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815-a 서울강의녹취 : 에베소서 제 17강
20080815-a 서울강의녹취 : 에베소서 제 17강
이름 : 오용익(IP:59.3.201.241)
에베소서 제 17강 (이 근호목사, 2008년 8월 15일-a, 서울의존교회)
에베소서 3:14부터 보겠습니다.
에베소서 3:14-17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사람들은 땅에만 살고 있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요? 그런데 성경에 보니까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라고 되어 있지요? 사도바울은 땅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고 하늘과 땅을 자꾸 연결시켜 주려고 애를 써요. 하늘에 있는 세계와 땅에 있는 사람들을 연결시켜주려고 하는데 하늘에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해, 해가 어디에 있습니까? 땅에 있습니까, 하늘에 있습니까? 하늘에 있지요. 달, 달은 어디에 있어요? 역시 하늘에 있지요. 별, 이것도 하늘에 있지요. 구름, 이것도 하늘에 있지요. 그러면 하늘에 있는 구름하고 땅에 있는 여러분의 손바닥하고 어떻게 연결시키겠습니까? 여러분이 손을 휙휙 저으면 하늘에 있는 구름이 딸려옵니까?
‘구름아, 멈추어다오’ 하면 구름이 가다가 스톱 합니까? 하늘은 하늘대로 구름은 구름대로 가고 땅에서는 아무리 손짓 해 가면서 ‘구름아, 게 섰거라. 너는 내 손아귀에 잡혀야 돼’라고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구름은 듣겠어요, 안 듣겠어요? ‘웬 꼬마가 지껄이냐’ 하고 그냥 가버리겠지요.
하늘과 땅에 있는 것을 연결시킨다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불가능하다’ 이겁니다. 해, 달, 별, 구름 이것이 어디에 있다고 했습니까? 그런데 성경에서는 이런 것들이 하늘에 있다고 보지 않고 이 모든 것을 다 합쳐서 땅에 있다고 보는 겁니다. 성경에서 하늘에는 천사, 예수님, 하나님 이런 분들이 계시고 하늘, 해, 달, 별, 구름, 사람, 마귀 이런 것들은 다 땅에 속한 겁니다.
제가 아까 이야기 했듯이 하늘에 떠 있는 구름과 이 땅에 있는 소녀하고 연결을 시켜 보려고 했는데 연결이 잘 되던가요, 안되던가요? 연결이 잘 안되지요? ‘구름아, 나하고 이야기 좀 하자’ 하면 구름이 지나가다가 ‘잠깐 이야기 할까’라고 하는 이런 구름은 없어요. 여러분이 달을 보고
“달아, 우리 집에 좀 와 주겠니?”
“알았어. 30분 뒤에 방문할게.”
이런 달을 봤습니까? 달은 달대로 나는 나대로 연결이 안돼요. 같은 땅에 속한 구름하고 나도 연결이 안 되는데 하물며 하늘에 있는 천사한테 ‘천사야, 이리와. 나하고 놀자’ 하면 천사가 오겠습니까? 안 오지요. 그래서 이것은 사람으로서는 가능하지 않은 ‘불가능성이다’ 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볼 때마다 무엇을 느끼느냐 하면 ‘이 성경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가능하지 않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문제 하나 나갑니다. 아까 땅에 있는 소녀가 하늘에 있는 구름을 못 잡았죠? 그러면 ‘그 땅에 있는 소녀가 구름을 탄다.’ 이것이 가능합니까, 불가능합니까?
이것도 안 되는 일이지요? 아무리 높이뛰기 선수가 높이 뛰어 올라도 구름위에 올라타지를 못하잖아요. 마찬가지로 ‘소녀가 구름 위를 탈수 없듯이 소녀가 저 천사가 살고 있고 예수님계시고, 성령님, 하나님이 계시는 저 천국에 간다.’ 이것도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제가 교회에서 봉사해오고 있는데 교회 오는 어린이와 여러분이 정말 신기해요. 되지도 않는 일을 왜 시도하십니까? 대체 뭘 믿고? 일층에서 2층, 3층 오르는 것도 계단타고 올라야 하는데 계단도 없는 곳에 아무 걸치는 것도 없는 곳에 어떻게 하늘나라 갈 수 있다고 그렇게 장담합니까?
그런데 만약에 여러분가운데서 구름위에 올라가 본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구름 위에 가 본 적이 있는 사람이 예쁜 소녀로서 의존교회 앞자리에 앉아 있다고 합시다. 그럴 때,
“얘야, 너 구름위에 올라가 본적이 있다면서?”
“올라갔지.”
“어떻게 올라갔는데?”
“날 믿고 날 따라와. 날 따라오면 너도 나처럼 구름위에 올라가게 해 줄게.”
자, 이렇게 된다면 여러분은 그 소녀의 말을 듣겠습니까, 안 듣겠습니까? 아마 안 믿고 싶어도 밑져봐야 본전이니까 믿겠지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많은 사람들이 박수를 쳤어요. ‘아이고, 골치 아픈 인간 잘 죽었다. 저렇게 죽을 것을…, 끝, 예수는 끝났다’라고 여겼는데 그 예수님이 몇 일만에 다시 되살아났습니까?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났지요.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시고 40일 만에 구름타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올라가시면서 올라가시기 직전에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을게. 내가 끝까지 너희들과 함께 있을 것이다’ 그 말씀을 하시고 구름타고 올라 가셨어요. 구름타고 하늘에 오른 최초의 인물입니다.
그전에 엘리야가 불 수레를 타고 올라간 적도 있지만, 죽었는데 사흘 만에 부활해서 구름타고 하늘에 올라가신 분은 예수님이 처음입니다. 그 때부터 사람들은 ‘나, 예수 믿을래. 나 예수 믿습니다. 나, 예수님께서 가신 그곳에 예수님 믿으면 나도 갈 수 있습니다’라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한두 명씩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예수 믿고 난 뒤에 돈을 많이 벌었겠어요, 아니겠어요? 돈하고는 관계없었어요. 그 사람들이 예수 믿고 난 뒤에 출세하려고 애를 많이 썼겠습니까? 아니겠습니까? 신경 안 썼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그들에게 무엇이 중요한 문제였을까요?
‘나도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예수님 가신 그 나라에 들어가기만 하면 이 땅에서 내가 어떻게 살든지 간에 그것은 나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면 누구나 다 할 수 있습니다. 사법시험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거 합격하면 나중에 변호사, 검사, 판사 되는 시험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어렵다는 시험이 사법시험인데 어렵다고 해도 열심히 공부하면 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어렵지만 될 수는 있지요. 의사전문의 시험도 참 힘든 시험입니다. 의대 13년 동안을 공부하고 내과 산부인과, 이런 전문의 시험 치는 것도 아주 어려워요. 전문의 딴 분들을 보니까 한 달 전부터 방 얻어 놓고 자기들끼리 모여서 토론하면서 공부한대요.
이 시험도 힘들기는 하지만 그래도 열심히 하면 되겠어요, 안되겠어요? 될 수도 있겠지요. 그러면 소녀가 구름위에 올라가는 것은 되겠어요, 안되겠어요? 그것은 아무리 애써도 안돼요. 마찬가지로 천사들이 살고 있는 이 천국에 우리가 열심 낸다고 들어갈 수 있겠어요, 없겠어요? 그것은 안 됩니다.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한번 따라 해 보세요. ‘불가능하다!’
이것은 불가능해요. 사법시험 열 번 합격한다 해도, 의사전문의 시험 백번 합격한다 해도 이것은 안 되는 일이고, 소녀가 구름위에 못가는 것처럼 이것은 사람에게는 인력으로 안 되는 일이고 허락되지 않았어요. 그러면 이 불가능한 것이 가능하게 되는 것은 여기에 다른 무엇이 들어와야 됩니다.
요새 목사님이 불교에 대해서 공부를 하고 있어요. 불교에서는 우주의 탄생에 대해서 뭐라고 이야기하는지, 불교에서는 인간에게 달린 코가 무엇 때문에 있다고 하는지, 눈이 있고 뇌가 있는 것을 어떻게 설명하며, 마지막 우주의 끝남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불교에서 말하는 마음은 무엇이며 영혼은 무엇이고 죽고 난 뒤에는 어떻게 된다고 하는지…등을 공부하고 있어요.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이 지상에서 49일 동안 돌아다닌다고 이야기해요. 불교가 그렇게 연구를 많이 해도 불가능합니다. 불교의 중들이 무엇을 인정하지 않느냐 하면, 불가능이 가능하게 되려면 이 중간에 무엇이 들어와야 된다는 이것을 불교, 절에 다니는 사람들은 인정하지 않아요.
기껏 하는 것이 자기를 열심히 닦고 문질러서 깨끗하게 하겠다는 식으로 하는 겁니다. 여기에 비타500 병이 있는데 이 병을 제가 손수건 가지고 100일 동안 정성을 다해서 닦고 또 닦으면 이 병이 무엇이 되겠어요? 병이 되지요. 그런데 이 병을 제가 정성들여서 닦았는데 이 병이 달걀이 되는 수가 있겠어요, 없겠어요? 없지요.
종이로 학을 만들면 종이학이 됩니다. 그러면 종이로 학을 두 개 접으면 그게 진짜 학이 됩니까? 아니면 그대로 종이학입니까? 종이학이죠. 그러면 999번째 종이로 만든 학은 진짜 학입니까, 종이학입니까? 종이죠. 1000번을 접으면? 역시 종이죠. 그런데 사람들은 ‘1000번을 접어야만 학이 되는 사연을 네가 아느냐’고 하고 있어요.
999번째까지 종이학이던 것이 1000번째 그것이 뭐라고 그게 학이 됩니까? 1000번을 접어도 맨 종이학입니다. 여러분 집에 가서 실험해 보세요. 이 병 가지고 백일동안 닦아 보세요. 맨 비타 500입니다. 닦아 봐도 소용없어요. 저와 여러분을 병이라고 해 봅시다.
이 병이 저와 여러분 같은 것인데 이 병에다가 갈고 닦으면서 ‘비나이다, 비나이다. 신령님께, 신씨에게 비나이다. 이 병이 달걀 되게 하옵소서’라고 백날 빌면 이 병이 달걀 됩니까? 닭이 돼요? 아마 백일 빌면 병 수거하는 쓰레기차가 올 겁니다. 불교신자들은 그저 병 같은 나를 갈고 닦고 문지르면 뭐가 되기는 된다는 거예요.
되기는 뭐가 됩니까? 벗기면 때만 나오지 되는 것 아무것도 없어요. 사람은 죽으면 뭐 됩니까? 흙 돼요. 두 번 죽으면 뭐 됩니까? 흙이 됩니다. 백번 죽으면? 맨 흙입니다. 골백번 죽었다가 깨어나도 흙입니다. 안됩니다. 오늘 강의 끝났다! 교회 와서 도 닦고 무슨 짓을 안돼요. 되는 수가 없어요. 여러분 사기꾼에 속아 넘어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공부 99일 동안 하다가 100일째 하면 구원받습니까? 안돼요. 천일을 해보세요. 안되지. 성경공부 왜 합니까? ‘아, 안 되는구나.’ 그것을 알라고 성경공부를 하는 겁니다. 사도 바울 뿐만이 아니고 성경전체가 그래요. 성경전체가 사림의 힘으로 성경말씀 지켜서 구원받을 수가 없다는 거예요. 이것이 되지를 않아요.
그런데 여기에 뭐가 들어와요. 따라 해 봅시다. ‘약속!’ 약속이 들어옵니다. 약속이 들어올 때 어떻게 들어오는가? ‘나는 불가능하다’라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면서 들어와요. 여자가 천일동안 기도한다고 남자가 됩니까? 안되지요.
그런데 예를 들어서 제가 구원자라고 치고 연극을 합니다. ‘여러분, 여자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여자는 구원되지 못하고 남자만 구원받습니다. 그런데 너 여자지?’ 라고 하는 거예요. 그럴 때 뭐라고 합니까?
“저, 여자가 맞습니다.”
“여자는 구원돼, 안 돼?”
“구원 안 됩니다.”
“알기는 아는구만.”
약속이 올 때는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아무리 해도 우리 힘으로 구원될 수 없다는 것 확실히 보여주면서 약속이 우리에게 들어오게 됩니다.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출애굽기 32장을 봅시다. 서울도 그동안 많이 더웠기 때문에 집중이 잘 안될 것이라고 보고 진도를 많이 나가지 않으면서 여러분의 사정을 헤아리면서 강의해 가겠습니다.
출애굽기 32:8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숭배하며 그것에게 희생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
거기에 ‘송아지를 부어 만들’었다고 되어 있는데 그것이 다 누구를 위한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까? ‘자기를 위하여.’ 자기를 위하여 만들었으니 그것을 우상숭배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 세상에 살면서 자기를 위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어요?다 자기를 위해서 살지요.
그런데 그게 뭐냐?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할 때에’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신을 섬기지 말라’는 그 말이거든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아 신을 섬기되 하나님을 위하여 신을 섬겨야지 너 자신을 위하여 신을 섬겨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 했는데 그것을 지킬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할머니, 교회 누구를 위해서 나왔습니까?” 라고 물으면 백이면 백 명의 할머니가 다
“그거야 날 위해서 나왔지. 나 천당 가기 위해서 나왔어.”
모두 다 ‘자기를 위해서’ 라고 합니다. 그것은 결국 뭐예요? 우상숭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제 말이 과하다고 여기지 마시고 들어보세요. 여기 예배당, 여기는 상가 2층에 이렇게 있지만, 태풍이 불어와서 예배당 지붕이고 뭐고 홀라당 다 날아가면 거기 사람만 남게 되죠. 그러면 홀라당 날아간 예배당이 교회입니까, 사람이 교회입니까?
그러면 그 사람에게 물어보세요.
“집사님, 누구를 위해서 교회 나왔습니까?”
“날 위해서 나왔지요.”
“그 옆에 목사님도 권사님도 누굴 위해서 교회 나왔습니까?”
“다 날 위해서 나온 거지요.”
그러면 이 교회는 결국 시내산 밑에서 뭐한 겁니까? 우상숭배를 한 거지요. 어느 산? 시내 산. 시내 산에 올라간 사람 누구입니까? 모세. 모세만은 누구를 위해서? ‘자기를 위해서’ 입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입니까? 모세만큼은 ‘하나님을 위해서’입니다. 모세는 거기서 밥도 물도 안 먹었어요.
모세는 시내산 위에서 40일 동안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함이었습니다. 모세는 말씀을 듣기 위해서 시내산 위에 올라갔는데 산 밑에서는 뭘 하고 있었습니까? 산 밑에서 ‘말씀을 위해서?’ 아닙니다. 산 밑에서 ‘하나님을 위해서? 아니지요.’ 산 밑에서는 ‘자기를 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까 산위에서 모세는 ‘하나님을 위해서’, 산 밑에서는 ‘자기를 위해서.’ 누가 우상입니까? 산 밑이 우상입니다. 산 밑에 우상, 자기를 위해서 살면서 거기서 예수 섬기고 성령 섬기고 하나님 섬기고 백날 해봤자 그것은 우상 집단입니다. 절입니다. 불교의 절에 가는 사람들이 부처 위해서 갑니까? 다 자기와 자기 가족 잘 되라고 빌기 위해서 옵니다.
오다 보니까 어느 감리교회 같던데 ‘자녀를 위해서 기도하기’라고 붙여 놨어요.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기도하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기도하기’라고 하면 교회 옵니까, 안 옵니까? 안 오지요. 교회 왜 옵니까? 절에 가서 하던 행세를 이제는 교회 와서 하는 행세인데 절에 갈 때 누구를 위해서 갔습니까? ‘자기를 위해서.’
절에 가던 사람이 교회 가는 것으로 바뀔 때 누구를 위해서? ‘자기를 위하여.’ 십계명 제 4계명에 자기를 위해서 사는 것은 우상숭배라고 해서 신이 달라요. 자기를 위한 예수, 예수도 아니고 자기를 위한 하나님, 하나님도 아니고 자기를 위한 성경은 성경도 아니고 전부다 엉터리란 말이죠.
이런 엉터리 같은 신을 믿으면서 자기들은 모였다고 이걸 이름붙이기를 교회라고 이름을 붙이는 거예요. 제가 보기에 그것은 교회 아닙니다. 그것은 우상집단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하나님, 제가 어떻게 하면, 어떤 방법을 쓰면 복을 받겠습니까’라는 가능성, 이것은 자기 좋으라고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러나 진짜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 자신밖에 모른다는 것을 지적하는 거예요. ‘학생, 남자만 구원받는데 학생은 여자지?’라고 하면 학생은 뭐라고 답변해야 됩니까? ‘저는 여자 맞습니다만 구원이란 주께서 이루어주실 줄로 믿습니다’라고 해야 됩니다.
‘나는 비록 여자라서 구원 못 받지만 주께서는 말씀대로, 약속대로 하실 수 있는 줄 믿습니다. 우리는 못하고 우리는 나밖에 몰라도 그 던져진 말씀이 말씀대로 이루어지면 모든 구원이 이루어질 줄로 저는 믿습니다’라고 되어야 합니다. 한번 시험해 볼까요? ‘남자만 구원받는데 너는 여자지?’라고 하면 뭐라고 답해야 됩니까?
‘맞습니다. 저는 여자 맞습니다. 하지만 주의 말씀대로 될 것입니다.’(눅 1:38) 이것을 누가 이야기했습니까? 예수님 모친이 이야기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아기를 낳고 난 뒤에는 선지자들이 아기를 안고 ‘주여, 이제는 종을 편안히 쉬게 놓아주시는군요. 주의 약속대로 이렇게 메시아가 탄생하다니, 우리는 불가능해도 주님의 가능으로 약속이 이루어졌군요’(눅 2:28-32) 하면서 기뻐했습니다.
한번 물어봅시다. 특히 가정 주부되시는 분들에게 묻습니다. 본인이 하는 밥이 맛있던가요? 밖에서 사먹는 밥이 맛있던가요? 역시 밖에서 사먹는 것이 더 맛있을 거예요. 내가 밥 지은 것도 아니고 반찬 한 것도 아닌데 돈만 주면 불고기도 구워주고 상도 다 차려주지요. 집에서 불고기 구우면 짜증만 납니다.
‘더운데 대충 먹지 무슨 고기반찬을 찾고…장 볼 때 한우냐 수입쇠고기냐 이것도 따져야 되고…어찌 되었든 빨리 먹고 나가라.’ 이런 식으로 되지요. 그런데 돈 좀 내고 한우 고기 집 가면 ‘돈 냈다. 한우 가져와라’ 이렇게 큰 소리 치잖아요. 에베소서 본문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다. 에베소서 3:12을 봅니다.
에베소서 3:12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
‘소고기 가져와! 나는 내가 만든 불고기는 안 먹어. 나는 주님이 하신 것을 먹고 싶단 말야. 가져와! 오직 주님의 뜻대로 주님의 공로로 예수님이 홀로 해내신 것 믿습니다. 나는 내가 교회에서 충성 봉사한 것 안 바라봅니다. 나는 내가 헌금하고 충성한 것 그것은 항상 불가능성으로 남습니다. 그런 것들로 인하여 구원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당당하게 구원받는다고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이 못난 내가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무것도 한 것이 없기에 그러합니다.’
내가 아니고 누가 했습니까? 예수님이 자기가 던진 약속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죽고 부활함으로써 이것이 내게 믿어진다는 말이죠. 주님께서 약속대로 ‘나를 믿는 자는 영생 얻으리라’고 하면 그게 그대로 믿어지는 거예요.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받는 겁니다. 행함이 아닙니다.
제가 아까부터 한 이야기가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이 석차를 매기고 등급을 매기고 계급을 매기는 것은 무엇을 기준으로 한 것인가? 자기가 얼마나 똑똑하고 얼마나 열심히 했고 얼마나 자기가 가진 자질과 능력을 발휘했느냐, 하는 행함을 가지고 한 줄로 세웁니다.
그런데 천국은 그런 것을 가지고 순서를 지우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이란 것은 내가 아무것도 한 적도 없는데 홀로 예수님이 하셨다는 것을 인정함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은 구원 받습니다. 이것이 어려운데 다시 한 번 적어 봅시다. 제가 아까 이야기 했잖아요. 소녀가 구름위에 못 올라간다고요. 마찬가지로 우리가 천국을 못갑니다.
이것은 분명히 알아야 돼요. 구름도 못타는 것이 어디 천당을 가요? 안 돼지요. 안 되는데 하나님의 약속가운데 무슨 약속이 있느냐 하면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 10:13) 하는 약속이 있어요. 여기에 백지가 있는데 여기에 뭘 썼는지 사람들은 몰라요. 제가 여기에 무엇을 쓴 뒤에 이것을 여기 앉아 있는 노란 셔츠 입은 소녀에게 줬습니다.
분명히 받았지요? 종이만 받았습니까? 그 안의 내용도 받은 겁니까? 그 안의 내용이 뭐라고 쓰여 있는지 펴서 읽어 보세요.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이 내용을 받았습니다. 절에 다니는 사람들은 이것을 줘도 안 받아요. 절에 다니는 사람들은 이것을 줘도 안 받아요. 자기를 갈고 닦기 바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에게 이 말씀이 들어올 때, ‘이것을 행하겠습니다’가 아니라 ‘주여, 하필이면 이 말씀을 왜 저에게 주십니까’라는 차원에서, ‘주의 이름으로 구원 받는다’는 그 말, 그 약속의 편지를 이 많고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왜 저에게 주십니까?‘ 라고 하는 그 순간 그 사람은 이 편지에 적힌 내용대로 그 사람에게 실시가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그래요. 이 편지를 받은 사람은 그 편지의 내용대로 그 사람의 운명이 되도록 그 사람의 팔자, 그 사람의 미래가 되도록 말씀이 그 사람에게 작용해서 적용을 시켜 버려요. 눅눅한 버터를 여러분의 셔츠 안 가슴속에 품고 있으면 한 시간 뒤에 보면 어떻게 됩니까? 버터가 녹아서 내 몸을 적시고 온 몸에서 냄새가 진동하겠지요?
이 말씀을 우리 속에 담아버리면 이 말씀 자체에서 능력이 나와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는 말씀이 믿어지는, 그래서 ‘내가 복음을 알다니’ 하는 당당하고 담대하면서도 기쁨과 감격과 환희가 내 온몸을 적십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버터는 내 피부나 적실뿐이지만 말씀은 우리의 마음까지 파고 들어오는 겁니다.
그것이 에베소서 3장 17절에 나옵니다.
에베소서 3: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그 다음에 뭡니까?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이거 우리가 초대했습니까? 아니지요. 예수님이 우리 마음에 들어오신 것이 우리가 우리 마음에 자크를 달아서 열어 드렸습니까? 아니지요. 예수님의 손목을 우리가 잡아 당겼습니까? 아니지요.
우리 마음속에 제 삼자, 예수님이라는 분이 어떻게 있게 되는 겁니까? 그것은 제가 아까 이야기 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된 말씀은 그냥 문자로 있는 것이 아니고 그 말씀이 전달되는 사람에게는 그 사람의 마음속까지 파고 들어와서 말씀에 의해서 변화가 일어나도록 예수님 쪽에서 변화를 주는 현상이 일어나게 되어 있어요.
내가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이 말씀을 지킬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지킬 수 없어요. 그것을 불가능성이라 했어요. 사람은 구름을 못 타요. 사람은 예수를 못 믿습니다. 사람이 예수를 못 믿는 이유를 아까 이야기 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만 챙긴다? 사람은 자기만 챙기는 우상숭배자이기 때문에 자기가 감히 ‘예수를 위하여, 하나님을 위하여’라는 것은 인간 속에서는 불가능해요.
만 날 예수 믿고 하나님을 믿어도 전부 다 누구 좋으라고? 자기만 생각하면서 자기만 좋으라고 하는 그런 인간인데 주님의 편지가 영으로 들어오니까 이제부터는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고 자기를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아가는 아주 희한한 정말 기적중의 기적, 희한한 사람이 되고 말았어요.
“내안에 누구 있다.”
“네 안에 누구 있는데?”
“내 안에 예수님 계시다.”
“네가 언제 불렀는데?”
“내가 부른 적 없어.”
“언제 초대했는데?”
“초대 한 적도 없어.”
“그럼 어떻게 네 안에 들어 왔는데?”
“몰라. 말씀이 오니까 그 말씀의 작용으로 그렇게 되었어.”
“그 말씀이 어디 있는데?”
“에베소서 3장17절.”
“너는 그 에베소서 3장 17절을 믿나?”
“그럼 너는 안 믿어지나???”(우리는 반문하면서)
“나는 안 믿어지는데?”
“나는 믿어지던데.”
“왜 믿어지는데?”
“몰라. 그냥 믿어지대.”
“그럼 내 속에는 예수님이 안 계시는 거네?”
“그럼 안계시지. 왜냐고? 믿음이 없기 때문에.”
“믿으려고 해도 안 믿어지는 걸 어떻게 하냐고?”
“그 자체가 믿음이 없기 때문에 그래.”
믿음이 없기 때문에 믿으려고 하는 거예요. 안에 예수님 계시면 그 자체가 믿음인데 믿음이 없으니까 자꾸 ‘믿씁니다. 믿씁니다’ 이렇게 쌍시옷 붙여가면서 믿으려고 하는 거예요. 여기서 좀 더 어려운 것을 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본인이 하신 말씀은 본인이 알아서 다 이루어내십니다. 에베소서 3:9을 보겠습니다.
에베소서 3:9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보세요. 이 말씀은 이 뜻입니다. ‘나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했노라. 창조한 이유는 그 창조속에 창조 전부터 담겨 있던 비밀을 그 안에 담아서 그것을 전개시키기 위해서 나는 창조했노라’는 그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겠다는 거예요. ‘하나님, 그렇게 하지 마옵소서’라고 신신당부해도 소용이 있어요, 없어요? 소용없어요.
제가 강의 처음부터 지금까지 일관되게 한 소리는 ‘하나님은 자기의 말씀대로 계속 그냥 해 나가고 있다는 것’ 그 이야기만 계속 하고 있어요. 사람이 믿든 안 믿든 하나님은 자기가 내뱉은 말씀과 계획은 차질 없이 그대로 밀어 붙인다는 것입니다. 안경집이 여기 있는데 내가 이 안경집을 밀려고 하는데 그 앞에 개미가 있어요.
개미가 ‘아저씨, 밀지 마세요. 그거 밀면 우리는 이 밑에 깔립니다. 밀지마세요’라고 해도 제가 개미 말을 듣겠어요, 안 듣겠어요? 개미가 있든 뭐가 있든 그냥 밀어 붙입니다. 하나님도 창세전부터 예정된 그 비밀을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세계에다가 담아놓고 죽 밀어 붙여요. ‘하나님, 그러시면 안 되지요. 그렇게 하시면 우리 집에 탈나는데요.’
아무리 그래도 그냥 밀어붙여요. 죽 밀어붙이는데 어디까지 하느냐? 우리 마음속까지 들어와요. 에베소서 3:17에 ‘예수님이 우리 마음에 계시게 한다’고 하는데 한 목사님께 물어 봅니다. 한 목사님은 손님이 내 집에 들어올 때 그냥 들어오도록 방치합니까? 아니면 문 열어주고 인사하고 안내합니까?
뭔가 내 허락이 있어야 되겠지요? ‘실례지만 어디서 오셨습니까?…아, 그러세요. 그러면 문 열어 드릴 테니 들어오세요.’ 안방으로 안내하고 방석 내 오고 그렇게 하면 ‘아, 저 사람 안방에 웬 손님이 왔구나’라고 되잖아요. 그렇다면 예수님이 우리 속에 들어올 때는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합니까, 안합니까?
영접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나를 위해서 살아가는 거예요. 이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설명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오셔도 우리한테 유리한 것, 나한테 좋은 것이고, 또 나한테 불리한 것, 나한테 나쁜 것, 이것이 딱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니라 누가와도 우리는 어떤 경우에만 좋아합니까?
그 하나님이 내가 좋아하는 것을 준다고 할 때는 문을 열어주지요. 나한테 유리할 경우에만 좋아하고 만약에 내게 나쁠 경우에는 적극적으로 저항하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실 때는 사람들에게 유리한 분으로 오신 겁니까? 아니면 사람들에게 불리한 분으로 오신 겁니까? 어느 쪽입니까?
둘 중의 하나인데 어느 쪽입니까? 1) 유리한 것. 2) 불리한 것. 불리한 것이죠. ‘너, 나와 함께 죽자.’ 이렇게 불리한 것입니다. ‘너를 미워하라.’ 불리한 거죠. ‘처나 자식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 불리한 겁니다. 또 예수님께서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사람은 평소에 자기에게 뭐가 좋다는 것을 알아요. 한글자로 뭡니까? 돈! 정답입니다. 돈을 좋아하는데 예수님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했거든요. 그러면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돈을 원하는 내 뜻이 아니라 누구를 주겠다? ‘예수님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하나님 자체를 주겠다’ 그 말 아닙니까?
우리는 돈을 원하는데 어느 인간이 자기에게 손해가 나는 하나님을 영접할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도 없어요. 우리는 우리 힘으로 예수님을 영접할 수가 없습니다. 도리어 예수님을 죽이려고 덤벼들지요. ‘바나바를 살릴까, 예수님을 살릴까?’ 사람들은 ‘바나바요!’ 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는?’ ‘죽여라!’ 했습니다.
중국 관중들이 여자양궁결승전 할 때에 한국 응원했겠어요, 중국 응원했겠어요? 중국 응원했지요. 왜 그렇습니까? 중국은 누구를 위하여? 중국을 위하여. 사람이 예수를 믿든 하나님을 믿든 누구를 위하여? ‘나 자신을 위하여.’ 나 자신을 위하여 있는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은 누구를 위하여?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위하는 하나님 되기를 원하는데 그런 하나님을 우리가 ‘죽여라!’ 해서 예수님이 죽었잖아요.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했어요. ‘너희가 살았다고 여기나 실은 죽은 자다. 왜 죽은 자인가? 자기밖에 모르니까 죽은 자다. 너희들이 하나님을 믿어? 아무리 믿어봐라. 그게 하나님이냐? 우상이지.’
나 좋으라고 믿는 하나님이 전부 다 가짜고 우상이고 지옥 가는 종교, 지옥 가는 교회입니다. 하나님이 진정 원하는 것은 내 뜻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내 속에 들어오셔서 이제는 내가 주인이 아니라 예수님이 주인이 되어서 예수님의 뜻을 펼칠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 그것이 바로 성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