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상 2:27-31 (하나님의 저주)
삼상 2:27-31 (하나님의 저주)
이름 : 우리교회(IP:220.81.176.150)
본문 : 사무엘상 2장 27-31절
제목 : 하나님의 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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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08-08-24 16:09
하나님의 저주
2008년 8월 24일 본문 말씀: 사무엘상 2:27-31
삼상 2:27) 『하나님의 사람이 엘리에게 와서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 조상의 집이 애굽에서 바로의 집에 속하였을 때에 내가 그들에게 나타나지 아니하였느냐』
(삼상 2:28)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내가 그를 택하여 나의 제사장을 삼아 그로 내 단에 올라 분향하며 내 앞에서 에봇을 입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이스라엘 자손의 드리는 모든 화제를 내가 네 조상의 집에 주지 아니하였느냐』
(삼상 2:29)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나의 처소에서 명한 나의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의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스스로 살지게 하느냐』
(삼상 2:30)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영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삼상 2:31) 『보라 내가 네 팔과 네 조상의 집 팔을 끊어 네 집에 노인이 하나도 없게 하는 날이 이를지라』
성경에 나와 있는 나쁜 자들을 보게 되면 정말 자신을 지으신 자를 무시하고 막무가내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증오심을 절로 일어납니다. 하지만 어느새 점차 그들의 행동에 대해서 충분히 이해가 되어가는 우리 자신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자신이 오로지 하나님만을 위해 살겠다고 나설 때,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를 하나님과 더불어 미워할 수가 있는데, 어느새 자신조차도 하나님을 멀리하게 되면, 도리어 하나님을 안 믿는 그들 편에 서 있고 싶은 충동을 갖게 됩니다.
동지감을 느낀다고나 할까요. 하나님을 멀리 할 수밖에 없는 자들끼리의 동질감을 공유하게 되는 겁니다. 즉 그동안 하나님 믿어보려고 최선을 다했지만 역시 하나님은 없더라는 겁니다. 하나님에 관해서 사용되는 각종에 용어들과 개념들을 남발해보지만 그것으로 인하여 신의 존재가 증명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척하는 것도 세월지나면 따분하고 지겁기만 합니다. 차라리 속질하게 “신은 없었더라”라고 양심선언하고 나서는 편에 속시원할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마음이 실은 예수 잘믿는다고 여기는 각자의 마음 속에 다 들어있습니다. 지금 잘 믿는다고 자부하기에 하나님에 소홀히 하는 사람들을 보면 당연히 분개하겠지요. 그러나 어느새 자신이 전에 비난했던 자들보다 더 하나님과 멀어진 생활을 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마치 튜브 가지고 해변 가까이 논다고 여기다가 한 눈 팔다보면 벌써 해변하고는 저만치 멀어져서 자기 힘으로 도저히 되돌아 올 수 없는 지경까지 가버리는 경우와 같습니다.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듣게 되는 말들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엄마가 지옥간다면 나도 엄마 따라 지옥갈거야”
글쎄요. 지옥 가는 것도 자기 마음대로 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지옥도 하나님의 허락과 능력으로만 갈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엘리 제사장이 나옵니다. 이 집안은 저주받게 되어 있는 집안입니다. 저주받는 이유도 나와있습니다. 하나님보다 자식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랍니다.
그렇다면 자식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면 저주받지 않는다는 논리가 성립됩니다. 논리로만 그렇지 실제로는 어느 인간이 하나님을 자기 자식보다 더 사랑할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엘리 제사장이 하나님보다 자기 자식을 더 사랑하는 것을 우리는 충분히 이해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식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했다는 조건을 가지고 구원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자력으로 구원될 자가 없듯이 어느 누구도 자력으로 하나님을 자식보 더 사랑할 위인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엘리 제사장의 두 자식은 평소에 하나님이 어떻다는 것을 이론상 많이 듣고 자라났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이론을 앞장 세운다고 그 사람을 신자라고 간주해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단지 하나님은 하나님이 없는 자들이 자기 마음대로 본색이 드러나게 하시고야 마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삼위일체에 정통하고, 신학을 많이 안다고 해서 그것으로 인하여 ‘신자’라고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시기 않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힘으로 구원이 어떻게 성사됩니까? 성사될 수 없습니다. 성사가 불가능합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어린 사무엘을 보세요. 부모는 그를 던져 놔버렸습니다. 하나님께 맡기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무엘은 구원됩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방식을 원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행할 수 없는 방식을 사용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약속입니다. 즉 약속이란 사람들에 의해서 포착될 수 있는 그런 하나님의 방식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약속 성취의 주도권은 하나님이 쥐고 있지 인간이 개입할 수 없는 위치에 있습니다.
소위 불의한 청지기라는 비유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어떤 경리보는 직원이 장부를 제멋대로 조작해서 자신의 앞길을 여는 자금이 되고자 했습니다. 이것은 횡령이요 도덕질입니다. 누가 봐도 이 직원은 나쁜 자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하필이면 만인이 보이기 나쁜 자를 거론할까요?
그것은 소위 자기 능력으로 구원될 수 있겠다고 자부하는 소위 의로운 지혜자들을 부정해버리기 위해서입니다. 즉 하나님은 인간들이 주장하는 신에 관한 화려한 용어들이나 행위들을 피해서 숨어있는 약속의 능력으로만 구원하십니다. 인간들하고 구원에 대해 타협할 의사가 없으시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의 약속은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는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사람들이 관심두지 않고 무시하는 자리에 있습니다. 인간들이 열심히 해서 자기 자신을 꾸미고 자기 자신을 성숙케 하겠다고 노력하는 그 와중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은 묵묵히 제 모습을 갖추어나갑니다. 마태복음 13장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악마가 뿌리 가라지에 대해서 손대지 말고 그냥 두러라“라고 하신 말씀이 나옵니다.
이 세상은 가라지도 함께 자라납니다. 우리 인간들이 나서서 가라지를 아예 뿌리채 제거하려고 해서는 아니됩니다. 인간들은 마치 자신의 최고로 의로운 사람인 것 같지만 실은 숨어있는 하나님의 작업이 따로 있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의 12제자 앞에서 조그마한 어린 아이를 내세우시는 식이 예수님의 구원방식입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같이 하늘나라를 섬기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섬김을 받기 보다는 섬기는 자가 되어라 는 말씀은 인간들을 대단한 열성이나 속은 맹렬한 저항과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작업이 차질나는 경우는 없다는 말입니다. 엘리의 두 아들은 필연적으로 죽이기로 하나님께서 작정해 두신 바가 있습니다.
이것은 아버지의 훈계로 고쳐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 믿음없는 자는 그냥 믿음없는 자로 살아갈 뿐이요 그들의 눈에 띄지 않는 사무엘의 세계는 차질없이 등장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방식입니다. 악마의 일로 너무 불평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악마의 일꾼이 악마답게 하는 것도 다 하나님의 약속 속에 포함된 내용들입니다. 인력으로 존중할 수 없는 하나님을, 하나님의 약속의 능력에 의해서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만 아는 자들이 성도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이 우리 마음대로 사는 것 같아도 결국 하나님의 약속대로만 진행될 뿐임을 우리가 인정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