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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08 우리교회 여름수련회 강의 파일강의[수련회]

2008 우리교회 여름수련회 강의 파일

이름 : 우리교회(IP:220.81.176.150)

2008년 우리교회 여름수련회 강의 파일

우리교회(IP:220.♡.176.150)

08-08-10 17:48

2008년 우리교회 여름수련회 음성파일

우리교회(IP:124.♡.84.9)

08-08-16 13:26

2008년 우리교회 여름수련회 동영상파일

우리교회(IP:220.♡.176.150)

08-08-20 19:03

2008년 우리교회 여름수련회 문서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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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교회(IP:220.♡.176.150)

08-08-20 19:04

2008우리교회 여름수련회 1강

2008-08-14 08:17:44 녹취 : 오용익

(2008년 우리교회 여름수련회, 강의 : 이 근호 목사)

제 1강, 선지자

하나님의 크신 사랑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귀한 말씀을 저희들이 받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 그 말씀 속에 들어 있는 그 생명과 사랑과 용서가, 그 주님의 자유와 품성이 이 시간부터 저희들의 품성과 사랑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제목이 『호세아/아모스 강해』라고 되어 있지요? 호세아, 아모스는 선지자입니다. 첫째시간에는 선지자가 어떤 분인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선지자는 세상 끝자락에 서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은 끝을 향해서 살아가는데 선지자는 이미 끝에 도달해서 끝을 향해서 달려가는 사람에게 끝을 이야기해 줍니다.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초반부터 했습니다. 다시 이야기를 해야 되겠지요. 선지자라 하는 것은 우리 보통사람과 어떤 차이가 나느냐 하면 선지자는 끝자락에 서서 끝자락을 향하여 질주하는 사람들을 쳐다보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선지자들 보기에 제일 웃기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하면, ‘이 세상에서 좀 성공했네, 잘 나가네’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선지자들이 보면 웃습니다. ‘저 인간이 끝을 모르고 중간쯤 와서 ’인생에 대해서 성공을 했니 못했니, 나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는‘ 등의 끝을 모르는 이야기들이 끝을 아는 선지자들의 눈에 보기에는 참 어설프기 짝이 없는 거예요. 그러면 선지자는 똑똑해서 그런가? 똑똑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이 선지자는 하나님과 땅에 있는 인간들 사이에 끼어들어요.

하늘과 땅 사이에 끼어들어서, 그 다음에 중요합니다, 선지자는 하늘과 땅 사이에 끼어들어서 하늘과 땅 사이에 연결된 하나님의 뜻을 독점하는 분입니다. 여기서 ‘독점’이 중요합니다. 독점이라는 말을 아시지요? 어떤 가게가 모든 물건을 다 싹쓸이해서 쟁여놓고 혼자 파는 거죠.

하늘과 땅 사이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 하는 것은 선지자가 혼자 다 알고 있기 때문에 진정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하늘에다 대고 기도한다고 알게 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을 통해야 되느냐?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돼요. 선지자를 통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을 모릅니다.

방금 제가 이야기 한 것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선지자는 끝자락에 사는 사람. 또 하나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을 독점하는 사람. 이 두 개를 합쳐 봅시다. 이 두 개를 합쳐버리면 선지자란 하나님의 뜻을 독점하고 있는 사람인데 그 내용은 뭐냐? 세상의 끝을 다 알고 있는 사람.

세상의 끝이 어떻게 끝이 나며 결국 인생이란 어떻게 끝이 나며, 세상이라는 것이 어떻게 결판나는지를 독점적으로, 다른 사람은 모르는데 홀로 아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선지자라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선지자를 대할 때에 ‘우리가 선지자처럼 되자. 혹은 선지자처럼 본받자’라고 나오면 좀 곤란합니다. 그것은 어디에 어긋납니까? 독점원리에 어긋나지요.

선지자를 본받고 싶다고 해서 본받을 수 없습니다. ‘선지자만큼 공부하면 어떻게 되겠지.’ 안됩니다. 선지자는 세상 끝자락에 서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면 선지자를 통해서 알아야지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우리가 선지자를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다’는 것이 여러분에게 기분 나쁘게 들립니까? 아니면 기분 좋게 들립니까?

기분 좋게 들려야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이 선지자들을 통해서 이미 확정되었다는 것은 우리에게 심리적인 마음의 안정감을 줘요. 만약에 선지자의 뜻이 흐리터분한 것 같으면 우리는 오늘도 기도원에 가서 기도해야 됩니다. ‘주여, 내 인생의 뜻이 무엇입니까’라고 기도해야 돼요. 그리고 그 기도 내용은 내일 되면 또 달라져요.

아침의 기도내용과 저녁의 기도내용이 계속해서 달라져요. 기분 따라 컨디션 따라 달라지고 가정에서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따라서 다 달라져요. 이런 흔들림, 이런 불안정 그것을 전부 다 없애버리고 ‘너에게 어떤 일이 있더라도 확정된 뜻은 이거야’라고 딱 결정을 내려준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뭘 느끼느냐 하면, 안도의 숨을 쉬면서 안도감을 느끼죠.

‘야, 역시 선지자는 정답이야. 내가 알려고 무던히 애썼지만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구나. 역시 선지자가 있으매 나는 마음의 평화를 얻었노라. 모든 진리의 확정을 얻었노라.’ 내가 모르고 있는 하나님의 뜻을 선지자는 알고 있다는데서 우리는 안심이 되지요. 모든 진리의 끝자락에 서 있다는 것은 그 끝자락까지 오게 되는 그 모든 정답을 다 알고 있다는 겁니다.

정답을 알고 있는 사람의 그 정답을 내가 이미 알았다는 사실은 우리를 굉장히 안정하게 만들고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지요. ‘세상이 어떻게 변해도 이미 주의 뜻은 내가 알아챘구나.’ 정답을 알았다는데서 오는 그 여유. 빨간색으로 써볼게요. ‘여유.’ 인생에 대해서 여유롭다는 것, 왜 여유로운가?

왜 인생이 여유로울까요? 지금까지 강의를 들으신 분들은 그 해답을 압니다. 왜 선지자의 말을 들으면 우리 인생이 여유롭게 될까요? 그 정답은 무엇을 알기 때문에? 끝을 알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아슬아슬한 드라마를 볼 때 이미 끝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어떠하겠습니까? 좀 시시하죠.

‘저 억울한 며느리를 어떻게 하지?’ 라든지 ‘저 남녀가 집안에서 반대를 하는데 결혼을 할 수 있을까나?’ 하면서 아슬아슬 한데 그 끝을 미리 다 아는 사람은 ‘저 둘이 결혼해서 괌으로 신혼여행 간다. 걱정하지 마라. 드라마 그렇게 끝나게 되어 있어’라고 이미 끝을 알게 되면 조마조마 아슬아슬한 그런 것이 없이 여유가 많지요.

그래서 여러분이 여유롭게 살려면 뭐만 알면 됩니까? 세상의 끝만 알면 다 여유로운 거예요. 여기 지금 손수건이 있는데 이것이 다 구겨졌어요. 그래서 인생처럼 복잡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아무리 복잡해도 이 인생의 끝을 다 알고 잡아당기는 사람은 인생의 내용들이 다 시시하죠. 다 시시한 겁니다. ‘어차피 인생의 끝이 이렇게 날걸.’ 끝을 장악하면 전부를 장악한 것이 돼요.

중간 중간 ‘성공했네, 실패했네.’ 이것은 백날 성공해봐야 내일 되면 또 흔들립니다. 아예 흔들리지 않도록 이번 수련회를 통해서 끝을 알고 정답을 아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해서 전부 다, 세상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부 다를 아는 사람 되기를 바랍니다.

끝은 어떤가? 호세아, 아모스 들어가기 전에 다니엘을 예로 들어서 끝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지 한 것은 잘 아시겠지요? 여유, 그 이유는 끝! ‘끝을 알면 여유 있다. 끝을 알면 불안하다.’ 간단하죠. 그래서 끝은 누가 독점한다? 선지자가 독점한다. 그러니 우리는 자기말 듣지 말고 선지자말을 들어야 한다. 선지자 말은 어디에 있다? 성경에 있다.

선지자중의 한 사람인 다니엘을 예로 들어서 끝이 어떻게 되는가를 설명 드리고자 합니다. 다니엘 세친구가 하나님께서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평소에 우상을 섬기지 않기로 마음에 결심을 했습니다.

그런데 ‘왕을 상징하는 형상인 금 신상에 절하지 아니하면 누구든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풀무 불, 쉽게 말하면 포항제철에 있는 거대한 용광로를 생각하면 됩니다, 그 거대한 용광로 속에 집어넣는다’는 국법이 제정되었습니다. 그래서 절하지 아니한 사람, 다니엘의 세친구가 체포되어서 법대로 용광로 불속에 들어갔습니다.

임금은 본때를 보이겠다는 마음으로 평소보다 그 용광로 불의 세기를 일곱 배로 높였습니다. 얼마나 그 열이 얼마나 뜨거웠던지, 제가 보기에는 한 섭씨 3000도 이상 되지 싶어요. 왜냐하면 세 사람을 붙들고 용광로에 집어넣는 그 관리가 타 죽을 정도였습니다. 세 사람을 집어넣으려고 그 세 사람을 붙든 법무부 공무원이 불길에 타죽을 정도였으니까 그 불길이 얼마나 세었겠습니까?

이것은 그 세 명이 타죽는다는 것이 기정사실이죠. 용광로가 있는데 그 용광로 입구에 불이 붙었습니다. 이 불 속에 이 세 사람이 들어갑니다. 지금 하나님의 끝이 뭐냐, 그걸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바깥에 있는 사람들 보기에 이 사람은 불속에 들어왔어요. 불속에 집어넣은 것은 죽으라고 불속에 집어넣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불 속의 세계는 죽음의 세계죠. 그리고 여기에 그들을 집어넣는 세계는 산자의 세계입니다. 막상 들어가고 나니까 세 명 들어간 줄 알았는데 거기에 한명이 더 있었습니다. + 한사람, 그 한 사람인 신의 아들이 함께 있으니까 불속에서도 이 사람들은 안 죽었어요. 선지자가 끝을 알고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을 독점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선지자가 가지고 있던 하나님의 뜻이란 사람들 보기에 죽음이라고 여겼던 그 죽음의 세계가 불속에서도 안 죽는 산자의 세계였습니다. 그 다음에 이 사람들을 불속에 집어넣으니까 불속에 들어간 사람들과 바깥에 있는 이들을 집어넣은 사람들과의 사이에 뭐가 있습니까? 불이 있죠.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보기에 이 사람들은 불속에 들어갔지만 반대로 예수님 쪽에서 보면 그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바로 불속에 있는 거예요. 산자라고 여겼던 그 세계가 죽음의 세계에요.

소위 선지자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뜻은 뭐냐 하면, ‘소위 이 세상에서 살았다고 여기는 사람은 사실은 죽은 자요, 사실은 하나님을 믿고 죽었다고 여기는 그 세계가 사실은 죽은 자의 세계가 아니고 유일하게 산사람의 세계라는 것’을, 유엔사무총장이 이야기한 것도 아니고 어느 법학박사가 이야기한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독점한 누구를 통해서 이야기한다? 선지자를 통해서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의 끝자락에서만 알 수 있는, 세상 사람들은 모르고 선지자만이 알 수 있는 독점적인 하나님의 뜻입니다. 여기서 문제 하나 던집니다. 여기 불을 가운데 두고서 다니엘의 세 친구를 불속에 집어넣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이들을 불속에 집어넣었다고 보지만 사실은 그 사람들이 불로 인하여 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다니엘의 세 친구는 살았으니까 나머지 그 바깥의 모든 사람들은 죽어가고 있는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그 불타는 세계 안에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약국, 마트, 산업시설 또 뭐가 있습니까? 유명한 것이 있습니다. 교회! 수영장도 있을 것이고요. 다시 말해서 이런 인간들의 모든 행태가 불에 타면서 산자의 세계에 들어올 것이 있다, 없다?

없는 거예요. 그렇다면 여기에서 이 교회란 뭡니까? 이것은 취미생활입니다. 그냥 신의 이름을 부르면서 노닥거리는 동네입니다. 아무 소용없어요. 이 교회에서 선교하고 전도하고 헌금하고 기도하고 예배하고 찬양하거든요. 다 소용없습니다. 이게 선지자의 뜻입니다.

사람이 뭘 해서 구원받는 것은 죽어가는 사람들이 지어낸 종교라는 이름, 기독교라는 이름의 아이디어지 하나님하고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데 자기들끼리 그럴 듯한 것 같아서, 아마 그러면 될 것 같아서, 이렇게 노력하고 착하면 구원될 것 같아서 자기들끼리 조작해 낸 겁니다.

기독교, 불교, 천주교, 힌두교 다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에 목사라는 직분, 장로라는 직분, 집사라는 직분도 있습니다. 정작 다니엘의 세 친구가 구원받은 것은 그들 제 삼자의 희생과 노력이 아닙니다. 이 사람들 자신의 노력과 희생으로 구원받았다고 한다면 다니엘의 세 친구는 여기에 있는 사람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미 신의 아들,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찾아오지 못하는 죽음의 세계에 이미 상주해 계시고 다니엘의 세 친구는 여기에 합류한 겁니다. 다시 말해서 평소에 다니엘의 세 친구는 이 불 속에 들어가기 전부터도 신의 아들과 합류해 있었습니다. 그것이 불 질렀을 때 표가 난 거예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아, 저 세 사람은 저희들끼리 잘 노네’라고 했는데 세 사람 이 잘 노는 것이 아니고 몇 사람이 잘 놉니까? 네 사람이 잘 놀아요. 이게 바로 구원이라는 겁니다. 구원이 무엇인가? 구원이란 불가능성입니다. 불가능성!

열심히 기도해도 안 되고 헌금해도 안 되고 십일조해도 안되고 전도해도 안 되고 봉사해도 안 되고 예배드려도 안 되고 찬양해도 안 되고 문경까지 와서 성경공부 해도 안 되고 무슨 발악을 다 해보고 무슨 짓을 다 해보세요. 구원이 되는가.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이 구원입니다. 이야기 끝났습니다. 다 집에 가요. 되지를 않아요. 안되는데 뭐.

이것을 제가 수평적으로 그렸는데 수직적으로 그리면 이해가 더 쉽습니다. 왜 구원이 안 되는데 왜 구원이 이루어지는가? 여기에 층이 두층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층이 두층이 있다는 것을 몰랐어요. 다니엘의 세 친구는 알았습니다. 위층에는 약속의 층이 있어요. 위층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루어지는 약속의 층이고 아래쪽에는 생존의 층입니다.

이 생존의 층이란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뒤에 예수 믿고 하나님 믿고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보려고 하는 생존의 층이 있어요. 생존의 층에서 교회 다니고 기도하고 예배드리고 백날 해봐야 이것이 도로 어디로 돌아가느냐? 이게 다 누구 좋으라고? 내 생존에 유리하도록 하기 위해서, 내 삶이 좀 더 풍족하고 여유 있게 살려고, 나를 위한 것, 내 생존을 위한 것으로 도로 와버려요.

아무리 열심히 교회 와서 기도하고 열심히 뭘 해도 결국 마지막에는 무엇과 연관되느냐 하면 ‘어찌되었든지 살아야지.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남는 그것이 남는 기다, 야야! 교회 다니고 예수 믿어도 살아남아야 돼. 자손들 잘되고 이것도 잘되고 저것도 잘되어서 무조건 살아남아야 돼’라는 것으로 다 귀환해 버립니다.

자기의 목숨부지, 목숨보존, 이런 생존의 층이 여기에 깔려 있습니다. 교재 1쪽에 보면 나옵니다만 약속의 층이란 창세기 3장 15절에 있는 대로 ‘하나님께서 자기가 원하는 사람을 천국으로 데려가기 위해서 인간하고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 똑바로 해. 전도 많이 해. 헌금 많이 해’라고 인간에게 닦달내고 인간한테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와 따지느냐 하면 우리 눈에는 안 보이는데 우리를 쥐고 있는 뱀의 후손, 악마와 따지는 거예요. 약속의 층에서는 인간을 배제합니다. 왜 배제하느냐 하면 인간은 무슨 발악을 해도 불가능성이니까. 우리는 주님께서 무슨 말씀을 해도 그것을 지킬 재주가, 능력이 없어요.

제가 청도에 있는 각북교회에서 요한계시록을 강의할 때 이렇게 했지요. 계시록에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주리라’(계 2:10)하는 대목이 나온다면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씀을 무슨 수로 지킵니까? 죽을 뻔하게 충성해도 아직 죽은 것은 아니잖아요. 죽도록 충성해야 생명의 면류관을 얻는데 산자가 아무리 충성을 해도 산자가 죽은 자가 되지는 않았잖아요.

그 말씀을 지킬 수가 없는 거예요. 죽도록 충성을 못한다는 말입니다. 죽도록 충성을 못한다면 생명의 면류관도 물 건너갔지요. 성경의 어떤 말씀도 지키는 것이 우리에게는 불가능한 겁니다. 지킬 수가 없어요. 온 법을 다 지키다가도 하나를 어기면 다 어긴 것이 됩니다.(약 2:10)

사람에게 닦달내지 않고 우리한테 의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스스로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과 의논해서 자기들끼리 결정한대로 실시, 그냥 적용할 뿐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은혜, 쉬운 말로 선물이라고 합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자기맘속에 두 가지 층이 있어요. 하나는 내가 밥 먹고 살려고 애쓰는 층과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두 층이 있습니다.

불신자는 층이 한 층밖에 없어요. 내가 밥 먹고 살려고 노력하고 애쓰는 층만 있고 하나님의 약속이 침투가 안 되었어요. 불신자에게는 약속의 층이 없어요. ‘내가 열심히 기도했더니 대학에 들어갔다.’ 이런 것은 뭡니까? 내가 가능으로 예상했던 결과가 대학 들어갔다는 겁니다.

그래놓고는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들어갔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들어갔다. 역시 내가 새벽기도 열심히 했더니 이렇게 복을 주셨어. 기도한 덕분에 내 자식이 잘되었어.’ 이러거든요. 전부 다 이것은 어쨌든지 ‘내 생존은 내가 챙긴다는 것, 하나님이고 뭐고 간에 내가 빌 때 나에게 잘해 준다는 것, 내가 뭔가 한 게 있을 때 반대급부로 뭐가 받게 된다는 것’, 전부 다 관심이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는 이것이 생존 층입니다.

여기에 모든 종교행위가 집중됩니다.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가 ‘나는 할 수 있다’는 그 가능성을 테스트 하고 그것을 토해놓게 하는데 총 집중을 다 합니다. ‘하나님이 성경 세장 읽다가 다섯 장으로 늘려 가면 복 주시겠지. 기도 5분 하다가 30분으로 연장시키면 그만큼 보너스를 주시겠지. 내 종교노동의 성과에 대해서 제대로 보답해 주셔야 정의로운 하나님이고 하나님 값을 하는 하나님이지 않겠는가?’ 이런 식으로 하나님에게 자기가 한수 가르치겠다는 식입니다.

이것은 가능성입니다. 누가 이렇게 가능성을 가르치냐 하면 보이지 않는 마귀가 그렇게 합니다. ‘구원은 네 손에 달려 있다. 구원은 네가 알아서 한다. 네가 하는 여하에 따라서 구원되고 안 되고가 결정 된다. 네 구원은 네 손에 달려 있다.’ 이것은 악마가 가르치는 겁니다.

제가 이런 소리를 하면, ‘목사님, 방금 그 말이 맞잖아요.’ 그 사람은 아직까지 약속의 층을 들어본 적도 없고 약속의 층을 받아 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이 생존의 층 안에서 보니까 그것이 맞는 것 같고 그런 신이 참된 신 같지요. ‘주고받고 주고받고 복 챙기고’, 그런 것이 진짜 하나님을 믿는 것처럼 여겨진다는 말이죠.

이것이 약속을 받아 본 적이 없는 인간의 한계입니다. 선지자는 그게 아니고 누가 달라고도 안했고 천당 갈 생각도 안하고 복받을 생각도 안하고 그냥 내 몸뚱아리밖에 모르는 그 인간에게 하나님 아버지하고 예수님하고 의논한대로 이 선물이 내려오게 되면 이 안에서 벌어지는 현상이란 ‘주님이여, 내가 천당 가려고 하지도 않았는데 왜 내게 왜 천당을 주십니까?’ 이렇게 됩니다.

‘내가 구원받으려고 하지도 않았는데 왜 덜렁 나를 천당 보내십니까?’ 이렇게 되어 버려요. 생존 층에 있는 사람들은 ‘주여, 내가 구원받으려고 20년, 30년째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기도의 응답으로 구원받았군요.’ 이런 고백을 하고 있고 약속의 층을 받은 사람은 ‘주여, 구원받으려고 신경도 안 쓰는데 왜 주십니까?’ 이렇게 나옵니다.

지나가는 사람이 하는 말이,

“아저씨, 아저씨는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몰라. 그냥 주대. 그냥 줘.”
“아, 난 기도 열심히 했는데….”
“기도고 뭐고 그냥 주더라.”

선지자의 특징은 하고 싶어서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아저씨, 왜 선지자 합니까?”
“그냥 하라고 해서 했어.”
“전생에 부모님이 기도를 많이 하셨구만.”
“아니야, 그런 것은 없어. 그냥 내려앉았어.”

그냥 내려앉은 거예요. 벼락 맞은 사람한테 물어보세요. 벼락을 어떻게 맞았는지 물어 보세요. 그냥 맞았지요. 벼락 맞듯이 구원됩니다. 벼락은 그냥 맞는 겁니다. 구원은 그냥 받는 겁니다. 약속의 층을 나중에 알고 보니까 나에게 구원이 온 것이 아버지께서 아들과 창세전에 의논한대로 그 결과를 나에게 통보한 거예요.

창세전에 구원받았다고 통보 한 거예요. 그래서 ‘아버지께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고 내어주었으니 도대체 어느 인간이 나보고 아직도 죄가 있다. 너는 그래서 구원 안 된다. 지옥 갈 것이다. 누가 그 따위 소리를 하느냐’ 말이죠.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 아들을 버리기까지 너에게 사랑의 선물을 주었는데 누가 감히 사랑받은 사람을 향하여 너는 죄가 적으니 많으니, 나쁜 짓을 했으니 지옥을 간다느니, 누가 그렇게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모독하느냐’라고 로마서 8장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끝을 압니다. 끝에 뭐만 남는가?

우리가 얼마나 애썼는가를 보는 것이 아니고 아직도 네 안에 하나님의 선물인 사랑이 들어 있느냐, 그것을 보시고 우리가 잘나고 못난 것과 상관없습니다. 제가 만약에 주님의 사랑이 들어 있다면 작년에 무슨 짓을 했고 앞으로 무슨 짓을 할 거냐와 관계없이 주님께서는 내 몸을 보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뭐 있나, 그것을 보는 거예요.

주님 주신 십자가 사랑이 여기 있잖아요. 그것으로 구원받는 겁니다. 왜? 나라는 생존의 층에 주님의 사랑이라는 약속의 층이 침투해서 이것이 흡사 바이러스나 암처럼 온몸에 퍼져 있는 거예요. 그것을 보고 우리를 구원하는 겁니다. 이것이 복음이고 기쁜 소식입니다. 어떤 분들은 복음이 뭐냐 하는 것을 잘 모르는 분들이 계신데 복음은 이렇게 아시면 정답입니다.

복음이라는 것은 나의 의가 아니고 하나님의 의입니다(롬 1:17). 그런데 하나님의 의는 누가 제조합니까? 우리는 죄인중의 괴수라서 의를 못 만들어요. 우리는 다만 의의 종일뿐이지 의를 만들 수는 없어요. 하나님 의는 하나님 아버지하고 예수님 둘 사이에 담판, 이것이 얼마나 좋은 말인지, 두 분 사이에 담판 지으신 내용입니다.

십자가 질 때 제자들 다 도망갔습니다. 베드로부터 시작해서 요한, 야고보, 그 잘나가던 임원진들 다 나가버렸습니다. 예수님 부활하셨을 때, 몇몇 찾아온 여자분들 있었는데 그들도 부활을 믿어서 온 것이 아니고 시체나 어떻게 보자는 식으로 왔습니다. 그렇게 왔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시체를 보러 왔는데 웬 아저씨가 앉아 있었어요.

“아줌마, 여기 왜 오셨어요?”
“혹시 여기 예수님 시체 못 보셨어요?”
“내가 예수다.”

기절초풍해서 미친 듯이 달려 베드로를 찾아가서,

“심봤다!”고 하니까
“아줌마, 진정하시고 뭘 봤는데요?”
“예수님 부활했습니다.”
“이 아줌마 완전히 맛이 갔구만.”

그들은 예수님 부활했는데도 아직까지 생존 층으로만 모든 것을 보고 있는 거예요. ‘어이, 제자들아, 야고보야, 우리 앞으로 우예 살꼬’라는 생존 층입니다. 평소에 예수님을 믿은 것도 예수님을 알아서 믿은 것이 아니고 무엇에 근거해서 무엇에 유리하려고? 자기 생존에 유리하라고. 그런데 아까 다니엘서 이야기를 하면서 생존층이 그것이 생명입니까, 아닙니까?

그것이 무엇 속에 있다? 불속에 있으니 그것이 죽음이죠. 불속에 있는 죽은 자를 네 번째 사나이, 신의 아들과 합류하게 되면 그 사람은 죽은 자가 아니고 뭐가 됩니까? 산자가 되는 것처럼 그 원칙을 하나님 아버지하고 담판 지어서 십자가에서 다 이룬 그것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오게 되면 그것이 우리 안에 ‘하나님 의’입니다.

‘하나님 의’,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사랑’, 다른 말로 하면 ‘성령’이라고 됩니다.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 의’를 주게 되면 ‘목사가 되어서 설교를 얼마나 잘했나’를 안 묻고, ‘전도 얼마나 했는지’도 안 묻고 ‘헌금 얼마나 했는지’도 안 묻고 오직 묻는 것은 제일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선물한 것, ‘내가 준 것을 잘 가지고 있나, 그것 한번 보자. 뭘? 하나님 의’라고 하는데 이것을 가지고 두자로 복음, 기쁜 소식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박국선지자가 하는 말이 ‘무화가 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열리지 않고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더라도’ 나는 무엇으로 기뻐한다? ‘나는 여호와의 구원을 기뻐한다’고 되어 있죠. 무화과나무에 무화과열매가 맺히는 것은 생계문제 아닙니까? 외양간에 소 있는 것 생계문제이거든요. 포도나무열매는 생계문제죠.

그 생계의 층을 보지 않고 뭘 본다? ‘내 안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약속의 층을 나는 기뻐한다.’ 그렇다면 왜 자꾸 일반 종교에서 종교적인 행세를 강요하느냐? 교회가 되어야 목사의 생계가 노후까지 보장됩니다. 하도 들어서 이제는 이런 이야기도 식상할 정도죠. 교회라는 것이 옛날 절의 연속성이죠.

옛날 우리조상들이 절에 갔는데 그 절에 가던 습관을 교회 가는 습관으로 이전했다고 보면 됩니다. 이 안에는 경쟁체제가 있어요. 열심히 충성해서 복 받은 사례들이 가득 차 있어서 경쟁을 시키죠. 경쟁을 시키게 되면 여기서는 1등급, 2등급, 이런 식의 서열이 생깁니다. 그야말로 세리와 창기는 천당 못 간다는 식으로 서열을 매겨버립니다.

그래서 교회가 약속의 층이 아니고 생존의 층, 여전히 ‘어떻게 하면 먹고 사느냐’하는 그런 걱정이 잔뜩 모였다가 예배마치고 나면 와르르 쏟아지는 겁니다. 오늘 우리교회 수련회참석 못하시는 분들이 다 무엇 때문에 못하시는 겁니까? 하나님의 약속 때문입니까? 생존의 층으로 인해서 못 오시고 또 여기 참석했더라도 빨리 가고 싶은 것은 생존의 층 때문에 그렇습니다.

생존의 층에 얽매이기 때문입니다. 문제 나갑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교회 다닌 지 몇 년쯤 지나면 생존의 층을 포기하겠습니까? 1) 2년. 2) 3년. 3) 4년. 4) 영원히 안 된다. 몇 번입니까? 영원히 안 됩니다. 영원히 우리는 자기의 생계문제에서 못 벗어납니다. 그래서 복음은 복음이다. 그래서 한번 복음은 영원한 복음인 거예요.

죽을 때도 영원한 복음입니다. 죽을 때도 우리는 뭐만 믿습니까? 복음만 믿습니다. 왜? 교회 십년 이상 다녀도, 목사가 되어도 자기 생계걱정에서 해방될 수 없기 때문에. 돈 좀 되는 교회 오면 ‘내 영혼아 걱정하지 마라’ 하면서 희희낙락하고 돈 좀 안 되는 교회 가면 기 팍 죽어서 화나 내고 있고요. 목사도 그런데 다른 교인들 말할 것 뭐 있습니까?

여기 혹시 미장원 하시는 분계십니까? 우리 미장원에 다니는 손님이 다른 미장원, 특히 길 건너편 미장원에 가보세요. 환장합니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 자기이익을 포기하는 인간 들어본 적도 본 바도 없습니다. 인간은 교회 백년 다녀도 목사가 되어도 자기 이익을 남에게 빼앗기는 것을 기분 좋아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자기는 오직 자기만을 위하여.’ 그래서 이런 인간이 마음을 돌려서 주님을 믿고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성입니다.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 불가능한 것이 가능할 때는 하나님의 약속의 층이 그 사람에게 침투할 때만, 그야말로 자기 이익밖에 모르고 돈밖에 모르는 나 같은 인간이 구원되었다는 것은 나한테서 온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이 의논한 그 결과라는 것을 아는 그런 순간만 복음이 주는 기쁨이 생겨요.

그게 과연 몇 초나 갈지, 어떤 사람은 수초 가고 어떤 사람은 좀 더 오래 가는 사람도 있는데 오래가면 뭐합니까? 도로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라는 것은 무엇을 믿느냐 하면 한번 주께서 사랑한 사람은 끝까지 버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어요. 주께서 한번 사랑한 사람의 완벽함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도 닦는 데가 아닙니다. 참 중요한 말입니다. 교회는 도 닦는 데가 아닙니다. 교회는 완벽한 하나님의 복음 앞에서 그동안 내가 세상 살면서 얼마나 시커멓게 되었는지 ×-ray 사진 찍는 곳, 종합 검진하는 곳입니다. 주일에 교회 오면 성경을 펴서 내 가슴팍에 대 보는 겁니다. ‘다니엘 3장아, 내 가슴팍에 대보자. 아, 나는 우상을 섬겼구나.’ 이렇게 되는 겁니다.

성경 어디든지 아무데나 펼쳐서 가슴에 대보세요. 요한복음 20장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도 대보는 겁니다. 성경의 어느 구절도 우리는 내가 나의 이익을 얻는 나의 생존의 층을 한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간다는 것을 지적받는 그 행복, 그 즐거움, 그것은 이미 약속의 층, 하나님의 사랑의 층이 임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혜택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약속의 층을 안 받은 사람 같으면 이 성경 덮어버립니다. ‘내가 종교인 될 일이 있나? 나는 종교 없이도 살 수 있다.’ 이렇게 됩니다. ‘하나님의 계시? 끝을 보여준다고? 선지자가 계시를 독점했다고? 선지자와 내가 무슨 볼일이 있나.’ 치워 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 사랑이 임한 사람들은 이 약속을 무시하지 않고 약속만 완전하며 나는 부족하다는 것을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 번 확인하면서 ‘주여, 나같이 개 같은 인간도 구원이 이미 되었다는 것이 놀라워라!’ 그렇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지갑을 잃어 본적이 있을 겁니다. 지갑을 잃어버리면 참 속상합니다.

그런데 그 지갑을 다시 찾을 때 잃을 때의 그 속상함이 곱빼기의 기쁨으로 옵니다. 그래서 성도에게는 무엇이 휘휘 감겨야 되느냐 하면 ‘나 같은 인간은 잃어진 인간인데 나의 애씀이 아니고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 두 분 간의 담판지은 그 은혜, 그 복음, 하나님의 의로 말미암아 내가 도로 찾아졌다’는 그 기쁨이 유지되면 유지 될수록 여러분들은 마음의 여유를 찾을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놓치면 다시 남들처럼 돈 한 푼 더 벌려고 그렇게 독하게 악바리가 되어서 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요. 돈이 문제가 아니고 남에게 졌다는 그것이 자존심이 더 상하니까 남에게 안 지려고 독하게 살려고 애를 쓰지요. 남에게 자기의 노동의 능력을 과시하려 들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시시때때로 불어오는 바람처럼 성령께서 말씀으로 우리에게 찾아들면 ‘주여, 개떡 같은 인간도 아닌 나를 위해서 십자가 피를 흘렸다니…’라고 잃었다가 얻었다는 그 기쁨을 또 다시 회복시켜 줍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 어떤 현상이 벌어지느냐 하면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이 보고 싶어져요. 여러분들이 옛날 연애했던 시절을 생각해 보세요.

‘그 연애상대자가 참 보고 싶다’ 할 때 만나기 두 시간 전부터 가슴이 벌렁벌렁 뛰지요. 내가 보고 싶은 사람을 보게 된다는 그 기대감 때문에. 그럴 때 누가 와서 흙탕물을 튀겼다. 사랑하는 연인이 보고 싶어서 가슴이 뛸 때는 누가 와서 흙탕물을 튀긴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툭툭 털어버리고 가던 길 가게 되죠.

안 그렇습니까? 누군가가 너무 너무 보고 싶을 때에는 정신이 팔려서 옆에서 누가 별 소리를 해도 별것 아니게 느껴집니다.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나니.’(요일 4:18) 왜? 보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뭐가 두려워요.

사람이 자기가 자기를 지키려 하니까 모든 것이 매사가 두렵지만 내가 나를 구원해주신 분을 보고 싶어 할 때는 어떤 것도 다 시시한 일이고 심각하지 않은 일이 되고 별로 안 중요 합니다. 가족 누가 아파도 별로 안중요합니다. 이렇게 나가면 가족의 화평을 깰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별로 안중요해요.

젊은 애들을 보면 축구국가대표팀이 경기에서 지게 되면 몸살을 앓아요. 한골 들어갔는데 후반에 한골 먹어서 비겼잖아요. 그때 막 속이 상하고 기분 더럽다고 모여서 술 먹고 그런다고요. 그게 뭐냐 하면 그런 축구게임, 공을 쫓아다니면서 골 넣는 아무것도 아닌 게임에 울고 웃는 것처럼 인생을 살아가면서 그 중간 중간에 나타나는 것들은 끝이 아닙니다.

선지자는 끝을 알기 때문에 선지자는 심지어 자기 목숨이 달아나도 그것은 시시한 일입니다. 스데반 집사가 돌이 막 날아와도 그것은 시시한 일입니다. 왜? 끝을 알거든요. 끝은 무엇으로 구원받는다? 나의 의가 아니고 하나님의 의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십자가피로 구원받기 때문에, 이미 인생의 정답을 알았기 때문에 세상의 어지간한 사태가 나도 경기 나거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나니 사랑은 모든 두려움을 내어쫒느니라.’(요일 4:18) ‘두려움, 저리가! 시시한 것들이 시비를 걸고 있네. 나는 지금 주님 보고 싶은데 왜 시시한 것들이 나에게 신경 거슬리게 만들어.’ 이렇게 됩니다.

선지자의 특징은 뭐냐? ‘자유’입니다. ‘자유’인데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세상이 감당치 못한자’라고 합니다. 이미 끝을 알고 어떻게 구원되는 것을 알기 때문에 세상이 감당치를 못해요. 선지자가 고생을 덜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어떤 선지자는 톱에 켜져 죽었고 어떤 선지자는 돌에 맞았습니다. 그런데 그게 별로 안중요해요.

그게 별로 안중요한 일이라고요. 다니엘의 세 친구가 불속에 들어갔습니다. 아마 친척들은 기절했을 거예요. 하지만 다니엘의 세 친구는 별로 안중요해요. 왜냐하면 네 번째 신의 아들과 함께 있다는 것은 그것이 바로 생명을 의미하기 때문에 안중요해요. 약속의 층은 생명의 층입니다. 밑에는 뭡니까? 죽음입니다.

여기서 약국을 하든지 병원 개업을 하든지 군복무를 하든지 목사로 봉사를 하든지 이것은 아무 의미 없어요. 약속의 층이 침투한 사람만 구원되고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은 종교 활동 하다가 지옥 가는 겁니다. 교회 실컷 다니고 지옥 가는 겁니다. 이 사람이 내놓는 것은 뭐냐? 자기의 종교노동에 대한 대가밖에 내놓는 것이 없어요.

‘내가 이렇게 열심히 했더니 구원받았다.’ 이것밖에 안내놓아요. 물론 교회에서 칭찬은 받지요.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게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람은 사랑받기 원하고 정으로 살잖아요. 주위 사람이 사랑과 정으로 인정해 준다는 것, 그런데 그게 자기 노닥거리는 것이지 그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그러면 목사 당신 말대로 하면 성도가 어떻게 살라는 말입니까? 무슨 성도의 삶에 대한 대안이 있어야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소. 어떻게 살꼬?’ 주님을 사랑하는 자유로 사시면 됩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어떻게 사는 것이 자유로 사는 것인가?’

고린도전서 10장에 나오죠. ‘먹든지 마시든지 죽든지 살든지 오줌을 누든지 목욕을 하든지 놀든지 주무시든지…’ 누구에게 영광을?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면 된다’는 겁니다. 최종적인 결론이 뭐냐? 주님께 감사한다는 것은 ‘내 공로는 있다, 없다?’ 없다고 여길 때만 감사합니다. 누군가에게 감사한다는 것은 자기 공과를 생각하지 않을 때입니다.

자기는 죄밖에 지은 것이 없을 때 그때 감사가 나오죠. 주님께 영광 돌릴 때 감사하죠. 먹든지 마시든지 뭘 하든지 간에 주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어떤 집사님이 술을 세병 잡숫다가 그걸 두병으로 줄이면서 얼마나 감사한지 ‘주여, 이것은 불가능한 것인데 주의 은혜입니다.’ 그러면 영광 되는 거예요.

그런데 아예 술을 처음부터 안 먹은 사람이 ‘주여, 저 세리는 술을 한 병 먹었지만 저는 처음부터 한 병도 안 먹었습니다’하면 그 인간은 지옥 가는 겁니다. 왜? 감사할 것이 없기 때문에. 전부 다 자기 애씀이고 자기 노동이기 때문에. 그것은 종교이고 교회에서 노는 종교 활동가지 그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신자는 전혀 아닙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부터 나오죠. ‘범사에 감사하라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주님과 대화하라). 그것이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뜻이니라.’ 오늘 첫시간 강의를 정리하면서 마치고자 합니다.

어른이 되면 기억력이 다 떨어집니다. 정리 해줘도 잊는데 정리를 안 해주면 더 잊어버리죠. 오늘 강의의 흐름은 이렇게 됩니다. 선지자는 모든 하나님의 뜻을 독점했습니다. 그 독점한 내용을 뜯어보니까 선지자는 세상 끝자락에 서서, 다른 사람들은 그것도 모르고 인생이 전부인줄 알고 헤헤 거릴 때, 선지자는 끝을 알고 ‘인간아 끝을 아느냐’ 합니다.

끝의 내용은 이 세상의 층이 두층이 있었어요. 사람이 애쓰는 층이 한 층이 있고, 이것은 죽을 때까지 사람이 자기 힘으로 포기 못합니다. 믿을 놈은 나밖에 없어요. 이것은 교회 10년 나오고 20년 나오고 해도 소용없어요. ‘죽을 때까지 믿을 것은 나밖에 없다’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난데없이 뭐가 침투했어요. ‘인간아. 사는 것은 네 힘으로 되는지 어쩐지 모르겠지만 구원받는 것은 내 덕이다. 너 산다고 죄 얼마나 지었나? 너는 의가 없어. 하지만 구원받는 것은 너 좋아라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네 안에 삽입된 하나님의 의 때문이다.’

그런데 그 의는 어디서 생겼습니까? 바로 하나님하고 아들 예수님하고 담판을 지었어요. ‘주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해놓고 ‘주여, 모든 것을 다 이루었나이다.’ 하나님께서 자기아들을 죄인인 우리 대신 죽게 함으로 말미암아 죄 문제, 영생과 구원의 문제에 대해서 더 이상 우리와 의논하지 않고 우리 속에 박혀 있는 아들의 피를 보고, 용서하시는 아들의 사랑을 보고 우리를 거저 구원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아버지와 아들 예수님 두 분간의 담판 지었던 예수님의 그 의가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면 이 사람이 무엇을 느끼느냐 하면 ‘어? 내가 아무것도 애쓰지도 않았는데 이것이 내 맘에 들어와 버렸네. 내가 아무것도 안했는데 들어와 버렸네. 이게 뭐지?’ 해서 뜯어보니까 ‘나는 이미 너를 위해서 대신 죽었다’는 십자가의 의미, 십자가의 구원의 능력, 십자가의 지혜가 들어왔어요.

그 때부터 그 사람은 뭘 자랑하느냐 하면 자기 애씀이라는 것은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고 정말 구원받고자 할 때는 오직 십자가외에는 구원될 길이 없음을 고백합니다. 아주 희한한 사람입니다.

“당신 열심히 교회 봉사했잖아요.”
“아닙니다. 봉사고 전도고 구제고 뭐고 오직 구원받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달리신 그 능력이 임해서 내가 구원받았소.”

이런 희한한,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서는 나올 수 없는, 인간이라 하는 것은 자기자랑하기 마련인데 자기자랑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공로를 자랑하는 아주 희한한 고백이 튀어 나올 때, 그 사람이 바로 주님과 함께 있는 다니엘의 세친구와도 같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우리 사는 것이 뻔합니다. 너 나 할 것 없이 이 땅에서 자식 낳고 살면서 어찌되었든 밥이나 먹고 잠이나 편히 잘 자기 위해서 돈이나 벌고 살아남기 위해서 24시간 충성을 다 바쳤습니다. 나밖에 모르는 이런 죄인이게 아무 행한 것도 없이 예수님께서 다 행하셔서 내가 다 행했다는 그 소식과 더불어서 영생을 선물로 주시니 너무나 감사합니다. 잃어버린 자가 예수님 덕분으로 얻었사오니 이제부터 남은 생애를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과 공로만 자랑하는 성도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우리교회(IP:220.♡.176.150)

08-08-20 19:14

2008우리교회 여름수련회 2강

2008-08-14 13:10:26 녹취 : 오용익

(2008년 우리교회 여름수련회, 강의 : 이 근호 목사)

제 2강, 호세아

이번시간에는 호세아를 강의하겠습니다. 지난시간에 잠깐 선지자에 대해서 언급을 했는데 선지자와 보통사람들의 차이가 뭐냐? 선지자는 하나님의 계시를 독점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자기가 받은 계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계시이기 때문에 선지자의 신의 개념과 인간들의 속에서 나오는 계시, 신적계시, 신에 대한 인상, ‘신은 아마 그럴 거야’라는 모든 인간이면 다 가지고 있는 신의 개념이 달라요.

이쪽(선지자) 신의 개념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반면에 인간에게서 나오는 신의 개념은 반드시 주고받는 것이 있어요. 여기에는 인간의 행함이 있어요. 인간의 행함으로서 뭔가 신에게 흥정을 하려는 거죠. 시장에서 흥정할 때 어떻게 합니까?

“콩나물 좀 더 주소.”
“그만 됐습니다.”
“좀 더 주소.”
“에이 모르겠다. 더 드립니다.”

보통 인간들이 생각하는 신의 개념은 여기에 인간의 행함이 들어 있어요. 그런데 그 행함의 주체자가 바로 ‘나’잖아요. 나에게서 신에게로 가는 어떤 선물, 어떤 정성, 신에게 가져다 바치는 나의 착함, 이런 것들 가지고 나의 행함이라는 이름으로 신과 거래를 시도합니다. ‘이만하면 정성 바칠 만큼 바쳤는데 어지간하면 복 주시지요.’

이렇게 내가 생각한 행함을 가지고 신과 거래에 나서는 것이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행함이라면 선지자가 알고 있는 신의 개념은 모든 것이 ‘주로부터 와서 주로 말미암아 주로 돌아간다’, 모든 것이 거저 주시는 거예요. 거저주심. 그러면 이 보통사람 가운데 누가 있느냐? 성도가 있지요.

성도는 보통 사람하고 또 달라야 되지요. 보통 사람은 자기 행함을 가지고 자기가 알고 있는 신의 개념과 흥정, 거래, ‘이만하면 정성이니까 한번 봐 달라’는 식으로 나서지만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고 선지자 쪽을 따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거저주심만 여기에 남아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제가 어제 밤 시간에 이야기 했지만 성도라 할지라도 자기 의로움, 자기 행함을 포기 못하죠. 왜? 보통사람이나 성도나 다를 것이 없잖아요. 유전자, 성격, 환경과 사회구조가 똑같으니 성도라 할지라도 안 믿는 사람하고 다를 것이 없이 똑같아요.

똑같은데 성도도 자기 행함을 포기 못하는데 보통 사람들이 자기 행함을 주장하는 반면에 구원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거저주심만 성도 안에 남아 있어야 되지요. 따라서 진짜 하나님의 은혜가 오면 하나님의 거저주심이 거저주심만 오는 것이 아니고 여기에 무슨 일이 벌어지느냐 하면, 빼앗김 현상이 일어납니다.

뭔가 빼앗기는 것, 몽땅 다 빼앗기는 현상이 일어나야 돼요. 성도가 보통사람으로서 가지고 있는 것을 빼앗깁니다. 자기의, 다른 말로 하면 자존심, 자기 잘남, 자기 우수함, 이기성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은혜가 오면 다 빼앗깁니다. 어제도 이야기 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누가 나오지요? 탕자가 나옵니다.

탕자가 구원받았습니까, 못 받았습니까? 탕자가 구원받았지요? 구원받을 때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작기가 갖고 있던 자기자존심이나 자기의를 다 빼앗긴 채 아버지가 주시는 거저주심이 이 탕자 속에 들어오니까 구원받은 거예요. 이 탕자가 가지고 있는 가락지는 누구 것입니까? 아버지 거죠.

탕자의 이 옷은 누구 것입니까? 아버지의 것입니다. 탕자가 먹었던 소고기국밥, 그것은 누구의 것입니까? 아버지의 것입니다. 자기 행한 것은 세상에 나가서 다 날렸잖아요. 아버지 주신 재산을 다 날렸다는 이유 때문에 탕자가 구원 못 받았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날려야 돼요. 이것이 중요한 겁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날려버려야 돼요.

어제 두 가지 층을 이야기 했습니다. 위에 있는 층은 약속의 층입니다. 이 약속의 층은 누구와 누구와 의논한 겁니까?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하고 의논해서 약속의 층이 다 이루어졌어요. 밑에는 무슨 층이라 했습니까? 생존의 층. 이것은 우리가 평생 못빠져 나갑니다. 목회 30년 하고, 50년 했다고 해도 ‘살고 싶어라’하는 이것을 어떤 인간이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그냥 살기만 합니까? ‘이왕이면 잘살고 싶어라.’ 그것으로 끝입니까? ‘이왕이면 남을 지배하고 싶어라.’ 이것은 인간이 말릴 수가 없어요. 처음에 배고플 때는 ‘배부르고 싶어라’ 하지요. 그런데 배부르면 그 다음엔 뭡니까? ‘나도 뜨고 싶어라.’ 그것으로 그냥 끝나는게 아닙니다. 좀 뜨게 되면 ‘남을 삼키고 싶다. 남을 지배하고 싶다. 모든 것을 다 갖고 싶다.’

마귀가 예수님한테 그러잖아요. ‘모든 것을 너한테 다 줄게. 나를 섬겨라.’ 이것이 인간의 본성이고 생존 층이죠. 여기에 약속이 생존 층에 침투하는데 오늘 본문에는 다니엘이 아니고 호세아입니다. 호세아가 약속의 층을 가지고 우리 생존 층에 침투할 때 어떻게 침투하는가? 호세아 6장 1절입니다.

호세아 6: 1- 2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니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이 그림이 무슨 그림입니까? 자아, 나지요? 하나님의 약속의 층이 우리 속에 들어오면 그 나, 살고 싶고 뜨고 싶고 유명해지고 싶고 남 지배하고 싶은 이것을 사정없이 찢어버립니다. 이거 며칠 만에 찢으신다고 했습니까? 이틀 만에 찢으시고 다시 살리는데 삼일이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은 뒤에 며칠 만에 부활했습니까? 삼일 만에.

그러면 예수님이 죽었다는 말은 예수님이 혼자 죽은 것이 아니고 호세아 6장 1, 2절을 완성하기 위해서 누군가를 껴않고 죽은 거예요. 하나님이 구원코자 하는 자기사람과 함께 죽었습니다. 그것을 십자가의 대신죽음이라고 하는데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죽었다는 말은 사실은 우리가 찢어져야 된다는 뜻입니다.

제가 아까 박박 찢은 것이 여기 이 것입니다. 아까 제가 여기에 자아 그림을 그리고 이것을 찢었어요. 이거 이틀 만에 작살났어요. 이거 죽고 저주받았지요?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한 이 말은 누가 해야 될 말을 대신 한 겁니까? 우리가 해야 할 말을 대신 한 거예요.

‘아버지, 나처럼 교회 잘 다니고 나처럼 기도 잘하고 나처럼 설교 잘하는데 왜 저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말을 예수님이 나 대신 내뱉은 거예요. 이거 이틀 만에 찢었습니다. 그리고 삼일 만에 다 붙입니다. 그 붙인 그림을 보여드릴게요. 이 그림입니다. 다시 결합이 되었는데 그냥 말짱한 것이 아니고 사이사이에 꿰맨 흔적이 있지요.

이렇게 찢어진 사람이 예수님의 부활에 의해서 다시 새 생명을 얻었으면 ‘나는 말짱하다’가 아니라 ‘나는 찢어져도 마땅합니다’라는 흔적을 죽을 때까지 계속 가져가야 돼요. 아, 이게 안돼요. 사람들이 ‘나는 복음에 대해서 안다. 십자가에 대해서 안다’고 하면서도 이렇게 찢어진 자기 모습을 보는 것이 아니고 ‘나 예수 믿었다. 뭐? 나는 의인이다.’ 이렇게 만 날 자기 자랑을 해요.

찢어져야 할 행세를 또 하고 있다는 말이죠. 찢어진 흔적이 새사람한테는 반드시 담겨 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사도바울은 ‘내 안에 십자가 흔적이 있다’고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나는 죄인중의 괴수입니다.’ ‘내가 죄인중의 괴수라’는 말은 한 것은 지금 죄 용서를 못 받아서가 아니라 이미 완전하게 죄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당당하게 이야기 하는 겁니다.

‘나는 죄인중의 괴수다.’ 이미 구원받았기에.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것을 믿으시니까 지금부터 호세아를 시작하겠습니다. 호세아의 주제를 글로 써보겠습니다. 호세아는 1번, 2번 중에서 1번은 아니고 2번입니다. 1번,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될까? 이것 이다, 아니다? 이것 아닙니다. 호세아, 아모스, 모든 성경 이것 아닙니다.

2번입니다. ‘내가 어떻게 해서 구원되었나?’ 이것이 ○표입니다. 이 차이점을 아시겠습니까? 내가 어떻게 해서 구원될까? 이것은 불가능합니다. 인간은 자기 힘으로 구원 안 됩니다. 그런데 호세아는 ‘구원이 안 되는 내가 어떻게 해서 구원이 되었나?’ 이것이 호세아입니다. 그러면 정답은 어떻게 되는가? 그 정답은?

나는 평생토록 어디에 매여 삽니까? 생존 층입니다. 사람이 몸이 아파보세요. 몸이 아프면 만사가 귀찮고 오직 생각하는 것이 ‘주여, 저를 낫게 해주시면 주께 영광돌리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뒷전이고 사실은 낫고 싶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꼭 하나님의 영광을 들먹일 때 ‘나를 낫게 하시면, 나의 건강을 회복시켜 주시면’ 이런 식으로 만날 자기 자신에 대해서 미련을 못 버리고 있습니다.

생존 층에 무엇이 밀려옵니까? 약속 층이 밀려오면, 침투하게 되면 ‘나는 어떻게 하면 구원될까’가 아니라 ‘나는 어떻게 하면 구원되었습니까?’ 라고 약속 층에 대한 관심사가 높아지게 됩니다. 제가 자꾸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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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580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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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