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7월 11일 강의 엡 3장 1절, 9절 감추어진 비밀
서울 7월 11일 강의 엡 3장 1절, 9절 감추어진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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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711 엡 3장 1절, 9절 감추어진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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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7-24 17:22
서울080711a엡3장1절
에베소서 제 15강 (이 근호목사, 2008년 7월 11일-a, 서울의존교회)
지난 시간에 에베소서 2장을 강의했는데 사도바울이 어려운 이야기를 했습니다. ‘성령안에서 너희가 성전이 되어간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에베소서 2:21,22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성전이란 건물인데 사람이 건물을 지을 때는 벽돌, 돌, 나무등의 재료를 가지고 땅을 다지고 기둥을 세우고 벽을 세우고 그 안에 칸을 나누어서 방을 만들고 그렇게 해서 집이 되어 갑니다. 사람은 그렇게 집을 짓게 되는데 하나님이 계시는 집은 어떤 집일까요? 사람이 사는 집과 하나님의 집의 차이점이 뭘까요?
사람이 사는 집은 목숨이 부지되면 됩니다. 하나님의 집은 죄가 없고 거룩이 있고, 의가 있고 영생, 하나님의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사랑이 있어야 하나님의 집이 됩니다. 여러분이 생각해 보세요. 죄는 없고 하나님의 사랑과 의와 거룩과 영생이 있는 그런 집을 여러분이 지어보실래요? 어떻게 지으면 이런 집이 됩니까?
사람 사는 집은 이런 것이 필요 없습니다. 자기 몸만 보전할 수 있으면 그만입니다. 그래서 어떤 집에 할아버지가 살다가 돌아가셨다고 하면 그 집은 주인이 없기에 없어져야 되겠지요. 사람 사는 집은 사람 죽으면 그만입니다. 그래서 여기에는 죽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는 집에는 아픈 것도 없고 죄도 없고 죽는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 사는 집에만 들어가면 영원히 살고 사랑이 넘치고 용서가 있고 거룩한데 대체 어떤 장치가 되어 있는 집이기에 그런 것이 가능합니까? 내가 죄를 지었는데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 보니까 갑자기 내가 의인이 되고 영광스럽게 되고 천사처럼 되는 겁니다. 이 집 나가면 그만 다시 죄인 되고 죽어 가는데 그 집에만 들어가면 하나님의 영생이 있고 거룩이 있고 사랑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집을 비밀이라고 했습니다. 뭔가 그 집에는 비밀이 있고 장치가 있는데 그것을 에베소서 3장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집에 어떤 비밀스런 장치가 있기에 하나님의 집에 사는 사람들은 영원히 죽지도 않고 사랑을 영원토록 받으면서 살게 되는 겁니다. 지난 금요일에 대구 병원으로 어떤 분을 전도하러 갔습니다.
그분의 연세가 지금 67세가 되었는데 지금껏 사는 동안 술로 살았어요. 세가지 병, 췌장암, 폐렴, 당뇨병이 한꺼번에 걸려서 6개월밖에 못산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마지막 가는 그 분의 길에 제가 불려갔습니다. “할아버지! 제가 마지막 가시는 길에 드리는 말씀이니 잘 들어 보세요. 두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한사람은 부자고 한 사람은 거지였습니다. 할아버지, 지금 제 이야기가 잘 들립니까?”
이때부터 할아버지는 울기 시작합니다. 그 할아버지가 울기 시작한 이유는 제가 전하는 복음이 감동스러워서가 아니고 ‘자기 신세가 얼마나 처량하고 비참하게 되었으면 목사가 다 와서 저럴까’라는 자기 처량함으로 인해서 우는 것 같이 여겨졌습니다. 울든 말든 복음을 전해야 되니 복음을 계속 전했습니다.
“할아버지, 마지막입니다. 두 사람이 죽었는데 한 사람은 거지인데 천국에 가고 한 사람은 부자인데 지옥에 갔습니다. 그런데 지옥에는 물이 한 방울도 나지 않습니다. 한방울도 안나는 지옥에 간 부자가 천국 가 있는 사람보고 물좀 달라고 하니까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이 하는 말이 ‘천국 간 사람은 절대로 천국 밖으로 못 벗어나고 지옥 간 사람은 절대로 지옥 밖으로 벗어날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할아버지 마지막인데 어떻게 하실겁니까?”
그런데 할아버지가 다시 울기 시작했어요. ‘처음에 울기 시작한 것은 자기 설움에 겨워서 우는 울음인데 이번 울음은 무슨 의미일까?’ 제가 왜 우느냐고 다그친 것은 아니고 계속 복음을 전했습니다. “할아버지, 제 말뜻을 아시겠습니까? 지금까지의 세상 사신 것은 잊어버리시고 앞으로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 회수를 하는데 천국으로 회수할거냐, 지옥으로 회수할거냐만 남아 있습니다. 어떻게 할 겁니까?”
그렇게 물으면서 그것은 할아버지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그 복음을 전하는 나에게도 같은 이야기를 한다는 겁니다. “이 목사! 너는 어디로 갈 거야?” 여러분이나 저나 천국에 가고 싶거든요. 가고 싶은데 그 천국이 어떻게 만들어지는데 거기에 어떻게 들어갈 수 있는지 거기에 들어간 사람은 왜 영원히 살 수 있는지를 여러분이 알고 있어야 됩니다.
어린이라고 해서 반드시 오래 산다는 보장은 없고 또 어린이라고 해서 영원히 산다는 것은 아예 없습니다. 결국 죽게 되어 있고 또 어린이라고 해도 어른보다 먼저 죽는 수도 많습니다. 초등학교 선생님이 이것을 가르쳐 줍니까? 안 가르쳐 주지요. 그러면 그 선생님은 나중에 죽어서 어디로 갈지 모르죠. 그 모르는 것을 가지고 성경에서 비밀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그것을 내가 특별히 너희에게 알려줄게’라고 합니다. 알려주는데 여기서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을 이야기하는데 그렇게 자신 만만하게 이야기 할 수밖에 없는 그 이유를 너희에게 이야기 해 줄게’라는 것이 에베소서 3장 1절부터 12절까지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천국 있습니다. 지옥 있습니다’라는 이야기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말할 거예요. “네가 가봤나? 가보지도 않고 왜 그렇게 거짓말을 하는거야?” 이렇게 나올 수가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그럴 줄 알고 ‘너희들이 알고 있는 천국은 말짱 다 거짓말이고 이 사도인 내가 알고 있는 천국이 진짜 천국이고 내가 알고 있는 지옥이 진짜 지옥이고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다’라고 이야기를 해 줍니다.
지금까지 강의를 여러 번 했지만 다 중요했지만 오늘도 참 중요한 날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여러분을 다 환자로 눕혀놓고 링겔 꽂아놓고 아까 말한 그 할아버지에게 복음 전했던 그 상황같이 그 심정으로 전하고 싶은 거예요. 여러분이 그런 마음가짐으로 들어야 됩니다. 앞으로 살날이 며칠 남지 않았다는 그런 심정으로 들어야 됩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비밀이라고 했습니다. 비밀은 아무나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 비밀은 에베소서 3장에 보면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만 알고 있는 비밀입니다. 그런데 그 비밀을 여러분에게 알려 줬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특별히 대우했다는 증거라는 말입니다.
사도바울의 말이 ‘이 비밀은 아무나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이천국가는 비밀을 여러분들이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비밀을 상호공유 할 자격을 줬다’는 거예요. 비밀은 아무한테나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고 친한 사이끼리 이야기는 거잖아요. 비밀을 공유한다는 것은 그만큼 친하다는 뜻입니다.
비밀을 공유한다는 것은 “내가 네 인생 책임질게”라는 것을 전제 할 경우에만 “이것은 비밀이야. 너만 알고 있어.” 오늘 간식은 떡입니까? 뭡니까? 모르죠? 이게 비밀입니다. 오늘 간식은 수박이랍니다. 그 비밀의 가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것은 비밀의 가치가 없어요. 왜냐하면 수박을 먹는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진짜 비밀은 어떤 요소가 있어야 되느냐 하면, ‘나는 비밀 알았다. 너는 택함 받았다’ 이렇게 연결되어야 그것이 비밀 값을 하는 겁니다. 비밀을 알았다는 것은 아무나 비밀을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비밀을 알도록 하는 그만한 입장에 있기 때문에 비밀스럽게 이야기하는데 그 말은 ‘너는 이미 택한 백성이야. 그러니까 너에게만 비밀이 이해되도록 비밀이 주어질거야’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다시 정리해 봅시다. 집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는 집과 사람이 사는 집의 차이점은 사람이 사는 집은 사람이 죽고 나면 그 집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좋은 집을 짓고 거기에 가구를 들여놓고 호화인테리어를 해도 내가 죽으면 그 집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중국에서 지진 났을 때 여학생들이 많이 죽었습니다. 제가 그 장면을 텔레비전으로 봤는데 안경이 딱 보였습니다. 지진 난 현장 쓰레기더미에서 안경이 하나 버려진 채 놓여 있을 때 그 안경주인 어디 갔습니까? 이미 죽었습니다. 그러면 그 안경은 소용없습니다. 그처럼 하나님께서는 ‘네몸이 네 집보다 더 중요하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하나님 제 집 좋지요?”
“인간들아! 네 집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네 몸, 네가 구원받을 인간인지 지옥 갈 인간인지 그게 더 중요하다.”
사람들이 자꾸 껍데기를 자랑합니다. ‘나는 한 달 수입이 천만원이고 우리 교회는 숫자가 천명 모인다.’ 그런것은 다 껍데기입니다.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그 온천하가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마 16:26) 다니엘의 세친구가 집에 있다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어디로 이동합니다. 우상에게 절하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에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갑니다(단 3장).
포항제철에 가면 철 녹이는 엄청나게 커다란 그릇이 있는데 그것을 용광로라 합니다. 그 용광로에 들어갑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펄펄 끓는 용광로 속에 들어가니까 어디가 집입니까? 용광로 속이 집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그들이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 세 사람이 들어가고 나니까 불속에서도 그들이 살았습니까, 죽었습니까? 살았습니다.
그 세 사람이 슈퍼맨이나 울트라맨입니까? 보통 우리와 같은 사람입니다. 우리도 안 죽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성경에서 이야기 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아는 자들아! 너희는 안 죽을 수 있는거야. 마치 다니엘의 세친구가 불속에 들어가서도 안 죽은 것처럼 너희도 안 죽을 수 있는거야’라는 겁니다.
그러면 다니엘의 세친구가 안 죽을 수 있었던 이유? 1) 평소에 운동을 많이 했다. 2) 들어가기 전에 물을 많이 뿌렸다. 3) 들어가서 기도를 많이 했다. 4) 거기에 누가 있었다. 몇 번입니까? 거기에 누가 있었습니까? 네 번째 분, 하나님의 아들이 계셨습니다. 죽어도 안 죽는 분과 함께 있으면 사람이 사는 집이 아니고 하나님이 사는 집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책임지고 자기 집에 온 사람 안 죽이겠다는 겁니다. 책임지고 죄 없게 해주시고 사랑하게 해주시고 의롭게 해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로마서 10장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 10:13)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
그래서 다니엘의 세 친구가 그 용광로 집에서 계속 살았습니까? 도로 용광로 밖으로 나왔습니까? 세 사람이 용광로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 세사람은 용광로 들어가기 전에도 살았고 용광로 안 불속에서도 살았고 그 용광로 밖에 나와서도 살았습니다. 이제 다니엘의 세 친구에게 겁나는 것이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겁나는 게 없습니다. 남들이 죽었다고 한 그 자리에서도 살았기에. 그림으로 그려볼게요. 이것이 용광로인데 여기에 세 사람이 들어갔는데 한분 더 계셔서 네 분이 여기 있었는데 여기서 살았는데 여기서 바깥을 보니 그 바깥이 죽음의 나라입니다. 진짜 나라는 여기 예수님과 함께 있는 나라가 영생의 나라가 되는 겁니다.
이걸 두 글자로 뭐라고 한다? 이게 비밀입니다. 여러분이 기도해서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내가 착한 일을 해서 구원받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누구와 함께 있느냐’가 ‘영생 얻느냐 마느냐’의 차이입니다. 천국에 누가 계십니까? 예수님. 그러니까 천국에 있는 사람들은 영생을 얻지요. 아주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지옥에는 누가 없습니까? 예수님. 예수님이 없기에 지옥에는 물이 한 방울도 없습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영생 얻고 천국에 가는 것은 우리 노력이 아닙니다. 우리가 열심히 살아서도 아니고 우리가 열심히 교회 나와서도 아니고 신학공부해서도 아니고 성경공부해도 아닙니다.
‘내 옆에 누구 있다.’ 옆에 정도가 아니고 ‘내 안에 너 있고 네 안에 나 있다’(요 14:20, 요 17:22) 고 이야기합니다. 제가 참 어려운 이야기를 했습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천국은 있다. 그런데 조건이 있다. 네 안에 예수 있고 예수 안에 네가 있으면 너는 하나님의 성전 안에 있는 사람이 되어서 영생 얻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내안에 뭐가 있습니까? 내 안에는 몸의 기관들밖에 없는데 뭐가 있다는 겁니까? 제가 그런 말을 했는데 오이는 어디를 잘라도 오이입니다. 수박이든 가지든 뭐든 다 마찬가지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 같은 경우에 평소에 자기 곁에 누가 있다는 것을 자기들만 알고 남들은 몰랐는데 그 세 사람이 가는 곳에 주님도 함께 있었습니다.
다니엘의 세친구가 불속에서 나왔어도 그들은 누구와 함께 살아가게 됩니까? 예수님과 함께 살아간 겁니다. “글쎄 목사님! 그것은 알겠는데 어떻게 해야 주님이 내 안에 들어옵니까? 어떻게 해야 나 혼자 밖에 없는 인생이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오고 예수님 안에 내가 있는 영생 얻는 인생이 됩니까?”라고 물으신다면 저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비밀입니다.
제가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바울이 그렇게 합니다. 왜 비밀입니까? 당신의 능력으로 안 되니까 그것이 비밀입니다. 이렇게 하면 된다는 어떤 방법이 없습니다. 방법이 없이 그냥 그렇게 되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 비밀입니다. 방법이 없다는 것이 여러분에게 절망적으로 들릴 텐데 사도바울은 에베소서 3장에서 그다지 절망적으로 이야기를 안 합니다.
에베소서 3:6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됨이라.”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 다음에 뭡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라고 되어 있지요. “복음으로 말미암아” 이게 정답입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성전이 되어 간다’는 이야기입니다. 지금까지는 좀 어려웠는데 지금부터는 좀 쉽게 어떻게 해서 우리가 예수 안에 있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겠습니다.
옛날에 사울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하나님의 비밀은 모르고 ‘예수 안’도 모르고 자기밖에 몰랐습니다. 자기를 갈고 닦고 자기를 순수하게 유지하고 고운 맘 착한 맘 정직한 맘을 키워내면서 ‘하나님, 제가 이정도 하니까 괜찮지요? 이정도 하면 충만하게 천당 갈 만하죠?’ 하면서 오직 하나님을 위해서 바르게 사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 귀에 무슨 소리가 들렸냐 하면 ‘예수님께서 우리가 못하는 일을 예수께서 대신 다 해줌으로 말미암아 그 덕분으로 우리는 천국 간다’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우리는 못하는데 우리가 못하는 일을 대신 해 줌으로 말미암아 그 혜택을 우리가 입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들려 왔습니다.
학교에서 어려운 숙제를 내줬는데 형이 대신 해 주면 기분 좋아요, 안 좋아요? 만일 그보다 더 어려운 시험인 대학시험을 누군가 대신 치러준다면 기분 진짜 좋을 거예요. 여러분이 천국 못 가는데 누군가 대신 천국에 넣어준다면 기분 좋겠지요? 그러면 그 천국 대신 넣어주는 그분과 여러분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나 주님 알거든요?” 그랬는데 주님은 “나는 너 모른다”고 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것은 보통 위태로운 것이 아닙니다. 길에서 아빠 비슷한 사람을 만났는데 “아빠!” 하니까 “네가 누구냐? 나는 너를 모른다.” 평소에 301호가 자기 집이니까 301호를 열고 들어가서 “엄마, 밥줘!” 하니까 어떤 낯선 아주머니가 “얘야! 너는 누구냐? 나는 너 같은 아들을 둔적이 없다.” 그날 밤 그 아이는 어디서 자야 합니까?
보통 문제 아닙니다. 그것을 에베소서 3장 9절에서는 ‘예정하심’이라고 합니다.
에베소서 3:9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예정해 놓은 사람에게는 그 사람이 찾지 않더라도 예수님이 찾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찾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찾지를 못하고 믿지를 못합니다. 왜? 그것은 비밀스럽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감추어진 하나님입니다.(사 45:15) 어려운 것이 계속 나오니 정리하고 갑시다.
301호가 자기 집 인줄 알고 거기에 들어갔던 어떤 초등학교 여학생이 “얘, 너는 누구니?”라고 하면서 어떤 아주머니한테 쫓겨나 버렸어요. 그 애는 그날부로 집도 없는 애가 되어 버렸어요. 그런데 어떤 남학생이 “엄마!” 하니까 “오, 그래 너는 내 아들이야” 합니다. 어떤 남학생은 그 301호에 들어가서 살더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집은 누가 짓습니까? 하나님이 짓습니다. 301호 그 집은 하나님이 짓는데 그 집의 특징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의와 용서와 사랑이 넘치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 집 문을 노크하고 두드린다고 해서 그 집에 들어가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도통 너를 모른다’고 하면 그만입니다. 301호 그 집, 천국의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숨어 있어도 소용없습니다. 하나님이 그 집에 들어갈 사람을 기어이 찾아옵니다. “누구세요?” “나는 네 아버지 하나님이다.” “저는요?” “너는 내 아들이지. 여기서 이러지 말고 우리 천국가자” 하고 아버지 쪽에서 우리 손잡고 이끌고 잡아 당겨서 이미 다 준비해 놓은 그 천국, 그 성전에 집어넣는 방법이 그 방법인데 이 방법을 두 글자로 ‘복음’이라고 합니다.
이게 감동들이 안 되시는 모양인데 아직 살날이 창창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디모데후서를 봅시다.
디모데후서 1: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여러분이 지금 세 가지 병에 걸려 있고 침대에 누워 있으며 내일 죽는다고 해 봅시다. 마지막 때에 목사를 보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은 ‘처음부터 너는 착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너는 내 자식이다.’는 말입니다. 이미 예정해 놓은 내 자식이기에 마지막 때에 나타난 겁니다.
그 할아버지가 구원받았다는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 할아버지의 장래일은 저는 모릅니다. 예를 드는 겁니다. 그때 그 환자가 하는 말이 “주여, 제가 죄인입니다.” 창세전에 예정되었다고 의인입니까? 아니죠. 창세전에 예정된 자가 뭐다? 죄인인데 그 죄인을 위해서 대신 누구를 보내서 ‘너는 예정된 자야’라고 예정된 자를 위해서 대신 피를 흘리시고 깨끗하게 하셔서 구원하는 겁니다.
디모데전서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미쁘다’는 말은 믿음직스럽다는 말입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그리스도 예수께서” 무엇을 구원하십니까? ‘죄인’을 구원하죠. 이것을 가지고 어떤 사람들은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이 아니고 예정된 사람만 구원하는데 예정된 사람이 훌륭하다? 아니요. 예정된 사람인 자기 백성은 죄인입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을 구원하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그 다음에 무엇을 얻는다고 되어 있습니까?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모델하우스입니다. 아파트는 모델하우스 지어놓고 그대로 짓는 것이 모델하우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이 땅에 살면서 죄인 되고 그 죄인된 것을 그 사람의 행함이 아니고 주님께서 그 사람을 불쌍히 여겨서 대신 값을 다 치르시고 그래서 건져내는 이 복음의 방법으로 사람 집에 살던 사람을 하나님의 집에 집어넣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다니엘의 세 친구는 어떻게 불속에서 살아남았습니까?
예수님의 불쌍히 여기심이 불타야 될 그 사람들마저 영생을 얻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다니엘의 세친구가 훌륭하냐고 묻지 마시고 ‘그 옆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셨기에 불속에서도 살아남은 사람이 되었는가’를 보고 그 비밀에 대해서 감탄해야 됩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목사님, 그 이야기가 그럴싸하기는 한데 예수님이라는 분이 어떻게 해서 죄인을 용서해주고 어떻게 건지는 겁니까?”라고 묻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제가 이렇게 답변합니다. 비밀입니다. 그 비밀도 설명해야죠. 사울이라는 사람이 다메섹에서 내려가는데 그 이야기가 사도행전 9장에 나옵니다.
사도행전 9:3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하늘에서 무엇이 내려왔습니까? 빛. 빛이 와서 사울일행을 둘러 싸버렸습니다. 진짜입니까? 진짜입니다. 하나님의 빛이 심심풀이로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빛이 임해버리면 그 순간 사울은 무엇만 생각하느냐 하면 ‘내가 키가 얼마이며 몸무게가 얼마이며 뱃살이 얼마나 많이 나왔는지, 한 달 수입, 남자냐 여자냐, 가족은 몇이고 아버지는 누구고’라는 세상적인 것들이 일체 다 없어지고 ‘어, 빛이다’만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제가 왜 이렇게 설명하느냐 하면, 여러분이 성령의 빛을 받게 되면 ‘나는 한 달 수입 얼마이고 학교 어디까지 나왔고 교인 몇 명이고 앞으로 어떻게 되는지’ 그런 것이 깡그리 그 순간 다 없어지고, 다 잊어버리고 ‘예정하신 뜻으로 내려온 빛이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지목하면서 내려오는 하나님의 빛이야’에 몽땅 쏠리게 됩니다.
중동의 원유 값이 얼마인지, 내가 학교 가는지 숙제하는지 다 잊어버리고 심지어 미장원에서 여자들이 파마한다고 머리 감고 있는데 감고 있는 채로 성령을 받아 버리면 자기가 몇시간 후에 파마를 풀어야 되는지도 잊어버리고 ‘어, 빛이다’, 이렇게 됩니다.
빛 앞에서 내가 어떤 존재며 나는 얼마나 성실하며 나는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그런 것은 다 무시당하고 오직 보이는 것은 ‘빛이다’라는 것만 보입니다. “그러면 목사님, 우리도 사도바울처럼 뭐가 빛이 비쳐야 되지 않습니까?” 꼭 사도바울처럼 빛이 실제로 임해서 눈이 소경이 되어야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장님 되어야 구원됩니까? 장님 되고 싶습니까?
장님 되어버린 것은 사도에게 있었지만 그 사도와 똑같은 효과가 우리에게도 일어납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지금 내가 통장에 돈이 얼마나 남아 있으며, 애가 시험 치는데 잘 쳤는지’ 그런 것은 다 날아가 버립니다.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주님은 구세주고. 하나님아버지의 예정대로 나를 구원하셨군요. 예수님이 나 대신 죽으신 구세주인 것을 알았습니다. 이제는 내가 예수 믿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는 것을 제가 인정하겠습니다.”
이런 순간이 오게 되면 사도바울에게 임했던 그 빛의 사건이나 오늘날 우리가 성령 받고 나서 ‘주여, 주님께서 저를 구원한 것 맞습니다. 제가 죄인입니다’라는 그 고백이 똑같은 체험이며 똑같은 결과를 낳습니다. 누가복음 2장에 보면 빛에 대해서 나옵니다. 마리아가 아기 낳고 있을 그 즈음 그 근처 들판에 목동들이 있었습니다.
목동들이 양을 치고 있을때에 그곳에 하나님의 빛이 임해서 그 둘레를 조명이 비치는 것처럼 만들었습니다. 그때 목동이 내일 시장에 양팔아 넘길 그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목동들은 무서워서 죽는 줄 알았습니다. 양이 지금 도망을 가는지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때 천사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누가복음 2:10-13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천사들이 부른 노래의 가사가 뭡니까? “하늘에서는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그러고서 목동이 어디로 갔습니까? 양 치러 갔습니까? 그들이 베들레헴에 가서 아기를 만나봤지요? 만약에 양 주인이 그걸 봤다면 그것은 목동의 근무지 이탈이고 근무태만입니다.
“이 인간들아! 양을 치라 했더니 양은 안치고 무엇을 하고 있느냐” 할 때 그 목동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빛이다!”
“미쳤나?”
“미쳤다! 나는 봤다. 천사의 예언을 들었다. ‘하늘에서는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정신 차려라. 너희들은 양이나 치고 월급이나 받으면 되지. 정신 좀 차려라.”
이것이 바로 창세전에 예정된 자에게 주님께서 확실하게 먼저 찾아와서 건져내는 방법이 이 방법입니다. 빛이라는 겁니다. 베드로전서에 보면 그 마음속에 무엇이 들어온다?(벧전 1:19) 우리 마음속에 샛별이 떠오르게 되면 우리마음은 그동안 내가 구축해 놓은, 키가 얼마니, 지위가 어떠니, 미장원에서 파마가 잘나왔니, 이런 모든 생각이 휴지조각보다 더 사소하고 하찮은 것으로 다 사라집니다.
“나는 봤다. 나는 알았네!”
“뭘?”
“창세전에 알려주기로 예정된 사람에게만 알려주는 그 비밀을. 나는 알았네. ‘주여 저는 죄인 맞습니다’.” 옆에서 보고 있다가,
“너같이 착실한 인간이 뭐가 죄인이야? 뭐가 죄인지 이야기 해봐.”
“이유 없이 죄인입니다.”
그래야 로마서 3장이 맞습니다.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죄인 되게 해서 이제는 율법이 아니라 율법외의 한 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라’는 성경의 모든 말씀이 사도바울과 사도베드로가 이야기했던 그 모든 것이 다 이해가 됩니다. ‘이것이구나!’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이미 지켜진 채로 예언의 말씀이 갑자기 덮어 씌워지는 겁니다.
그 모든 말씀이 우리 마음의 빛으로 와버리면 우리는 성경말씀대로 완성되고 성취된 것을 골라잡기 바빠요. 이것도 성취, 이것도 성취, 모든 것이 이미 완료된 상태입니다. 모든 것이 공짜로 그냥 들어오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은 문자로 보는 것이 아니고 영으로 읽으라’는 말이 그 말입니다.
빛 이야기가 또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고 난 뒤에 40일 동안 무엇을 먹었습니까? 통조림을 먹었습니까, 생수를 마셨습니까? 뭘 먹었습니까? 1) 칡넝쿨 2) 통조림 3) 라면 4)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몇 번입니까? 아무것도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는데 모세가 산에서 내려올 때는 온 산 전체가 무엇으로 뒤덮였습니까?
빛으로 뒤덮였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눈이 부셨습니다. 마치 태양이 산 위에서 성큼 성큼 내려오는 것 같았겠지요. 눈이 부셔서 ‘저게 사람인지 태양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였습니다. 백성들이 어쩔 줄 모르고 있을 때 모세가 수건을 가지고 자기 광채 나는 얼굴을 가리웁니다. “나다! 알아보겠나?” “어디 다녀오셨습니까?” 빛의 나라에 다녀오니 그렇게 된 겁니다.
성경은 우리들이 모르는 감추어진 비밀을 오직 예정된 자에게만 알려주는 책이 성경책입니다. 그런데 그 비밀을 전달하는 중간에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보고도 ‘그냥 정치범 하나가 까불다가 죽었구먼’ 하는 사람은 여전히 어리석은 것이고‘저 피가 창세전에 예정된 사람의 모든 죄를 대신 용서하기 위해서, 복주기 위해서, 영생주기 위해서 그분이 혼자 고생했던 십자가라고 이해되는 것, 그것이 바로 구원의 능력입니다.
헌금, 십일조, 주일성수, 봉사, 찬양대, 교사, 목사, 집사, 장로, 남자, 여자, 결혼했다, 안했다, 이혼했다, 안했다, 그런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창세전에 예정된 것은 십자가인데 자기신세타령 할 일 있습니까? 다시 이야기합니다. 목자가 빛 앞에서 ‘이거 양 내다 팔면 얼마 받을런지’ 그런 것을 의논하지 않았습니다.
양이냐 도망가든 죽든 자기는 어디로 달려갑니까? 예수님 보러 달려갔습니다. 그 아기 예수가 하나님의 약속된 그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분을 죽이셨습니다. 그분이 죽어야 합니다. 죽는 그것이 약속된 비밀입니다. 그분이 죽어야 우리가 삽니다. 그분이 죽어야 우리가 살고 그 죽었던 분을 살려내고 죽어 마땅한 우리도 살려내고 그래서 하나님의 집에서 함께 영원히 사는 겁니다.
이것이 창세전에 예정된 프로젝트입니다. 이 프로젝트가 어떻게 전달되는지 다음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우리교회(IP:220.♡.176.141)
08-07-24 17:25
서울080711b엡3장9절
에베소서 제 16강 (이 근호목사, 2008년 7월 11일-b, 서울의존교회)
앞에 있는 이 그림을 보시면 감추어진 숨어있는 하나님이 나타나신 하나님이 될 때 그냥 나타나시는 것이 아닙니다. 아까 간식으로 수박이 나타날 때 여기 없다가 밖에 있다가 여기에 나타났지요. 하나님이 창세전에 뭔가 감추어 놓은 것이 있는데 그게 감추어진 성전입니다. 여기 실을 살살 풀면 이것이 나타난 성전이 되는 겁니다.
숨어 있는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 그냥 빈손으로 나타나시는 것이 아니고 창세전에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시면서 우리 앞에 나타나는 겁니다.
에베소서 3:9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 보면 옛날에는 어땠다고요? 감취었다. 지금은 어떻게 한다고요? 드러낸다. 감취었던 것이 드러나면서 하나님께서 복음으로 나타난 겁니다. 말이 좀 어려우니 쉽게 하겠습니다. 복음이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감춰놓은 겁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부터 감춰놓은 그것을 마지막때에 나타내니까 나타난 것이 뭐냐? 복음, 기쁜 소식이라고 나타난 겁니다.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 ‘경륜’이란 절차라는 뜻입니다. 이것도 어려우니 그림으로 그립니다. 하나님께 감추어진 그 무엇이 있는데 그 무엇이 실타래를 풀듯이 솔솔 하나하나 풀어 나가는 겁니다. 풀어 나가게 되면 그 중의 하나가 대표적인 것이 솔로몬이 지은 성전입니다.
모세율법 속에 보면 성전의 구조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장방형으로 지어진 구조물인데 동쪽은 오른방향, 서쪽은 왼방향, 북쪽은 위방향, 남쪽은 아래방향으로 볼때. 출애굽기 25:1-31:11) 맨 바깥 울타리가 동서방향(긴면)이 50미터, 남북방향(짧은면)이 25미터, 높이는 5미터로 바깥에서 안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 안에는 텐트구조물이 하나 있는데 그 텐트는 방이 둘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동쪽에 문이 있어서 그 문안으로는 제사장들만 들어 갈수 있습니다.
안에 있는 텐트와 바깥 울타리 사이를 뜰이라고 하고 동쪽문으로 들어가게 되면 맨 먼저 놋제단이 나오는데 여기서 짐승을 잡습니다. 놋제단을 지나 물두멍이 있는데 거기는 제사장의 손발을 씻도록 하고 짐승을 잡아서 텐트안으로 들어가는데 방이 두 개 있는데 안쪽에 있는 방을 지성소라고 하고 바깥쪽에 있는 방을 성소라고 합니다.
성소에 들어가면 북쪽면에 떡상이 놓여 있고 그 떡상에 떡이 한줄에 여섯 개씩 나란히 놓여져 12개가 놓여져 있고, 남쪽면에는 탁자위에 금촛대가 있는데 양쪽으로 여섯 개의 가지가 나와 있어서 일곱등잔을 켜게 되어 있습니다. 입구 맞은편 서쪽면에는 향을 피우는 향단이 자리 잡습니다.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는 위로부터 아래까지 커튼(막)이 드리워져 있고 거기에는 천사(그룹)들이 수놓아져 있습니다. 그 커튼안쪽의 지성소에는 아카시아 나무(조각목)로 만들어서 금을 입힌 상자, 언약궤 혹은 증거궤가 놓여져 있습니다. 이 성막이 나중에 단단한 건축물이 되면 이것이 솔로몬 성전이 되는데 이 원형이 하늘나라에 있습니다.
창세전부터 감취어진 성전의 모양새입니다. 이 집이 하나님의 집이고 하나님은 이 안에 계시기에 이 안만 거룩한 곳이 됩니다. 이 안에 누가 들어오면 죽습니다. 일반인들은 죽고 여기에는 피 바른 사람만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나중에 솔로몬 성전이 되면 여자나 이방인은 못 들어오고 피 발린 남자들만 출입하게 됩니다.
더 나중에 에스겔서에 성전이 나오는데 그것은 더 복잡한 구조물로 등장합니다. 어쨌든 제가 지금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 하늘에 있는 진짜 성전의 모형이고 그림자입니다. 그림자가 뭔지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제가 성경책을 들고 있는데 이 성경책의 그림자가 있습니다. 이 그림자를 보고 성경인지 아닌지 알아보겠습니까, 못 알아보겠습니까?
못 알아봅니다. 네모난 것이 한 두개입니까? 이 그림자를 보고 이게 맛있는지 안 맛있는지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사람들은 하늘나라성전은 감취어져 있고 그림자만 지상역사에 나타나니까 이게 하나님의 집인 줄 알고 이것만 붙드는 겁니다. 그림자만 붙들고 ‘나는 하나님집의 제사장이고 레위인이고 나는 들어가서 구원되는데 너희는 못들어가서 구원못된다’는 식으로 만날 이것만 생각하는 겁니다.
사도바울도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대로 성전을 세우라고 했는데 말씀대로 성전을 세웠습니다. 이제 된거지요?” 예수님이 오셔서 “아니야. 아니야. 그것은 그림자야 그림자. 헛 밟았어. 헛 밟았어.” 어떤 바보같은 아이가 자기를 괴롭히는 애한테 달려들지 못하고 그 애가 지나간 그림자를 밟으면서 “한번 당해봐라. 아프지! 아프지!” 하면 그애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잘한다. 실컷 한번 밟아봐라. 네 발만 아프지.” 이럴거 아닙니까?
그림자를 보고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림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 어두운 그림자는 옛날부터 감취어진 성전이 솔솔 내려와서 모세율법, 솔로몬 성전, 십일조, 안식일, 십계명 등등이 되는 겁니다. ‘탐내지 말라, 부모를 공경하라’ 이런 것들이 다 그림자입니다. 지켜봐야 그것은 그림자 지키는 겁니다. 골로새서 2장에 보면 그것은 다 그리스도의 그림자입니다.
골로새서 2:16,17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율법은 다 그림자입니다. 그 그림자가 있으매 진짜 본체, 실체가 있는 겁니다. 그림자가 있다는 것은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숨어 있는 실체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 숨어 있는 실체가 뭔지를 모르고 사람들은 그림자만 잔뜩 지키고 순종하고 그러면 구원되는 줄 알고 있는 거예요.
이 그림자가 성경의 그림자라면 이 그림자를 보고서는 성경인지 그냥 네모판대기인지는 모릅니다. 그런데 이 성경이 움직이니까 그림자도 움직이고 그 움직임을 통해서 실체가 어떠하다 하는 것을 알도록 하는 겁니다. 그림자가 움직이니까요. 이 성전에서 그림자가 어떻게 움직입니까? 1) 흠 없는 양을 잡았다. 2) 그 양은 피 흘리고 죽었다. 3) 그 피는 하나님의 성소에 뿌려진다. 4) 그 피로 백성들의 죄가 없어진다.
그림자가 움직이니까 뭔가 감취어진 것에서 움직임이 나타나는데 그 움직임이 뭐냐 하면 ‘흠 없는 양이 피 흘리고 죽었는데 그 피를 성소에 뿌리니까 그 양을 바친 모든 백성들이 죄용서 받아서 거룩한 백성이라고 다른 나라와 전쟁을 해서 승리했다.’ 이런 시나리오, 이런 내용이 흘러나옵니다.
그 내용이 이사야 53장에 가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제갈 길 가고 도망쳤는데 우리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흠 없는 양으로 바쳐서 대신 피 흘리게 해서 자기 백성을 용서했다’고 약간 더 구체적으로 나와 있고 점점 더 신약성경에 올 때까지 그런 식입니다. 그래서 궁금합니다. 이것이 그림자인데 그림자를 대신할만한 진짜 그 분은 어떤 모습일까?
내 님은 누구일까? 어떻게 생겼을까? 어떤 집사님이 계신데 그 분은 결혼할 때 얼굴은 못보고 전화로만 대화를 했답니다. 그런데 목소리가 너무 멋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그 목소리를 기초로 해서 그 목소리에 합당한 모든 상상력을 다 동원해서 상대방을 멋있게 꾸몄습니다. 그런데 막상 만나보니 키도 작고 불 품도 없고 영 상상과는 딴판이었고 그야말로 목소리만 좋았던 겁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목소리나 외모보다도 그분이 ‘빛이다’ 여기에 관심사가 있습니다. 누구하고 살지, 수입이 얼마인지 이런 데는 큰 관심이 없고 모였다 하면 빛에 대해서 복음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성경을 이야기 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 여자 분도 복음에 대해서 화제가 되고 나니까 그 나머지 문제는 별 의미 없어지는 겁니다.
처음에는 목소리만 좋았는데 이제는 목소리 좋은 것도 별 의미 없고 이제는 복음이 좋아서 둘이 사니 얼마나 궁합이 맞는지 애가 셋입니다. 사람은 그 실체는 모르고 자꾸 그 이미지만 상상을 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그 인간들의 마음속에 힌트를 주기 위해서 뭔가 자꾸 움직임을 줍니다.
그래서 그 움직임을 종합해서 메시아를 생각했는데 인간들이 생각한 그 메시아와 완전히 정 반대되는 메시아를 하나님께서 보냈습니다. 하나님은 장난꾸러기! 아무도 예상 못한 메시아를 보냈습니다. 사람들이 아무도 알아보지 못한 메시아를 보냈습니다. 심지어 열두제자도 자기 힘으로 주님을 알아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전부 다 엉뚱한 생각하고 자기 생각하기 바빴고 나중에 주님 십자가에 달릴 때 도망치기 바빴습니다. 지난 주일설교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요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이 가룟유다의 발을 씻어주셨습니까, 안 씻어주셨습니까? 씻어 주셨습니다. 그게 뭡니까? 그게 그림자입니다. 그러면 발 씻은 그 그림자를 받으면 그 받은 가룟유다가 구원받습니까?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발을 씻어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국 마귀라는 것(요 6:70, 13:2)은 내가 어떤 상징, 어떤 체험을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가 뭘 받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진짜 예수님은 마지막에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느냐가 중요하고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피입니다.
그 십자가의 피를 남겨준 이유, 왜 우리에게 유일하게 남겨준 사랑의 증표가 십자가의 피인가?
에베소서 3:12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
어떤 경우에, 예수님에게 일어난 일중에서 어떤 일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당당이 나아감을 얻게 하는 겁니까? 예수님의 일중에서 어떤 일이 우리가 하나님께 당당하게 나아감을 얻도록 만드는 일이 되는 겁니까? 질문이 어려운 것 같으니 다시 하겠습니까? 예수님에게 일어난 어떤 일이 있기에 우리는 우리 행동에 구애받지 않고 내 행동의 실수나 모자람에 관계없이 어떤 경우에도 당당하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이거 내 안경이다 고이고이 간직해라.” 이런 경우는 하나님께 당당할 수 없습니다. 만일에 이 안경 깨뜨리면 우리는 하나님께 원망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이 포크 이거 내꺼야. 이거 꼭 쥐고 있어야 천당갈수 있다. 이거 꼭 잘 쥐고 있어라”라고 한다면 우리가 이 포크를 잃어버리거나 하면 천당 못가잖아요.
그거 지킨다고 늘 초조하겠지요. 만 날 그거 지킨다고 당당함, 혹은 담대함이 안 되지요. 계속해서 그거 있나 초조하게 확인이나 하겠지요. 제가 어떤 분에게 휴대폰을 얻었는데 이것 때문에 계속 신경이 쓰이는 거예요. 잊었다 싶으면 찾고 어디로 갔나, 늘 찾게 되고 고장 나면 수리하느라 신경 쓰고 이게 애물단지입니다.
휴대폰 때문에 당당하지를 못합니다. 그러면 언제 담대하고 당당합니까? 내 것이 어떤 것이라도 내 것과 상관없이 구원될 경우에만 우리는 담대하고 당당해 지겠지요. 우리가 당당하고 담대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어떤 인간이 되었든지 상관없이 우리 외부에서 예수님이 뭔가 했을 때 우리가 그 이유로 인하여 담대하고 당당한 겁니다.
‘내가 이것을 간수해야 돼. 이것 놓치면 안 돼. 이것 놓치면 지옥 가는거야.’ 끊임없이 이렇게 생각한다면 당당하고 담대할 수 없습니다. “이거 잘 키워라. 이것 많이 키워야 돼. 이것 못키우면 지옥가는거야.” 이런 식이면 담대할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에 달란트 비유가 나오는데 달란트를 줘도 문제입니다(마 25:14-29).
펀드 넣어놓고 망할까봐서 벌벌 떠는 것처럼 이것은 담대한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담대하다는 것은 어느 정도냐? 예수님이 하신 일로 인해서 추가적으로 계속해서 뭔가 쏟아질 때 그게 담대하고 당당하고 안도감이 생깁니다. 어떤 식당에 가면 이렇게 써붙여 놓았습니다. “점심때 쌈밥은 무제한 제공됩니다.” 도대체 쌈밥에서 뭐가 무제한 제공된다는 것인지, 그게 쌈인지 밥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떤 곳은 커피를 한번 시키면 그 뒤로 리필이 무제한 제공된다고 합니다. 커피 아무리 무제한으로 리필 해줘도 그거 10잔씩 들이킬 사람 누가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의 은사가 우리에게 무제한으로 공급됩니다. 그게 에베소서 3장 19절에 나옵니다.
에베소서 3:18,19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충만’이란 넘친다는 뜻입니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사랑이 어느 정도 되느냐 하면 그 사랑의 “…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이것이 사랑의 해일인데, 하늘나라에 그 정도로 가득 찼는데 이제는 하늘나라에만 가득 찬 것이 아니고 너희에게도 가득 차기를 바란다는 말입니다.
“넘쳐나라!”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두자로 ‘충만’입니다. ‘충분히 넘치도록 줄게. 무제한 으로 줄게’ 그 말입니다. ‘그 사랑을 무제한으로 줄 테니 그 무제한의 사랑이 나에게 덮쳤다는 그 사랑의 무제한을 알고 담대하고 당당하게 하나님께 나아가라’는 말입니다. 십자가라는 것은 메마른 명태가 아닙니다.
그냥 바짝 마른 명태 들고 나니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서 뭔가 쏟아져 나옵니다. 거기서 쏟아져 나오는 것이 뭡니까? 사랑, 용서입니다. ‘용서해줄게. 사랑해줄게!’ 이게 본체고 옛날 그림자는 뭐냐?
양을 잡아서 그 피를 가지고 성전에 들어가서 피를 뿌리고 ‘하나님, 이 피를 뿌리오니 이 피 받으시고 저 백성들의 죄악을 몽땅 다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으로 용서해주세요’라고 하면서 실제로 어린양, 또는 염소, 피를 잡아서 성전에서 뿌리면 용서가 되었습니다. 옛날에는 그것을 되풀이 했습니다.
제사장이 하다가 죽으면 다른 제사장이 또 하고 계속 되풀이 했습니다. 히브리서에 보면 그것이 나옵니다. 지금은 단번에 다 해 치웠습니다.
히브리서 9:11,12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히브리서 10:10 “이 뜻을 좆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이것은 ‘넘쳐나라’와 똑같은 말입니다. 이것이 감추어진 비밀입니다. 이것이 누구한테 해당됩니까?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창세전에 예정된 하나님의 자기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겁니다. 그 사람이 40년 술을 퍼먹어서 지금은 죽기 직전에 있더라도, 병실에 누워 있느냐, 집에 있느냐, 병이 세 가지냐 네 가지냐, 그런 것을 묻지 않습니다.
“어이, 아들아!”
“누구십니까?”
“나, 하나님이다.”
“왜 오셨습니까?”
“너는 창세전부터 내 아들이다.”
“어쩌란 말입니까?”
“너 죄인이다. 너 대신 내 아들 예수가 십자가에서 피 흘렸다. 그 피로 말미암아 이 사랑이 넘쳐나라! 너를 용서하는 사랑이 넘쳐나라!”
그 때 그 사람이 평생 술을 먹었어도 하늘나라 어떻게 갈까요? 자기가 회개했다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피를 보고, 어린양은 그림자고 실체는 예수님의 십자가이기에 그 실체인 그 피를 보고 담대하게 당당하게 ‘아버지, 저를 받아 주소서’합니다.
좀 뻔뻔스럽다마는 디모데전서에 보니까 ‘창세전에 예정된 자에게 죄인을 오래 참으사 나 같은 죄인도 구원했는데 그 복음이 바로 이 복음이다’(딤전 1:15,16)라고 합니다. 우리 행함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이미 구원되기로 작정한 자에게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총의 증거가 뭡니까?
흠 없는 어린양의 그 피가 바로 우리가 행한 것도 없이 구원되는 유일한 증거로 주어진다는 말입니다. 그 증거중의 하나가 바로 출애굽당시의 일입니다. 출애굽의 유월절에 여러 가지 깊이 있는 이야기가 많지만 중요한 것만 몇 가지만 말씀드립니다. 히브리인들이 애굽나라에서 나오는데 그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는 히브리인들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자가 하나님 쪽에서 방문을 해오고 보니까 애굽나라는 죽음의 나라이고 히브리인들도 그 죽음의 나라에 꼼짝 못하고 잡혀 있는 죽음의 사람들입니다. 애굽은 무조건 죽음의 나라입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바로의 맏이 왕자가 죽는데 바로의 왕자만 죽는 것이 아니고 희한하게도 바로왕궁의 옥에 갇혀 있는 자들의 맏아들도 다 죽습니다.
쉽게 말해서 아버지가 교도소에서 복역하고 있는데 유월절의 그 밤에 집에 있는 초등학생 아들이 아무 이유도 없이 죽는 겁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그 아들이 무슨 잘못을 했습니까? 애굽나라 그 자체가 죽음이라는 말입니다. 그 죽음의 나라에 속했으니 히브리인들도 마땅히 같이 죽어야 마땅한 사람들입니다.
애굽나라 전체가 하나님 앞에서 생명이 없는 죽음의 나라인데 여기서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난 겁니다. 그 죽음의 천사(사자)는 사전에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언질(약속)을 받았습니다. 이 유월절도 그림자이기에 여기서 창세전에 예정된 실체가 솔솔 풀려 나와야 됩니다. 실체가 뭐냐하면 ‘피로 용서한다’는 그 약속(언질)을 지니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사람을 죽입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그렇게 집집마다 죽이고 돌아다니는데 히브리인들은 집집마다 흠 없는 어린양의 피를 발랐습니다. 지금 제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피’, ‘십자가 피’가 실체고 나머지는 다 상징이고 그림자입니다.
지금 죽음의 사자의 관심사는 피를 잘발랐느냐, 많이 발랐느냐, 그 피 발린 집 안에 들어 있는 사람이 몇 명이냐, 애굽인이냐 히브리인이냐,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묻지도 않고 ‘그 피만 있으면 그냥 용서해주라’는 그 약속을 누구에게 받았습니까? 사전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약속입니다. 그게 두 글자로 ‘비밀’입니다.
기독교 간단합니다. 기독교란 하나님끼리만 아는 비밀을 우리가 알아차리는 것, 그것이 기독교입니다. 하늘나라에서 죽음의 사자가 왔는데 그 사자는 아주 냉정하게 거룩하지 않은 인간 다 죽이는 겁니다. 지난 주일설교에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람들이 악마를 못이기는 이유는 악마는 천사이기 때문에 천사는 생존문제에 연연해 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혈육에 속했기에 만 날 자기 세포, 생존문제, 밥 먹고 사는 그것을 걱정합니다. 천사가 기관총을 겁내겠습니까? 아니면 기관포를 겁내겠습니까? 천사의 관심거리는 하나님께 미움받을거냐, 사랑받을거냐 그것만 생각하는 겁니다. 죽고 사는 그것은 별 문제 아닙니다.
우리가 천사같이 살 것 같으면 ‘주여, 제가 예수 믿고 몇 년 더 살겠습니까?’가 관심이 아니고 ‘주여, 우리는 죽든지 살든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입니까? 미움의 대상입니까?’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피만 발리면 그냥 넘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목사님, 그거 진짜입니까?” “진짜입니다.”
사도바울은 사도되기 전에는 그걸 모르고 자기 행함으로 구원받는 줄 알았습니다. 사도되고 나서는 ‘율법의 행함으로 구원될 자가 없고 만일 행함으로 구원받으면 십자가를 헛되게 하는 것이다’(갈 2:16,21)라고 했습니다. 십자가하고 무엇을 대비시킵니까? 우리의 행함과 대비시킵니다. 만일 우리가 행함으로 구원받으면 십자가피가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 1:29) 예수님이 어린양으로 왔다는 말은 그 때 그 그림자대로 실체가 그대로 옮기겠다는 겁니다. 죽음의 사자한테는 뇌물 같은 것 안 통합니다. 어린양의 피를 보고 그냥 넘어간다고 해서 뭐라고 합니까? 유월절(逾月節, pass over)이라 합니다. 뭘 보고 넘어갑니까? 피를 보고 넘어갑니다.
찬송가에도 나옵니다. 그냥 넘어가는 겁니다. 얼마나 간단합니까? 그림자는 복잡해도 실체는 간단합니다.
주 십자가를 지심으로(찬송가 199장)
주 십자가를 지심으로 죄인을 구속하셨으니
그 피를 보고 믿는 자는 주의 진노를 면하겠네.
내가 그 피를 유월절 그 양의
피를 볼 때에 내가 너를 넘어가리라.
흉악한 죄인 괴수라도 예수는 능히 구원하네.
온 몸을 피에 잠글 때에 주의 진노를 면하겠네.
내가 그 피를 유월절 그 양의
피를 볼때 내가 너를 넘어가리라.
심판할 때에 모든 백성 행한일 대로 보응받네.
죄 있는 자는 피를 믿게 주의 진노를 면하겠네.
내가 그 피를 유월절 그 양의
피를 볼 때에 내가 너를 넘어가리라.
구주의 사랑 크신 은혜 보혈의 능력 의지하세.
심판의 불이 내릴 때에 주의 진노를 면하겠네.
내가 그 피를 유월절 그 양의
피를 볼 때에 내가 너를 넘어가리라.
그냥 넘어가는 겁니다. 그렇게 넘어가면서 우리가 구원되었지요. 그 다음에 구원되고 나서 우리에게 뭘 주느냐를 이야기 하겠습니다. 구원은 우리의 행함과 관계없이 뭘 보고 넘어간다? 피 보고 넘어간다. 저보고 따지지 마세요. 그것은 하나님과 이야기가 다 끝난 겁니다. 피만 있으면 넘어갑니다.
그것을 가지고 히브리서는 ‘언약의 피를 모독하지 말라’고 하고 언약의 피를 짓밟는 것을 용서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히브리서 10:26-29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에베소서 1장 7절에도 뭐라 되어 있습니까?
에베소서 1: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
뭐로 말미암아? ‘피로 말미암아.’ “목사님, 어떻게 하면 그 비밀을 알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나의 집이 아니고 하늘의 집에 갈수 있습니까?” 그 방법은 뭡니까? 그 피만 보고 넘어가는 겁니다. 넘어가게 되면 졸지에 우리는 어디에 와 있다? 하나님의 집에 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집 입구에는 피가 발려 있습니다.
흠 없는 피로 인하여 그 집에 들어오게 되면 여기서 기다리는 것은 에베소서 1장부터 죽 나오고 오늘 본문 3장에서도 나오는 것이 ‘사랑’입니다. 5장에서는 이 사랑을 다른 말로 ‘용서’라고 합니다. 주기도문에도 나옵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마 6:9-15) 하나님의 사랑속에는 용서가 있습니다.
‘주께서 너희를 용서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용서하라’(엡 5:2) 에베소서 5장에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찌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는 이런 것은 전부다 사랑과 용서의 힘에서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발 제 말을 듣고 ‘이제부터 내 남편을 어떻게 해야지’ 그런 소리는 하지 마세요. 사랑을 알게 되면 그 사랑이 여러분을 가만두지 않고 반드시 사랑값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게 되어 있습니다. 에베소서 5장에 보면 “술취하지 말라”고 하는데 그냥 술을 끊은 것은 은사가 아닙니다.
‘술 취하지 말라’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성령에 취하라’가 나오지요. 성령에 취하면 ‘빛이다!’ 이겁니다. 자기 것이 없다는 말이거든요. 술을 마시게 되면 일단 자기가 없어집니다. 자기가 없어지니까 자신의 본능만 남습니다.
그래서 술 취하면 아무데나 오줌 누고 버스타고 기사나 승객한테 행패부리고 집에 들어가서 자는 애들 다 깨워서 한 소리 또 하고 지겹게 하고 또 잔소리하고, 그만 하라고 하면 무시한다고 또 윽박지르고 그래놓고 아무데나 쓰러져서 자고 일어나서 머리 아프다고 호소하면서 북어 국 끓여달라고 합니다.
술 취하면 자기를 잊어버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