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7월 25일 강의 디모데전서 3장
광주 7월 25일 강의 디모데전서 3장
이름 : 우리교회(IP:220.81.176.150)
080725 딤전3장, 감독직분과 권력의 관계구조 _____ (미완료의 누락)
우리교회(IP:220.♡.176.150)
08-07-26 10:45
우리교회(IP:220.♡.176.150)
08-07-30 18:20
광주080725a디모데전서3장1절
광주 강의(08. 7. 25) 39-1
디모데전서 3장 1~5절까지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미쁘다(믿음직스럽다) 이 말이여,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하면 선한 일을 사모한다 함이로다.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근신하며, 아담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치 아니하며,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라야 할지며,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 보리요.”
1절에서 5절까지 읽었는데, 읽어보니까 여러분이 이해하기 쉽다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상당히 어려운 거예요. 이게 쉬운 말이 아닙니다. 왜 쉬운 말이 아니냐 하면, 감독이란 것이 꼭 필요한가 하는 그 문제부터 따져봐야 합니다. 그리고 감독이라는 직분이 하나님이 만들었는가 아니면 사람이 만들었는가 하는 것도 따져봐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만드신 직분이라면, 과연 어떤 사람이 딱 맞게 그 자리에 들어갈 수 있느냐? 이것도 상당히 난해한 문제입니다.
이것이 상당히 어려운 것인데, 제가 최대한 쉽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대구에서 버스를 타고 광주로 오는데 약 2시간 동안 차 안이 시끄러웠어요. 갓난아기가 잠을 자야하는데 잠을 못 자서 차 안에서 막 우는 거예요. 그러니 차 안에 있는 사람들이 다 짜증이 났어요. 엄마는 어쩔 줄 모르고 있고.
자, 엄마가 아기 운다고 달랠 때, 그 엄마는 어떻게 하면 엄마가 될 수 있습니까? 말이 이상하지요? 어떻게 하면 좋은 엄마가 되는지를 물은 것이 아니고, 엄마라는 자리가 어떤 자리냔 말입니다. 엄마는 아기만 낳으면 엄마 아닙니까. 그 다음에 좋은 엄마가 되려고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아기가 엄마를 좋은 엄마로 만드는 것입니까?
아기가 으 ~앙 하고 울지요. 얘기가 우는데 엄마는 달래려고 애를 쓰요. 안았다가 엎었다가 우유를 먹이다가 하면서. 그런데 뒤에 앉은 아주머니는 아이가 울어도 얘기 엄마처럼 애달아하지도 않고 무심하게 앉아 있어요. 그 이유가 뭡니까? 자기 아이가 아니니까 그렇지요.
그러면 엄마를 엄마 되게 하는 것이 결국 누구입니까? 아기가 태어남으로 말미암아 여기에서 벌써 관계라는 것이 뻗어 나왔지요. 아기 없는 새댁이 아기가 태어나면 엄마가 되잖아요. 그런데 오늘 새댁이 안 왔네! 한 자리가 비었다 싶었는데 새댁이 안 왔네.
아기를 낳게 되면 ‘나 몰라라.’ 할 수 없잖아요. 가끔 그런 미친 사람도 있습니다만, 대부분의 엄마들은, 아무리 몸매 관리하고, 옷에 신경 쓰고 해도 아기가 생기면 아기가 우선이 됩니다. 그래서 아무리 점잖고 채면을 중시하는 여자라도 아기가 빽빽 울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더라도 아기 울음 그치게 하는데 매진합니다. 이것이 바로 엄마라는 자리입니다.
이제 이해되지요? “나는 좋은 엄마 될래.” 그런 말은 소용없어요. 그것은 자기 바람이고 실제로 엄마가 엄마답게 엄마의 자리를 채우는 것은 아기와 엄마의 관계 속에서 형성 됩니다.
그래서 이 대목이 어려운 것은, 신학교 나온 사람이 목사 되려고 하면 ‘나도 이런 항목 주의 해야지. 그래야 나도 감독(목사) 되겠지.’ 라고 이렇게 나오는데, 제 이야기는 그것이 잘못 됐다는 겁니다.
보통 여자들이 남자와 연애할 때는 남자가 이렇게 하면 내가 이렇게 해 준다고 예상을 하는데, 막상 결혼하고 나면 남편뿐만 아니고 남편의 동생, 남편의 엄마, 남편의 아빠, 심지어는 남편의 친구 등 얽히고설킨 문제까지 다 신경을 써야 한다는 것을 연애 시절에는 미처 생각도 못했지요.
남자 만나면 그냥 궁금해서 가족관계에 대해 묻지요. “아버지는 어떤 분이세요?” “우리 아버지는 걱정하지 마라. 우리 아버지 같은 시아버지는 없다.” 그러나 막상 결혼하면 예상도 못한 본색이 나옵니다. 어른 노릇 하려고 객기를 부리고 하면 기가 찰 노릇이란 말이죠. 이렇게 되면 보통 힘든 게 아니지요.
그리고 아무리 좋은 시아버지, 시어머니도 늙어서 치매에 걸려 노인 병동에 입원해 있으면 누가 시간을 빼앗깁니까? 단지 며느리란 이유 때문에, 특별이 좋은 며느리는 아닙니다. 좋은 며느리도 아니고 나쁜 며느리도 아닌데, 단지 며느리라는 이유 때문에 며느리 노릇을 해야 됩니다.
아까 우 집사님 친구 분이 교통사고 난 후에 “나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나? 내가 왜 죄인인가?” 라는 생각을 했단 말이죠. 피 한 방울 안 섞인 시아버지, 시어머니 봉양하는데 내가 시간 뺏기고 돈 뺏기고 할 때 “내가 왜 죄인인가?” 그런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요?
이것은 뭐냐 하면, 관계가 먼저 설정되어 있고 거기에 우리가 초청 받은 겁니다. 이제부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미리 양해를 구합니다. 사전에 겁을 줘야 정신 빠짝 차리고 듣지요.
이게 본문 6절과 관계됩니다.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제가 글을 쓰겠습니다. ‘권력의 행사는 권력이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할 경우다.’ 참 어렵지요? 진짜 권력이 지배할 때는 권력에 예속되어 있는 사람이 지금 내 위에 권력이 있다는 것을 못 느끼도록 지배하는 것이 권력이 권력답게 우리한테 행사하는 방법입니다. 마귀가 그렇게 해요.
불신자들에게 “너는 마귀에게 장악되었다.”고 하면 화내지요. “내 위에 누가 있다고? 우끼지 마라. 나는 내 마음대로 산다.” 권력이 분명히 지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못 느낄 때 가장 권력답지요.
사람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뭐든지 자기가 알아서 한다고 하지만 막상 그 자리에 가보면 이미 준비된 관계망이 있어요. 내가 요구하지도 않고 내가 원치도 않은 그런 관계망이 딱 설정되어 있습니다.
여자들은 남자들이 군대 가기 싫어하는 이유를 몰라요. 여자들도 군대 가봐야 얼마나 싫은 곳인 줄 알게 됩니다. 군대가 왜 싫은가 하면 시간 관리를 내가 못한다는 거예요. 밥맛이 없다. 잠을 푹 못 잔다. 이런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내 스케줄을 내가 안 짠다는 거예요. 이것은 자유의 박탈이죠.
한창 방종하고 제 멋대로 술 먹고 밤늦게 돌아다니던 젊은이들이, 머리 깎고 군에 입대하면 그 이후부터는 밤 10시 되면 무조건 자야 되고, 새벽 6시면 무조건 일어나야 되고, 정해진 시간에 보초 서야 되고, 식사 시간도 정해져 있고. 개성도 없고, 자기의 취향도 허용 안 되고, 자기 특기도 발휘 못하고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움직여야 하고, 남보다 뛰어나도 안 되고 못해도 안 되고 똑같이 해야 되는 것. 그래서 인간의 주체가 말살되는 곳이 군대입니다. 강제로 ‘나’가 없어지는 거예요. 한 마디로 표현하면 ‘개가 되는 것’입니다.
개는 항상 홀로 있지 않습니다. 홀로 있는 개는 야생 개지요. 여기서 개라는 것은 항상 길들여져야 되고, 권력에 의해 강제로 길들여지는 것이 바로 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이 개들을 앞장세워 총알받이가 되어서 삼천리 반도 강산을 지킬 수가 있는 겁니다.
촛불 집회할 때 앞에 개들을 배치해야 됩니다. 개들은 이유도 모르고 영문도 모르고 촛불 집회 때 얻어맞아야 합니다. 그래야 국가 질서가 유지됩니다. 제 이야기를 듣고 “아이고 남자들 불쌍하다.”고 하는데, 여자들도 시집가면 똑같습니다. 시집의 개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 다녀도 소용없어요. 제사 열두 번 있으면 열두 번 지내야 합니다. 연애할 때는 “남편 될 사람이 날 좋아하면 됐지 남편의 부모까지 날 좋아할 필요 없다.” 이러다가 혼납니다. 살기 힘들어요. 처음 만났을 때는 시부모 될 사람이 “얘야, 나는 너의 종교까지 간섭하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더 무서운 일은 그런 권력에 처음에는 반항하다가 자진해서 협조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내 개성이 스스로 진화를 추구합니다. 내 자체가 적응을 하게 돼요. 시집가기 전에는 내 마음대로 사는 줄 알았지만 그것도 내 마음대로는 아니고 친정집에서 만든 그물망에 적응된 나였는데, 이제 결혼을 해서 시집이라는 권력 구조에 내가 적응을 잘 해야 여기서 편하게 살 수 있습니다.
적응을 잘 한다는 말은 기존의 내 성질이나 취미, 개성 이런 것들을 접고 권력에 굴복하도록 하는 거예요. 처음에는 굴복하기 힘들지만 나중에 굴복해보면 권력에 지배를 안 받는 것처럼 지배를 받게 되는 그런 현상이 일어납니다. 이것을 ‘아비투스’라고 해요. 이런 말은 외울 필요는 없는데, ‘행동의 체제’라고 부르디외(프랑스 사회학자)가 주장한 거예요.
인간은 행동할 때 왜 그렇게 행동하는가? 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가 그렇게 하고 싶어서 그런 행동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이미 그 행동을 조종하고 지시하는 권력을 바깥으로 드러내면서 행동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사람의 행동을 보고 그 사람이 어떤 권력 체제 속에서 적응하고 사는가 하는 것이 나옵니다. 이것을 간단히 말해서 “참, 집안이 훌륭하시네요.” 라고 하지요. “가정교육이 잘 되었군요.” 라고 하고.
제가 대구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습니다. 어릴 때 언어를 배운다고 합니다. 맞는 것 같지요? 어릴 때 부모로부터 언어를 배워요. 부모에게 언어를 배울 때 언어학, 국어학을 배웁니까? 언어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명령을 배워요. ‘ ~ 하라. ~ 하지 마라.’ 이런 명령을 배워요.
어릴 때부터 이런 명령을 배운 것이 자기의 언어체계가 됩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이 어른이 되어 상대와 의사소통을 하고 대화할 때 본인은 모르지만 그의 말이 명령어로 나옵니다. “집사님, 광주에 비 많이 왔어요?” 남들 보기에는 이 말이 명령이 아니고 그냥 묻는 말로 느껴지지요. 그런데 이 말을 분석하고 분해하면 ‘나는 분명히 광주에 비 왔다고 확신하는데, 만약에 거기에 동의 안 하시면 내편 아니야.’ 이게 깔려있단 말이지요.
“아, 참 경치 좋다.” 혼자 말인데, 이것을 옆 사람이 들으면 명령이라니까. 이게 무슨 명령이냐고 할지 모르지만, 이 말을 만약 사장이 했다고 한다면, 부하직원은 “예, 그렇습니다. 참 경치 좋습니다.” 이렇게 나오지요. 자기 보기에 별로 안 좋아도 사장의 그런 말을 했으면, 부하직원도 좋다고 해야 됩니다.
어떤 구석이라도 권력의 그물 구조를 벗어난 삶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행동하는 것은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에요. ‘이 구조에서는 내가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 아마 내게 유리할 거야.’ 라는 계산 하에 움직이는 거예요. 따라서 행동은 권력이 명령하는 대로 움직입니다. 무슨 자유가 있고, 어디 내 마음대로 행동을 합니까?
성경은 말합니다. 권력은 두 종류밖에 없다. 하나님의 지시 아니면 악마의 지시다. 하나님이나 악마 둘 다 숨어있는 권력입니다.
숨어있는 권력이 들어날 때는 어떻게 드러나는가 하면, 숨어있는 권력을 인간의 힘으로 드러내지 못해요. 어떤 위인도, 어떤 철학자도, 어떤 박사도 숨어있는 권력을 도출해 내지를 못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도출 하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할 때 그 때 숨어있는 악마가 나오고, 숨어계시는 하나님이 나오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그 현장에서 선한 하나님과 악한 사단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드러납니다.
예를 들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변화산에 올라갔을 때, 원래 변화산에서 대화 자체가 성립이 안 됩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누구와 대화를 합니까?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를 했지요. 제자 셋은 그냥 구경만 했을 뿐이지요. 베드로서 나서서 “초막 셋을 짓겠습니다.” 라고 해도, 성경에 보면 ‘자기가 무슨 소리 하는지 자기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어른들 대화하는데 애들 끼지 말란 말입니다.
구조가 달라요. 이쪽(베드로, 요한, 야고보)은 세상의 지배를 받는 자들이고, 저쪽(예수님, 모세, 엘리야)은 하나님의 지배를 받고 있기에 대화 자체가 성립이 안 됩니다. 거룩한 분들이 계신 곳에 가면 더러운 인간들은 죽어야 됩니다. 그런데 세 제자들이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하는 것을 듣고 보도록 허락한 것은, 바로 이것이 중요한 것인데,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가 대화 할 때 대화의 내용이 뭐냐 하면, 예수님의 죽으심에 관해서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죽으심의 범위 내에서는 여기에 택한 자도 하나님과 같이 함께 있는 영역이, 삶이 보장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죽어야 될 이유가 죽어야 베드로, 요한, 야고보가 마치 엘리야와 모세처럼 예수님과 영원히 살 수 있는 겁니다.
그냥 예수님께서 폼 잡으려고 변화산에 제자들 데리고 간 게 아니에요. “예들아, 내가 왜 죽어야 하는지를 알겠느냐?” 만약 안 죽으면 모세와 엘리야처럼 이렇게 같이 이야기를 할 수 없는 거예요. 베드로, 요한, 야고보가. 그 정도로 거룩한 곳입니다.
이 거룩한 곳에 건방지게 우리가 가려고 하고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어린양의 피를 발라야 피 안에서 우리는 비로소 영적인 세계와 만남이 가능합니다. 그만큼 우리의 관계망, 이 구조가 천국의 구조와 다릅니다.
우리에게 쏟아지는 것은 마귀가 좋아하는 그런 것들로 뭉쳐져 있어요. 과연 그런가를 본문을 보면서 확인해 보겠습니다.
3장 1~5절까지의 성경 내용을 바꾸어서 해 보겠습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악한 일을 사모함이 옳습니다. 그러므로 감독 안 할 사람은 책망할 것이 많으며 여러 여자의 남편이며 절제와 근신이 없고 항상 미친개같이 설치고 나그네는 쫓아내고 가르치기는 못하고 술을 즐기고 구타를 밥 먹듯 하고 절대 관용은 없고 다투기를 일삼으며 돈을 사랑하며 자기 집은 개판으로 버려두고 자녀들은 방치해 두고 이런 사람은 감독을 안 해도 됩니다.”
왜 제가 성경을 이렇게 비틀어서 이야기하는가 하면, 감독은 중립지역이라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감독 안 하려면 내가 현제 속해있는 관계 구조가 드러나요. 어떤 관계입니까? 구타하기를 좋아하고, 술 처먹고 이런 것들을 즐기고 있다는 거예요.
‘목사님, 나는 감독 안 합니다. 그러니 술 먹어도 되잖아요?’ 바로 그러한 속셈을 드러내기 위해서 감독이란 것이 있는 거예요. 이제 감독 직분을 아시겠습니까?
감독 말고 집사로 해 봅시다.
8절에 “집사 안 될 사람들은 단정하지 말고, 일구이언 하고, 술에 절이고, 더러운 이득을 탐하고, 깨끗한 양심은 버리고 이런 자는 집사를 세우지 말아야 한다.” 이런 뜻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사람들이 어떻게 하는가 하면 “술에 인박이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는 집사가 되어라.”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대번 교인들이 하는 말이 ‘목사님, 저는 집사 안 할래요. 집사 안 되면 이런 것 안 해도 되잖아요.’ 이렇게 나와요.
이 말은 그런 뜻이 아니고, ‘집사는 이러해야 한다.’는 것은, 바로 세상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다른 구조, 악마의 구조를 드러내는 방법 중의 하나가 집사 세우고 감독 세움으로 말미암아 그의 독특함을 통해서 상대적으로 빛과 반대되는 어둠을 드러내는 겁니다.
대부분의 목사들이 장립식에서 이 대목을 설명하면서 성경에 있는 대로 하라고 하는데, 교인들은 이걸 들을 때 어떻게 듣겠습니까? ‘목사님, 그러면 나는 집사 안하면 이런 구절에 신경 안 쓰도 되지요?’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림으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제가 왜 이것을 어렵게 설명을 하는가 하면, 보통 이것을 쉽게 이야기 했어요. 뭐냐 하면, 사람이란 중립인데 ‘내가 엄마가 되려만 아기 낳지 뭐. 집사가 되려면 그 때는 술 끊지 뭐. 감독이 되면 그때부터는 남을 구타하지 말아야지.’ 자꾸 이렇게, ‘나는 여기 그냥 혼자 있는데 뭔가 하나 더 얻으려고 한다면 이런 저런 것을 해야겠구나.’ 이렇게 생각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런 사고방식이 틀렸다는 겁니다.
제가 뭘 예로 들었습니까? 엄마라는 자리는 내가 되고 싶어서 된 것이 아니고 아기가 울면 남들 시선 때문에라도 아기를 달래야지 어떻게 하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아기 낳고 난 뒤에 아기 돌보는 것보다 자기 몸 S라인 유지하는데 더 신경을 쓰요. 아기 낳고 살찌고 뱃살 나오기 마련이지요. 왜? 아기 잘 때 같이 자지요. 밤에 또 자지요. 그러니까 늘 잠을 자고 활동 안하고 아기와 늘 붙어 있으니까 살찌지요.
엄마는 아줌마가 되기 마련입니다. 아줌마 안 되려고 아기 안 낳고 이럴 수는 없잖아요. 사람은 제 마음대로 안 됩니다. 아기 낳으면 아기에게 맞추게 되어 있고, 환경이 바뀌면 그 환경에 따라 변하게 되어 있어요. 왜? 구조가 그러니까.
자꾸 사람은 구조를 잊어버리고 자기 혼자 어떤 행동을 결정하면 그렇게 되는 줄 알고 있어요. ‘나는 남편만 사랑했지 시댁 식구는 신경 안 쓴다.’ 시집 가 보세요. 마음대로 되는지. ‘나는 교회 다니기 때문에 제사는 안 지내야지.’ 시집 가 보세요. 처음에는 싫어도 억지로 했는데, 나중에 시어머니가 “너 부침개 참 잘 만드네. 어떻게 이런 솜씨가 나오니?” 하고 칭찬하면 나중에는 기쁜 마음으로 제사 준비 합니다. 이것이 적응입니다.
주님 사랑은 뒷전이고 나를 사랑합니다. 남들에게 칭찬받으면 계속 칭찬 받는 쪽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칭찬은 어디에서 나옵니까? 구조에서 나옵니다. 이 구조에 적응할 때 칭찬이 나오고, 칭찬 받는 재미로, 다른 말로하면 사랑 받는 재미로 사람들은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내 안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구조가 원하는 대로 맞추는 맞춤 인생 밖에 없지 내 인생은 없습니다. 내가 참 오랜만에 바른 소리 했다. 내 인생이 어디 있어요. 환경 따라 그때그때 재조립되고 해체되고 하는 나밖에 없습니다.
SBS에서 하는 [인터뷰게임]이라는 프로를 보니까, 57세 된 아저씨가 이혼하고는 이혼한 것을 후회해서 다시 본처와 재결합하려고 여러 사람에게 압력을 넣고 쑤시고 하는 이야기가 나왔어요. 그런데 이혼한 아내의 말이 걸작이에요. “나는 이미 당신에 대한 신뢰가 끊어졌다. 당신이 무슨 말을 해도 이제는 신뢰할 수 없다. 미안하다.”
남자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내가 행동을 나쁘게 해서 아내가 나갔으니까 이제 내 행동을 고치면 아내가 돌아올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참 바보지요. 아내가 그동안 같이 산 것은 남자 행동이 반듯해서 같이 산 것이 아니고, 아내의 구조에 아직도 그 남편이 맞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런데 이혼해서 나갈 때는 자기 구조에 맞지 않아서 떠난 거예요. 이혼한 여자의 구조 속에는 이제 남편은 없는 거예요.
그런데 바보 같은 남자는 “행동 잘 하면 될 것 아닌가” 라고 하지만, 여자는 이혼을 하고 떠나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행동 반듯한 옛날 남편을 찾는 것이 아니고 행동 반듯한 새 남자를 찾지요. 중고를 왜 사는데? 같은 돈 내고 신상품 사지 중고를 왜 삽니까?
그런데 이 바보 같은 남자는 중고지만 깨끗하게 수리해 놓았다고 중고 사라는 거예요. 남자가 오해하기를 그동안 여자가 자기한테 굴복했다는 거예요. 세상에 어떤 여자가 남자한테 굴복해. 굴복한 것이 아니고 여자는 아직도 자기 구조에 그 남자가 쓸 만 하다고 생각해서 붙어 산 거예요. 만약 자기 구조에 벗어났다고 하면 자기 구조를 옹호하는 동시에 남자가 아무리 빌고 애원해도 이미 이 구조에서는 하나의 선택 대상으로 전락합니다. 왜냐하면 이제 자기는 여러 남자를 선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혼자 살거냐, 아니면 새로 돈 많은 남자를 만날 것인가. 여러 선택의 기회가 있기 때문에 이혼한 남자에게 돌아가기가 힘든 겁니다.
후보감 중에 하나는 되겠지만 전남편은 한 번 살아봤기 때문에 신선도가 떨어져서 가능성이 희박합니다. 고등어도 신선도가 떨어지면 안삽니다.
현재 있는 구조니까 찢어지면 자기가 너무 많은 피해를 입으니까 안 찢어지는 거지요. 지금 만약 집사님이 이혼했다고 해 보세요. 남편과 다시 살겠습니까? 다른 남자 찾지. 안 그렇습니까?
그러나 남자는 안 그래요. 남자는 여자를 집의 애완견이나 가구로 보기 때문에 이미 익숙해진 가구가 낫다고 생각해서, 그동안 말 잘 듣도록 명령을 코드화 시키는 일이 힘들었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소프트웨어를 깔려고 하니까 보통 일이 아니지요.
그렇지만 여자는 안 그래요. 그래서 남자는 아내를 가끔 사랑하지만 여자는 항상 남편을 사랑해요. 이렇게 서로 코드가 틀려요. 남자는 가끔 사랑하지만 여자는 남자를 늘 사랑해요. 마치 부모 자식 간의 관계와 비슷해요. 자식은 부모를 가끔 사랑하지만 부모는 자식을 늘 사랑합니다. 그것이 바로 아내가 남편을 볼 때 자식처럼 그렇게 생각해요.
어쨌든 오늘 본문에서 구조가 있다는 거예요.
이제부터 그 구조를 설명하려고 하는데 좀 더 계속해 봅시다.
감독이란 직분이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우리 직분이 아니에요. 저는 목사님들 설교를 듣거나 할 때 항상 먼저 보는 것이 뭐냐 하면, ‘목사가 소유의식을 갖고 있는가?’ 하는 점을 먼저 봅니다. ‘내가 설교를 잘 해서 이 교회를 내 소유로 만들어야지.’ 라는 식으로 설교를 하는지, 아니면 ‘내 것은 아예 없다.’ 고 여기고 설교하는지를 봐요.
그래서 유창하고 신학을 동원하고 해도 “아이고, 이 인간아!” 하는 그런 생각이 드는 설교를 보게 되지요. 너 자신을 부인하지 못하면서 뭐 남을 가르친단 말인가. 소유의식을 가지고 남을 가르치게 되면 가르침을 받는 사람은 자기 권력 구조에 소속하게 돼요.
“감독은 가르치기를 잘 하며” 라고 했는데, 이 감독은 소유의 직분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강의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감독은 내가 소유할 수 있는 직분이 아니란 말이지요. 감독, 혹은 목사가 된 사람은 오히려 그 직분의 소유물이 되는 거지요. 목사라는 직책의 소유물이 목사가 되어야 한단 말입니다.
제가 아까 식사할 때 이야기 했잖아요. “나는 내 설교를 못 따라 간다”고. 저는 제 설교를 들으면 겁이나요. 내 것이 될 게 전혀 없어요. 내 것도 아닌 자리를 가지고 남을 가르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지요. 가르치는 것은 감독자가 가르치면 안 되고 감독이 가르쳐야 되지요.
제가 얼마 전에 그런 설교를 했어요. “교회는 목사 중심이지 목사님 중심이 아니다”고. 교회는 장로 중심이 맞는데 장로님 중심은 아닙니다. 그래서 ‘님’을 빼야 돼요. 화평교회는 집사님이 계신데, 교회는 집사 중심이 되어야지 집사님 중심이 되면 안 됩니다. 이 말은 “집사님이여, 집사를 절대로 자기 소유화 시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집사는 술에 인박이지 아니하고” 이 말은, ‘술에 인박이지 말라’고 하는 그 구조에 내가 종속되어야 해요. 술에 인박이고 싶어도 ‘아, 맞아. 내가 지금 소속되어 있는 곳이 집사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에 술에 인박이면 안 돼지. 이건 나쁜 것이지. 내가 나쁘다는 것을 인식하기 위해서 집사가 되었지.’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술에 인박이게 되었으니까 집사 안 할래.’ 가 아니라, 안 하겠다고 하는 것은 자기가 뭔가 소유하기도 하고 소유 안 하기도 하고 자기 마음대로 뭔가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성경에는 그런 집사 직분은 없어요. 집사 직분은 자기가 소유할 수 있는 직분이 아닙니다. 직분이 그 사람을 소유하게 되어 있어요. 감독이 그 사람을 감독자 되게 만들고. 장로가 장로 되게 만드는 자리에요. 그 자리가.
요한계시록에 보면 전 세계에 교회가 몇 군데입니까? 일곱 군데 아닙니까. 일곱 개를 바꿔치기 하는 거예요. 계속. 일곱 교회는 누구의 손에 있다. 주님의 손에 있는 일곱 별이지요. 일곱 별인데, 그 교회의 담당자는 누굽니까? 천사지요. 일곱 천사가 일곱 교회를 담당하고 있어요. 이 말은 일곱 교회는 사람 소유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소유에요.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라는 말은 교회의 소유자가 따로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나는 일곱 교회 안 할래. 나는 우리교회 할래.’ 그러면 그것은 처음부터 교회가 아니지요.
이렇게 제가 설명하니까 감독이나 집사가 부담이 안 돼지요? 오히려 집사 되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해야 돼요. 왜냐하면, 내가 집사라는 직분에 종속된 것이 황공스럽기 때문에. 그리고 나머지 이 모든 성경 말씀도 누가 되게 한다? 주께서 집사 직분을 통해서 그렇게 되게 하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집사님 되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집사님으로 만들어내는 그런 구조에 우리가 놓이게 됩니다. 그래서 “난 안 할래.” 라는 말이 성립이 안 됩니다. 왜? 우리는 어디를 가도 내 소유란 게 없기 때문에.
오늘 학생이 참석을 했는데, 예를 들어서 버스를 탔는데 빈 자리가 있어서 앉았어요. 그런데 그 자리가 경로석이었고 어떤 노인이 버스에 올라와서 “학생, 경로석인데 자리를 양보해야지.” 라고 할 때, 학생이 기분 나빠하면 안 되지요. 성경대로 하면 ‘나는 학생 값도 못하는데 드디어 학생 값을 하게 노인을 보냈구나.’ 노인이 나를 학생답게 만들었어요. 이게 놀라운 기적이란 말입니다.
성도라는 것은 절대로 여러분 소유가 아닙니다. 로마서 6장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세례 받고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니 이제는 그리스도의 것이다.’ 그래서 나의 것이란 없어요. 그리스도의 것이에요. 그리스도의 것은 그리스도가 알아서 책임지고 만들어 내십니다. 어떻게? 그 ‘어떻게’는 우리가 계속 살펴 볼 것입니다.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이런 식으로 주께서 해 내시고야 말지요.
자, 그러면 ‘구약의 제사장과 신약의 감독하고 무슨 연관이 있습니까?’ 라고 궁금해 하는 분들이 많이 있는데, 구약에는 제사장이 있고 신약에는 감독이 있는데, 구약에는 제사장만 있는 게 아니고 백부장, 천부장도 있어요. 그러면 구약의 제사장과 신약의 감독이 만약 같은 직급이라면 교회가 뭐가 되느냐 하면, 이스라엘이 되어야 하고 결국 교회 감독이 무슨 역할을 해야 하는가 하면 왕이 되어야 하고 장로는 신하가 되어야 된다는 그런 논리가, 그런 시스템이 형성 되겠지요.
그래서 제사장을 통해서 구원 받듯이 신약의 사람들은 감독을 통해서 구원 받고 교회 안 다니면 구원 못 받는다는 논리가 성립되는 겁니다. 이것을 누가 주장합니까? 천주교와 감리교. 그리고 요즘은 순복음과 기존의 한국교회 전체가 이렇게 나가지요.
이런 주장을 할 때 천주교가 내세우는 논리가 뭔가 하면, 마태복음 16장을 거론합니다. 베드로 위에다가 교회를 세우고 베드로는 교회 밑의 돌멩이. 그러면 베드로가 교회에 포함되는 겁니까, 베드로와 교회가 따로 입니까? 베드로도 교회에 포함 되지요. 그러면 베드로로 하여금 반석 되게 하신 분이 오늘날 우리로 하여금 교회 되게 하시지요. 원래의 뜻은 그런 뜻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뭐라고 주장하는고 하니, 베드로가 마치 우리를 구원하는 것처럼 주장하는데, 그렇게 해석하는 이유가 뭐냐? 그것은 교회를 소유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소유되지 않으면 이해 안 되는, 납득이 안 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령을 받으면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소유 당함으로 구원 받는데, 이 사람들은 뭔가를 소유해야 돼요. 교회도 소유하고 목사도 소유하고 이렇게 소유를 해야, 직분을 가져야 구원 받는, 그러니까 나의 중보자를 내가 소유해야 된다는 거예요. 이것은 배후에 악마가 역사해서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내가 소유해야 구원 받는다는 말은 결국 악마가 예수 그리스도를 지배하려고 하는 거예요. 이게 오늘날의 교회고 천주교고 오늘날 인간들입니다.
10분 쉬고 두 번째 시간에는 도대체 이 제사장 제도와 신약의 교회 제도가 무슨 연관이 있는가? 이점에 대해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10분 쉬겠습니다.
(2008. 7. 30. 15:30 녹취 마침)
우리교회(IP:220.♡.176.150)
08-08-03 17:25
광주080725b디모데전서3장6절
광주 강의(08. 7. 25) 39-2
지난 시간에 한 것을 한번 정리해 보면, 사람은 원래 자기 것이 없고 원래의 구조가 있고, 그 구조에 적응해서 살아남으려는 것이 인간이지 내 방식대로 내 원하는 대로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걸 누가 아시는가? 하나님이 아세요. 인간이 까불고 설치지만 세상 흘러가는 대로 흘러갈 수밖에 없는 인생이라는 것을.
쟝 보드리아르(프랑스 사회학자)가 이런 이야기했어요. “이 세상에는 모든 것이 상품화 되어있다.” 하나의 예를 들면, 엄마, 여자 국회의원, 여 교사는 하는 일이 다 다르지만 TV 드라마나 세상에서 볼 때는 반드시 예쁜 엄마, 예쁜 국회의원, 예쁜 선생님이 인기가 있어요. 성을 상품화 하는 시대지요. 다른 말로 하면 매력적인 것이 상품이 되는 시대라는 것을 보드리아르는 오늘날의 구조로 보는 거예요.
상품화라는 것이 뭐냐 하면, 사고파는 거예요. 무슨 뜻이냐 하면 반드시 여기에 ‘예쁘다. 좋다.’를 그냥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금액으로 평가합니다. 얼마짜리냐? “인간을 어떻게 돈으로 평가하느냐?” 라고 말들은 하지만, 막상 금액이 매겨지고 하면 거기에 굴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보드리아르의 이런 주장이 상당히 의미 상장한 것이, 분명히 여성으로 보지 말고 그냥 엄마로, 혹은 국회의원으로 또는 약사로 그 사람의 하는일을 통해서 그 사람의 가치를 보는것이 정당한데, 여기에서 ‘예쁘다’는 요소를 뽑아내면 예쁜것이 상품화 되어서 돈이 여기에 몰립니다. 그냥 약사를 하면 밥먹고 살지만, 만약 약사가 노래를 잘불러서 히트를 치면 큰돈 버는 가수가 되는 거예요. 주현미가 그런 경우인데, 그냥 약사만 했으면 큰 돈은 못 벌겠지요.
이 구조를 사람들이 처음에는 거부하지만 잠시 후면 선호하게 돼요. 이런 사람은 이미 구조화 되었어요. 또 이 구조화가 자기의 생활 습관과 정신 상태를 형성하고 말았어요. 교회 오는 것도 교제를 위해서 오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러한 세태를 부수고 하나님께서 바른교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감독자를 세우는 겁니다. 옛날 제사장과 감독의 차이점이 뭐냐? 감독은 자기가 일 안하고, 제사장은 자기가 일을 해야한다는 것이 차이점. 제사장은 자기가 일을 해야되고, 감독은 일은 안하고 감독만 하면돼요.
그럼 뭘 감독하는가? 사도행전 20장 28절을 찾아보겠습니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여기에 감독자 되는데 누가 감독자 되게 합니까? 성령이 되게 하지요. 이게 제일 관건입니다. 성령께서 그렇게 한다는 의미를 알기 위해서 사도행전 5장을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나오는데, 부동산을 팔아서 목돈이 생겼는데 그것을 사도 앞에 헌금이라고 내 놓았어요. 그럴 때 베드로가 뭐라고 합니까? 3절에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라고 하지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땅값 얼마를 감추고 일부를 가지고 와서 전부인 것처럼 하는데, 이것이 누구를 속이는 것인가 하면, 사람을 속이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속이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보면 초대교회는 진짜 교회 맞지요. 가짜 교회는 사람만 있으면 교회인데, 초대교회는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에 계셔서, 사람 속이는 것은 문제가 아니고 ‘성령을 속이느냐, 안 속이느냐?’로 사단이 틈탔느냐, 아니냐를 결정했단 말이지요. 얼마나 무서운 동네입니다.
그 당시 예배당이 컸습니까? 예배당 짓는데 수십억 들었습니까? 예배당이 얼마짜리냐가 문제가 아니에요. 성령이 있어서 사단에 들린 사람을 가려낼 수 있는 교회, 그것이 초대교회입니다. 사람과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직접 상대하는 교회. 보통 무서운 교회가 아니지요?
그런데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교회를 하나의 친목 단체로 생각한 모양이에요. 요즘 교회처럼. 목사도 목사 구실을 못하고 성도도 성도 구실을 못하는 교회. 그래서 모두가 제 마음대로 행동해요. 교회가 사도행전 5장도 모르고 성경 안본지는 오래 되었고.
사람들이 교회 나오는 이유는 처음에는 복 받기 위해서 나왔는데, 나중에는 사랑받기 위해서 나와요. ‘교회 왜 나오는가?’ 그 이유를 알려면 그 사람이 어떨 때 삐치느냐를 보면 알아요. 미움 받으면 삐쳐요. “난 너하고 안 논다.” 이렇게 되거든요. 이런 사람은 처음 교회 올 때부터 교제의 장으로 본 거예요. 결국 사람만 봤지 성령이라든지 사단의 역사는 아예 안중에도 없어요.
노아 방주에 탄 사람은 달랑 한 식구, 8명밖에 없습니다. 지금 이 교회는 8명 이상 되잖아요. 그 사람들이 생각한 것은, 너무 적다든지 자리가 너무 비었다든지 그런 것을 걱정한 것이 아니고, ‘과연 방주가 무사히 새 하늘과 새 땅을 볼 수 있느냐?’ 그것이 관건이잖아요.
교회라는 것이 뭐냐 하면, ‘과연 주님께서 우리 안에 계셔서 주님이 원하는 사람으로 주께서 만들어 내고 계시는가?’ 그게 관건이에요. 다른 사람한테 사랑받기 위해서 오면 안 되고, 성경 말씀대로 집사는 집사, 감독은 감독. 성경 말씀대로 나를 그렇게 만들어 내시는 것을 통해서 정말 주님이 살아 계시는구나 하는 것을 느낄 때, 그게 바로 내가 이미 천국에 와 있는 거예요.
이것이 신약의 교회인데, 구약에는 강제로 실시했어요. 그래서 제사 제도가 무너져야 되는 거예요. 이제 이해되십니까?
신약 시대의 감독이라는 것은, 감독은 분명 사람 맞습니다. 하지만 감독 앞에는 누가 있습니까? 성령님이 계세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감독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누가 중요하다? 성령님이 주도권을 가지고 계세요. 이게 신약 시대의 특징입니다. 신약 시대의 감독 위치는 성령이 시키는 대로 그냥 감독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피를 계속 봐야 돼요. 문설주의 피를 안 보면 그냥 넘어가지를 않으니까.
만약 하나님께서 녹음기를 보고 구원 한다고 하면 내가 녹음기를 소파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러면 항상 관심이 어디에 가 있겠습니까? 화장실에 가도, 방에 가도 항상 녹음기를 생각 하잖아요. 마찬가지로 이걸 감독하는 것이 감독자에요. 아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심판하지 않고 용서해서 그냥 넘어가는 것은 하나님의 피 아닙니까. 그 피를 우리 각자가 다 내 놓았습니다. 그런데 바쁘게 보건소 일 하다보면 잊어버릴 수 있단 말이지요. 또 ‘내가 열심히 잘 하면 복 받을 거야.’ 이런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그러다가 주일 설교를 들으면 “아, 맞아. 문설주에 피를 바르니까 하나님이 그 피를 보고 넘어갔지.” 그 안에 있는 내가 어떤 옷을 입었는지 그런 것은 안 따집니다. 밖에서 피를 보고 넘어갔어요. 안에 들어와서 상태를 본 것이 아니에요.
출애굽기에 죽음의 사자가 찾아와서 ‘여기 몇 명 있습니까?’ 그런 것 조사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그냥 밖에서 피가 발린 것을 보면, 그 안에 누가 있든지, 그 사람이 대머리든지 상관없이 그냥 넘어갔습니다.
그러니까 신약 시대에는 뭘 감독해야 돼요? 각자의 마음속에 주님이 피보고 넘어간다는 생각을 잊지 말도록, 그걸 놓치지 말도록 설교하고 가르치는 일을 감독자가 합니다. 그러면 감독자 지는 별거냐? 지는 자기 생각 안 합니까? 하지요. 그러니까 특별히 감독의 직분이 감독자를 만드는데 성령께서 직분자로 하여금 그 직분을 감당케 한단 말이지요.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술에 인박이면 안 되고,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구타하면 안 되고,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피와 연관시켜서 그렇게 되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모든 감독과 집사의 행실이 피와 연관 되는가?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구약의 제사장 제도를 보는 겁니다. 하여튼 구약의 제사장과 신약의 감독은 다릅니다.
감독은 이미 이루어진 것을 감독하는 거고, 제사장은 감독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뭘 해야 돼요. 자기가 빠지면 일이 안 돼. 감독이 빠지면 다름 사람을 집어넣으면 그만이에요. 내가 감독될 필요는 없어요. 다른 사람이 하면 됩니다. 감독자 없는 교회는 없어요. 다 있는데 내가 꼭 될 필요는 없단 말이지요.
그런데 제사장은 혈통에 의해서 됩니다. 세습제예요. 본인의 신체로 하는 겁니다. 하기 싫어도 안 할 수 없어요. 반드시 해야 합니다. 완전히 강제적입니다. 제사장은 다 같은 집안이에요. 아버지가 제사장이면 아들도 제사장이에요.
레위 가문 전체가 제사 제도를 책임지고 있습니다. 자, 이것은 뭘 의미하는가? 제사장이 혈통으로 된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이 제사장 같은 사람만 구원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전체를 혈통적 근거로써 구원해 내는데, 이들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겁니다. 아들이라는 말은 아버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혈통적인 아들 사이를 구축하겠다. 그리고 그것만 구원이 되고 나머지는 구원이 안 된다.’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해 보면, 하나님이 선택한 나라, 집단 빼놓고는 구원이 없다.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제사장입니다. 그러니까 제사장은 왜 혈통이냐? 아버지가 선택 받았으니까 아들은 자동적으로 선택 받는 거예요.
제사장의 특징이 뭐냐 하면, 아버지로 인하여 내가 제사장이 되는 거예요. 아버지가 이스라엘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이스라엘 사람 되는 거예요. 이 전체가 하나님께서 어떤 특정 민족만을 따로 구원하고 나머지는 저주한다는 강한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구약의 제사장은 어쩔 수 없습니다. “너 왜 성이 김씨니?” 이건 어쩔 수 없어요. 아버지가 김씨니까. 이것이 구약 제사장의 특징입니다.
구약의 제사장은 신약의 감독과 연결되는 것이 아니고,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이라’(벧전2:9) 신약은 구원받은 성도 전체가 제사장입니다. 교회가 어떻게 구원 받았습니까? 어쩔 수가 없는 거예요. 우리 아버지가 “너는 내 아들이다.” 라고 하니까 아들이 된 거예요. 간단하지요. “네 아버지는 누군데?” “하나님”.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구원 되어야 한다는 것을 구약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거예요.
그런데 이 사실을 모르게 되면, 사람들은 교회가 있으니까, ‘내가 구원 받기 위해서는 교회 가야지.’ 마치 자기가 선택해서 교회를 가서 기독교란 종교를 가져서 구원 되는 줄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종교 취미생활이고 교회가 교제의 장으로 보는 겁니다. 구약의 제사장 제도에 의하면 이런 사고방식은 용납이 안 됩니다.
교회 오는 것을 동창회 참석하는 것처럼, 꼭 갈 필요는 없고 재미있을 것 같으면 가고, 별 도움 안 될 것 같으면 안 가고. 마치 사교단체 회원 가입한 것 같아요. 요즘 젊은 사람들이 교회 올 때 그런 마음으로 와요.
가을에 우리교회 어떤 집사님이 건의를 해서 중고등학생들 세례 받도록 하자는 건의가 있었어요. 저는 좋다고 했습니다. 세례를 안 하겠다는 것도 우습고, 강제로 세례를 하겠다는 것도 우스운데 교인들이 원한다면 세례 하는 것도 좋잖아요. 예배 시간이 11시인데, 12시로 하자고 하면 12시에 하면 되지요.
그런데 “세례를 받도록 합시다.” 라고 했을 때, 그 세례 받는 주 대상은 중고등학생이거든요. 그런데 이 건의를 학생들이 하는 것이 아니고 엄마들이 건의를 하는 거예요. 이건 무슨 뜻인가 하면 ‘목사님께서 우리아이 세례만 주면 제가 책임지고 신앙생활 잘 하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나중에 교회와 멀어져도 세례 받은 세례 교인이라는 것을 상기시켜서 다시 교회로 돌아올 수 있는데, 세례조차 안 받았으면 교인이라고 인정도 안 할 것이고 ---’
뭔가 세례교인이란 것이 하나의 도장처럼 빼도 박도 못하고 도장처럼 꽉 찍어주는 운명의 낙인처럼 그렇게 강제로 하기 위한 조치인지, 진짜 믿음 좋아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어쨌든 부모가 건의를 했어요.
자, 부모 뜻이 그렇잖아요. 좋아요. 그러면 학생들 뜻도 그렇습니까? ‘우리 어머니가 세례 받으라고 하니까 나도 세례 받고 싶다.’ 왜? ‘부모의 지시가 있었고, 나는 부모의 자식이거든요.’ 이렇게 되면 좋겠는데, ‘다른 것은 내가 부모의 뜻을 따르겠지만 교회 가라고 하는 것은 안 따르렵니다.’ 이렇게 되면 부모의 말을 어기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한테는 아버지가 없는 거예요.
밥해주고 돈 주고 빨래해주는 부모님밖에 없지 진짜 아버지가 없는 거예요. 이런 신앙은 없습니다. 자기가 알아서 구원 받는 신앙도 없고, 반드시 신앙은 아버지가 “너는 내 아들이야. 그래서 빼도 박도 못하고 영원히 천당에서 함께 살아야 돼.” 라는 그 아들, 딸 외에는 다른 신앙인은 없습니다. 이게 이스라엘 방식입니다.
주께서 골라야 돼요. 그래서 요한복음 15장 16절에 보면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것이 바로 선택론입니다. 아버지가 이미 나를 아들로 간주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 증거 하나가 뭐냐? 제사장은 빼도 박도 못하게 어쩔 수 없이 한번 제사장 되었으면 그 가문은 대대로 제사장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하는 일은 피를 내고 재물을 잡는 일을 해야만 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제사장입니다.
감독은 아니죠. 감독은 자기가 일하는 것이 아니고 감독을 해야 되고, 제사장은 자기가 제사 지내야 구원 받는 거예요. 그런데 히브리서 7장 11절을 보면,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 (백성이 그 아래서 율법을 받았으니)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좇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별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뇨.” 라고 했어요.
레위 집안은 담당이 뭐다? 제사 담당. 제사 담당하라고 레위 지파를 세웠는데, ‘만약 그것이 진짜 그래서 구원되고 그래서 백성이 되는 거라면 또 다른 집안 유다 집안 멜기세덱을 세울 필요가 있었겠는가?’ 하고 묻는 거예요. 이 말은 ‘레위 집안 세운 것은 가라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장난쳤어요. 우리 하나님이 장난을 쳤어요. 실컷 제사 지내라고 해 놓고, “욕봤다. 그런데 그건 가짜거든.” 이렇게 나와요. 그러면 왜 이렇게 하실까요? 진짜는 인간이 뭘 해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전에 열심히 인간이 하도록 한 것입니다.
하나님: “열심히 했나?”
백 성: “열심히 했습니다.”
하나님: “많이 했나?”
백 성: “많이 했습니다.”
하나님: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온전하지 못하거든”
백 성: “온전하지 못한 것 왜 시킵니까?”
하나님: “온전하지 못한 것 말고 온전한 것은 따로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했다.”
로마서 3장 21절을 봅시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노선이 두 개입니다. 하나님이 시켰어요. 율법을 지키며 살아라. 십계명도 주고 제사 제도도 주시고 해서 그렇게 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이거 아니거든” 율법 외에 한 노선이 있어요. 이것은 우리가 아무것도 한 것이 없어요. 이 노선은 예수님 홀로 하셔서 저쪽 노선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 노선이 온전치 못하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백날 뭘 해도 내 행한 것으로 절대 구원이 안 된다.” 이것을 확실히 해 놓고, “지올 갈 거지?” “예, 지옥 갑니다.” “진짜 지옥 가는 거 맞지?” “맞습니다.” 저는 이것을 이번에 발간할 책에 이렇게 섰습니다. ‘하나님의 무시’ 라고. 하나님께 무시를 당해야 돼요. 모욕을 받아야 하고, 굴욕을 당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어느 정도 굴욕을 당해야 하는가 하면, 설교하고 내려오는데 “(손가락으로 목사 얼굴을 밀면서)네가 목사야?” 이런 식으로 모욕을 당해야 합니다. 이 정도로 굴욕 당해야 해요. 텐트 쳐놓고 FTA반대 집회하는 곳에 찾아가서 “이런 것 하는 것이 주의 뜻입니까?” 라고 하니까 “너 어느 교단의 목사야?” 하면서 굴욕 당했지요. 축복 받은 줄 아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무시당해야 됩니다. “하나님, 내 인생 왜 이렇게 꼬이게 하십니까?” “더 꼬아 볼까?” 무시당해야 됩니다. “왜 내가 몸이 아픕니까?” “더 아프게 해 줄까?” 철저하게 모독당하고 굴욕적으로 무시를 당해야 됩니다. 왜? 이 노선에서 내가 할 것은 처음부터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 ‘율법 외에 한 의’와 네가 한 일을 한 번 비교해 보라는 겁니다. 네가 한 짓과 예수님이 하신 일과 한 번 비교해 보란 말이지요. 어느 노선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지. 로마서 3장에 보니까 ‘율법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고, 의에 이르지 못하더니 하나님께서 어떤 분을 준비하사 이분께서 피를 흘렸는데, 하나님께서 그 피를 보시고 저쪽에 있는 피 발린 인간들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다.’
피 흘려 죽으신 분이 누구냐? 바로 아들이에요. 우리는 뭐냐? 아들 아니고 양자입니다. 양자의 자격으로 아들 덕분에 우리가 구원 받는 겁니다. 이것을 감독하는 것이 감독자입니다. 그리고 제사장은 뭘 합니까? 쓸데없는 짓을 열심히 하는 겁니다. 그 쓸데없는 짓을 누가 시켰습니까? 하나님이 시켰어요. ‘너는 어쩔 수 없이 이 일을 해야만 한다.’ 이게 히브리서 7장에 보면, 제사를 담당하는 레위 지파가 열심히 제사를 드려야 됩니다. 왜? 그래야 구원 받으니까. 그런데 그것이 성경에 보니까 온전하다, 온전치 못하다? 온전치 못한 거예요.
못된 시어머니가 며느리 길 드린다고 “예야, 밥맛이 없다. 된장찌개 끓여라.” “어머님, 된장찌개 했습니다.” “치워라. 맛없다.” “잡채 해라.” “잡채 했습니다. 잡수시지요.” “이게 고무줄이야 뭐야? 갔다 버려라. 나는 미역국 먹고 싶다.” “어머님, 미역국 끓여 왔습니다.” “이게 뭐야? 짜서 못 먹겠다.” 오는 족족 다 거절할 때 철저하게 시어머니께 무시당하지요. 그래서 더 이상 못살겠다고 보따리 챙겨서 “어머니 안녕히 계십시오.” 하고 작별 인사를 할 때, “여기 주문한 음식 들여와라.” 그 때 각종 요리들이 쫙 들어오면서 “먹어라. 이것은 네가 한 것이 아니라 내가 한 것이다.”
철저하게 우리 인생이 망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기독교의 허상]에서 “목회자는 목회에 망해야 구원 받는다.”고 섰어요. 목회자가 목회 성공하면 그 사람은 자기가 가치 있는 인간인줄 착각하기 때문에 큰일 납니다. 목회에 망해야 됩니다. 저는 지금 계속 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인생이 망해야 돼요. 여기 우리 어여쁜 딸들 인생이 망하기 바랍니다. 망해야 구원 받습니다. 망해야 하나님의 그저 주는 사랑으로 구원 받는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꾸 내가 잘나서 구원 받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이제 제사장의 역할을 알겠지요?
쓸데없는 짓을 열심히 해야 하는 것이 제사장입니다. 감독은 이미 다 해 놓은 것을 느긋한 마음으로 감독하는 일. 확연한 차이가 있지요. 감독하는 것이니까 자기가 일하는 것은 아니지요.
본문으로 돌아와서 3장 2-3절 봅시다.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근신하며 아담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치 아니하며”
이것은 바로 성령께서 감독자를 이런 식으로 만들어 나가시면서 감독케 하는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정작 감독이 해야 될 일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 중요한 일이 세상적인 것으로 비방 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하는 겁니다.
자, 그러면 어떤 사람이 이런 것을 실천에 옮길 수 있을까요? ‘술 끊은 사람.’ 아니죠. ‘절제 잘 하는 사람.’ 아니죠. ‘잘 가르치는 사람.’ 아니지요. ‘구타하지 않는 사람.’ 아닙니다. 한꺼번에 다 지킵니다. 정신을 오직 복음에만 팔면 세상적인 것에 대해서 관심이 없지요. 24시간 복음만 생각하는 사람이 남을 구타할 생각이 나겠습니까? 24시간 복음만 생각한다면 돈을 사랑하겠습니까? 안 하지요.
자, 그렇다면 이것이 그렇지 않고, 이것을 억지로 해 보려고 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게 바로 6절에 나오는데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마귀가 하나님께 정죄를 당했는데, 마귀가 정죄당한 이유가 뭐냐? 교만해서 그렇다는 거예요. 마귀가 무식한 것이 아닙니다. 마귀는 똑똑해요. 그런데 뭐가 문제입니까? 교만이지요. 교만이란 말이 무슨 뜻입니까? 관심이 자기한테 있는 거예요. 감독자는 누구한테 관심이 있습니까? 복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있는 반면에 마귀는 자기에게 관심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마귀 들린 인간은 전부다 관심이 누구에게 있는가 하면, 자기 자신의 자존심에 있어요. 자존심이 있으면 교만해 질 수밖에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결국 게임이고 경쟁이기 때문에.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할 때 자꾸 예수님 자신에게 관심을 두도록 했잖아요. “예수야, 너 배고프지? 예수야, 너 위대한 사람 되고 싶지? 예수야, 네가 온 세상을 갖고 싶지?” 자꾸 ‘너의 소유, 너의 능력, 너의 재주’ 거기다 관심을 두는데, 예수님은 관심을 어디에 둡니까?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말씀으로 산다.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관심사가 하나님께 있고 그분의 말씀을 생각했지 ‘내가 얼마나 가졌느냐?’ 그런 생각 한 적이 없단 말이지요.
화평교회가 마귀 들렸다고 생각한다면 ‘화평교회 교인수가 얼마며, 헌금이 얼마며’ 이렇게 되면 이건 진짜 마귀 들린 겁니다. 그런데 생각해 봅시다. 세상에 어떤 하나님이 숫자보고 천당 보내고 합니까.
이번에 나올 [피]라는 책에 보면 이런 것이 있습니다. ‘끝이 고통스러우면 전부다 고통스럽다.’ 어떤 뜻인가 하면, 끝을 우대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젊은 시절 잘났고, 잘 먹고 잘 살아도 어느 한 순간에 아프다면 과거에 잘 나간 것이 자신의 아픈 것을 경감하지 못합니다. 아픈 것은 아픈 것입니다. 마지막 때 아프다면 과거가 아무리 멋있고 화려해도 지금 아프면 다 아픈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지우개로 자꾸 과거를 지워 나가요. ‘나는 이런 일 했다.’고 돌아서면 벌써 다 지워졌어요. 하나님은 자꾸 죽음이란 지우개로 지우기 때문에 현재 달랑 남아있는 것은 현재가 어떠한가 하는 것만 남아있지 과거는 아무 소용없어요. 지금 내가 아프면 전부 다 아픈 거예요.
마귀는 계속해서 관심을 우리 자신에게 두도록 해요. 우리 자아가 있으면 경쟁에 나서요. 그러니까 여기에 마귀가 와서 “네가 승리해야지. 남에게 패하면 되겠니?” 이렇게 자꾸 유혹을 하니까 자연적으로 교만해 질 수밖에 없지요. 교만한 자는 감독자가 될 수 없습니다. 교만한 자가 감독이 되면 뭘 감독합니까? 자기의 목사직을 감독하지요. “나는 목사다. 어디 감히 나에게 대들어? 목사의 권위를 무시하면 안 돼.”
‘주님은 이렇습니다. 주께서 피 흘리셨습니다.’ 이런 말해야 되는데, 만날 자기만 쳐다보는 거예요.
[피]의 내용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희생의 피가 우리 마음 판에 적시면 우리는 다만 고개를 숙일 뿐이다.” 마치 욥처럼 ‘내 손으로 입을 막을 뿐입니다. 내가 뭘 하나님께 따지고 요구할 것이 있습니까? 다만 입을 막고 조용히 있겠습니다.’ 라고. 욥이 초반에 ‘왜 내가 고난 받아야 합니까?’ 하고 자기에게 관심을 갖다가 나중에 진짜 하나님이 폭풍가운데 나타나니까 더 이상 자기 생각은 못하게 됩니다.
‘똑똑하다. 잘한다.’ 이런 것이 소용없습니다. 주님의 피를 보지 않고 다른 것을 쳐다보면 그것이 다 교만입니다.
6절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라고 했는데, 처음 교회 온 사람들의 특징이 뭐냐? 교회에서 경쟁을 하려고 합니다. ‘내가 신앙이 어느 정도 될까?’ 이런 식으로. 우리의 모델은 목사가 아니고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마귀의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하라고 합니다. 교회는 주님 쳐다보는 것이지 내 사랑 받기 위해서 교회 오는 것이 아닙니다.
8절에 보면 “이와 같이 집사들도 단정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어요. “목사님, 감독과 집사 중 누가 경건빨이 셉니까?” ‘감독은 수준이 더 높아야 되고, 경건의 수준이 완벽에 가까워야 하지만 집사는 그 정도 안 돼도 되잖아요?’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어요.
감독이나 집사나 어떤 인간도 이걸 할 수 있는 사람은 없고, 하나님이 원하는 교회는 이런 수준이어야 한다는 것을 감독을 통해서 집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겁니다. 교회는 성령님께서 우리를 이런 식으로 이끄신다는 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이런 수준이 안 되니까 집사 사표 내겠습니다.’ 이렇게 하지 말고, 이렇게 되게 하십니다. 본인이 안 하고 싶어도 되게 하는 겁니다. 엄마 안 하고 싶어도 어린 아기가 울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