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능우 집사님의 잠언 강의 소감
이능우 집사님의 잠언 강의 소감
이름 : 이근호(IP:117.55.144.99)
잠언을 듣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다른 인간이라면 이 잠언(성경)을 이해한다.
잠언은 지혜로써 인간에게는 없으며 없는 것을 가지고 심판한다.
우리 속에 있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데 죽어보니깐 지혜대로 되는데 이것을 구조라 한다.
잠언은 구조인데 이 구조(지혜)가 움직여서 천국 갈 사람은 천국 지옥 갈 사람은 지옥으로 간다.
즉, 잠언 속에 있는 지혜가 우리의 운명을 통치 지배하고 있다,
지혜는 우리에게는 없는데 우리 인생을 자기 마음대로 휘저어 놓는 외부에 설치된 시스템 구조 그게 바로 지혜다
우리의 인생은 우리의 소유가 아니고 외부에 있는 지혜자의 권위(여호와)에 의해 진행되기 때문에 자신이 고민할 이유가 없다.
인생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지혜의 지시에 따라 그저 움직일 뿐이다.
잠언대로 움직인 사람의 고백은 잠언은 여호와에게서 나와서 여호와께로 돌아감을 고백한다.
이자가 지혜 속에 사는 자다.
인생길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세워 놓으신 구조(지혜)대로 움직여 나간다.
성도에게는 지혜자 되시는 예수님이 걸어가신 절차 경로를 밟아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구조로 이미 확정 되어있다.
이러한 지혜대로 움직여 나가는 것은 인간에게는 불가능성이다.
하지만 성도에게는 주님께서 불가능성을 가능성으로 인도하게 하신다.
성도에게는 주님 자신의 십자가 피의 흔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 피로 인해 자신의 죄인 됨과 십자가 사랑으로 구원해주심에 대해 고맙고 감사하며 이로 인해 울 수 있다는 점에서 천사보다 귀하다.
지혜는 활동성으로 나타나는데 그 활동성이 행함을 유발하며 그 행함의 지향성은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식으로 활동하게 되어있다.
그 사람 속에 성령께서 하나님께서 넣어준 각본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구조 속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잠언에서는 지혜가 이야기한 지혜 자가 따로 모델로 있다.
인간은 자기가 받은 말씀에 순종하므로 지혜 자가 되려고 하고 잠언에서는 지혜 자가 이 땅에 등장한 분이 있어 경쟁 관계 속에 들어간다.
하지만 지혜가 우리속에 들어오면 우리의 행함은 책망 받아야 마땅하며 창조의 모델이신 지혜자만 참 인간이고 자기는 짐승과 같은 존재였음을 깨닫게 된다.
성도의 노선에는 예수님에 의해 지배당하여 이끌러 가면서 갈등을 유발하며 가고 불신자의 노선에는 인간적인 도리 종교적 모든 역량을 발휘해서 스스로 열심히 도를 닦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인간의 한계는 자신을 놓지 못하는 것이다.
인간에게서 나가는 것은 무엇이든지 인간 자기에게로 되돌아오기 마련이다.
이것이 자기 사랑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즐거운 것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꾸 인간은 다른 곳에서 즐거움을 찾으려 하고 있다.
이것은 인력으로 안 된다.
성신이 임한 자에게만 일어나는 기이한 현상이다.
그러기에 “오직 여호와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도다”,(시편1:2)
라 했으며, 여호와를 경외하므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시편2:11)
이런 마음이 이런 행동이 아무에게나 있는 것이 아니다.
창세전 아들 되기 위하여 이미 작정된 사람에게 주어지는 지혜다.
이 아들이 만들어지므로 아들 되지 못한 자와 전쟁이 일어나 싸움에 가담하게 한다.
잠언서 에서는 오직 예수님만 아들이고 우리는 아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우리라는 집체 속에 한 아들이다.
이 아들이 만듦은 근본 되시는 한분의 피로써 되는데 이 피로된 모두를 역시 한 아들 속에 포함되며 여호와를 경외할 수밖에 없는 한 몸 하나가 된다.
우리가 경외하는 것이 아니고 지혜자 되시는 그분이 우리의 각자 어리석은 행동과 엉터리 같은 신앙도 그것마저 하나님을 경외하는 쪽으로 바꾸어주시는 지혜자의 작용을 하시는데 우리는 그냥그분의 포대기에 쌓여 그분의 대신 해주신 은혜로 공짜로 아들이 되는 것이다.
집단적인 아들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집단속에서 자신의 더러운 본색을 보고 이런 나 같은 못난 인간도 아들 삼아 주시는 그분은 과연 우리 속에 어떠한 모습으로 침투해 있는지 알아가게 하시기 위해서 집단적인 아들로 되어 있는데 그분은 가난한 낮은 모습으로 우리 속에서 휘돌아다니면서 우리의 죄성과 욕심을 찔러 대신다.
그리고 낮은 자리로 잡아당기신다.
지혜란 이웃과의 관계에서 구조적 활동성으로 나오는데 지혜로서 우리의 본성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온전히 모든 법을 이루시고 우리에게 그 법과 상관없는 하나님께서 긍휼을 일방적으로 입혀주시는 것과 우리에게는 이젠 다시는 법으로 정죄함이 없다는 것까지 알려 주셔서 하나님 홀로 영광 받으시는 것이다.
성경에는 율법노선과 지혜노선이 있다.
지혜의 노선에 있는 자는 예정되고 선택된 자로서 지혜를 받게 되면 지혜자의 기능이 들어 있어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 주게 된다.
아들 되시는 한분의 모습만을 바라보는 집단적인 아들이 형성된다.
아들의 특징은 자기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아들 되게 하시는 아버지께서 친히 함께 하셔서 우리를 기르시고 계시는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하신다.
가난한자나 부한 자나 주님께서 지으신 것이며 가난을 원망하지 말고 부한 것을 자랑치 말고 항상 주님의 가난과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의 죽기까지 낮아지심을 바라보며 생각하는 참으로 심령이 가난한자 되어야 할 것이다.
인간을 구조 안에서 어떤 혜택이 있는가를 보여주는 증거물로서 존재한다.
즉 구조안의 속성 본질 성질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는 증인으로서만 존재한다.
현대인은 주채로서 구조를 만들려고 하지만 성경에서는 이미 짜인 구조 속에서 누가 합당한 사람이냐를 따진다.
잠언에서는 물의 구조와 불의 구조가 나오는데 물의 구조는 무지개언약 즉 악함에도 불구하고 은총을 주신다는 그 자비의 구조를 이해하면 살아남고 이해 못하면 죽인다는 것이 물의 구조이다.
이미 지혜를 받은 자는 구조속의 성질을 파악해서 그것을 보여주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구조로 되어 있는데 그 구조를 알지 못하고 인간 구조를 의지하는 자는 불의 구조로 다 태워 버린다.
인간의 주체론 으로 이루어진 구조는 흙이며 흙이 아닌 생명의 구조는 지혜로 지어진 구조이다.
하나님의 아들 된 자만이 물과 불의 구조에서 살아남게 되며 오직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 예수님을 통해서 만든 모든 지혜와 창조를 같이 감사하고 고마워하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며 이런 자들끼리 모임 이 모임자체가 천국이며 하나님 뜻이다.
지혜의 노선에서는 지혜자체가 우리를 점령하여 지혜가 걸어간 길을 몸소 우리 일생 속에서 적응하여 동행하면서 겪게 하신다.
이런 구조 속에 놓이게 하여 자신의 죄인 됨의 본질과 하나님의 은총을 알아가게 한다.
잠언 에서는 “너는 사랑 받을 자격이 원래 없어” 라는 것을 일깨워 주면서 너 대신 고생하신 분 때문에 긍휼을 입었다는 것을 강조하는데 이럴 때 자기보다 긍휼을 주신 여호와를 경외 하는데 이것이 영생이며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다’ 가 된다.
지혜는 우리자신이 어떠한 구조 속에 놓여있는지 계속 알려주고 있다.
그 구조를 믿는 자에게는 행복과 기쁨에 살아갈 수밖에 없다.
즉, 불가능성에서 지혜로 인하여 가능성으로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의 구조는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말하고 불의 구조는 천국 삶에 대해서 말한다.
구조론 속에서는 주체론은 사라져야 된다.
이 세상은 인간들에 의해서 자기 마음대로 되는 세상이 아니고 구조에 의해서 되는 세상이며 구조에 의해서 떠밀리게 되어 있다.
이웃 사랑을 누가 시행하느냐 하면 이미 그런 구조에 집어 넣어주신 지혜 자가 나로 하여금 이웃사랑이 무엇인지 몸소 체험케 해서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케 한다.
이것이 지혜의 성취다.
사람은 좋든 싫든 간에 이미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그 구조 안에서 못 벗어난다.
인간은 이미 태어나기 전에 외곽에서 자기가 어찌할 수 없는 그런 구조에 놓인 채로 하나님을 멸시할 자는 멸시하고 경외할 자는 경외 하도록 구조 속에 놓여 살아가게 된다.
즉, 너는 구조적으로 악함 속에 포함이 되어 있고 너는 구조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입게 되어있어 그것을 확인하는 식으로 분류되어 세상이 진행 되어 간다.
복음을 싫어하는 자는 구조적으로 그렇게 자기 본성대로 살아가게 되어있고 하나님의 은총을 사모하는 자는 하나님이 이들로써 지혜자가 그렇게 인도하시니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음을 잠언 에서는 말하고 있다.
성도는 완벽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을 아는 자다.
긍휼을 아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아는 것이요 이것은 주체를 가진 자로서는 불가능성인대도 불구하고 가능 하다는 것은 이미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서의 아들 됨이다는 말이다.
성경구절 하나하나 에는 긍휼로 이끄는 죽음의 힘이 들어 있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했을 때 우리 에게는 생명이 없으며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드려질 때 죽음 안에서 생명 되시는 지혜와 서로 만나는 것이다.
성경에서 음녀는 여호와 언약과 경외함을 잊어버릴 때 음녀라 한다.
보이지 않는 구조가 우리를 지금 지배하고 있다.
결국 미련한 자와 지혜로운 자가 어떻게 도출 되느냐 하면 주위의 관계성으로 들어나는데 미련한자는 주위의 관계를 통해 유감없이 주체성으로 미련함을 들어내고 지혜자는 긍휼로써 하나님을 경외하는 쪽으로 지혜를 드러내는 식의 구조로 되어 있다
미련한 자는 자기 주체성으로 자기 꿈을 갖고 살아가면서 주위에 피해를 주지만 지혜를 받은 자는 누군가의 희생 즉 죽음의 힘에 의해 자기에게 주어진 긍휼과 은혜를 알아가면서 살아간다.
복음을 전함으로 인해서 그 사람 속에 있는 속성이 드러난다.
어리석은 자는 주체적으로 자기 원하는 것을 가지고 신과 직접 연결한다면 지혜로운 자는 구조를 생각하는데 왕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새언약을 믿음으로 은총을 주게 되어 있으며 이러한 구조를 알지 못하는 자가 어리석은 자이다.
다윗 언약에서 피와 죄가 만나야 긍휼(용서)이 되고 다윗 언약의 완성이 된다.
중보자를 한분으로 정하신 것은 자신이 전적 죄인임과 죄인으로 태어남을 알리게 한다.
그 한 통로에는 어린양의 피가 설치되어 있다.
성도는 왜 피가 필요한지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왜 버리셨는지 유일하게 아는 자다.
자신이 죄인 됨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피를 증거 하는 자로 동원되는 것이 성도다.
잠언의 전체 내용은 죄인임이 드러나고 자비(용서)를 베푼다는 것이다.(시51)
“여호와 하시는 일이 우리를 죄인 되게 하시는 군요” 하고 찬양하고 박수치며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슬기로운 자고 그 밖에는 모두 어리석은 자다.
하나님께서 교만한자 어리석은자 건방진자를 슬기로운자로 모으기 위해 그들의 꿈이 깨어지도록 하는데 난데없이 내 힘으로 사는 것이 힘이 들고 구원도 내 힘으로 안 됨을 어느 시점에서 깨닫게 해서 구원은 외부에서 주어져야지 나 스스로 되지 않음을 알게 하는 그런 사태를 일으키신다.
구원받을 행함이 자기포기가 될 때 메시아를 의존하는 그 행함 자기가 깨어지는 이것이 구원받을 행함이다.
성령이 우리 속에 들어올 때 우리의 어리석음을 책망하며 자신을 포기하고 부인케 하면서 주체가 우리가 아니라 주도권을 지혜가 쥐면서 들어오게 된다.
그래서 성도는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며 살아가게 된다.
여호와의 만남은 여호와 쪽에서 내민 지혜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사귐이 얼어난다.
성도에게 있어서 하나님과의 교제가 최고의 선물이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있어서 계시의 전달자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부모를 공경하라 하는 것이다.
아버지는 아버지로 부터 물려받은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아들에게 전해 줌으로 아들다운 아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잠언에서 부지런함은 말씀이나 성경공부에 메이지 않고 일상 속에 모두 하나님의 지혜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에 어떤 일에 부지런해도 그런 일을 통해서 지혜를 느낄 수가 있다.
그리고 그런 일을 만드신 분은 주님이시다 할 수 있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어둠의 세상 자기밖에 모르는 세상 언약이 없는 세상속에 지혜가 들어오면 이 세상이 흉하고 나쁘고 무서운 세상임을 비로써 알게 된다.
아버지로써 아들에게 이런 세상에 처해있는 현실을 보여주면서 그것에 유혹되지 말고 아버지가 전해 주어서 알고 있는 복음이 천하의 어떤 것보다 귀하고 아름답다는 것을 알라 하는 것이다.
잠언의 모든 말씀은 신약에 와서 “주 예수를 믿어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로 함축 할 수 있다.
이근호(IP:117.♡.144.99)
08-09-03 16:03
평신도의 글이 이토록 아름다울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