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강의(08. 6. 27) 둘째 시간
광주 강의(08. 6. 27) 둘째 시간
이름 : 서경수(IP:116.37.101.23)
광주 강의(08. 6. 27) 38-2
두 번째 시간은 좀 난해한대, 그 난해한 구절부터 먼저 읽어드리겠습니다.
2장 15절에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여기 구원 문제가 나오고, 앞에 ‘해산’이란 말이 나옵니다. ‘아기 낳는 것으로 인하여 구원을 얻는다.’ 이 어려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앞에 뭔가 알아야 이 문제가 풀립니다. 수녀들 있지요. 그리고 노처녀들. 또 결혼은 했는데 아기를 못 낳는 여자들. 이들의 경우에는 구원 못 받습니까? 여자는 해산함으로 구원 받는다고 했는데.
이런 어려운 구절이 있기 때문에 제가 앞에서 뜸을 드린 거예요. 차이점을 분명히 하시라고. 변화한다는 것. 그리니까 구원 받기 전에 아기 낳았을 때는 그냥 아기 낳는 것이 아기 낳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구원 받고 난 뒤에는 아기 낳는 것도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정보가 포함된 채 내가 아기를 낳고 있구나!’ 하는 것을 아니까 그 여인은 아기 낳으면서 구원 받았음을 확인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결혼 안 하고 아기 안 낳아도 그 내용을 성경을 통해서 안다면, 또는 다른 여자들이 아기 낳는 것을 통해서 구원의 의미를 되새긴다면 그 사람도 구원 받은 여자입니다. 자기는 아기를 못 낳아봤지만, 다른 여자들이 아기 낳는 것을 보면서, 구원 받기 전에는 단순히 ‘아기가 태어나는구나.’ 생각했었는데 구원 받고 난 후에는 아기가 태어나는 것을 보면서 ‘저런 식으로 구원이 형성되는 구나!’를 보게 되는 겁니다.
이런 말 한 마디에 사도바울의 신학 전체가 농축되어 있는 겁니다. 따라서 모르고 넘어갈 수는 없지요. 알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니까.
디모데전서 2장 11-14절을 보겠습니다.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종용히’는 ‘조용히’와 같은 뜻입니다.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하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남자, 여자 중에서 ‘누가 주도권을 쥐어야 하는가?’ 하는 그 문제를 ‘남자가 쥐어야 한다. 아니다. 여자가 쥐어야 한다.’ 단지 남자, 여자 둘만 고려한다면 이는 구원 받기 전의 사고방식입니다. ‘누가 주도권을 쥐어야 할 것인가?’ 하는 그 문제를, 남자냐 여자냐가 아니라 이걸 구원자 아래,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의 기능을 파 해쳐보면 그 안에 남자, 여자가 서로 주도권을 쥐려는 이런 싸움을 종결시킵니다.
남자들아, 이 말씀을 이용해서 여자를 누르지 말라는 것이지요. 다만 이 땅에 내려오신 예수님이 남자라는 것을 인식하라는 말이지요. 왜 구세주가 남자입니까? 왜 여자는 안 되는 거예요? 그것이 고린도전서 11장에 나옵니다.
11장 3절에 보면,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이것을 도표로 그려보겠습니다. 제가 물음을 던졌습니다. 왜 메시야가 여자가 아니고 남자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 문제를 이제 풀어야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1장 7절에 보면,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기에 보면,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이지요. 그러면 여자는 하나님의 형상이 안 되는 겁니다. 우리가 구원 받기 전에는 눈에 보이는 것이 남자요, 여자이기 때문에 누가 주도권을 쥐는가를 자기들 끼리 알아서 해결하려고 해요. 그런데 여기에 구원자가 개입을 하면 남자, 여자 둘 다 어디를 쳐다보는가 하면 하늘에서 내려온 구원자를 쳐다봐요.
그러면 그 구원자 속에 뭐가 담겨 있는가 하면, 고린도전서 11장이 담겨 있고, 디모데전서 2장이 담겨 있어요. 구원의 질서, 구원의 방식, 구원의 원칙과 본질이 들어 있습니다. 이것을 탁 쪼개서 어떻게 구원 하는가를 보는 거예요. 구원 받지 않은 사람은 관심이 없겠지요.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 밑에 예수님이 계시고, 예수님 밑에 남자 있고, 남자 밑에 여자가 있지요. 이 질서는 어떤 계통, 어떤 흐름을 보여주는 거예요.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면서 어떤 흐름이냐는 것은, 남자가 여자와 비교해 볼 때(다른 사람과의 비교 말고. 하나님이나 예수님과의 비교 말고) 남자가 여자와 비교해 볼 때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이 되고,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 됩니다. 고린도전서 11장에 나오지요?
그렇다면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지요. 사람은 남자, 여자 둘 다를 포함하지요. 하나님의 형상은 따로 있어요. 신약에 보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형상이고,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 쪽에 계신 분(하나님, 예수님 다 포함되지요). 우리 사람 쪽은 아니지요. 사람 쪽은 아니고 사람 위쪽에, 하나님 쪽에 계신 분들은 전부 하나님의 형상이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아래쪽 인간을 만든 거예요.
사람이 존재하는 이유가 뭔가? 예수님의 속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여기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의 내막을 보여주기 위해서 남자가 태어나야 했고, 여자가 필요했단 말입니다.
구원 받기 전에는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이런 것을 신경도 안 쓰다가 구원 받고 난 뒤에는 달라져요. 구원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 쪽에서 누가 왔지요. 하나님 쪽에서 어떤 분이 오셨다는 것은 ‘너 구원 받아야 해! 구원 안 받으면 안 돼’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이 뭔지를 알아야 하고, 하나님의 본질을 알아야 합니다.
“저는 신을 아는데요.” 신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분에 의해서 오신 분, 구원자를 알아야 돼요. 구원자를 알게 되면 우리는 어디에 빠져 들어가는가 하면 이 질서 속에 빠져 들어가요. 그 질서를 고린도전서 11장에서는 ‘하나님의 교회’라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11장 22절에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이렇게 되어 있지요. ‘하나님의 교회’라는 말이 나오지요? 하나님의 질서가 형성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질서가 어떻게 형상 되느냐?
아까 제가 ‘메시야는 왜 남자여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져놓고 설명하는 겁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님 쪽은 하나님 형상이고 이쪽은 하나님 형상대로 만든 피조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이 피조물을 만든 이유는 하나님 형상의 본질을 담아내기 위해서 그렇게 한 거예요.
담기게 하는데, 남자, 여자를 분리시켜 놓고 남자만 하나님의 형상으로 간주하고 여자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져야 될 마지막 결과물, 결실 이게 영광이에요. 하나님의 형상께서 무슨 일을 했는데 그 일이 ‘아이고 만족스럽다.’ 하고 손 털고 ‘야, 이것은 내 영광이야!’ 영광이 무슨 뜻입니까? ‘야, 그놈 참 잘 빠졌네.’ 자기의 모든 노동과 열정을 다 퍼부어서 생긴 그 무엇 아닙니까.
논리가 어렵기 때문에 잘 이해하지 못할 수 있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좀 쉽게 따라올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신부로 만들었어요. 예수님은 신랑입니다. 남자, 여자 만들어 놓고 예수님이 자기가 만든 피조물 이미지를 사용해요. 자기 옷을 벗어버리고 자기가 만든 이미지의 옷을 입어요. 그러면 예수님은 무슨 이미지가 됩니까? 신랑 이미지. 그리고 구원 받은 우리는 무슨 이미지? 신부. 아내 이미지. 호세아에 나오지요. ‘나는 네 남편이 되고--’
남편이란 말은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남자 옆에는 여자가 있지만, 그 남자가 남편이 되면 그 여자는 아내가 됩니다. 남자, 여자를 괜히 만든 것이 아니고 남자와 여자가 하나가 되어서 부부가 되는 것이 공연한 것이 아니고 구원 받고 난 뒤에는 그 모든 것이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속성과 본질을 드러내기 위한 도화지로 사용하는 겁니다.
남자가 여자의 머리 된다는 것은, 이것은 남자가 여자를 주관하라는 말이 아니고, 남자의 역할은 ‘내 위에 뭐 있다.’ 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여자야!” “왜 남자야!” “내 위에 누가 있거든. 그런데 너 위에는 그분이 바로 이어지지는 안거든.” 이 말입니다.
예수님 밑에 남자, 남자 밑에 여자가 있는데, 여자 위에 남자가 있는 이유는 남자가 여자보다 더 높다는 것이 아니고, 남자가 뭔가 여자에게 보여 줄 것이 있어요. 너가 내 밑에 있는 것처럼 나도 누구 밑에 있다는 것을 보여 줌으로서 남자는 남자의 구실을 다 하는 거예요. 비아그라 먹는다고 남자 구실을 하는 것이 아니고, 내 위에 누가 있다는 것이지요.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에요. 그리스도는 누가 보낸 자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누가입니까? 하나님. 하나님을 모르면 남자, 여자 저희 둘끼리 다툼이 일어나요. 그러나 구원을 받고 난 뒤에는 위에 있는 질서, 하나님이 예수님 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냈다는 그 질서가 그 질서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고 이 지상에 남자, 여자에 까지 확산돼요.
구원 받고 난 뒤에는, ‘아하 남자라는 것이 남자 나를 위한 남자가 아니고 누군가를 보여주는 남자구나.’ 또 여자는 ‘아하 여자는 그냥 여자가 아니라 누구를 보여줘야 될 임무를 띠고 이 땅에 여자로 태어났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남자, 여자를 통해서 보여주는 것이 뭐냐 하면, 남자는 형상 노릇 하고 여자는 영광 노릇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이 결국 너희들을 영광스럽게 만든다는 이 구원의 스토리를 우리 둘이 만나서, 만날 때마다 확인하는 거예요.
왜 구원자가 남자여야 하는가 하면, 남자가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우주를 다스려야 될 그 임무를 남자로 태어난 메시야가 이 남자를 대표해서 모든 것을 다 이루는 거예요.
이 점을 보충하기 위해서 고린도전서 11장 8절을 봅시다.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이게 말이 됩니까?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래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답니다. 이게 언제 적 이야기입니까? 이것은 창세기 2장에서 단 한번 있은 이야기지요.
단 한번인데 그 한번을 지나간 한번으로 보지 않고 계속되는 한번으로 규정하겠다는 거예요. 여자가 남자를 만든 것이 아니고 남자가 여자를 만들었다는 그 원리를 창세기 2장 그 때 그 시절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계속 이어가겠다는 것인데, 그 말은 하나님의 뜻을 남자, 여자 속에 계속 남겨 두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난 너희들 포기 안 했다.’ 이 말이거든요. 너희들이 남자, 여자로 태어났다는 것은 너희들에게 하나님의 속성이 들이닥친다는 말입니다.
9절에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 이것도 창세기 2장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렇지요?
10-11절에 “이러므로 여자는 천사들을 인하여 권세 아래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지니라.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12절에 보면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으나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이 말은 창세기 이후에 모든 인간이 예수 믿든 안 믿든 다 인정하지요. 남자 어디서 태어납니까? 엄마, 여자가 낳아야지요. 남자에게는 자궁이 없어요. 왜 남자는 아기를 못 낳는가? 자궁이 없기에. 없다는 것은 없어도 괜찮기 때문에. 한 번 낳은 것으로 계속 낳기 때문에. 무슨 말인가 하면, 처음에 남자가 여자를 낳았잖아요. 남자가 낳은 여자가 백날 남자 낳아봤자 그 여자는 누가 낳았습니까? 남자가 낳았으니까 남자가 계속해서 여자의 머리역할을 해야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형상 역할을 해야 되는 겁니다.
형상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그 형상이 만든 결과물, 영광이 나중에 있어요. 남자가 우선이라는 것은 힘이 세서 우선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할 때 형상으로 창조했고 형상은 반드시 영광을 회수한다는 그 법칙을 남자, 여자한테 적용시키다 보니까 남자가 먼저고 여자가 나중이기 때문에 먼저난 자에게는 형상이라는 속성이 돌아가야 되고, 나중 된 여자한테는 영광이란 것이 맡겨져야 되고. 그래야 짝을 이루어서 형상이 영광 만든다, 형상이 알아서 영광되게 한다는 그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는 말이지요.
그 작업을 누가 하느냐 하면 여자가 남자를 낳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다. 여자가 남자를 낳음으로 말미암아 남자로 하여금 여자를 자기 소유로 만들지 못하게 해요. 그러면 여자는 누구 소유입니까? 하나님 소유죠. 둘 다 피조물이다 이 말입니다. 너 때문에 내가 있는 것도 아니고 내 때문에 네가 있는 것도 아니고 둘 다 하나님을 위해서 있다 이 말입니다.
여자가 남자를 낳음으로서, 이미 앞서서 남자가 여자를 낳았잖아요. 하나님 형상 아닙니까. 그 형상은 뭔가 앞으로 형상되시는 분으로 일을 해야 될 것 아닙니까. 일을 하는 것이 영광을 위하여 할 때 보람이 있거든요. 영광을 위하여 할 때는 하나님께서 여자가 남자를 낳는데 거기에 뛰어들어요. 그러니까 메시야는 여자가 낳아요.
요한계시록 12장에 보면,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까 악마가 달려들잖아요. 창세기 3장 15절에 그 메시야가 남자의 후손입니까, 여자의 후손입니까? 여자의 후손입니다. 남자 없이 태어나요. 여자가 남자를 낳아요. 딸이 아니고 아들을 낳는다고. 이것은 창세기에 맞춰서 하기 때문에 메시야조차도 창세기의 원리 속에 들어와서 여자로부터 태어난단 말이지요.
메시야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니까 사람들이 마리아를 섬기는데 웃기는 이야기에요. 마리아를 섬기면 안 돼요. 주님을 섬겨야지요. 마리아가 나쁘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마리아와 일반 여인은 똑같습니다. 특별난 사람이 아닙니다. 만약 마리아가 예수님 어머니라면 모든 여성은 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어야 해요. 한 사람을 너무 특혜주면 안 돼요. 같이 가야 돼요.
한 번 정리해 봅시다.
구원 받기 전에는 문화 스타일은 무엇을 위해 있다고 했습니까? 살기 위해서. 살기 위해서 사람들은 그 시대의 질서를 따르는데, 질서를 따르다보면 노동은 남자가 합니다. 남자가 힘을 많이 쓰게 되어 있습니다. 자식을 낳으면 아버지 성을 따르고 이것이 부계 사회 아닙니까. 아브라함이 누구를 낳고? 이삭을 낳고.
아브라함은 자궁이 없는데 어떻게 이삭을 낳아요? 이삭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낳았지. 아내가 낳아도 그것은 아브라함이 낳은 것으로 친다. 정철의 시조에도 있지요. “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기르시니 --” 저는 초등학교 때 너무너무 이상했어요. 어떻게 아버지가 날 낳았느냔 말이지요.
막상 내가 자식을 낳아 보니까 느끼는 건데, 어떤 혼혈 가수가 부른 노래인데 [부모]라는 노래가 있어요. ‘부모가 되면 알리라.’ 뭐 그런 가사가 있는데, 저는 부모가 되어서 알았어요. 뭐냐 하면, 부모가 키우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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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유주용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 겨울에 기나긴 밤 어머님하고, 둘이 앉아 옛이야기 들어라.
나는 어쩌면 생겨나와, 이 이야기 듣는가, 묻지도 말아라 내일 날에, 내가 부모 되어서 알아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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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자기가 알아서 커요. “‘가’하면 ‘예’ 하시기 바랍니다.” 동의하지요. 안 그렇습니까? 아이는 스스로 큽니다. 밥 줘서 키우는 것이 아니고 지가 밥 달라고 해요. 갓난아기 때는 울잖아요. 우니까 젖 주지요. 안 울고 있으면 젖 안 줘요. 그 아이에게 세포가 있는데 200조 세포가 살려고 난리를 치니까 살 수밖에 없지요.
성경에서는 누가 키웁니까?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눅12:24)
구원 받기 전에는 누가 해산해요? 지 자식 지가 해산 하는 거예요. 그러나 구원 받은 후, 고린도전서 11장을 아는 사람은 여자가 아들을 해산하는 거예요. 그러나 이것은 자기 자식이 아니고 남자의 자식이 됩니다. 낳기는 자기가 낳아도 자기는 남자의 밑에 있기 때문에 남자의 자식을 낳는 거예요.
내가 낳으면서도 내 자식이 안 되는 그것을 통해서 ‘아하, 구원은 이런 식으로 되는 것이구나.’ 라는 것을 아니까 ‘해산함으로 구원 받는다.’는 것입니다.
“목사님 그 이야기 맞습니까?” “예, 맞습니다.” 고린도전서 11장에 의해서 맞아요.
이사야 54장 1절에 보면 ‘잉태치 못한 자여 기뻐하라.’ 고 하고, 그 다음에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니라.”고 했어요.
잉태치 못하고 생산치 못하는 그것이 노래할 거리가 됩니까? 여자가 시집가서 아기 못 낳으면 그것은 하나님께 저주 받은 흔적이었어요. 사무엘상 1장에 보면 한나가 아기를 못 낳았지요. 그러니까 그것은 누가 봐도 하나님께 저주받은 겁니다. 창세기 20장에서 아브라함이 아비멜렉 추장을 찾아가지요. 아브라함의 예쁜 누이동생을 아내 삼으려고 할 때, 하나님의 벌을 받아서 아비멜렉 모든 가문에 대가 다 끊겼어요.
옛날에 지도자의 집에 대가 끊기면 신이 내린 지도자가 아니라는 그런 풍습에 의해서 죽임을 당합니다. 그러니까 자식을 못 낳는다는 것은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럴 때 아브라함이 기도를 해 주니까 태가 열려서 자식을 낳게 되었거든요.
그때부터 자식 낳는 것은 누구의 소관이다? 하나님의 소관이지 인간 소관은 아니에요. 인간 소관 맞는데 이게 구원의 입장에서, 구원 받은 사람에게는 그것이 새로운 현실로 주어진단 말이지요. 아기 못 낳았다고 지옥 간다고 생각하지는 말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잉태치 못한 자가 왜 노래를 해야 되느냔 말이지요. 우리로 하여금 잉태치 못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우리 구원, 우리가 복 받는 것에 대해서 우리 자신을 무능자로 밀어붙이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을 받게 되면 내가 계속 무능자라는 것을 느끼게 하는 것이 성령의 역사에요. 그래서 제가 수요일 설교하면서 이사야 54장은 반드시 53장을 거쳐야 됩니다. 53장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이사야 53장에서 말하는 것은 우리를 어디로 몰아넣습니까? ‘구원자 떴다. 고맙네.’ 이것이 아니고, ‘구원자 떴다. 우리는 졸지에 죄인 되었다.’ 결국 빛이 떴다는 것은 우리는 어둠이라는 것이 밝혀져요. ‘구원자 떴다.’가 그분은 의인이고 우리는 죄인이 됩니다.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어요.
죄인이 뭐냐 하면, 죄인은 기뻐할 필요도 없고, 노래할 필요도 없고, 잉태할 필요도 없고, 그냥 죄인으로 죽으면 그만이에요. 그런데 54장에서 ‘너희는 죄인인데 너를 위해서 내가 대신 희생을 함으로 말미암아 분명히 너는 잉태치 못한 자요 자식 없이 저주 받을 놈인데 노래하고 기뻐해라. 잉태치 못한 너희를 위해서 내가 잉태케 했다.’는 것입니다.
잉태케 하는데 이것이 53장에 보면 ‘고난’으로 된다. 십자가 고난으로 잉태한다. 그러니까 십자가 바라볼 때마다 우리는 무능자라는 것을 알고, 또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을 아는 겁니다.
제가 지난 주일 오전 설교 끝부분에 뭐라고 했는가 하면, ‘십자가는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는 우리가 처음부터 죄인인 채로 살기 위해서 십자가 졌다.’ 십자가의 의미가 뭐냐? 우리는 죄인으로 살아야 된다는 것을,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나야 된다는 사실을 알려 주기 위해서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죄인으로 태어난 게 우리의 팔자인데 구태여 의인 되려고 하는 것이 우스운 거예요. 우리 팔자가 죄인인 팔자에요. 우리가 죄인 되어야 주님의 의가 빛나는 거예요. 새삼스럽게 죄 지을 필요 없어요. 죄 안 지어도 그냥 죄인이에요.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것이 맞아요.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었다는 말은, 조직신학이나 기존의 칼빈주의에서는 ‘우리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 씨앗이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그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지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가 만들어졌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우리 속에 어떤 일부가, 형상의 일부가 들어온다는 뜻이 아니고, 99% 죄 지었지만 1%는 형상이 들어온다는 말이 아니고, 우리는 통째로 죄인 되어야 될 이유가 하나님께서 통째로 하나님 형상이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이냐를 보여주기 위해서 필요해서 만들어졌다는 의미에서 형상대로 만들어진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는 그것이 로마서 8장 29절에 보면, 맏아들의 형상을 본받아요.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의 원형은 이미 정해졌어요. 우리는 그 맏아들 예수님을 본받게 되는데,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는다는 말이 뭐냐? 영광스럽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다. 남자가 애쓰고 수고한 모든 것이 여자에게 돌아간다 이 말입니다. 예수님이 수고한 모든 것이 누구한테 돌아온다? 신부인 우리에게 돌아온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남자는 여자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라.’고 했어요. 이것은 마치 주님이 교회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처럼 하라는 말입니다. 아무도 안 바칩니다. 왜?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아무도 안 바칩니다. 우리는 잉태치 못한 자이기 때문에 말씀을 잉태할 능력이 없어요. 우리는 분명히 못했는데 결과적으로는 노래하고 즐거워하고 찬양해야 된다. 왜? 우리는 못하지만 주께서 우리를 가지고 그렇게 해 내신단 말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노래하고 즐거워하고 감사할 뿐입니다.
여자가 남자의 영광이라고 했는데, 그러면 여자를 학대하는 것은 ‘나는 인간도 아니다.’는 것입니다. 내가 온 정성과 노력을 바쳐서 만든 작품이 바로 여자인데 자기 작품을 자기가 때린다는 말은 나는 너와 상관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갈라서야지요. 왜 갈라서야 하는가 하면, 형상이 아닌 것과 붙어있으면 영광이 안 돼요. 반드시 영광이란 것은 형상이 있어야 영광되거든요.
이제 디모데전서로 돌아옵시다. 이제 해석이 되겠지요.
2장 11절에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누구한테 순종하란 말입니까? 남자에게 순종하는데, 여기서 남자의 정의는 뭐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정의고, 순종할 때 뭘 기대한다? 나는 하나님의 형상에 의해 얻어질 영광이기 때문에, 영광이라는 그 희망, 영광이 된다는 그 자부심으로 즐거이 순종하지요.
즐거이 순종하기 때문에 어떤 때는 순종하고, 어떤 때는 순종 안 하고 이런 것이 아니라 일절(一切), 모든 면에 있어서 항상 순종할 태세가 되어 있지요. 이런 여자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주께서 그렇게 하도록 하십니다. 뭘 통해서? 남자가 형상으로 변하는 그 순간 순종하게 하십니다.
남자는 안 변하는데 여자 혼자 변하는 경우는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왜냐하면 짝을 이루어야 하니까. 형상과 영광이 짝을 이뤄야 하니까. 형상이 형상 안 되는데 영광만 영광 되는 법은 없어요. 왜냐하면 형상이 형상 될 때 영광이 생산되기 때문에.
그러니까 남자가 술 처먹고 와서 “다시는 안 그럴 게. 미안해 여보. 북어국 끓여 줘.” 이렇게 나올 때 일절 순종하면서 북어국 끓여 줍니다. 왜? 회개했잖아요. 그 때 그렇게 북어국 끓여줄 때 자기 자랑하지 마시고 주께서 역사하셨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불신자와 산다는 것은 항상 이혼할 수 있는 대비태세다. 이렇게 봅니다. 그래서 불신자가 이혼하자고 하면 거절하지 말고 이혼해 주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혼하지 않고 그냥 교회도 안 다니면서 붙어살거든 행여 나로 인하여 구원될 수 있을까 해서 갈라서지 말고 같이 살라고 고린도전서에 나옵니다.
그것을 보면 얼마나 배짱이신지 예수님이. 배짱이 셀 수밖에 없지요. 구원자가 와서 구원했는데 그보다 더 큰 배짱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구원 받기 전에는 원칙이 이미 구원 받았다가 아니고 어찌했든 살아남기 위해서 힘 있는 남자, 돈 되는 남자에게 무조건 붙어 있어야 밥이라도 얻어먹고 사니까 술 취해 개판을 치든 구박을 하든 붙어 사는 거예요. 왜? 여자 혼자 사는 것이 힘드니까. 그 당시에는 여자가 밥벌이를 한다는 것은 몸 파는 짓 외에는 할 것이 없었어요.
여자가 왜 이렇게 약한가 하면, 육체가 약해서 약한 것도 있지만 옛날 문화스타일이 여자에게 정보를 취득할 수 있는 능력, 학교를 안 보냈어요. 신명기에 보면 모든 말씀을 남자에게, 아들에게 가르쳐 줘요. 사람이 힘세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무식하면 고개 숙이고 들어가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옛날 부부들 사는 것 보면 남편이 아내에게 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어요. ‘이 무식한 것!’ 뭘 가르쳐 줄 때 그냥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꼭 한 마디 하고 가르쳐 줘요.
요즘은 달라져서 아내가 퇴근하면 “이제 오십니까?” 하고 인사하고 그렇게 하지요. 왜냐하면 여자 없으면 못 살기 때문에. 월급도 여자가 더 많고, 집에서 살림을 살아도 남자보다 여자가 더 잘 하고. 아내가 하는 일을 사람 써서 해 보세요. 돈이 얼마나 드는지. 그래서 여자를 상전으로 모시지요.
시장에 가면 전부 여자가 장사를 해요. 왜 그런 줄 아세요? 남자가 장사하면 손님이 안 와요. 인상도 험악해서 ‘살거요, 말거요?’ 하는 식으로 나오면 누가 그 가게에 가겠어요. 애살을 가지고 손님 붙드는 것도 여자가 붙들지 남자는 그렇게 안 해요. 개 코도 아무것도 없으면서 배짱을 부려서 손님 다 떠나가요. 남자는 조용히 뒷방에서 있는 듯 없는 듯이 있다가 혹시 불량배가 오면 막아주고 그 외에는 숨어 있어야 해요. 그래야 장사가 돼요. 새벽에 물건이나 해주고. 시장 바닥은 다 그렇습니다.
구원 받기 전에는 항상 살아야 되기 때문에, 남자든 여자든 먹고 살면 그것이 진리고, 선도 나에게 이익이 되면 그것이 선이에요. 진리고 뭐고 없어요. 내가 잘되면 그것이 선이고 진리입니다.
그러나 구원 받고 난 뒤에는 하나님께서 이제 이미 구원 받았잖아. 누구 때문에? 남자 때문에. 무슨 남자? 남자의 머리되시는 남자 때문에. 누굽니까? 예수님. 예수님께 이미 구원 받았기에 우리는 몽땅 그 남자(메시아)의 신부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일절 순종함으로, 이미 우리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신 예수님께 순종하는 신부가 되는 거예요.
‘예수님께 순종합시다.’ 라는 것을 어떤 역할을 통해서? 남자, 여자의 역할을 통해서 가정 내에서 그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우리는 주님께 순종합시다.’ 라고 하면서 남자, 여자가 같이 사는 거예요. 이것은 구원 받은 입장에서 그렇게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그걸 모르고 ‘남편 없는 사람 구원 못 받겠네. 애기 없는 사람 구원 못 받겠네.’ 그런 식으로 하지 말란 말입니다.
이것은 이미 구원 받은 자의 입장에서 구원의 원리가 담겨 있는 겁니다. 아기 낳는다고 다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메시아를 아는 사람은 성령께서 그 사람에게는 이러한 원리로 너희가 구원 받았다는 것을 말씀대로 가르쳐 주는 이런 일들이 있다 이 말입니다.
계속해서 디모데전서 2장을 봅시다.
12-14절에 “여자는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옛날 선배들의 부부싸움 한 것을 가지고 도대체 몇 만 년을 우려먹습니까? 아니 우리가 싸웠습니까? 우리가 꾀임에 빠진 거예요? 옛날 우리 조상이 한 거잖아요.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가 부부싸움 한 것 때문에 우리가 왜 영향을 받아야 합니까?
이것만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참 재미있고, 어렵지요?
원래 하나님의 뜻이 선악과 따먹으면 죽는다는 것을 원래 누구한테 이야기 했느냐 하면 아담에게 먼저 이야기를 했답니다. 창세기 3장에는 안 나타나는데 디모데전서에 보니까 아담이 가르쳤데요. 그런데 하와가 혼자 있을 때 뱀의 유혹을 받아 가르침을 위반했다는 겁니다. 이 원리가 그대로 우리에게 이어져서 부부는 될 수 있는 대로 떨어져 살지 말고 합방해라. 떨어져 자면 사탄의 시험에 빠질 수 있다는 대목이 있어요. 고린도전서에 나오지요?
자, 그러면 신혼부부들은 같이 자요. 그런데 아기 낳고 난 뒤에 그 아기가 새벽 2시, 3시 되면 울어요. 남편은 잠을 자고 직장에 출근해야 일을 할 수 있는데, 그 때는 편의상 남편 잠을 재우기 위해서 다른 방에 자도록 하고 엄마는 아기와 같이 자요. 이게 하루 이틀 계속 되면 습관이 돼서 이제 따로 자는 것이 편해요. 남자만 편하게 아니에요. 여자도 편해요. 여기에서 더 편하면 곤란한 일이 생겨요. 더 편해지면 외롭잖아요. 그러면 남편은 이상한 생각을 해요. 마찬가지로 아내도 맞바람을 피우는 수가 있어요.
그러니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무식한 남자라도 그에게 배우라는 말이 아니고 가르침이 중요해요. 뭘 가르치느냐? 어떤 경우라도 가르침을 떠나서는 안 된다. 무슨 가르침? 복음의 가르침. 복음이 그 가정에서 떠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두 사람 다 복음이 아닐 경우에는 복음도 아닌 것을 가지고 여자가 나설 이유가 없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복음의 내용이 뭐예요? 옛날 옛날이 어떤 여자가 남편의 가르침대로 안 하고 엉뚱하게 뱀의 말을 듣고 죄를 범했다는 그 가르침의 내용을 가르치면서, 같이 보면서 자기가 가르치겠다고 하는 것은 복음의 내용과 안 맞단 말이지요.
같이 복음을 알 경우에는 ‘우리 옛날처럼 당신도 제대로 한 번 가르쳐 봐’ 이렇게 될 수 있는데, 만약에 남자가 모르고 여자가 알면 어떻게 돼요? 여자가 가르쳐야지요. 중요한 것은 누가 가르치냐가 아니고 뭘 가르치는가가 중요하기 때문에. 지금 그것을 이야기해요. ‘남자들아, 너희들은 가르치고 여자들은 듣기만 해라.’ 이것이 아니고, 그 뒤에 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남자가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라.’고 했지요.
여러분! 대충 무슨 이야기인지 아시겠지요?
어떤 집에 군대 이야기를 여자가 더 많이 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 여자는 하사관 출신이고 남자는 방위 출신이에요. TV에서 군대 이야기가 나오니까 여자가 군대 이야기 할 수 있단 말이지요. 왜? 여자지만 제대로 된 군 생활을 했고, 남자는 군 복무를 도시락 챙겨서 출퇴근했거든요. 그러니까 남자는 군대에 대해 잘 몰라요. 동사무소에서 방위로 근무했기 때문에 군 내무반 생활을 안 해 봐서 몰라요. 이런 경우에는 군에 대해서 누가 가르쳐야 돼요? 아는 사람이 가르쳐야지요.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이 경우는 일단 둘 다 안다고 치고, 둘 다 성도일 경우에는 남자한테 가르치는 권한을 양보하라는 말이지요. 왜? 둘 다 아니까. 결국 이것은 남자가 ‘엄매, 기 살아!’ 가 아니고, 복음의 내용대로 남자가 솔선수범해야 한다는 이 부담을 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대목을 사실은 못 본 것으로 슬쩍 넘기고 싶은 사람은 여자 쪽이 아니고 남자 쪽입니다. “나는 디모데전서 모른다.” 이렇게. 왜? 가르친다는 말은 결국, 여자는 유혹에 빠졌잖아요. 그러면 가르치는 자는 유혹에 안 빠져야 한다는 부담을 갖게 된단 말이지요. 이 말은 곧 여자는 유혹에 빠지더라도 용서가 되고 남자는 유혹에 빠지면 안 된다는 말이고, 더 나아가서 남자는 여자로 하여금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거룩한 손을 들고 기도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남자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그렇게 하고야 마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그냥 생긴 것이 아니고 다 뜻이 있어서, 뜻이 따라와서,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덮쳐서 우리가 구원 된 줄 알았습니다. 생활에 변화가 있게 하시고, 그 변화를 주도하시는 분이 예수님인 것을 우리가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08. 7. 14. 08:32 녹취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