법은 없다 이 말이죠.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 피로 말미암아 단번에 구원을 얻었기 때문에.

박영선 목사님 설교가 바로 문제점이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 피만으로 영~ 믿지를 못하겠어. 왜?

10분 쉬고 합시다.

우리교회(IP:220.♡.176.150)

08-09-07 18:01

부산080902b조지래드21신약신학-그리스도안에서의새로운삶b

20080902b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삶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을 하겠습니다.

래드가 이 대목에서 중요한 이 단락에서 중요한 것을 이야기했어요. 그게 뭐냐 하면,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삶] 제목 제일 마지막 대목에 보면, 대목 한번 봅시다. 제가 적어볼게요. 래드가 알고 이야기했는지 모르고 이야기했는지 얼마나 중요한 이야기인지. [바울은 죄가 죽었다 말하지 않고 믿는 자들이 죄에 대해서 죽었다고 말하고 있다.]

적어볼게요. ‘죄가 죽었다’고 이야기하지 않고,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이야기한다. 끝에서 한 30줄 더 위에 올라가면, 제일 마지막에서 밑에서 30내지 40 보면, 거기 에베소서 4장 22절 나오거든요. 4장 22절 밑에서 네 번째 줄에 보면, [바울은 죄가 죽었다고 말하지 않고 있으며 믿는 자들이 죄에 대해서 죽었다]고 하는 거예요.

왜 이 이야기가 중요하냐 하면, 이게 뭐냐 하면, 예수 믿는 사람은 성도는 더 이상 죄 짓지 않는다 하는 건데 그러니까 성도는 죄한테는 무조건 이긴다. 왜? 성도 앞에서는 죄가 죽어 있으니까. ‘형님, 잘못됐습니다. 다시는 죄 지라고 이야기 안 할게요.’ 죄가 살살 빈다는 거예요. 왜? 성도는 죄에 대해서 죽었기 때문에 이 말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성도는 모든 죄를 이겼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하는 거예요. 성도는 절대로 죄 짓는 법이 없다는 거예요.

죄에 대해서 죽었다는 말은 그들은 뭐라고 표현하느냐 하면, 보통 K1 하는데 보면, 한 대 때려서 뻗었잖아요. ‘이게 어디 쪽도 못 쓰는 게. 너 이제 죽었어.’ 이러잖아요. 그때 의미는 뭡니까? ‘너는 아무리해도 나한테는 안 돼’라는 그런 뜻이거든요. 사도바울이 죄에 대해서 죽었다는 말은 그렇게 이해하는 거예요. ‘이제 죄는 나한테는 쨉도 안 돼.’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내가 순종하기만 하면 죄는 안 달라붙고, ‘아이고, 형님 알아 모시겠습니다. 이제는 착한 일만 하이소’라고 죄가 슬슬 물러가준다 이래 보는 거예요. 그런데 래드는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반대로 이야기해요. 뭐냐? 성도는 죄에 대해서 죽었다는 거예요. 뭐냐 하면, 성도는 죄에 대해서 죽었다는 말은 성도가 죄 앞에서 어디 죄가 까불어. 라고 사는 행세를 할 수 없는 입장에 있다는 겁니다.

어느 게 맞는지 상당히. 둘 다 반대로 이야기하는데 둘 다 틀릴 수 있겠지요. 다시 말해서 뭐냐 하면, 죄가 나타나면 ‘엄매 기죽어.’ 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에요. 왜? 성도는 죄에 대해서 죽은 자기 때문에. 죄가 이야기하기를 ‘어이, 성도.’ 죄가 골목 강패고, 나는 새로 전학해온 초자. ‘어이, 새로 전학해온 놈 이리 나와. 너 성도야?’ ‘성도야.’ ‘나 죄야. 돈 내놔.’ ‘돈 여기 있습니다.’ 다 갔다 내. ‘너 왜 강패한테 돈 주노?’ ‘나 죽었거든.’ 죄에 대해서 죽은 자기 때문에 죄를 이길 수 없다 이 말이죠. 죽은 자거든요. ‘그러니까 있는 대로 다 갖다 줘야지. 어떻게 해.’ 둘 중에 어느 게 맞느냐 이 말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래드가 앞에 대목 뒤에 성경구절 쭉 보게 되면, 그 앞에 보면 이게 참 어려운데요. 에베소서 4장 22절 찾았습니까? 그 대목부터 읽어볼게요. 제일 끝에서 한 40째 줄 위에 돼요. [옛 사람은 회개하지 않는 죄 많은 존재를 가리킨다. 주목해야 될 중요한 것은 서술과 명령 안에 긴장이다.] 이 말은 더 어려워요.

여기 세 가지 다 나와요. ‘서술’, ‘명령’ 그 다음에 나오는 용어가 뭡니까? ‘긴장’ 그 중에 제일 어려운 게 긴장이란 용어에요. 무슨 말인지 몰라요. 긴장이 뭐냐? 당기고 미는 거잖아요. 서술과 명령과 그 다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긴장이라 했잖아요. 긴장이 뭔 뜻입니까? 긴장은 줄다리기 아닙니까? 한 쪽은 이리 밀렸다고 한 쪽은 뭡니까? 저리 밀렸다가. 누가 왔다갔다 당깁니까? 서술이 당겼다가 한 쪽은 뭐가 당깁니까? 명령이 당겼다가.

다른 말로 하면 로이드 존스 주장에 의하면 서술은 뭡니까? ‘이미 너는 구원받았다.’ 명령은 뭐냐 하면, ‘구원받도록 바르게 살아라.’ 이거 아닙니까. ‘넌 이미 구원받았다. 아직 구원 덜 받았어’라는 이 명령, 이 사이에 한 쪽은 이리 갔다가 한 쪽은 이리 갔다가, 이게 바로 서술과 명령 사이에 긴장이라 하잖아요.

사도 바울이 그렇게 표현했다는 겁니다. 로이드 존스도 그래 이야기했고. 래드도 그리 이야기한다는 거예요. 도대체 이 말이 무슨 말인지 그러니까 이미 구원됐다 하는 갑자기 바깥에 눈이 와 있는 ‘아’라는 이건 없어져버렸지요. 지금 어디에 초점이 맞춰있습니까? ‘나’라는 인간이 어떻게 하면 구원받을까 여기에 와 있지요.

지금 긴장 속에 있잖아요. 긴장 속에 있다는 것은 긴장이 풀려버리면 완전히 구원받은 거죠. 근데 래드는 뭡니까? 긴장 속에 있다 했지요. 지금 현재 총신이고 장신이고 모든 신학생 주장이 이거 아닙니까? 긴장 아닙니까. ‘이미, 아직’ 긴장이잖아요. 긴장이 왔다는 말은 아직까지 구원이 완전 방면은 없다 아닙니까.

그렇다면 여기 두 가지지요. 긴장에서 긴장이 풀리는 시간, 긴장에서 긴장이 없어지는 완벽한 구원이 되려면 1번, 행함입니까? 2번, 행함이 아닙니까? 어느 쪽입니까? 행함이냐, 행함이 아니냐? 어느 쪽이냐 말이죠.

그들은 지금 긴장이란 말을 했기 때문에 그 다음에 독자들에게 또는 신학생들에게 또는 교인들에게 뭘 이야기해야 되느냐 하면, 그러면 목사님, 긴장이라면, 왔다갔다 줄다리기 한다면, 난 신학교 때 신성종 교수가 이 긴장이란 말해서 긴장이란 말이 무엇인지 몰라서 수십 년 동안 고생했어요.

긴장이란 말만 하면 안 되거든요. 긴장이 풀리는 방법을 이야기해야 될 것 아닙니까? 목사가 됐으면, 신학자가 됐으면. 푸는 방법에 사람들에게 뭘 이야기해? 행함을 이야기할 거요, 아니면 행함을 이야기 안 할 거요? 이 문제 나온다 말이죠.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부다가 긴장을 이야기한 사람치고 그 다음에 반드시 ‘행함’을 이야기하게 돼있어요. 그러니까 그 다음부터는 뭐뭐 열심히 하란 말이죠. 그럼 열심히 하면 그 행함은 어디 속합니까? 서술과 명령 가운데 어디 속하지요? ‘행하라’ 했으니까 이게 어디 속합니까? 명령이죠.

그러면 서술과 명령 가운데 긴장이 있는 가운데 다시 기준이 어디로 갑니까? 서술로 가는 게 아니고 어디로 갑니까? 다시 긴장에서 명령으로. 결국 남는 건 뭐예요? 명령밖에 없죠. 박영선 목사 설교 이거잖아요. 명령밖에 없다는 것은 바로 바리새인의 행함, 명령밖에 없죠. 결국은 행함밖에 없지요. 기껏 서술을 이야기했지만 서술이라 하는 것은 중간에 끼어들어가다 빠져버리고 결국 남는 것은 행함밖에 없다. 인간의 행함밖에 없다 이 말이죠. 옛 사람을 벗어버려라. ‘벗어버려라’ 명령이잖아요. 행함밖에 없다 이 말입니다.

그 다음에 이 긴장을 푸는데 긴장이 만약에 긴장이 있다면 푸는데 행함이 없는, 행함이 아닌 방식으로 긴장을 푸는 방식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이게 모순돼요. 행하지 않고, 지금 순종과 행위를 주장하는 사람이 뭐라 합니까? 앞에 무슨 말 있어요? ‘가만있으면 안 되고’ ‘너희들이 가만있으면 안 되고 반드시 행해야 된다.’ 이거 아닙니까?

그러면 ‘가만있으면’ 어디에 해당됩니까? 가만있는 것은 서술에 해당된다는 거예요. ‘너는 이렇게 구원받았단다. 가만있으면 안 되고 행해야 된다.’ 이래 이야기한다고. 결국 긴장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가만있으면 안 돼’라는 말은 서술을 꺾어버리고 제거하고, 서술은 이제 생각하지 말고, 명령만 순종하란 이것만 해야 되지 만약에 그냥 서서 앉아 있으면 이것은 구원이 안 돼버려요.

그러면 애초부터 서술이 빠져버리면 뭐가 빠지는 겁니까? 긴장 자체가 처음부터 없어지지요. 그렇다면 이 문장은 서술과 명령의 긴장이 아니고, 결국 뭐냐 하면, 구원이 안 된 상태에서 구원이 되려고 애쓰는 사이의 뭡니까? 긴장인데 이건 오직 인간의 행함과 명령밖에 통하지 않는다 이 말입니다. 십자가가 뭔 필요 있습니까? 십자가 아무 필요 없잖아요.

성경적으로 보면 복음적으로 보면, 아까 이야기한 이러한 사고방식이 무슨 상태냐 하면, 이건 바로 죽은 상태다 말이죠. 하나님의 언약이 끼어들지 아니하면, 인간은 지가 착하게 애써도 그건 죽은 상태에요. 구약에서 산다는 것은, 제가 어느 설교에 그랬죠. 사람 사이에 제발 하나님의 복음을 집어넣으라고. 누구 만날 때 복음을 집어넣고 이야기하라고. 그냥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나지 말고.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나서 자아이야기, 자꾸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영광을 가리잖아요.

하나님의 복음이 들어와 버리면 살라고, 구원받으려고, 바리새인처럼 열심히 하려 하는 이것 자체가 언약 안에 뭐가 들어있어요? 들어있는 것 아무 거나 해보세요. 언약 안에 생명이 들어있다. 언약 안에 거룩이 들어있다. 언약 안에 의가 들어있다. 이 세 가지만 합시다. 대표적인 거니까. 그렇지요.

생명과 거룩과 의는 없지요? 일단 없지요. 성령이 오기 전에는 없잖아요. 생명나무를 우린 맛도 못 봤잖아요.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는. 예수님 자신이 생명나무 아닙니까? 나는 생명나무라. 생명이 없지요. 거룩도 물론 없지요. 내가 어느 설교할 때 그런 기억나는데, 세상에 인간들끼리 거룩을 논한다고 누가 잘났냐고. 네가 모세처럼 돼봤나? 모세는 사십일 동안 밥도 안 먹고, 물도 안 마셨단 말이죠. 거룩 되려면 그 정도 거룩 돼야지.

사람이 밥 먹고 사는데 거룩한 놈 누가 있습니까? 돈 버는데 무슨 거룩이 있어요. 돈 벌면 사람이 졸지에 뭐 되느냐? 치졸하게 치사하게 되고. 지가 안 되려고 해도 돈 버는 사람 있지만. 치사하고 더럽고 그리고 온 몸에 땀 냄새가 돌고 그리고 피곤에 대한 반발로 하나님께 원망하고. ‘주여, 꼭 내가 이래 살아야 되겠습니까?’ ‘진짜 내가 이 짓해야 되겠습니까?’ 우리 목사님들 많이 느끼지요. ‘꼭 내가 이 짓해야 되겠습니까?’ ‘더러운 짓을 내가 동참을 해야 돈이 나옵니까?’

세상에 모세처럼 물도 안 마시고 밥도 안 먹어도 사십일 동안 얼굴에 건강한 정도가 아니고 빛이 날 정도 같으면 거룩하지 말래도 그게 거룩하잖아요. 이게 뭡니까? ‘아’ 눈 덮인 것 여기에 명령이고 서술이 어디 있습니까? 그냥 아, 뭔 뜻입니까? 문 여니까 폭설 내렸잖아요. 내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고 나를 지배하고 있는 환경 자체가, 아! 거룩하고 생명스럽고 하나님의 의가 거룩하고. 모세가 사십일 동안을.

지금 하나님이 주시려고 하는 거룩이 어느 상태냐 하면, 그 상태라고. 예수님의 십자가 성령이 오게 되면, 지금 우리는 만날 돈, 돈 하지만 사실은 우리를 걸치고 있는 그것이 모세가 경험했던 그 세계보다 더 완벽한 생명과 거룩과 의가 지금 지배하고 있다고. 우리가 삶에 바빠 그걸 모독하고 있고, 무시하고 있기 때문에 맛을 못 느끼고 있는 거예요.

십자가 진 강도나 개 같은 여자, 그 여자 같으면 알지요. 개입니다. 개 맞습니다. 사는 게 평생 죄 짓는 것밖에 더 있습니까? 저요, 십이 년 동안 피 흘려도 마땅합니다, 이거. 십오 년 동안 흘려도 괜찮아. 그 사람이 십이 년 동안 피 흘렸다고 주님께 원망합니까? ‘주여, 어찌하여 나에게 이런 형벌을. 전생에 무슨 업보가 있어서.’ 이렇게 했습니까? 뭐라고 합니까? ‘맞습니다. 저, 개 맞습니다.’

뭘 봤기에, 뭘 느꼈기에 자기 자신에 대해서 원망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창녀, 창녀인지 아닌지 논쟁이 있습니다만, 어쨌든 간에 막달라 마리아, 행세 나쁘다고 소문난 여자, 울면서 주님 앞에 그 비싼 자기 시집가려고 한 향수를 탁 한꺼번에 깨버렸잖아요. 주님의 장사를 보여주기 위해서 증거하기 위해서.

도대체 뭘 했기에 그 비싼 것 깹니까? 요새 교인들 돈 만원 하는 것도. 참, 목사로서 진짜 어디 직장만 다닌다고 이래 살아야 되는 줄 아십니까? 목사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돈 만원 헌금하면서 생색 다 내고. ‘더러워 이 돈 없으면 내 자식 못 먹고 사나’ 생각 들고. 그 비싼 향수를 최소한 얼마였다고? 그 전 재산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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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576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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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