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5장 25-34절 제목 :믿음과 구원
막 5:25-34 (믿음과 구원)
이름 : 우리교회(IP:220.81.176.141)
본문 : 마가복음 5장 25-34절
제목 : 믿음과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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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08-07-20 13:31
믿음과 구원
2008년 7월 20일 본문 말씀: 마가복음 5:25-34
(막 5:25)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
(막 5:26)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막 5:27)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막 5:28)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막 5:29)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막 5:30)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막 5:31)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막 5:32)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 보시니』
(막 5:33) 『여자가 제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짜온대』
(막 5:34)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성경 속에는 어떤 모델이 나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델입니다. 만약에 어떤 이들이 성경을 보기를 거절하는 것은 곧 성경 속에서 하나님께서 제시하는 모델을 거절하고 대신 성경 밖에서 자신이 원하는 모델을 찾는 바가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 34절에 보면 “딸아 네 믿음으로 구원을 구원했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즉 ‘믿음으로 구원’입니다. 이 ‘믿음으로 구원’에 합당한 모델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12년 동안 피 흘리며 살던 여인입니다. 우리는 이 여인을 보고 ‘재수없는 여자’라고 측은해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여인을 통해서 ‘믿음으로 구원’의 모델로 내세웠다는 점을 주목해 봐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과 같이 이 여인을 통해서 ‘믿음으로 구원’의 모델상을 찾고자 한다면 성경 밖에서 우리가 부러워하는 다른 모델을 찾아서는 아니되는 겁니다. 사람이란 자신이 지키겠다고 내세우는 것을 통해서 그 사람의 본색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최종적으로 지키려고 합니까? 자존심입니까 아니면 명예입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은 심판주되십니다. 즉 다른 심판주가 없습니다. 다른 심판도 없습니다. 이 여인과 예수님과의 만남에서 예수님께서 이 여인에게 내린 평가가 곧 우리가 결국 만나게 되는 예수님의 평가 기준이 되는 겁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에게 들었던 평가, 즉 ‘믿음으로 구원’이 우리가 듣지 못하게 된다면 우리는 본질 안에 엉뚱한 것이 들어있다고 봐야 합니다.
인생을 아무리 요란스럽게 살아도 예수님에 내리신 평가, 즉 ‘믿음으로 구원’은 요지부동,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 자신이 우리를 평가내려도 소용없습니다. 스스로 보기에 제대로 산 것 같더라도 예수님께서 찾고 계신 것은 예수님과의 ‘믿음’ 여부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이 여인을 모델로 삼아 관심을 주시기 바랍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여인이 어떻게 했길래 예수님으로부터 ‘합격’이라는 통보를 그 면전에 듣게 되는 겁니까? 이 여인은 12년 동안이나 하혈하는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의 믿음관계가 나타나기 전에 그는 자신의 행함을 동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의사에게 자기 몸을 맡기기도 했지만 그 의사들로 인하여 되레 많은 고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있는 돈도 다 날리고 병을 도리어 악화되었습니다.
우리가 왜 이런 여인을 우리들의 모델로 꼭 삼아야 하는 걸까요? 그것은 그녀는 더 이상 자시 자신을 의지하거나 믿지를 않게 된 것입니다. 더 이상 자신의 행함을 믿지를 않는 겁니다. 자신의 힘을 믿지를 않는 겁니다. 오늘날 교회라는 것이 자신을 위대함을 남들이 알아주기를 원해서 오고 있습니다.
말씀 속으로, 성경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냥 교회 속으로만 왔다가 도로 가 버립니다. 그 이유는, “이만하면 됐다. 이 정도로 형편만으로도 만족하겠다‘고 다짐하기 때문입니다. 즉 이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추가적인 힘을 기대하고 온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있어 이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인은 전혀 자신의 이상형이 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이런 사람에게는 더 이상 ‘믿음으로 구원’도 해당되지 못하는 자입니다. 우리가 이 여인의 자리에 같이 서지 않는 한, 주님으로부터 ‘믿음으로 구원 합격’이라는 통지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폭우를 얇은 신문지 한 장으로 막아 낼 수 없듯이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을 ‘교회 출석’으로 막아낼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 여인이 예수님의 옷가를 만진 심정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 여인의 마음 구조가 오직 ‘생명 아니면 죽음, 죽음 아니면 생명’ 이 뿐이었습니다. 화목한 가정생활이나 자신의 명예심 회복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녀는 자신에게 온갖 것을 다 동원해서 개선해 보려고 했습니다. 그것이 아무런 소용없음을 알았던 것입니다.
이 ‘앎’, 즉 ‘나는 소용없는 짓만 할 수 밖에 없음’이라는 이 사실에 입각해서 그녀는 예수님 오시기를 기다렸습니다. 여인이 예수님의 옷 깃을 만진 자의 전부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옷 깃 뿐만 아니라 몸도 만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둘러보시면서 찾는 이는 오직 이 여인 뿐입니다. 왜 그럴까요?
다른 사람은 자신의 열성이나 오기나 집념에서 예수님을 만졌지만 이 여인만이 오직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은 인간의 행함이나 열성이나 오기나 집념과 다르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다를까요? 그것은 능력이 나가신 예수님이 판단하실 문제입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사도 바울이 말한 것, 즉 “믿음은 선물이다”는 사실입니다.
즉 여인의 예수님의 옷 깃 만짐은 같이 예수님을 민 사람들의 눈에는 같은 행함에 일종이라고 보이지만 능력이 나가신 예수님에게만 행함의 관계가 아니라 믿음의 관계로 알아 모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음과 행함이 어떻게 차이나는 겁니까?
믿음이란 선물이라는 대 공식 안에서, 믿음이란 대상에게 믿을 수 있는 능력이 예수님 쪽에서 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창세기 27장에서 이삭은 맏 아들에게 축복을 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동생인 야곱이 형 행세를 하면서 아버지와 형을 속여 아버지로부터 축복을 가로채고 말았습니다.
거짓말 해서 남은 것을 자기 것으로 가로채는 것은 나쁜 짓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서 호락호락 야곱의 속임수에 같이 넘어가 주신다는 겁니다. 이것은 곧 ‘맏이가 복받는다’는 원칙에서가 아니라 ‘복받은 자가 맏이가 된다’는 원칙이 새롭게 적용되는 겁니다. 즉 복 받을 자는 아무리 동생이라고 결국 맏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왜 이 원칙을 믿음에 적용시키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앞으로 가실 십자가의 길은 곧 여인이 앓고 있는 그 무서운 병마 속으로 들어가는 길인 것입니다. 더러운 여인의 병마 속에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의’를 즉 ‘하나님의 정당성’을 심어놓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을 받은 여인은 자신이 그동안 12동안 아픈 것이 참으로 하나님께서 합당한 조치, 정당한 조치를 취한 것임을 믿는 겁니다. 바로 이 관계가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자신이 예수님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있는 나의 이 더러움 안에다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를 심어놓으신 작업이 참으로 합당하고 정당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관계를 뜻합니다. 이제부터 이 여인은 오직 이 사랑과 복음만이 평생 지켜나갈 겁니다. 우리도 이 여인처럼 평생토록 죄라는 죽음의 피가 줄곧 흐르고 있음을 알고 이런 우리 속에 하나님의 의를 심어주신 주님의 십자가 능력을 감사합시다. 이런 자만이 성도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더 이상 우리 자신을 사수하는 식으로 살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