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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080711-b 서울강의녹취 : 에베소서 제 16강자유게시판에베소서

20080711-b 서울강의녹취 : 에베소서 제 16강

이름 : 오용익(IP:59.3.201.241)

에베소서 제 16강 (이 근호목사, 2008년 7월 11일-b, 서울의존교회)

앞에 있는 이 그림을 보시면 감추어진 숨어있는 하나님이 나타나신 하나님이 될 때 그냥 나타나시는 것이 아닙니다. 아까 간식으로 수박이 나타날 때 여기 없다가 밖에 있다가 여기에 나타났지요. 하나님이 창세전에 뭔가 감추어 놓은 것이 있는데 그게 감추어진 성전입니다. 여기 실을 살살 풀면 이것이 나타난 성전이 되는 겁니다.

숨어 있는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 그냥 빈손으로 나타나시는 것이 아니고 창세전에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시면서 우리 앞에 나타나는 겁니다.

에베소서 3:9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 보면 옛날에는 어땠다고요? 감취었다. 지금은 어떻게 한다고요? 드러낸다. 감취었던 것이 드러나면서 하나님께서 복음으로 나타난 겁니다. 말이 좀 어려우니 쉽게 하겠습니다. 복음이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감춰놓은 겁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부터 감춰놓은 그것을 마지막때에 나타내니까 나타난 것이 뭐냐? 복음, 기쁜 소식이라고 나타난 겁니다.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 ‘경륜’이란 절차라는 뜻입니다. 이것도 어려우니 그림으로 그립니다. 하나님께 감추어진 그 무엇이 있는데 그 무엇이 실타래를 풀듯이 솔솔 하나하나 풀어 나가는 겁니다. 풀어 나가게 되면 그 중의 하나가 대표적인 것이 솔로몬이 지은 성전입니다.

모세율법 속에 보면 성전의 구조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장방형으로 지어진 구조물인데 동쪽은 오른방향, 서쪽은 왼방향, 북쪽은 위방향, 남쪽은 아래방향으로 볼때. 출애굽기 25:1-31:11) 맨 바깥 울타리가 동서방향(긴면)이 50미터, 남북방향(짧은면)이 25미터, 높이는 5미터로 바깥에서 안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 안에는 텐트구조물이 하나 있는데 그 텐트는 방이 둘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동쪽에 문이 있어서 그 문안으로는 제사장들만 들어 갈수 있습니다.

안에 있는 텐트와 바깥 울타리 사이를 뜰이라고 하고 동쪽문으로 들어가게 되면 맨 먼저 놋제단이 나오는데 여기서 짐승을 잡습니다. 놋제단을 지나 물두멍이 있는데 거기는 제사장의 손발을 씻도록 하고 짐승을 잡아서 텐트안으로 들어가는데 방이 두 개 있는데 안쪽에 있는 방을 지성소라고 하고 바깥쪽에 있는 방을 성소라고 합니다.

성소에 들어가면 북쪽면에 떡상이 놓여 있고 그 떡상에 떡이 한줄에 여섯 개씩 나란히 놓여져 12개가 놓여져 있고, 남쪽면에는 탁자위에 금촛대가 있는데 양쪽으로 여섯 개의 가지가 나와 있어서 일곱등잔을 켜게 되어 있습니다. 입구 맞은편 서쪽면에는 향을 피우는 향단이 자리 잡습니다.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는 위로부터 아래까지 커튼(막)이 드리워져 있고 거기에는 천사(그룹)들이 수놓아져 있습니다. 그 커튼안쪽의 지성소에는 아카시아 나무(조각목)로 만들어서 금을 입힌 상자, 언약궤 혹은 증거궤가 놓여져 있습니다. 이 성막이 나중에 단단한 건축물이 되면 이것이 솔로몬 성전이 되는데 이 원형이 하늘나라에 있습니다.

창세전부터 감취어진 성전의 모양새입니다. 이 집이 하나님의 집이고 하나님은 이 안에 계시기에 이 안만 거룩한 곳이 됩니다. 이 안에 누가 들어오면 죽습니다. 일반인들은 죽고 여기에는 피 바른 사람만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나중에 솔로몬 성전이 되면 여자나 이방인은 못 들어오고 피 발린 남자들만 출입하게 됩니다.

더 나중에 에스겔서에 성전이 나오는데 그것은 더 복잡한 구조물로 등장합니다. 어쨌든 제가 지금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 하늘에 있는 진짜 성전의 모형이고 그림자입니다. 그림자가 뭔지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제가 성경책을 들고 있는데 이 성경책의 그림자가 있습니다. 이 그림자를 보고 성경인지 아닌지 알아보겠습니까, 못 알아보겠습니까?

못 알아봅니다. 네모난 것이 한 두개입니까? 이 그림자를 보고 이게 맛있는지 안 맛있는지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사람들은 하늘나라성전은 감취어져 있고 그림자만 지상역사에 나타나니까 이게 하나님의 집인 줄 알고 이것만 붙드는 겁니다. 그림자만 붙들고 ‘나는 하나님집의 제사장이고 레위인이고 나는 들어가서 구원되는데 너희는 못들어가서 구원못된다’는 식으로 만날 이것만 생각하는 겁니다.

사도바울도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대로 성전을 세우라고 했는데 말씀대로 성전을 세웠습니다. 이제 된거지요?” 예수님이 오셔서 “아니야. 아니야. 그것은 그림자야 그림자. 헛 밟았어. 헛 밟았어.” 어떤 바보같은 아이가 자기를 괴롭히는 애한테 달려들지 못하고 그 애가 지나간 그림자를 밟으면서 “한번 당해봐라. 아프지! 아프지!” 하면 그애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잘한다. 실컷 한번 밟아봐라. 네 발만 아프지.” 이럴거 아닙니까?

그림자를 보고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림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 어두운 그림자는 옛날부터 감취어진 성전이 솔솔 내려와서 모세율법, 솔로몬 성전, 십일조, 안식일, 십계명 등등이 되는 겁니다. ‘탐내지 말라, 부모를 공경하라’ 이런 것들이 다 그림자입니다. 지켜봐야 그것은 그림자 지키는 겁니다. 골로새서 2장에 보면 그것은 다 그리스도의 그림자입니다.

골로새서 2:16,17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율법은 다 그림자입니다. 그 그림자가 있으매 진짜 본체, 실체가 있는 겁니다. 그림자가 있다는 것은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숨어 있는 실체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 숨어 있는 실체가 뭔지를 모르고 사람들은 그림자만 잔뜩 지키고 순종하고 그러면 구원되는 줄 알고 있는 거예요.

이 그림자가 성경의 그림자라면 이 그림자를 보고서는 성경인지 그냥 네모판대기인지는 모릅니다. 그런데 이 성경이 움직이니까 그림자도 움직이고 그 움직임을 통해서 실체가 어떠하다 하는 것을 알도록 하는 겁니다. 그림자가 움직이니까요. 이 성전에서 그림자가 어떻게 움직입니까? 1) 흠 없는 양을 잡았다. 2) 그 양은 피 흘리고 죽었다. 3) 그 피는 하나님의 성소에 뿌려진다. 4) 그 피로 백성들의 죄가 없어진다.

그림자가 움직이니까 뭔가 감취어진 것에서 움직임이 나타나는데 그 움직임이 뭐냐 하면 ‘흠 없는 양이 피 흘리고 죽었는데 그 피를 성소에 뿌리니까 그 양을 바친 모든 백성들이 죄용서 받아서 거룩한 백성이라고 다른 나라와 전쟁을 해서 승리했다.’ 이런 시나리오, 이런 내용이 흘러나옵니다.

그 내용이 이사야 53장에 가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제갈 길 가고 도망쳤는데 우리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흠 없는 양으로 바쳐서 대신 피 흘리게 해서 자기 백성을 용서했다’고 약간 더 구체적으로 나와 있고 점점 더 신약성경에 올 때까지 그런 식입니다. 그래서 궁금합니다. 이것이 그림자인데 그림자를 대신할만한 진짜 그 분은 어떤 모습일까?

내 님은 누구일까? 어떻게 생겼을까? 어떤 집사님이 계신데 그 분은 결혼할 때 얼굴은 못보고 전화로만 대화를 했답니다. 그런데 목소리가 너무 멋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그 목소리를 기초로 해서 그 목소리에 합당한 모든 상상력을 다 동원해서 상대방을 멋있게 꾸몄습니다. 그런데 막상 만나보니 키도 작고 불 품도 없고 영 상상과는 딴판이었고 그야말로 목소리만 좋았던 겁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목소리나 외모보다도 그분이 ‘빛이다’ 여기에 관심사가 있습니다. 누구하고 살지, 수입이 얼마인지 이런 데는 큰 관심이 없고 모였다 하면 빛에 대해서 복음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성경을 이야기 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 여자 분도 복음에 대해서 화제가 되고 나니까 그 나머지 문제는 별 의미 없어지는 겁니다.

처음에는 목소리만 좋았는데 이제는 목소리 좋은 것도 별 의미 없고 이제는 복음이 좋아서 둘이 사니 얼마나 궁합이 맞는지 애가 셋입니다. 사람은 그 실체는 모르고 자꾸 그 이미지만 상상을 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그 인간들의 마음속에 힌트를 주기 위해서 뭔가 자꾸 움직임을 줍니다.

그래서 그 움직임을 종합해서 메시아를 생각했는데 인간들이 생각한 그 메시아와 완전히 정 반대되는 메시아를 하나님께서 보냈습니다. 하나님은 장난꾸러기! 아무도 예상 못한 메시아를 보냈습니다. 사람들이 아무도 알아보지 못한 메시아를 보냈습니다. 심지어 열두제자도 자기 힘으로 주님을 알아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전부 다 엉뚱한 생각하고 자기 생각하기 바빴고 나중에 주님 십자가에 달릴 때 도망치기 바빴습니다. 지난 주일설교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요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이 가룟유다의 발을 씻어주셨습니까, 안 씻어주셨습니까? 씻어 주셨습니다. 그게 뭡니까? 그게 그림자입니다. 그러면 발 씻은 그 그림자를 받으면 그 받은 가룟유다가 구원받습니까?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발을 씻어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국 마귀라는 것(요 6:70, 13:2)은 내가 어떤 상징, 어떤 체험을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가 뭘 받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진짜 예수님은 마지막에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느냐가 중요하고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피입니다.

그 십자가의 피를 남겨준 이유, 왜 우리에게 유일하게 남겨준 사랑의 증표가 십자가의 피인가?

에베소서 3:12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

어떤 경우에, 예수님에게 일어난 일중에서 어떤 일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당당이 나아감을 얻게 하는 겁니까? 예수님의 일중에서 어떤 일이 우리가 하나님께 당당하게 나아감을 얻도록 만드는 일이 되는 겁니까? 질문이 어려운 것 같으니 다시 하겠습니까? 예수님에게 일어난 어떤 일이 있기에 우리는 우리 행동에 구애받지 않고 내 행동의 실수나 모자람에 관계없이 어떤 경우에도 당당하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이거 내 안경이다 고이고이 간직해라.” 이런 경우는 하나님께 당당할 수 없습니다. 만일에 이 안경 깨뜨리면 우리는 하나님께 원망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이 포크 이거 내꺼야. 이거 꼭 쥐고 있어야 천당갈수 있다. 이거 꼭 잘 쥐고 있어라”라고 한다면 우리가 이 포크를 잃어버리거나 하면 천당 못가잖아요.

그거 지킨다고 늘 초조하겠지요. 만 날 그거 지킨다고 당당함, 혹은 담대함이 안 되지요. 계속해서 그거 있나 초조하게 확인이나 하겠지요. 제가 어떤 분에게 휴대폰을 얻었는데 이것 때문에 계속 신경이 쓰이는 거예요. 잊었다 싶으면 찾고 어디로 갔나, 늘 찾게 되고 고장 나면 수리하느라 신경 쓰고 이게 애물단지입니다.

휴대폰 때문에 당당하지를 못합니다. 그러면 언제 담대하고 당당합니까? 내 것이 어떤 것이라도 내 것과 상관없이 구원될 경우에만 우리는 담대하고 당당해 지겠지요. 우리가 당당하고 담대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어떤 인간이 되었든지 상관없이 우리 외부에서 예수님이 뭔가 했을 때 우리가 그 이유로 인하여 담대하고 당당한 겁니다.

‘내가 이것을 간수해야 돼. 이것 놓치면 안 돼. 이것 놓치면 지옥 가는거야.’ 끊임없이 이렇게 생각한다면 당당하고 담대할 수 없습니다. “이거 잘 키워라. 이것 많이 키워야 돼. 이것 못키우면 지옥가는거야.” 이런 식이면 담대할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에 달란트 비유가 나오는데 달란트를 줘도 문제입니다(마 25:14-29).

펀드 넣어놓고 망할까봐서 벌벌 떠는 것처럼 이것은 담대한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담대하다는 것은 어느 정도냐? 예수님이 하신 일로 인해서 추가적으로 계속해서 뭔가 쏟아질 때 그게 담대하고 당당하고 안도감이 생깁니다. 어떤 식당에 가면 이렇게 써붙여 놓았습니다. “점심때 쌈밥은 무제한 제공됩니다.” 도대체 쌈밥에서 뭐가 무제한 제공된다는 것인지, 그게 쌈인지 밥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떤 곳은 커피를 한번 시키면 그 뒤로 리필이 무제한 제공된다고 합니다. 커피 아무리 무제한으로 리필 해줘도 그거 10잔씩 들이킬 사람 누가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의 은사가 우리에게 무제한으로 공급됩니다. 그게 에베소서 3장 19절에 나옵니다.

에베소서 3:18,19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충만’이란 넘친다는 뜻입니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사랑이 어느 정도 되느냐 하면 그 사랑의 “…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이것이 사랑의 해일인데, 하늘나라에 그 정도로 가득 찼는데 이제는 하늘나라에만 가득 찬 것이 아니고 너희에게도 가득 차기를 바란다는 말입니다.

“넘쳐나라!”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두자로 ‘충만’입니다. ‘충분히 넘치도록 줄게. 무제한 으로 줄게’ 그 말입니다. ‘그 사랑을 무제한으로 줄 테니 그 무제한의 사랑이 나에게 덮쳤다는 그 사랑의 무제한을 알고 담대하고 당당하게 하나님께 나아가라’는 말입니다. 십자가라는 것은 메마른 명태가 아닙니다.

그냥 바짝 마른 명태 들고 나니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서 뭔가 쏟아져 나옵니다. 거기서 쏟아져 나오는 것이 뭡니까? 사랑, 용서입니다. ‘용서해줄게. 사랑해줄게!’ 이게 본체고 옛날 그림자는 뭐냐?

양을 잡아서 그 피를 가지고 성전에 들어가서 피를 뿌리고 ‘하나님, 이 피를 뿌리오니 이 피 받으시고 저 백성들의 죄악을 몽땅 다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으로 용서해주세요’라고 하면서 실제로 어린양, 또는 염소, 피를 잡아서 성전에서 뿌리면 용서가 되었습니다. 옛날에는 그것을 되풀이 했습니다.

제사장이 하다가 죽으면 다른 제사장이 또 하고 계속 되풀이 했습니다. 히브리서에 보면 그것이 나옵니다. 지금은 단번에 다 해 치웠습니다.

히브리서 9:11,12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히브리서 10:10

“이 뜻을 좆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이것은 ‘넘쳐나라’와 똑같은 말입니다. 이것이 감추어진 비밀입니다. 이것이 누구한테 해당됩니까?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창세전에 예정된 하나님의 자기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겁니다. 그 사람이 40년 술을 퍼먹어서 지금은 죽기 직전에 있더라도, 병실에 누워 있느냐, 집에 있느냐, 병이 세 가지냐 네 가지냐, 그런 것을 묻지 않습니다.

“어이, 아들아!”

“누구십니까?”

“나, 하나님이다.”

“왜 오셨습니까?”

“너는 창세전부터 내 아들이다.”

“어쩌란 말입니까?”

“너 죄인이다. 너 대신 내 아들 예수가 십자가에서 피 흘렸다. 그 피로 말미암아 이 사랑이 넘쳐나라! 너를 용서하는 사랑이 넘쳐나라!”

그 때 그 사람이 평생 술을 먹었어도 하늘나라 어떻게 갈까요? 자기가 회개했다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피를 보고, 어린양은 그림자고 실체는 예수님의 십자가이기에 그 실체인 그 피를 보고 담대하게 당당하게 ‘아버지, 저를 받아 주소서’합니다.

좀 뻔뻔스럽다마는 디모데전서에 보니까 ‘창세전에 예정된 자에게 죄인을 오래 참으사 나 같은 죄인도 구원했는데 그 복음이 바로 이 복음이다’(딤전 1:15,16)라고 합니다. 우리 행함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이미 구원되기로 작정한 자에게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총의 증거가 뭡니까?

흠 없는 어린양의 그 피가 바로 우리가 행한 것도 없이 구원되는 유일한 증거로 주어진다는 말입니다. 그 증거중의 하나가 바로 출애굽당시의 일입니다. 출애굽의 유월절에 여러 가지 깊이 있는 이야기가 많지만 중요한 것만 몇 가지만 말씀드립니다. 히브리인들이 애굽나라에서 나오는데 그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는 히브리인들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자가 하나님 쪽에서 방문을 해오고 보니까 애굽나라는 죽음의 나라이고 히브리인들도 그 죽음의 나라에 꼼짝 못하고 잡혀 있는 죽음의 사람들입니다. 애굽은 무조건 죽음의 나라입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바로의 맏이 왕자가 죽는데 바로의 왕자만 죽는 것이 아니고 희한하게도 바로왕궁의 옥에 갇혀 있는 자들의 맏아들도 다 죽습니다.

쉽게 말해서 아버지가 교도소에서 복역하고 있는데 유월절의 그 밤에 집에 있는 초등학생 아들이 아무 이유도 없이 죽는 겁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그 아들이 무슨 잘못을 했습니까? 애굽나라 그 자체가 죽음이라는 말입니다. 그 죽음의 나라에 속했으니 히브리인들도 마땅히 같이 죽어야 마땅한 사람들입니다.

애굽나라 전체가 하나님 앞에서 생명이 없는 죽음의 나라인데 여기서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난 겁니다. 그 죽음의 천사(사자)는 사전에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언질(약속)을 받았습니다. 이 유월절도 그림자이기에 여기서 창세전에 예정된 실체가 솔솔 풀려 나와야 됩니다. 실체가 뭐냐하면 ‘피로 용서한다’는 그 약속(언질)을 지니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사람을 죽입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그렇게 집집마다 죽이고 돌아다니는데 히브리인들은 집집마다 흠 없는 어린양의 피를 발랐습니다. 지금 제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피’, ‘십자가 피’가 실체고 나머지는 다 상징이고 그림자입니다.

지금 죽음의 사자의 관심사는 피를 잘발랐느냐, 많이 발랐느냐, 그 피 발린 집 안에 들어 있는 사람이 몇 명이냐, 애굽인이냐 히브리인이냐,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묻지도 않고 ‘그 피만 있으면 그냥 용서해주라’는 그 약속을 누구에게 받았습니까? 사전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약속입니다. 그게 두 글자로 ‘비밀’입니다.

기독교 간단합니다. 기독교란 하나님끼리만 아는 비밀을 우리가 알아차리는 것, 그것이 기독교입니다. 하늘나라에서 죽음의 사자가 왔는데 그 사자는 아주 냉정하게 거룩하지 않은 인간 다 죽이는 겁니다. 지난 주일설교에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람들이 악마를 못이기는 이유는 악마는 천사이기 때문에 천사는 생존문제에 연연해 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혈육에 속했기에 만 날 자기 세포, 생존문제, 밥 먹고 사는 그것을 걱정합니다. 천사가 기관총을 겁내겠습니까? 아니면 기관포를 겁내겠습니까? 천사의 관심거리는 하나님께 미움받을거냐, 사랑받을거냐 그것만 생각하는 겁니다. 죽고 사는 그것은 별 문제 아닙니다.

우리가 천사같이 살 것 같으면 ‘주여, 제가 예수 믿고 몇 년 더 살겠습니까?’가 관심이 아니고 ‘주여, 우리는 죽든지 살든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입니까? 미움의 대상입니까?’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피만 발리면 그냥 넘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목사님, 그거 진짜입니까?” “진짜입니다.”

사도바울은 사도되기 전에는 그걸 모르고 자기 행함으로 구원받는 줄 알았습니다. 사도되고 나서는 ‘율법의 행함으로 구원될 자가 없고 만일 행함으로 구원받으면 십자가를 헛되게 하는 것이다’(갈 2:16,21)라고 했습니다. 십자가하고 무엇을 대비시킵니까? 우리의 행함과 대비시킵니다. 만일 우리가 행함으로 구원받으면 십자가피가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 1:29) 예수님이 어린양으로 왔다는 말은 그 때 그 그림자대로 실체가 그대로 옮기겠다는 겁니다. 죽음의 사자한테는 뇌물 같은 것 안 통합니다. 어린양의 피를 보고 그냥 넘어간다고 해서 뭐라고 합니까? 유월절(逾月節, pass over)이라 합니다. 뭘 보고 넘어갑니까? 피를 보고 넘어갑니다.

찬송가에도 나옵니다. 그냥 넘어가는 겁니다. 얼마나 간단합니까? 그림자는 복잡해도 실체는 간단합니다.

주 십자가를 지심으로(찬송가 199장)

주 십자가를 지심으로 죄인을 구속하셨으니

그 피를 보고 믿는 자는 주의 진노를 면하겠네.

내가 그 피를 유월절 그 양의

피를 볼 때에 내가 너를 넘어가리라.

흉악한 죄인 괴수라도 예수는 능히 구원하네.

온 몸을 피에 잠글 때에 주의 진노를 면하겠네.

내가 그 피를 유월절 그 양의

피를 볼때 내가 너를 넘어가리라.

심판할 때에 모든 백성 행한일 대로 보응받네.

죄 있는 자는 피를 믿게 주의 진노를 면하겠네.

내가 그 피를 유월절 그 양의

피를 볼 때에 내가 너를 넘어가리라.

구주의 사랑 크신 은혜 보혈의 능력 의지하세.

심판의 불이 내릴 때에 주의 진노를 면하겠네.

내가 그 피를 유월절 그 양의

피를 볼 때에 내가 너를 넘어가리라.

그냥 넘어가는 겁니다. 그렇게 넘어가면서 우리가 구원되었지요. 그 다음에 구원되고 나서 우리에게 뭘 주느냐를 이야기 하겠습니다. 구원은 우리의 행함과 관계없이 뭘 보고 넘어간다? 피 보고 넘어간다. 저보고 따지지 마세요. 그것은 하나님과 이야기가 다 끝난 겁니다. 피만 있으면 넘어갑니다.

그것을 가지고 히브리서는 ‘언약의 피를 모독하지 말라’고 하고 언약의 피를 짓밟는 것을 용서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히브리서 10:26-29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에베소서 1장 7절에도 뭐라 되어 있습니까?

에베소서 1: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

뭐로 말미암아? ‘피로 말미암아.’ “목사님, 어떻게 하면 그 비밀을 알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나의 집이 아니고 하늘의 집에 갈수 있습니까?” 그 방법은 뭡니까? 그 피만 보고 넘어가는 겁니다. 넘어가게 되면 졸지에 우리는 어디에 와 있다? 하나님의 집에 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집 입구에는 피가 발려 있습니다.

흠 없는 피로 인하여 그 집에 들어오게 되면 여기서 기다리는 것은 에베소서 1장부터 죽 나오고 오늘 본문 3장에서도 나오는 것이 ‘사랑’입니다. 5장에서는 이 사랑을 다른 말로 ‘용서’라고 합니다. 주기도문에도 나옵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마 6:9-15) 하나님의 사랑속에는 용서가 있습니다.

‘주께서 너희를 용서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용서하라’(엡 5:2) 에베소서 5장에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찌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는 이런 것은 전부다 사랑과 용서의 힘에서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발 제 말을 듣고 ‘이제부터 내 남편을 어떻게 해야지’ 그런 소리는 하지 마세요. 사랑을 알게 되면 그 사랑이 여러분을 가만두지 않고 반드시 사랑값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게 되어 있습니다. 에베소서 5장에 보면 “술취하지 말라”고 하는데 그냥 술을 끊은 것은 은사가 아닙니다.

‘술 취하지 말라’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성령에 취하라’가 나오지요. 성령에 취하면 ‘빛이다!’ 이겁니다. 자기 것이 없다는 말이거든요. 술을 마시게 되면 일단 자기가 없어집니다. 자기가 없어지니까 자신의 본능만 남습니다.

그래서 술 취하면 아무데나 오줌 누고 버스타고 기사나 승객한테 행패부리고 집에 들어가서 자는 애들 다 깨워서 한 소리 또 하고 지겹게 하고 또 잔소리하고, 그만 하라고 하면 무시한다고 또 윽박지르고 그래놓고 아무데나 쓰러져서 자고 일어나서 머리 아프다고 호소하면서 북어 국 끓여달라고 합니다.

술 취하면 자기를 잊어버립니다. 그런데 자기를 잊어버리는 다른 길이 있다는 겁니다. 그게 ‘성령에 취하라’는 겁니다. ‘성령에 취하라’는 것은 용서에 취하고 사랑에 취하라는 겁니다. 사람이 남을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가 너무 의식되기 때문입니다. 자기 이익, 자기 자존심, 자기계산, 만 날 자기 생각을 하니까 사랑이 안 되는 겁니다.

사랑에 취해버리면 복음에 취해버리면 자기를 잊어버려요. 목사님들이 설교할 때 복음에 취해버리면 자기를 잊어버려요. 복음에 안취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어이, 거기 왜 돌아다니고 왔다 갔다 해? 그리고 집사님! 잠이나 좀 깨세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목사님, 애들이 돌아다니든지 성도들이 잠을 자든지 목사님은 복음이나 전하세요. 목사님은 목사님 할 일이나 하세요. 잠을 자도 주께서 사랑하시니까 잠을 자는 것입니다.” ‘애들이 떠들어서 설교 못하고 사람들이 여름 되니까 다 자는데 무슨 재미로 설교하느냐’고 하는데 재미로 설교하는 것이 아니고 혹시 한분이라도 하나님께서 안주무시게 할 수 있잖아요.

자면서도 다 듣습니다. 물론 잠깨면 다 잊어버리지만. 하여튼 저 목사님이 뭔가에 취했다는 거, 복음에 취했다는 것, ‘이거 하고 나면 월급이 얼마 오르고’ 전혀 그런 것도 모르고 ‘하여튼 피만 증거 하면 끝이다’ 이럴 정도로 완전히 도취되어 버려요. 그게 성령에 취한 거예요.

직장에서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하면 자기를 전혀 안 돌보고 일에 취한 사람을 직장에서 제일 좋아합니다. 그런 사람은 월급이 안 아깝습니다. 그런데 직장에서 제일 싫어하는 사람은 뺀질이입니다. 이 핑계 저 핑계 다 대면서 될 수 있는 대로 일에서 빠지려고 하고 남에게 일 다 맡겨 가면서 자기는 컴퓨터 게임하고 있다든지 하는 사람, 책상 치워버려야 됩니다.

그러니까 에베소서 뒷부분에 나오는 것들이 ‘이것이 사도의 명령이니 이것을 해야 된다’가 아니라 이것은 취하면 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술 취한 사람이 제정신이 있겠습니까? ‘내가 그때 필름이 끊겨서 그랬나보다’ 하는 것처럼 성령에 취해버리면 정말 아내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도록 되어 있고 남편에게 복종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해놓고도 ‘내가 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하셨다’고 합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는 모습입니다. 자기가 알아서 정신 차려서 하는 것이 아니고 취하는 겁니다. 그 피안에 있는 하나님의 집에서 뭔가 준비된 것이 있는데 그게 바로 하나님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입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있는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

하나님의 은사가 하나님의 집에 마련되어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 영생, 죄사함, 의로움, 다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입구는 ‘피’입니다. 오늘 강의 정리해 봅시다. 이 모든 것이 우리는 가만히 있는데 창세전에 이미 준비된 겁니다. 그림으로 그려보겠습니다. 모세가 산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만났을 때 여기에 감취어진 것이 있었습니다.

그 감취어진 것이 에베소서 3장 9절입니다. 그 감취어진 것이 솔솔 풀려 내려오니까 그것이 성전도 되고 이사야서에 보면 메시야가 어린양으로 죽는 것도 있습니다. 그 본체는 ‘모든 그림자는 십자가에 다 이루었다’는 겁니다.

십자가 피, 그 본체에서 주어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인데 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원래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만 형성되었던 그 선물이 믿음과 소망과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선물이 피로 인하여 예정된 그 사람의 몫으로 그 사람도 여기에 합류하기 위해서 아버지와 아들만 있는 그 사이에 끼어들게 되어 있습니다.

어린 애들 키워보면 그 애들이 자기 방에 가서 자라고 해도 밤중에 무섭다고 하면서 엄마 아빠 자는 그 사이에 끼어들 때가 많습니다. 자식이 하나 있을 때는 더 그렇습니다. 자식이 하나뿐이면 부모와 자식의 수준의 경계선이 깨어지면서 맞물려 버립니다. 그래서 부모일에 사사건건 끼어들어서 다 참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사가 하나인데 이제는 거기에 끼어서 아버지와 아들과 너희가 하나가 되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공유하는 그것을 예정해서 이미 예정된 우리에게 실체로 주셨습니다. 그러면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체험할 수 있습니까?” 그 체험은 에베소서 3장 9절에 ‘비밀의 경륜’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경륜’이란 절차, 과정이라는 뜻인데 우리가 한 평생 살면서 중간 중간에 어떤 사건을 통해서 ‘사소한 일에 신경 쓰지 말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집어넣는 절차는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겁니다. ‘아내 있는 자는 없는자 같이 하고 돈을 쓰는 자는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고 합니다. 왜? ‘다 지나간다’(고전 7:29-31)는 겁니다.

우리는 평소에 무엇 때문에 울고 웃는가 하면 내가 얻고 싶은 그것이, 내가 욕망하는 소망인줄, 사랑인줄, 그것이 무슨 믿음인줄 알고 살았는데 그것이 전부인줄 알고 살았는데 그것이 깨어지면서 그 경륜, 그 절차를 통해서 ‘아하, 환란이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곤고나 그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주님의 사랑은 절대로 끊어지지 않는구나. 그 이유는? 피’임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그것을 모르고 자꾸 자기 가진 것이 없어진다고 ‘하나님, 이럴 수 있습니까? 왜 이런 짐을 주십니까?’ 하고 따지는데 돌아서서 보면 ‘아, 쓸데없는 것에 내가 목숨 걸었구나. 사소한 것에 내가 목숨 걸었구나’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잡초가 인간보다 더 정직합니다. 잡초는 그냥 잡초로서 만족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택한 백성, 예정하신 택한 백성, 그것으로 만족할 줄 몰라요. 우리는 내 욕심대로 믿음 소망 사랑을 자꾸 취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경륜대로 안개가 다 걷혀지고 ‘너는 안개야. 그것은 다 없어질 거야.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야. 그게 너의 기쁨이 아니고 너의 행복이 아니야’라고 사건을 통해서 그 껍데기가 벗겨지면서 진짜 숨어 있던 십자가의 그 사랑의 길이와 넓이와 높이의 충만함을 아는 그런 것들이 앞으로 여러분이 계속해서 살아가는 동안 이어지리라 확신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성경말씀대로 하면 복줍니까’라는 식으로 자기욕심을 채우려고 했던 우리를 이 성경말씀이 내 욕심채우는 것이 아니고 ‘이미 너는 창세전에 구원받기로 작정되었다’는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통보해주는 책인줄 알았습니다. 그 피로 말미암아 이미 구원을 받았사오니 주님이 갖고 있는 그 믿음과 소망, 사랑의 기쁨을 함께 누리도록 성령께서 날마다 성령에 취하는 저희들 만들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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