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 8월 15일 강의 고후 9장 8절
안산 8월 15일 강의 고후 9장 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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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815 고후 9장 8절
우리교회(IP:124.♡.84.9)
08-08-16 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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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080815고후9장8절
2010-11-10 09:24:04 녹취 : 박온정
안산080815고후9장8절 / 이근호 목사
오늘 강의는 고린도후서9장8절에서9절인데요, 제가 읽어보겠습니다.『8,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9,기록한바 저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아멘.
여기서 하나님의 은혜가 나오는데, 사람은 은혜는 대게 좋아해요. 은혜는 다른 말로 하면 선물이라고 하죠. 하나님이 선물해준 거예요. 사람이 은혜를 받는다, 선물을 받는다, 기분 대게 좋아하죠. 그런데 우리가 사이에서 선물 받을 때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을 받을 때 살짝 기분 나쁘잖아요. 어떤 사람이 조용필을 아주 싫어하는데 조용필 시디를 선물 받았다, 그때부터 기분 나쁘죠. 하필이면 내가 왜 싫어하는 걸 주느냐…
그러면 사람에게는 두 가지가 있는데 자기가 싫어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 있죠? 그렇다면 ‘은혜’라는 이 단어의 개념만 달랑 가져오게 되면 사람들은 무엇을 기대하냐 하면 싫어하는 걸 싫어하지 않아요.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주실 때 ‘감사합니다.’ 해요. 그런데 사람들은 싫어하는 것을 주면 이걸 저주받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나는 너희에게 그리스도의 뭘 주느냐 하면, 나는 너희에게 피를 소개한다 했어요. ‘피’라 는 것은 언제 생기냐 하면 죽을 때 생기죠. 피는 곧 죽음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전하노라」할 때 이걸 평소에 사람들이 자기 자신이 나는 죽어야 돼, 나는 지옥가야 돼, 나는 그야말로 똥차야. 이런 사람한테는 예수님의 죽음이 오게 되면 ‘고맙습니다’ 이렇게 되지만, 평소에 가지가 ‘나는 살아도 마땅해,’ 나는 남보다 더 오래 살아야 돼, 이런 입장에 있을 경우에는 자기가 싫어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이 어떻게 구분되느냐 하면, 싫어하는 것은 나 살고자 하는 의지를 가로막는 것 이것 싫어하고 내 존재가치가 행복을 업그레이드시키면 사람들이 좋아하지요.
문제가 약간 복잡하게 된 게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은혜주시면서 ‘받아라’ 이러면 문제가 간단한 것 같은데 사도바울이 주시고자 하는 그것과 사람들이 받고자 하는 그것과 매치가 안 되니까 문제가 복잡하게 되는 거예요. -오늘 칠판 가져와서 강의 잘될 것 같은데 교회에 대해서 합시다.- 교회 사람들이 소복이 모여 있어요. 교회 지붕을 벗겨봅시다. 교회라는 지붕과 건물을 벗겨버리면 사람들만 남지요? 예배당을 교회라고 하지 마세요.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와 요새 교회와 다른 예를 꼭 들어야 되요.
예배당 지붕이 태풍불어 날아가 버리면 교회 아닙니까? 역시 교회거든요. 제가 옛날에 있을 때 박사교회, 이런 설교했던 기억이 나는데, 뭐냐면 강대상 여기는 성령이 계신 곳이기에 여전도사나 부교역자가 올라가면 안 되고, 당회장 목사만, 기름부음 받은 종말 올라가야 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청소할 때 예외지만 못 올라온다. 지붕이 홀라당 날아 가버렸다, 강대상이고 뭐고 다 없어졌다. 그러면 어디가 거룩한 공간입니까? 문제가 되죠?
만약에 강대상 위치가 파악 안 된 상태에서 목사가 전에 있던 강대상 위치와 정 반대에서 일반 교인들이 서 있는 곳에 서 있으면 목사가 서 있는 장소가 거룩한 장소가 돼버려요. 거기가 거룩한 곳이 돼버려요. 얼마나 이것이 불합리하냐 이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정상이다 비정상이다 하는 것은 간단해요. 자기가 품고 있는 껍데기를 벗겨버리고 날려버리면, 만약에 아파트 지붕을 벗겨버리고 날려버리면 과연 교회 성도냐, 제대로 볼 수 있거든요.
다 같이 예수 믿으면 심지어 그 식구가 쫓겨나고 길바닥에 나앉아 있어도 그 가정은 교회가 되는 겁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가게 세를 못내 쫓겨나가더라도 그리스도를 믿으면 교회가 되는 겁니다. 교회 껍데기를 벗겨버리면 뭐만 남아요? 사람들만 남지요. 이 사람들이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잘 들어보세요.- 사람들이, 전라도 말로 ‘뭐땀시 모였느냐’ 하는 겁니다. 무엇 때문에 여기 모였느냐. 1)자기가 죽을 죄인인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다시 한번 깨닫기 위해 왔다. 2) 교회 나와서 복 받기 위해 나왔다. 몇 번입니까?
보통 문제들은 2번이 정답인데 이거는 1번이 정답이네요. 제가 보기엔 무지무지 수상한 거예요. 굉장히 수상하다 말이죠. 왜냐면 제가 아는 경험에 의하면 골목에 장사하는 트럭이 지나가도 사람들 안 모이는데 ‘자, 앞으로 두 시간동안 공짜로 드립니다.’ 하니까 와~ 사람들이 몰리는 거예요. ‘고물 파세요’ 하면 사람들 안 모입니다. ‘그냥 줍니다’ 하면 오는 거예요.
사람은 ‘은혜’ ‘선물’ 주면 모이게 돼있어요. 공짜라 하면. 근데 사람들이 만약에 공짜로 준다 해가지고 공짜가 뭔지 내용도 모르고 모였다가 만약에 각자에게 ‘부고장’ 날려버리면 다 흩어질 거예요. ‘당신 죽었소, 당신 죄인이요,’ 하면 다 도망갈 거란 말이에요. 그렇지 않고 오늘 오신 분들은 복 받았습니다. 앞으로 사업 잘되고 부부간에 갈등 없고 애 공부 잘하고 앞으로 승진 될 것이고, 한 달 수입이 팍팍 늘어날 것입니다. 라고 하면 그들은 교회에 온 보람을 느낄 것이란 말이죠.
그래서 저는 이걸 수상하다 합니다. 수상해요. 제가 수상하다 하면 주님이야 귀신같이 들여다보지요. 귀신같이.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모였느냐 입니다. 우리교회 전에 개척교회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을 쯤 이었어요. 스물 남짓 모였지요. 만약에 깡패들이 뒤에서 몽둥이 들고 와가지고 ‘다 나가라’할 때 20여명 모인데서 집사님 한분이 ‘왜 이래요, 우리가 이렇게 모였는데 왜 행패요’ 할 때 깡패들이 ‘당신들 여기 왜 모였냐,’ 물으면 우리가 뭐라고 답변해야 돼요, 갑자기.
‘당신들 왜 모였는데?’ 하고 물었을 때 답변을 순간 딱 해야 되는데 뭐라고 해야 될 거냐 말이죠. 상당히 상투적이 되겠죠. 하나님께 경배하기 위해 모였다, 이런 이야기 하죠. 경배하려면 집에서 경배하지 뭣 하러? 집에서 아파트 껍데기 날려버리면 그것도 교회인데. 집에서 하지 뭣 땜에 모였냐 말이죠. 그거에 대한 정답은 제가 드릴 게 아니고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한곳에 모이게 했습니다. 안식일에도 그렇고 절기에도 그렇고. 절기고 안식일이고 그들은 왜 모였습니까?
그들 가운데서 무슨 일이 벌어지죠? 무슨 일이 벌어진지 알아요? 제사를 드렸다고요 제사. 예배정도가 아니에요. 제사입니다. 제사를 지냈다고요 제사. 오늘날 교회에 올 때 제사의식이 없어요. 조상제사는 지낼 줄 알지. 조상제사는 싱싱한 농산물과 해산물 바치면 됩니다. 좌청룡 우백골 해가지고 대추 까고 막걸리 받아가지고 은공하고 술은 지들이 먹고 이러면 되요. 절만 하고. 조상제사는 자기가 행동을 보여주면 됩니다. 엎드려 절할 수 있잖아요. 허리 안 아픈 사람은 다 할 수 있다고요.
작년에 사용하던 문어 냉동실에 넣었다 꺼내가지고 바치면 그만이에요. 귀신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보통 조상 제사는 인간의 행함입니다. 가인의 제사예요 그냥. ‘주여, 받으소서’ 이러면 되요. 찬양? 하면 되지요. 피아노 있겠다, 반주하면 되죠. 그런데 구약에서 말하는 그 제사가 아니라니까요. 그거는 가인의 제사예요. 지금 오늘날 교회 예배 양 잡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양 잡는 이상으로 죽음을 담고 있는 말씀. 언어. 그게 증거 돼야 합니다. 옛날에는 눈으로 봤잖아요.
옛날에는 눈으로 봤다고. 실제로 양이 죽는다고요. 양의 피를 내서 재단에 바쳤잖아요. 실제로 백성들이 봤다 이 말이죠. 보고난 뒤에 ‘아이고~ 우리 죄가 죽을죄구나~’ 하고 알았다 말이지요. 잡는 제사장이나 백성이나 다 봤다 이 말이죠. 오늘날은 그 제사를 어디에 담아야 됩니까? 목사의 설교에 담아야 되겠지요. 그러면 교인들이 앉아서 목사의 설교를 들을 때 그 담긴 언어에서 무엇을 캐치해야 됩니까? 무엇을. 우리 죄를 위해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분이 계셨구나.
그것은 우리가 양을 바치는 게 아니라 하늘의 하나님이 양을 바쳤구나. 그래서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 하면, 이 더러운 인간을 위해서 양 바친 분. 사실은 그게 양이 아니라 자기 아들이잖아요. 더러움을 위해서 자기 아들을 바친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진짜 유일한 하나님의 뜻은 뭐냐, 우리를 위해서 자기 아들을 바치는 행위를 할 수 있는 하나님.
그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고 그 하나님의 행위가 진짜 살아계신 하나님의 행위라고 보고 나머지는 다 우상이고 가짜인지 아는 사람 분별할 줄 아는 사람, 그게 신자 아니고 뭐겠어요. 그게 참 제사 아니고 뭐겠습니까. 참 제사예요. 오늘날 교회에서 고린도후서9장을 펴 놓고 「저가 흩어져 가난한 자를 위해 죽었으니 그 의가 영원토록 있는 자니라.」이런 대목 있죠. 그 다음 8절에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대목을 가지고 뭘 설명하느냐 하면,
구제하세요, 구제하면 이웃의 못사는 사람들 한 사람이라도 꼬실 수 있습니다. 구제가 빠지면 교회 부흥 안 됩니다. 이런 식으로 설명을 하게 된 거예요. 내가 알고 있는 백이면 백 우리가 읽은 이 대목을 자선과 구제용도로 성경말씀을 인용하는 걸 들었습니다만, 저 말고 그렇게 들은 분 계십니까? 물어보나마나죠 뭐, 이 고린도후서 8장9장을 헌금이야기고 헌금하는 것은 구제이야기인데 시편에 나오는 말씀 인용해서 ‘사도바울이 구제 많이 하라고 했다,’
구제 많이 하면 참된 교회고 복을 받아서 많은 사람이 몰려와서 교회 부흥된다. 이런 논조로 성경말씀을 보잖아요. 그런데 신약의 어떤 말씀도 하나님의 구제가 아니면 구제라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이 자선하지 않으면 자선이라 하지 않습니다. 누가복음14장에 나오죠? 14장12-14절,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읽어보고 질문을 하나 해볼게요.
『 눅14:12-14 :12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13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14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 』
이 내용은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대접을 하려면 어떤 사람에게 하라? 고맙다고 나중에 다시 대접할 사람에게는 대접하지 마라, 말이죠? 그러면 어떤 사람을 대접하냐 하면, 대접을 받되 갚을 능력이 없는 자에게 대접하라, 이것이 뭐냐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선물이에요. 그러니까 은혜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되는 과정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우리에게 갚으라고 의를 베푸신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선물을 “너 받아놓고 왜 안 갚아?” 이런 닦달하려고 우리에게 은혜주신 게 아니에요.
뭐냐 하면, 은혜는 은혜로 우리 안에 머물러 있으라고 은혜를 주신 겁니다. 이 점을 쉽게 말해서 교회가 남에게 자선이나 구제를 베풀 때는 어떤 경우에 구제가 될 수 있냐 하면, 그 교회 안에 누가 계시냐 하면 예수그리스도가 계셔서 누가복음의 그(눅14) 말씀대로 우리를 활용할 때만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한 하나님의 구제가 되고 자선이 됩니다. 뭐가 살아있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의’ 그러면 제가 질문 드립니다. 이 하나님의 의를 우리가 갚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그래서 우리는 내가 갚을 수 없는, 내가 갚을 수 없기에 내가 베풀어도 상대방이 안 갚아줘도 무방한 행사를 해야만 하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는 자선과 구제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인간의 힘으로 가능해요?「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했는데 왼손이 할 때 오른손 깁스해봐야 다 알아챕니다. 압니다. 같은 몸체인데 모를 리가 있습니까? 오른손 왼손 따로 놀 것 같으면 몰라요. 오른손과 왼손이 같이 붙어있으면 왼손이 하는 걸 오른손이 알아요 몰라요? “알아요”(어무이 따라온 꼬마친구의 대답) “옳지! 알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가 어떻게 실천되는가, 그 실천의 양상과 과정을, 절차를 이 시간에 생각해봐야 돼요. - 당히 어렵습니다.-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해보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실 때 은혜라 하는 것은 은혜를 주었으니까 은혜를 감사하면 될 텐데 절대로 그렇지 않다 했어요. 왜? 인간에게는 우리가 싫어하는 것 따로 있고 좋아하는 것 따로 있는데 하나님의 은혜를 어떤 걸로 유도하느냐 하면, 내가 싫어하는 걸 주면 은혜라 인정하지 않고 꼭 지가 좋아하는 것을 달라고 하는 거예요. 이게 꼭 문제예요.
그런데 실제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우리가 간절히 애타는 것을 주시는 게 아니고 우리가 고대하는 것을 주신 것도 아니요, 반대로, 우리가 싫어하는 것을 주는 거예요. 싫어하는 걸. 하나님께서 어느 돈 백 원을 가지고 “근호야, 여기 백원 준다”(ㅋㅋ) “감사합니다. 평소에 백 원 갖고 싶어서 얼마나 애썼는데” “야~ 예수님 나 좋아하는 걸 주시는구먼,” 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있잖아~ 저 옆에 사람에게 줘라,” 이거는 내가 싫어하는 거라,
차라리 안 줬으면 그 사람에게 용돈 주지, 줘놓고 그냥 줘버리면 나는 그저 운반자가 돼버려요. “기분 되게 나빠, 나는 내 것인 줄 알았어,” 기분이 굉장히 나쁘지요? 거기에 대해 욥 같은 경우 욥이 뭐라고 했습니까.「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거둔 자도 하나님이라 」참 이게 말은 쉽지요, 교회라는 데는 자기들끼리 모였을 때는 마치, 하나님의 구원 받은 것 같지만 실제론 어떤 하나님을 모시냐 하면, 자기가 좋아하는 하나님이에요.
여기 이것을 가지고 결국은 성경에서 유명한 출애굽기20장 4절 유명한 십계명 들어있지요? 십계명 제2계명에 의하면「너를 위하여 신을 네게 두지 말라」했죠. 모든 우상의 특징은 뭐냐 하면, 바로「나를 위하여」가 포함되어 있으면 우상입니다. 그런데 진짜 하나님은 누구를 위하여? 하나님 자체를 위하여. 그게 우상이 아니고 진짜 하나님입니다. ‘그거 쉽네,’ 하겠지만 그게 가짜거든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 말이 가짜라고요.
그게 가짜라는 게 언제 들통 나느냐 하면 바로 우리가 원치 않은 것을 하나님이 줄 때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반항이 생깁니다. ‘아, 내가 싫어하는 건데’ 이러거든요. 그래서 아까 강의하면서 사도바울이 우리에게 뭘 준다했습니까.「피」를 주죠. 피를 보니까 이미 너는 ‘죽은 자’다 했습니다. 사람이 왜 살려합니까. 그냥 살아있으니까 살려합니다. 애 키우고 남편 섬기고, 왜 그렇습니까. 내가 살아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살아있으면 계속 살아야 돼요.
거기에 무슨 이유가 있습니까. 내가 지금 살아있기에 살아가는데 무슨 이유가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가지고『네가 살아있으나 실상은 죽은 자라』했어요. 이걸 조금 더 설명해 드리면 이렇습니다. 이것 설명하면 쉬워요. 재래시장을 현대화 할 때 제일 먼저 하는 게 뭐가 있어요. 입구에 아케이드 세워놓으면 모양도 예쁘고 비도 안 맞고 찬거리 살 수 있잖아요. 그러면 아케이드가 없을 때 시장에 골목만 있고 상가만 있다면 비 다 맞겠지요? 그런데 아케이드 설치해 세워놓으면 사람들이 아케이드 속을 왔다 갔다 하겠지요.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십자가 가지고 왔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가지고 오셨기 때문에 아케이드를 십자가로 봅시다. 그러면 하나님을 만날 때 어디서 만납니까. 주님께서 십자가 지실 때 하나님 아들로 죽음의 아케이드 속에 들어왔어요. 그러면 우리가 주님을 만날 때 어떻게 만나냐 하면 죽음의 배경, 죽음에 대한 환경 그 십자가 안에서 주님을 만납니다. 그게 바로 복이에요. 그게 바로 축복이고 그게 은혜라고요.
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와서 죽음 속에 들어간 거 보니까 나도 몰랐는데 이미 내 위에 죽음이라는 것이 드리워졌다는 것을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알게 된 겁니다. 죄 없는 하나님이 이 땅에 왔는데 이 땅에서 어떻게 끝났습니까? 처참한 죽음으로 끝났잖아요.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지금 살았다고 자식 키우고 살아있다고 의시대지만 실상은 뭐냐, 내가 죽음 속에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는 중이에요. 결국 인간은 죽음 속에서 살다가 나이 70,80 돼가지고 힘 빠지면 죽죠? 그런데 처음부터 죽음 속에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살아가면서 그것을 못 느끼고, 펄펄 살죠, 펄펄~ 펄펄 살고 내가 내년엔 뭐 하고, 그 다음해에는 뭐 하고, 계획 잡고 살지요. 그러다 죽으면 ‘에이, 재수 없다,’ 하고 재수 없는 게 아니고 우리 본성인데. “그럼 당신은 왜 사느냐,” “주님 은혜로 살아요” 주님이 주신 은혜로 산다고 하는데 바로 이 죽음 속에서 주님께서 오실 때, 축복이라 하는 것은 아까 구약의 제사에서 뭐가 흘러나옵니까. ‘축복’이 흘러나오죠.
옛날 구약 사람들 모일 때 제사 때문에 모였죠? 제가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나님의 의’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거룩’이 나와요. 예수님이 죽으시면서 의가 되고 거룩이 나온다고요. 제사 없는 곳에는 뭐가 없다? ‘의’가 없고 ‘거룩’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거룩과 의는 우리가 좋아합니까, 안 좋아합니까? 안 좋아하지요! 우리는 돈을 좋아해요! 돈을! 낼 곧 죽어도 돈 벼락맞고 죽고 싶어! 지금 죽더라도 돈 한 번 실컷 벌어보고 죽겠다. ‘까짓 거, 사람이 한 번 죽지 두 번 죽나? 돈이나 실컷 벌어보고 죽자!’ 이거다 말이지요. 이거…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하나님을 재물과 겸하여 섬길 수 없다」했거든요. 그 말이 재밌잖아요. 하나님 반대편에 뭐가 있어요? 재물이 있다고요, 돈이 있다고요 돈이. 그러고난 뒤에 “참새를 봐라, 주께서 친히 기르시잖아~ 창고도 안 지었잖아~ 들풀 봐라, 솔로몬 옷 보다 들풀이 더 아름다운 거잖아~ 그러니까 너희들은 살면서 돈이 아니라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염려하지 말고 줄게!” “뭐요?” “그의 나라와 의를 줄게” “미쳤다! 나는 그런 거원하지 않아요,” “하나님 나는 그 나라와 의를 주소서, 이런 기도하기 싫은데요.”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 걸 준다니까요.
그래서 기존 교회에서 복음 설교한다는 것이요, 그렇게 힘들어요. 이제부터 잘 들어야 돼요. 이제부터 어려운 거 합니다. 여기까지는 쉽죠? 어렵지만 쉽게 하도록 애를 써보겠습니다. 제사에서 뭐가 나온다 했어요? 의와 거룩이 나오지요. 그러면 제사에 참여하는 우리가 여기 있잖아요. 하나님 소원이 뭐냐 하면, 하나님 아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의와 거룩이 이 지상에 펼쳐지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그렇죠? 맞지요?
우산이 있죠? 우상 꼭대기에 대가 있잖아요. 우산 위에 비가 떨어졌다. 물방울이 굴러서 아래로 떨어지겠죠? 똑, 똑 떨어지겠죠? 이게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고후9:9 저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이 말씀이에요. 우산에 떨어진 의가 또르르 굴러서 툭, 떨어질 때 떨어진 물방울과 우산대 꼭대기에 떨어지는 물방울이 같은 물방울이잖아요. 이것보고 의라 하지요. 하나님께서 고린도후서에서 고린도교인들에게 중간에 물방울이 흘러가는 골 -골이 무슨 뜻인지 알죠? 골짜기...- 이 골을 무엇으로 사용하냐면 가난한 자로 사용하는 거예요.
‘가난하게 되라,’ 는 말이 아닙니다! -이런 강의가 젤 어렵다- 이번 대전 강의 때 했는데, 부자들은 뭐가 되라? ‘부자들아 제발 가난한 자가 되라,’ 이 말이거든요. 돈 없는 가난한 자 말고, 돈이 있더라도 뭐가 가난한 자? ‘심령’이 가난한 자. 「나는 주님 없으면 못 삽니다.」라고 느끼는 가슴이 가난한 자, 그런 사람에게 뭐가 많다? 복이 있다! 왜? 자기를 대단하게 보기 때문에. ‘나는 돈 있다~ 나는 뭐 가졌다~’ 이거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아니고 심령이 부자지요.
‘하나님, 제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저는 운반채에 불과합니다.’ 이거? 가난하죠. 우리들 자신에게 제사제도를 통해 어린 양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가 발생되면 그 발생된 의가 떼구르르 굴러가지고 떨어지는데, 제가 왜 우산대를 예로 들었냐 하면 우산대가 사방팔방으로 펼쳐져 있잖아요. 흩어지는 것의 적당한 예라서 우산을 예로 든 겁니다. 하나님의 의와 거룩이 제사를 통해서 이루어지면, 떼구르르 굴러 우리라는 걸 통해서 흩어지죠. 흩어질 때 구제를 한다는데 구제가 아니고, 돈이 흩어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의와 거룩이 흩어지죠.
가난한 사람들 돈 주고 교회 나오라 하면 돈 보고 교회 나옵니다. 그것은 의가 흩어진 게 아니고 교회자금이 흩어진 거죠. -누구는 운영비가 없어서 줄 것도 없지만- 사람들이 구제라고 하면 돈, 돈 돈을 염두에 두는 수가 있는데 하나님의 뜻은 돈의 흩어짐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의와 거룩이 흩어짐이에요. 그런데 ‘거룩’과 ‘의’는 우리가 좋아하는 겁니까, 안 좋아하는 겁니까.
안 좋아해요! 어느 인간이 거룩과 의를 좋아할 인간이 어디가 있습니까. 돈을 좋아하지. “목사님 왜 그런데요?” 그게 인간이고 누구를 위해서? 자기를 위한 우상숭배자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도 “하나님이여~ 내 원하는 돈 주세요,” 이럴 정도로 우상숭배자고, 그런 우상숭배자의 마음을 맞춰줘야 교회가 부흥 되요. 우상이 아니면 요새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우상을 전해야 교회가 됩니다. -오랜만에 바른 소리 한번 했다,-
만약에 참 하나님을 전하면 교회가 사라집니다. 교회가 사라져요. 여러분 거룩과 의를 전달하는 전달자가 되세요. “그럼 내 것은요?” “당신 몫은 없습니다” 하면 누가 하겠어요. 다시 이야기할게요. 누가복음14장, 누가 우리를 대접할 때는 어떻게 하라? 다시 대접받을 친구나 친척에게 하지 말고 누구한테 하라? 값을 것이 없는 자에게 해버려라! 왜? 너는 운반 채니까! 그냥 전달하는 사람에 지나지 않으니까. 그래서 사도바울이 말하기를「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그런 말씀을 하신 거예요. 자, 이제부터 진짜 어려운 거 합니다.ㅋㅋ
제사에서 이루어진 이 복이 죽지 아니하면 왜 복이 안 된다 말입니까. 가인의 제사처럼 “받으~소서, 이거는 하나님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바치는 거, 우리가 드리는 거, 우리의 정성, 우리가 비는 거, 우리의 찬양, 왜 그런 것들이 모아져서 제사가 안 되느냐 이 말입니다. 왜 예배가 안 되고 찬양이 안 되느냐 말입니다. 왜 꼭 누가 죽어야 돼요? 왜 누가 죽어야 되냐 이 말입니다. 왜 누가 죽어야 의가 생기고 거룩이 생기냐 말입니다. 이유가 뭐냐 말입니다. 그걸 제가 설명 드릴게요.
구약에 보면 언약이 있어요. 언약. 제일 처음에 나온 언약이 노아언약인데, 노아가 받은 언약이니 노아언약입니다. 그 다음에 무슨 언약이냐면 아브라함 언약입니다. 노아언약은 땅을 위한 언약입니다. 땅을 복 받는 땅이 되게 하기 위해서. 노아에게 가는 것도 아니고 노아 식구에게 가는 것도 아닙니다. 노아가 딛고 있을 그 ‘땅’에게 항상 하나님의 은총이 임합니다. 노아언약에서 하늘의 은총을 받는데 그 근거는, 땅에서 인간이 얼마나 악하든지 선하든지 그건 상관하지 않아요.
노아가 드린 의로운 재물로 땅에게 혜택이 주어집니다. 지금도 안산시내에 비 내리잖아요. 이 중에 예수 안 믿는 사람도 있고 지옥 갈 사람도 있지만, 지옥가지 않을 사람은 무엇을 갖고 있습니까?「단비」라는 은혜를 갖고 있습니다. 그걸 그 사람에게 따지고 물어서 “에이~네가 나쁜 짓했구나, 비 안내리겠다,” 이게 아니라 나쁜 일했든 않든 관계없이, 땅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람이 땅을 딛고 있는 이상은 그 땅의 혜택을 공급받게 돼 있습니다.
두 번째 아브라함언약은 뭐냐, 이것은 가족이에요. 가족에 관한 언약입니다. 아브라함의 특별한 언약이 -어려우니까 쉽게 하자면- 이 세상에는 모든 가족이 많지만, 그중에 특별한 가족을 따로 만들었습니다. 이 가족은 있던 가족이 아니고 없던 가족이 새로 생겨요. 죽었던 가족, 죽었던 가족이라는 건 태(胎)가 자식 못 낳은 가족. 저주받은 가족. 자식이 없는 가족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함으로써 죽은 자에게 새로운 핏줄이 나오지요. 새로운 이삭이 나오죠. 이삭= 약속의 자식이라는 뜻입니다.
로마서4장에 보면 예수님을 지칭할 때 아브라함을 지칭한 게 아니고 이삭을 예수님이라고 봤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이삭을 믿는, 믿음의 조상이 되는 그런 관계예요. 이삭은 예수님 역할을 하고 아브라함은 이삭이 믿는 자 역할. 그래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고 이삭은 죽은데서 살아나고 없는데서 있게 된 메시야, 그리스도,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삭이 존재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이삭이 어떻게 됐어요. 이삭이 재물이 되? 이삭이 모리아산에서 죽고, 그때 숫양 때문에 다시 살잖아요. 아브라함의 가정은 어떤 가정이냐 하면, 하나님의 어떤 원수도 이기지 못하는, 하나님의 원수의 성혼을 이루는 그러한 가정이 돼요. 창세기22장17절 찾아봅시다. 누가 한 번 읽어봐요.『창22: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보세요. 하나의 씨가 번성하죠?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번성하는데 번성하는 하나하나가 역할이 있고 기능이 있어요. 그 ‘대적’ 원수의 문을 연다. 원수라는 것이 사기당해서 생긴 개인의 원한관계 아닙니다. 하나님의 적에 대해서 하나의 벌떼 같은 군사로 자라가기 위해서 아브라함 자손이 최초로 등장하는 겁니다. 그런데 아브라함 자손이 하나님의 원수를 이길 수 있는 이유는 뭐냐, 아브라함 자손은 죽은데서 죽음에서 살아났고 없는데서 있게 된 그러한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이 임했기 때문에 세상의 어떤 적에게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질문 던집니다. 그러면 아브라함 가족 외에 다른 가족들은 이 일을 못합니까? 그들은 죽은데서 살아나지 못하고 없는데서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렇죠. 뭐가 달라도 다르다 이 말이죠. 아브라함가정은 달라요. 하나님의 언약이 있는 사람과 언약이 없는 사람은 달라도 너무 달라요. 아브라함의 아들이었던 이삭의 원리가 그대로 어디로 옮겨가느냐, 야곱에게 옮겨갑니다. 야곱에게 옮겨가면 그 하나님의 원수는 누가 되겠어요?
야곱에게 있어서의 원수가 누굽니까? 자기 형, ‘에서’ 이삭에게는 적이 누가 되겠어요? 이스마엘이 되겠지요? 이스마엘이 왜 적이냐 하면, 육으로 태어났고 이삭은 약속으로 태어났고. 그래서 하나님이 뭐라 합니까. “어서 내 쫓아라” 왜! 저들은 인간의 혈통에서 태어났고 이삭은 혈통이 아니고 약속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는 혈통에 의한 인간들은 들어갈 수가 없어요. 세상교회들은 미안하지만 못 들어갑니다.
거듭나지 않으면 하늘나라 못 들어가요. 다시 말하면 거듭나지 않으면 사람 취급을 못 받습니다. 그거는 저주받은 자식이라. 하나님의 업무에서 제외되는 거예요. 원수의 성혼은커녕 원수에 묶여 살고 지배받고 통치 받고 삽니다. 그 사람들은. 그 속에 언약이 활동하지 않은 사람은요. 그런데 야곱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지만 그는 가장 사랑하는 자식 요셉이 도중에 어찌됩니까. 죽었잖아요. 다른 형제는 알지요.
죽을 뻔했는데 애굽에 팔아먹었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 내막을 누구는 모릅니까? 아버지 야곱은 알 턱이 없지요. 야곱에게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만나기 전에 항상 죽은 자식으로 있어요. “아이고~ 내가 사랑하는 아들 죽었다!” 나중에 애굽에서 만나죠? 그때 뭘 생각했어요?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데서 살았다 하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있는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의 공통점이 있어요.
뭐냐면, 죽었다가 살아나지 않으면 내 자식 아니라는 공통점이 있어요. 그런데 그런 복을, 야곱이 혜택을 받기 위해서는 요셉이란 사람이 죽음의 자리에 들어가야 되지요. 마치 아브라함을 살리기 위해 제물이 되는 것처럼. “아버지, 불쏘시개는 있는데 제물은 어디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그것은 하나님이 준비하실 것이지 네가 걱정할 일이 아니다.”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실 것이다”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신 것이 누구였죠? 이삭 본인이었잖아요.
본인이 묻는 거예요. “아버지, 제물은 어디 있습니까?” “너야 너!” 라는 말은 못하고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실 거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 저를 구원할 인간 이 세상에 누굽니까?”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실 거다” 누군데? 돈 많은 장로님입니까, 누구 말입니까. “너야 너!” 우리가 바로 하나님의 의를 전달하는 매개체고 운반자예요. 우리는 운반자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문제는 어디까지나 뭐냐면, 하나의 가정에 관한 문제예요. 가정... 아까 노아언약은 어디에 관한 문제다? 땅에 관한 문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가정에 관한 문제. 이제 그 다음 언약이 뭐냐,「모세언약」이 나옵니다. 모세언약은 집단적이에요. 모세언약은 거대한 집단을 이뤄요. 집단을 이루면서 하나의 국가가 돼요. 이 국가의 왕은 누구냐. 이 국가의 왕은「여호와 하나님」이 왕이 됩니다.
하나의 가정에서도 누가 죽어야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용서가, 그러니까 요셉의 형제들이 누구한테 용서받은 거예요? 하나님께 용서받았지만 그 매개체는 누구였습니까? 요셉이죠? “요셉아, 요셉아 미안하다, 아버지 죽고 난 뒤에 복수할거니?” 자꾸 물으니까 요셉이 답답해서 “형들이여! 형들의 죄를 구원하기 위해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냈는데 자꾸 개인적인, 사적인 원한관계를 따지십니까? 답답한 거예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은 것은 우리를 밟으려고 죽은 게 아닙니다. 우리를 어떻게 하기 위해서 죽었습니까. 전부 우리를 위해서 막무가내로 살려내기 위해서 용서해주시기 위해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죽었어요. 예수님이 우리를 붙들고 시비 걸려고 죽은 게 아닙니다. “너 내게 뭐해줬냐, 돈 내라” 이런 예수 없어요. 그건 한국교회에 있어요. 주님은 주시고 손 털어버렸어요. ‘다 먹어라! 다 가져가라!’
자신의 모습까지 우리에게 다 털려버렸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 믿거든 남에게 권하지 마세요. “에구~ 몸이 아파서 죽을 때가 됐습니다.” “믿습니다.” “그럼 뭘 더 원해!” “몸이 아파서 낼 모래 오락가락하는데...” “잘 됐네요.” 예수 믿는 게 얼마나 큰 구원인데 어찌 다른 걸 더 바래. 도둑놈 심보지, 그런 나쁜 심보가 어디 있어요. 예수를 함부로 믿을 수 있는 줄 압니까? 못 믿어요! 목숨까지 탈탈 다 털어 내놨는데 뭘 더 내놔요. 더 내놓는다면 그건 가짜겠지요. 그건 가짜예수예요.
예수 믿고 구원받았거든 욕심내지 마세요. 코 박고 죽든, 돌에 맞아죽든, 그거 큰 문제 아닙니다. 가야산에서 다 이야기했잖아요. 다 시시합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시시해요. 교회 예배드리고 있는데 누가 창에 돌 던져서 유리창 깨졌어요. 시비합니다. 예배마치고 비가 와가지고 비 홀딱 맞았습니다. 시시한 이야기예요. 하나님께서는 의가 없고 거룩이 없으면 무조건 저주하는데.
우리는 거룩 없고 의 없는 인간인 거 아시고 자기 아들을 통해서 우리를 용서하시는 ‘의’외 ‘거룩’을 주신 거예요. 그러면 더 이상 우리가 욕심내면 안 되지요. 아직 서른세 살 안 사신 분? 예수님은 서른세 살 사시고 그만 제대했어요. 군대가 뭐가 좋다고 말뚝 박고 난리합니까. 모세언약에서는 하나의 왕이, 여호와가 왕이기 때문에 모세언약과 공통점이 뭐다?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데서 살리는 그 법칙을 제사법으로 보여줍니다. 제사법으로.
그래서 제사 때마다 죽는 그 어린양, 어린 소, 흠 없는 제물의 죽음 십자가 예수님의 죽음, 흠 없는 양의 죽음, 오늘날의 예수님의 죽으심. 사도바울이 전한 진짜복음은 뭐였습니까. 갈라디아서 6장에서「십자가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했어요. 왜 목사들이 다른 복음을 전할까요? 그것은 뭐냐,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제공하면 교회가 된다는 논리 때문에 그래요. 사람들은 자기 가치를 누구한테 인정받는 걸 좋아해요.
그런데 예수님 십자가 앞에서는 뭡니까. 우리는 이미 죽은 자고 저주받을 자고 있어도 없어도 그만인, 아무것도 아닌 존재 그런 존재라는 것을 십자가 앞에서 알게되니까요. 왜? 예수님이 우리 인간 세상에 들어와 보니까 결국 십자가고 우리도 십자가고 둘 다 십자가에서 인생 끝나잖아요.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사흘 만에 죽어 천당 가고, 우리도 십자가에서 끝나버리고 똑 같아요.
그 제사법에서 나오는 ‘의’ 이 제사법에서 의가 나오잖아요. 의가… 의가 나오는데, 이 제사법에서 나오는 의가 바로 모세언약에 보면 구제요 이웃사랑이고 그렇다 말입니다. 모세언약에 이런 패턴을 가지고 두 자로 뭐라 하냐면 ‘율법’이라고 합니다. 율법. 이렇게 율법을 줬는데 온전한 이스라엘을 이루었습니까, 못 이뤘습니까? 못 이뤘죠. 나중에 알고보니까 율법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숨어있는 죄를 드러내기 위해서 율법을 준 거예요.
그러니까 율법은 가시인데 그들은 가시를 가지고 카스테라나 돈까스로 아는 겁니다. ‘너무 맛있겠다’ (ㅋㅋ) 자기를 찌르는 바늘인데 마치 양식으로 생각하고 오해한 거예요. 바늘을. 쟁반에 바늘 쭉 내 놓으니까 그 바늘이 찌르는 바늘인데 ‘바늘 맛있게 생겼다,’면서 바늘을 먹는 거예요.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실패할 줄 아시고 하나님의 제사에 대한 그것은 레위지파가 아니고 유다지파를 통해서 왕을 보내시잖아요. 왕…
그러면 유다지파로 왕을 보내면 인간들이 생각했던 모든 여호와라 하는 것은 전부 다 가짜가 되겠지요. 이것 좀 어려워요. 이것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지금 요셉지파가 에브라임과 므낫세 두 지파로 나눠졌지요? 모두 몇 지파입니까? 열 세지파지요. 레위기 거쳐서 민수기 오게 되면 열두지파니까 한 지파는 따로 돼있어요. 군대서 ‘향도嚮導’란 앞에서 통솔하는 사람아닙니까, 앞으로 갓! 뒤로돌아 갓! 하잖아요. 보통 향도는 바깥에 서 있죠.
한 지파가 열두지파를 통솔하지요. 한 지파가 나머지 지파에게 무슨 기능과 관련돼있어요? 제사기능과 관련돼있습니다. 그러면 열두지파를 어디를 쳐다봅니까. 제사지파를 쳐다보죠. 왜, 그 피흘림 없이는 뭐가 없기 때문에? 용서고 뭐고 그거는 저주받을 자예요. 저주받는 거예요. 피 없이는 저주받는 겁니다. 그런데 결국은 레위지파가 실패했지요. 인간의 힘으로 안 되잖아요. 자기가 인도한다는 자체가 모순에 빠졌는데요. 하나님 법에 거룩하지 않으면. 거룩의 티를 내면서 거룩할 수 없어요. 거룩의 티를 내도 거룩하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지파가운데서 유다지파 같은 경우에는 역시 자식이 둘이었습니다. 창세기38장에 보면 베레스와 세라, 베레스와 세라 두 자식은 누구와의 관계에서 낳은 자식입니까? 세상에 시아버지와 며느리와 관계에서 낳은 자식이잖아요. 여기에 뭐가 담겨있습니까. 유다 지신의 죄가 담겨있지요. 요셉의 므낫세와 에브라임은 요셉의 거룩한 희생이 담겨있습니다. 그런데 유다의 베레스와 세라는 뭐가 담겨있어요? 경솔한 짓을 했던 유다의 잘못이 담겨있죠.
그로인하여 유다지파에서 누가 태어난다고요? 왕이 태어난다고. 그렇다면 열 세 지파 가운데서 통솔하는 한 지파가, 왕이 유다지파에서 나온다는 말은 유다지파가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 없다? 없다는 겁니다. 왕이 될 만한 자격이 없다는 점에서 사람들은 오직 누가 왕이에요? 오직 하늘에 계신 여호와하나님이 진짜 왕입니다. 그래서 유다지파로부터 옴으로 말미암아 레위지파에서 이루었던 모든 것은 뭐로 돌아가느냐 하면, 죄며 실패작이며 하나님의 의와 거룩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이 드러나요.
이것을 아까 처음 그림 그렸던 우산이야기, 우산대가 있는데 우산대에 뭐가 떨어졌다? 물방울, 하나님의 의가 있지요? 오늘 본문에 의가 흩어져 또르르 굴러 떨어지죠? 우산발 사이에 있는 계곡이 뭐에 해당됩니까. 이스라엘이고 운반체예요. 운반체인데 하나님의 의가 인간의 행위로서 증명되는 게 아니고, 인간의 잘남이 아니라 제대로 가려면 물방울이 구를 때마다 뭘 느껴야 됩니까? 자신이 죄인인 것, 인간의 죄인인 것을 느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인을 사용해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언약의 보편적인 방식을 이루어가십니다. 이게 바로 아까 이야기한 '흩어진‘ 하나님의 흩어짐에 의한 원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관심사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주시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좋아한 것을 우리가 싫어하더라도 우리에게 맡기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싫다고 박박대죠? 화내죠. 그러면 우리는 그것을 통해서 뭘 압니까. 내가 얼마나 내 이익만 챙기는 죄인인가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오직 주님의 공로만 높이는 성도가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축복에 대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을 전달하는 매개체라 하는 것을 잊지 말고, 우리가 예수 믿게 된 그 자체만으로 하나님의 쓰임 받는 종으로, 종이 되는 것만으로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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