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요리문답공부 9(030202)
소요리문답공부 9(030202)
이름 : 오용익(IP:59.3.201.241)
소요리문답공부 제 9강 (이 근호목사, 2003년 2월 2일, 우리교회)
오늘은 제 13과입니다.
지난시간에 원죄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 사실은 원죄라는 것은 성경에서 이야기하지 않는 겁니다. 성경에서는 인간의 행함 위주로 ‘죄냐, 아니냐’를 규정한 것이 아닙니다. 다시 설명하면 인간이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면 죄고 이어지면 의가 되고,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단절되면 이것은 죄고 이어지면 그것이 의입니다.
만약에 인간이 행한 것을 가지고 그것을 죄라고 한다면 의라는 것이 결국 인간이 잘 행하면 의가 된다 이렇게 되어야 하니까 그것은 성경과는 어긋나는 겁니다. 원죄라는 것은 있는 것이 아닌데 사람위주로 생각하다 보니까 그런 현상이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인간이 단절된 것이 죄가 되는 겁니다.
사람이 양심상 나쁜 짓을 하면 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인간들이 그렇게 생각해 온 겁니다. 사람들은 ‘내가 교회 안 나가면 내가 죄 짓는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교회 나오면 의로운 행동입니까? 아니잖아요. 교회 안다니면 죄다. 그러면 다니면 의로우냐?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그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그 자체가 죄입니다.
‘근본적으로 내가 하나님과 떨어져 사는구나.’ 이것을 통분히 여겨야 할 텐데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졌다는 생각은 안하고 ‘내가 교회 안 나왔으니까 벌 받는 모양이다’ 라고 자기 행동을 기준으로 해서 죄다, 아니다 라고 자기 맘대로 생각하는 인간을 마귀가 더 좋아하고 달려드는 겁니다.
“그것을 당신은 어떻게 알았습니까?”
“언약을 통해서 알았습니다.”
‘언약이라는 것은 인자의 피와 인자의 살을 먹으면 영생을 얻으리라. 이 잔은 내 피요 이 떡은 내 살이라’(마 26:29) 예수님이 유월절을 치르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것을 기초로 해서 세상 모든 죄와 의를 정리해 보면 어느 인간도 하나님과 단절된 것에 대해서 나설 수가 없습니다. 자기 죄 값 치르기도 바쁜데 남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어요.
그래서 이 중간에 예수님께서 자기 피와 자기 살을 제공하는 거예요. 예수님의 깨끗한 피, 깨끗한 살이 있기 때문에 의롭다 그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인간이 언약적으로 연결된 그 자체가 의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은 죄 없기 때문에 우리가 의롭다 그것이 아니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언약을 완성했기 때문에 그 완성 속에서 우리가 의롭게 되는 거죠.
이런 것도 참 어려운데요.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은 깨끗해서 우리대신 돌아가셨기 때문에 네가 죄지으면 지옥 간다.’ 이렇게 될 수가 있어요. ‘예수님은 이렇게 착한데 너는 왜 나쁜 짓을 해.’ 이렇게 되어 버리면 예수님의 공로는 완전히 날아가는 거예요. ‘아, 예수님이 이렇게 우리를 위해서 깨끗한 피를 흘렸기 때문에 우리도 바르게 살아야 되겠구나.’
바르게 살다가 몇 년 지나서 그렇게 못살게 되면 어떻게 할 거예요? 어제 뉴스에 보니 50세 먹은 사위가 엽총을 쏴서 처남 둘 죽이고 장모는 다쳤다는 소식이 전해졌어요. 50세 먹은 사위는 50세 될 때까지 사람을 죽인 적이 있습니까? 있어요? 없습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런데 그 사람이 50세 될 그 때에 아다리가 딱 맞았어요.
평소에 그 사람이 엽총을 가지고 토끼 같은 짐승사냥을 많이 했어요. 그 사람이 ‘내가 토기 잡으면서 사격술을 연마해서 나중에는 사람을 잡아야지’라고 사람 잡기 위해서 토끼 잡은 것 아닙니다. 그냥 열 불 나서 사람을 쐈는데 사람이 죽었어요. ‘60때까지 나는 사람 죽인 적이 없다.’ 맞아요. 그러면 61세 될 때 두고 보자는 거예요.
앞으로 사위들이 처가에 갈 때에는 검문검색을 철저히 해서 엽총 같은 무기가 있으면 다 빼앗아 버려야 합니다. 총이나 흉기를 소지하고 있으면 나중에 소주 먹고 열 불 나서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너 임마, 아버지 재산 누나 좀 안주나’ 하면서 찌르고 쏠 수가 있다 이말 입니다. 사람 열 불 나면 어떻게 될지 몰라요.
50세까지 예수 믿었다. 그 다음 60세 되어서는 ‘나 이제 예수 안 믿는다’라고 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가지고 조바심 나서 살겠습니까? ‘아 이제 60, 앞으로 죽을 날 20년 남았다. 20년 잘 버텨보자.’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 안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의로운 피 흘렸으니 바르게 살자’는 이것은 ‘구원받지 말라’는 말과 똑같은 소리입니다.
잘 들어 보세요. 예수님의 의는 인간적인 착함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한 그 관계를 가지고 의롭다 하는 거예요. ‘다리가 놓여 졌다는 그 자체가 의롭다’ 이말 입니다. 그것을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우리는 의인이 되는 거예요. 세상에 이보다 더 기쁜 소식이 어디 있습니까? 정말 기쁜 소식 아닙니까?
인간은 원죄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그냥 죄인입니다. 인간이 죄라고 하는 것은 이 언약을 자기 힘으로 달성 못하기 때문에 죄가 되는 거예요. 인간이 아무리 이웃 사랑한다고 ARS 전화한번 할 때마다 구제비가 누적되는 방식으로 타인을 도와줘도 관계가 예수를 안 믿으면 그 사람은 지옥 갑니다. 사도행전 17장 30,31절에 옛날에는 예수 안 믿어도 봐줬어요.
그러나 ‘마지막 때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지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이제 예수 믿지 아니하면 누구든지 심판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관계가 끊어진 것을 죄라고 하고 그 관계가 이어진 것을 믿게 되면 그것이 의’가 됩니다. 이게 복음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행동에 대해서 너무 타박하지 마세요. 사람이 성격상 같은 행동을 해도 남하고 다르게 행동 할 수 있어요.
장로님께서 하는 말 때문에 제가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모님, 참 마음고생이 크시겠습니다. 이렇게 운전하는 사람 옆에 타고 계시니 얼마나 힘드시겠습니까?’ 아마 장로님이 참다 참다 도저히 못 참겠어서 한마디 말은 해야겠는데 목사에게는 못하겠고 그래서 그렇게 하시는 말씀 같아요. 놀이동산도 아니고 죽으려고 환장한 것도 아니고 시속 100키로 가깝게 달리면서 그렇게 험하게 운전을 해 댔으니.
그런데 저는 제가 운전을 꽤 잘한다고 보거든요. 그러면 죄를 규정합시다. 운전하는 동안에 ‘얼마나 심하게 왔다 갔다 했는지 그걸 따지는데 1분에 몇 번 하느냐에, 예를 들어 1분에 10회가 안되면 죄가 아니고 10회 이상하면 죄가 됩니까?’ 이것을 확대시켜 보면 모든 행동이 마찬가지입니다.
슬리퍼를 질질 끌고 다닐 때 몇 미터를 끌고 다니는가를 가지고 죄를 규정합니다. 옛날 사람들은 이런 것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아침에 고양이가 나타나면 재수 없다.’ 대체 아침에 고양이가 몇 마리 나타나야 재수가 없게 되는 겁니까? 인간이 생각하는 죄라는 개념은 자기 행동, 자기가 습관화한 관행에 의해서 자기가 속임을 당하고 있어요.
왜냐하면 사람을 모든 것을 보지 못했으니까. 자기 딴에는 운전을 잘한다고 여기는데 분명히 자기보다 더 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제 인척 중에는 저보다 운전 더 심하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인간이 한 두 종류가 아니니까 주님께서는 그 모든 인간을 다 묵살하자는 겁니다.
묵살하는 방법은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율법으로 말미암아 입을 막아 버려서 잘난 놈 없다’고 하는 겁니다. ‘사망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율법이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5,56) 하지요? 율법이 노리고 쑤시는 것은 죄인데 이미 생명관계, 의 관계에 들어갔기 때문에 탓하지 말자는 겁니다.
그 사람이 예수를 믿으면 그가 열 명을 죽이든 스무 명을 죽이든 그 사람은 의인 되었으니 탓하지 말자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살하면 지옥 간다는 소리를 하는데 참, 그런 사람을 보면 나는 기가 막혀요. 자살의 종류도 가지가지입니다. 장희빈을 보면 ‘사약을 마셔라’하는 것은 자살형태의 극형입니다.
전쟁 통 같은 경우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고요. 그런 일이 참 많거든요. 농부들은 농약을 조심해야 됩니다. 홧김에 막 마신다고요. 박사교회 있을 때 그런 일도 꽤 있었어요. 자살이 되었든 타살이 되었든 그게 뭐든 간에 인간이 잘했다 잘못했다 하는 것은 도토리 키재기밖에 안 됩니다.
아까 50세 된 사위가 엽총 가지고 처남 둘 죽인 사람의 예를 들었잖아요.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예수님께서 해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원죄라는 것은 없는 겁니다.
제 13과 인간의 본성
제 18 문 사람이 타락한 상태에서 죄가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사람이 타락한 상태에서 죄가 되는 것은 아담의 첫 범죄의 유죄한 것과 근본적인 의가 없는 것과 온 품성이 부패한 것인데, 이것은 보통 원죄라 칭하며 아울러 원죄로 인해 나오는 모든 범죄입니다.
제 13과에서는 전전 부패라는 말이 나오는데 여기서 묻는 것이 ‘사람이 타락한 지위에서 죄되는 것이 뭡니까’라고 하죠. 대체 뭘 묻는 것인지 모르겠어요. 답은 ‘사람이 타락한 상태에서 죄가 되는 것은 아담의 첫 범죄의 유죄한 것과 근본적인 의가 없는 것과 온 품성이 부패한 것인데, 이것은 보통 원죄라 칭하며 아울러 원죄로 인해 나오는 모든 범죄입니다.’
묻는 것도 이상하고 답하는 것은 더욱 더 이상하고 그렇게 되어 있어요. 사실은 문제 자체가 안돼요. ‘사람이 지금 어떻게 됐습니까?’ 이렇게 물으면 ‘지금 전적 부패 했습니다’라고 답변이 되는데 제목은 전적부패라는 의미로 잡아 놓고는 ‘죄가 뭐냐’를 묻고 답하고 있어요. 어찌되었든 ‘전적부패’라는 것은 인간이 뭘 해도 뭐가 될 수 없다?
‘인간은 뭘 해도 의가 될 수 없다.’ 이것이 전적부패입니다. ‘예수 믿고 난 이후도 마찬가지입니까?’라고 물으신다면 옳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믿고 나서 뭘 해도 의로운 것은 될 수 없습니다. ‘아니, 예수 믿으면 의로운 인간 되잖아요.’ ‘예수 믿어서 의인되지 예수 믿는 행위는 의로운 행위는 아닙니다.’
그것은 믿는 행위죠. ‘아니, 왜 예수 믿는 행위가 의로운 행위가 아닙니까?’ 의롭다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과 연결된 것을 의롭다고 해요. ‘행위에서 의롭다고 하는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에 보면 ‘인간이 행위에서 의로울 것 같으면 예수님께서 오시지 않았다’(갈 2:16, 21)고 합니다.
의라는 것은 언약대로 관계를 이야기하기 때문에 행위가 어찌되었든 그것은 의가 될 수 없습니다. 의라 할 때 왜 관계가 의냐 하면 그 관계를 형성하는 행동의 출처가 우리 인간이 아니고 예수님에게서 나와요. 하나님과 인간을 연결시키는 이 의를, 다리를 건설하는데는 그 행동이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에게서만 나오기 때문에 이 연결된 전체를 가지고 ‘의’라고 합니다.
인간은 무슨 행동을 해도 그것은 의가 될 수 없는 거예요. 행위의 주체가 인간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사람이 강도짓을 해도 ‘강도짓은 나쁘다’ 할 때, 그 듣는 강도 기분 나빠요.
“나는 강도짓을 한 것이 아니고 약간의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내가 지금 가정이 이렇게 어렵기 때문에 돈 200만원만 꿔 달라고 한 것입니다.”
“그럼 칼은 왜 들었는데?”
‘칼은 손에 아무것도 안 쥐니까 뭔가 심심해서 하나 쥔 것인데 이 칼로 인해서 위협을 느끼고 안 느끼고는 상대방 본인이 결정할 문제지 내가 결정할 문제는 아니었다’는 말이죠. 참 핑계도 가지가지지요? 무슨 말이냐 하면 칼 들고 권총 들고 하는 말이 ‘나는 이렇게 총들고 칼 들었지만 사실은 그냥 보통 평범한 시민인데 지금 내가 집안 좀 어려워서 돈 200만원이 아쉬운데 내가 갚을 테니까 좀 꿔줄래요?’
이것을 가지고 법에서는 두 글자로 강도라고 하지요. 그러나 그 짓을 한 본인은 전혀 강도짓을 안 한 거예요. 사정이 좀 어려워서 약간 여유 있어 보이는 사람에게 돈을 꿔달라고 한 거예요. ‘내가 국회의원인데 어떤 사람이 돈을 일억 원을 들고 왔다. 그것도 귤 상자에 넣어서 들고 왔다.’ 그래서 묻습니다.
“그게 뭡니까?”
“현찰입니다.”
“왜 들고 왔습니까?”
“애들 떡값이나, 껌 값이나 하시기 바랍니다.”
“얼만데요?”
“얼마 안 됩니다. 일억 원밖에 안됩니다.”
“얼마 안 되네. 껌 값 맞네.”
“맞지요.”
둘 사이는 이것이 껌 값으로 합의가 끝난 상태에요.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가지고 뇌물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그 둘 사이에는 전혀 껌 값을 받았지 뇌물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전혀 그런 적이 없어요. 이것은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할 때 제 삼자가 보는 죄의식과 그 행동을 한 당사자 본인의 의식이 다르기 때문에 일률적인 합의가 도출이 안돼요.
그래서 감옥소에 가는 사람들의 공식이 뭐냐? ‘재수 없다’입니다. 자기보다 더 나쁜 놈, 남 등쳐먹는 놈은 안 잡히고 자기만 잡혔다는 겁니다. 재수가 없는 것 뿐이고 다른 말로 하면 이것이 우연입니다. 우연히 잡히고 우연히 들키고, 그런 거예요. 사람들이 방금 제가 한 말을 누가 인정하겠습니까?
자기 행한 것을 가지고 변명하고 자기 정당화하는 이것을 성경에는 전적 부패했기에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고 결론짓는 겁니다. 이런 변명과 자기정당화에 능한 현상을 강도질하고 교도소 가는 사람이나 뇌물주고 받는 사람을 예로 들었지만 평상시의 우리 행동을 보세요. 그들뿐만 아니라 우리도 늘 상 나오는 것이 변명과 핑계입니다.
나오는 모든 것이 변명과 핑계입니다. 변명-핑계-변명-핑계, 이것이 계속 줄줄이 이어져 갑니다. 그게 왜냐? 전적 부패했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납니다. 아마 세상 끝날 때까지 계속 이어질 거예요.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은 인간에게는 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약간 더 어려운 것을 해 봅시다.
그렇다면 사람 속에 뭐가 들어 있느냐? 죄가 들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을 바꿔줘야 돼요. 죄가 들어 있다고 할 때 어떤 사람에게는 이 죄가 조금 들어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많이 들어 있다고 할 때, 죄게 적게 들어 있는 사람보다는 많이 들어 있는 사람이 더 큰 죄인이 될 거예요. 이런 사람은 없어요. 다 같이 아담의 자손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조금 나쁘고 어떤 사람은 많이 나쁘고 그런 사람은 없어요. 프로이트라는 사람은 이것을 리비도(성적충동)라고 했는데 ‘성적충동이라는 것은 외부로는 성적충동으로 나오지만 그 밑에서는 자기 존재성으로 나오고 그 존재성은 남을 죽여서라도 자기만은 살아야 되겠다는 본능으로 나온다’고 봤습니다.
그게 무의식속에 있는데 그 무의식이라는 것은 어떤 사람은 많이 들어있고 어떤 사람은 적게 들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증거가 뭐냐? 프로이트라는 사람이 2만 번 내지 3만 번의 임상실험을 거쳤어요. ‘사람이 남녀노소와 관계없이 꿈의 내용이 한결 같더라.’ 꿈은 내용이 전부 다 비슷비슷해요.
그런데 정신력이 약한 사람은 꿈과 현실을 구분을 못해서 이게 막 착각 속에서 그냥 튀어나오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데 ‘꿈은 꿈이고 현실은 현실이다.’ 이것이 정신건강상태가 좋은 사람은 절제가 되고 자기 관리가 잘 돼요. 이런 사람은 남들 보기에 신사로 보이고 숙녀로 보이고 점잖은 사람으로 보이지만 인간의 꿈은 다 개판입니다.
목사가 되었든 누가 되었든 다 개판 같은 꿈입니다. 하루는 예수님 꿈꾸었다가 하루는 지옥 꿈꾸었다가 번갈아서 하는 거예요. 누구든지 마찬가지에요. 가정환경과 정신건강이 잘 받쳐주면 이런 것들이 조절이 잘 되죠. 예수 믿는다고 나쁜 짓 안하는 것이 아니고 그 절제와 조절은 첫째, 선천적인 요소이고 두 번째는 가정환경, 세 번째는 생계환경, 그만큼 풍족 해야 되죠.
밥 먹고 살기도 바쁜데 언제 윤리 도덕을 다 지킵니까? 먹고 남아돌 만큼 풍족해서 남에게 구제도 힘껏 하는 사람에게는 사회적으로 죄지을 가능성이 더 적을 뿐이죠. 아프리카에는 에이즈환자와 범죄율이 그만큼 높고 유럽과 일본과 그 밖의 나라에서는 그만큼 낮은 이유가 생계환경이 그만큼 나아서일뿐이지 아프리카사람은 더 죄인이고 그 밖의 국가 사람은 덜 죄인이고 그것은 있을 수 없는 겁니다.
어찌 되었든 전적부패 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