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강의(08. 8. 22) 1강
광주 강의(08. 8. 22) 1강
이름 : 서경수(IP:116.37.101.23)
광주 강의(08. 8. 22) 40-1
오늘은 디모데전서 3장 15절부터 보겠습니다.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여기에 ‘살아 있다’는 말씀이 있는데, 우리가 알기로는 내가 살아 있고, 이 세상에는 인간만 살아 있지요. 내가 살아 있는 그 외에 다른 것은 살아있지 않다고 그렇게 과학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살아 있는 것들은 인간과 동․식물들. 이것 외에 이 세상에 별이라든지 이런 것은 살아있지 않지요.
그런데 성경에 보니까 우리 인간 말고 또 살아 있는 것이 있다는 거예요.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겁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고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는데 문제는 우리는 왜 이것을 모르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데 살아있는 인간들이 왜 이것을 모르는가 하는 이것이 교회에서의 고민입니다.
‘교회에 와서 세례를 받으라’고 하면 이것은 사람들이 할 수 있어요. 세례 주는 사람이 목사이기 때문에 목사를 통해서 세례를 받으면 됩니다. ‘성찬식을 하라’고 하면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것이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은 못 된다는 것이고 이것이 교회에서의 고민입니다.
더 노골적으로 이야기해서, 천국이 있다고 하는데 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기준에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기준은 다 빼시기 바랍니다. 천국은 있는데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을 다 빼버리면 그 기준 자체가 사람 쪽에서는 성립이 안 되잖아요.
무슨 말인가 하면,
교회가 크면 구원 받습니까?
아뇨.
그러면 테레사 수녀처럼 살면 구원 받습니까?
아니요.
기도원에서 은혜 많이 받으면 구원 받습니까?
아니요.
그러면 도대체 구원 받을 수 있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여기 있고 기준이 저기 있다면 저기 기준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우리에게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에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딤후3:15)라고 했는데, 진리가 아닐 경우에는 교회가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진리를 찾지도 않고 관심도 없어요.
따라서 사람이 없다면 교회가 없어지고 사람이 있어야 교회가 되는데, 교회가 되기 위해서 사람을 끌어 모으려면 진리가 아닌 사람들이 납득이 되는 걸 이야기해야 되는데, 문제는 그 교회는 하나님이 살아계신 곳이 아니라는 겁니다. 구원 받을 수 있는 진리의 기둥과 터가 될 수 없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더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사람들에게 납득이 될 수 있는 구원 받는 기준을 교회에서 제공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이 납득이 될 수 있는 기준을 제공하면 안 돼요. 왜 그러냐 하면, 사람들은 자체가 진리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진리에 관심도 없고, 모르고 살고, 진리 밖에서 살고 있어요.
진리 밖에 있는 사람이 ‘진리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다. 진리에 대해서 알고 싶다.’ 이건 거짓말입니다. 사실은 자기한테 관심이 있어요. ‘내가 죽어서 좋은데 가고 싶습니다.’ 이것은 자기한테 관심 있는 거예요.
전도자: 죽어서 좋은데 가고 싶습니까?
답변자: 예, 가고 싶습니다.
전도자: 그러면 진리에 대해서 알아야 하는데 진리에 대해서 관심 있습니까?
답변자: 그것은 관심 없고 내가 죽어서 천국은 가고 싶습니다. 천국 있습니까?
전도자: 천국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진리가 아니고 천국에 가는 길이 곧 진리입니다.
답변자: 제가 가면 안 되겠습니까?
전도자: 안 됩니다.
답변자: 왜요?
전도자: 당신은 진리에 대해서 이야기해도 거부할 사람입니다.
교회가 사람들에게 제시해야 될 기준은 바로 거부당할 수밖에 없는 그런 진리, 그런 기준만 제시할 수밖에 없어요. 사람들로 하여금 우르르 몰려오는 것을 하늘나라에서는 일체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기준은 절대로 아닙니다.
지금까지 강의한 것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사람들이 좋아하고 즐겨하는 그런 구원받는 기준은 그 자체가 진리도 아니고 엉터리입니다. 결국 뭐냐 하면, 사람들은 기준이 없어서 그냥 ‘넣어 도. 합격시켜 줘. 그냥 천국 들어가게 해 줘.’
윤리, 도덕 속에 뭐가 포함되어 있느냐 하면 인간의 외침이 들어있어요. ‘나, 여기 있노라!’ 날 주목해 달라는 거지요. 올림픽 중계방송을 보면 상당히 재미있는 풍경이 나와요. 자기 나라 응원단이 한 사람도 없어요. 그 나라는 가난해서 중국까지 가서 입장료 지불하고 경기장에 갈 사람이 없어요. 그런데 그 선수가 신기록을 세우고 금메달을 따면 그 선수와 코치 두 사람만 기뻐하고 그 외 관중이나 심판 그리고 상대측 선수나 임원진은 조용합니다. 승리한 선수와 감독 두 사람만 좋아하는 거예요. 너무 경기장 분위기가 썰렁하니까 선수와 감독 둘이 좋아하다가 그 두 사람도 분위기에 압도되어 그냥 기쁨이 식어버려요.
이 세상은 같이 좋아할 때 그것이 기준이 돼요. 그것을 진리라고 합니다. 이 세상의 진리는 함께 즐기고 함께 웃고 함께 좋아할 때 그것이 진리에요. 남들이 자기 좋아하는 것을 안 알아주면 기가 죽어서 그만 둡니다.
윤리, 도덕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내가 이런 가치 있는 존재이니까 알아 달라고 할 때, 남들의 박수소리와 칭찬을 기대하면서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없을 경우에는 윤리, 도덕에 따라 안 삽니다. 남들이 볼 때 해요.
이처럼 모든 기준(천당 가는 기준, 하나님 믿는 기준, 복 받는 기준 등)은 자기가 만들어 내요. 그렇기 때문에 그 자체가 비 진리고 사기입니다. 다 엉터리에요. 사람들은 성경을 읽으면서도 그 순간에 기준을 만들어 냅니다. ‘하나님 성경 열심히 읽으면 천국 넣어 주지요?’ 이런 식으로.
사람의 행동은 반드시 뭔가 기대하는 것이 있습니다. 기대하는 것이 없으면 행동하지 않습니다. 이 기대하고 고대하는 이 자체가 엉터리이기 때문에 모든 행위가 다 엉터리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엉터리로부터 시작에서 엉터리로 끝이 납니다. 여기에서 천당 가는 기준도 만들고 별별 기준을 다 만듭니다. 그러나 다 엉터리지요.
그래서 복음을 아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사람들에게 구원 받는 기준을 이야기해야 되겠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그들이 수용 못할 그 기준만 제시하는 것이 진리의 기둥과 터의 역할입니다.
저는 혼자 생각해 봐요. 어떤 사람이 구원 받은 사람이냐? 구원 받았다는 그 기준이 뭐냐? 전도를 많이 하는 것. 헌금 하는 것. 아닌데. 뭐가 기준인가? 성경에서는 그 기준을 뭐라고 하는가 하면, ‘비밀이거든.’ 이렇게 나와요. ‘감춰진 비밀이거든.’
뭐로 구원 받습니까? 비밀로 구원 받습니다. 너무나 비밀스러운 것. 아무리 사람들이 접근해도 접근이 불가능한 비밀이 우리를 구원 합니다. 이게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비밀이 구원한다고.
비밀이 구원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기준을 제시하는 교회,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한국교회지요. 이것은 교회도 아니고 그냥 놀이동산이지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기준은 감춰진 비밀이 아니기 때문에 교회 다니고 지옥 가는 그런 꼴이 됩니다.
자, 그렇다면 이 비밀은 어디에서 흘러나오는가? 이것에 대해 지금부터 설명을 할 텐데, 이제부터는 여러분들이 신경을 바짝 써야 됩니다.
두 가지를 설명해 드리겠는데, 이 비밀이 왜 사람들에게 납득이 안 되는가 하면, 이 비밀의 내용 구조가 두 가지로 되어 있어요. 하나는 하늘나라의 구조이고 다른 하나는 땅의 구조입니다. 이 하늘의 구조와 땅의 구조가 충돌하는 이것이 비밀입니다.
하늘나라 구조와 땅의 구조가 충돌할 때 생기는 것이 바로 비밀이 됩니다. 땅의 구조라는 것은 인간 마음의 구조입니다. 인간 마음의 구조는 기본적으로 생존에 있습니다. 제가 얼마 전에 글 올린 것 있지요? [불교의 창조론과 구원론]에 대한 글 있잖아요. 거기에 보면 불교는 모든 것이 에너지로부터 시작해서 에너지로 끝나지요. 이게 동양학으로는 기(氣)라고 합니다.
땅의 구조, 사람의 마음의 구조 속에는 힘(또는 에너지)의 배치가 있어요. 나의 가진 힘을 어디에다 저장해 놓고, 내가 또 그 힘을 얻기 위해서 어떤 행동을 해야 하고. 이 마음의 구조 자체가 힘을 끌어 모아서, 외부에 있는 힘이 내 속에 있는 힘이 되도록 자꾸 모으는데, 이 힘이 빠져나가면 아까워하고, 힘이 다시 모이면 축복으로 여기고 이렇게 자꾸 힘을 끌어 모아요.
고대 신화에는 이런 것이 있어요. 힘 = 인격. 힘이 인격이에요. 고대 부족사회에서 그 사람이 얼마나 인격적으로 훌륭하냐 하는 것은 그가 얼마나 힘을 가졌느냐? 힘이 곧 인격입니다. 베이컨은 말했지요. ‘아는 것이 힘이다.’
보세요. 관심사가 힘이잖아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자기가 자립할 수 있고 버틸 수 있는 힘을 모으는 그런 기준점이 있어요. 이게 마음 구조에요. 마음이 결국 행동으로 나오는데, 힘을 모으는 그런 구조가 밖으로 뻗어 나오는 겁니다.
쉬운 예로, 문어가 움직일 때, 문어는 없어요. 문어 발 하나하나 움직이는 그 자체가 문어가 되는 거예요. 죽은 문어는 문어가 아닙니다. 문어가 살아있을 때만 문어에요. 인간은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요. 죽으면 인간이 아니에요. 인간은 자기가 힘을 발휘할 때 인간입니다. 아무개를 호명하면 ‘예’라고 답변하지요. 이렇게 살아서 답변하는 자체가 인간이 됩니다. 그냥 사진 찍어서 걸어놓으면 그것은 인간이 아니지요.
인간이라고 할 때는 뭔가 살아서 움직이는 그 힘의 덩어리. 이것을 인간이라고 하는 겁니다. 실제로 살아있는 사람이 있고, 여기에서 개념을 뽑아내는데 그것을 ‘사람’이라고 하는 거예요. 여기에서 ‘사람’은 언어지요. 이 언어는 항상 추상적입니다. 개념은 추상적인 언어에 불과하고, 사람이라는 글자를 본다고 사람이 아니지요.
추상적 개념은 도로 살아있는 사람을 만나야 이것이 진짜 사람이지 글자는 사람이 아닙니다. ‘전두환’ 이라고 쓰여진 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살인마. 광주 학살의 원흉’ 하면서 막 욕을 합니다. 그런데 전두환이 앞에 있다면 욕할 수 있습니까? 머리 빠지고 늙은 영감이 앉아 있으면 함부로 욕 못하잖아요. 살아있기 때문에. ‘전두환’ 글자는 죽은 것이기 때문에 마음 놓고 욕해도 되는데, 살아있는 사람을 만나면 마음 놓고 욕하지를 못해요.
이명박 대통령을 막 욕하는 사람도 막상 청와대에 초청받아서 대통령 앞에 있으면 황공스러워서 행동을 조심하지요. 이처럼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마음대로 욕해요. 예수는 자기 집 강아지보다 더 못해. 교회에서 피해를 입었거나 하는 사람은 예수를 심하게 욕합니다. 예수는 살아있지 않고 그냥 문자(글자)로만 서로 통용되고 있는, 살아있는 것은 자신이 살아 있고 예수는 살아있는 자가 아니에요.
그런데 진짜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나면 반대가 돼요. 예수님만 살아있고 나는 있으나마나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에 그분 앞에서 내가 살아있다는 말을 한다는 것은 주제넘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비밀로 구원 받는 이것이 기준인데, 하늘나라의 구조가 이 지상의 구조로 들어올 때 여기에서 치열한 싸움이 벌어져요. 그 싸움의 현장에서 피가 튈 때 그 피가 바로 우리를 구원하는 비밀이 된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피가 구원하지요. 하나님이 구원하는 것은 모든 종교에서 다 이야기합니다. 이슬람교, 불교, 기독교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종교가 없는 사람도 ‘오, 신이시여!’ 운동선수들도 신을 향해서 뭔가 주문을 외우기도 하는데, 신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의 이름은 누구나 알아요. 교회 안 다니는 사람도 하나님, 예수님 다 알아요. 우리나라 애국가에도 나오니까.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하나님이든 하느님이든 나오잖아요. 우리가 접근하고 부를 수 있는 신은 가짜에요.
진짜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신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죽을 때 피를 흘렸습니다. 그 피가 구원하는데 사람들은 자꾸 하나님이 구원한다고 해요. 아닙니다. 되도 않은 죄인을 위해 하나님이 죽으셨고, 그 피가 구원의 기준이 되는 겁니다. 피가 기준이 되다보니까 구원 받는 사람들은 그 피 앞에 할 말이 없어요. 왜? 나 때문에 죽었으니까.
사람이 누구에게 잘못해서 피해를 입혔으면 딴 사람에게는 큰소리 쳐도 자기 때문에 피해를 당한 사람 앞에서는 기가 팍 죽어요. ‘저 사람이 내 때문에 고생했다.’ 양심이 손톱만큼이라도 있는 사람 같으면 ‘저분이 나 때문에 죽었구나.’ 하는 것을 알면 기가 팍 죽지요.
예수 믿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 주님의 희생을 안다는 것. 딴사람 앞에서는 큰소리 쳐요. 하지만 예수님 십자가만 생각하면 기가 팍 죽어서 ‘주여, 제가 입이 100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내가 강도고, 창녀고, 도둑놈이고, 살인자며, 10계명은 아예 지킨 적이 없고, 내 힘만 모으는데 평생을 헌신하고 달려온 못난 인간인데 이런 날 위해 피를 흘리시다니요.’
목사가 설교하면서 이런 소리를 해야 됩니다. ‘내 힘 모으려고 예배당 크게 지었는데 이 죄를 어떻게 합니까? 내 노후대책 위해서 믿음도 없는 자들을 세례주고, 세례 받으면 구원 된다, 전도하면 복 받는다고 사기를 쳤는데 이 죄를 어떻게 하지요?’
이런 설교하면 장로들은 어떻게 나올까요? “목사님, 한번만 더 그런 설교하면 교회에서 쫓아내겠습니다.” 사람들은 전부 큰 힘 모아서 성공하려고 교회 왔는데 왜 갑자기 피 이야기를 합니까? 피를 누가 좋아합니까? 아무도 안 좋아해요. 왜? 피는 비밀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피 이야기 듣기 위해서 교회 온 것이 아니잖아요. “기도하면 너희에게 힘을 줄 것이다. 금메달 딸 것이다.” 이런 소리 듣기 위해 교회에 왔지, 피 이야기 들으려고 교회 온 것이 아닙니다.
교회뿐만 아니라 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절에 왜 갑니까? 옛날 교회가 없을 때, 불교가 국교일 때 사람들이 왜 절에 가서 빌었습니까? 서산대사가 임진왜란 때 부처의 힘을 빌려 나라를 지키려고 했는데, 다 힘을 얻으려고 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조상 제사를 왜 드립니까? 제사를 드림으로 말미암아 죽은 조상의 덕을 보자는 겁니다. 힘을 모으겠다는 것이지요.
힘이 구원의 기준이고, 힘이 있으면 구원 받은 것으로 믿는 이런 생존의 구조에, 하나님이 위에서 하늘나라의 구조, 죄인을 위해서 의인 되시는 주님이 죽어야 된다는 이런 말씀, 이것이 디모데전서 3장 16절에 나옵니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다른 말로 하면 사람 경건이 아니고 큰 경건, 그러니까 하늘나라에 속한 경건. 이것은 지상에서는 아무리 애써도 모릅니다. 왜? 하늘의 경건은 너무나 크기 때문에 지상에서는 발각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이런 하늘의 구조가 천장 내려앉듯이 내려앉으니까, 우리 인간들이 생각하는 것 말고, 내가 고대하고 기대했던 힘이 아니라 큰 경건, 엄청난 하나님의 의와 진리가 위에서 쏟아지는 거예요.
2장 5절에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라고 했는데, 왜 중보자가 있어야 됩니까? 그 이유를 한 번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가 정성을 다하고 열심을 내면 되지 왜 중보자가 따로 있어야 돼요?
중보자 없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중보자가 있어야 돼요. 중보자가 왜 있는가? 우리가 얼마나 못났는가를 일깨워주기 위해서 중보자가 있는 거예요. 네 힘으로 구원이 안 된다는 것을 일깨워주기 위해서 중보자가 있는 겁니다.
히브리서에 보면 그 중보자가 바로 하나님의 집에 아들이고 모세는 종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3장 5절에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사환은 주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그의 집을 맡은 아들로 충성했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관심사는 우리가 지상에서 힘을 모으는 이 땅의 관심사가 아니고 하나님의 집은 따로 있어요. 그런데 그 집은 지상에서 사람들이 기준점을 찾아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고, 위에서 무너지듯이 덮쳐 와야 돼요.
아파트 지어놓고 분양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집은 위에 있어요. 위에 있는 구조가 지상에 그냥 뭉개고 내려와야 합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원하는 기준점으로는 그 집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진리나 비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마음의 구조 자체가 힘으로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힘으로 살아가는 인간이 하루아침에 힘을 버린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인간은 본성대로 삽니다. 그 본성 안에 죄가 들어 있고 본성대로 그냥 죄를 지으면서 살아갑니다. 죄 짓기에 바쁜 인간이 언제 진리에 대해서 관심이나 둡니까? 안 두지요.
인간이 말하는 진리라는 것은 힘을 모으는 것입니다. 죄가 됐든 뭐가 됐든 힘만 챙기면 그게 진리가 되는 거예요. 금메달 딴 사람 중에 자기는 고생 안 하고 금메달 땄다는 사람 없습니다. 고생해서 금메달 땄다고 합니다. 이게 거짓말입니다. 자기보다 더 고생하고도 금메달 못 딴 사람이 많이 있어요. “금메달 딴 것은 운입니다.” 이렇게 말해야 정답입니다.
운이란 말은 금메달, 은메달이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고등학교 때 전교 1등 한 학생이 입시를 앞두고 아버지 사업이 망해서 수능시험을 망쳤어요. 그런데 늘 학교에서 자기를 못 이겨 애타하던 친구는 서울대 법대 수석으로 입학했습니다. 그 후 자기는 중소기업에 취직해서 평범한 세일즈맨으로 일하고, 자기 친구는 변호사가 되었어요.
왜 하필 입시를 앞두고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고 몸이 병들어 병 수발하게 되었으며, 그것으로 인해 시험을 망치는 일이 벌어져야만 했습니까? 철없는 아가씨는 말합니다. “아버지, 왜 저는 쌍꺼풀 없이 태어나게 했습니까? 저는 왜 키가 작습니까?” 라고. 쌍꺼풀과 큰 키가 힘이 되기 때문에 원하는 겁니다.
이런 세상에 우리가 태어났습니다. 이런 사고방식으로 천국을 가요? 그러면 천국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천국에 가려면 천국의 구조에 합당해야 돼요.
이슬람교의 천국과 성경의 천국의 차이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간단합니다. 이슬람교의 천국은 지상에서 원하는 힘이 천국에서도 그대로 보장이 되는 거예요. 이게 이슬람교의 천국입니다. 지상에서 힘을 원했잖아요. 잘 먹고, 잘 살고, 높은 지위를 원했잖아요. 그러면 그것이 그대로 천국에서 성취되고 보장되고 완성되는 것이 그들의 천국입니다. 그러니까 일종의 보험 상품이죠. ‘월 9,900원 내면 나중에 죽으면 1,000만원 받는다.’ 그래서 이슬람교에서는 많은 구제를 해야 돼요. 그래야 납입금이 모여서 나중에 천국에서 목돈 타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천국은 이 지상에서 어떤 것을 생각하든 ‘그것은 다 죄였습니다.’ 라는 것을 예수님의 대신 죽으신 그 피를 통과해서 깨닫게 되고, ‘이런 죄인을 구원하는 것은 예수님의 공로입니다.’ 라는 고백이 나오는 그 상태가 바로 천국입니다.
얼마나 다릅니까? 이슬람교의 천국은 지상과 똑같아요. 지상과 하늘이 서로 내통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의 천국은 지상과 완전히 단절되어 있습니다. 피로써 단절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장담합니다. 지금 우리가 불교 영향권에서 교회가 들어왔기 때문에 불교 같은 기독교가 되었지만, 만약 이슬람교의 영향권에서 교회가 들어왔다면 이슬람교와 같은 교회가 만들어졌을 겁니다.
아프리카나 중동 지역, 말레지라, 인도네시아 전부 이슬람 문화권이거든요. 중국에서 데모 하는 그쪽도 이슬람권이고. 불교의 교리는 모든 것을 해체시키기 때문에 뭔가 가질 게 없기 때문에 기독교가 들어오니까 죽어서 좋은데 가겠다고 하지만, 이슬람교 같으면 이 땅에서부터 죽어서까지 좋은 것으로 채워지니까 기독교가 들어올 틈이 없지요.
죄를 지적하는 기준이 바로 비밀로서의 피 입니다. 예수님의 피만이 우리의 죄를 알 수 있게 합니다. 예수님의 윤리와 도덕은 죄를 지적할 수 없어요. 왜 그런가 하면,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해도, ‘앞으로 우리가 잘 할게요.’ 이렇게 나오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흘린 피가 우리를 구원하지 예수님의 산상설교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산상설교는 하나의 잔소리로 들릴 뿐이지요. ‘앞으로 잘 하면 될 것 아닙니까’ 하면서. ‘마음속으로도 간음하지 말라.’ ‘예, 알겠습니다.’
교회에서 목사가 설교를 하면 사람들은 자기가 납득이 되는 것을 골라잡는데, 피만 나오면 그것은 다 피하고, 피 말고 다른 기준 ‘열심히 순종하세요.’ ‘예, 순종하겠습니다.’ 하고 알아들어요. 수상하지요? ‘예배 시간에 지각하지 마세요.’ ‘예, 알겠습니다.’ 이런 것들은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 하라. ~ 하지 말라.’는 것은 잘 듣고 순종하는데, 피만 나오면 못들은 것으로 외면해 버립니다.
제가 10년 넘도록 강의를 계속해 오고 있는데, 외부에서 ‘이근호 목사가 주장하는 것이 뭔데?’ 물으면, 사람들이 답변을 제대로 못해요. ‘이근호 목사는 이것을 이야기하더라.’ 라고 딱 꼬집어 지적을 해야 되는데 지적을 하지 않아요. 대신 무슨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자기만 주의 종이래. 십자가마을에만 구원이 있대.’ 이렇게 나와요. 내가 전혀 이야기하지 않은 것을 자꾸 이야기해요.
왜 이런 식으로 나오는가 하면, 그들은 관심사가 교회에 있기 때문에 우리 공동체도 공동체고 우리 교회도 교회로 인정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제가 제시한 기준 ‘피’는 차마 말을 못해요. 그걸 빼고 들었기 때문에. 아예 그런데는 관심이 없어요.
만약에 제가 얘기한 ‘피’를 진지하게 들은 사람 같으면 두 번 다시 ‘우리도 교회다. 우리 공동체도 인정해 다오.’ 이런 소리가 안 나옵니다. 왜냐하면, ‘피’는 내가 그동안 공동체니 뭐니 주장했던 그 주장이 전부 다 내 힘을 끌어 모으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음이 폭로되고, 이런 것들이 ‘피’ 앞에서는 다 죄가 되거든요.
정리를 해보면, 교회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기준을 제시하면 안 돼요. 왜냐하면, 그 교회 자체가 ‘진리의 기둥과 터’기 때문에, 이것을 포기하려면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이야기해야 되고, ‘진리의 기둥과 터’가 되려면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참 경건의 비밀, 예수님의 피, 왜 우리 힘으로 안 되고 중보자가 있어야 하는가를 이야기 해 줘야 돼요.
제가 주일날 이런 소리 했어요. 예배시간에 태풍이 불어서 예배당 지붕이 날아가 버렸어요. 그러면 남는 것은 뭐가 있습니까? 예배당 없어지니까 사람들만 남지요. 이 사람들 왜 모였습니까? 교회 오기 위해서. 그러면 교회가 날아가 버렸는데. 무엇 때문에 모였습니까? 예배당이 날아가 버렸는데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낚시 동호회인지 골프 동호회인지 분간이 안 되잖아요. 분간이 안 되는데, 예배당에 나온 무리들하고 다른 무리들이, 예배당 건물 빼놓고도 뭔가 차이점이 있어야 됩니다.
그 차이점이 뭘까요? 한쪽은 즐기고 재미를 위해서 모였지만, 예배당에 모인 사람들은 ‘나는 바로 죄인입니다.’ 나는 어떤 행동을 하든지 나 잘났음을 증명하는 식으로 살았는데, 날 변호한다는 자체가 왜 엉터리가 되는지, 나는 아직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옹호하는 것이 왜 죄인지, 예수님의 그 십자가 복음 앞에서 ‘아하, 내가 죄인 맞구나. 그러니까 예수님이 피를 흘렸지.’
그래서 사도행전 20장 28절에 ‘하나님의 피로 사신 교회’가 되는 겁니다. 예배당 지붕 날아가도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알고 예수님의 피를 바라보면 이것이 바로 살아있는 큰 경건, 이것은 지상에서 찾아볼 수 없는 비밀로서의 큰 경건을 갖고 있는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가 되는 겁니다.
00 집사님 막대따님이 피곤해 하시기 때문에 조금만 더 하고 쉬겠습니다. 하루 종일 힘 모은다고 얼마나 피곤했습니까?
선지자들의 특징이 뭐냐? 이 그림을 잊지 마세요. 비밀을 한 글자로 하면 뭡니까? 피. 하나님의 뜻이 뭐냐고 하면, 레위기에는 1장부터 피가 나와요. 제사 드리기 위해 제물을 잡잖아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냐 하면 피만 받으시는 하나님이에요. 간단하지요. 하나님은 피만 받습니다. 우리의 정성은 안 받습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드린 그 제물의 흠 없는 피만 받아요.
여러분이 신앙생활 몇 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지난날의 모든 것들은 다 잊어도 좋습니다. 이것 하나만 기억하세요. ‘우리 하나님은 흠 없는 피만 받는다.’ 이것만 알아도 구원 받습니다. 선지자들이 이런 이야기를 해요.
하나님은 다른 것은 일체 거절하고 피만 받습니다. ‘언약의 피’지요. 피를 보고 살려줍니다. 하나님은 드라큘라 같아요. 피만 보고 좋아합니다. 그런데 이 선지자의 운명이 고정된 것이 아니고 피가 생기는 곳을 가는 움직이는 운명입니다. 이것을 ‘유동성’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은 힘을 모읍니다. 이렇게 되면 이것은 ‘고정성’이 됩니다. 우리교회 김대식 형제님이 십자가마을 게시판에 “목사님들은 반드시 숙제 해 주시길” 라고 하면서 영화를 올려놓았잖아요. 그 멘트를 보면 얼마나 목사들이 보기에 시건방진지. 자기가 노회장도 아니고 총회장도 아닌데 ‘이 영화에 대해서 평을 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존경하는 목사님들’ 이렇게 나와도 영화를 볼지 말지 모르는데 “반드시 숙제하시기 바랍니다.” 학교 졸업하고 숙제가 없어서 편하게 사는데 어른이 되어서 갑자기 누가 숙제를 하라고 하니 원.
십자가마을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또 이런 것으로 시비를 걸 거예요. “봐라. 성도가 이근호 목사 빽 믿고 건방지게 목사들한테 하라고 명령을 하고.” 이렇게 나올 거예요. 어쨌든 김대식 선생님이 숙제라고 냈는데, 윗사람이 숙제를 냈으니까 아랫사람들이 숙제를 해야 될 것 아닙니까. 말 안 들으면 ‘이근호 목사 교만하다.’ 이런 소리 들을 것이고, 윤리적으로 비난을 받으면 내가 힘을 모으는데 힘이 없어지잖아요.
윤리란 것은 ‘내가 여기 있다.’는 외침. ‘봐, 나 착하잖아!’ 하는 자기 외침이거든요. ‘나 봐라 가치 있는 인간이잖아.’ 하는 외침이라고요. 윤리, 도덕이란 게. 이 사회에서.
그래서 그 영화를 보니까 영화가 괜찮아요. 잘 만들었어요. 그 영화에 목사가 나오는데, 목사가 찌질이지요. 요즘 말로 ‘찌질男’(지질이도 못난 남자)이죠. 교인이 달랑 7명인데, 중국집 배달하는 청년, 할머니, 아이와 장애인, 목사님 사모님과 딸. 7명인데, 중국집 배달하는 청년은 목사가 중매해 준 여자가 작은 교회 가기 싫다고 해서 큰 교회로 가버리고, 딸은 친구의 요청으로 큰 교회 가고, 사모님은 보험 영업을 하는데 마치 계약자가 주일날 만나자고 해서 계약자 만나기 위해서 가버리고, 예배 참석한 사람은 달랑 3명입니다. 목사까지 하면 4명이죠.
자, 이 비참한 현실. 그런데 강원도에서 300명 모이는 어떤 교회에서 오라고 하는데 안 가고 하는 그런 내용입니다. 그 영화를 보면, 교회라는 것이 유동성이 아니고 하나의 고정성이라. 그러니까 결국은 ‘내 교회’라는 인식. 내가 여기 고정적으로 있잖아요. 나를 위해 꾸미는 것, 예배당을 치장하는 것. 이런 것이 있으면 그 사람은 그 자리에 머물러 있어야 해요.
선지자는 자기 것이 뜯겨 나가고, 꾸미는 것이 아니고 찢겨 나가요. 자기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얼마나 가식적이고 위선자인지. 하나하나 주님의 성령의 태풍이 불어서, 태풍 불면 지붕 날아가고, 유리창 깨지고 다 날아가잖아요. 성령이 오게 되면 내가 가지고 있던 가식적인 것, 윤리, 도덕 이런 것들이 다 깨지고, 남는 것은 장차 오실 메시야가 희생당할 그 피의 자리에 합류를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선지자는 유동성이에요. 그런데 그 영화를 보게 되면 목사는 뭐냐? 나의 교회, 고정적인 내 성도가 없어서 ‘찌질남’으로 나온단 말이지요. 내가 여기 있다는 이유 때문에 나를 꾸밀 수 있는 화려한 저택이라든지 좋은 직장이라든지 고급 승용차라든지 현재 나를 고정되게 할 수 있는 이런 많은 꾸미는 것들, 나를 화려하게 드러낼 것들을 끌어 모으므로 고정성에 점점 더 집착하게 되지요.
그런데 선지자는 자기의 것이 점점 더 떨어져 나가요. 엘리야의 경우에는 다 떨어져 나가고 나중에는 자살하려고 했습니다. 요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것도 내 것이라고 고정된 것이 없어요. 다 뜯겨 나갔어요. 심지어 자기 목도 자기 것이 아닌 사람이 있었어요. 세례 요한. 횟집도 아니고, 생선 대가리도 아니고 세상에 사람 목이 쟁반에 담겨서 그렇게 죽을 줄 누가 알았어요. 세례 요한이 평소에 이런 사실을 알았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자기 몫을 챙기는 것이 아니고, 나도 남들처럼 가지고 싶고 내 것이라고 할 것들을 갖고 싶은데, 뭔가 나로 하여금 움직이게 만드는 그 하늘의 경건의 힘, 하늘의 비밀. 그 힘에 의해서 선지자는 유동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머물지 않고 흘러가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교회 수련회 가서도 했고, 서울 강의에서도 했는데, 광주에서도 이것을 하고 5분 쉽시다. 컵 좀 가져오세요. 목사님은 보셨지만 다른 사람은 힘 모으다가 바빠서 못 봤으니까.
컵이 이렇게 있으면, 우리는 빈 그릇이고 주께서 주신 비밀이 있어요. 비밀을 우리는 (컵의 물을 다른 곳으로 부으면서) 이렇게 유동적으로 흘려보네요. 이게 뭐냐 하면, 바로 하나님의 의와 사랑입니다. 유동적이에요. 남에게 주기 위해서 흘려보냅니다. 그러나 나는 항상 빈 그릇이 됩니다. 서울에서 많이 했기 때문에 여기서는 이 정도로만 하겠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고정적이 아니고, 힘이 와요. 오지만 이 힘은(이 경건의 힘은) 남에게 주기 위한 힘입니다. ‘나 구원 받았다.’ 이게 아니라 흘려보낼 때 구원 받은 사람입니다. 내 것도 아닌 것이 하늘에서 주어졌다. 그래서 내 것이 아니기에 당신께 드립니다. 뭘? 이 피를. 하늘의 경건의 비밀을 드립니다. 나는 하나의 전달자(매개체)에 불과합니다.
재산이 얼마냐? 그것은 구원 받는 기준이 아니에요. 신앙생활 몇 년 했는가 하는 것도 기준이 아닙니다. 네 안에 무엇이 흐르고 있는가? 예수의 피가 흐르기를 바랍니다.
(2008. 9. 1. 15:33 녹취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