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7월 21일 강의 차이와 반복 - 들뢰즈
대구 7월 21일 강의 차이와 반복 - 들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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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721 차이와 반복 - 들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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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7-21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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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9-07 17:10
대구080721차이와반복-들뢰즈
08 대구강의 10 - [차이와 반복] 질 들뢰즈 저, 김상환 역, 민음사(서울: 2005)
08,07,21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삭제된 된 것을 복구하라 !!
들뢰즈가 말하기를, "사람의 얼굴과 머리는 다르다" 라고 주장했는데, 무슨 말이고 하니, 사람의 얼굴에는 시선이 머무는 하나하나에 예민하게 다 드러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진과 같이 그렇게 박혀있는 것에는 그것이 살아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공부할 들뢰즈가 쓴 '차이와 반복' 이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인데, 이 책은 자기의 박사학위논문으로서, 그러니 당연히 어렵다는 말이다. 서울대학교 교수인 김상환씨가 고생을 해서 번역했고 말이다. 이 책을 대하면서 사람들이 제일로 힘들게 생각하는 것이 다음과 같은 점인데, 한번 살펴보자.
만약에 우리가 어떤 대상을(?) 하나의 개념화를 시켜버린다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까, 예를 들어서, "이것이 저 사람의 머리이다(?)" 라고, 그렇게 개념화를 시켜버리게 되면, 이러한 개념화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보이지 않는 어떤 후광과 같은 것이, 동양철학의 기(氣)라고 보면 되는데, 그것이 삭제가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없어져버리면 개념화만이 남게 되고, 그것이 법이 되어서 중간에 있는 것은 그만 다 날아가 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껍데기만 남게 되는데, 그런 점에 대해서 들뢰즈는 주장하기를, 그렇게 삭제된 것을 찾아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 '자아'로 굳혀진 그것은?
이것을 더 쉽게 이야기하면, 사람이 자기 과거를 생각하면, 즉 '나' 라는 인간에게 있어서, 1982년에서 2008년까지를 생각한다면, 그것이 자기의 과거, 현재, 미래가 되어서, 즉 개인의 역사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중학교 때부터 지금까지의 기억이 자기의 역사가 되어버리면, 그것이 그만 자기의 '자아'로서 굳혀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자아로 굳혀지게 되면, 밖에 있는 것들이, 즉 다른 사람이 자기를 평가하는 것이라든지, 자기에게 상처받고 떠난 여자라든지, 아니면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든지, 그런 것들은 모두가 다 떨어져나가고, "나는 여기서부터 여기까지이다" 라고 하는, 그런 범위 안에서만 자이를 구축하기 때문에, 그것은 결국 거짓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필요한 것만 새롭게 촬영해서 그것만 골라서 과거를 설정하고, 또한 자기가 기대한 것만 골라서 미래를 설정하게 되니, 그렇게 해서 "내가 누구인가?" 라고 하면, "현재의 나는 이렇다" 라고 해버린다는 것이다.
◈ 들뢰즈 - 아리스토텔레스의 '동일성'은 싫어 !!
들뢰즈는 이렇게 자꾸만 개념화시키는 것을 '동일성' 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고대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나왔는데, 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동일성을 강조하고 개념화시켰다는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이렇게 이름이 있다고 하는 것은, 그 이름에 걸맞지 않은 것은 모두 삭제한 상태에서의 이름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최고급 시계인 로렉스를 차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 사람은 지금 롤렉스를 차고 있기 때문에 만원 짜리 시계는 자기에게 없는데, 그렇게 되면 만원 짜리 시계는 자기밖에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기와는 상관이 없어지고 말이다.
◈ 주위의 도움 없이 글도 하나 못 쓰면서 !!
그러나 들뢰즈에 의하면, 그렇게 상관이 없다고 하는 것 자체가 거짓이란 말이다. 이 세상에 그렇게 상관이 없는 것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제가 이렇게 글씨를 쓰고 있는데, 만약 실내온도가 50도라고 하면 글씨를 쓰겠는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에이, 더워서 못쓰겠다" 라고 하는데, 그런데 다른 사람이 "그 글씨는 누가 썼습니까?" 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예, 제가 썼습니다" 라고 할 것인데, 그러나 그게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글씨를 쓸 때 누가 도와주었는고 하니, 날씨가 적당하게 글씨를 쓰도록 도와주었기 때문에 자기가 글씨를 쓸 수 있었기에 말이다.
지금 제가 하는 말이 맞지 싶은데, 그렇지 않은가요? 이렇게 글씨를 쓰는 것도 모두가 우주의 보이지 않는 도와줌, 뒤에서 바쳐줌, 만들어줌 등, 그런 것들이 있는데, 그런데 "내가 무엇을 했다, 한다, 하고싶다" 라고 하는 순간에, 그 모든 도와주는 관계성은 다 싹둑 싹둑 잘라나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해놓고, "이것은 내가 글씨를 썼다, 그렸다, 하고싶다" 라고 했을 때, 그것은 명령으로 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내가 이렇게 글씨를 썼으니 옳지 않는가? 그러니 무조건 수용을 해라" 라고, 그렇게 상대방에게 명령조로 이야기를 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지금부터 이런 점에 대해서 설명을 해드리도록 하겠는데, 아까도 말했지만 사실 이 '차이와 반복'이 참으로 어려운 책인데, 물론 여러분도 쉽다고는 기대를 하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만약 쉬울 것 같으면 이렇게 어렵게 시작하지 않는데, 그러니 오늘은 조금 참을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 아이는 부모로부터 명령을 배워 !!
예를 들어서, 부모와 어린아이의 경우에, 부모와 아이가 서로 의논해서 무엇을 하는가? 아니면 부모가 시키는가? 당연히 부모가 일방적으로 시키는데, 즉 명령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부모가 아이에게 밖으로 나가서 놀라고 말이다. 심지어 강아지에게 "여기서 오줌을 누면 안돼. 밖에 나가서 해" 라고, 그렇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강아지도 밖에 나가서 볼일을 본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이 아이는 부모에게서 무엇을 배우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화하는 방법을 배운다고 하는데,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 라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을 배우는가? 명령하는 법을 배운다는 말이다. 명령을 말이다. 그렇게 어린아이는 부모로부터 명령을 배우게 되는데, 그러한 명령이 곧 언어체계가 된다는 것이다.
◈ 인간은 명령과 명령 속에서 !!
인간은 어릴 때부터 명령이 없이는 되는 경우가 없는데, 명령이 있어야 일이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 어린아이는 어른이 되어도 어떤 체계 속에 있는고 하니, 명령으로 된 언어체계를 배웠고, 그래서 어른이 되어도 남들에게 훈계를 하듯이, 그렇게 명령으로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들이 다 그렇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하늘에게서 비가 온다고 하면, 자기는 제 아무리 "아, 비가 온다" 라고 해도, 옆에 있는 사람은 길에 자기가 떨어뜨린 동전에 관심이 있는데, 다른 사람이 주우면 안 되니까 말이다. 그래서 동전을 줍는 것이 중요하지, 하늘에서 비가 오는 것은 그 다음 문제라는 말이다. 그러니 그 순간에는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각자 각자의 관심사에 몰두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만약에 하늘에서 비가 오지 않고, 길에 동전을 떨어뜨리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멍청하게(?) 있을 때는 이 세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가? 그렇지가 않은데, 인간은 멍청하게 있을 때도 반드시 어느 하나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말이다.
◈ 성경에도 이런 일들이 !!
이것이 철학의 문제가 아니라 성경에서도 중요한데, 바리새인들은 관심이 어디에 있는고 하니,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있는데, 즉 방금 말한바와 같이 하자면, 바리새인들은 길에 떨어진 동전을 줍는데 관심이 있는데, 그런데 예수님은 "아하, 하늘에서 비가 오는구나"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서로 의사소통이 될 리가 없다는 말이다.
예수님이 설교만 하고 가만히 있었으면 죽을 리가 없는데, 예수님이 먼저 꼭 들이대고 결국은 성전을 뒤엎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뒤엎을 때는 반드시 명령을 하시는데, "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 아니고, 그 집은 내가 3일만에 짓겠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신의 명령이고, 하늘의 명령이라는 말이다.
◈ 인간에게는 각자 나름대로의 진리가 !!
오늘날 교인들이 이런 하늘의 명령인 말씀을 기피하는 이유는, 모두들 자기 나름대로의 명령체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인데, 그래서 주님의 명령체계가 들어올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말씀이 오히려 자꾸만 퉁겨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집사님, 지난주에 교회에 왜 못나왔습니까?" 라고 하면, "예, 바빠서 그랬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나는 바쁘다" 라는 것이 자기 나름대로는 자기에게 진리라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농사를 짓는 사람이라면, 지금 가을철이 되어서 몹시 바쁜데, 그래서 일요일 11시에는 도저히 교회에 나갈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사람에게는 농사짓는 것이 진리가 되는데,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집사님, 농사를 왜 짓습니까?" 라고 해도, 그 사람은 농사를 지어야 자기가 구축이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현재의 자기를 구축하기 위해서 과거에서 필요한 것을 끌어 모으는데, 물론 과거의 모든 것을 다 모으는 것이 아니라 취사선택을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미래에 대해서는, 지금 빨리 햇빛이 뜨거울 때 어떻게 손을 좀 봐야 내일 시장에 나가서 물건을 내다 판다는 것이다.
왜 구약의 선지서에도 보면, 어떤 사람이 그만 안식일이 되어서 장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즉 빨리 물건을 모두 다 팔아야 하는데 그만 밑지게 생겼다고 군지렁거리면서 불평하는 장면이 나온다는 말이다. (어디에??)
◈ 들뢰즈 - 그놈의 욕망 때문에 !!
그러니 그런 미래와 과거가 있어야, 그것이 자아가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들뢰즈가 이 '차이와 반복' 이란 책에서 주장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 자아가 바로 개념화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개념화는 일방적인 동일성을 추구하는데, 그 동일성이 자기 이름이 되고 명예가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기까지는 그 중간에 무수히 많은 것들이 삭제가 되는데, 그동안 도와준 햇빛과 공기, 또 다른 모든 관계들을 차단해서 너무 너무 일방적으로 자기 중심으로 본다는 것이다. 여기서 들뢰즈는 이런 개념화를 만들어내는 원흉을 '욕망'으로 본다는 말이다.
이렇게 사람들이 그냥 무심코 말하는 것을 철학자들은 놓치지 않는데, 아무튼 들뢰즈는 층을 두 개의 층으로 나누는데, 먼저 밖에 자아의 층이 있는데, 이 자아는 언제나 과거가 없이는 자아가 없고, 현재가 없이는 자아가 없고, 또한 미래가 없이는 자아가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자아는 이렇게 모두를 끌어 모아야 하는데, 그러므로 미래에 뭔가가 되고 싶다는 것은, 현재의 자아가 과거의 누적된 기초 위에서 소망이라는 것이 나온다는 말이다.
◈ 남녀 메이져대회 동반우승도 가능 !!
1라운드 1등, 2라운드 1등, 3라운드 2등, 4라운드 19등, 이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이번에 치러진 미국 골프 PGA의 최경주 선수의 게임 스코어인데, 그때 신문기사가 3라운드까지는 무엇이라고 나왔는고 하니, "골프, 최초로 남녀 메이져대회 동반우승도 가능하다" 라고 했는데, 그러면 사람들은 어디에다 집중을 하는가?
여기서 '집중' 이라는 말은, 바늘을 가지고 한 구멍을 뚫는다는 뜻인데, 그러면 최경주 선수의 팬들의 입장에서는 하나로 집중이 되는데, 그렇게 되면 나머지들은 모두가 삭제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독도문제도, 촛불집회도 잠시 잊어버리고 말이다. 그런데 그 미래가 현재가 되어보니 19등을 하고 말았는데, 그러면 사람들이 하는 말이 "내 그럴 줄 알았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 들뢰즈 - 인간 내면의 흐름도 살펴야 !!
이것이 '개념화' 라는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그런데 사람들이 왜 이렇게 개념화를 추구하는고 하니까, 그 내면의 밑바닥에는 욕망의 흐름이 있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살펴보고자 라는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 이라는 박사학위논문은 무엇을 이야기하는고 하니, 바깥의 그것도 흐름이지만, 내면에 있는 것도 역시 흐름이라는 것이다.
바깥의 흐름은 개념화가 되고, 그 개념화는 동일성에 의해서 나오는데, 그 동일성은 바로 과학이라는 것이다. 바깥은 그렇게 과학인데, 그래서 물리적, 즉 물질의 구체화라는 것이다. 하지만 반면에 욕망은 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데 현대 철학에 이르기까지 정신과 물질, 혹은 영혼과 신체라고 할 수 있는 이것을 결합시키지를 못했다는 것이다.
데카르트에 의해서 이것이 분리되고 난 뒤에, 지금까지 제대로 합친 철학자가 없었다는 말이다. 물론 여러 사람이 여기에 대해서 합치려고 시도는 했었지만, 그러나 결코 그것이 서로 전혀 결합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격상 결합이 안 된다는 말이다.
◈ 볼펜을 하나 돌려도 !!
예를 들어서, 이렇게 손으로 볼펜을 돌린다고 하면, 그것을 물리학적으로 설명하면, 에너지가 근육을 움직이는데, 그렇게 해서 그때 원심력의 법칙에 의해서 돌아가는데, 즉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는데, 그것이 곧 과학이란 것이다. 그런데 정신 쪽에서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그것이 돌든지, 혹은 돌지 않는 것은 나의 의지에 달렸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서로 대화가 되지 않는데, 즉 철학자들이 "그렇게 내가 돌리고 싶어서 돌리겠다고 하는데, 당신이 왜 그리 말이 많은가?" 라는 것이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뭐라고 하는가? 백날 그렇게 마음속으로 한번 돌려보라는 것이다. 과연 그것이 돌아가는지, 안 돌아가는지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실제로 볼펜이 있고 해야 돌려도 돌리는 것이지, 백날 생각만으로 그렇게 하는 것은 전혀 돌리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꿈이데, 물론 꿈에서는 자기 마음대로 되고, 또한 절벽에서 뛰어내려도 날 수가 있지만, 그러나 현실에서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냐는 말이다.
◈ 精神一到何事不成 ??
그래서 과학에서는 이러한 정신을 헛방(?)이라고 보는데, 그렇게 정신을 바짝 차리면 반도체가 생산이 되고, 그렇게 해서 어떻게 컴퓨터가 만들어지고 비행기가 만들어지느냐는 것이다. 그런 얼토당토 않는 소리는 하지 말라는 말이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 철학을 하는 사람들은 말하기를, 처음에 어떻게 상상하지 않고 그런 물건들이 나올 수 있었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겨우 한다는 소리가, 19세기 때는 인간의 의지에 의해서 필요한 것을 끌어 모아서 물건이 나온다고 했다는 말이다. 인간의 의지에 의해서 말이다.
그러니 당연히 형상이 먼저인데, 그 형상이 질료(물질)을 만나서 드디어 사물이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명한 예화가 나오는데, 여기에 이렇게 청동이 있으면, 처음에는 그것이 물질인데,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조각가가 어떤 자기의 아이디어를 집어넣어야만 진짜 제대로 된 작품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형상과 물질이 그렇게 합쳐져야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와서 그렇게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여기서 말하는 의지나 욕구라고 하는 것은, 두뇌의 에너지 작용이라는 것이다. 정신이 아니라 에너지의 작용이란 말이다. 그러니 그렇게 물질이 있는데, 거기에 정신이 수반된다는 말이다.
◈ '수반이론'을 주장한 한국출신의 철학자는?
이 '수반이론'의 대가가 한국출신인데, 지금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 아무개 박사라고, 지금 생각이 잘나지 않는데 말이다. (혹시 김재권 박사가 아닌가?) 지금 미국에서는 분석철학이 대세인데, 그 양반이 주장한 수반이론은, 항상 수반은 그림자처럼 실체가 가는 곳에 따라오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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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재권 (金在權, 1934~) - 한국 태생의 미국 철학자. 동양인 최초로 미국철학회 회장을 지냈고 브라운대학교 철학과 석좌교수 등을 역임하고 있다. 심리철학에서 독창적이 '심신수반론'을 제시했다. 또 결함을 인정하고 '기능적 환원주의'를 내세워 '심적 인과의 문제'를 새롭게 제시했다. 1934년 대구광역시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불문학과를 거쳐 미국 다트머스대학교에서 철학·불문학·수학을 전공한 뒤, 프린스턴대학교 대학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이후 미국 스와츠모어대학교·코넬대학교·존스홉킨스대학교·미시간대학교 등에서 철학을 가르쳤다. 미국철학회 동부지역 회장과 동양인으로는 최초로 미국철학회 회장을 지냈고, 2001년 현재까지 미국 학술원 정회원, 프랑스 국제철학학술원 정회원, 브라운대학교 철학과 석좌교수 등을 역임하고 있다. 특히 그는 심리철학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인 심신관계 모델의 이론적인 결함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심신수반론'이라는 자신의 독창적인 이론을 제시하고, 30여 년 간 이 이론을 발전시키는 데 주력해 왔다. 또 자신이 주장하는 '심신수반론'에도 치명적인 결함이 있음을 인정하고, 이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으로 '기능적 환원주의'를 내세워 '심적 인과의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룸으로써 세계 철학계로부터 기존의 연구성과를 뛰어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00년 KBS 해외동포상(학술 부문)과 2001년 서우철학상을 받았고, 주요 저서로는 《수반과 심리 Supervenience and Mind》(1993), 《심리철학 Philosophy of Mind》(1996), 《물리계 안에서의 마음 Mind in a Physical World》(1998) 등이 있다. -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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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학계는 완전히 이원론(二元論) !!
그렇다면 한국(?) 신학계에서 뭐라고 하는가? 그들은 여기에 대한 아무런 대책도 없이 완전히 이원론인데, 즉 정신 따로, 물질 따로 라는 것이다. 결합하려고 해도 할 수 없는데, 기껏 아이디어를 주장해봐야 기존의 철학에서 이야기한 것을 다시 되풀이하고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학 자체가 플라톤 철학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둘 다 같은 이원론이니 말이다. 즉 이 세상은 모방이고 이 세상의 원형은 이상세계에 있다는 것이다.
◈ 들뢰즈 - '흐름'을 놓치지 말자 !!
하지만 들뢰즈가 이야기하고 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러한 바깥의 과학과 인간 내부의 욕망이, 즉 이러한 두 가지 모두가 다 '흐름'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흐름에서 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 흐름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그것은 물론 흐름 덩어리에서 나온다는 말이다. (흐름 덩어리??) 이해가 잘 되지 않는가요?
예를 들어서, 세숫대야에 이렇게 물이 들어있는데, 그것을 제 아무리 흔들어도 그것은 세숫대야 안에 들어있는 흐름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우주' 라는 것도 갇혀있고, 그렇게 갇혀있는 것을 흔들어버리면 말할 수 없는 변화가 생기게 되는데, 그런 변화 중에서 하나가 인간이고, 개이고, 원숭이고, 등등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이야기를 들으면 마치 대승불교에서 주장하는 것과도 비슷한 것 같은데, 불교에서는 물질을 버리고 정신을 주장하게 되고 말이다. 그런데 들뢰즈가 보기에 이 불교의 문제점이 무엇인고 하니, 불교에서는 말하기를, 그냥 가만히 있으면 해탈이 되지 않고,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고 하는데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들뢰즈가 보기에 웃기는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데, 만약 정신을 집중해서 될 것 같으면 그것도 역시 하나의 개념화가 되는데, 그러니 그런 개념화를 부수기 위해서 정신집중을 해야 한다는 것은 전혀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 불교의 모순 - 길가는 사람에게 왜 시비를?
지금 이 불교의 허점이 무엇인고 하니까, 예를 들어서, 여기에 이렇게 빨간 매직이 있는데, "이 매직의 뚜껑을 어떻게 열 수 있겠는가? 오른쪽으로 돌린 것인가? 아니면 왼쪽으로 돌릴 것인가?" 라고 한다면 어떻게 대답할 것이냐는 말이다.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 "병 속에 있는 새를 어떻게 꺼낼 것인가?" 라는 것인데,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소위 '화두(話頭)' 라는 것인데, 고참스님이 신참스님에게 그렇게 질문한다는 말이다. 모르면 한 대 때리려고 옆에 몽둥이(?)가 놓여있고 말이다.
불교에서는 이렇게 새가 있고 병이 있다는 것 자체를 하나의 집착으로 보는데, 바로 이러한 집착을 벗어버리면 병도 없어지고 물론 새도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해답인데, 하지만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산 속에서 도사에게 교육을 받을 때나 나올 수가 있는 사상이지, 평소에 집에서 자기 자식새끼들을 돌보면서 신랑을 감시하며(?) 살아가는 일상의 아줌마들에게 이런 생각이 들겠는가? 전혀 그렇게 않다는 말이다.
이것이 곧 불교의 모순인데, 그냥 길을 걸어가는 사람을 괜히 붙잡아놓고는, "어이 당신, 정신집중을 해야지"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 사람은 전혀 그럴 마음이 없는데 말이다. 그러니 그것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냐는 것이다.
◈ 들뢰즈의 고민은, 어떻게 해탈을 !!
그래서 들뢰즈에게 있어서 지금 문제가 어떻게 해탈을 하느냐는 것인데, 물론 불교도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해탈도 하지 말라고 하지만 말이다. 즉 "마음을 직관적으로 알아라" 라고 해놓고는, 나중에 "그 마음조차도 버려야 한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마음 판을 버리게 되면 무엇인가가 나온다는 말이다.
이렇게 불교는 자기들도 모르는 것을 괜히 쑤셔 가지고는 생쇼(?)를 한다는 것이다. 모르는 것은 그냥 모른다고 하면 되는데, 괜히 자기들끼리 난리를 친다는 말이다. 그것은 바로 제가 보기에는, 중들이 그냥 편안히 먹고 놀려고 하는 짓으로 여겨지는데,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미안하니 말이다. 그야말로 땡중들이 하는 짓이라는 것이다.
◈ 들뢰즈 - 개념화된 것을 두고 진리라고 하면 곤란 !!
하지만 들뢰즈의 입장은 무엇인고 하니, 과학이든 불교이든 종교이든 간에, 그냥 그대로 인정하자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인정하는 이유가, 그 모든 것이 인간의 욕망에서 나온 하나의 개념화이니, '있음' 자체는 나쁘고 좋고 할 문제가 아니라, 다만 그렇게 개념화된 것을 두고서 "진리가 이것뿐이다" 라고 하는 것이 나쁘다는 말이다.
제가 아까도 말했지만, 사람이 글을 하나 쓸 때도 태양의 영향을 받고, 달의 영향을 받고, 심지어는 바다의 영향도 받게 되는데,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모두 삭제해버리고는 뭐라고 하는가? "이 글은 내가 썼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 '차이와 반복' 이라는 책을 보면, 모든 신학을 다 포함하고 있어서 마치 조직신학을 다룬 책처럼 보이는데, 물론 철학자들의 눈에는 그런 것이 보이지를 않겠지만 말이다. 저는 그래도 신학을 했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이 제 눈에는 정말이지 두꺼운 신학서적처럼 보이는데, 물론 조금 있기는 하지만 신학적인 용어는 거의 쓰지 않으면서, 신학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모두 다 언급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 책이 너무 어렵기 때문에 사람들이 읽지를 않는데, 아무튼 쉽게 하기 위해서 대략적인 것을 먼저 알려드렸는데, 감을 좀 잡았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제 교재를 한번 살펴보자.
** 차이의 반대말은 동일자이다. 모든 것을 균등하게 보자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차이'의 반대말로서 '반복'을 이야기하는데, 무슨 말인고 하니, 반복이란 동일한 것이 한다고 여긴다는 말이다. 그러나 들뢰즈는 이 책에서 주장하기를, 그런 것은 반복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같은 것을 되풀이한다고 하는 것은 엉터리인데, 왜냐하면 이 세상에 같은 것이 없기에 그렇다는 말이다.
◈ 사도바울은, 왜 십자가가 현재 진행형인가?
지금부터 이야기하는 부분은 들뢰즈의 주장이 아니라 제가 책을 보면서 단 일종의 주석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예를 들어서, 십자가가 분명히 한 사건인데, 그래서 그때 십자가 사건이 있었다면 앞으로는 이 십자가 사건이 없다고 보아야 하는데, 하지만 사도바울에 의하면 십자가 사건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에게 있어서 제일 어려운 점이 이것인데, 이미 십자가가 지나간 과거인데 그런데 사도바울은 여전히 이 십자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동일성의 철학에 의하면, 십자가를 이야기했으면 그 다음에 부활을 이야기해야 하는데, 즉 부활의 세계 속에 놓여있다고 말이다.
그렇게 되면 부활의 세계에 십자가가 포함이 되어서 십자가의 시대는 끝나야 하는데, 지금은 부활의 시대이니 말이다. 또 성령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인데, 그런데 사도바울은 계속해서 이 십자가를 이야기하고 피를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피란 인간의 시체에 들어있는 액체인데, 그 액체가 어떻게 스스로 움직이느냐는 것이다. 참으로 이상하지 않는가?
예수님의 피를 믿으라고 했다고 해서, 그 당시 예수님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를 지금은 구경도 할 수 없고, 찍어 바를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히브리서에서는 그 피를 짓밟는 자는 용서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계속해서 그 피를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 성만찬 - 피의 영속화 !!
그래서 중세철학에서는 이 피를 영속시키려고 하는 방법 중 하나로서 성만찬화사켰다고, 그렇게 본다는 것이다. 오스카 쿨만이 그렇게 주장하는데, 중세 천주교에서 그렇게 만들었다는 말이다. 이 피가 실체인데, 그것이 계속해서 실체가 되기 위해서 대용실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대용실체가 포도주이고, 또 살을 대용하는 것이 떡인데, 그렇게 해서라도 계속해서 실체를 유지해야만 하는데, 만약 실체가 되지 않으면 쯔빙글리의 주장처럼 하나의 상징에 불과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상징이 되면 문제가 무엇이 문제가 되겠는가?
예수님께서 "이것은 내 몸이다. 그리고 피이다" 라고 했으면, 거기서 '이다' 라는 것은 동일성 개념에 의해서 동일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피를 상징하고 살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바로 피이고 살이다" 라는 말이다.
◈ 만약에 상징이라면, 택배회사는 어디로?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상징이 되어버리면, 예수님의 피로서 구원을 받는다고 할 때, 그 피가 우리에게 전달될 때 그 매개체가 모호해져버린다는 것이다. 즉 그렇게 되면 교회가 있을 이유가 그만 없어진다는 말이다. 그 피를 받아서 사람들에게 전달해야 될 매개체로서 교회인데, 지금까지는 그렇게 우겨왔는데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피가 그만 상징이 되어버리면, 그 피가 스스로 알아서 구원받을 사람에게 가기 때문에, 그 중간에서 피를 전달하는 택배회사(?)가 그만 필요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미쳤다고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겠는가? 문제는 교회인데, 장사가 안 되니 큰 일이라는 말이다.
◈ 성만찬 - 성령에 의해서 피로 된다 !!
바로 이런 점을 루터와 칼빈도 알았는데, 그래서 타협점을 내놓았는데, "성찬식의 포도주가 예수님의 피이다" 라는 것이 아니라, "피가 된다" 혹은 "피로 변한다" 라고 말이다. 그냥 변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성령을 집어넣는다는 것이다. '변한다' 라고 하면 화체설이 되는데, 아무튼 피가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이, "성령께서 포도주나 떡이 없으면 일을 하지 않는가?" 라는 것이다. 또 다른 질문은, "포도주나 떡이 우선인가? 아니면 성령이 우선인가?" 라는 것인데, 즉 "성령은 떡과 포도주가 없으면 피를 전달할 수 없는 무능한 분인가?" 라는 것이다.
성령께서 "아, 어디 떡이 없나? 나는 저 사람을 구원하고 싶은데" 라고 하겠느냐는 것이다. 과연 그러한 분이 성령님이 맞느냐는 것이다. 개혁주의는 이러한 사실을 알았는데, 성령으로 구원받는다고 하면 침례교가 되어버리는데, 성령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피로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 들뢰즈 - 이런 단순한(?) 놈들을 봤나?
그런데 들뢰즈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논쟁자체가 전부 개념화와 동일성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이렇게 개념화를 시켜버리면, 이것이 법이 되는데, 하지만 법은 양쪽을 다 잘라낸 다음의 법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들뢰즈의 입장에서 제일 열 받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분명히 하나의 개념을 이야기하면, 무수히 많은 파이프가 연결이 되어서 그런 개념이 형성되었는데, 사람들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그러한 개념화의 주체는 어디서 나왔는가? 아까 지하에는 누가 흐르고 있다고 했는가? 자아가 있고, 그 밑에 욕망의 흐름이 있는데, 하지만 사실은 자아는 없고 욕망의 흐름만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욕망의 흐름조차도 시간에 저촉을 받는데, 그래서 들뢰즈는 이 책 마지막에서 시간조차도 벗어버리는 해탈을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렇게 개념화를 시키기 위해서 자아가 있고, 그 자아를 다듬어서 법이 되어버리면, 사람들은 이 법에서 자동적으로 힘이 나온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자동으로 말이다. 바로 이러한 점에 대해서 들뢰즈가 매우 속이 상한다는 것이다.
◈ 이 쟁반 위의 과자는 누구 꺼?
예를 들어서, 이렇게 쟁반에 과자를 담았다면, 쟁반에서 과자가 나온 것이 아니라 담아놓은 것인데, 그런데 사람들은 이 쟁반이 없으면 과자가 아닌 줄로 안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 쟁반을 누가 만들었는고 하니, 자기가 만들었는데, 그래서 쟁반 안에 있는 과자는 과자이고 쟁반밖에 있는 과자는 과자가 아닌 줄로 안다는 것이다.
이것과 분위기가 비슷 무리한 말이 있는데, 혹시나 들어보았는지 모르겠는데, "내가 하면 로맨스이고, 남이 하면 불륜이다" 라고 하는 말이다. 아마 여러분은 전혀 이런 경험이 없지 싶은데, 로맨스의 그런 짜릿함을 말이다. 물론 천 목사님은 빼고 말이다.
교회에서 남을 사랑하고 배려해주어야 한다고 하는데, 세상에서도 마찬가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것이 들뢰즈에게는 또 웃기는 이야기인데, 남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자기가 여기에 있는데, 백 날을 사랑해봐야 그 사랑의 주체가 자기인데, 자기가 그렇게 다가가 봐야 사랑한다는 것을 빌미로 남을 점령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 나는 너를 사랑한다 ??
그러니 "나는 너를 사랑한다" 라는 것은 그 사람을 침략하는 것이고 잡아먹는(?) 것인데, 사랑의 이름으로 말이다. 그래서 자기 사랑을 받아주지 않으면 죽여버리고 말이다. 그런 일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는가? 참아서 그렇지 우리도 다들 경험한 것이 아니냐는 말이다. 그러니 도대체 남을 어떻게 사랑하느냐는 것이다.
◈ 들뢰즈 - 근본적으로 '자아'가 사고뭉치 !!
그러니 들뢰즈는 주장하기를, 근본적으로 자아가 있으면 반드시 개념화가 되고, 그 개념화가 법으로 인식이 되는데, 그런데 사람들은 그 법이 있으면 그 법에서 뭔가가 나온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생각이 너무나 일방적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일방적이기 때문에, 분쟁과 침략과 다툼이 생기고, 서로 잡아먹으려고 하고, 이용해먹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너를 사랑했는데, 너는 왜 나를 사랑하지 않는가?" 라는 식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들뢰즈는 도대체 그것이 무슨 사랑이냐는 것이다. 오히려 자기 영역의 확장에 불과한 것이란 말이다. 차라리 사랑을 하지 않을 때는 그래도 좋게 보았는데, 하지만 사랑을 하고 나니 점점 더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다.
◈ 어느 목사의 어설픈 심방 이야기 !!
교회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목사가 교인들에게 관심을 덜 가질 때는 조용한데, 그런데 폼을 잡고 심방을 한다면서 찾아가서 분잡스럽게 하고, 또 어림도 없는 상담을 한다면서 자녀문제에 개입을 하는데, 그러면 집사는 또 이 목사가 전문가인가 싶어서 이용을 하고 말이다. 그렇게 해서 관계가 깊어지면(?) 말이 많아지는데, 또 그렇게 되면 실수가 생기게 마련이고, 그렇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교회에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차라리 처음부터 가만히 두었으면 인사나 하면서 잘 지낼 것인데, 그런데 성도와 아픔을 같이 한다고 하면서, 성경대로 서로 돌보아준다고 하면서, 좋은 것을 서로 나누고 말이다. 그렇게 말씀을 실천한다고 하면서, 괜히 개입을 해서 틀어지게 만들고 말이다. 젊은 청년들의 경우에도, 처음에는 잘 다니다가 서로 사귀면 그 다음부터는 삐쳐서 교회에 안 나온다는 것이다.
◈ 개념화는 내게 맡겨라 !!
이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모든 것이 개념화인데, 이렇게 어떤 개념을 잡아서 자기 세계관을 가지고자 하는 그 자체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인간 세상의 모든 문제점들이 생기는데,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것을 정당화시킨다는 것이다. 과학의 이름으로, 철학의 이름으로, 또한 윤리와 도덕으로 이름으로 말이다.
하지만 들뢰즈가 보기에는, 그런 것이 도저히 옳은 것이 아닌데, 전부가 다 삭제되고 일방적인 것인데, 니체는 이 전체를 하나의 힘의 의지, 즉 권력의 의지로 보았다는 말이다. 바로 이러한 모든 개념화와 정당화가 다 권력에 대한 의지, 즉 집착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너는 내 편이 아니라면 적이다" 라는 것인데, 자기에게 굴복하지 않으면 다 적이라는 것이다.
◈ 인간이 어릴 때부터 배운 것은, 명령체계 !!
왜냐하면, 인간은 어릴 때부터 그런 명령을 받으면서 명령체계 속에 살았기 때문에 그런 언어체계가 갖추어지는데, 그래서 남에게 이야기를 할 때도 명령조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배운 것이 그것이니 말이다. 그것이 바로 니체에게는 '권력에의 의지' 라는 것이다.
"나에게 무릎을 꿇어. 그렇지 않으면 놀지 않아" 라고 하는데, 그러면 상대방은 "일단은 무릎을 끓을게요. 그러니 같이 놀아주세요" 라고 하면서 이용을 해먹고 말이다. 그래서 고린도전서에 보면, 서로 속이고 속기도 한다는 것이다. 사기를 치는 사람도 먼저 사기를 당해본 사람이 하듯이 말이다. 자기 상처를 보상받으려면 사기를 쳐야 보상이 되는데, 그렇게 해야 서로 평형감각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사기를 치고 또 당하고 말이다.
◈ 들뢰즈의 철학은 용광로 ??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이 들뢰즈의 철학은, 지금까지의 철학, 심리학 등, 그 모든 것을 다 녹여놓았다는 것이다. 기존의 철학이나 심리학과 같은 것들은 전부가 다 개념화라고 할 수 있는데,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동일성이고 말이다.
이렇게 나오면 그쪽에서 뿔따구가 나는데, 너무 많이 치니 기분이 나쁘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는 말이, "니는 뭐야?" 라고 하면서 나오는데, 즉 "당신은 이 세상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라는 말이다. 지금까지의 모든 것이 아니라면,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냐는 것이다. 즉 "들뢰즈 당신의 말대로 라고 하면, 이 세상은 다 개념화가 되고 나쁜 것밖에 없는데, 그러면 도대체 진리는 무엇인가?" 라는 말이다.
◈ 들뢰즈 - 바로 '시간'이 있잖아 !!
여기서 들뢰즈가 내어놓는 것이 곧 '시간' 인데, 들뢰즈는 바로 이 시간을 통해서 문제를 풀겠다는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자아가 모두 동일화가 되어버리면, 그 어떤 시간이라고 해도 여기에 있는 동일화에 '집중'이 된다는 것이다.
프로이드는 이 집중을 다른 말로 뭐라고 했는데, 아무튼 프로이든 무의식 가운데 언어의 구조가 은유와 환유로 되어있다고 했는데, 여기서 환유는 대치를 이야기하고, 은유는 집중인데, 프로이든 이 집중을 다른 말로 무엇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비슷한 말인데 말이다.
아무튼 이 우주는 시간을 배태하는데,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예를 들어서, 바다에서 수증기가 올라오고, 이 수증기는 지구가 자전을 하면 태풍이 되고 하는데, 그렇게 수증기가 올라오듯이 모든 흐름 속에서 시간이 피어난다는 것이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유일한 표현은 시간밖에는 없는데, 왜냐하면 모두가 변화하니 말이다. (??)
◈ 시간마저도 '나'에게 집중시키니 !!
지금 제가 하는 말이 너무 어려운가요? 사람들은 우주가 내뱉는 이 수증기, 즉 시간을 누구에게 집중시키는고 하니, 자기를 위한 시간으로 모아버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인간의 자아는, 그 시간을 자기가 끌어다 모아놓고는, 시간에 따라 다른 '나'를 구성하고, 또 그리워하게 된다는 것이다. 욕망에 의해서 말이다.
지금 제가 하는 소리가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요? 일방적으로 그렇게 끌어다 모아놓고서는, "나는 앞으로 10년 뒤에 무엇이 될 거야" 라고 한다면, 그것은 마치 자기가 시간에 순응하는 것처럼 마치 위선을 떨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것은 10년 뒤가 되어도 자아를 그대로 가지고 가겠다는 것인데, 100년이 흘러도 그렇고 말이다.
심지어 인간은 이렇게 자기가 처음에 야구를 좋아하다가 나중에는 축구를 좋아하게 되어도, 그래도 자아는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즉 그렇게 동일성의 내용은 달라도 동일성은 그대로 유지하겠다는 것이다. 동일성 자체는 말이다.
◈ 들뢰즈 - 원(原) 시간의 흐름을 타라 !!
여기에 대해서 들뢰즈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제발 시간을 자기의 시간으로 보지 말고, 즉 '나'를 위한 시간으로 보지 말고, 시간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라는 것인데, 그렇게 해서 자기도 원래 그 시간의 흐름을 타면 된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들뢰즈의 책 '차이와 반복'의 하이라이트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지금 엉터리 시간은 자기 중심의 시간인데, 그러나 그 시간 말고 진짜 시간이 있는데, 그러나 그 진짜배기 시간은 자기가 일방적으로 생각한 시간 때문에 가려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 라는 동일성이 나쁘다는 것을 알고, 그 '나' 라는 동일성을 해체시켜버리고, 원래 시간의 흐름 속에다 '나'를 맡기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들뢰즈는 '해탈'의 경지라고 하는데, 그래서 불교는 아니지만 불교 비슷하게 되는데, 즉 시간마저도 초월하는 세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이 교재에서는 너무나 어렵기 때문에 간단하게 설명을 해놓았는데, 3페이지를 한번 살펴보자.
◈ 시계소리가 '똑'과 '딱' ??
** 시계 소리를 '똑 딱'의 반복으로 일반성을 구축하는 것이(술어의 대립) 정신 활동이며, 이 활동은 뭐든지 종합하기 위한 활동이다.
이렇게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면, 우리들은 '똑'과 '딱' 이라는 서로 다른 문자를 사용해서 표현하지만, 그러나 실제로는 시계라는 기계에 있어서 똑같은 주파수라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앞의 것은 '똑'으로 보고, 뒤의 것은 '딱'으로 이야기한다는 말이다. 이것을 '흄'이 이야기했지 싶은데, 베르그송은 해체하는 의미에서 '똑', '똑', '똑'으로 보았고 말이다.
그렇게 자기 마음대로 '똑'과 '딱'으로 잘라놓고는, "나는 이 세상이 이렇다는 것을 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사실은 '똑'과 '딱' 이 차이가 없는데, 자기가 임의로 그렇게 차이를 만들어놓고는 말이다. 그러면 왜 그렇게 끊어버리는가? 그것은 바로 그렇게 하는 것이 자기에게 편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나에게 편하다" 라는 것은, 또 하나의 개념화이고 동일성이란 말이다.
◈ 들뢰즈 - 라이프니츠에 의하면 !!
그렇다면 아까도 말했지만 "들뢰즈, 당신은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라는 것인데, 그렇게 남을 공격만 하지 말고 그 대안을 한번 내어놓으라는 것이다. 그것이 듣고 싶다는 것인데, 여기에 대해서 들뢰즈는 제시하기를,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라이프니츠의 철학을 동원시켰다는 것이다.
라이프니츠의 철학이 무엇인고 하니, 그의 주장은 스피노자와는 다른데, 스피노자의 주장은 "인간의 모든 것은 그림자이고, 실체는 신밖에 없다" 라는 것인데, 이 자연자체가 능산적(?) 자연인데, 자연이 만들어낸 여러 가지 사물을 소산적(?) 자연이라고 하고 말이다. 자연 자체를 신으로 보는데, 그래서 신 자체만이 실체이고 나머지는 다 그림자라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안개' 라는 표현이 그렇다는 말이다.
왜 인간을 그림자인고 하니, 실체라는 것은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아야 하는데, 즉 동일성을 유지해야만 실체인데, 그런데 인간은 모두 다 해체되어 없어지니 실체가 아니고, '없어짐'이고, 또한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라이프니츠의 주장에 의하면, 그렇게 되어버리면 무엇이 문제인고 하니, 신께서 우리 인간을 사랑하고 사물을 유지한다는 것이 그만 깨어진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이나 사물이 그림자가 아니라 실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는가?
◈ 인간은 그림자가 아니라, 주름이 !!
그것은 스피노자가 말한 것처럼 인간은 그림자가 아니라, '쟁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왜 장독이 오이지가 차곡차곡 재여 있듯이, 또 목재가 차곡차곡 쌓여있는 것도 그런 것인데, 아무튼 그렇게 주름이 져있다는 것이다.
◈ '변화'는, 주름진 실체가 벗겨지는 것 !!
그렇게 쟁여되고 쌓여져서, 즉 주름이 져있다는 것은 그림자가 아니라는 말인데, 즉 허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변화' 라고 하는 것은, 그런 주름진 실체가 한꺼풀 한꺼풀 그 모습을 시간에 따라서 비로소 드러내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인생이고, 사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사물마다 쟁여되어 있는 것이 다르다는 말이다.
그런데 모든 것이 실체가 되어버리면 무엇이 문제인고 하니까, 그만 악(惡)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악도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서 쟁여되어야 하는데, 그러니 악도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존재한다는 의미에서는 선이 된다는 말이다.
◈ 라이프니츠가 예정 조화설을 주장하는 이유는?
이것을 '예정 조화설' 이라고 하는데, 즉 모든 것들이 다 예정이 되어있으며, 그러므로 그 모든 것들은 필요에 따라서 있어야만 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라이프니츠의 '예정 조화설' 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라이프니츠가 이런 주장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스피노자나 데카르트처럼 "이 세상은 아무 것도 아니다" 라고 하면 안 되고, "모든 것이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 라고 하는, 그것을 믿자는 말이다. 잡초라고 보기에 좋고, 원숭이도 보기에 아름답다는 것이다. 자기가 인간이 안 된 것을 한탄하는 그런 원숭이는 없다는 말이다. 원숭이도 원숭이대로 실체이고, 하나님의 예정조화에 의해서 다 그렇게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 라이프니츠 - 동일성은 썩 꺼져 !!
그리고 라이프니츠에 의하면 무엇이 필요 없는고 하니, 이 '동일성'이 그만 깨어진다는 것이다. 여기서 '식별불가능의 법칙' 이라는 것이 있는데, 즉 "식별이 불가능하면 동일자로 보자" 라는 말인데, 그것은 바로 무슨 의미인고 하니, "그런 존재는 이 세상에 없다" 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식별이 불가능하다면 동일자는 없다는 것인데,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은 동일한 것은 없다는 말이다. 또한 그런 동일한 것이 없으니까, 큰 동일성 속에 작은 동일성이 포함될 이유가 있는가? 없다는 것이다. 즉 원숭이가 사람이 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원숭이 하나, 인간 하나가 다 하나님의 조화인데, 그렇게 쟁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을 '모나드', 즉 '단자(單子)' 라고 하고 말이다.
◈ 들뢰즈 - 이 세상은 긍정적이야 !!
이러한 라이프니츠의 예정 조화설에 의하면, 그는 이 세상을 무척이나 긍정적으로 보는데, 무척이나 말이다. 한탄스럽게 보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 그래서 들뢰즈의 철학은, 너무 너무 긍정적인데, 여기서 긍정이라는 말은, '기쁘다' 라는 것인데, 즉 철학을 할 때 이런 기쁨과 보람이 없이 도대체 무슨 철학을 하느냐는 말이다.
이 세상을 연구할 때, 니체처럼 "아, 너무 허무하다. 자살을 할까?" 라고 해버리면, 까뮈나 쇼펜하우어처럼 말이다. 그렇게 자살론과 허무주의가 나오는 이유가, 이 세상을 너무 동일성으로 보기 때문인데, 그 동일성이 곧 권력이고, 그 동일성은 큰 동일성 밑에 작은 동일성을 두고서 지배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이론이 '진화론' 이고 말이다.
◈ 진화론 - 큰 형님에게 다 들어와 !!
이 '진화론' 이라는 것은, 큰 형님 속에 작은 똘마니들을 포함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니 철저한 인간중심이고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인간이 되기 위해서 원숭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온 유명한 시(詩)가 있지 않는가?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서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어야 했다고 말이다.
그런데 라이프니츠의 이론에 의하면, 이 소쩍새가 웃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소쩍새가 운 것은, 자기 속에 울어야 한다는 것이 쟁여되어 있기 때문인데, 그것이 시간을 따라서 그렇게 벗겨진다는 것이다. 소쩍새가 시도 때도 없이 우는 것이 아니고, 때와 시간에 따라서 우는 것이니 말이다. 그렇게 울고 나서 국화꽃이 피었다면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이렇게 바다에서 수증기가 피어오른다고 한다면, 'A' 라는 지점에서 수증기가 피어오르는데, 그때 저쪽 'B' 라는 지점에서도 피어올랐다면, 그것이 서로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말이다.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 라이프니츠 - 제발 있는 그대로 좀 내버려둬 !!
그러니 라이프니츠의 철학은 무엇인고 하니, "제발 있는 그대로 좀 내버려둬라" 라는 것이다. 그것도 하나님의 예정 조화론에 의한 하나의 단자, 즉 하나님의 작품이니 간섭을 하지 말라는 말이다. 만약에 간섭을 하게 되면, '나'의 동일성 속에 그 간섭받는 자의 동일성을 집어넣으려는 것밖에 더 되느냐는 것이다. 즉 침략하고 함락시키려는 것이고, 곧 게임에서 승리하려는 인간의 욕망이지 않느냐는 말이다.
지금 들뢰즈가 인간의 이기주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큰 긍정에서 볼 때에 그런 사소한 부정적인 것은 모두 다 포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들뢰즈가 그 정도의 배포는 되는데, 그러니 들뢰즈가 교회에 다니지 않는 이유를 알 수 있는데, 그의 신학수준을 어느 목사가 극복하겠느냐는 것이다. (??)
◈ 지금부터 십자가 이야기를 !!
지금부터 십자가 이야기를 좀 해보면, 이것은 들뢰즈의 주장이 아니라, 제가 이 '차이와 반복' 이라는 책을 통해서 풀어보겠다는 말이다. 지금 제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지요?
들뢰즈는 절대로 같은 것을 반복할 수 없다고 하는데, 자연은 시간에 준해서 같은 것을 반복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만약 같은 것을 반복하면 시간이 무용지물이 되니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같은 것을 반복하면 시간은 흐르나마나 라는 것이다.
여기에 이렇게 책이 있는데, 만약에 이 책이 30분 뒤와 1시간 뒤가 서로 동일하다면 적어도 이 책에서는 시간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지만 엄밀히 조사해보면, 이 책이 30분만큼은 늙은(?) 것인데, 즉 낡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책을 평가할 때 30전의 책과 30분 후의 책이 차이가 나니까, 어느 것을 기준으로 해서 "이것이 책이다" 라고 평가를 내릴 수 있느냐는 말이다.
◈ 토마스 아퀴나스 - 평균을 내서 인간을 !!
여기서 대해서 중간정도로 평균을 잡아서 결정하자는 것이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인데, 즉 인간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평균을 잡아서, 즉 중간쯤 되는 사람을 인간으로 보자는 것이다. 이것을 토마스 아퀴나스는 '형상' 이라고 했는데, 그렇게 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닌 것이 되는데, 왜냐하면 예수님이 중간정도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았다는 말이다.
◈ 라이프니츠 - 십자가 사건은 쟁여된 것 !!
라이프니츠에 의하면 십자가 사건은 쟁여된 것인데, 즉 쌓여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시간에 따라서 한 꺼풀씩 펼쳐질 때에, 그것을 들뢰즈는 이 책에서 '반복'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반복은 반드시 차이를 가지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책이름이 '차이와 반복' 인데,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그렇게 차이를 느끼고 있는 것은 반드시 반복이 된다는 말이다.
상당히 역설적인 주장인데, 우리는 보통 반복이라고 하면, 일단 원형이 있고, 그 원형을 복제를 해서 반복이 되는데, 그렇지요? 그런데 만약에 차이가 난다고 하면 우리는 반복이 아니라고 여기는데, 우리는 보통 차이가 나면 '새롭다' 라고 하면서, 창조성을 발휘했다고 하지, 그것을 두고서 누가 '반복한다' 라고 하느냐는 말이다.
◈ 들뢰즈의 핵심은, 곧 '차이의 반복' !!
그런데 들뢰즈는 이러한 차이를 두고서 반복이라고 함으로서 모든 기존의 동일성을 모두 다 쳐버린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반복이 없이 차이가 난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원형이 있다고 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니 차이가 나는 것은, 마치 원형하고 다르다고 하는 의미처럼 느껴지는데, 그러니 마치 원형이 있는 것처럼 여겨지게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 들뢰즈의 반박은 '차이의 반복' 이라는 것이다. 책이름은 '차이와 반복' 이지만, 사실상 그 내용은 '차이의 반복' 이라는 말이다. 바로 이것을 이야기하려고 지금까지 힘들게 왔는데, 그것이 바로 '차이의 반복' 이란 것이다. 그러면 왜 '반복' 이라는 말을 사용하는가? 그것은 곧 '양푼이 속의 물' 이기 때문인데, 즉 기존의 에너지가 밖으로 새지 않고 변화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이것을 십자가에 적용을 시켜보면, 사도바울이 눈앞에 십자가가 보인다고 할 때, 만약에 그의 주장을 동일성을 주장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사도바울, 니가 그 피를 보았나? 예수님의 혈액형이 A형인가? B형인가?" 라고 할 것인데, 그러니 십자가를 이야기함에 있어서 자꾸만 실체를, 즉 개념을 들이댄다는 것이다.
◈ 사도바울은 들뢰즈 편 ??
하지만 사도바울은 그런 식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의 피가 믿어지는 사건의 반복으로 본다" 라는 것이다. 그 사건은 사람마다 차이가 나는데, 그래서 '사건들' 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게 차이가 남에도 불구하고 오직 한 곳으로 바라보는데, 즉 "나는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없다" 라는 것이다. 자기가 구원받는 것은, 오직 십자가의 공로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다. 바로 이것을 지적할 수 있는 것이 들뢰즈가 말한 '반복' 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들뢰즈의 주장과 개혁주의와의 차이점은 무엇인고 하니, 개혁주의에서는 십자가가 이미 하나의 개념화가 되어버렸는데, 즉 일종의 법이 되어버렸다는 말이다. 그래서 성만찬이 동원되고 말이다. 그렇게 십자가가 개념화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이것의 문제점은, 사실 십자가가 아닌 것이 없는데, 십자가가 따로 있는 것처럼 여기게 한다는 말이다.
◈ 역시 한경직 목사는 위대해 !!
쉽게 예를 들어보자면, 어떤 목사가 말하기를, "역시 한경직 목사는 위대하구나" 라고 했다면, 그렇게 한경직 목사가 위대하다고 했을 때, 그 사람은 차이가 없는 반복을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그렇지요?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 그 사람이 참으로 훌륭했다" 라는 것인데, 그렇게 한경직 목사가 훌륭하다는 인식과 그때 한경직 목사가 일치된다는 말이다.
◈ 들뢰즈- 차이가 없는 반복은 NO !!
그러니 차이가 없는 반복인데, 이것을 들뢰즈는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십자가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말인데, 즉 "예수님, 그때 참으로 훌륭했지" 라는 것은 십자가가 아니라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그때 예수님께서 훌륭했다고 하는 그 십자가 말고, 지금 당신 속의 십자가는 과연 무엇인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가? "저는 죄인이며,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니면 구원받을 길이 전혀 없습니다" 라고 해야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를 이렇게 만든 것은 예수님의 새언약의 체계가 작용해서 그렇게 된 것인데, 물론 들뢰즈에 의하면 '새언약'이 아니라 '자연'이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우리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바로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아서 구원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어린양의 피로 말이다.
◈ 그런데 사람마다 쟁여된 것이 달라 !!
그런데 이것이 사람마다 같은가? 아니면 다른가? 물론 사람마다 다른데, 왜냐하면 사람마다 쟁여된 것이 다르니 말이다. 그러니 지옥에 갈 사람들은 쟁여된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십자가 같은 소리를 하네. 예수님이 뭐꼬?" 라고 하면서 십자가를 모독할 것이고, 즉 그런 쟁여된 것이 나온다는 말이다. 그렇게 이단이 설쳐야 하는데, 즉 악마가 복음을 방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마지막 때에 믿음을 보겠는가?" 라고 하셨고 말이다.
◈ 기존신학은, 개념화시켜 법으로 !!
다시 정리해보면, 기존의 모든 신학의 바탕이 무엇이 되는고 하니, 우리는 성경을 이야기해야 하니, 철학보다는 신학이라고 하는 것이 바람직한데, 즉 "과거에 훌륭했었다. 그것을 우리가 본받아서 지금 현재 우리가 훌륭히 되자" 라고 하는 것을 성립시키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하는가? 과거에 훌륭했던 그것을 개념화시키고, 그 개념화된 것을 법으로 만들어서, 그리고 그것을 모방하든지 해서 그런 영향을 계속해서 이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 그러나 슐라이에르마허나 가다머는?
여기에 대해서 슐라이에르마허나 가다머와 같은 새로운 해석학을 주장하는 철학자들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기존의 사도바울이 훌륭했다는 것과 현재 자기의 훌륭함과는 밑바닥에는 서로 통하는 것이 있다고 하는, 그런 이론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즉 과거에 예수님이나 사도바울을 바치고 있던 바탕과 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