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6장 1- 6절 제목 :예수님과 선지자
막 6: 1- 6 (예수님과 선지자)
이름 : 우리교회(IP:220.81.176.150)
본문 : 마가복음 6장 1- 6절
제목 : 예수님과 선지자
듣기 :
, 보기 :
이근호
08-08-03 13:32
예수님과 선지자
2008년 8월 3일 본문 말씀: 마가복음 6:1-6
(막 6:1)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좇으니라』
(막 6:2)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가로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뇨 이 사람의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뇨』
(막 6:3)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막 6:4)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며』
(막 6:5)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인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막 6:6)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선지자가 메시야가 인간 속에서 개입해서 활동하는 것을 사람들은 반기지 않습니다. 그저 잘나나 못나나 우리 인간들끼리 사는 것을 원하고 있습니다. 이 점은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서로 친하게 지내서 운영되는 그런 교회이기를 원합니다. 만약에 어느 교회에 예수님이 개입하셔서 설교 하신다든지 하면 사람들은 그 교회에 남아 있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서 오게 하시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로 올 수 없느니라”(요 6:65) 라는 식으로 일관하기에 평소에 자신의 행함에 자부심을 갖고 있는 자들로부터 분개만 더 돋게 할 뿐입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이나 예수님이 보내신 선지자는 그 교회에서 사람들로부터 배척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쉽게 말해서 예수님이나 선지자가 관여한 교회는 ‘인간의 불가능성’을 선포하는 교회입니다. 이것은 곧 아무도 그 교회에 대해서는 자력으로 출석할 수가 없다는 말이 됩니다. 이런 교회가 유지될 리가 없습니다. 사람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합니다. 오로지 사람들의 가능성을 널리 강조하는 교회만이 사람들로부터 환영받습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예수 없는 교회를 원할까요? 그것은 평소에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생존해왔던 생각들이 있습니다. 생각이 쌓여서 습관이 되고 습관이 뭉쳐져서 나름대로의 법이 됩니다. 쉽게 말해서 ‘제발 살아온 식대로 살도록 인정해달라’는 겁니다. 하지만 정작 메시야와 선지자가 이 세상에 나타났을 때, 사람들은 그 분들을 배척할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가족과 친지들이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그 이유를 이러합니다. 예수님의 가족과 친지들은 자신들의 ‘자리’가 따로 정해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 누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나서면 그들은 자신의 하나님의 상과 부합되느냐 여부에 따라 그 친지를 좋게 보거나 혹은 나쁘게 보거나 할 것입니다. 그런데 평소에 그들 친지들이 생각한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달리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되면 그들로부터 배척받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한 집안에 목사가 배출되는 것은 그 가문의 영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목사라는 것은 사회에서 인정받고 대우받는 높은 인격을 지난 목사상에 기준에서 볼 때의 일입니다. 만약 그 목사가 복음을 알게 되면 그 때부터 그 가족과 친지를 그 목사를 미워하게 됩니다. 같은 집안이라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깁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예수님이나 선지자가 제시하는 다른 ‘자리’가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5:12-13에 보면, 귀신은 자신이 거할 자리를 달라고 예수님과 흥정하고 있는 대목이 나옵니다. 여기서 우리는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왜 영물인 귀신이 꼭 자리가 필요한지를 말입니다.
그것은 피조물이란 누구나 자신이 자리를 장만하거나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지정된 자리가 따로 있고 그 지정된 자리에 맞추어서 자신이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께서 미리 만들어놓은 자리들이 따로 있습니다. 귀신은 귀신에 맞는 자리, 성도는 성도에 맞는 자리가 따로 있습니다. 바로 이 자리 마련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백화점의 쇼 윈도에는 마네킹들이 새 옷으로 갈아입고 고객들을 눈길을 받습니다. 이처럼 마네킹은 그것들이 보여줄 자리가 이미 지정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제시한 바람직한 인간의 모델, 성공적인 인간의 모델은 바로 선지자와 예수님에 의해서 보여주게 됩니다. 선지자들과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으로 고마워하고 충성했습니다. 설사 자신의 모든 것을 잃고 목숨까지 잃어도 상관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제시한 자리요, 모델이요 마네킹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자리를 좋아하지 않고 미워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자리는 자기가 마음에 맞게 만들어 보겠다는 겁니다. 인생을 살면서 무수한 노고와 고생을 하면서도 쏟아 부을 모델과 자리는 자신이 만들어 보겠다는 겁니다. 바로 이런 자리의 차이로 인하여 선지자와 예수님은 가까운 식구들부터도 배척당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제공하는 모델은 무엇입니까? 출애굽기 4:22-23에 보면, “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놓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벌리시는 일은 오로지 ‘자기 아들 만들기’입니다. 만약에 그 누구라도 ‘아들 만들기’에 방해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공격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은 기존에 인간들이 하나님을 찾는 취지와 딴판입니다. 기존의 인간들은 ‘자기 자리’를 넓히고 키우기 위해 교회에 나옵니다. 즉 자기 자리를 교체하려고 교회 나오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평생 고생하면서 쏟아 부어서 만든 자기 자리를 남들의 것으로 넘겨지는 것을 원치 않을 것입니다. 즉 인간의 자리는 ‘하나님의 아들 되기’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오로지 자기 자리만 사수하면 복인줄 알고 있습니다. 이런 차이점으로 인해 예수님과 선지자들은 인간들으로부터 배척당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들로부터 다 빼앗기고 배척받으면서도 오로지 하나님의 복음만 즐거워하는 자를 유일하게 성공한 인간 자리로 보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바람직작 교회상이란 마치 식당을 성공적으로 운영하듯이 운영되는 교회를 말합니다. 즉 성실하고 정식하고 남을 배려할 줄 알면 이 험난한 세상에서 성공하고 살아남을 수 있는 단체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이렇게 성공한 단체나 사업체나 교회는 어디까지나 소유주가 발생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참된 교회는 소유자가 이 세상에서는 있을 수 없습니다. 즉 ‘이것까지는 내 교회요 저것부터는 너의 교회’라는 경계 짓는 것이 허용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참된 교회의 기준은 하나님의 아들 만들기와 관련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 만들기는 출애굽에서 오직 어린양의 피를 발라서 아들이 되었습니다. 아들의 자리란 피로 만들어집니다.
피가 있는 자는 아들이요 피가 없는 자는 아들이 아닙니다. 따라서 계속해서 설교단에서 예수님의 피만을 증거해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진정한 교회가 오직 예수님의 아들 자리에서만 발생됨을 압니다. 즉 예수님은 우리가 깔고 앉은 방석을 빼버리고 예수님의 피의 방석을 우리 엉덩이 밑에 수셔 넣으려고 합니다. 우리는 강력하게 저항합니다. 하지만 이런 저항이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주님께서 아들 만들기 작업에 들어갔다는 증거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죽으면 모든 관계와 자리가 다 떨어져나간다는 사실을 알고 벌써 주님의 아들로 사는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