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요리문답공부7 (20030119)
소요리문답공부7 (20030119)
이름 : 오용익(IP:59.3.201.241)
소요리문답공부 제 7강 (이 근호목사, 2003년 1월 19일, 우리교회)
지난시간에 생명의 언약이라고 했습니다. ‘지키면 영생 얻는다’는 그것이 처음 에덴동산에서는 있을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에덴동산에서는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그것이 주가 되어서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에 대해서 원천적으로 참여한 바 없었다는 것을 분명히 해 주는 겁니다.
인간은 처음에 하나님께서 생각해 놓은 그 회합에 참여해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만드셔야 됩니다. 세상은 저렇게 만드셔야 됩니다’라고 의도적으로 참여한 바는 없었다는 거죠.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그 아이디어를 인간 쪽에서 먼저 제시한 적은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이라 하는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이 먼저고 인간은 그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산출된 그런 결실에 불과한 겁니다. 이것이 인간의 위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지옥을 만들어 놓아도 거기에 대해서 반항할 수 있는 권리도 없고 제한된 사람에 한해서 천국을 보내도 거기에 대해서 반발할 수 있는 권리 같은 것도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인간이라 하는 것은 인간끼리 비교해서도 알 수 없고 인간이란 하나님께 비춰봐서만 아는데 이때도 인간이 생각하는 하나님을 통해서도 안 되고, 하나님이 알려준 그 하나님 앞에서 비춰볼때 비로소 인간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산물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 11 과, 죄와 타락
제 13문, 우리 시조가 창조함을 받은 본 상태에 그대로 있었습니까?
답) 우리 시조가 임의로 자유함을 인하여 하나님께 죄를 범함으로 창조함을 받은 본 상태에서 타락하였습니다.
제 14문, 죄가 무엇입니까?
답) 죄는 하나님의 법을 순종함에 부족한 것이나 혹 어기는 것입니다.
제 15문, 우리 시조가 창조함을 받은 본 상태에서 타락하게 된 죄가 무엇입니까?
답) 우리 시조가 창조함을 받은 본 상태에서 타락하게 된 죄는 그 금하신 실과를 먹은 것입니다.
‘타락’이란 말 자체가 잘못되었습니다. ‘타락’(墮落)이란 말은 ‘떨어진다’는 뜻이 들어 있는데 떨어질 이유도 필요도 없습니다. 중력의 법칙이 작용하는 것도 아닐 테고 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왜 ‘타락’이라고 하는가? 사람들이 생각을 잘못해서 그래요. ‘타락’이란 어느 수준에서 떨어진다는 이야기인데,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죄지었으면 사람 그대로 있는 겁니다.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만큼 나의 수준이 높아지려고 하다가 어떤 일이 있어서 와장창 밑으로 떨어졌다’고 생각하는 버릇이 있어서 그런 현상이 일어나게 됩니다만 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제 11과의 주제가 ‘죄와 타락’이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에 문제가 세 개 나와 있습니다. 제 13문에 ‘우리 시조가 창조함을 받은 본 상태에 그대로 있었습니까?’ 그대로 있었잖아요. 무슨 문제 있습니까? 답을 보면 ‘우리 시조가 임의로 자유함을 인하여 하나님께 죄를 범함으로 창조함을 받은 본 상태에서 타락하였습니다.’ ‘떨어졌다’는 거죠.
답변이 좀 이상하죠? 죄를 범했으면 그냥 죄를 범한 것이지 떨어질 이유가 없잖아요. ‘떨어진다’는 것은 어떤 어감이 있느냐 하면 ‘아, 잘할 수 있었는데, 나도 천사처럼 더욱 순수해 질 수 있었고 인격의 수준이 더 높아질 수 있었는데’라는 이런 선입감이 있기 때문에 ‘타락’이라는 말을 자꾸 쓰는 겁니다.
사람은 타락할 필요도 없고 타락되지도 않고 그냥 그 자리에 있는 거예요. 죄 없는 상태에서 죄짓고 난 뒤에 죄 있는 죄인의 모습으로 그냥 그 자리에 있는 겁니다. 이제 주어질 것은 하나님의 천벌만 주어지면 그만입니다. 떨어질 것도 없습니다. 조정될 수 있는 것도 없고 조정해서 벗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길이라는 것이 재미있는 것이 있습니다. 길이라는 게, 차를 타고 길을 가게 되면 그 길 바깥으로 나갈 수 없다는 속박시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인간은 그 길 바깥으로 나가야 자유라고 생각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정해진 길로 가게 하는데 ‘네가 이 길을 가는데 의인으로 이 길을 갈거냐, 아니면 죄인으로 갈거냐’ 해서 인간은 그 길을 못 벗어나는 거죠.
바깥에 못 벗어난다는 이것이 선악과로 인한 제한인데, 인간은 사방팔방 마구 돌아다닐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이게 큰 오산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정해준 그 노선을 그대로 따라가면서 ‘의인으로 갈거냐, 죄인으로 갈거냐’ 그것뿐이지 사방팔방 돌아다닐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안계시면 인간은 죽음이라는 것이 없어야 됩니다.
하나님을 안 믿는다고 하면서도 사람은 죽음이라는 것이 점점 다가오기에 죽음은 이길 수가 없습니다. 병고와 피곤함, 외로움 이런 것이 다 포함됩니다. 무쏘의 뿔로서 혼자 가라는 말도 있고 화엄경에도 그런 사상이 들어 있는데, 사람에게 죽음이라는 것은 미래의 죽음이 앞당겨서 병마로써 찾아오는 거예요.
어린애는 엎어지면 금방 일어나지요. 그런데 연세 많은 분들이 엎어지면 그대로 돌아가시는 경우가 생깁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만큼 죽음의 무게가 많이 나가거든요. 점점 더 죽음의 짐이 강도 있게 다가온다는 말입니다. 연세가 많아질수록 모든 것이 피곤하고 모든 것이 축축 처지게 됩니다.
‘당신 자유니까 알아서 건강해라.’ 아무리 자유를 줘도 내 몸 내 맘대로 못하는데 어떻게 합니까? 외로움! 외로움이라는 것을 우습게보지만 나에게 돈이 수십억 있고 건강이 넘치고 지금 어느 술집에 가서 술 마실 수 있는 자유가 있더라도 외로움을 무슨 수로 떨쳐 버립니까? 긴긴 밤 홀로 지새우는 그 외로움을 무슨 수로 떨쳐 버립니까?
‘외로움아, 돈 2만원줄게. 떨어져 줘.’ 그럴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 아래층에 있는 술집에 가서 바텐더와 밤새도록 이야기를 하면서 술을 마시고 새벽녘 되어서야 집에 돌아가다가 고함지르던 어떤 인간은 저한테 한소리 듣고.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외로우니까 술로 달래는 겁니다. 그게 달래집니까? 외로움이 더 깊어지죠.
인간에게 자유가 있다? 그 자유를 어디에 써먹으려고요? 써먹을 데가 없습니다. 내 자유도 커버 못하는 재앙이 무한정 닥쳐 오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죄의 흔적, 죄로 주어진 결과물, 저주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타락’이라고 해서 어디서 어디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냥 그 자리에 있는 거예요.
제 14문에 ‘죄가 무엇입니까’라고 하는데 답변으로 ‘죄는 하나님의 법을 순종함에 부족한 것이나 혹 어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답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니까 죄를 짓지 말자.’ 이것은 말이 안 됩니다. ‘죄짓지 말자’하는 그 자체가 죄의 결과입니다. ‘죄 지을 수밖에 없다.’ 딩동댕! 정답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 죄이기 때문에 죄를 짓지 말자’라는 것은 땡! 정답이 아닙니다. 죄인이 되었으면 죄 짓는 것이 정상이지 ‘죄 안 짓겠다’ 하는 것은 자기의 본성을 거슬리는 일종의 위장술입니다. ‘그러면 당신 말대로 하면 더욱 더 죄를 지어야 되겠네.’ 그런 생각 안 해도 가만있으면 더욱 더 죄를 짓도록 되어 있는데 타는 불같은 욕망에다가 더 불을 지필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가만히 그냥 살아도 더 원하고 그렇게 애타는 죄를 마음껏 원 없이 지을 수 있으니까, 이런 죄 저런 죄 십계명에 나오는 그 모든 죄를 원 없이 짓는데 뭘 그걸 일찍이 다 경험하려 듭니까? 살다 보면 부딪히는 경험들 속에서 이런 죄도 경험하고 저런 죄도 경험하고 결국 마지막 죄값은 죽음, 사망인 것이 우리네 인생입니다.
‘인생이 무엇이냐?’ 그러면 저는 그렇게 답변합니다. ‘죄짓다가 볼일 다보는 것. 그리고 그죄에서 돌이킬 능력은 우리에게 전혀 없는. 그래서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은총으로 구원하는 것은 사랑으로 모든 죄를 죄 없는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자기 백성만 건져내는 그것이 우리 인생의 갈 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경험해야 되는 것은 뭐냐? ‘과연 내가 어떠한 죄가 있는가?’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경험케 합니다. 자기 딴에는 바르게 살아보려고 애를 썼는데, 기어이 자기의 죄의 본성을 자기 스스로 못 견뎌서 이번에는 이쪽으로 돌아서서 바르게 살아보려고 시도하고, 다음에는 저쪽으로 돌아서서 시도합니다.
예를 들어서 사영리, 영성훈련, 전도훈련, 노방전도, 성경베껴쓰기, 새벽기도 나오기, 과감하게 십분의 일 헌금 바치기 등등, 자기 딴엔 발작을 합니다. 처음에는 ‘나, 새사람 되었구나. 변화 되었구나’ 하다가 점점 ‘변화 되었구나’라는 그 목소리도 점점 줄어들어서 사흘 만에 중단되어 버립니다.
그리고는 ‘아, 옛날 그때가 좋았는데’ 하면서 다시 애굽의 그 시절이 그립고 ‘예수 괜히 알았다. 기도도 괜히 배워가지고’라는 후회도 막심하게 들어오면서 그쪽으로 다시 돌아가죠. 목사 되고 난 뒤에 ‘하나님, 이제는 새사람 되었으니 목사 하겠습니다’ 하다가 몇 년도 못가서 목사 된 것을 후회하고 배운 가락이 그것밖에 없으니 다른 짓은 못하고 ‘그냥 배운 게 이거니 이 길로 나가자’고 하는 식으로 버티는데 그렇게 버티다 보니 자기도 괴롭고 남도 다 괴롭히게 됩니다.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복음을 같이 공부하는 목사들 중에도 그런 분들이 참 많습니다. ‘괜히 복음을 알았다. 몰랐을 것을. 이제 복음을 알아놓았으니 돈도 안 되고 내 신세 망치고 폐인 되었구나. 말종이 되었구나.’ 여기가도 환영 못 받고 저기서도 환영 못 받고, 노회에서도 찍히고 예수한테도 찍히고, 오도가도 못 하고, 돈은 안 되는데 돈은 밝혀야 되겠고. 빼도 박도 못하는 이 양면성.
‘개혁하면 하나님이 도와줄 줄 알았고 복음 전하면 하나님이 도와줄 줄 알았는데 아, 그게 아니었구나.’ 그러나 돌아서기는 너무나 멀고, 이 복음을 알고 나니 남들이 알지 못하는 죄성을 알게 되고. 그것이 바로 모든 사람에게 공히 주어지는 운명이라는 겁니다.
제 15문에 ‘우리 시조가 창조함을 받은 본 상태에서 타락하게 된 죄가 무엇입니까?’ 답변은 ‘우리 시조가 창조함을 받은 본 상태에서 타락하게 된 죄는 그 금하신 실과를 먹은 겁니다.’ ‘선악과를 따먹었기에 죄를 지은 겁니다.’ 여기에서 문제가 있어요. ‘과실을 따먹은 것이 죄입니까, 아니면 과실을 따먹어야 되겠다고 먼저 마음이 동하고 움직인 것이 죄입니까?’ 그런 문제가 있습니다.
만약에 ‘과실 따먹은 것이 죄’라고 한다면 과실을 안 따먹은 오늘날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죄를 물을 수가 없지요. ‘가게에서 우리 아버지가 바나나를 훔쳐 먹었다.’
“네가 훔쳤지?”
“제가 안 먹었어요. 우리 아버지가 훔쳐 먹었어요.”
“입 벌려봐라.”
“아아!”
“어? 진짜 네가 먹은 게 아니네.”
여기서 무엇이 어렵냐 하면, ‘과실을 따먹은 것이 죄냐, 아니면 죄가 과실 안에 있느냐’ 하는 겁니다. 사과를 딱 깨보면 그 안에 씨가 있잖아요. 그런데 ‘선악과는 와작, 하고 씹으면 그 죄라는 것이 씹히면서 그 죄가 아담 속에 밀려들어오느냐?’ 아니면 ‘저것을 따먹어야지’ 하고 하나님의 금하신 계명을 어긴 그 행동, ‘그 과실과 관계없이 따먹은 행동이 죄입니까?’ 그 이야기입니다.
먹고 살기 바쁜데 그런 것을 생각할 여력이 없지요. 책임추궁에 관한 문제이기에 상당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보통 신학에서 여기까지는 잘 생각을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저는 어느 쪽이냐 하면 이쪽, 과실 자체에 죄가 있다고 봅니다. 좀 의외지요?
사람들이 마음, 마음을 그렇게 강조하면서 ‘마음자체가 죄가 아니냐’고 보지만 저는 그렇게 보지 않고 과실에서 죄가 들어왔고 그 죄가 과실을 따먹음으로 말미암아서 우리 안에 넘쳤고 그 넘친 죄가 계속 넘쳐서 후손까지 이어졌다고 봅니다.
제가 왜 이렇게 주장하느냐 하면 ‘선악과 자체가 죄가 되어서 우리에게까지 넘겨졌다’는 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생명나무에서 의가 나오지, ‘생명나무를 따먹어야지, 혹은 예수님을 믿어야 되겠다’는 내 마음의 의로움은 곤란하다는 그 말입니다. 정말 어렵습니다.
마음자체가 죄라면 그러면 의가 뭐냐? ‘내가 예수 믿어 줘야지. 천당 가 줘야지.’ 하나님 보시기에 ‘나, 예수 믿습니다’하는 내 마음, 그것이 외부에서 주어질 필요 없이 ‘내 마음이 선택하면 그것이 바로 나에게 의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틀린 겁니다. 예수님의 ‘내 피와 내 살이 생명’이라면 그것을 반대로 생각해서 ‘선악과 자체가 죄가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내 살을 먹어라. 내 피를 마셔라’고 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마음을 움직인다고 해서 그것으로 의로울 수는 없고 예수님 자체가 의가 된다’는 그것이 앞뒤를 맞춰보고 대비해 볼 때 그것이 옳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