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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080701b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바울의 심리학자유게시판[신학]

20080701b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바울의 심리학

이름 : 한윤범(IP:59.6.189.226)

20080701b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바울의 심리학

(강의:이근호 목사)

신약에서도 네페쉬 같은 요소가 있습니다. 바로 프쉬케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말로 하면 목숨, 혹은 영혼이 됩니다. 이것도 역시 우리를 살게 하시는 힘을 두고 말합니다. 선인과 악인에게도 하나님께서 햇빛과 공기를 퍼부어주셔서 살게 합니다. 만물이 다 이 네페쉬의 힘으로 삽니다. 소나 말이나 개나 돼지까지도 말입니다.

그렇다면 루아, 즉 영이라는 것은 뭡니까? 영이라는 것은 네페쉬와 겹치는 부분이 있다고 래드는 말합니다. 옳습니다. 루아도 네페쉬와 같이 사람을 살게 하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살게 하느냐 하는 겁니다. 네페쉬는 인간에게 찾아오면서 하나님의 약속에 준해서 인간을 다룰 때 작용하는 그런 하나님의 능력을 말합니다.

즉 그냥 인간을 살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장차 완성된 약속, 혹은 약속된 분을 증거하기 위해 인간에게 다가와서 능력으로 작용하는 것, 그것이 루아, 즉 영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신약의 성령과 연관성을 가지게 되면 상당히 복잡한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신약에 나오는 인간에 관한 용어들은 결코 인간 자체를 분석하거나 탐구하기 위한 용어가 아닙니다. 십자가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서 동원된 용어들입니다. 그런데 이 점이 구약에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구약에 나오는 바사르, 즉 몸이나 네페쉬, 즉 혼이나 루아, 즉 영은 모두 인간을 설명하기 위한 용어들이 아니라 예수님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발생된 새로운 그 무엇으로 인하여 인간은 어떤 식으로 이미 완성되어버린 약속을 증거하느냐? 그 역할을 하는 것이 인간인데 그런 역할을 하기 위한 또는 하고 있는 그런 표현하는 용어가 바로 신약에 나온 인간에 관한 용어들입니다.

즉 신약에 나오는 소마, 즉 몸을 통하여서 십자가 사건으로 모아져야 하고 프쉬케, 즉 혼 개념을 통해서 십자가 사건으로 통해야 하고, 퓨뉴마 즉 영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십자가의 의의가 설명되어져야 하는 겁니다, 복음 발생을 말하지 않는 인간론은 성경적 안목이 아니라 자기 존재를 고수하겠다는 자신만을 절대존재로 품어보겠다는 사단적 악마적인 안목에 불과합니다.

사울과 다윗의 관계에서 이것이 나옵니다. 사울도 분명 루아를 받았습니다. 즉 성신을 받은 자였습니다. 그러니까 블레셋 군대를 성신의 힘으로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로 백성들이 외치기를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다”라고 나오니 그러한 외침이 루아적인 하나님의 능력의 작용에서 나온 외침인 줄 모르고 그 성신의 작용 앞에서 그만 자아가 절대적으로 고수하게 됩니다. 이것을 가지고 성경에선 악신이 임했다. 그렇게 이야기하죠.

이처럼 루아, 곧 성신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약속 앞에서 인간이 숨어있는 자기 위주의 반응을 드러내가 하는 작용을 합니다. 이것이 나중에 신약에 가서는 성령의 활동 앞에서 인간은 자기 본색을 더 이상 감추지 못하고, 자기 밖에 모르는 악마적 본성을 노출시키는 그러한 작용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악마성으로 인해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이며 이로 인해 성신이 기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당당하게 성취가 됩니다.

그래서 신약의 인간론 용어들을 씹으면 씹을수록 마치 자일리톨 껌을 터뜨리는 것처럼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이 깨물 때마다 팡팡 터져 나와야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구약에 나오는 인간에 관한 표현들, 바사르, 즉 몸이라든지, 네페쉬, 즉 혼이라든지, 루아, 영이라는 표현도 신약과 마찬가지로 결코 인간 자체를 묘사한 용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는 십자가 복음을 머금은 용어라면 구약은 무엇이겠습니까?

래드의 인간론의 문제점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조직신학에서 말하는 이분설, 삼분설을 배척하기 위해 구약의 인간론을 근거를 두고 신약의 바울 인간론을 논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구약의 인간론이 그건 어디에 근거하는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흔히 사람들이 인간론을 다루면서 이미 여기 내가 있다. 그 ‘있음’에서부터 시작해서 그 있는 존재를 분석하고 파악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구약의 인간론은 신약과 마찬가지로 인간을 위한 인간론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바로 ‘없음’에서 ‘있음’을 이끌어내신 그 하나님의 창조를 말하기 위한 인간론입니다.

사라가 있음에서 이삭을 낳은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사라에게 자식 없음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바로 그 없음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태의 죽음’입니다. 이 둘을 합치면 이렇게 되겠지요. ‘없음’에서 ‘있음’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전환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창조요 이 창조의 모습을 담아내기 위한 용어가 인간에 관한 용어입니다.

그래서 바사르, 즉 몸은 이 땅에 머물 수가 없는 겁니다. 자꾸만 어디론지 흘러가는 겁니다. 바사르를 지닌 자로서 자아를 찾기 위해 많은 학문을 해봤자 그것도 바람을 잡는 것처럼 허공을 잡는 일이 되고, 자아가 무엇인지 규정하기 위해 많은 돈을 벌어봤자 그것도 바람, 즉 공기를 잡는 일이 되고, 자아가 얼마나 대단하지를 확인하기 위해 아무리 선한 일을 해봤자 그것도 바람 잡는 일이라고 전도서에 나옵니다.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된 일입니다.

그냥 사라지고 없어져가는 것이 곧 바사르로서의 인간입니다. 시편에 보면, 우리 인간은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다고 했습니다. 머물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다윗은 말하기를 이 머물지 않는 바사르로서 결국 음부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데 음부에 들어간 입장에서 어떻게 하나님께 찬양하겠습니까? 그러니 빨리 음부에 머물지 않는 바사르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배후에는 바사르라든지 네페쉬라든지 루아는 모두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는 하나님의 창조를 묘사하기 위해 표현된 사실이 깔려 있습니다. 죽은데서 살리기 때문에 바사르란 인간도 삶으로써 전환될 수 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 자의 하나님이라는 사상이 깔려 있는 겁니다. 결국 구약의 인간론은 하나님의 창조를 보여주기 위해서 거론된 것입니다. 인간이 무엇이냐를 말하기 위해서 있는 거는 아닙니다. 다윗은 자기 자신을 규정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은 온전히 하나님께 도로 드리기 위한 기능과 용도로만 존재할 뿐임을 알았습니다.

루아 같은 경우에, 네페쉬에 동일하게 인간에 작용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네페쉬나 루아나 다같이 인간을 살게 하는 힘으로 주어지지만 특별히 루아는 하나님의 약속을 알리는 일과 관련돼있습니다. 즉 루아가 작용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계속 만드시고 다루시는 그 본래의 목적이 서서히 밝혀집니다. 그것은 바로 약속이요 언약입니다.

분명 노아나 그 당시에 사람들 모두가 네페쉬, 즉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살았습니다. 햇빛과 공기가 주어지고 단 비가 내려서 그들을 살게 했고 그들의 심장은 한 밤중에서 멈추지 않고 뛰었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다른 이에게 없는 게 특별히 주어졌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신이 임했다는 겁니다. 달리 말해서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겁니다.

반면에 다른 이들은 창세기 6장 3절에 보니 하나님의 신이 떠나버려서 그들과 함께 있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남은 것은 네페쉬나 바사르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그냥 편한대로 사는 겁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하고 사고팔고 했습니다. 이게 무슨 죄가 되는 겁니까? 노아도 마찬가지로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했습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런 네페쉬, 즉 혼이 인도하는 대로 사는 것이 그들의 전부였습니다. 온통 관심사가 그것뿐이었습니다.

반면에 노아는 하나님의 신이 임했습니다. 하나님의 신은 하나님의 약속 달성과 관련 돼있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와 더불어 언약을 맺었습니다. 노아의 관심사는 다른 사람과 달랐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노아의 뚝딱거리며 방주를 만드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루아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들은 루아적으로 봐서 비로소 그들이 바사르, 즉 허무하게 부서지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 드러나는 겁니다. 그리고 그들의 네페쉬, 즉 혼은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을 받기 위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겁니다. 전도서 마지막에 그게 나오지요.

하지만 노아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는 말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먹고 살게 해주신다는 것이 아니라 루아라는 영적 활동 혜택을 입고 있다는 말입니다. 즉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데서 살게 하는 그 모든 원천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고 하나님의 언약이 있다는 사실은 오직 루아의 작용으로만 알 수 있는 겁니다.

이 루아가 신약에 와서 프뉴마로 이어집니다. 소위 말해서 성신에서 성령으로 바뀌는 겁니다. 실은 이 용어의 바뀜은 이미 말라기 이후의 유대 묵시문학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래드는 말하기를 이 루아가 신약에 와서는 ‘죽을 몸도 살려내는’ 성령의 기능으로 이어진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제대로 보았습니다.

하지만 래드는 어떻게 해서 ‘죽을 몸도 살려내는 영’인지를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십자가 사건 이후에 본격적으로 성령이 활동한다는 복음적 안목과 인간론을 연결시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십자가를 근거하지 않고 그냥 인간이 무엇인가를 성경적 문자로만 수집하겠다, 이걸 결합하겠다. 이런 아이디어를 가지고 인간론을 쓴 거예요.

마치 구약에서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데서 살려내는 창조 기능’을 위해 인간에 관한 용어가 등장했듯이 신약에서 오로지 십자가 복음을 말하기 위해 인간론이 등장한 겁니다. 근데 래드는 그걸 언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첫째 시간을 끝내고 둘째 시간에 들어가 봅시다.

신약에 오면 ‘몸’의 개념이 둘로 나누어집니다. 구약에서는 바사르 하나로 설명했지요. 사라져가고 부서져야 될 몸, 그게 바사르입니다. 그런데 신약에 오면 이 바사르라는 ‘허무한 몸’이 ‘소마’와 ‘사르크스’로 나누어집니다. 그냥 몸과 그리고 육에 속한 몸, 혹은 육신에 속한 몸. 그냥 몸은 소마고, 육에 속한 몸은 사르크스입니다. 그리고 구약의 네페쉬는 신약에 와서 프쉬케가 됩니다. 목숨, 혹은 혼으로 번역될 수 있지요. 그리고 루아는 프뉴마 곧 영이 됩니다.

이 프뉴마는 하나님의 약속이 완성되어서 비로소 사용할 수 있는 용어입니다. 약속을 듬뿍 담고 그 약속을 전개하는 영입니다. 그냥 맨 탕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프쉬케일 뿐입니다. 그런데 왜 구약의 몸이 신약에 와서 그냥 몸과 ‘죄 있는 몸’으로 둘로 나누어질까요?

이 점을 설명하기 위해서 신약, 특히 바울의 인간론에서 ‘자아’ 개념이 형성되게 됩니다. 이 ‘자아 개념’이 없이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설명할 수 없고, 십자가를 제대로 설명 안 되면 왜 사도 바울이 몸과 육신의 몸을 나뉘었는지도 설명될 수 없습니다.

여기서 다시금 다짐을 합니다만, 바울의 인간에 관한 용어들은 결코 인간 자체를 표현한다든지 분석하기 위한 용어가 아니라 십자가 사건이 그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를 말하기 위해서 동원된 표현입니다. 따라서 소마라든지 사르크스라든지 프쉬케라든지 퓨뉴마라는 용어를 씹을 때마다 십자가 피 복음만이 톡톡 터져 나와야 됩니다. 인간에 관한 용어는 일종의 피를 머금고 있는 캡슐 같은 겁니다.

자아란 신약에 와서 크게 부각이 됩니다. 로마서 7장에 나오는 자아는 래드의 주장에 의하면 불신자에게 해당되는 사항이 아니라 오직 신자에서만 해당되는 사항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자아는 어떻게 생겨나는 걸까요?

아담이 범죄하고 난 뒤에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수치를 느끼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다가왔을 때 아담은 하와에게 자기 죄를 전가하였고, 하와는 뱀에게 자기 죄를 전가했습니다. 넘겨주려고 한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그 죄를 예수님이 받아내도록 했지만 말이죠. 이럴 경우에 분명 인간에게는 자아라는 게 이미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보세요. 평소에 사람들이 프쉬케적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생존의 은혜로 살 때에 과연 자아를 생각합니까?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하고 사고팔고 할 때 과연 자아를 생각하느냐 말입니다. 자아에 대한 분석과 탐구 없이 그냥 목숨을 유지하는 기운대로 살아갈 뿐입니다. 즉 왜 사느냐 물으면 그냥 살아있으니 살아가는 대로 살아간다고 답변할 뿐이죠. 자아의 구조에서 그 원인을 찾지를 않습니다.

편한대로 살고, 하고 싶은 대로 살고 몸이 이끄는 대로 살고 200개조의 세포가 아우성치는 대로 사는 겁니다. 배고플 때 밥 먹고 자아에 대해서 생각안합니다. 그저 위가 요구하는 대로 밥으로 채워주면 그만입니다. 잠이 오면 자면 그만이지 ‘왜 나는 잠이 와야만 하는가?’라고 연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난 시간에서 구약의 바사르는 ‘부서지는 몸’이라고 했습니다. 한 순간도 가만있지 못하고 해체되는 과정을 밟아나갑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창조와 관련 있을 때 자아를 그렇게 여겨지는 것이지 하나님과 상관없는 사람에게는 자신이 영원하다고 보게 마련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나를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한에서 하나님이 만들었기 때문에 나는 허무하다. 이렇게 생각하지만 하나님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결국은 그냥 살아가는 거예요.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살아있으니까 살아가는 겁니다.

이처럼 바사르를 제쳐두고 프쉬케나 프뉴마와 찾아들면 자아라는 것이 발생합니다. 바사르는 그냥 해체중이니 고정적인 자아 개념이 나올 수없습니다. 계속 해체중이니까. 그런데 그 자아가 꼭 자아를 규정할 때는 반드시 자기 손에 만져지는 몸을 앞장 세워서 자아를 거명합니다. 여기에 바로 동원되는 것이 ‘소마’입니다. 즉 몸입니다. 쉽게 말해서 ‘내가 무엇이며 어디 있느냐?’ 물으면 꼭 자신의 몸을 가지고 말하죠. ‘자, 여기 이렇게 몸이 있잖아. 이 몸이 누구 것일 줄 알아? 내 것이야. 그러니까 이 몸이 곧 나이고 내가 이 몸이야.’라고 말을 하는 겁니다. 자아라는 것이 이처럼 이렇게 몸, 소마 없이는 성립되지 않는 겁니다.

그런데 과연 이 말이 맞습니까? 아닙니다. 분명 하나님과 관련된 인간은 구약에 의하면 바사르, 즉 ‘헛된 몸’으로만 존재하는 겁니다. ‘여기 나 있다’가 아니라 ‘나는 어디로 가고 있다’로서 자신을 말해주어야 하나님이 규정해주신 그 ‘바사르’에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신약에 와서 인간은 바사르적 인간으로 자신을 보는 것이 아니라 ‘소마’적인 몸이 여기 있음을 가지고 자아를 대변해주고 자아를 주장하게 되는 겁니다.

그 원인은 바로 프쉬케와 퓨뉴마의 합작된 활약 때문입니다. 즉 종말에 인간은 드디어 자신이 지닌 악을 숨기려야 숨길 수 없는 시기에 돌입되어 있다는 겁니다. 즉 부셔지는 몸을 가지고 그 ‘부서짐’을 거부하고 안 부서질 것 같은 몸을 가지고 자아를 주장하기에 이릅니다. 이런 것으로 인하여 십자가 사건이 터져버렸고 그 십자가 사건이 오히려 하나님께서 고대했던 약속을 성공하는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프쉬케+퓨뉴마의 활약 때문에 이런 현상이 십자가 사건이 유발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출현은 인간들의 이러한 자아근성, 그것도 바사르적 몸을 가지고 소마라고 하는 고정된 몸이라고 우기는 그 죄를 그냥 주시하지 않고 ‘문제 있다’고 지적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출현했습니다. 사실 인간의 자아가 붙들고 있는 몸은 소마가 아니라 사르크스라는 것이 사도 바울의 외침입니다.

즉 인간은 그냥 부서지는 정도가 아니라 죄악 된 몸에 불과하기 때문에 부셔진다는 겁니다. 구약에서는 그 원인이 없었지요. 신약에서는 마지막이기 때문에 비로소 원인이 밝혀진 겁니다. 여기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죄악 된 몸을 지닌 것이 아니고, 그냥 죄악 된 몸 자체가 곧 인간이라는 겁니다. 인간이 죄악 된 몸을 지닌 것이 아니라 죄악 된 몸 자체가 인간이에요. 하지만 인간들은 죄악 된 몸이 아니라 소마적인 안정적인 몸으로서 자아라고 자기 본인이라고 허구적 개념을 계속 도출해내고 있습니다.

그 원인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죄 아래 들어앉아있기 때문에.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인간은 죄를 짓는 자아적 존재가 아니라 아예 죄에 의해서 허구적 개념인 자아를 고집하는 그런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죄 아래 자기가 죄를 짓는 게 아니고 죄란 통치 아래, 지배 아래 들어온 겁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본인들이 이것을 문제 있다고 탐구해봤자 진정 나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를 알지 못하죠.

마치 요한복음 3장에서 어두움이란 빛이 찾아들었을 때 비로소 어두움입니다. 빛이 찾아오기 전까지는 어두움이 어두임 줄도 모르게 됩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 앞에서 소경을 앞장 세워 말씀하신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본다고 하니 소경이고, 소경이라고 생각하니까 소경이 아니라는 겁니다. 진짜 인간, 진짜 몸은 프뉴마와 프쉬케 작용에 의해서 이 세상에 출생하시고 사셨던 예수님 아니면 없습니다.

예수님은 프뉴마와 사르크스의 결합입니다. 즉 로마서 8장 3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몸으로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마리아라는 사르크스와 성령에 의해서 출생하셨습니다. 그 분은 소마, 즉 몸을 지녔습니다. 그 몸은 죄 없는 몸이십니다. 하지만 몸소 죄 아래에 들어오신 것입니다. 사르크스가 되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죄를 지으신 것이 아니라 죄의 지배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구약에 바사르가 신약에 와서는 소마와 사르크스로 둘로 나누어졌습니다. 왜 나뉘어져야 합니까? 그것은 바로 죄를 지적해내기 위해서입니다. 그 죄는 어디 있습니까? 인간의 움직임 속에서 인간을 지배하는 모습으로 양상으로 죄가 발각이 되는 겁니다. 사르크스로서의 인간존재는 단순히 흔히 생각하는 나쁜 짓을 지었다가 아니라 메시아에게 적극적으로 반발하는 기운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이게 악의 본질입니다.

프쉬케로 있을 때 프쉬케라 하는 것은 신께서 인간을 살게 하는 그 힘을 말하죠. 그래서 꼭 복음을 모르더라도 나는 절에 다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자연의 은혜로 산다. 보이지 않는 어떤 신의 은혜로 산다. 종교가 없더라도 야, 조물주 때문에 내가 산다. 이렇게 자기 은혜를 깨닫고 또는 내 인생이라 하는 것은 허무하다.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어요. 하지만 프뉴마가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가는 것이 죄라는 것을 성령을 안 받았기 때문에 십자가 앞에 있지 않기 때문에 그게 죄인 줄 모르죠.

그 소마와 사르크스와 프쉬케, 프뉴마를 통해서 인간 자신이 죄 아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은 십자가 지셔야 될 몸으로 오신 겁니다. 따라서 신약에 나오는 인간의 용어라 하는 것은 인간을 규명하기 위함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의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인간에 대한 용어들이 다양하게 쓰여지고 있습니다. 복음을 위한 인간 존재지요.

그러나 인간들은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자아는 소마, 즉 몸의 실재로 말을 하고, 그 실제로 있는 몸을 자아라고 우기죠. 그 소마, 그 몸의 영원함을 유지하려고 합니다. 자아를 영원히 유지하려고 하면 할수록 그게 계속해서 하나님의 십자가를 더욱 욕되게 하는 거죠.

왜냐하면 주님은 그걸 지적하거든요. ‘너는 죄 있는 몸이야.’라고 우겨도 자꾸 거기에 대해서 반발하는 거예요. 뭐라고 반발하느냐 하면, 나는 신의 은혜를 받고 사는 걸 안다. 그리고 내 인생이라는 건 영원하지 않고 정말 죽는 걸 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아는 내가 죄인이란 말인가? 라고 자꾸 대들게 되는 겁니다. 인간의 죄는 죄로써 있는 것이 아니고 그냥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마저 죽게 하는 그런 죄의 본성입니다.

사울이 바울이 되기 전에 그는 스데반 집사의 죽음을 당연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자신을 소마라고 보았지 결코 사르크스로 본 것이 아닙니다. 소마적인 자아에는 네페쉬나 루아적인 요소가 다 함축되어 있다고 그렇게 착각한 거죠. 쉽게 말해서 구약에 약속한 대로 루아, 즉 성신이 임하게 되면, 예레미야나 에스겔에 예언한대로 성신이 임한, 즉 루아가 임한 몸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제대로 하나님께 영광과 거룩을 드리는 자아가 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겁니다. 오늘날 성화론자들의 생각과 같은 겁니다. 옛날엔 죄 때문에 말씀을 못 지켰는데 이제는 하나님 용서받고 의인되니까 제대로 하나님 말씀 지킨다. 그런 아이디어를 가진 겁니다.

네페쉬로 주신 은혜를 루아적으로 영광 돌리겠다는 그런 계산이었지요. 그래서 자아는 네페쉬와 루아를 통해서 형성된다고 그들이 주장했고 제가 이렇게 말씀드린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도무지 예수님의 십자가가 끼어들 필요조차 없이 된 거죠. 바로 이점을 사도가 되기 전에 사울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뵙게 되었습니다. 그는 스데반 집사의 죽음을 당연하게 여겼던 그런 사고방식의 소유자로서 예수님을 만난 겁니다.

그 때 그는 십자가의 의미를 알았습니다. 즉 예수님을 죽었던 것이 바로 이런 자신의 죄 때문인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을 죽인 것이 자기 속에 있는 자기를 지배하고 있는 그 죄의 앞잡이가 되어서 내가 하나님을 죽인 겁니다. 무엇이 죄가 무엇일까요? 바사르식이 아니라 소마식으로 자아를 규정했던 그것이 바로 죄였던 겁니다. 물론 분명 소마는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네페쉬, 곧 프쉬케를 통해서 몸이 있게 하셨습니다. 인간에게 몸이 있습니다. 이 몸은 하나님께서 살게 하는 저 말이나 소나 돼지가 있는 것처럼 프쉬케로 있는 것처럼 인간들의 몸도 프쉬케로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자아라고 규정한 바로 그 인식이 이미 죄의 지배 아래 있기에 그러한 몸을 자기를 대신한다고 보는 거예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그 소마가 대신하는 것이 아니고 사르크스, 죄 있는 몸이 인간을 대신한다. 이래 바울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그렇게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이러한 소마적인 자아를 고수하기에 진정 네페쉬와 루아로 오신 메시아를 못 알아보고 공격하게 돼있습니다. 이것이 사르크스, 즉 죄악 된 육신의 죄 됨을 보여주는 방식이죠.

예수님은 프쉬케로서 루아 아래서 소마로 오셨습니다. 소마는 프쉬케로 유지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소마, 몸은 어디까지나 프뉴마, 즉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함을 받지요.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다는 말은 구약의 인간론에서 루아가 약속과 언약과 관련된 하나님의 활동이라는 것을 고려해 볼 때, 예수님의 소마, 몸은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기 위한 몸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자신의 몸을 소마를 통해 자아라는 허구적 개념을 유지하기 위한 소마죠. 하나님 뜻이 아니고 자기 몸, 갖고 있는 몸 자체를 계속 영원토록 유지하기 위해서 신께서 자기 은혜를 줬다고 이래 보는 거죠. 그래서 인간은 자기 편한대로 사는 겁니다.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는 겁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약속을 위해 깨어계셨지만 제자들은 자기 몸 편한대로 살다보니까 그 시간에 잠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프쉬케→퓨뉴마→소마→사르크스’ 이런 일련의 절차를 그대로 밟게 하십니다. 그렇게 해야지만 죄의 본질이 들추어지기 때문입니다. 죄의 본질이 들추어지게 되면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셔야 하는가가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 피가 왜 하나님께 유일하게 영광이 되며 하나님의 모든 약속의 완성이 되는가도 드러나죠.

요한복음 10:16에서 예수님은, 자진해서 소마를 버렸다고 했습니다. 누가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진해서 자신의 몸을 죽음에 넘긴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일련의 과정 속에서 자신의 몸을 맡기신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야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그 절차를 다 밟게 되면 바로 거룩한 소마, 하늘에 속한 영적 몸이 부활을 통해서 얻게 되는 겁니다.

천사가 그렇게 성도를 부러워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위함이 아니라 죄 아래 있는 자기 백성을 위하여 귀하신 몸을 처분했습니다. 그리고 흙에 속한 소마, 몸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소마, 하늘에 속한 몸으로 완전히 정립시켰습니다. 이제 인간에게 있어 자아란 자기 몸을 제 것이라고 하면 안 돼요. 그런 자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자아입니다. 즉 더 이상 자기 몸이 아닌 자기 몸으로서는 자아는 더 이상 성립될 수 없다는 말이죠.

이렇게 해서 프뉴마가 기대했던 성령이 기대했던 그 약속 완성이 예수님의 소마, 예수님의 몸으로 인해 완성되었습니다. 그 완성의 결실물이 바로 성도의 영광스러운 몸입니다. 이제 성도의 몸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 즉 프쉬케는 전부 십자가 피 중심으로 뱅글뱅글 돌아갑니다.

그래서 이 많은 인간 중에서 집 앞에 놔둔 쓰레기를 쓰레기차가 몰래 와서 회수하듯이 거두어 가셔서 먹든지 마시든지 주변에서 무슨 촛불집회가 일어나든지 말든지 간에 기름값이 치솟든지 말든지 간에 그 가운데서 하나님이 거저주시는 피의 은혜를 찬미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소마’로서 살게 하시는 겁니다.

에베소서 1:6-7에 보면,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래드는 십자가 피 중심의 인간론을 펼치지 못하고 인간 중심의 구원론을 펼쳐놓으니까 ‘육에 속한 자’와 ‘육신의 속한 자’와 ‘영에 속한 자’의 구분을 자신의 성실함으로 구분 지어놓고 말았습니다. 인간이 자기 성실하면 성실할수록 육에 속한 자에서 육신에 속한 자, 육신에 속한 자에서 영에 속한 자, 이렇게 이전한다고 본 거예요.

물론 육에 속한 자에서 육신에 속한 자는 자기 성실함이 아니고 성령이 임해서 된다고 래드가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단지 육신에 속한 자와 영에 속한 자는 자기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 달성된다. 그렇게 봤습니다. 이것은 바로 성화론으로 이어지게 마련이죠.

그러나 십자가 복음으로 보면 우리가 말하는 ‘자아’는 이미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날마다 우리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임을 드러내기 위해서 프뉴마에 의해서 곧 성령에 의해 날마다 정과 욕심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수모, 사실은 이게 즐거움과 행복이죠. 수모를 당하게 됩니다. 갈라디아서 5:24에 나옵니다.

‘우리’라는 자아는 날마다 죽고 날마다 살려내시는 프쉬케+프뉴마의 작품입니다. 따라서 모든 영광을 오직 예수님의 공로와 현재 활동하고 계심의 공로로 돌려야 됩니다. 우리의 자아는 할 일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천국에서 우리의 면류관을 예수님 발 앞에 반납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현재 남아 있는 몸은 바사르가 되어야 됩니다. 즉 옛 사람은 후패해야 됩니다. 그래야 새 몸, 새 소망을 입게 됩니다.

나는 죽고 이제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게 됩니다. 갈라디아서 2:20 말씀이죠. 왜 그래야 합니까? 그것은 우리의 몸이 우리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피로 값 주고 산 그리스도의 것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고린도전서 6:19-20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을 위하여 우리를 만든 것이 아니라 우리 예수님을 위하여 우리 몸이 있게 되었다는 골로새서 1장 16절 말씀과 염두에 두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주를 위하여 주로 말미암아 주께 돌아가기 위해서 만들어진 몸이기에 더 이상 우리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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