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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08대구강의08-주님의전쟁7자유게시판마태복음

08대구강의08-주님의전쟁7

이름 : 구득영(IP:203.223.97.201)

08 대구강의 8 - 주님의 전쟁 7 - 지옥의 하나님 29

08,06,16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주의 이름과 내 이름 !!

오늘은 우리 교재 104페이지에 있는 '2. 주의 이름의 증언'부터 하겠는데, 지난 시간에 우리는 전쟁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는데, 그런데 그 전쟁이 우리의 이름으로 하는 전쟁이 아니라, '주의 이름'을 위한 전쟁이기 때문에, 그렇게 되면 '내 이름'은 전쟁에 있어서 장애물이 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구약을 보면 주의 이름으로 전쟁을 하는데, 그 전쟁에 자꾸 방해가 되는 것이 바로 '나의 이름' 이라는 말이다. 물론 자기 이름 안에는 자기 존재가 들어있고, 그렇게 존재가 들어있다는 말은, 자기의 자아가 들어있고, 그런 자아가 들어있다는 것은 자기의 경험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우리가 살아온 경험이 주님의 존재, 주님의 경험, 주님의 어떤 기능, 즉 주님의 하실 일을 우리의 경험이 가로막고 있다는 것인데, 주님의 전쟁에 있어서 말이다. 그렇게 이 전쟁에서 방해한다는 것은 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가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로마서 5장에 나오고 말이다.

(롬 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 과연 무엇이 거룩이고, 의(義)인가?

그런데 성경에서 이렇게 주의 이름으로 전쟁을 하는 것을 두고서 '거룩' 이라고 하고, 또 '의(義)'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 이름에서 나온, 즉 우리 경험에서 나오는 것은 결코 '거룩'도 아니고 '의'도 아니라는 말이다.

하지만 인간은 자기 존재가 있어버리면, 그 존재라는 것은 자기의 정당성을 부각하기 위해서 자기의 잘남을, 즉 자기가 옳다고 하는 것을 우기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주의 거룩과 그 의를 위하여 방해가 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그것은 바로 인간의 존재가 자기의 거룩과 의를 가지고 주님의 거룩과 의를 공격하게 된다는 말이다.

◈ 저는 성경말씀대로 살았습니다 !!

그런데 인간의 자아가 공격을 하면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 "나는 율법대로 살았습니다" 라고 하는데, 요즘 교인들의 말로 하면, "성경말씀대로 살았습니다" 라고 말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자기만의 의를, 이것은 결코 타인에게 빼앗기지 않는 것인데, 즉 자기가 기도해서 얻은 것은 자기의 기도 덕분이지, 남이 기도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 십자가 사건 - 이름과 이름의 충돌현장 !!

그렇게 타인을 배척하고 자기 고유의 거룩과 의를 가지게 되는데, 그 핑계는 "나는 율법대로 살았습니다" 라는 것이고 말이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인데, 이들이 누구를 공격했는가? 주의 이름을 공격하게 되는데, 바로 그 충돌로 인하여 벌어진 사건이 '십자가 사건' 이라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의와 거룩을 우리에게 주려고 오셨는데, 이미 이 세상에 우리를 대표해서 바리새인들이 자기 의(義)의 고수로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는 말이다.

이것을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장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는데,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바리새인들은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인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물며 이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낫지 못하다면, 그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고 말이다.

(마 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크로스 빌리지의 박윤진씨의 글을 보면, 여기에 대해서 재미있게 적은 것이 있는데,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율법을 이야기하고 나서 또 송사에 관해서 말씀하신 것을 언급하는데, 즉 미리 화해하지를 않고 재판장에게 걸리면, 그때 한 호리라도 완벽하게 처리하지 않으면 감옥에서 나오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율법은 지킬만한 것을 골라 지켜서 마일리지를 쌓는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을 완벽하게 다 지켜야한다는 말이다.

(마 5:25)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마 5:26)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 하지만 몸통에 하자가 있으니 !!

제가 퀴즈를 하나 내겠는데, 만약에 왼손이 도적질을 하고 오른손이 구제를 했다면 그 사람은 착한 사람인가? 당연히 아닌데,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따로 따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몸통을 보신다는 것이다. 아무리 오른손이 착한 일을 해도 왼손이 도적질을 한다면, 무엇에 문제가 있는고 하니, 바로 그 하나의 같은 몸통인데, 즉 몸통에 하자가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야고보서 2장에 보면, 온 율법을 지키다가 하나라도 어기면 전부를 어긴 것이 된다고 한다는 말이다. 물론 우리는 몸통이 아니라 부분을 봐달라고 하지만,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아니라 같은 몸통에서 나온 나쁜 질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한 몸통에서 나쁜 것이 나왔다는 말은, 그 몸통의 질에 분명 문제가 있다는 말이다.

(약 2:10)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자가 되나니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기를, "악한 자는 모든 것이 악하고, 선한 자에게는 모든 것이 선하다" 라고 하셨는데, 즉 예수님은 부분이 아니라 몸통을 보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좋은 나무에서 나쁜 열매를 맺는 법이 없고, 나쁜 나무에서 좋은 열매를 맺는 법이 없다는 말이다.

(눅 6:45)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 철학과 종교는, '공격성'을 몰라 !!

그것은 바로 인간의 업적이나 마일리지를 제쳐 버리고, 예수님의 몸통과 우리 인간의 몸통을 곧 바로 연결시켜버리는데, 즉 그렇게 주의 이름과 우리 인간의 이름을 직통으로 연결시켜버리면, 거기에서 "우리는 못났다, 우리는 참으로 부족하다" 라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 인간의 이름이 '공격성'을 가지고 있음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과 이 세상의 종교나 철학과의 차이점인데, 불교의 경우에도 공부해보면, "부족하다, 못났다, 연약하다, 모자란다" 라고 하는데, 물론 철학도 그러하고 말이다. 즉 "인간이 되어서 어떻게 천지를 다 알 수 있겠는가? 정말이지 부족하다" 라고 하지, 무엇이 없는고 하니, 바로 이 공격성으로 나가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전쟁' 이란 개념을 집어 넣어버리면 어떻게 되는가? "우리는 부족하고 못났다" 라는 것이 아니라, 누구를 공격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누구인고 하니, 바로 예수님이라는 말이다. 즉 "예수님, 당신은 무엇이 그렇게 잘났습니까?"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적극적인 공격성으로 말이다.

◈ 사도바울은, 왜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하는가?

예수님은 그런 배후에 있는 주동자를 무엇으로 보는고 하니, '악마'로 보는데, 그래서 사도바울은 에베소서 6장에서 말하기를,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씨름대상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라, 공중권세를 잡은 자, 즉 악마와의 싸움이라는 말이다. 물론 강호동과 씨름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엡 6:11)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엡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이렇게 분명하게 악마와의 싸움인데, 그런데 교인들에게 왜 교회에 나오지 않느냐고 물으면, "아이쿠, 바빠서요" 라고 하는데, 그것이 무슨 뜻인고 하니, "나올 마음은 있는데, 믿음이 부족해서" 라는 의미인데, 그러니 교회가 이렇게 있으니 여건이 허락되면 갈 수 있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공중권세 잡은 자와의 싸움이라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 그러므로 자기가 약간만 더 노력하고 부지런을 떨면,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는 여력이 자기에게 있다는 것이다.

◈ 사도바울의 길을 막은 '사단'에 대해서 !!

그런데 사도바울의 입장이 무엇인고 하니, 바울서신의 난해한 점 가운데 하나가 바로 데살로니가전서 2장에 나오는 말씀인데, "내가 너희에게 가고자 하여도 사단이 막았도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냥 가면 되는데, 그것도 하나님이 막은 것도 아니고 악마가 막았다고 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바로 지금 사도바울의 마음속에는 현재 우리가 전쟁 중에 있다는 것인데, 즉 악마와의 전쟁 말이다.

(살전 2:18) 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번 두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단이 우리를 막았도다

지금 우리가 교재 104페이지에 나오는 '주의 이름의 증언' 내용을 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평소에 그냥 생활하다가 전쟁개념으로 끌어올리려면 문제가 되는 것이, 그래도 상대방이 눈에 보인다면 "다같이 죽자" 라고 하면서 싸우겠는데, 자동차 접촉사고가 났을 때 하듯이 말이다.

그런데 상대방이 보이지도 않는데 싸워야 한다면, 어떻게 하느냐는 말이다. 통일교와 싸우라고 하면, 그 쪽에서 나오는 물건도 구입하지 않으면서 나름대로 싸우겠는데, 김정일과 싸우라면 그대로 서로 지역적으로 대치하고 있으니 싸울 수가 있지만, 그러나 문제는 지금 우리의 싸움은 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데 어떻게 싸우느냐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다음 엄마와 아들의 대화를 한번 들어보자.

* 엄마 : 아들아, 우리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마귀와 싸워야 한다.
* 아들 : 엄마, 마귀는 어느 동네에 살아요?
* 엄마 : ? ? ?
* 아들 : 어떻게 생겼어요? 덩치는 어느 정도 예요?
* 엄마 : ? ? ?
* 아들 : 엄마, 뭐해요? 가르쳐줘요?
* 엄마 : ? ? ?
* 아들 : 그것도 모르고, 엄마는 미워.
* 엄마 : ? ? ?

◈ 악마는 항상 미완성, 복음은 언제나 완성 !!

하지만 사도바울의 입장에서는 복음으로 무장을 하면 마귀가 보인다는 것이다. 즉 십자가를 내세울 때만 악마가 보인다는 말이다. 이 악마는 항상 미완성인데, 그런데 복음은 항상 완성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왜 악마가 복음 앞에서만 보이는가?

사단에는 영이 만든 사단이 있고, 육이 만든 사단이 있는데, 이 육이 만든 사단은 우리를 해롭게 하는 것이란 말이다. 어둡고 습기가 찬 곳에서 나타나는 목 없는 미녀(?) 같은 것은 육이 만든 사단인데, 영화 오멘에 나오는 것들도 그렇고 말이다. 그것은 우리 인간의 허망(?)이 그런 사단을 만들어놓고, 그것을 쫓아낸다고 난리라는 것이다. 허망을 말이다.

이런 사단이 누구에게 달려드는고 하니,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에게 접근을 하는데, 축구응원을 한다고 정신이 없는 곳에서는 이런 사단은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가하니 잡념이 생기고, 그런 잡념이 사단을 부른다는 말이다. 사단은 선악의 개념에서 나오니 말이다. 그렇게 혼자 벌러덩 누워서 "나쁜 짓을 하면 안 되는데" 라고 하고 있으면, 사단이 와서 속삭인다는 것이다. 이런 사단은 바로 할 일 없을 때, 만들어지는 그 허망에서 나온다는 말이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사단은 그런 게 아니라, 즉 영으로 만든 사단인데, 그 사단은 양을 탈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꼭 시비를 거는 사람이 있는데, 하지만 이것이 고린도후서 11장에 나온다는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탈인지 아닌지를 우리는 구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고후 11:13)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고후 11:14)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고후 11:15)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 너무나 과격하신(?) 어린양 !!

그리고 이렇게 양의 탈을 썼다는 것은 목자의 모습이라는 말인데, 물론 성질이 더러운 양이 아니고 순하고 아주 착한 양 말이다. 그렇게 사단은 머리를 풀고 피 흘리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아주 어질고 착한 양의 모습으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피는 예수님이 흘리셨는데, 그리고 조금은 역설적인 말이지만,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어린양이라고 하셨는데, 그런데 정작 자기를 어린양이라고 하면서 왜 그렇게 과격한 행동을 하느냐는 것이다. 성전에 가서 마구 다 뒤집어 엎어버리고 말이다.

◈ 악마의 특징은, 복음의 미완성을 주장 !!

아무튼 악마의 특징은 복음의 미완성을 주장하는데, 그래서 예수님의 "다 이루셨다" 라는 것을 악마는 엎어버린다는 것이다.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의 의로 구원을 받고, 그 의는 복음으로 나타나게 되는데, 하지만 그 의가 생성되는 것은 우리 소관이 아니라, 전적으로 어떤 분에게 달려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그분의 약속으로 의(義)가 나타나게 되는데, 그것을 두 글자로 '복음' 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복음은 당연히 인간이 만드는 것이 아니고, 또한 그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믿음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에게 완성된 완제품을 주시는데, 그때 우리는 "맞습니다. 정말 완성품입니다. 더 이상 추가할 것이 없네요" 라고 하면서 받아들일 때, 그렇게 되면 우리 외부에 있던 약속이 우리 내부로 들어오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문자로서 성경에 있던 그 약속이 이제는 우리 안으로 파고 들어와서, 그때부터 우리는 의의 종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약속의 사람이라고 하고 말이다. 창세기에서는 이런 약속의 사람이 바로 이삭이고 말이다.

* 아아쿠, 오랜만입니다. (누가 오셨지?)

로마서 8장에 보면 무슨 말씀이 나오는고 하니, 사도바울이 "누가 너를 송사하리요? 누가 너를 정죄하리요?" 라고 할 때, 지금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아주 성실하게 모든 것을 제대로 잘 하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그게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 그들이 그렇게 제대로 하기 때문에, 아무도 그들을 송사하거나 정죄하면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 왜 우리를 송사하지 못하는가?

그들은 여전히 엉터리이지만, 그러나 그들에게 그런 송사나 정죄를 할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 밑바닥에 보면 아주 희한한 장치가 하나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 장치가 로마서 8장에 나오는데,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그 밑바닥에 까심으로 말미암아서, 그 위에 있는 사람은 그 장치 때문에 아무도 그 사람을 정죄할 수도 없고, 송사할 수도 없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자기가 하얀 눈이 내린 벌판에서 사진을 한 장 찍었다면, 자기가 겨울이 오도록 한 것도 아니고, 눈이 내리게 한 것도 아니고, 이미 그렇게 되어있는 눈밭에서 사진을 찍은 것인데, 겨울철에 말이다. 여름에 코트를 입고 찍은 게 아니고 말이다. 그러니 얼마나 쉬운가? 털코트 하나 입고 사진만 찍으면 되니 말이다. (예가 어찌 좀, ㅋㅋ)

◈ 혹시 그 유명한 '세차장 비유'를 아세요?

제가 어제 아침에 설교를 하면서 예를 들었던 것이 소위 '세차장비유'(?) 인데, 요즘은 세차장에 가서 가만히 차안에 타고만 있으면 모두 자동으로 세차를 해준다는 것이다. 커다란 솔이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면서 거품을 물고 말이다. (사실은 차에서 내려야 하는데, ㅋㅋ)

제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고 하니, 이 세상이라는 것은 자기가 부지런히 설치고 해야 먹고산다고 생각하는데, 하지만 사실은 우리가 아닌 다른 무엇인가가 왔다갔다했다는 것이다. 마치 세차장에서 커다란 솔이 그렇게 움직이듯이 말이다. 자동차는 가만히 있는데 말이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평소에 생각하기를, 자기는 열심히 일하고 예수님은 노는 것으로 여기는데, 자기 눈에 보인지 않는다고 해서 말이다. 하지만 주님은 누구보다도 부지런히 일을 하시는데, 물론 완성의 차원에서 말이다. 그것은 바로 이미 밑바닥에 다 이루었다고 하는 깔고, 그것이 우리에게 스며들도록 일을 하신다는 것이다.

◈ 겨울에는 겨울옷을 입어야 하듯이 !!

제가 지금 '피' 라는 책을 거의 마무리를 다 했는데, 그 책에 보면 무슨 내용이 나오는고 하니, 겨울이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고 하니, 상공 30km가 영하 30도라면, 상공 10km는 영하 10도, 그리고 이 지상은 영하 5도 정도가 되지 싶은데, 예를 들어서 말이다. 그러니 겨울이 되면 하늘만 겨울이 아니라 이 지상과 우리 뼛속까지도 다 겨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옷을 두껍게 입어야 한다는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사람들이 성경에서 말하는 세계와 이 세상을 따로 구분을 하려고 하는데, 즉 성경에서는 예수님이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이 세상에서는 자기가 일해야 된다고 말이다. 그래서 십자가를 이야기해도, "아하, 옛날에 그런 일이 있었지"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 안은 겨울인데, 자기는 여름이라는 말이다. 즉 자기는 성경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 성경에 나오는 현실이 우리 몸 깊숙이 !!

성경말씀이 이야기하는 세계가 허구가 아니라 엄연한 현실이라면, 그 현실세계가 우리 피부 속까지 스며들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 몸 자체가 성경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이 이렇게 있다면, 우리가 그것을 열심히 공부해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이 말씀이 우리를 파고 들어온다는 것이다. 우리의 몸 속 깊숙이 말이다. 심지어 우리가 성경말씀을 보지 않는 경우에도 말이다.

◈ 심판도 역시 무덤 속까지 !!

불교신자가 절에 가는 경우에도 그 뒤를 말씀이 따라가는데, 아닌가요? 맞다는 것이다. 그렇게 뒤를 따라가는데, 물론 구원이 아니라 심판을 하려고 그 뒤를 끈질기게 쫓아간다는 말이다. 심지어는 죽어서도 따라가는데, 무덤 속까지도 말이다.

그래서 요한복음 5장에도 나오듯이, 무덤에 있는 경우에도 인자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 얼마나 끈질긴가? 히브리서 9장에서는,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하신 것이고,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했고 말이다.

(요 5:27)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요 5:28)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히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다시 말해서, 사람이 이렇게 실체가 있으면 또 그림자가 있는데, 이 그림자에 해당되는 것이 말씀이라는 것이다. 따라온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그것을 두고서 인간을 '피조물' 이라고 하는데, 자기가 피조물이 되지 싫다고 해서 피조물이 아닌가? 그런 법은 없다는 말이다.

* A : 나, 피조물이 안 할래.
* B : 그러면 당신은 누가 만들었는데?
* A : 그런 것은 몰라.
* B : 모르면 안 되는데?
* A : 바빠서 관심이 없어.
* B : ? ? ?

성경을 덮었다고 해서 성경말씀과 무관한 세상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인데, 지금 한국교회가 목사에게 요구하는 것이, "목사님, 성경을 좀 덮어주시고, 우리가 원하는 것을 좀 채워주세요" 라고 하는데, 그래서 목사가 성경을 이야기하면 눈치도 없는 목사라는 말이다.

그야말로 목회도 전혀 할 줄을 모르는, 즉 교회를 말아먹으려고 작정을 했다는 것이다. 아니, 물건을 팔려면 소비자가 원하는 상품을 만들어놓아야지, 소비자가 원하지도 않는 것을 어떻게 팔 수가 있느냐는 말이다. 그렇게 사람들이 교회에서 원하는 것은, 자기의 의를 축적해서, 그 의를 가지고 천국도 뚫을 수 있는 영적인 여력을 달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완성이 아닌 미완성일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 영적전쟁 - 미완성과 완성의 충돌 !!

영적싸움에서 마귀의 무기는 바로 이런 미완성이라는 말이다. "니는 아직 멀었다. 그래 20년 동안을 도를 닦았나? 그러나 그것 가지고는 부족해. 좀 더 열심히 닦아야지"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런 것은 곧 마귀의 음성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반해서 복음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의가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라는 것인데,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는 더하거나 뺄 것이 없이, 그 자체가 바로 완성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완성된 것이기에, 그것이 우리에게 스며드는 것조차도 이미 완성된 상태에서 스며들게 되기 때문에, 80%이니, 90%이니, 그런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냥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푹' 잠기고 스며들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제가 이런 주장을 이야기하면 시비를 거는 사람이 반드시 생기게 되는데, 드디어 한 사람이 나타나셨는데, 한번 들어보자는 말이다. (그런데 그 양반 성함이 좀 거시기 한데, ㅋㅋ)

* 노근호 : 이근호 목사, 계신가?
* 이근호 : 예, 어서 오세요.
* 노근호 : 내가 자네에게 볼 일이 좀 있어서 말이지.
* 이근호 : 예, 말씀하세요.
* 노근호 : 당신 말대로 하면, 가만히 있어도 성화가 된다는 말이지?
* 이근호 : 그런 뜻이 아니라, 말씀이 젖어든다는 뜻입니다.
* 노근호 : 그러면 교회에 가지 않고 집에 가만히 있어도 말이지?
* 이근호 : 바로 그렇지요.
* 노근호 : 에끼, 이 양반이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 이근호 : ? ? ?

◈ 여보, 우리 집구석이 왜 이래?

이러한 부류의 사람이 생각하는 성경말씀은, 아무튼 자기가 좋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하지만 제가 이야기하는 말씀은, "나는 죽어도 당연하다. 인생은 허무하구나" 라는 것이고 말이다. 전도서 1장 1절 말씀이 무엇인가? '헛되고, 헛되도다' 라는 것인데, 자기 집구석에 한번 가보라는 말이다. 얼마나 헛된지, 그야말로 피부 깊숙이(?) 깨닫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 긍휼과 진노의 그릇으로만 !!

무슨 말인고 하니, 인간이 피조물인 이상 말씀대로 되지 않을 수가 없는데, 즉 인간은 도저히 말씀을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는 긍휼의 그릇이고, 또 다른 하나는 진노의 그릇인데, 그런 확정된 영역에서 도저히 빠져 나올 구멍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예수님의 속성을 보여주기 때문에 말이다. 하나님께서 그런 목적으로 이 세상을 만드셨다는 것이다.

(롬 9: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롬 9:22)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롬 9:23)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 사도바울의 특강 - 마귀와 싸우는 방법 !!

오늘 강의의 핵심이 무엇인고 하니까, 지금 사도바울이 마귀와 전쟁을 하려고 하는데, 그래도 전쟁을 하려고 하면 마귀든지 뭐가 되었든지 간에 적군이 낡은 초가집이든지 들어있든지 해서 보여야 하는데, 그런데 그 상대방인 마귀가 보이지 않으니 어떻게 싸우느냐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도바울은 싸우라고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제가 아까도 말했는데, 이 놈의 마귀가 보일 때가 있는데 언제 보인다고 했는가? 그것은 바로 자기가 복음에 사로잡힐 때, 그때 마귀도 함께 붙어서 온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십자가 복음이라는 것은 반드시 피해자인데, 그러니 그 맞은 편에는 가해자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피해자와 가해자가 만나야 십자가 복음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그분의 십자가의 피를 보고서, "이이쿠, 피를 흘리셨네" 라고 하면서 마치는 것이 아니라, "아니, 예수님이 피를 왜 흘리셨지?" 라고 하는데, 그 예수님을 누가 죽였는고 하니,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너무나도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택함을 받은 자가 그렇게 하겠지만 말이다.

◈ 아하, 난 자랑할 것이 없어 !!

다시 말해서, 우리가 죽인 바로 그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다시금 은혜를 베푸셨는데, 그분이 우리 죄를 죄로 갚지 않으시고 도리어 용서로 다가오시게 되는데, 바로 그럴 때에 비로소 우리는 무엇을 깨닫게 되는고 하니, 더 이상 우리 자신에 대해서 자랑할 것이 없음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왜 예수님을 미워하고 싫어하는가? 이것도 강의를 처음에 시작할 때 이야기했는데, 그것은 바로 자기 안에 자기 의가 자리를 잡고 있고, 그러한 자기 의는 곧 자기 존재의 정당성, 바로 그것이란 말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당연히 존재할 가치가 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라는 말이다.

◈ 결핍은 욕망을 정당화한다 !!

서울에서 강의를 할 때 한번 써먹은 문장인데 여기서 다시 써보면, "결핍은 욕망을 정당화한다" 라고 말이다. 아무 멋있는(?) 문장인데, 여기서 말하는 욕망은 쉽게 말하자면 욕심인데, 이 욕심이 밖으로 뛰쳐나오면서 "아, 욕심이 잉태해서 죄를 났는다" 라고 성경에서 이야기를 하니, "제가 잘못했습니다" 라고 처음에는 제법 그럴싸한 말을 하는데,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또 생기고 또 생긴다는 말이다.

자기는 욕심을 부리지 않으려고 하는데, 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욕심이 '툭' 하고 그만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도 어떻게 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렇게 인간은 자기 탓이 아닌 것으로 돌리려고 하는데, 즉 그렇게 현재 자기 수준과 높은 수준의 그 결핍이 자기 욕망을 정당화한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정당화는 '옳다' 라는 의미이고 말이다.

◈ 동양철학에서 말하는 선(善) !!

동양철학에서 선(善)이 두 종류가 있는데, 즉 '옳다' 라는 선이 있고, '잘했다' 라는 선이 있는데, 그런데 여기서 옳다는 선은 인정하지 않고, 잘했다고 하는 선만 인정하는데, 이 차이점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옳다' 라는 것은 "진리대로 했다" 라는 것인데, 그런 선은 통하지 않고, '잘했다' 라고 하는, 즉 "나에게 유리하게 했다" 라는 선만 받아들인다는 말이다.

그러니 여기서 "참 잘했어요" 라는 것은, "당신에게 이익이 되도록 잘했어요"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동양철학에서는 몸을 중요하게 여기니, 그래서 자기 몸에 유익이 되도록 잘했다는 말이다. 이것을 '축복' 이라고 하고 말이다.

◈ 소복(小福)은 제근(諸勤)이요, 대복(大福)은 제천(諸天)이라 ??

어제 제가 설교시간에 어려운 문자를 하나 썼는데, "소복은 제근이요, 대복은 제천이라" 라고 말이다. 즉 작은 복은 자기가 부지런하면 되고, 큰복은 하늘이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한마디에 평소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든 사고방식이 다 들어있다는 것이다. 교회에 오든지 어디를 가든지, 절에 가도 모두가 똑같다는 것이다.

자기가 부지런을 떨어서 그래도 신에게 잘 보이면 그래도 작은 복이라도 있는데, 하지만 그것으로는 만족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결핍은 교회에 다니고 절에 다니는 자기 욕망을 정당화하니 말이다. 그것을 차지해야 성에 차는데, 하지만 차지하고 나면 또 결핍이 생긴다는 것이다.

여담이지만, 인천 구 목사님이 사는 아파트가 19평짜리인데, 사모님이 상훈이네의 24평짜리 아파트에 가서 집이 넓고 좋다고 하는 바람에 상훈이 엄마인 최자은씨가 놀라서(?) 웃은 적이 있다고 하는데, 왜냐하면 사모님은 덕담이 아니라 진짜로 그렇게 느꼈다는 말이다. 하지만 상훈이 엄마는 단 한번도 자기 집이 넓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최소한 33평 이상이 되면 몰라도 말이다. 물론 33평에 사는 사람은 당연히 50평 이상을 생각하고 말이다.

◈ 예수님 - 내가 돌을 던지마 !!

그러므로 결국은 "남은 죽어도 나의 존재는 있어야 한다" 라는 것인데, 그렇게 자기 존재의 정당함을 위해서 누구든지 그런 정당함을 욕하는 놈들은 그냥 두지 않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자기 존재의 정당성을 향해서 돌을 던진 분이 누구인가?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말이다.

예수님의 어록(?)에 있는, "자기를 부인하라,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다, 자기를 미워하지 않으면 생명을 얻지 못한다" 라는 등등의 말씀은 전부가 다, 바로 이러한 우리 인간 존재의 정당성을 향해서 던진 말씀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정말 미워 !!)

우리는 부지런하게 일해서 작은 복을 얻고, 신에게 빌어서 큰복을 얻으려고 했는데,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우리 인간의 근원을 치기 위해서 "자기를 부인하라" 라고 하시니, 우리는 그만 예수님을 욕하면서 떠나고 싶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의 존재성을 건드렸기 때문에 말이다.

◈ 이근호 목사가 장가간 것은 기적 ??

도대체 누가 '나'를 건드리는가? 외로울 때 누가 '나'를 위로해주는가? 결국은 '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인데, 물로 자기 말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위로를 받기 위해서 결혼도 하고 하지만, 그러나 나이가 들면 들수록 서로가 귀찮아지고, 엄청 힘들어진다는 것이다.

또한 누군가가 한 사람이 아프게 되면 진짜 귀찮은데, 도덕적으로(?) 옆에서 보살피고 치료를 해주려면 그 얼마나 짜증이 나는지 말이다. 그러니 결국에는 위로를 받으려고 만난 그 배우자 때문에 그만 자기 인생을 다 버려놓았다는 말이다. 쉽게 말해서, "너 때문에 내 인생 조졌다" 라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 인생을 조지도록 자기 배우자를 아프게 한 분이 누구인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따지고 보면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결국에는 누구를 공격해야 하는가? 예수님을 공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민중들은 바라바를 원했으면 원했지 예수님을 원하지 않았는데, 그러한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다는 것이다.

◈ 우리가, 어찌할꼬 !!

그래서 유대인들이 하는 말이 "어찌할꼬" 라고 하는데, 베드로가 사도행전 2장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이야기할 때 말이다. 베드로가 십자가를 말했을 때, 민중들의 이 십자가에 대한 반응은 4가지 단어밖에는 없는데, 그것이 바로 "어찌할꼬" 라는 것이다. 그렇게 "어찌할꼬" 라는 순간에 자기의 정당성은 그만 사라지고 죄인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행 2: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행 2:37)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 우리 이름은 십자가에서 부정을 당하고 !!

그것이 공식(?)인데, 바로 이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각자가 자기 갈 길로 가버리고, 그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다" 라고 했을 때, 그 순간 우리는 평생을 그렇게 지키고자 했던 자기 존재의 정당성, 즉 세상은 끝나도 자기는 끝까지 살아남아야 한다는 자기 정당성이, 바로 그러한 자기 이름이 십자가 앞에서 부정을 당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성경에서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우리가 그렇게 산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우리들 배후에 괴물이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니 복음으로 무장이 될 경우에만, 우리 속에 그동안 마귀가 우리 좋아라고 우리편에 서서 그렇게 같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 다시 한번 더, 악마는 미완성, 복음은 완성 !!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러한 악마의 특징은 미완성이고, 복음은 완성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미완성과 완성의 싸움, 그것이 바로 영적인 전쟁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언제 아는고 하니까, 자기가 엄청난(?) 죄를 지었을 때, 바로 그때 비로소 복음의 기쁨을 제대로 안다는 것이다. 물론 성령을 받은 자의 경우에만 말이다.

◈ 많이 용서받은 자가 많이 사랑하기에 !!

누가복음에 보면, 어떤 행실이 나쁜 한 여자가 예수님 앞에서 자기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긴 적이 있었는데, 이 여자가 막달라 마리아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는데 말이다. 그때 예수님은 뭐라고 하셨는가? 용서를 많이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는 것이다. (이 여인은 나사로의 여동생이 아닌가?)

(눅 7:44)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 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눅 7:45)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눅 7:46)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눅 7: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눅 7:48)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하시니

◈ 이 개 같은 년아 !!

그리고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님이 엄청난 모독을 받았는데, 개 같은 이방인이라고 말이다. 그러니 그 여인이 뭐라고 했는가? "아이엠 어 개"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그 개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음식 부스러기이라도 먹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 떨어지는 것이 영생이라면, 개라는 욕을 듣던, 원숭이라고 놀림을 받던, 그것이 무슨 대수냐는 것이다. 어차피 영생은 자기에게 없고, 그 떡고물에, 즉 부스러기에 있는데 말이다. 감사하게 먹으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막 7:26)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막 7:27)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막 7:28)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막 7:29)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막 7:30)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 아, 독가스 - 난 죄인이 아니야 !!

그러니 이러한 영적전쟁에 있어서 사단이 우리 안에 있는데, 그렇게 우리 안에서 이 놈이 하는 짓이 무엇인고 하니, 즉 우리 안에서 지독하게 올라오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죄에 대한 부정이라는 것이다. 마치 독가스가 피어오르듯이 말이다.

우리 교재 '지옥의 하나님'의 2부 내용이 무엇인고 하니, 목사들의 심리와 그 죄악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인데, 제가 안산에서 고린도후서를 강의하면서 뭐라고 했는고 하니, 지금 우리가 어떻게 되었던지 간에, 즉 우리 모임이 한 명이든 두 명이 모이든 간에 이 고린도후서를 공부할 수 있도록 해준 것에 대해서 감사한다는 것이다.

◈ 고린도후서 - 고난과 함께 위로를 !!

그리고 이 고린도후서를 공부함으로 말미암아서 어떤 현상이 벌어지는고 하니, 먼저 이 고린도후서의 내용이 무엇인고 하니, 1장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예수님의 위로도 넘친다" 라는 것인데, 그런데 만약에 이 고린도후서를 공부를 하지 않고 모른다고 하면, 그렇게 되면 무엇을 모르는고 하니, 예수님의 고난이 덮치는 자가 성도임을 말이다.

(고후 1:3)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고후 1: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고후 1: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고난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먼저 하나는 자기 생존에 대한 염려 때문에 발생하는 고난이 있고, 역시 그것도 고린도후서에 나오는 것인데, 그것은 고난이 아니라 '고생' 이라고 할 수 있고 말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 때문이 생기는 그런 고생이 아니라, 전적으로 예수님 때문에 생기는 고난이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 때문에 말이다.

여기서 보통 사람들은 고난을 자기의 생존 때문에 일어나는 것으로 여기는데, 그래서 예수님 때문에 생기는 고난에 대해서 말하기를, "그것이 뭔 말이야? 과거에 죽은 예수 때문에 내가 왜 고난을 받지?"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 때문에 받은 고난은 어떤 것입니까?" 라고 물어보면 사람들이 대답을 못한다는 것이다.

◈ 고린도교회 - 고생이 고난을 유발시켜 !!

초대교회 당시를 보면, 바로 고난이 한 종류밖에 없다고 우기는, 그런 사람들로부터 고난을 받았다는 말이다. 그런 한 종류의 고난이 바로 각자 밥먹고 살려고 하다가 받는 고생이고 말이다. 쉽게 말해서, 밥먹고 사는데 이런 성경공부가 무슨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물론 성경공부를 해야 될 때도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기가 먹고사는데 유리할 경우에는 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크, 뜨끔!)

그것이 바로 초대교회처럼 "저는 예수님만 있으면 행복합니다" 라고 여기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고난을 안겨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린도교회가 고난을 받는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 시대는 앞으로 가면 갈수록 더 성경이 필요 없다고 하게 될 것이고 말이다.

* 질문 - 목사님의 강의가 "당신의 인생에 있어서 예수가 필요하다" 라는 것으로 들려지는데요?

양쪽을 다 이야기해주어야 하는데, 육에서 주장하는 방식도 말이다. 예수님이 그런 이야기를 했으니 말이다. 아까 세차장 이야기를 했는데, 그것도 역시 그런 차원에서 이해하면 된다는 것이다.

* 질문 - 그리고 또 궁금한 것이, 그렇다면 바리새인들은 제사법을 어떻게 생각을 했습니까? 그들은 나름대로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이루려고 현실에서 애를 쓰고, 또 제사를 드리고 했는데 말입니다.

그들은 제사법을 미완성으로 여겼는데, 왜냐하면 아직 메시야가 없으니 말이다. 히브리서 7장에 보면, 제사장이 늘 죽는데, 그들은 그러한 죽음의 연속이 결국은 완성된 어떤 메시야가 올 것이라고 보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히브리서에 그대로 나오는데, 제사장이 한 명이 아니라 다수인데, 이렇게 제사장이 여러 명이라는 것은 아직도 복음이 미완성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본다는 말이다.

(히 7:23) 저희 제사장 된 자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을 인하여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
(히 7:24)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그래서 제가 미완성이라는 말을 했는데, 그런데 이렇게 미완성이 되면 어떻게 되는가? 자기의 죄를 모르는데, 그래서 "부족합니다. 다음에는 좀 더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바리새인들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주장은 무엇인고 하니, 바로 그따위 생각이 예수님의 완성된 것을 훼방하고 모독한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이 죄를 짓게 되면 두 가지 반응이 나오는데, 불신자의 경우에는 "이런, 예수님도 별 소용이 없네. 나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했으니까 말이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진짜 복음을 제대로 아는 신자의 경우에는 어떤 반응을 하는고 하니, "야, 이게 진짜로 완성이 되었구나" 라는 것을 깨닫는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의 부족함을 알고 나름대로 열심히 살려고 한 것, 그것이 바로 그 완성을 모독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자기가 죄를 짓고 보니 오히려 복음을 모독했음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혹시 여러분은 그런 경험이 없나요?

* 질문 - 히브리서에서는 말하는 것이, 바리새인들은 지금 현실에서 자기들이 짓는 죄가 제사제도를 통해서 용서를 받는 습성(?)이 있으니까, 그래서 그들이 다시금 구약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유혹에 빠지지는 않는가요? (??)

그것은 아닌데, 물론 히브리서 주석가들 중에서는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저는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이 복음을 모르기에 유대인들과 연관을 시킨다는 말이다. 문자적으로 따지고 해서 말이다. 그러나 히브리서는 그런 것이 아니라 '피의 완성' 이라는 것이다.

* 질문 - 제가 목사님의 의견에 반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저도 지금 피의 완성을 말한다고 볼 수가 있는데, 목사님은 바리새인들을 율법적으로 너무 몰아 부치시는데, 하지만 그들에게도 죄사함을 받는 어떤 장치가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 우리도, 하나님께 영광을 !!

무슨 말인지 알겠는데, 그들에게 '미드라쉬' 라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그들의 율법의 누적된 해석들의 진리라는 것이다. 코란이 곧 모세오경인데, 이 코란을 해석한 과거의 권위를 존중해서, 그들은 해석을 첨가할 때도 아주 조심스럽게 하는데, 그 미드라쉬에 보면 해석법도 나오는데, 거기에 보면 자기들은 하나님의 자비, 즉 하나님의 의로 율법을 받았기 때문에, 이러한 하나님이 베푼 자비를 가운데서 자기들이 공덕을 쌓으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까, 자기들은 출애굽 당시에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는데, 그들이 은혜를 받기만 하고 입을 닥은 것이 아니라, 모세오경에 보면 많은 율법들이 있는데, 그 율법을 통해서 구원을 받은 자기들이 하나님께 얼마나 많은 영광을 돌리느냐, 그렇지 않으냐는,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얼마나 많이 지키느냐, 그렇지 않느냐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선택을 받는 유대인들에 국한되는 것이지, 이방인들은 여기에 전혀 해당사항이 없는데, 이것이 바로 예수님 당시 신약에서의 바리새인들의 사고방식인데,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이런 코란을 모르는 이방인들을 마치 개같이 취급했는데, 7단계로 해서 계급을 나누고 말이다.

그런데 이런 사고방식이 바로 바리새인들뿐만 오늘날 개혁주의자들의 사고방식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니, 행함으로 영광을 돌리자는 말이다. 보너스로 상급도 받고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것이 바로 '미완성' 이라는 것이다.

◈ 그들의 주장이 왜 미완성인가?

이것이 매우 중요한데, 그것이 왜 미완성인지 잠시 설명을 해보면, 이 문제가 십자가에서 어떻게 풀리는지 살펴보자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저에게 공격적으로 "신약도 율법입니까?" 라고 질문을 하는데, 여기에 성경말씀이 있고 또 우리가 이렇게 있는데, 만약 여기에 십자가가 없다고 하면 우리는 "내가 성령을 받았으니 말씀을 지켜야지" 라고 하면서, 곧 바로 들어가도 된다는 것이다. 자기가 성경말씀을 지키겠다고 말이다.

◈ 종말에는, 성령이 십자가 의미를 담고서 !!

그런데 문제는 종말에 이 십자가에게 무엇이 나오는고 하니, 성령님이 나온다는 것이다. 즉 그 성령이 십자가의 의미를 담은 체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말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나는 십자가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했다" 라고 말하는 것은, 성령을 받게 되면 십자가 외에 다른 것은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물론 성령을 받지 않으면 이 십자가를 전혀 모르고 말이다.

고린도전서 2장에 보면,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것을 알게 하시는데, 즉 십자가가 와야 안다는 것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 성령만큼은 말이다. 그렇게 성령을 받으면 하나님의 깊은 것을 알게 되고, 그런 십자가의 의미가 들어오면, 그 십자가의 의미가 말씀 속에 담겨있다는 말이다.

◈ 말씀은 십자가가 들어오는 방편 ??

다시 말해서, 말씀이라는 문자가 이렇게 있다면, 그 안에 십자가가 다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에 들어갈 때, 그냥 "저는 말씀을 지켰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십자가가 확대되어서, 그 십자가가 들어오는 방편이 바로 말씀이 된다는 것이다.

(고전 2: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고전 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전 2: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예를 들어서,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악의 뿌리이다" 라고 하면, 그것을 두고 "나는 돈을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왜 일방적으로 그렇게 했지?" 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런데 가만히 보니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악의 뿌리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지킬 수 없고, 그렇게 지킬 수 없다는 것은 자기가 죄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그 말씀을 다 지켜서, 자기가 그렇게 돈을 사랑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말이다.

평생동안 돈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인간인데, 이 십자가를 통해서 돈을 사랑하지 않도록, 그렇게 십자가를 통해서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위에 있는 사람이 "어, 당신 돈을 사랑하지 않는구만" 라고 하면, 그 사람은 이야기하기를, "제가 그런 게 아니라, 성령께서 하셨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 A : 성령께서 말씀을 저에게 적용을 시켰습니다.
* B : 아니, 당신은 능력이 있는데, 성령께서 왜 그렇게 하시죠?
* A : 저는 죄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말입니다.
* B : 아니, 죄인이라구요?
* A : 예, 십자가 앞에서 말입니다.
* B : ? ? ?

그러므로 여기에서 "성령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라고 하는 것은, "제가 지켰습니다" 라는 것을 자랑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가 모든 일을 다 중재해서, 그렇게 십자가가 일이 되도록 모두 했다는 것이다. 자기가 아닌 십자가가 말이다.

◈ 바리새인들 - 은혜로 구원받고, 성령으로 행하자 !!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그것이 아니라, 그들은 십자가가 없고 성신이 있는데, 물론 자기들도 성령이라고 하는데, 그런데 이 성령은 자기 소관이라는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이제 성령을 받았으니, 그 성령을 받은 자기가 나서서 일을 처리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고, 성령을 받아서 잘 행하고 있는데, 도대체 예수님의 십자가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하는 말이, 자기들이 완전하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은 아직도 완성을 향해서 나아간다는 말이다. 그래서 제가 주장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렇게 완성을 행해서 나아간다고 하니까, 그들이 바로 악마가 아니냐는 것이다. 완성을 향해서 나아간다는 그 개념자체가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 제가 사도바울의 명령 가운데서 70% 정도는 지키는데, 아직 30%는 남아있습니다" 라고 하면, 그것은 바로 바리새인들이 하는 짓이라는 말이다. 사실상 우리는 70%도 제대로 지켜본 적이 없는데, 그냥 성경을 볼 때마다 자기가 지키는 것이 아니라, 전혀 지키지 못하는 죄인임을 깨닫게 될 뿐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그 어느 성경구절도 자기가 지켰다고 내세울 것이 전혀 없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주님의 소유이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를 사용하셔서 "내 솜씨가 대단하지" 라고 하는, 그렇게 주님의 솜씨를 자랑하기 위해서 우리가 있다는 말이다. 우리의 솜씨를 자랑하라고 우리 자신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싸움을 할 때 십자가의 복음으로 하라고 하는데, 왜냐하면 그 십자가의 복음 안에는 우리의 정과 욕심이 죽은 자로 간주되기 때문에 말이다.

◈ 가만히 있으면서 감사하는 인간 !!

제가 이렇게 말하면 누군가가 질문하기를, "목사님의 말씀대로 가만히 있으면 되겠네요" 라고 하는데, 물론 가만히 있으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하나가 더 오는데 감사가 말이다. 그래서 "가만히 있으면서 감사한다" 라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주의 말씀의 성취라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기서 감사는 빼버리고 "가만히 있으면 되겠네요" 라고 하는데, 그렇게 되면 주체가 자기 자신이 되지만, 그러나 감사하게 되면 주체가 주님이 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가만히 있게 하신 분이 누구인고 하니,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가만히 있게 하신 그분에게 영광을 돌리게 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가만히 있으면 되겠네요" 라고 하면 자기 공로가 되어버리고 말이다.

그래서 제가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무슨 일을 하든지 감사가 나오면 주의 일이고, 감사가 나오지 않으면 제 아무리 대단한 일을 해도 주의 일이 아니다" 라고 말이다. 왜냐하면, 감사가 되려고 하면 자기가 완전히 꼴아 박아야 감사가 나오니 말이다.

예를 들어서, 사흘을 굶어도 감사하는 자는 어떤 사람인고 하니, 자기는 나흘을 굶어도 너무나 당연하다고 여기는 자라는 것이다. 그런 자에 한에서 사흘을 굶어도 감사가 터져 나온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는가? "에이, 사흘이나 굶게 하고" 라고 하는 자에게서 어떻게 감사가 나오겠는가?

◈ 사도바울은 그 얼마나 굶었는가?

사도바울은 얼마나 굶었는가? 자기는 굶기만 한 것이 아니라 얻어터지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감사가 나오는가? 자기는 얻어맞고 굶어도 당연하다고 여기기에, 그래서 항상 감사가 넘쳐난다는 것이다. 자기는 그것도 복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이다. 또한 자기의 무능함을 항상 드러내고 말이다.

(고후 11:23)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뻔 하였으니
(고후 11: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번 맞았으며
(고후 11:25) 세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고후 11:26)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고후 11: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아까도 말했지만, 사랑의 폭을 넓히려면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는다는 것인데, 그렇게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것도 말씀이 그렇게 우리를 마구 찔러서, 즉 "이래도 니가 죄인이 아니야?" 라고 말이다. 그렇게 우리를 죄인이 되게 함으로서, 우리 속에서 사랑의 깊이와 넓이가 풀장에 차고 넘치도록 조치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곧 십자가의 능력이라는 것이다.

◈ 사도바울- 우리의 싸움은 우주적 전쟁의 일부 !!

지금까지 한 것이 교재 110페이지부터 나오는 것인데, 사도바울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라고 말이다. 이제 111페이지를 보겠는데, 그것을 보기에 앞서 자나갔지만 108페이지를 먼저 살펴보자.

** 사도바울은 자신의 싸움을 우주적 전쟁의 일부라고 보고 있다. 성도라면 누구나 할 것 없이 싸워가야 하는 입장에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도바울은 자신의 싸움을 우주적 전쟁의 일부라고 보고 있으니까, "하나님, 왜 저를 이렇게 하십니까" 라는 말이 나올 수가 없다는 것이다. 자기는 일부이니 말이다. 마치 세탁물이 세탁기안에서 같이 엉켜서 돌아가듯이 말이다. 아니 런닝이 와이셔츠를 보고 뭐라고 하겠는가? 다같이 휘말려 돌아가니 말이다.

그러니 우리도 살아가면서 "하나님, 저 사람은 저렇게 50평짜리 아파트에서 잘 사는데, 저는 왜 이렇습니까?" 라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휩싸여 돌아가는데 말이다. 우리는 다 일부이니, "저 사람은 못됐지만, 저는 착하지요?" 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너와 나'의 개별자를 구별할 수 없다는 말이다.

성도라면 누구나 다 싸우는데, 어떤 사람은 가난하게 살아가면서 싸우고, 또 어떤 사람은 부자이면서 싸우고 말이다. 예쁘게 만들어서 싸우고, 못 생기게 만들어서 싸우고, 또 뚱뚱하게 해서 싸우고, 날씬하게 해서 싸우고 말이다. 아무튼 하나님께서 자기 것을 자기 필요에 따라 싸우게 하신다는 것이다.

◈ 잠언서도 당연히 십자가로 해석해야 !!

이런 것이 잠언서에는 나오지 않는데(?), 그래서 이번 여름 수련회 때 이런 것을 포함시켜서 강의를 한번 해보려고 한다는 것이다. 잠언서에 보면, 가난한 자나 부한 자나 다 하나님께서 지었다고 하는데, 그런데 이런 말씀을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고 해석을 해버리니, "그래 그래, 모두가 내 팔자이다. 가난해도 참아야지" 라고 그렇게 해석을 운명론적으로 해버린다는 말이다. 박윤선(박영선?) 목사의 주석도 그렇고 말이다.

이것은 마치 동양철학을 하는 것 같은데, 그것도 점쟁이들이 하는 말이다. 그래서 이 잠언서를 마치 토정비결을 보는 것처럼 하는데, 물론 잠언서는 전혀 그런 것이 아닌데, 해석을 그냥 그렇게 해버린다는 것이다. 소극적(?)으로 말이다.

예를 들어서, "구제를 하면 부자가 된다" 라고 하면, 부자가 되기 위해서 구제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현재 잠언서 주석은 정말 볼 책이 없는데, 말로는 '지혜서' 라고 하면서, 도저히 그런 지혜를 찾아볼 길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 지혜를 동양철학에서 말하는 지혜처럼 여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이 잠언서가 애굽의 아멘호텝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는데, 즉 애굽의 철학이 이 잠언서에 영향을 주어서 현재의 잠언서가 만들어졌다는 말이다. 이름만 '여호와' 라고 슬쩍 바꾸어서 말이다. (아니, 그러면 표절이 아닌가?) 하지만 분명히 잠언서도 복음으로 가득한데, 그것이 무슨 복음이냐는 말이다. 모르면 모른다고 하지 말이다. 마치 동양의 처세술처럼 여기면 안 된다는 것이다.

◈ 잠언서는 게임의 법칙 ??

여기서 처세술이 나왔으니 잠시 이야기하면, 잠언서를 마치 이런 동양철학의 입장에서 보면 게임의 법칙이 되는데, "당신이 이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어떻게 처신을 해야 하는가?" 라는 것을 말이다. 즉 승리자가 되기 위해서 말이다.

사람들이 잠언서를 그냥 보는 게 아니라, 자기가 이 세상에서 최종적인 승리자가 되기 위해서 어떤 지혜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지, 그런 선입관을 가지고서 이 잠언서를 보기 때문에 그런 십자가와 상관이 없는 말도 안 되는 해석들이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게임의 법칙에 입각해서 말이다. 그런 게임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누가 있는가? 누가 패배하기 위해서 게임을 하느냐는 말이다.

하지만 성경은 게임이 아니라 '예정' 이라는 말이다. 모든 것이 다 예정되었다는 것이다. 굳이 게임이라고 한다면, 그 게임을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는 것이고 말이다. 마귀도 다 예정된 대로 움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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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