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6장 7-13절 제목 :제자의 참 모습
막 6: 7-13 (제자의 참 모습)
이름 : 우리교회(IP:220.81.176.150)
본문 : 마가복음 6장 7-13절
제목 : 제자의 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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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08-08-17 13:30
제자의 참 모습
2008년 8월 17일 본문 말씀: 마가복음 6:7-13
(막 6:7)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시고』
(막 6:8)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주머니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막 6:9)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하시고』
(막 6:10) 『또 가라사대 어디서든지 뉘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곳을 떠나기까지 거기 유하라』
(막 6:11) 『어느 곳에서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거기서 나갈 때에 발 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저희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막 6:12)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막 6:13)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인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
더러운 귀신을 쫓아낸다는 것은 곧 이 세상이 더럽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시지 않았다면 이 세상은 더러운 세상이 아니라 힘들지만 그래도 억지로 버티면 버틸만한 세상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즉 더러우냐 아니냐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살기에 수월하느냐 힘드느냐로 세상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간들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들이닥치므로서 살기 힘들다 수월하다는 차원이 아니라 더러우냐 거룩하냐로 판정받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거룩한 곳은 어디 있습니까? 없습니다. 사람들은 거룩한 곳을 임의대로 만들고 깊은 산 속에서 사사로운 정을 피하여 마음 수련에 나서지만 그 어디에도 거룩한 곳은 없습니다.
사실 거룩한 곳은 따로 있습니다. 그곳은 하늘 나라 뿐입니다. 예수님은 그 거룩한 하늘에 계시다가 하늘 나라의 거룩을 몰고 이 땅에 나타나셨습니다. 마치 예수님과 제자들의 모임은 낙수물이 떨어지는 홈통 같습니다. 지붕에 있는 물이 땅에 떨어지기 위해서는 건물 모서리에 설치된 홈통을 따로 내려와야 합니다.
이와마찬가지로 하늘의 거룩이란 오직 예수님과 그 무리에 국한 되어 있습니다. 다른 곳에는 거룩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단순히 ‘거룩이 없음’ 정도가 아니라 아예 더럽습니다. 어째서 독단적으로 예수님과 그 무리에만 거룩이 있고 나머지에는 없다고 단정을 내릴 수 있습니까?
그 원리는 이미 구약 때부터 있었습니다. 옛날 이스라엘 나라는 비록 하나님으로부터 ‘거룩한 나라’라는 칭호를 들었지만 실은 그 지역이 다 거룩한 공간이 아닙니다. 거룩한 공간은 따로 있었습니다. 그곳을 성소라고 합니다. 그곳은 테두리가 쳐져 있고 일반인들은 그 테두리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그 테두리 안에서 제사일을 해야하는 제사장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오른쪽 귀부리와 오른쪽 손가락과 오른쪽 발가락 끝에 피를 발라야 그곳에서 일할 수 있습니다. 그곳만이 거룩한 공간이 된다는 말은 곧 그곳 말고는 하나님 눈으로 보기에 더럽다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그 거룩한 성소에서 작업한 제사의 효력으로 나머지 더러운 공간과 사람들이 거룩한 백성으로 불리워지게 됩니다.
이러한 특정 지역이 거룩한 공간이 되는 이치는 그 전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자기 쪽으로 불러내는데 그 근거가 있었습니다. 성소라는 거룩한 공간도 수평적으로 보면 더러운 세속 공간과 붙어있는 상황입니다. 어째서 거룩한 공간이 더러운 세속의 공간 안에 자리잡게 되었을까요?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는 40일 동안 밤 낮으로 아무 것도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습니다. 그래도 얼굴에서는 세상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빛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곳만이 진정 거룩다운 거룩입니다. 이 세상에서 상대적으로 거룩하다느니 하는 것은 다 세속에 불과합니다. 참 거룩이 아닙니다. 도토리 키재기에 해당됩니다.
진정한 거룩이 무엇이냐 하는 것은 수직적으로 봐서 시내산 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우상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상이라는 것은 반드시 ‘자기를 위하여’ 신을 섬기는 것을 말합니다. 즉 산 위에서 모세는 온통 ‘하나님을 위하여’ 넋이 나가있는 반면에, 산 밑에서는 ‘자기를 위하여’ 신을 이용하기에 급급합니다.
오늘날 교회들을 보세요. 사람들은 예배당이라고 이름 하는 부동산에 출입하면서 마치 교회 다니고 있는 것처럼 여깁니다. 그리고 교회의 많은 직원들이 그 부동산들을 관리, 유지, 보수하는데 투입되고 있습니다. 만약에 태풍이 불어서 그 예배당 종탑과 지붕을 홀라당 날려 보냈다고 칩시다. 남는 것은 무엇입니까?
역시 사람 무리만 달랑 남아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무리지어 있는 양상은 꼭 교회 아니라더라도 낚시 동우회나 동창회나 관광 여행단도 무리 지어있습니다. 단지 사람들이 무리 지어있다고 한다면 다른 단체와 차이나는 점이 무엇일까요? 뭔가 차이나는 점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세상의 모든 단체는 ‘자기를 위하여’를 전제로 합니다. 하지만 참된 교회는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를 위하여 모여있습니다. 이 점을 다른 점입니다.
즉 하나님만이 거룩하고 우리는 거룩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무리들입니다. 시내산에 있던 모세가 지상에 내려오게 되면 최초로 이 지상에서 거룩한 공간이 생기게 됩니다. 수직적으로 보면 시내산 위에 밑이 구분되지만 수평적으로 보면, 산 밑과 산 위는 같은 평면에 있는 중심지역과 변두리 지역으로 나뉘어질 뿐입니다.
그래서 성도라는 것이 이스라엘 지역 중심에 자리잡게 된 것입니다. 거룩이 세속 속에 들어와 앉아있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 원리에 의해서 이 세상에는 오로지 더러움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 더러움만 있는 세상 속에 하늘의 거룩이 침투해서 자리잡게 된 것이 바로 예수님과 그 12제자 무리들입니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는 다른 구조를 보이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하십니다. 두 벌을 입지 말고, 지갑도 갖지 말고 어느 집에 들어가서 얻어먹는 식으로 다녀라는 겁니다. 그리고 꼭 지팡이는 갖고 다니라고 합니다. 이런 특징들은 뭔가 곧장 이 세상을 미련없이 훌쩍 떠날 채비를 차리고 있는 자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세상에 밀착하고 집착하는 것이 늘 들썩들썩 떠날 용의가 되어 있는 마음 자세를 보여주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본성을 보십니다. 예수님은 본성을 포기하시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는 자신들의 믿음이 대단한 줄 알았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주신 권세를 가지고 마귀를 쫓아낼 때에는 자신들의 본성이 달라진 줄로 알았습니다.
하지만 막상 예수님께서는 죄인의 괴수로 낙인 찍혀서 저항 한 번없이 십자가 이슬로 사라질 때에 제자들은 각기 자기 살 길을 찾아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인간들이 거룩한 하나님과 거룩한 관계를 유지했다고 자부했으나 다 엉터리였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위하여’를 인간은 평생을 다가도록 포기할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 하늘의 거룩이 어떻게 세속 속에 들어올 수가 있을까요? 모세의 경우를 보면 모세는 산 위에서 내려오면서 양 팔에 언약판을 들고 내려왔습니다. 곧 말씀입니다. 이 언약판이 그냥 그대로 들어오면 모든 인간은 그 더러움으로 인해 죽습니다. 그런데 이 언약판에 피가 묻히면 그 거룩은 그대로 백성들의 거룩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이 일을 위하여 오셨습니다. 인간의 죄+피=사랑이 됩니다. 예수님은 고기잡는 베드로에게 다시 나타나셔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즉 과거의 모든 것을 잊고 오로지 사랑으로만 이야기 하자는 겁니다. 사랑이란 모든 과거를 다 사라지게 합니다. 예수님은 과거 베드로의 배신을 문제 삼지 않으셨습니다. 사랑이란 항상 새로운 미래를 제공해주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긍휼입니다. 불쌍히 여기십니다. 제자란 무엇입니까? 바로 이 긍휼을 입은 자를 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사랑 밖에 모르게 하옵소서. 자신이 일평생 다가도록 돈만 사랑한다는 존재임을 인정하고 그 더러움은 오직 예수님의 긍휼하심으로 사라진다는 사실에 눈에 열리기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