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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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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우주론과 구원론성경신학[신학]

불교의 우주론과 구원론

이름 : 이근호(IP:117.55.140.63)

불교의 우주론과 구원론

2008년 8월 16일 이 근 호 목사

참고서적 : 『觀(관)』 구선 지음 / 봉성기획 (서울 : 1999)

A. 서 론

흔히 불교를 ‘도 닦는 종교’로 알고 있다. 맞다. 하지만 무턱대고 도를 닦는 것이 아니다. 돈을 닦는다는 것은 우주의 대원리에 부합되고 융합하기 위해서 도를 닦는 것이다. 따라서 ‘우주의 대원리’가 어떤 것인가를 설정 작업이 전제 된다. 우주의 모델을 수립해놓고서 그 수립해놓은 모델에 일치되는 자기 존재가 되려 하려는 것이다. 그 우주 모델에 부합되지 못하면 자기만 손해니까.

따라서 ‘도를 닦는 것’은 자신이 예상한 우주와 하나가 되기 위한 수련 작업이다. 그렇다면 불교에서 말한 우주관은 어떤 모습인가? 여기에 물리학과 천문학과 화학과 의학과 생물학과 주역과 심리학과 윤리 같은 것이 총 투입이 되어서 세워진다. 큰 틀을 짜는 것이다. 우주의 생성원리가 우선되어야 하며 그 생성원리에 준해서 우주의 역사나 개인의 인생사가 진척될 것이다. 여기서 비켜나면 윤리적으로 나쁜 짓이 된다.

B. 우주와 인간의 창조와 죽음

이 눈에 보이는 우주는 처음 어떻게 생겼을까? 우주라는 존재가 어떻게 생겼느냐를 따지면 그것은 물리학이지 결코 불교가 아니다. 불교란 우주라는 존재 이전에 생명이 먼저 있었다고 본다. 그래야 인간이 도를 닦아 이 존재라는 굴레마저 벗겨버려서 탈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존재론보다 생명론이 우선이다 는 말은, 대상을 존재론적으로 잡아놓고서 탐구하려는 모든 인간들의 학문(신학, 철학, 과학, 심리학)의 범주 밖에서 논의된다는 말이다.

이는 곧 불교의 생명론에 대해서 신학이나 철학이나 과학의 안목으로서 감히 평가하려 들지 말라는 말이다. 영적 직관에 의해서만 우주의 내막과 교류된다. 이 선(禪)의 경지에서만 밝혀진 사실을 세속의 세계를 알려주려 한다.

원래 에너지 밖에 없었다. 그 에너지는 정숙하고 고요하다. 이것이 생명의 세계다. 이 에너지는 처음에너지(선천 先天 에너지). 하지만 나중에너지(후천 後天 에너지)가 들이닥친다. 나중에너지는 먼저 에너지에 부딪치고 흡수되기도 하고 튕겨지기도 하였다. 이 부딪힘에서 나중에너지(후천에너지)를 대신하여 색다른 에너지 두 종류가 생겼는데 그것이 바로 양기와 음기다. 서로 대립되는 성질을 나타내는데 양기는 안으로 당기는 성질이 있고 음기는 밀어내는 성질이 있다.

어쨌든 이로서 ‘처음 고요’를 유지하려는 에너지와 이쪽으로 당기려는 양기와 밀어내려는 음기로서 세상의 모든 우주 만물을 다 설명할 수 있다. 물질이란 양기와 음기의 스파크에서 발생한다. 이로서 물은 양기적 물질과 음기적 물질로 나뉘어졌다. 생겨난 물질이 생명의 중심부로 쏠리면 생명은 거부반응을 보인다. 이 거부반응으로 물질들이 처음 에너지에 틀로 밀리고 이 밀려버린 물질이 다시 생명의 중심부로 왔다 갔다 하는 방향을 갖게 되는데 이 방향성으로 인해 파장이 발생한다. 이로서 이 물질의 대우주는 물질이 뿜어내는 ‘파장’의 세계가 된다. 이 파장들이 고유 파장이다. 이제부터 벌어지는 모든 물질의 결합과 해리는 파장이 던지는 진동수의 일치여부와 관련 있다.

물질이 속도가 가해지고 파장이 강해지면 이 ‘혼돈’의 생태에서 빠져나오는 물질과 파장이 있다. 먼저 에너지 틀을 빠져나오는 것이다. 이것이 양자 물리학에 말하는 ‘특이점’이고 이 특이점에서 시간과 공간이 창조되기 시작한다.

공간이란 물질 입자가 전에 있었던 먼저 에너지 틀에서 가졌던 관성적 진동에 의해서 차원대가 형성된 것이다. 즉 공간이란 파장의 폭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서로 다른 진동수를 가진 생명들이 각자 갖고 있는 고유 진동수에 따라 살아갈 수 있는 삶의 터전이 되는 것이다.

이제 물질은 안정상태를 유지하면 분별의식을 갖추게 된다. 여기에 6개의 분별의식이 나온다. (여섯 개의 분별의식이란 나중에 인간의 신체로 발현하게 되면 안이비설신의, 즉 눈과 귀와 코와 혀와 신체와 의지:두뇌의 의식이 되는 것이다) 6개의 분별의식이란 원래 생명에는 없었던 것이 혼돈을 거쳐서 나온 것이다. 이것이 존재다. 이 존재화된 생명을 ‘원초신(原初神)’이라고 지칭해두자. 이 원초신을 앞으로 유지시켜 주는 에너지는 어디서 공급되는가? 그것은 나중에너지(후천 에너지)에서 주어진다. 이 후천에너지가 주입되면서 원래 생명과 기질이 달라졌다. 좋다 나쁘다 라는 분별을 일으키는 의식활동을 하게 된 것이다. (선과 악을 분별하는 의식의 발생)

의식과 의식이 교류가 일어나면서 원래 있던 각각의 의식은 주체 의식이 되고 다른 의식과의 교류로 인하여 형성된 파장은 객체 의식이 된다. 주체 의식의 파장과 가까운 파장은 ‘좋은 것’이 되고 주체 의식과 멀어지는 파장은 ‘나쁜 것’이 된다. 이러다보니 점점 주체로 삼은 고유 진동수 중심의 체계가 갖추어지는데 이러한 생명이 원신(原神) 혹은 ‘영(靈)’이다. 원신과 원초신이 다른데, 원초신은 일곱 가지의 의식(6개의 의식에다가 고요의 식을 첨가해서 7개다)의 면모로서 정립되었던 것과는 달리 일곱 가지 의식의 면모 중에 하나의 면모가 중심이 되어 나머지 여섯 가지 면모가 적절하게 결합되어 있는 상태로 하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따라서 원신의 종류에는 천인(天人) 곧 신, 인간, 식물, 동물, 무정물, 원생물, 그리고 틀 지워진 활동적 에너지 등이 있다.

인간 원신이 물질공간이 가지는 고유 진동수와 일치되면서 인간은 외롭고, 슬프고, 기쁘고, 사랑하고, 미워하는 등등의 감정의식이 발생하는데 여기서 생겨난 물질 입자를 혼이라고 한다. 혼이 생기면 영이 생길 때와는 달리 외부의식계가 만들어진다. 물질 입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눈, 귀, 코, 혀, 신체, 두뇌 같은 것이 생겨난다. 영이 만들어낸 것은 내부의식계라면 혼이 만든 것은 외부의식계이기에 이로 인해 생명은 두 개의 주체의식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이 둘의 주체의식이 결합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한다. 나중에 물질화되면(원신체가 되면) 서로의 원신을 배양하고자 하여 성적인 접촉을 하게 된다.

불교에서는 우주를 인간 중심으로 창조된 것으로 보고 있다, 원래 고요한 에너지에서 빠져나오는 인간의 원신이 진동수가 높은 물질 세계로 들어오면서 인간 원신과 비슷한 진동수를 가진 것들끼리 모여들었는데 이로서 우주는 인간 중심으로 서열화가 매겨진다. 즉 인간 원신과 가까운 것은 원신체 공간이 되고 그 밖으로는 물질체 공간이 된다. 원신체 공간은 원신에서 생성되는 에너지가 있는 반면에 물질체의 공간은 그러한 에너지가 없어 수동적 변화를 겪을 뿐이다.

이로서 인간 원신들은 물질의 결합과 분열에 영향을 주게 된다. 인간 원신의 힘이 미치는 장(場) 안에서 물질은 드디어 입자가 된다. 원신체의 공간은 물질 입자가 분열과 융합을 하면서 방출해 놓은 열과 압력 때문에 ‘고(高) 에너지’ 상태가 된다. 이 때에 나타난 변화가 공간의 팽창과 빛의 생성이다. 공간에서의 밝은 부분은 인간 원신의 혼이 이루는 부분이고, 공간에서의 어두운 부분은 그 밖의 공간이다.

이렇게 해서 공간은 원신체와 물질체와 궁창, 이 세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이 원신체 중에서 인간 원신이 일반적 원신과 분리된 것이 형상화된 인간이며 나머지 일반적인 원신체는 혼의 상태로서 일정한 공간에 거주하게 된다. 물질체들은 무정(無情)으로서 흙과 물, 불과 공기가 되는 것들이 있는가 하면 하나의 별이 되는 것도 있다.

별들이 물질 공간에 생겨나면서 물질공간 자체는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힘의 영향권 안에 들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인력(引力)’이다. 이 인력으로 인해 모든 생명들은 인력의 영향을 받게 되는데 여기서 생긴 것이 바로 자기 보호 본능이다. 외부인력에 저항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인해 분리체의 형상이 고체화되는데 이 저항성이 뼈와 살, 피와 골수, 힘줄과 신경조직, 경락과 오장육부가 만들어지는데 영향을 입힌다.

하지만 이 육체는 원신 인간의 육체이지 결코 지금의 인간 육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 원신은 물질을 양분으로 섭취하는 것이 아니라 고요에서 생성된 에너지만으로 충분하게 활동하게 된다.

인력이 증가하면서 원신들은 높아진 공간 진동을 견디지 못해서 각자 적절한 장소로 나뉘어게 된다. 이 원신들이 자기 고유 진동수에 맞는 별들을 찾아 살게 된다. (즉 지구 이외에도 원신 인간들이 있다는 뜻) 그 중의 한 종류가 바로 지구로 이주해온 원신이다. 지구로 온 원신은 지구의 중력과 기업에 맞는 신체구조를 지니게 된다.

대기 중의 산소는 인간 원신들로 하여금 육체적 틀을 보존시키는데 있어 결정적인 장애가 된다. 그래서 이 때부터 지구에 온 인간 원신들은 물질체에 있는 양분을 섭취함으로써 산소가 가지는 산화성을 극복하고 그 스스로의 육체를 생장시켰다. 위장에 있는 소화액도 산소와 결합하기 위한 조건을 갖추기 위함이다.

오장(심장, 간, 신장, 폐, 비장) 육부(대장, 소장, 위장, 방광, 담, 삼초)에서 오부는 물질 양분을 섭취하는 기관이라면 오장은 의식 활동에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하기 위한 내분비 활동을 제공한다. 오장에 저장되지 못하는 양분들은 뼈로 향하여 뼛속에 저장되는데, 이때의 인간 원신을 이루는 인체 내에서 유일하게 비어있는 공간이 뼈 속이기 때문이다. 이 뼈 속의 양분이 생명력을 만나게 되면 정(精)이 생긴다. 이 정 속에는 인간 원신이 물질을 양분으로 섭취하기 시작한 이후의 습성이 그대로 기록된다. 이 정이 나타나는 고유 진동수는 본래의 고유 진동수와 달라서 한 몸을 이루고 있으면서도 육신과는 서로 이질화된 상태가 된다. 그래서 인간 원신은 스스로 이질화되는 있는 ‘정’을 분리시키고자 한다.

이것은 오욕칠정(五慾七情)이다. 이 정을 물질체와의 접촉에서 그 욕구를 채우려 한다. 그 대상이 바로 물질체의 여자다. 물질체와 원신체는 서로 다른 극성으로 인해 정과 정이 합쳐지는데 이것이 포태를 이룬다. 음정과 양정이 합쳐져서 포태로 수정되면 외부에서 영혼이 들어와서 수정란에 깃든다. 물질체의 정은 정 자체가 고요함을 함유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외부로부터 영혼을 받아들여야만 생명성을 갖게 되고, 원신체의 정은 자체 내에 고요함(적정성 寂靜性)을 갖고 있기 때문에 외부에서 영혼을 받아들이지 않고도 생명성을 가질 수 있다.

포태를 통해 태어난 인간 원신의 자손들은 이 때부터 생로병사의 네 가지 고통을 받게 된다. 원신체와 물질체의 결합으로 태어난 인간 자손은 아버지의 원신에서 분리된 양정 자체가 영혼이 되고 어머니의 음정(陰精)은 육체를 이루는 바탕이 된다. 이것인 신인류다.(창세기 6:3)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아기는 자신만의 고유 진동수와 거의 일치된 진동수를 갖는 날에 태어나게 된다. 따라서 음양오행의 역학에서 보면 사람이 태어나는 날과 달, 년과 시를 알면 그 사람의 성품을 알게 된다. 인간이 살면서 정기적으로 육체와 영혼과 진동수를 일치시켜 주는 것이 필요한데 이 일을 위하여 물질체에 생긴 습성이 바로 잠이다.

사람이 죽게 되면 영혼과 육체는 분리된다. 일단 죽게 되면 중음(中陰)의 기간을 맞이하게 된다. 49일 동안이다. 중음 기간을 원만하게 보내는 것은 망자의 몸에 의해 좌우된다. 영이란 두뇌에 있으면서 6가지 신체의 의식을 통제하는 근원적 의식이었다. 그러다가 죽음이 임하면 머리에서 심장 쪽으로 이동한다. 혼이란 살아 생전에 오장에 흩어져 거하면서 생명이 가지는 의식 중 감정이 발현되는 근본이었다. 에너지를 저장해서 공급하여 안, 이, 비, 설, 신, 의가 활동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다가 죽음이 임박해서는 각각의 장기가 갖고 있는 혼이 거두어져서 심장에 합쳐졌다가 머리 쪽으로 이동하여 정수리를 통해서 빠져나간다.

병으로 죽을 때와 사고로 죽을 때와 수명을 다 해서 죽을 때가 중음 기간을 통과하는 절차가 다 다르다. 즉 영과 혼이 원만하게 전이되지 못하고 사고사일 경우에는 사고 난 상처부위를 통해서 급하게 빠져나가기에 정상적으로 정수리를 통해서 빠져 나가지 못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성품이 원만하지 못하고 악업이 많은 사람의 영혼의 전이도 원만히 이루어지지 못한다. 죽을 때 큰 고통을 느끼게 된다. 그렇게 되면 중음기간 동안 다른 영혼의 침해를 받을 수 있다.

중음의 기간이 49일부터 길어져 연장되면 중음신(中陰神)이 된다. 죽음의 세계는 유계(幽界)와 영계(靈界)와 신계(神界)로 이루어져 있다. 유계는 죽음에 적응 못한 생명들이 사는 세계이고, 영계는 죽음에는 적응했으나 임의로운 활동성을 갖지 못한 생명들이 사는 세계며, 신계는 죽음에 완전히 적응해 그 활동이 자유로운 생명들이 사는 세계다.

일반적으로 망자가 유계에 들어가면 거기서 30년을 보내게 되고, 영계에 들어가면 120년을 보내게 되면 신계에 들어가면 600년 내지는 800년을 보내게 된다.

영혼이 세분화된 인간 원신의 아들들은 하나의 영혼이 수많은 사람들의 물질체가 되어 태어나기도 하고 하나의 영혼이 수많은 동물이나 식물이 되어 태어나기도 한다. 이것이 윤회다. 그런데 윤회가 주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그들의 자각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즉 윤회를 거듭하면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터득하는데 이는 곧 처음의 고요(寂靜)을 다시 찾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육체를 갖고 살던 생명이 자기 내면에 적정(고요)을 갖추지 못하면 6도(六度)에 해당되는 범주 안에 놓이게 되는데 그 육도란 바로 천상계, 인간계, 지옥계, 축생계, 아귀계, 아수라계의 여섯 세계를 말한다. 이 여섯 세계의 활동은 곧 지구의 물리적 환경을 변화시키게 된다. 육도윤회계 중 영혼이 스스로 활동할 수 있는 에너지를 얻을 수 없는 아귀계나 아수라계나 축생계에 있는 생명들은 다른 외부 세계의 진동수를 급격하게 높여주어서 결국 지구는 대환란을 맞이하게 된다. 이런 상황 속에서 별의 표면에서 이주해왔던 원신체들은 다시 지구를 떠나 버리고 지구에는 인간 원신의 아들들과 물질체만이 남게 되는데 이것들은 거의 다 죽게 된다.

생명이 물질적 한계를 벗어나 새로운 생명으로 진화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윤회의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 이것은 생명 자체가 갖고 있는 고유 진동수로 인한 육체의 한계성 때문이다. 육체를 갖고 있는 상태에서 진보된 의식을 갖게 된 생명은 다시 영혼으로 돌아가서 그와 같은 원신적 구조를 갖고 있는 생명을 만나 새로운 육체를 갖게 됨으로써 물질적 진화의 한계를 극복하고 끝없는 진화의 길을 가게 된다.

C. 우주론에 입각한 구원론

불교의 핵심은 마하반야바라밀다에 있다. ‘마하’라는 것은 절대적 존재를 말하고, ‘반야’라는 것은 지혜를 말하고, ‘바라밀다’라는 것은 극락의 세계로 건너감을 말한다. 바로 이것을 실행하는 종교이다.

불교의 지혜인 반야를 요약한 경전이 반야경이다. 이 반야경의 첫머리에 ‘관자재’가 나온다. 그 다음에 나오는 단어가 ‘보살’이다. ‘관’이란 본다는 말이고 ‘자재’는 ‘스스로 있는 신’이라는 말한다. 그 뒤에 ‘보살’이라는 말을 붙이면 이렇게 된다. 즉 스스로 있는 신이 세상을 나타난 것이 보살인데, 그 보살은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하는 것이 바로 불교의 진수이다.

즉 절대적인 신적 세계가 인간을 통해서, 그리고 인간 안에서 구현되는 것이 극락의 세계라는 말이다. 여기에서 신과 인간은 하나가 된다.

부처는 이 보살의 원형이며 부처를 뒤따르는 제자들이나 중생들도 깨달음을 통해 다 부처처럼 보살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부처는 깨달음을 추구하되 자신의 해탈이나 유익만을 구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웃을 이롭게 하는 이른바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삶을 추구하는 자가 보살이다. 보살은 만인을 하나같이 여기며 사랑하는 동체대비심(同體大悲心)을 가지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며 사는 사람이다.

불교에서는 누구든지 마음을 일으켜 작심을 하면 곧 보살이 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순수한 마음을 먹고 곧바로 수행 정진에 힘쓸 때 누구든지 보살이 된다는 것이다. 다만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삶을 살되, 이타적 삶을 산다고 주장하거나 자랑하지 않을 때 진정 보살이 되는 것이다. 석가는 최초로 깨달은 부처가 되어, 바로 이러한 보살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보살이 바라밀다를 가능케 하는 수행에는 6가지가 있다.

1. 보시(布施)

보시는 베푸는 것이다. 베풀되 보상이나 성과를 바라지 않는 것이다.

2. 지계(持戒)

계명을 유지하는 것, 계명을 지킨다는 것이다. ‘계’라고 하며는 경계를 뜻한다. 넘지 말아야 될 선을 뜻한다. 삶에는 경계를 소홀히 하지 말아야 될 부분이 많이 있다. 말과 뜻과 행동에 있어서 언제 어디서는 경계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탐, 진 ,치 즉, 욕심과 분노와 어리석의 세 가지 독성으로 인하여 몸과 입과 의지의 행위로 죄를 지어 윤회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한다. 바로 이렇게 되지 않기를 경계하라는 말이다.

3. 인욕(忍辱)

인내를 말한다. 욕을 먹어도 참아야 한다는 것이다. 총애를 받거나 욕을 먹거나 해도 시종 그럴 수도 있겠지 하는 태도를 취하라는 것이다.

4. 정진(精進)

게으르지 말고 꾸준히 수행을 계속해 나가라는 뜻이다. 죽는 날까지 계속하라는 것이다. 작심삼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되 유혹에 굴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5. 선정(禪定)

마을 고요히 하여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번뇌와 염려, 그리고 산란한 마음을 떠나 고요한 마음을 유지하여 참된 이치를 구하라는 말이다. 여기에는 묵상과 명상과 기도의 방법이 있다.

6. 지혜(知慧)

일체 모든 것의 실상을 통찰하는 것을 말한다. 상대적 세계의 분별지(分別智)를 넘어서 평등하고 무분별한 지식에 이르는 것이다. 이것은 무분별한 생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차별을 두지 않는 평등으로 바라보는 지식이다. 무집착의 지혜이니 비움의 완성이다. 이 비움에 극락의 세계가 가득 차게 된다는 것이다.

D. 결 론

죽음이 없는 하나님의 일은 없다. 모든 일을 반드시 죽음을 통해서 일하신다. 그것은 하나님마저 죽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마저 죽은 그 현실 바탕 위에서 당연히 인간도 죽음 안에서 논의된다. 죽어야 될 이유, 죽어야 될 목적, 죽는 방법, 죽는 환경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죽음’이라는 근거 위에서 밝혀진다. 그런데 성령을 받지 못한 자들은 이런 사정을 모른다. 그들이 신봉하는 하나님은 ‘죽으신 하나님’이 아니라 ‘죽은 적이 없는 하나님’이다. 즉 죽음을 피해서 신과 교류하고 싶어 한다. 그것은 신을 찾지만 실은 본인들이 신임을 확인하는 절차일 뿐이다. 숨을 내 쉴 때마다 들리는 소리는 “내가 곧 하나님이다, 내가 곧 하나님이다”이며 인간들이 힘차게 공기를 가르며 활기차게 온몸을 움직일 때 나오는 소리도 “내가 곧 하나님이다, 내가 곧 하나님이다” 사람의 잠꼬대의 소리도 해석하면 “내가 곧 하나님이다”로 모아진다. 인간의 맨 살을 콕 쑤시면 튀어나오는 짧은 비명소리 속에도 “내가 곧 하나님이다”가 섞여 나온다. 하늘이 신이 허락한 여분의 신의 자리를 지상에서 자신들이 차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과학, 가정, 종교 등 각종 문명의 영토마다 우렁찬 주장들이 들려온다. “지상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이다! 진리란 우리의 행복을 말한다.”

출애굽 당시, 양의 피로 인하여 살 자와 죽을 자가 갈라졌다. 유월절은 단순한 종교 축제가 아니었다. 실제로 전쟁이었다. 살아남은 자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전쟁에 동원된 실제 군대였다. “사백삼십 년이 마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즉”(출 7:4/12:41) 성도는 싸움꾼이다. 도나 닦고 있는 자가 아니다. 군인이다. 싸울 명분이 엄연히 있다. ‘피의 전쟁’이다. 거룩한 피의 효력이 실제냐 아니면 더러운 피의 효력이 실제냐를 놓고 벌리는 전쟁이다. 이 싸움판에 끼지 못한 자는 불행한 자다. 그들 눈에는 자아의 적수 이외에는 ‘하나님의 원수’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적수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세상 중심과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임을 나타낸다. 즉 사느냐 죽느냐 라는 결정은 인간 본인이 내리는 것이 아니다. 피의 전쟁의 참전하면서 예수님과의 관련성을 가질 때만 ‘산 자’라고 할 수 있다. 이 ‘산 자’만이 자신이 치른 전쟁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다. 전쟁에서는 죽느냐 사느냐만 관권이다. 직업이나 재산이나 직위 같은 것은 소용없다. 출애굽에서 하나님의 군대의 특징인 집마다 피를 발랐다. 그리고 그 피에 사활을 걸었다. 자신들의 피가 아니다. 하나님의 적을 의식해서 바른 흠없는 어린양의 피다. 피를 바른 자들만 살았고, 피가 없는 자는 예외 없이 죽었다. 심지어 바로 궁 감옥에 있던 죄수들의 맏아들도 난데없이 죽어야 했다.(출 12:29) 그들은 진정한 죽음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기 위해 이스라엘 앞에서 죽어야만 했던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다른 전쟁, 다른 현실은 없다. 모든 게 피 중심의 전쟁 때문이다.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히 13:20)

언약의 피를 아는가? 유일한 현실이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눅 21:33)

첨부파일 : 불교의우주론과구원론.hwp (48.0K), Down:32

관리자(IP:124.♡.84.82)

09-03-07 20:39

불교의 우주론과 구원론

2008년 8월 16일 이 근 호 목사

참고서적 : 『觀(관)』 구선 지음 / 봉성기획 (서울 : 1999)

A. 서 론

흔히 불교를 ‘도 닦는 종교’로 알고 있다. 맞다. 하지만 무턱대고 도를 닦는 것이 아니다. 돈을 닦는다는 것은 우주의 대원리에 부합되고 융합하기 위해서 도를 닦는 것이다. 따라서 ‘우주의 대원리’가 어떤 것인가를 설정 작업이 전제 된다. 우주의 모델을 수립해놓고서 그 수립해놓은 모델에 일치되는 자기 존재가 되려 하려는 것이다. 그 우주 모델에 부합되지 못하면 자기만 손해니까.

따라서 ‘도를 닦는 것’은 자신이 예상한 우주와 하나가 되기 위한 수련 작업이다. 그렇다면 불교에서 말한 우주관은 어떤 모습인가? 여기에 물리학과 천문학과 화학과 의학과 생물학과 주역과 심리학과 윤리 같은 것이 총 투입이 되어서 세워진다. 큰 틀을 짜는 것이다. 우주의 생성원리가 우선되어야 하며 그 생성원리에 준해서 우주의 역사나 개인의 인생사가 진척될 것이다. 여기서 비켜나면 윤리적으로 나쁜 짓이 된다.

B. 우주와 인간의 창조와 죽음

이 눈에 보이는 우주는 처음 어떻게 생겼을까? 우주라는 존재가 어떻게 생겼느냐를 따지면 그것은 물리학이지 결코 불교가 아니다. 불교란 우주라는 존재 이전에 생명이 먼저 있었다고 본다. 그래야 인간이 도를 닦아 이 존재라는 굴레마저 벗겨버려서 탈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존재론보다 생명론이 우선이다 는 말은, 대상을 존재론적으로 잡아놓고서 탐구하려는 모든 인간들의 학문(신학, 철학, 과학, 심리학)의 범주 밖에서 논의된다는 말이다.

이는 곧 불교의 생명론에 대해서 신학이나 철학이나 과학의 안목으로서 감히 평가하려 들지 말라는 말이다. 영적 직관에 의해서만 우주의 내막과 교류된다. 이 선(禪)의 경지에서만 밝혀진 사실을 세속의 세계를 알려주려 한다.

원래 에너지 밖에 없었다. 그 에너지는 정숙하고 고요하다. 이것이 생명의 세계다. 이 에너지는 처음에너지(선천 先天 에너지). 하지만 나중에너지(후천 後天 에너지)가 들이닥친다. 나중에너지는 먼저 에너지에 부딪치고 흡수되기도 하고 튕겨지기도 하였다. 이 부딪힘에서 나중에너지(후천에너지)를 대신하여 색다른 에너지 두 종류가 생겼는데 그것이 바로 양기와 음기다. 서로 대립되는 성질을 나타내는데 양기는 안으로 당기는 성질이 있고 음기는 밀어내는 성질이 있다.

어쨌든 이로서 ‘처음 고요’를 유지하려는 에너지와 이쪽으로 당기려는 양기와 밀어내려는 음기로서 세상의 모든 우주 만물을 다 설명할 수 있다. 물질이란 양기와 음기의 스파크에서 발생한다. 이로서 물은 양기적 물질과 음기적 물질로 나뉘어졌다. 생겨난 물질이 생명의 중심부로 쏠리면 생명은 거부반응을 보인다. 이 거부반응으로 물질들이 처음 에너지에 틀로 밀리고 이 밀려버린 물질이 다시 생명의 중심부로 왔다 갔다 하는 방향을 갖게 되는데 이 방향성으로 인해 파장이 발생한다. 이로서 이 물질의 대우주는 물질이 뿜어내는 ‘파장’의 세계가 된다. 이 파장들이 고유 파장이다. 이제부터 벌어지는 모든 물질의 결합과 해리는 파장이 던지는 진동수의 일치여부와 관련 있다.

물질이 속도가 가해지고 파장이 강해지면 이 ‘혼돈’의 생태에서 빠져나오는 물질과 파장이 있다. 먼저 에너지 틀을 빠져나오는 것이다. 이것이 양자 물리학에 말하는 ‘특이점’이고 이 특이점에서 시간과 공간이 창조되기 시작한다.

공간이란 물질 입자가 전에 있었던 먼저 에너지 틀에서 가졌던 관성적 진동에 의해서 차원대가 형성된 것이다. 즉 공간이란 파장의 폭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서로 다른 진동수를 가진 생명들이 각자 갖고 있는 고유 진동수에 따라 살아갈 수 있는 삶의 터전이 되는 것이다.

이제 물질은 안정상태를 유지하면 분별의식을 갖추게 된다. 여기에 6개의 분별의식이 나온다. (여섯 개의 분별의식이란 나중에 인간의 신체로 발현하게 되면 안이비설신의, 즉 눈과 귀와 코와 혀와 신체와 의지:두뇌의 의식이 되는 것이다) 6개의 분별의식이란 원래 생명에는 없었던 것이 혼돈을 거쳐서 나온 것이다. 이것이 존재다. 이 존재화된 생명을 ‘원초신(原初神)’이라고 지칭해두자. 이 원초신을 앞으로 유지시켜 주는 에너지는 어디서 공급되는가? 그것은 나중에너지(후천 에너지)에서 주어진다. 이 후천에너지가 주입되면서 원래 생명과 기질이 달라졌다. 좋다 나쁘다 라는 분별을 일으키는 의식활동을 하게 된 것이다. (선과 악을 분별하는 의식의 발생)

의식과 의식이 교류가 일어나면서 원래 있던 각각의 의식은 주체 의식이 되고 다른 의식과의 교류로 인하여 형성된 파장은 객체 의식이 된다. 주체 의식의 파장과 가까운 파장은 ‘좋은 것’이 되고 주체 의식과 멀어지는 파장은 ‘나쁜 것’이 된다. 이러다보니 점점 주체로 삼은 고유 진동수 중심의 체계가 갖추어지는데 이러한 생명이 원신(原神) 혹은 ‘영(靈)’이다. 원신과 원초신이 다른데, 원초신은 일곱 가지의 의식(6개의 의식에다가 고요의 식을 첨가해서 7개다)의 면모로서 정립되었던 것과는 달리 일곱 가지 의식의 면모 중에 하나의 면모가 중심이 되어 나머지 여섯 가지 면모가 적절하게 결합되어 있는 상태로 하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따라서 원신의 종류에는 천인(天人) 곧 신, 인간, 식물, 동물, 무정물, 원생물, 그리고 틀 지워진 활동적 에너지 등이 있다.

인간 원신이 물질공간이 가지는 고유 진동수와 일치되면서 인간은 외롭고, 슬프고, 기쁘고, 사랑하고, 미워하는 등등의 감정의식이 발생하는데 여기서 생겨난 물질 입자를 혼이라고 한다. 혼이 생기면 영이 생길 때와는 달리 외부의식계가 만들어진다. 물질 입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눈, 귀, 코, 혀, 신체, 두뇌 같은 것이 생겨난다. 영이 만들어낸 것은 내부의식계라면 혼이 만든 것은 외부의식계이기에 이로 인해 생명은 두 개의 주체의식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이 둘의 주체의식이 결합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한다. 나중에 물질화되면(원신체가 되면) 서로의 원신을 배양하고자 하여 성적인 접촉을 하게 된다.

불교에서는 우주를 인간 중심으로 창조된 것으로 보고 있다, 원래 고요한 에너지에서 빠져나오는 인간의 원신이 진동수가 높은 물질 세계로 들어오면서 인간 원신과 비슷한 진동수를 가진 것들끼리 모여들었는데 이로서 우주는 인간 중심으로 서열화가 매겨진다. 즉 인간 원신과 가까운 것은 원신체 공간이 되고 그 밖으로는 물질체 공간이 된다. 원신체 공간은 원신에서 생성되는 에너지가 있는 반면에 물질체의 공간은 그러한 에너지가 없어 수동적 변화를 겪을 뿐이다.

이로서 인간 원신들은 물질의 결합과 분열에 영향을 주게 된다. 인간 원신의 힘이 미치는 장(場) 안에서 물질은 드디어 입자가 된다. 원신체의 공간은 물질 입자가 분열과 융합을 하면서 방출해 놓은 열과 압력 때문에 ‘고(高) 에너지’ 상태가 된다. 이 때에 나타난 변화가 공간의 팽창과 빛의 생성이다. 공간에서의 밝은 부분은 인간 원신의 혼이 이루는 부분이고, 공간에서의 어두운 부분은 그 밖의 공간이다.

이렇게 해서 공간은 원신체와 물질체와 궁창, 이 세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이 원신체 중에서 인간 원신이 일반적 원신과 분리된 것이 형상화된 인간이며 나머지 일반적인 원신체는 혼의 상태로서 일정한 공간에 거주하게 된다. 물질체들은 무정(無情)으로서 흙과 물, 불과 공기가 되는 것들이 있는가 하면 하나의 별이 되는 것도 있다.

별들이 물질 공간에 생겨나면서 물질공간 자체는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힘의 영향권 안에 들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인력(引力)’이다. 이 인력으로 인해 모든 생명들은 인력의 영향을 받게 되는데 여기서 생긴 것이 바로 자기 보호 본능이다. 외부인력에 저항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인해 분리체의 형상이 고체화되는데 이 저항성이 뼈와 살, 피와 골수, 힘줄과 신경조직, 경락과 오장육부가 만들어지는데 영향을 입힌다.

하지만 이 육체는 원신 인간의 육체이지 결코 지금의 인간 육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 원신은 물질을 양분으로 섭취하는 것이 아니라 고요에서 생성된 에너지만으로 충분하게 활동하게 된다.

인력이 증가하면서 원신들은 높아진 공간 진동을 견디지 못해서 각자 적절한 장소로 나뉘어게 된다. 이 원신들이 자기 고유 진동수에 맞는 별들을 찾아 살게 된다. (즉 지구 이외에도 원신 인간들이 있다는 뜻) 그 중의 한 종류가 바로 지구로 이주해온 원신이다. 지구로 온 원신은 지구의 중력과 기업에 맞는 신체구조를 지니게 된다.

대기 중의 산소는 인간 원신들로 하여금 육체적 틀을 보존시키는데 있어 결정적인 장애가 된다. 그래서 이 때부터 지구에 온 인간 원신들은 물질체에 있는 양분을 섭취함으로써 산소가 가지는 산화성을 극복하고 그 스스로의 육체를 생장시켰다. 위장에 있는 소화액도 산소와 결합하기 위한 조건을 갖추기 위함이다.

오장(심장, 간, 신장, 폐, 비장) 육부(대장, 소장, 위장, 방광, 담, 삼초)에서 오부는 물질 양분을 섭취하는 기관이라면 오장은 의식 활동에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하기 위한 내분비 활동을 제공한다. 오장에 저장되지 못하는 양분들은 뼈로 향하여 뼛속에 저장되는데, 이때의 인간 원신을 이루는 인체 내에서 유일하게 비어있는 공간이 뼈 속이기 때문이다. 이 뼈 속의 양분이 생명력을 만나게 되면 정(精)이 생긴다. 이 정 속에는 인간 원신이 물질을 양분으로 섭취하기 시작한 이후의 습성이 그대로 기록된다. 이 정이 나타나는 고유 진동수는 본래의 고유 진동수와 달라서 한 몸을 이루고 있으면서도 육신과는 서로 이질화된 상태가 된다. 그래서 인간 원신은 스스로 이질화되는 있는 ‘정’을 분리시키고자 한다.

이것은 오욕칠정(五慾七情)이다. 이 정을 물질체와의 접촉에서 그 욕구를 채우려 한다. 그 대상이 바로 물질체의 여자다. 물질체와 원신체는 서로 다른 극성으로 인해 정과 정이 합쳐지는데 이것이 포태를 이룬다. 음정과 양정이 합쳐져서 포태로 수정되면 외부에서 영혼이 들어와서 수정란에 깃든다. 물질체의 정은 정 자체가 고요함을 함유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외부로부터 영혼을 받아들여야만 생명성을 갖게 되고, 원신체의 정은 자체 내에 고요함(적정성 寂靜性)을 갖고 있기 때문에 외부에서 영혼을 받아들이지 않고도 생명성을 가질 수 있다.

포태를 통해 태어난 인간 원신의 자손들은 이 때부터 생로병사의 네 가지 고통을 받게 된다. 원신체와 물질체의 결합으로 태어난 인간 자손은 아버지의 원신에서 분리된 양정 자체가 영혼이 되고 어머니의 음정(陰精)은 육체를 이루는 바탕이 된다. 이것인 신인류다.(창세기 6:3)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아기는 자신만의 고유 진동수와 거의 일치된 진동수를 갖는 날에 태어나게 된다. 따라서 음양오행의 역학에서 보면 사람이 태어나는 날과 달, 년과 시를 알면 그 사람의 성품을 알게 된다. 인간이 살면서 정기적으로 육체와 영혼과 진동수를 일치시켜 주는 것이 필요한데 이 일을 위하여 물질체에 생긴 습성이 바로 잠이다.

사람이 죽게 되면 영혼과 육체는 분리된다. 일단 죽게 되면 중음(中陰)의 기간을 맞이하게 된다. 49일 동안이다. 중음 기간을 원만하게 보내는 것은 망자의 몸에 의해 좌우된다. 영이란 두뇌에 있으면서 6가지 신체의 의식을 통제하는 근원적 의식이었다. 그러다가 죽음이 임하면 머리에서 심장 쪽으로 이동한다. 혼이란 살아 생전에 오장에 흩어져 거하면서 생명이 가지는 의식 중 감정이 발현되는 근본이었다. 에너지를 저장해서 공급하여 안, 이, 비, 설, 신, 의가 활동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다가 죽음이 임박해서는 각각의 장기가 갖고 있는 혼이 거두어져서 심장에 합쳐졌다가 머리 쪽으로 이동하여 정수리를 통해서 빠져나간다.

병으로 죽을 때와 사고로 죽을 때와 수명을 다 해서 죽을 때가 중음 기간을 통과하는 절차가 다 다르다. 즉 영과 혼이 원만하게 전이되지 못하고 사고사일 경우에는 사고 난 상처부위를 통해서 급하게 빠져나가기에 정상적으로 정수리를 통해서 빠져 나가지 못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성품이 원만하지 못하고 악업이 많은 사람의 영혼의 전이도 원만히 이루어지지 못한다. 죽을 때 큰 고통을 느끼게 된다. 그렇게 되면 중음기간 동안 다른 영혼의 침해를 받을 수 있다.

중음의 기간이 49일부터 길어져 연장되면 중음신(中陰神)이 된다. 죽음의 세계는 유계(幽界)와 영계(靈界)와 신계(神界)로 이루어져 있다. 유계는 죽음에 적응 못한 생명들이 사는 세계이고, 영계는 죽음에는 적응했으나 임의로운 활동성을 갖지 못한 생명들이 사는 세계며, 신계는 죽음에 완전히 적응해 그 활동이 자유로운 생명들이 사는 세계다.

일반적으로 망자가 유계에 들어가면 거기서 30년을 보내게 되고, 영계에 들어가면 120년을 보내게 되면 신계에 들어가면 600년 내지는 800년을 보내게 된다.

영혼이 세분화된 인간 원신의 아들들은 하나의 영혼이 수많은 사람들의 물질체가 되어 태어나기도 하고 하나의 영혼이 수많은 동물이나 식물이 되어 태어나기도 한다. 이것이 윤회다. 그런데 윤회가 주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그들의 자각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즉 윤회를 거듭하면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터득하는데 이는 곧 처음의 고요(寂靜)을 다시 찾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육체를 갖고 살던 생명이 자기 내면에 적정(고요)을 갖추지 못하면 6도(六度)에 해당되는 범주 안에 놓이게 되는데 그 육도란 바로 천상계, 인간계, 지옥계, 축생계, 아귀계, 아수라계의 여섯 세계를 말한다. 이 여섯 세계의 활동은 곧 지구의 물리적 환경을 변화시키게 된다. 육도윤회계 중 영혼이 스스로 활동할 수 있는 에너지를 얻을 수 없는 아귀계나 아수라계나 축생계에 있는 생명들은 다른 외부 세계의 진동수를 급격하게 높여주어서 결국 지구는 대환란을 맞이하게 된다. 이런 상황 속에서 별의 표면에서 이주해왔던 원신체들은 다시 지구를 떠나 버리고 지구에는 인간 원신의 아들들과 물질체만이 남게 되는데 이것들은 거의 다 죽게 된다.

생명이 물질적 한계를 벗어나 새로운 생명으로 진화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윤회의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 이것은 생명 자체가 갖고 있는 고유 진동수로 인한 육체의 한계성 때문이다. 육체를 갖고 있는 상태에서 진보된 의식을 갖게 된 생명은 다시 영혼으로 돌아가서 그와 같은 원신적 구조를 갖고 있는 생명을 만나 새로운 육체를 갖게 됨으로써 물질적 진화의 한계를 극복하고 끝없는 진화의 길을 가게 된다.

C. 우주론에 입각한 구원론

불교의 핵심은 마하반야바라밀다에 있다. ‘마하’라는 것은 절대적 존재를 말하고, ‘반야’라는 것은 지혜를 말하고, ‘바라밀다’라는 것은 극락의 세계로 건너감을 말한다. 바로 이것을 실행하는 종교이다.

불교의 지혜인 반야를 요약한 경전이 반야경이다. 이 반야경의 첫머리에 ‘관자재’가 나온다. 그 다음에 나오는 단어가 ‘보살’이다. ‘관’이란 본다는 말이고 ‘자재’는 ‘스스로 있는 신’이라는 말한다. 그 뒤에 ‘보살’이라는 말을 붙이면 이렇게 된다. 즉 스스로 있는 신이 세상을 나타난 것이 보살인데, 그 보살은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하는 것이 바로 불교의 진수이다.

즉 절대적인 신적 세계가 인간을 통해서, 그리고 인간 안에서 구현되는 것이 극락의 세계라는 말이다. 여기에서 신과 인간은 하나가 된다.

부처는 이 보살의 원형이며 부처를 뒤따르는 제자들이나 중생들도 깨달음을 통해 다 부처처럼 보살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부처는 깨달음을 추구하되 자신의 해탈이나 유익만을 구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웃을 이롭게 하는 이른바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삶을 추구하는 자가 보살이다. 보살은 만인을 하나같이 여기며 사랑하는 동체대비심(同體大悲心)을 가지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며 사는 사람이다.

불교에서는 누구든지 마음을 일으켜 작심을 하면 곧 보살이 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순수한 마음을 먹고 곧바로 수행 정진에 힘쓸 때 누구든지 보살이 된다는 것이다. 다만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삶을 살되, 이타적 삶을 산다고 주장하거나 자랑하지 않을 때 진정 보살이 되는 것이다. 석가는 최초로 깨달은 부처가 되어, 바로 이러한 보살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보살이 바라밀다를 가능케 하는 수행에는 6가지가 있다.

1. 보시(布施)

보시는 베푸는 것이다. 베풀되 보상이나 성과를 바라지 않는 것이다.

2. 지계(持戒)

계명을 유지하는 것, 계명을 지킨다는 것이다. ‘계’라고 하며는 경계를 뜻한다. 넘지 말아야 될 선을 뜻한다. 삶에는 경계를 소홀히 하지 말아야 될 부분이 많이 있다. 말과 뜻과 행동에 있어서 언제 어디서는 경계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탐, 진 ,치 즉, 욕심과 분노와 어리석의 세 가지 독성으로 인하여 몸과 입과 의지의 행위로 죄를 지어 윤회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한다. 바로 이렇게 되지 않기를 경계하라는 말이다.

3. 인욕(忍辱)

인내를 말한다. 욕을 먹어도 참아야 한다는 것이다. 총애를 받거나 욕을 먹거나 해도 시종 그럴 수도 있겠지 하는 태도를 취하라는 것이다.

4. 정진(精進)

게으르지 말고 꾸준히 수행을 계속해 나가라는 뜻이다. 죽는 날까지 계속하라는 것이다. 작심삼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되 유혹에 굴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5. 선정(禪定)

마을 고요히 하여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번뇌와 염려, 그리고 산란한 마음을 떠나 고요한 마음을 유지하여 참된 이치를 구하라는 말이다. 여기에는 묵상과 명상과 기도의 방법이 있다.

6. 지혜(知慧)

일체 모든 것의 실상을 통찰하는 것을 말한다. 상대적 세계의 분별지(分別智)를 넘어서 평등하고 무분별한 지식에 이르는 것이다. 이것은 무분별한 생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차별을 두지 않는 평등으로 바라보는 지식이다. 무집착의 지혜이니 비움의 완성이다. 이 비움에 극락의 세계가 가득 차게 된다는 것이다.

D. 결 론

죽음이 없는 하나님의 일은 없다. 모든 일을 반드시 죽음을 통해서 일하신다. 그것은 하나님마저 죽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마저 죽은 그 현실 바탕 위에서 당연히 인간도 죽음 안에서 논의된다. 죽어야 될 이유, 죽어야 될 목적, 죽는 방법, 죽는 환경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죽음’이라는 근거 위에서 밝혀진다. 그런데 성령을 받지 못한 자들은 이런 사정을 모른다. 그들이 신봉하는 하나님은 ‘죽으신 하나님’이 아니라 ‘죽은 적이 없는 하나님’이다. 즉 죽음을 피해서 신과 교류하고 싶어 한다. 그것은 신을 찾지만 실은 본인들이 신임을 확인하는 절차일 뿐이다. 숨을 내 쉴 때마다 들리는 소리는 “내가 곧 하나님이다, 내가 곧 하나님이다”이며 인간들이 힘차게 공기를 가르며 활기차게 온몸을 움직일 때 나오는 소리도 “내가 곧 하나님이다, 내가 곧 하나님이다” 사람의 잠꼬대의 소리도 해석하면 “내가 곧 하나님이다”로 모아진다. 인간의 맨 살을 콕 쑤시면 튀어나오는 짧은 비명소리 속에도 “내가 곧 하나님이다”가 섞여 나온다. 하늘이 신이 허락한 여분의 신의 자리를 지상에서 자신들이 차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과학, 가정, 종교 등 각종 문명의 영토마다 우렁찬 주장들이 들려온다. “지상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이다! 진리란 우리의 행복을 말한다.”

출애굽 당시, 양의 피로 인하여 살 자와 죽을 자가 갈라졌다. 유월절은 단순한 종교 축제가 아니었다. 실제로 전쟁이었다. 살아남은 자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전쟁에 동원된 실제 군대였다. “사백삼십 년이 마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즉”(출 7:4/12:41) 성도는 싸움꾼이다. 도나 닦고 있는 자가 아니다. 군인이다. 싸울 명분이 엄연히 있다. ‘피의 전쟁’이다. 거룩한 피의 효력이 실제냐 아니면 더러운 피의 효력이 실제냐를 놓고 벌리는 전쟁이다. 이 싸움판에 끼지 못한 자는 불행한 자다. 그들 눈에는 자아의 적수 이외에는 ‘하나님의 원수’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적수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세상 중심과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임을 나타낸다. 즉 사느냐 죽느냐 라는 결정은 인간 본인이 내리는 것이 아니다. 피의 전쟁의 참전하면서 예수님과의 관련성을 가질 때만 ‘산 자’라고 할 수 있다. 이 ‘산 자’만이 자신이 치른 전쟁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다. 전쟁에서는 죽느냐 사느냐만 관권이다. 직업이나 재산이나 직위 같은 것은 소용없다. 출애굽에서 하나님의 군대의 특징인 집마다 피를 발랐다. 그리고 그 피에 사활을 걸었다. 자신들의 피가 아니다. 하나님의 적을 의식해서 바른 흠없는 어린양의 피다. 피를 바른 자들만 살았고, 피가 없는 자는 예외 없이 죽었다. 심지어 바로 궁 감옥에 있던 죄수들의 맏아들도 난데없이 죽어야 했다.(출 12:29) 그들은 진정한 죽음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기 위해 이스라엘 앞에서 죽어야만 했던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다른 전쟁, 다른 현실은 없다. 모든 게 피 중심의 전쟁 때문이다.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히 13:20)

언약의 피를 아는가? 유일한 현실이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눅 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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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577건 중 1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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