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칠곡강의(뒤에서본한국교회)05-출애굽기3(강의정리)
04칠곡강의(뒤에서본한국교회)05-출애굽기3(강의정리)
이름 : 구득영(IP:203.223.97.201)
04칠곡강의 [뒤에서 본 한국교회] 05 - 출애굽기3
04,05,29 강의: 이근호 목사, 정리: 구득영
◈ 출애굽기 17장에 웬 전쟁이 !!
오늘은 먼저 출애굽기 17장을 하겠는데, 이것을 그림으로 설명하자면, 지금 모세가 산 위에 올라가서 이렇게 기도를 하고 있고, 또 산 아래에서는 여호수아 장군이 이끄는 이스라엘 군대가 아말렉 군대와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참으로 이상한 현상이 벌어지는데, 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패배하느냐는 것이, 산 아래에서 열심히 싸우는 군사들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산 위에 있는 모세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말이다. 모세가 오른 손에 지팡이를 들고 손을 들고 있으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고 있으면 지고 말이다. 그래서 아론과 훌이 모세의 손을 바쳤다는 것이다.
(출 17:9)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꼭대기에 서리라
(출 17:10) 여호수아가 모세의 말대로 행하여 아말렉과 싸우고 모세와 아론과 훌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출 17:11)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출 17:12)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로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하나는 이편에서 하나는 저편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 하나님의 전쟁은 인간의 솜씨와는 무관 !!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까, 이 전쟁은 사람의 전쟁 솜씨와는, 즉 사람의 전투능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우리가 바로 이 세상에 살면서, 그리고 교회생활을 하면서 '신앙' 이라는 이름으로 수용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하고 교회에 잘 다닌다는 사람들이 가장 잘 빠지는 유혹이 무엇인고 하니까, "목사님, 제가 이런 나쁜 짓을 했으니 벌을 받겠지요" 라는 것인데, 교회에서 겸손하라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물론 자기 속에 들어있는 "착한 일을 했으니 복을 받겠지요" 라는 것은 이야기하지 못하고 말이다. 그렇게 반대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것이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이것이 세상을 알아 가는 자녀교육의 차원에서는 맞을지 몰라도, 그러나 신앙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도 이 세상중심이고, 상식적인 사고방식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한번 더 강조하지만, 신앙이란 인간의 전투력이나 그 어떤 수완과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것이 인간의 윤리 도덕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 그런데 "내가 이런 나쁜 짓을 했으니 벌을 받겠지" 라고 한다는 것이다.
◈ 누가 누가 착한가?
얼마나 신앙이 없으면 여전히 자기의 능력이 수완을 가지고, 즉 자기의 거룩으로서, 소위 '성화' 라는 것이 얼마나 우리 인간의 마음을 깊숙이 차지하고 있는지, 그래서 '착한 사람으로 살기 대회'를 그렇게 지금도 열심히 벌이고 있다는 말이다. 이런 것이 성경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데, 그런데 여기에다 온통 신경을 다 쓰면서 살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일이란 것은 무엇인가? 이렇게 산 위의 모세와 산 아래의 여호수아가 대비되는 것은, 인간들의 열심과는 하나님의 일은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것을 보다 더 분명토록 하도록 위해서 이렇게 아말렉과 전쟁을 벌리고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전쟁을 특별히 좋아해서 벌리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 예수님의 전투와 우리 전투의 가장 큰 차이점은?
그렇다면 이 전쟁은 도대체 누가 하는 것인가? 인간의 열심과 또 전쟁 능력과도 상관이 없고 말이다. 신약에서 이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하심인데, 즉 예수님께서 전투를 하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전투와 우리가 하는 전투의 가장 큰 차이점이 무엇인가? 이것이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인데, 잘 한번 들어보자는 것이다.
우리 인간들이 생각하는 전쟁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선으로서 악을 이기려고 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예수님의 경우에는, "누가 예수님의 용서하심의 그 사랑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 라는 싸움이라는 것이다. 즉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행하신 그 공로, 즉 그 의로움을 받아들이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싸움이라는 말이다.
◈ 어느 빈대떡 아주머니의 울분 !!
쉬운 예를 하나 들자면, 여기에 이렇게 빈대떡이 있고 또 이 빈대떡을 만드신 아주머니가 앉아있다고 한다면, 그런데 이 빈대떡을 그냥 공짜로 먹는 사람이 한다는 말이, 자기가 지금 이 빈대떡을 얼마나 맛있게, 꼭꼭 씹어서 매너 있게 흘리지 않고 먹는지, 물론 손도 잘 씻고 말이다. 그런 자기 행동에서 나오는 것을 가지고 자랑을 하더라는 말이다. 그러니 이 빈대떡을 만든 아줌마가 얼마나 화가 나던지, "아니 도대체 이것을 누가 만들었는가?" 라고 고함을 지르더라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오늘날 교인들이 교회에 나와서 하는 것과도 너무나 똑같은데, 자기가 얼마나 예배를 잘 드리고, 또 찬양을 아름답게 잘 하느냐를 가지고, 그것이 마치 믿음이 좋은 것처럼 여기는, 꼭 그런 양상이라는 것이다. 즉 자기 착함과 자기 진실함과 정의로움에 그만 자기가 도취되어버린다는 말이다. 소위 '자아도취'에 빠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들끼리의 싸움이고, 진짜 영적인 싸움은 따로 있는데, 이런 영적 싸움을 하는 사람들은 "이것은 제가 만든 것이 아니라, 만드신 분이 따로 계십니다" 라고 고백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것을 인정할 때, 그것을 두 글자로 '믿음' 이라고 하고 말이다.
◈ 하나님의 전쟁에 이스라엘은 들러리로 !!
그러므로 출애굽기 17장에 나오는 아말렉과의 전쟁에 있어서, 이 아말렉은 이스라엘의 적이 아니라, 사실은 이들은 정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적으로 등장했다는 말이다. 즉 하나님의 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적에 대해서, 즉 하나님께서 그들과 벌리는 전쟁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들러리로서, 그렇게 남의 전쟁에 동원된 것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자기들의 전쟁이 아니라 말이다.
모세의 지팡이가 가진 어떤 지팡이인고 하니까,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기 위한 지팡이인데, 그러므로 하나님의 언약에 의하면 아말렉 같은 놈들은 패배를 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구조를 알려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런 희한한 방법으로 '지팡이 전쟁'(?)을 하셨다는 말이다.
그러니 비록 우리의 원수는 아니라고 해도 하나님께서 바라보는 원수는 따로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전쟁에다 우리를 집어넣으셨는데, 그래서 우리는 자기의 전쟁 솜씨나 지혜나 착함이 아니라, 그런 우리의 능력과는 전혀 상관없이 적은 자기 정체를 밝히면서 패배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 현장에 우리가 놓여있고 말이다.
◈ 다시, 정리하자면 !!
다시 정리해보면, 왜 모세가 지팡이를 들었을 때 승리하는고 하니, 이 아말렉이라는 적은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붙여준, 그렇게 하나님의 원수로서 우리에게 붙여주셨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우리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기 자신밖에는 모른다는 말이다.
그런데 창세기 3장에 의하면, 우리는 이미 태어날 때부터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과의 싸움에 걸려들었다는 말이다. 사실 우리들은 시집가고, 장가가고, 아이들을 키우고, 사업을 하고, 그렇게 자기밖에 모르면서 바쁘게 살아가는데, 그런데 그게 전부가 아니라 또 다른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 우리에게는 승리의 법칙이 없어 !!
그리고 이것이 중요한데, 이 진짜 전쟁에서 승리하는 법칙은 무엇인고 하니, "너희들은 아니야" 라는 것이다. 즉 우리 자신에게는 전쟁에서 승리하는 법칙이 없음을 알고, 오직 예수님의 공로만을 기억하면서 전쟁에 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이러한 예수님의 공로를 무시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이 모두가 다 뱀의 후손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예수님의 공로를 받아드리면, 그 사람이 전에 어떤 짓을 하면서 살았든지 간에 전혀 상관없이 모두가 다 천국의 자녀가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행함과 상관이 없이 예수님의 적들이 있고, 바로 거기에 우리가 불려왔다는 말이다.
이렇게 우리네 인생은 우리의 생존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를 부르신 예수님의 명예와 공로와 관련이 있고, 그 예수님의 공로와 관련된 전쟁터에 지금 우리가 나와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남들보다 잘 먹고 잘 살아가는 전쟁이 아니고 말이다.
◈ 이스라엘은 오합지졸인가? 하나님의 군대인가?
그래서 이스라엘을 뭐라고 하는고 하니, '하나님의 군대' 라고 한다는 것이다. 분명히 오합지졸인데, 그런데 애굽에서 나오자마자 하나님께서는 일방적으로 '여호와의 군대'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도 역시 그렇고 말이다. 아니, 이것이 무슨 여호와의 군대의 모습인가? 총이나 칼도 하나 없이, 그저 자기밖에는 모르고, 또 모여서는 매일같이 돈 자랑, 자식자랑이나 잔뜩 늘여놓는데 말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자기 솜씨를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예수님의 공로만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무엇을 하는고 하니까, 예수님의 공로를 인정하지 않는 자들과 청군과 백군으로 나누듯이 그렇게 편을 나우어서 전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한 쪽은 예수님의 공로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이고, 다른 한 쪽은 예수님의 공로도 좋지만 인간의 행함도 있어야 된다고 하는, 즉 악마의 자식들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마귀가 왜 이렇게 인간의 행함을 강조하는 짓을 하는고 하니, 어떻게 하든지 예수님과 멀어지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 날마다 십자가를 생각하는 인간이어야 !!
그러니 우리가 날마다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저 십자가가 왜 저런 나무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는가?" 라는 것을 제대로 기억해야만 하는데, 그것은 바로 이 세상은 이미 심판의 대상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비참하게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다는 말이다.
어떤 분이 십자가 마을에 '천국에 대해서' 라는 글을 올려놓았기에 리플을 했는데, 아모스에 의하면 천국은 깜깜한 날이고 통곡의 날이고 절규의 날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좋다고 하는 천국이 왜 그러한 모양인가? 어둡고 통곡소리가 나고 말이다. 바로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퇴출을 당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렇게 이 세상으로부터 무가치하다고 추방을 당했는데, 그런데 그렇게 추방을 당한 예수님 안에 천국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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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판을 위한 천국 ]
(2004,5 이근호) - 십자가 마을에서
천국은 심판하는 행위인 것을 아셔야 합니다.
천국은 깜깜한 날이요, 절규와 통곡의 순간이요, 파멸시키는 힘으로 다가옵니다.
무엇을 겨냥해서 심판할까요?
인간들이 머리 위에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천국의 낭만을 향하여 진노하십니다.
인간들의 천국이 예수님을 죽였고,
인간들의 천국이 오늘날 교회를 만들어내었습니다(주일학교도 만들어 내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세상을 다시 보세요.
그렇다면, 천국이란 곧 이 땅에서 지옥을 경험하는 사람의 세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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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국은, 이 땅이 곧 지옥임을 철저히 느끼는 자들만 !!
그러니 예수님처럼 발길질을 당하고 쫓겨나는 사람들 속에만 천국이 있는데, 즉 이 땅이 곧 지옥임을 철저히 느끼는 사람들만이 천국의 백성이라는 것이다. 이 땅은 유황불로서 도배될 수밖에는 없다는 사실을 구구절절이 느끼는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세상을 바라보고서, "참 좋다. 기다려라, 내가 간다" 라고 하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추방당한 이유를 깜박 잊어버렸거나, 아니면 전혀 도외시하는 사람들이라는 말이다.
제가 이 '심판을 위한 천국' 이란 글을 쓰고 난 뒤에, 제 글이지만 여러 번 읽었는데, 그러니까 갑자기 사명감이 우르르 몰려오는데, 이 복음을 전하는 일이 그 얼마나 중요한지 말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성질을 부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러나 그것보다 이 세상에서 빠져 나오라는 소리를 질러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도 자기의 성깔대로 지르겠지만 말이다.
그러니 인간이 천국에 가고 싶다는 것은, 그야말로 웃기지 말라는 것이다. 그곳은 바로 지옥이라는 말이다. 진짜 천국은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의 의미를 아는 자만이 들어가는 것이지, 그 이외는 전혀 해당사항이 없다는 것이다. 어떻게 십자가도 모르고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인가? 저는 전혀 받아드릴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이 세상에서 추방당하신 예수님을 말이다.
◈ 이스라엘은, 無에서 有로 새롭게 창조된 나라 !!
다시 이 아말렉과의 싸움을 이야기해보면, 이 부분은 쉽게 이해가 되지 싶은데, 여기 산 위에 모세가 있고 밑에는 아말렉 군대가 있는데, 바로 이 아말렉이 있는 자리가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세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아말렉 옆에 있는 이스라엘은 원래가 없는 나라인데, 그런데 어린양 때문에 새로 생긴 나라라는 것이다. 즉 무(無)에서 유(有)로 새롭게 창조된 나라가 곧 이스라엘이고, 이 이스라엘이 아말렉과 전쟁을 붙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들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아니 우리가 언제 하늘나라의 백성이 되려고 했었는가?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를 받는 순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래서 전혀 끊어지지 않는 사랑의 끈으로서 묶여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 '붙이시매 전쟁'을 위해 !!
그렇게 꽁꽁 묶여서 무슨 일을 하는고 하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대해서 시큰둥한 사람들에게, 즉 "예수만 잘났느냐, 공자도 있고 석가모니도 있다" 라고 하는, 바로 그들에게 하나님은 먼저 믿는 자들로 하여금 붙여서 전쟁을 벌려나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붙이시매 전쟁' 이라 하고 말이다. 바로 이것이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의 위상이고, 또한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의 사명이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 라는 것이다. 너무 간단한가? 그러면 제가 왜 처음부터 이렇게 하나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말을 하지 않았는고 하니, 기존 교회에서 '임마누엘'이 어쩌고 하면서 귀가 시리도록 사용해서 그렇다는 말이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함께 계신다" 라는 것을 너무 엉터리로 함부로, 온갖 좋은 소리를 다 갖다 부쳐서 한다는 말이다. 심방을 가도 "이 가정에 임마누엘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길 믿습니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두려워 말라. 너희와 함께 하시리니" 라는 구절도 마구 써먹고 말이다. 그러니 교인들이 이제는 이런 말에 세뇌가 되어서, 함께 하시면 무조건 좋고 괜찮은 것으로 여긴다는 말이다.
◈ 성도란, 예수님의 고난이 넘치는 자 !!
그런데 정작 성경에서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 라는 의미가 무엇인고 하니까, 다른 것이 넘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이 나에게 넘친다" 라는 것이다. 그분의 십자가 고난이 말이다. 여기서 고린도후서 1장 5절을 한번 살펴보자.
(고후 1: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그러므로 성도가 무엇인고 하니까, 자기는 가만히 있는데 그리스도의 고난이 마구 넘친다는 것이다. 마치 파도가 넘치고 넘치듯이 말이다. 즉 "너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신다" 라는 것인데, 그러면 우리는 "아이쿠, 감사합니다. 웬 축복입니까?" 라고 하는데, 정말로 그것이 인간들이 생각하는 그런 축복이겠는가?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에 받는 그 고난은 바로 이 세상이 예수님에게 주는 고난인데, 하지만 그것은 예수님만이 당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도 동일한 고난이 닥쳐온다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그것을 축복이라고 하고 말이다.
그래서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뭐라고 하는가? "이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한 것처럼 그 제자들도 미워한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당하는 것을 두고서 너무 섭섭하게 여기지 말라는 것인데, 만약에 스승이 당했다고 한다면 그 제자들도 당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요 15: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 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그러니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마치 주부가 마트에 가서 마음에 드는 상품 하나 골라서 장바구니에 넣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것이 신앙이 아니라, 자기는 가만히 있는데 난데없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졌던 바로 그 고난이, 어떻게 자기를 알아보고는 마치 바다의 파도가 넘치듯이 그렇게 넘쳐서 자기를 삼켜버린다는 것이다.
◈ 고난과 함께 넘치는 위로 !!
이렇게 십자가의 고난이 가만히 있는데 넘쳐온다면 우리는 엄청난 좌절을 겪게 될 것이 뻔한데, 그렇다면 과연 이 고난을 자기 자신의 힘으로 이길 수 있는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고린도후서 1장 5절 끝에 보면 뭐라고 하는가? "위로도 함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친다" 라는 것이다. 놀랍게도 고난만이 아니라 위로도 함께 말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바로 진짜 기적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돈으로 이길까, 건강으로 이길까, 아니면 나의 착한 일로 이길까?" 라고 하면서, 그렇게 전전긍긍하면서 살아가고 있는데,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은 역시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위로로 말미암아서 이긴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의 사랑으로 말이다. 그래서 "아하, 십자가가 바로 천국이구나, 구원이구나, 사랑이구나, 용서이구나"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라면, 당연히 자식으로 위로 받고, 돈으로 위로 받고, 사업이 잘되어서 위로 받는 것이 아니라, 아마 교회에 이런 사람들이 99.99%이지 싶은데 말이다. 하지만 성도는 누가 뭐라고 해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위로를 받는다는 것이다. 이 세상의 위로가 아닌 그리스도의 위로를 말이다.
◈ 토요일에 우는 남자 !!
그래서 제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토요일에 좀 많이 울었는데, '심판을 위한 천국' 이라는 글을 쓰고 나서 말이다. 왜냐하면 너무나도 좋아서, 심판이 있다는 것이 너무 너무 좋아서 말이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신다는 것이 왜 그렇게 기쁜지 모른다는 말이다.
제가 놀부 심보인가요? 저의 눈으로 봐도 모두가 다 지옥인데, 어떻게 주님이 보시기에 지옥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지옥이라면 방치하면 안 되고 당연히 박살내야하는데,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깜깜한(?) 천국을 몰고 오신다는 것이다. 찬란한 천국이 아닌 깜깜하고 캄캄한 천국을 말이다.
교인들이 교회에 다니면서 오해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교회에 다니면 자기의 부족한 것이 채워진다고 생각하는데, 그러나 사실은 채워지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자기는 가만히 서 있는데 파도가 치면 어떻게 되겠는가? 모두가 다 휩쓸려서 물 속에 빠지고 넘어진다는 것이다. 바람도 세게 불면 '콰당' 하고 넘어지듯이 말이다.
◈ 참된 고난 - 세상을 향한 욕심 때문에 하는 '가슴앓이' !!
그러니 자기에게 있는 것마저도 모두 다 빼앗기는 것인데, 그래서 이 세상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만으로 기뻐하고 만족하도록 하신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고린도후서 1장 5절의 말씀인데, 어느 누구라도 예외가 없이 말이다. 그러니 잊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돈도 아니고 자식도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는 사람이 되게 하려고 말이다.
(고후 1: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누군가가 질문하기를, "그러면 목사님, 가만히 있으면 우리에게 큰 고난이 들이닥칩니까?" 라고 하지 싶은데, 하지만 십자가의 고난이라는 것이, 반드시 자기 몸이 상하게 되고, 집안이 망하고, 아이가 사고를 당하고 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 것은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 나오는 고난이고, 어떻게 보면 그것은 위장된 마귀가 만든 가짜 고난이고, 진짜 고난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 속에 들어있는 이 세상을 향한 자기의 욕심 때문에 가슴앓이 하는 것, 그것이 바로 고난이라는 말이다. - 아멘 !!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고난이라는 것은, 자기 몸이 아프고, 집안이 망하고, 이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아 세상에서 말하는 고난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진짜 고난은 "아니, 내가 왜 이렇게 욕심이 많지? 아직도 내가 이 세상에 대해서 인기를 얻으려고 애를 쓰는구나" 라고 하면서, 그런 자기 모습 때문에 가슴 아파하는 것이 바로 고난이라는 것이다.
사실상 이 세상에서는 그런 것이 고난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나도 당연시되는 일인데, 그러니 이것은 십자가가 와야만 발생하는 일인데, 왜냐하면 십자가가 와야만 비로소 자기의 정체가 무엇인지 탄로가 나니까 말이다. 자기도 몰랐던 자기의 정체가 말이다.
◈ 사도바울 - 나는 죄인 중에서 괴수 !!
그렇지 않다면 사도바울이 어떻게 자기가 '죄인 중에 괴수' 라는 말을 함부로 사용할 수가 있겠는가? 성령을 받지 않았다면 말이다.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믿기 이전에는 그 누구에게도 자기가 죄인 중에 괴수라는 이야기를 결코 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자기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에 고난에 동참하면서, 비로소 자기의 모든 것이 다 죄임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오직 예수님의 의로움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마치 모세의 지팡이로서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이기듯이 말이다.
그러니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이 아니라면, 도대체 어떻게 자기 같은 인간이 구원을 받을 수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조금 전에 말한 마치 산 위에서의 모세의 지팡이처럼 말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인데, 그러니 산 아래에 있는 여호수아가 전쟁을 잘 수행해서, 즉 칼싸움을 잘해서 이긴 게 전혀 아니라는 말이다.
* 질문 - 그런데 부흥사들이 모세의 손을 들어준 '아론'과 '훌'을 많이 이용하던데요?
아론과 훌은 나중에 모세를 배반할 사람들인데, 그들은 여호와 전쟁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속한 집단의 이익만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세의 팔도 처음부터 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상황이 가만히 만들어져 가는 꼴을 보고서, 즉 모세의 팔이 내려오니 싸움에서 지니까 말이다. 당장 어려움에 취하니 모면하려고 말이다. 그래서 그들은 나중에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고 없을 때 산밑에서 금송아지를 만드는데 주동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들에게 도움이 된다고 하면 무슨 짓이든지(?) 다 하겠다는 말이다.
(출 32:1)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아론에게 이르러 가로되 일어나라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출 32:2) 아론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 아내와 자녀의 귀의 금고리를 빼어 내게로 가져 오라
(출 32:3) 모든 백성이 그 귀에서 금고리를 빼어 아론에게로 가져오매
(출 32:4)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그 고리를 받아 부어서 각도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하는지라
◈ 부흥사들이 하는 거짓말 1,2,3등은?
그러므로 한국교회가 하는 말이 모두가 다 거짓말인데, 그 중에도 1등이 무엇인고 하니,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창대하리라" 라는 것이고, 2등이 무엇인고 하니, "장로들아, 아론과 훌처럼 목사를 좀 부축해라" 라는 것이다. 자기들이 하는 말에 따라오지 않으니 말이다. 그리고 3등이 무엇인고 하니, "벧세메스로 가는 소처럼 일 좀 제대로 해라" 라는 것이다. 새끼를 떼어놓고 법궤를 매고 벧스메스로 울면서 가는 암소처럼 말이다. 물론 돈이 좀 있는 장로와 집사들에게 말이다.
쉽게 말하면, 교회에 돈 좀 갖다 바치라는 것인데, 이런 것들이 모두 부흥사들이 퍼트린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 개새끼들이고 쥐새끼들인데, 개와 쥐에게는 조금은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말이다. 그들은 마귀를 구세주로 보게 하고, 예수님을 마귀로 보이도록 한다는 것이다. 성경말씀과는 정반대로 말이다.
그러므로 출애굽기의 승리는 우리의 승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승리인데, 그래서 이 전쟁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집어넣기 위해서 만드신 전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전쟁을 인간들이 자기의 착함과 열심을 가지고 싸우려고 하니, 그야말로 개판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부흥사들의 공갈이 먹혀드는 것도 문제인데, 그렇게 하면 목사, 장로, 집사 순서로 하늘나라에 가는 서열이 매겨진다는 것이다. 헌금을 많이 하고 고생 많이 한 순서대로 말이다. 직장이나 교회도 다 이렇게 승진하는 재미로서 다니는데, 그렇게 해서 면류관도 받고 말이다. 이것은 마치 사월초파일에 절에 달린 등처럼, 그런 등들은 대웅전에서 가까운 등일수록 비싼 등인데, 어떻게 교회에서 하는 짓과 그리 똑같은지, 그러니 그들의 아비는 다 마귀라는 것이다.
* 질문 - 그렇다면 목사님은 지금 한국교회에서 하는 말이 성경과 다르다고 보십니까?
다른 정도가 아니라 정반대인데, 요한계시록 4장에 보면, 물론 지금 한국교회가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지만 설령 그렇게 해서 면류관을 받는다고 해도, 그 면류관을 반납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 4장에 보면, 천국에 와서 보니 자기들이 면류관을 받는다는 것은 건방지기가 짝이 없는 일이고, 그야말로 모든 것을 다 주님께서 하셨다는 것을 알고서, 자기들이 받은 면류관마저도 모두 다 주님의 보좌 앞으로 도로 반납한다는 것이다.
(계 4:10) 이십 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계 4: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저는 이 본문말씀을 보면서, "그런 면류관을 미리 좀 앞당겨서 내놓자" 라는 엉뚱한(?) 생각이 들곤 하는데, 미리 이 세상에 살면서 모든 공로는 모두 주님의 것이라고 여기고 말이다. 그런데 교회에서 목사나 장로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은, 자기들이 믿음이 없어서 그런데, 즉 자기들의 믿음 없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온갖 것으로 다 포장을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목사의 칭찬 등으로 말이다.
◈ 이미 들어왔으니 걱정하지마 !!
출애굽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제발 엉뚱한 일에 스트레스를 받지 말고, 걱정근심일랑 땅에 묻어두어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까, 이미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비록 말단직원이지만 채용이 되었다는 것이다. 비록 말단이지만 말이다.
그러니 이미 들어왔음을 확인시키는 것이 바로 출애굽기인데, 즉 CEO가 되시는 예수님께서 자기의 솜씨로 알아서 모두 하시니까, 그러니 우리는 시키는 데로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원래 우리 솜씨는 아무리 해봐야 뻔하니 말이다. 그러한 상태를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 질문 - 어느 장로님이 돌아가시면서, 예수를 믿어도 아무런 소용이 없으니 교회에 다니지 말라고 유언을 했다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그것은 두 가지 경우로 볼 수 있는데, 이런 엉터리 교회에 다니지 말라는 것일 수도 있고, 처음부터 믿음이 없어서 예수님을 믿지 말라는 경우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는데, 제가 보기에는 그 장로가 죽을 때 비로소 정신을 조금 차린 것 같은데, 자식들에게 하는 말이, "아무튼 이제는 한국교회에 그만 속아라" 라고 말이다. 물론 그분은 교회에 다니는 것을 예수를 믿는 것과 같이 여겼을 수도 있고 말이다.
물론 그렇게 되면 그 교회 목회자는 자기 생계에 위협을 받으니 그 죽은 장로를 공격할 수밖에 없고 말이다. 그러니 교회에 나가고 말고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도대체 예수님이 어떤 분이지를 제대로 알아야만 하는데, 그런데 지금 한국교회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돈 많은 놈을 한 놈이라고 더 붙잡으려고 안달이라는 말이다.
◈ 청주로 가는 버스는 승객이 졸아도 청주로 !!
아무튼 이 출애굽기에서 '전쟁'이 무엇인고 하니까, 하나님의 적이 따로 있다는 것인데,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적을 향해서 싸우는 군대로 뽑혔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의 적은 또 따로 있는데, 하루종일 시끄럽게 하면서 못살게 구는 옆집 사람이고, 또 보증을 세우고 도망간 직장 동료이고 말이다. 그러니 우리의 싸움도 아니고, 우리의 공로도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청주로 가는 버스를 탔다면, 그 버스 안에서 졸든지 노래를 부르든지 무슨 짓을 다해도 버스는 목적지인 청주로 가는데, 그렇게 가는 것은 기사가 다 알아서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해바라기를 아시나요?' 라고 하면서 노래나 부르면 되지 말이다. 승객이 졸지 않고서 수준 있는 책을 본다고 해서 버스가 어디 다른 곳으로 가는가? 그런 버스 안에 있는 상황이 바로 믿음의 상황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는 어떠한가? 예수님이 천국으로 가는 버스를 모는 기사임을 믿으면 되는데, 그런데 자기들이 각자 모두가 다 기사가 되어서 버스를 몬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버스들이 도대체 어디로 가겠는가? 아니, 천국으로 가는 버스를 운전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한번 나와보라는 것이다. 길도 전혀 모르면서 말이다.
◈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어 !!
그런데 한국교회가 그렇게 교인들 각자에게 버스를 한 대씩 주면서 잘 몰면 천국에 간다고 하니까, 각자가 엄청 조마조마한 마음을 가지고 몬다는 것이다. "거봐, 니가 잘못해서 박았잖아?" 라고 하면서 개인책임으로 다 돌려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교회에 나와도 무슨 평화와 감사가 있겠는가? 마음이 조금만 틀어져도 맨 날 싸움질이나 하고 말이다.
그러니 이미 천국으로 가는 버스 안에 들어있는 것과, 자기가 알아서 천국으로 몰고 가는 것은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자기가 이 세상을 이겼으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뭔가를 두려워한다는 것은, 그것은 바로 믿음이 없는 모습이라는 말이다.
(요일 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 출애굽기 17장을 다시 정리하면 !!
지금까지 출애굽기 17장을 강의했는데, 지금부터는 출애굽기에서 제일 어렵다는 16장을 한번 해보겠는데, 17장도 물론 어렵고 말이다. 순서가 뒤바뀐 것이 아니라, 17장을 먼저 하고 16장을 해야 이해가 되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이 출애굽기에서 16장과 17장을 상당히 중요하게 여기는데, 이 17장을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이미 하나의 상자 속에 들어있는데, 이 속에는 하나님도 함께 들어있다(동행)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은 누구를 공격하는고 하니, 돈을 떼먹고 도망간 우리의 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적을 공격하시는데, 그 적이 바로 17장에서는 '아말렉' 이라는 말이다.
◈ 왜 아말렉은 미워하고, 이스라엘은 사랑하시는가?
여기서 머리가 조금 잘 돌아가는 사람은 질문하기를, "목사님, 아말렉이 하나님의 적이지요? 그러면 하나님은 아말렉은 공격하면서 이스라엘은 공격하지 않습니까? 제가 보기엔 그 나라가 그 나라인데, 그렇다면 도대체 이스라엘과 하나님은 무슨 관계입니까?" 라고 말이다. 아닌가요? 그런 질문은 머리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그건 그렇고, 아무튼 간에 하나님께서는 아말렉은 왜 그렇게 미워하고, 이스라엘은 그렇게 사랑하시느냐는 것이다. 굳이 이스라엘을 동원해서 아말렉을 치기까지 하면서 말이다. 그것에 관한 해답이 바로 출애굽기 16장에 나오는데, 이 16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인도하는지에 대해서 나오는데, 17장도 마찬가지인데, 먼저 17장 1절을 보도록 하자.
(출 17:1)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
◈ 어미, 환장허것네. 물이 없어야 !!
지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셨는데,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말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 마음대로 신 광야에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그만 뭐가 없는가? 살아가는데 그렇게 중요한 물이 없다는 것이다. 자기들이 고집을 피워서 잘못된 길을 가서 물이 없다면 그래도 억지로라도 참겠는데, 그런데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즉 그렇게 하나님의 노정을 따라 갔는데 그만 물이 없다는 말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까, 조금 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지금 싸우려고 하는 하나님의 적은 백성들의 적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적이라는 것이다. 즉 악마는 우리들의 원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원수라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러한 하나님의 원수와 싸우는 군사로서 부름을 받았고 말이다.
◈ 군대에는 자유가 없어 !!
요즘 젊은 아이들이 왜 군대에 가기를 싫어하는가? 물로 옛날에도 그랬지만, 그것은 바로 군대에는 자유가 없다는 것이다. 교도소도 그렇지만 말이다. 자기 마음대로 망아지처럼 마구 뛰어 놀다가, 새벽 2시에 자고 12시에 일어났는데, 그런데 이제는 잠도 정해진 시간에 자야만 되고, 물론 일어나는 것도 그렇다는 것이다. 또 한 밤중에 깨워서 보초를 세우고 말이다.
"아니, 내 몸은 분명히 내 것인데, 도대체 국방부 장관이 무엇이기에 이렇게 고생을 시키느냐?" 라는 것이다. 자기가 무슨 큰 잘못을 했다고 말이다. 그래서 군대에 가지 않고 옆으로 빠지려고 인간들이 그 얼마나 많고, 별의 별 가상한 노력을 다 하느냐는 것이다.
◈ 이스라엘은, 누가 뭐라고 해도 하나님의 군대 !!
그렇게 자기 마음대로 하지를 못하고 시키는 데로 해야만 하는 이유는, 그것은 곧 군대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이스라엘이 무엇인고 하니까, 바로 하나님의 군대라는 것이다. 그것이 창세기 32장에 보면 나오는데 말이다.
(창 32:2)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출 7:4) 바로가 너희를 듣지 아니할 터인즉 내가 내 손을 애굽에 더하여 여러 큰 재앙을 내리고 내 군대,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찌라
◈ 여호와의 군대이기에 물이 없는 곳으로 !!
사실은 그들이 여호와의 군대이기 때문에 물이 없는 곳으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미치고 환장할 노릇인가? 자기들이 가고 싶어서 가는 것도 아닌데, 그런데도 물이 없는 곳으로 데리고 가니 말이다.
아무튼 이 군대는 계급이기 때문에, 위의 놈이 밑에 있는 놈을 조져야 하는데, 그래야 자기가 진급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제일 밑에 있는 졸따구들은 그야말로 죽을 맛인데, "무조건 해" 라는 것이고, 그야말로 로봇 취급을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유를 박탈당한다는 것, 그것이 그 얼마나 더럽고 서러운지 말이다. 이것은 군대뿐만이 아니라, 어느 집단에 매여있으면 모두가 다 그렇다는 말이다.
◈ 하나님의 군대는 '죽음' 정도는 극복해야 !!
이렇게 군대에 속한 군인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고 싶은 선택권이 전혀 없는데,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란 자기의 군대를 물이 없는 곳으로 보내었다는 것이다. 자기들이 선택권이 있으면 그런 곳으로 갈 리가 만무하니 말이다. 이렇게 되면 드디어 백성들이 이성을 잃게 되는데,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는 것이 오히려 자기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으니 말이다.
지금부터 몹시 어려우니까 정신을 바짝 차리시고,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왔는데, 그런데 들어갈 나라도 사실은 애굽과 같은 계열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죽음에서 끄집어내었다고 하면, 그렇다고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스스로 죽음 정도는 이겨내어야만 저쪽 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다는 것이다.
◈ 시편 105편에 보면 !!
이것이 시편 105편에 나오는데, 전혀 신학공부도 하지 않은 여러분에게 시편까지 공부하려고 하니까 조금은 미안하기도 한데, 그래서 정신을 좀 차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은 문자를 분해한다고 되는 것이 아님을 명심하고, 105편 23절 말씀을 보자.
(시 105:23) 이에 이스라엘이 애굽에 들어감이여 야곱이 함 땅에 객이 되었도다
(시 105:24)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크게 번성케 하사 그들의 대적보다 강하게 하셨으며
(시 105:25) 또 저희 마음을 변하여 그 백성을 미워하게 하시며 그 종들에게 교활히 행하게 하셨도다
(시 105:26) 또 그 종 모세와 그 택하신 아론을 보내시니
(시 105:27) 저희가 그 백성 중에 여호와의 표징을 보이고 함 땅에서 기사를 행하였도다
이것이 무슨 내용인고 하니,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함'의 땅에 들어간다는 것인데, 하지만 사실은 양쪽이 모두 다 함의 땅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그림으로 한번 그려보자면, 여기에 이렇게 애굽이 있고, 또 이렇게 약속의 땅이 있고, 그리고 그 사이에 광야가 있는데, 애굽과 가나안 땅은 모두 함 자손의 땅이라는 말이다.
◈ 애굽이 아닌 '죽음'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 !!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애굽에서 나오는데, 그래서 그들은 죽음을 이기게 되는데, 그런데 이런 과정에서 자기들이 무엇을 한 것은 사실상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가만히 서서 바라보기만 했던 그들이, 이제는 광야로 가면서 무엇을 느끼는고 하니, 자기들이 도대체 어디서 나왔는지를 알게 된다는 것이다. 즉 애굽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죽음'에서 나왔다는 것을 말이다.
물론 다음과 같은 과정들을 겪게 되는데, 다음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의 대화내용을 한번 녹취(?)한 것이니, 잘 들어보라는 말이다.
* 백성들 : 우린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 하나님 : 아니야. 죽음에서 나왔어.
* 백성들 : 우린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 하나님 : 아니야. 죽음에서 나왔어.
* 백성들 : 우린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 하나님 : 아니야. 죽음에서 구원되었어.
* 백성들 : 우린 애굽에서 구원되었습니다.
* 하나님 : 아니야. 죽음에서 구원되었어.
* 백성들 : 우린 애굽에서 구원되었습니다.
* 하나님 : 아니야. 죽음에서 구원되었어.
* 백성들 : ? ? ?
◈ '나는 반드시 살아야만 돼' 라는 데서 탈출 !!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이제는 죽음의 세계, 즉 물도 없는 광야로 들어가게 하신다는 말이다. 그리고 양식도 없는데, 그러니 죽은목숨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들은 분명하게 죽어야만 하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 생명의 만나를 줄 때, 비로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 나라에서 또 다른 한 나라로 분리해서 이동하는 차원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애굽에서의 탈출은, 이 애굽은 어느 특정한 나라가 아니라, "나는 반드시 살아야만 돼" 라는 사고방식 자체로부터의 탈출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 그 자체가 곧 영생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가나안 땅에 들어가고 말고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이제는 더 이상 죽음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말라는 것인데, 즉 죽음 자체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마침내 죽음을 극복한 역사상 전무후무한 나라가 된다는 것이다.
◈ 광야에서 물이 없는데, 어떻게 ??
제가 이 말을 하기 위해서 출애굽기 16장과 17장이 어렵다고 했는데, 여러분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이 되어서 생각해보면 어떻겠는가? 광야에서 물이 없는데, 어떻게 자기들을 그곳으로 데리고 온, 아니 끌고 온 지도자를 원망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런데 이 본문을 보면서, "그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하나님을 원망했지. 그러나 믿음이 좋은 나는 그렇게 안 해야지" 라고 한다는 것이다. 아니, 그게 다짐을 한다고 될 문제인가? 속으로는 실컷 원망을 다 해놓고는 말이다. 그런 태도가 과연 믿음이 좋은 것인가? 이 본문을 기록하도록 하나님의 취지도 전혀 모르고서 말이다.
◈ 함께 하심으로 죽음을 통과 또 통과 !!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광야 40년을 통해서 생명을 경험했을 때, 비로소 그들 앞에 막강한 나라가 등장하는데, 여기서 막강하다는 것은, 물이 없어도 죽고, 양식이 없어도 죽는 것이 인간이지만, 그리고 자기보다 더 강한 적이 나타나도 죽는다는 것이다.
인간이 죽는 이유가 이렇게 다양한데, 물이 없어도, 양식이 없어도, 그리고 자기보다 더욱 강한 적이 나타나도 죽는 것이 인간인데, 이러한 세 가지의 죽음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서 통과 또 통과시킨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출애굽기' 라는 말이다.
◈ 예수님만이 부활의 첫 열매 !!
신약에서 예수님은 죽었다가 부활하셨는데, 우리는 예수님이니 그것이 너무나 당연하다고 여기지만,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그렇게 쉽게 생각하지 말아야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솜씨가 좋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 즉 첫 주자가 되셨고, 그 다음 주자는 바로 저와 여러분이라는 말이다. 즉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이고 우리들은 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이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이미 죽음을 이겼기에 그런 일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데, 여기에서 예수님은 자기가 부활이고 생명임을 분명히 말씀하시고, 그리고 마리아와 마르다에게 "네가 이것을 믿느냐"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다. "예, 믿습니다" 라고 하면 말이다.
(요 11: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요 11: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 성경공부의 환희와 에프킬라 !!
우리가 평소에 살아가면서, 가정문제, 직장문제, 그리고 교회문제 등으로 인해서 마음이 복잡하고 좀 아파도, 막상 이렇게 성경공부를 하면서 깊이 있게 들어가게 되면, 가정이나 직장이나 교회 등의 그런 문제들은 아주 사소한 문제가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놀랍게도 말이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말씀을 보면서 당장 죽어도 괜찮다고 하는 것에 대한 감격과 환희는 결단코 놓칠 수가 없기에 말이다. 물론 성경공부를 마침과 동시에 마치 에프킬라 냄새처럼 모두가 사라지겠지만 말이다. "야, 밥 먹자" 라고 하는 순간에 '휙' 하고 말이다.
아무튼 지옥에 가야 될 자가 천국에 간다는 것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닌데, 적어도 죽음을 이겨야만 천국을 이야기할 수 있고 천국에 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죽음도 극복하지 못하고, 어떻게 천국을 이야기하느냐는 것이다. 죽음도 이기지 못하고 말이다.
◈ 아니, 이런 무서운 성경말씀이 !!
여기서 히브리서 2장 14절과 15절 말씀을 살펴보면, 성경이 이렇게 무서운 구절이 있는가 싶을 정도인데 말이다. 성경에 이런 무시무시한 구절이 이것 말고도 몇 군데에 더 있는데, 입에 담기도 끔찍한 구절이 말이다.
(히 2:14)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히 2: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여기에 15절에 보면, 사람이 누군가에게 매여있다고 하는데, 도대체 어디에 매여있다고 하는가? '마귀에게' 매여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왜 마귀에게 매여있는가? 죽기가 무서워서 그렇다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육신에 매여서 덜덜 떠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즉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죽기가 무서워서 평생동안 종노릇하는 우리들을 풀어주기 위해서, 즉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육신의 몸으로 이 땅에 직접 오셨다는 것이다. 그러한 분이 바로 예수님인데, 즉 "니가 당하는 것을 내가 다 당했으니, 걱정하지 마라"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 믿음 - 죽음조차 두렵지 않아 !!
이 성경구절이 정말 무섭지 않은가요? "야, 믿는다는 것이 이 정도 수준에 올라가야 비로소 믿는다고 하는구나" 라고 하니 말이다. 즉 과거에는 죽기가 무서워서 마귀에게 매여서 살다가, 이제 예수님을 믿고 난 다음에는 죽는 것이 두렵지 않는, 그런 경지를 두고서 '믿음'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또 무서운 구절을 하나 예로 들어보면, 그것이 야고보서 5장에 보면 나오는데, 돈을 사랑하고 밝히는 자들에게 아예 저주를 퍼붓는다는 것이다.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 라고 하면서 말이다.
(약 5:1)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
(약 5:2)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 먹었으며
(약 5:3)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 지금까지 한 강의를 종합해보면 !!
지금까지 강의한 것을 종합해보면, 신앙이라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죽음 자체를 해결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죽음을 누가 해결하는가? 처음에 이야기한 바와 같이, 이 죽음은 우리들의 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적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에게 죽음이 찾아왔다는 것은, 물론 우리도 좀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먼저 섭섭해(?) 한다는 것이다.
◈ 죽음에 얽매이지 않는 인간으로 새롭게 창조 !!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런 죽음이 찾아와도 이제부터는 죽지 않는 인간으로 새롭게 창조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해당되고 뽑혀서 부활이 되고 생명이 된 사람들이 곧 성도이고, 그러한 사람에 한해서는 더 이상 죽음이 왕 노릇하지 못한다는 것을, 이렇게 성경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통보해주신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니까, 이 창세기와 출애굽기가 전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신 것처럼,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들을 출애굽기 17장에 나오는 것과 동일한 원칙으로 인도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 하나님의 구원방식 - 출애굽기 17장대로 !!
다시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은 어떻게 인도하시는가? 고린도후서 1장 5절에 의하면, 십자가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치도록 인도하시고, 또한 출애굽기 16장과 17장에 의하면, 분명히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데로 따라갔는데, 그런데 가서 보니 물이 없고 양식이 없더라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지금 우리들을 인도하심으로 말미암아서, '죽음' 이라고 하는 것에 꽁꽁 묶여서 온갖 협박과 공갈을 당하는 우리를 구원해주신다는 것이다. "너 속에 생명이 있다" 라고 하는, 그래서 예수님이 자신이 직접 우리와 동일한 육신의 몸을 직접 입고서 이 땅에 오셔서, 생명과 부활을 주심으로 말미암아서 말이다.
아직 중요하고 어려운 것이 좀 더 남아있는데, 출애굽기 17장을 계속 살펴보면, 아무튼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이 없다고 원망을 하는데, 사실 그것이 당연하고 말이다. 아무튼지 아말렉과의 전투에 앞서서 무슨 일이 있었는데, 1절 말씀부터 한번 살펴보자.
(출 17:1)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
(출 17:2)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가로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출 17:3) 거기서 백성이 물에 갈하매 그들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생축으로 목말라 죽게 하느냐
(출 17:4)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얼마 아니면 내게 돌질하겠나이다
(출 17: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가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하수를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출 17:6) 내가 거기서 호렙산 반석 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출 17:7) 그가 그곳 이름을 맛사라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 하였음이더라
여기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을 달라고 하는데, 그것이 사실상 우리가 보기에는 맞는 말인데, 그렇지 않는가? 데리고 다니려면 물 정도는 주어야지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차, 내가 바둑을 두다가 깜박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를 하면서 실수를 했다. 그러니 마음을 좀 풀고, 여기에 물이 있으니, 얼른 받아라" 라고 하셨는가?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 물이 없다고, 그러면 나를 쳐서 마셔라 !!
그래서 그들이 이러한 물 문제로 인해서 서로가 다투었는데, 그래서 그곳 이름을 '맛사' 혹은 '므리바' 라고 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물을 주시는고 하니, "나를 치라" 라고 하서 하면서 주신다는 것이다. 그것이 6절 말씀에 나오고 말이다.
◈ 왜 하나님은 자기를 치라고 하시는가?
다시 말해서, 하나님 자신이 반석 위에 서 있을 테니, 물론 보이지는 않지만 말이다. 모세를 보고서 하시는 말씀이, 지팡이를 가지고 그 반석을 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나님 자신을 때리라는 말과도 같다는 것이다. 그 당시 모세는 누구의 대표자인가? 하나님의 대변자가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표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원망하는 백성들을 말이다.
그런 모세가 백성을 대표해서 물을 달라고 하니, "여기 있다" 라고 하면서 물을 줄줄 부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한 반석 위에 서서 모세를 보고 그 반석을 지팡이로 때리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러니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치라고 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하셨는가? 이것은 그야말로 하나님께서 "나를 밟고서 지나가라" 라는 것과도 같은 말인데, 무슨 김소월의 '진달래'도 아니고 말이다. 하필이면 왜 하나님은 이러한 방법을 사용하셔서 물을 주시느냐는 것이다.
◈ 참된 생명을 알지 못하는 이스라엘에 대한 고발 !!
그것은 바로 "우리는 물이 없이는 갈 수가 없습니다" 라고 하는, 즉 참된 생명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고발이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죽음조차도 이긴다는 것을 모르고, "나를 죽이면 누구든지 용서가 없어"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자기들의 목마르고 배고픈 것, 그런 것에 마구 얽매여 있는, 즉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 덤비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고발하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곳을 "하나님과 그들이 싸웠다" 라고 이름을 붙였던 것이다. 하나님의 동행을 의심하니 말이다.
지금 이 백성들의 이름이 무엇인가? 분명히 '이스라엘' 인데, 이 이름이 어디서 나온 것인가?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하나님의 천사와 밤새도록 씨름을 해서 얻은 이름이라는 것이다. 바로 지금 그 당시의 그 행세를 그대로 하고 있는데, 그것이 어디 다른 데로 가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야곱과 같은 인간을 이스라엘로 바꾸신다는 것이다.
◈ 시험이란, 악마가 적대적인 감정을 가지고 공격하는 것 !!
여기 7절에서, '다투고' 라는 것 다음에 '시험한다' 라고 나오는데, 이것은 '테스트를 한다' 라는 의미가 아니라, '공격한다' 라는 의미로서, 광야에서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하는 바로 그 시험이라는 말이다. 즉 맹목적으로 마구 달려들어서 공격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한다는 것은, 적대적 의미를 가지고 "아이쿠, 니가 메시아야. 생긴 꼬락서니하고는" 라면서 예수님을 떠밀어버린다는 말이다. 만약에 그런 공격하는 의미의 시험이 아니라면, 예수님이 시험을 잘 쳐서 걸리면 되는데, 하지만 예수님의 태도는 전혀 그런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성경에 나오는 '시험' 이라는 말을 아주 좋고 건전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는데, 마치 학교에서 치는 '시험' 정도로 말이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말하는 시험은 적대적인 감정을 가지고서 '확' 달려들어서 악마적인 품성으로 공격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즉 성경에서의 시험은 그런 부정적인 의미로 보면 된다는 것이다.
◈ 출애굽기 17장의 십자가는, 부서진 반석에서는 나오는 물 !!
그러니 지금 한번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성질을 한다는 것이다. 자기들이 마음대로 갔으면 모르겠는데,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시키는 데로 해서 그대로 갔는데, 물이 없으니까 하나님을 원망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시는데, 자기가 반석 위에 있을 테니까 치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반석을 치니 반석이 깨어지면서 물이 쏟아졌다는 말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바로 물이 없다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태도가 바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