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상 1: 5-28 (한나의 서원제)
삼상 1: 5-28 (한나의 서원제)
이름 : 우리교회(IP:220.81.176.141)
본문 : 사무엘상 1장 5-28절
제목 : 한나의 서원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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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08-07-20 15:53
한나의 서원제
(삼상 1:21) 『그 사람 엘가나와 그 온 집이 여호와께 매년제와 그 서원제를 드리러 올라갈 때에』
(삼상 1:22) 『오직 한나는 올라가지 아니하고 그 남편에게 이르되 아이를 젖 떼거든 내가 그를 데리고 가서 여호와 앞에 뵈게 하고 거기 영영히 있게 하리이다』
(삼상 1:23) 『그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그대의 소견에 선한 대로 하여 그를 젖 떼기까지 기다리라 오직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이에 그 여자가 그 아들을 양육하며 그 젖 떼기까지 기다리다가』
(삼상 1:24) 『젖을 뗀 후에 그를 데리고 올라갈새 수소 셋과 가루 한 에바와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가지고 실로 여호와의 집에 나아갔는데 아이가 어리더라』
(삼상 1:25) 『그들이 수소를 잡고 아이를 데리고 엘리에게 가서』
(삼상 1:26) 『한나가 가로되 나의 주여 당신의 사심으로 맹세하나이다 나는 여기서 나의 주 당신 곁에 서서 여호와께 기도하던 여자라』
(삼상 1:27)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여호와께서 나의 구하여 기도한 바를 허락하신지라』
(삼상 1:28)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하고 그 아이는 거기서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성도는 참으로 독합니다. 자기가 기도해서 낳은 아들은 더 이상 자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고 여기면서 돌려주는 것은 참으로 독하기 짝이 없습니다. 한나가 왜 이래 독하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그녀에게 두 가지 점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없는 데서 있게 하시고, 다른 하나는 죽은 데서 살리시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미 있는 것을 사랑합니다. 이미 있는 자기를 사랑하고, 그 자기 것이라고 분류시킨 것들을 사랑합니다. 돈이나 명예나 위신 같은 것들입니다. 하지만 한나는 그 모든 것이 결코 자기 것이 아니며 정말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또한 한나는 자신의 죽은 태가 도로 살아났음을 알았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자신의 자궁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 전체 마저 하나님께서 살린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는 반드시 ‘없는 데서 있게’하고 ‘죽은 데서 살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니 한나는 그 어떤 것도 무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는 곧 본인이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한나가 제멋대로 살겠네요? 아닙니다. 한나는 실체를 보여주는 그림자입니다. 실체를 끊어진 그림자란 없습니다. 그림자를 움직이는 것은 그림자가 아닙니다. 타인의 그림자도 아닙니다. 오직 실체입니다. 한나가 드린 서원제는 바로 장차 오실 예수님을 말해주기 위해 드린 것입니다.
즉 한나 인생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니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바로 서원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서원제를 드려야 할까요? 바로 이 점을 우리가 깊게 생각해봐야 합니다. 구약 전체가 그림자입니다. 신약은 다른 구조의 지배가 작용하는 곳입니다. 예를 들면, 여기 안경이 있습니다.
안경이 움직일 때마다 그림자가 이 바닥에 같이 움직입니다. 그런데 이 그림자만 보고 실체가 무엇인지 아무리 연구해도 알 수가 없습니다. 길다란 작대기 같은 그림자를 보고서 ‘안경’이라는 실체를 발견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구약은 어디론가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이 임한 성도가 자꾸 행하게 됩니다.
그러나 신약 성경에 와서는 다릅니다. 신약 성도들도 과연 하나님의 능력을 받았으면 한나처럼 서원제를 꼭 바쳐야 할까요? 로마서 12:1-3에 보면,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 본문은 헌신 예배 때 자주 거론되는 본문입니다. 신약에서도 역시 성도는 예배와 제사를 드리는데 아예 자기 몸을 바치게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내용을 구약처럼 그림자로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신약 때의 성도는 영적 구조의 지배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미 완료 된 상황으로 인해서 영적으로 지배를 받는 겁니다.
즉 “내 안에 누구 있다!”는 식입니다. 예를 들면, 구약에서는 사람이 자기 힘으로 축복과 저주를 만들어내야 될 형편이지만 신약에서는 마치 각기 다른 색깔의 물줄기가 쏟아지는 샤워장에 들어선 것처럼 그 방에 들어서기만 하면 한 쪽 방에서 축복의 물줄기가 쏟아지고 다른 방에서 저주의 물줄기가 쏟아집니다.
신약에 와서 이런 식으로 되는 이유가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서원제를 십자가에 드렸고 그 서원제가 하나님으로부터 응답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바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응답받은 것만을 ‘축복’이라는 이름으로 주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신약의 성도들도 한나처럼, 자기가 이룰 수 없는 것을 예수님으로 통해서 하나님께서 받게 됩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입니다. 이것은 은사, 곧 선물입니다. 주셔야 받을 수 있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노력한다고 해서 얻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신약의 성도들 속에는 다른 분이 계십니다. 메시야가 계십니다.
그 분의 서원으로 인해 우리 성도는 자신이 원하는 길을 가고 싶어도 가지를 못합니다. 마치 말과 기수와 같은 관계입니다. 말은 제 갈 길로 가고 싶어도 기수가 올라타면서 그 말을 그냥 두지를 않습니다. 우리들은 세상 유혹에 약합니다. 하지만 우리 안에 계시는 예수님은 절대로 이 세대를 본받도록 방치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이 세상 안에서 예수님이 이루어놓으신 하나님과의 약속을 반드시 이루고 내시고야 맙니다.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칼의 위험 속에서도 예수님은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서약해 놓은 성도를 반드시 구원해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해주시는 겁니다.
한나의 서원이 아들 사무엘을 하나님의 것으로 내놓은 일이라면 오늘날 성도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에게 서원하시어 자신의 사람으로 부리고 사용하시는 일입니다. 소위 선교라는 것은 반드시 이런 원리와 원칙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선교를 할 때에, 본인이 하나님에게 쓰임받겠다고 나서봤자 며칠 가지도 못하고 낙담합니다.
인간에게는 남들로부터 인정받고 욕망이 있습니다. 남들로부터 인정받아야 비로소 자신도 자기를 인정합니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우기면서 먼 나라로 선교하려 간다고 하지만, 스스로 자신의 미래를 확보하려고 나가려는 것이 아닌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이 때 중요한 것은 복음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이 들어있지 않는 하나님의 일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일로서 선교가 아니면 선교가 아닙니다. 만약 자신이 주인공이 된다면 그것은 선교를 빙자한 밥벌이 행각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복음을 위해서 움직인다면 국내에 있던 국외에 있던 모두 선교입니다.
서원이나 헌신도 장소가 문제가 아닙니다. 그 인간 속에 복음이 있는지가 관권입니다.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움직이는 자, 바로 이들이 오늘날의 사무엘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더 이상 우리 자신을 내 것이라고 우기지 말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