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요리문답공부5 (20030105)
소요리문답공부5 (20030105)
이름 : 오용익(IP:59.3.201.241)
소요리문답공부 제 5강 (이 근호목사, 2003년 1월 5일, 우리교회)
지난시간에 ‘하나님이 사람을 지을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난 시간에 한 것을 다시 요약합니다. ‘있음에서 있음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 과학자들의 주장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성경은 ‘있다는 것은 없는데서 생겼다. 없는데서 생긴 것이 피조세계다’ 합니다.
따라서 ‘피조세계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만 추구해서는 안 되고 우리를 만드신 보이지 않는 분까지 관계가 이어져야 제대로 사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과학과 성경이 너무 다르지요? 보이지 않는 분에 의해서 사람이 만들어졌다면 그 뒤에 어떤 문제가 따라오느냐 하면 ‘보이지 않는 분이 사람을 왜 지었는가’하는 그 문제가 따라오지요.
만약에 과학적으로 따져서 ‘있는 것이 있는 것으로 되었다’고 한다면 ‘사람은 왜 지어졌는가’라는 물음을 인간 스스로에게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되는 대로 살면 되지 ‘내가 사는 목적이 있어야 되고 사는 근본적인 이유가 뭔지’를 물을 필요조차 없겠지요. 이 양자가 인생관에 있어서 얼마나 큰 차이가 나는지요.
‘나는 그냥 그저 사는 이대로 살 거야. 누가 나를 만들고 자시고 그런 것은 인정 안 해. 나는 있는 그대로 살 거야.’ 이것이 과학적인 사고방식인 반면에 성경은 ‘보이지 않는 분이 나를 만들었기 때문에 사람이 산다는 것은 그분의 뜻에 일치되어서 살아야 된다’ 하는 그런 목적이라는 것이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8과의 제 10문의 답변을 보면 “하나님이 사람을 남녀로 지으시되 자기의 형상대로 지식과 공의와 거룩함이 있게 하사 모든 생물을 지배하게 하셨습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자기 형상대로 지었다’는 말이 성경에 나옵니다만 이 말이 무슨 뜻이냐 하는 거죠. 이게 좀 어렵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서 보이는 것, 있는 것에서 있는 것으로 한다면, 거기서 말하는 형상이라고 한다면 복사하듯이, 판에 박듯이 ‘겉모습이 동일할 때 그것이 형상대로다’라는 말을 할수 있을 것입니다. “어이, 너 나 닮았네.”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닮은 그 본체가 눈에 보이고 그 보이는 것을 두고 ‘야, 빼다 박았네’라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이 우리를 자기 형상대로 만들었다’고 했을 그때의 형상이라는 것은 그런 겉모습이 동일하다는 뜻은 아니라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데서 형상이라고 할때는 그 형상이 그 형상 맞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이 형상이라고 했을 때의 그 형상이라는 것은 보이지 않는 분이 보이지 않는 분끼리 형상이라고 말을 붙일 수 있는 어떤 분이 계신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들었다’고 했을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상대로’ 여기까지가 역시 보이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이점에 대해서 인간 쪽에서 ‘이것이 형상이다. 이것이 형상 아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들었다’고 할 때 눈에 보이지 않는 분들끼리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의 신체와 육체의 눈에 보이는 모습과는 무관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형상’이라고 하는 분은 따로 존재하는 겁니다. 골로새서에 보면 그 형상은 예수님입니다.
골로새서 1:15-17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창세기에서는 ‘우리의 형상대로’라고 되어 있지만 신약에 오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본받게 하기 위해서 인간을 만들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그 대목이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는 따로 어떤 인물이 계시다는 겁니다.
그런데 자꾸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을 지상의 인간들인 자신들이 갖고 있는 어떤 요소, 그것을 확대시켜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니까 이 문답서에 나오는 대로 ‘… 자기의 형상대로 지식과 공의와 거룩함이 있게 하사…’ 라고 나온다는 말입니다. 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주장하는 ‘공의와 거룩과 지식’이란 동물과는 다르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것이 동물이 아니고 인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이 뭐냐 하는 것은 동물과는 다른 인간들만이 가지고 있는 그 요소만 빼내면 된다’고 주장하는 거예요. 그렇게 발췌된 것이 ‘지식과 공의와 거룩함’ 이런 것입니다. 문화인류학적으로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은 ‘직립보행, 언어사용, 불사용, 도구사용’ 네 가지입니다.
직립보행, 언어사용, 불사용, 도구사용 이 네 가지는 동물과 차이 나게 인간만의 고유하게 가진 것이고 그것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보는데 이렇게 되면 모순점이 생깁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을 지옥에 보내는 것이 되고 맙니다. 지옥 가는 사람 중에서 하나님의 형상(인간쪽에서 발췌한)이 안 들어 있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지옥 가는 사람도 예외 없이 하나님의 형상이 들어 있고 결국은 하나님이 자기 형상을 지옥에 멸하는 식이 되어서 자기 형상을 자기 스스로 망치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인간만 지은 것이 아니고 천사들도 지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말한 이러한 논리는 ‘눈에 보이는 것에서 눈에 보이는 것이 만들어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이냐’ 할 때에 ‘눈에 보이는 것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이냐’를 뽑다 보니까 그런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우리로부터 출발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 나오는 ‘지식과 공의와 거룩함’이라는 것은 불교신자에게도 많은 겁니다. 이것은 모슬렘들에게도 많고 집에 도 닦는 사람에게도 많고 가정교육 잘 받는 사람에게도 이런 것이 충만하게 넘쳐납니다. 똑똑하고 공부 많이 하는 사람들 ‘지식과 공의와 거룩함’ 이런 형상이 참 많아요. 바르게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에게도 이런 형상이 많습니다. 양심고운 사람들도 많아요.
그러면 교회에 나왔지만 개차반같이 행동하는 사람보다 교회에는 안 나오고 예수는 안 믿지만 인품이 아주 뛰어나고 훌륭한 그 사람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더 많겠네요.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까? 성경에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것은 불신자들이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하고 아무리 도를 닦아도 도저히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요소가 하나님의 형상이며 그분은 바로 구체적인 인물 나사렛 예수입니다. ‘예수다움’이나 ‘예수스럽다’는 형용사적인 것이 아니고 구체적인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아는 것,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되시는 분이 성도를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하실 때 예수님 자신의 형상대로 지었기 때문에 그 사람만이 예수를 주로 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지음 받은 새로운 피조물의 목적은 뭐냐?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입니다.
제 9 과, 섭리
제 11문, 하나님의 섭리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답) 하나님의 섭리하시는 일은 지극히 거룩함과 지혜와 권능으로써 모든 피조물과 그 모든 행동을 보존하시며 통치하시는 일입니다.
여기 ‘섭리’라는 말이 나오는데 섭라라는 말은 성경에는 없는 말이죠. 성경에는 없는 말인 ‘섭리’라는 말을 왜 했을까? 이것은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작성한 당시(1643-1649)의 사람들이 불신자들에게 하나님을 납득시키는 하나님으로 설득하기 위해서 이런 새로운 용어들을 자꾸 만들어 냈던 겁니다.
용어를 만들 때 그 용어에 뒤따르는 사고체계는 과연 성경적인가? 그것은 아닙니다. ‘섭리’라는 말 자체가 성경의 복음을 전하는데 더 장애가 되어 버렸습니다. ‘섭리’라는 말은 복음적인 것이 아니고 유신론적인 철학에서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유신론(有神論)이라는 말은 ‘신이 있다’는 말입니다.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가지고 인간들의 세세한 행동, 참새 한 마리 죽고 사는 것, 발걸음 세는 것, 머리카락이 나는 이런 이 모든 것들을 ‘신의 섭리’란 말로 표현했는데 이 ‘섭리’는 기독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다른 모든 종교인들도 다 알고 있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주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칼빈주의’라고 하는데 ‘칼빈주의’가 ‘하나님의 주권’을 주장할 것 같으면 ‘칼빈주의’는 복음적이 아닙니다. 왜? 다른 종교도 그것을 다 이야기하고 있고 그중에서 가장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종교가 이슬람입니다. 이슬람교에서는 얼마나 하나님의 주권을 세게 강조하는지 ‘삼위일체’도 인정 안 합니다.
‘셋이 있으면 경쟁적이기에 그중에 하나 오야봉은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게 진짜 유일신, 알라신의 주권이 주권답게 될 것이 아니냐’고 합니다. 세분이 입법, 사법, 행정 이렇게 삼권분립같은 식이 되어 버리면 이것은 주권답지를 못하다는 거죠. 이슬람교에 기독교가 안 먹히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이미 주권자가 따로 있는데.
그러면 예수는 뭐냐? 예수는 알라신의 섭리 하에 하나의 위대한 선지자죠. 마치 아브라함을 존경하고 모세를 존경하는 것 같이 예수를 존경합니다. 특히 이슬람교의 교리에 들어가면 마호메트를 그다지 위대하게 치지 않습니다. 알라신이 중요하지 마호메트는 예수와 같이 하나의 졸때기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이슬람교는 어떤 신의 형상도 만들지를 않습니다. 이슬람교의 건축물은 어떤 문자고 도형이고 기하학적인 원형이지 구체적인 형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어떤 형상이든 만들지 말라’고 했으니까. 그들의 건축물 자체가 철저하게 어떤 추상적인 구조물입니다. ‘주권’ 하려면 확실하게 해야지 어설프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예수상 만들고 마리아상 만들고 그런 것이 없습니다.
여기서 ‘신의 섭리가 뭐냐’ 하는데 복음적이 아닙니다. 복음은 ‘신의 주권’, ‘신의 섭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 하나님께서 누구를 믿으라고 보내셨는가’의 이야기입니다. ‘신이 존재한다. 운행하신다. 섭리하신다. 주권하신다.’ 그것은 복음이 아니고 자연종교, 인간에게서 자연적으로 나오는 종교성입니다. 그런 식이라면 이슬람교 사람들도 천당 다 갑니다.
그것이 아니고 ‘기쁜 소식’이란 ‘신이 섭리한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마지막 때에 누구를 보냈느냐? 자기 아들을 보냈는데 그 아들이 누구냐? 아들은 바로 나사렛 예수라는 청년 그분뿐이고 다른 사람은 아들이 될 수 없다’는 그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자꾸 사람들은 ‘너는 신을 인정하나? 너는 안하지? 나는 한다.’ 이것으로 신자된 것처럼 패갈음을 하는데 그러면 안 됩니다. 신의 존재는 교회 안다녀도 사람들이 어렴풋이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모든 인간이 다 신의 존재를 압니다. 여기 보면 “하나님의 섭리하시는 일은 지극히 거룩함과 지혜와 권능으로써 모든 피조물과 그 모든 행동을 보존하시며 통치하시는 일입니다” 했습니다.
이것은 상식입니다. 성경을 안본 사람도 성경 덮어버려도 알 수 있는 상식입니다. 신이 모든 것 위에 초월한다면 초월다운 면모가 나오는 것이 마땅한 일인데 여기다가 뭘 덧붙일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5가 뭐냐? 5=2+3이다. 이게 2+3만 됩니까? 어떤 사람은 ‘아니야, 5=4+1이다.’ 또 어떤 사람은 ‘아니야, 5=5×1이다.’
이것을 동어반복, 같은 말을 반복한다는 뜻이거든요. ‘신이 뭐냐? 신은 이렇게 섭리하는 것이다.’ 그것이 어떻게 신을 아는 겁니까? 신이니까 마땅한 거죠. 적어도 5가 뭐냐 할 때는 6과 혹은 7과의 차이점, 이렇게 나와야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은 복음적이 될 수 없는데 왜 그런 것이 있는가?
‘혹시 마음으로는 믿지만 노골적으로 신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서 ‘신이 계시고 여러분의 모든 일들은 신의 계획 하에 잡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이 자기를 속인다 해도 너무 슬퍼하거나 노여워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 뉘앙스의 이야기인데 그런 이야기는 안 믿는 사람들, 교회 안다니는 사람들도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것은 절간에서도 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신이 있든 없든 관계없이 삼라만상 우주의모든 것은 자연스럽게…’, 여기서 자연이라는 것은 스스로 있다는 거죠, ‘…스스로 있는 것들은 스스로 움직이기 때문에 너무 자기 인생의 실패와 성공을 가지고 마음에 담아두지 말고 그러려니 하고 살아가세요.’
이것은 절에 가도 다 들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복음이 아니고 인간승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