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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광주강의(08. 6. 27) 1강 녹취록자유게시판고린도전서

광주강의(08. 6. 27) 1강 녹취록

이름 : 서경수(IP:116.37.101.23)

광주 강의(08. 6. 27) 38-1

디모데전서 2장입니다.

사도바울이 갑자기 예수님, 중보자 이야기를 하다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4절) 지난 시간에 이 구절 설명해 드렸지요?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 뭐냐? 구원 받아야 된다는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나 하나님 압니다.’ 이러면 안 되고,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분이란 말은, 우리는 구원 받아야 되고 만약 구원 안 받으면 하나님한테 혼난다는 의미가 있지요. 하나님이 누구를 보냈다? 중보자를 보냈잖아요. 하나님께서 중보자를 보냈다는 말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까? ‘너 구원 받아야 돼. 구원 안 받으면 넌 저주야!’ 이런 의미가 되는 거지요.

이 도표를 생각하면서 사도바울이 안타까운 마음으로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한다.’는 말을 한 겁니다. ‘중보자가 떴다. 구원자가 떴다.’ 이 말은, 구원자를 구원자로 못 알아보면 그 사람은 구원 못 받는다는 뜻이고, 이 사람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시겠다는 강한 의지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차라리 구원자가 안 오면, ‘하나님이 만든 인간은 하나님이 만들었다는 이유 때문에 책임져 주시겠지’ 하면서 그냥 살면 되는데, 갑자가 구원자가 나타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존재를 아느냐 모르느냐 하는 이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아요. ‘누구를 보내셨는가?’ 여기에 초점을 맞춰야지 ‘하나님은 자비로우시고 영광스러운 분이고 ---’ 이런 것은 별 문제가 안 돼요.

다시 한 번 정리해 보면, 하나님으로부터 누가 왔다는 말은, 우리에게 ‘너희는 구원 되어야 돼.’ 라는 뜻으로 오셨고, 구원 안 받으면 안 된다는 것이죠.

그리고 우리가 구원자를 알고, 예수님을 알면 반드시 변화가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드가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열정이 없으면 신앙이 없는 것이다.” 일리가 있는 이야기죠. 무슨 뜻이냐 하면, ‘나는 구원 받았는데 나는 변화를 못 느꼈다.’ 이러면 그 사람은 수상한 사람이란 말이죠.

물에 빠져서 물살에 휩쓸려 내려갈 때 ‘아, 인생 이렇게 끝나는구나. 이제 죽었다.’ 라고 했는데, 누군가가 갈고리로 건져 주었을 때 그것이 구원 혹은 구출 아닙니까. 죽음에 있었는데 누가 건져주니까 삶의 영역으로 이동했는데 ‘나는 아무렇지도 않아!’ 라고 한다면 그것이 이상하잖아요.

물에 떠내려가는 사람을 건져 주었으면 적어도 ‘고맙습니다.’ 라고 인사라도 해야 되는데, 그런 것도 없이 ‘내가 무슨 일 있었나?’ 이렇게 되기는 정말 힘들지요?

그래서 오늘 본문 이야기는 아주 엉뚱해 보이는 말씀이 나옵니다. 뭐냐 하면, 8절에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라는 이야기부터 해서, 9절에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이런 아주 사소한,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가 쭉 나온단 말이지요.

이건 한마디로 해서 뭐냐 하면, “구원 받았습니까?” “예.” “그렇다면 변화가 일어나야겠지요?” 그런 뜻이란 말입니다.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이 말은, 땋은 머리는 미장원에서 풀라는 그런 변화가 아니고, 어쨌든 그 당시 문화의 입장에서는 뭔가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문화’라는 말을 좀 설명해 보겠습니다. ‘문화’라는 것이 굉장히 추상적인데, 실제 내용이 뭔가 하면 ‘의, 식, 주’가 문화입니다. 옷 입는 것, 먹는 것, 주거하는 것이 문화입니다. 의, 식, 주 빼놓고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까? 사람이 문화를 만들자는 그런 것은 없어요.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의, 식, 주에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문화라는 영역을 따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요즘 사람들은 문화생활이라고 하면 극장에 가고, 뮤지컬 관람하고 이런 것을 생각하는데, 그것은 문화가 아니에요. 문화라는 것은 의, 식, 주를 이야기합니다. 실제로 드러나는 삶의 양식입니다. 보통 각 나라마다 문화가 다르다. 시대마다 문화가 다르다. 시간적으로 문화가 달라지고 공간적으로 문화가 달라져요. 산이 있다든지 강이 있어서 이쪽 마을과 저쪽 마을이 나눠져 있으면 사는 스타일이 달라요. 그러면 ‘서로 문화가 다르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본문으로 돌아가서, 여기 본문에는 안 나옵니다만 고린도전서에 보면 나오는데, 여자가 머리를 기르든지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머리에 뭔가를 덮어 쓰서 ‘천사가 정해준 그 질서에 나는 순종합니다.’ 라는 표시를 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천주교에서는 성당에 들어갈 때는 머리에 흰 수건을 쓰지요.

‘왜 복음을 이야기하다가 문화를 이야기합니까?’ 라고 하는데, 제가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사도바울이 구원자 이야기를 하면서 그 뒷부분에 문화가 바뀌는 이야기를 합니다. 본문을 찾아봅시다. 9절에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이렇게 되어 있지요?

그리고 11절에 보면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그렇게 되어 있어요.

여자가 남자한테 복종하면 구원 받습니까? 아니죠. 그게 아니고, 아까 물에 떠내려가는 이야기했잖아요. 구원을 받았으면 뭔가 변화가 일어나게 되어 있는데 그 변화는 자기가 자기에게 내려주는 변화는 절대로 아니라는 겁니다. 이게 어려워요.

변화된다고 하니까 스스로 자기가 바뀌기 위해서 파마한 머리를 풀어 생머리하고 돌아다니고 이런 변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여기에 변화가 일어난 그 변화의 모델, 변화의 그 기준마저도 구원자가 갖고 있던 그 속성이 그대로 흘러서 문화스타일 속에 그대로 흡수가 된다는 말입니다.

성경에서 바뀐다고 하니까 어떤 사람은 여자는 머리에 뭔가 쓰고 다니고, 결혼할 때 패물하면 안 되고 이런 식으로 해야 성경대로 사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문화와 구원을 구분해서 문화는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어떻게 된다고 했습니까? 이게 스타일의 변화가 일어난단 말이지요. 쉽게 말해서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것은 변화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어떤 식으로 변화하면 구원 받은 것입니까?’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뭔가 달라지고 있다는 것. 어디까지? 그것은 시간과 공간에 따라서 다르지요. 그것은 각 개인마다 다 달라요. 어쨌든 달라진다는 겁니다. 안 달라지는 것이 더 어려워요. ‘나는 이제 예수 믿는다. 나는 구원 받았다.’ 라고 해놓고 전혀 안 달라진다는 것은 더 힘들어요.

친구와의 술 모임에 덜 가게 되고, 사치 부리는 것도 좀 덜하게 되고, 다른 모임보다 성경공부에 더 관심 갖게 되고, 교회 나오려고 애를 쓰고, 뭔가 달라지게 돼 있어요. 구원이 없을 때는 직장에 가서 상사에게 늘 아부하다가 구원 받고난 후에는 상사 말에 틀린 것은 틀렸다고 당당하게 이야기할 때 상사가 어떻게 느끼겠습니다. ‘이 사람이 갑자기 왜 이러지? 이놈이 뭘 믿고 이렇게 나오나?’ 이런 식으로 달라집니다.

세상 사람들 관점에서는 ‘이 녀석이 많이 컸네.’ 라고 하겠지만 큰 것이 아니고 기본을 알게 된 거죠. 인간의 기본. 그 사람들은 크는 것 밖에 모르지만, 크는 게 목적이지만 우리는 인간이 무엇인지 근본을 아는 것, 모든 것이 무너져도 무너지지 않는 반석, 인간의 기본이 뭐며 사람이 어디서 나왔으며 사람은 이렇게 살아야 된다는 기본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하지요. 이것을 두 자로 ‘진리’라고 합니다.

진리가 중요합니까, 직장이 중요합니까? 직장을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면 됩니다. 직장 그만둘 필요 없어요. 변하면 돼요. 변화라고 하니까 꼭 때려치우고 성경 읽는 것을 변화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아니고 삶의 스타일이 바뀌는 것입니다. 남들 보기에는 ‘많이 컸네.’ 이렇게 나오지만 자기는 기본과 근본에 가깝게 변하는 것입니다.

여기 기본과 근본을 가지고 ‘지혜’라고 합니다. 이번 여름수련회에 할 것인데, 지혜를 모아놓은 것이 잠언입니다. 지혜는 보이지 않아요. 그런데 이 지혜가 변화를 일으켜요. 수련회 때 할 것인데 지금 하면 안 되는데 --

세상 지혜는 자기가 알아서 자기가 실천으로 옮기려 해요. 그러니까 자기가 지혜를 마음대로 요리하는 것이 세상 지혜입니다. 그런데 성경의 지혜는 지혜가 나를 덮쳐요. 그래서 잠언은 지킬 것이 없어요. 지혜가 우리를 그대로 이끄십니다.

잠언을 알아야 어떤 식으로 우리를 이끄는가를 알게 돼요. ‘어떻게 이끄는지 알 필요 뭐 있나. 그냥 이끄시는 대로 가면 되지.’ 라고 하는데, 아닙니다. 내 욕망이 나를 이끄는지 지혜가 이끄는지 분별하는 것은 지혜가 있어야 판정할 수 있습니다. 자기 욕망대로 해 놓고는 성령이 인도하시는 대로 했다고 우길 수가 있어요.

잠언을 보면서, 성경을 보면서 변화를 하는데, 변화는 성령이 없는 사람도 늘 변화합니다. 여러분, 죄가 어디서 나오지요? 욕심에서 나오지요.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해서 사망을 낳는데, 문제는 어디까지가 욕심이고 어디까지가 욕심이 아니고 하는 것을 어떻게 정합니까? 이것까지는 욕심 아니고 이것부터는 욕심이라는 것을 누가 정하며, 어떻게 정합니까? 정답은 ‘정하지 마세요.’

왜 그러냐 하면, 성경에 의하면 살려고 하는 자체가 죄에요. 우리는 죽어가고 있으면서, 방향이 죽음 쪽인데 그 방향을 반대로 살려고 한다는 자체가 욕심이 되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디서 어디까지가 욕심이냐고 따질 것도 없이 우리는 매일같이 살고자 하는 본능이 있기 때문에, 우리 몸에 200조의 세포가 살려고 난리를 치고 우리 DNA가 살려고 난리를 치기 때문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살고자 하는 것들의 뭉치가 우리 인간이기 때문에 여기서 우리는 슬그머니 빠져나오세요. 내가 내 몸에게 ‘네 마음대로 해라.’ 하고 빠져나오면 돼요.

이론상으로는 쉽지요.

사람에게 200조의 세포가 있어요. 여러분이 손톱을 깎으면 손톱이 또 자라나지요. 손톱이 자라난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손톱 세포가 살려고 설치는 거예요. 그러니까 깎아도 또 자라나요. 달리 말해서 손톱 세포에 의하면 그들은 발톱 세포와 관계없이 독립적으로 살아야 됩니다.

너무 어렵게 들어왔는데, 이왕 어렵게 한 것 더 나가봅시다.

새가 공중을 납니다. 공중이 새를 날게 한 것입니까, 새가 공중을 나는 겁니까? 또 씨가 자란다. 자라나는 능력이 씨 안에 있습니까, 아니면 시 바깥에 있습니까? 이것을 철학에서는 해결을 못 합니다. 장(field)과 개체가 교류를 한다고 해요. 이것이 생물학에서도 적용이 되고.

보통 연세 많은 할머니들이 남편을 보면서 ‘아이구 저 영감 빨리 안 죽나.’ 해요. 그러나 그 영감이 죽고 난 뒤에는 외로워서 못 살겠다고 해요. 결국 그분은 남편이 함께 있을 때, 자기는 남편 없으면 편히 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배우자가 죽고 난 뒤에는 외로워요. 왜? 잔소리를 해도, 그 잔소리 할 대상 때문에 내가 존재하고 있는 거예요. 허전하지 않고 내가 잔소리할 위인이 있다는 것에 내가 위로가 되고.

말썽꾸러기가 말썽 안 부리면 참 심심할 거예요. 이것을 동양철학, 노자철학에서는 ‘비어있는 것이 그냥 비어있는 것이 아니고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비어있다.’고 해요. 동양에서의 무(無) 개념을 어떤 목사들은 창세기까지 끌고 옵니다. 창세기에서 아무것도 없었던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꽉 찰 것이란 것을 내다보고 아무것도 없는 것이니까 무는 혼자의 개념이 아니고 유를 내다본 무고, 무는 유가 있으면 무고 유는 무 있으면 유다.

굉장히 심오해 보이지요? 이 문제의 해결책은 성경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동양철학, 서양철학을 공부 많이 하면서도 정작 해답(진리)을 몰라요. 골로새서 1장 16절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니고, 너와 나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있는 것은 누구를 위함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해야 될 속성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두 가지 속성을 전에도 여러 번 이야기 했는데, 공의와 사랑입니다.

공의와 사랑을 위해서, 공의를 위해서는 지옥이 있고 사랑을 위해서는 천국이 있다. 지난 시간에도 했지요? 이 속성을 위하여 구세주가 떴어요. 이 구세주는 우리의 근본입니다. 구원자가 달랑 우리만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근본이에요. 구원자 앞에서 우리는 “나는 어떻게 살지?” 이런 말 할 필요 없어요. 그런 소리 하기 전부터 이미 그분 덕분에 살아 왔었어요.

다만 우리는 내가 누구 덕분에 사는 지 근본을 몰랐었는데,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므로 말미암아 ‘아하, 피 흘리신 그분이 나를 만들었고 나는 그분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고, 내 안에 그분이 있게 되는 그런 사람이구나.’를 알게 됩니다.

교회에 사람들이 모이는 것은 스타일입니다. 스타일이 구원해 주는 것은 아니에요. 그러나 스타일을 따져보고 생각해 보는 이유는 그 스타일이 뭔가 어떤 계기로 해서 변한다는 겁니다. 그 변할 때 어떻게 변하는가 하면 바로 근본으로 변해야 돼요.

여름 수련회에서 강의할 것이 지혜입니다. 근본이 지혜 쪽으로 움직일 때 그 변화, 이 변화가 그 사람은 이미 구원 받았다는 것을 단정할 수 있단 말이지요. 그래서 잠언 1장 8절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믿고 난 뒤에 구원 받은 기쁨으로 마음의 자유를 얻고 살면, 다른 사람들은 ‘야, 너 많이 컸다.’ 하고 빈정대지요. “전에는 나한테 꼼짝도 못하고 빌빌거리더니 이제 겁도 없이 막 나오네.” 하지요. 많이 큰 게 아니고 근본을 향하여 달려가는 중입니다.

동양화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보름달을 아주 크게 그려놓고 기러기 떼가 날아가지요. 마치 그림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기러기 떼가 달을 향해 날아가는 것 같지요. 여기서 기러기는 성도고 큰 달은 예수 그리스도에요. 달을 향해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문화 스타일이 바뀔 수밖에 없지요. 뭐가 문화라고 했습니까? 의, 식, 주를 말합니다. 문화라고 하니까 뮤지컬 보고, 영화 보고, 스포츠 관람하고 그런 것을 생각하는데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그냥 의, 식, 주입니다. 의, 식, 주인데 오늘 본문에서 바로 의복에 대해서 거론하는 거예요. 눈에 보이는 것.

쉽게 말해서 눈에 보이는 것이 뭔가 달라진다는 것은 그 사람 통째로 근본을 향하여, 자기 구원자를 향하여 질주하고 있는 그런 존재구나 하는 것을 오늘 본문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자, 그러면 여기에서 궁금한 것이, 어떻게 달라졌을 때 구원 받은 자의 달라짐이라고 단정할 수 있습니까? 이 해답은 제가 아까 말했어요. 뭐라고 했는고 하면, 뭘 향하여 가는 거예요. 지금 내가 어느 정도 달라졌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계속 달라지는데, 중요한 것은 어느 정도까지 왔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어디를 향하여 간다는 겁니다.

6. 25 전쟁이 터졌다. 전쟁이 터졌을 때 피난을 가는데, 간난 애기 있는 사람들은 빨리 못 가더라. 그런데 애기 없는 가족들은 빨리 이동하더라. 여기서 누가 더 빨리 가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어느 쪽으로 가는가 하는 점이 중요하지요.

‘예수 믿고 사람이 달라져야지.’ 라고 할 때, 목표가 술 끊고 담배 끊고 그것이 아니고, 간난 애기 있는 식구들은 한 아이는 업고 한 아니는 손을 잡고 가는데, 문제는 그 방향이 남쪽(부산 쪽)이지 북쪽(평양 쪽)은 아니란 말이지요.

어떤 사람은 제 말을 오해해서 예수 믿고 난 뒤에 개판으로 살아도 된다고 생각하는데, 제 말은 막 살아도 좋은데 ‘그 막 사는 방향이 어딥니까?’ 물어보면 자기 욕망대로 삽니다. 아까 했지요.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는다. 그쪽으로 가면 안 되고 방향이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는 쪽으로 달려가고 있느냔 말이지요. 빨리 가느냐? 늦게 가느냐? 그것은 문제 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아직도 술 못 끊었나?’ 이런 것이 문제가 아니고, 지금 방향이 어느 쪽이냔 말이지요.

제가 걱정하는 것은 빨리 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너무 빨리 가서 예수님 계신 곳을 지나가 버린 사람들. 이런 사람들도 많아요. 예수님을 지나가 버리니까 자기는 졸지에 의인이 되 버렸어요.

여기서 다시 한 번 봅시다. 어떻게 달라지느냐 하는 그 문제. 이것을 하려면 두 가지를 알아야 돼요. 달라지기 전과 달라진 후 그 양쪽이 차이가 나야 되지요. 성경에서는 이 둘을 다 이야기해 줍니다.

전(前)부터 이야기해 보면, 디모데전서 2장 8절을 봅시다.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했고, 그 다음에 “다툼”이죠. 그리고 여자들은 9절에 “땋은 머리” 요새 같으면 ‘파마’

제가 스타일이 달라진다고 했지요. 땋은 머리는 나쁜 것이고 생머리는 좋은 것이라는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문화라 하는 것은 공간적, 시간적으로 달라지니까 그 당시로 보면 땋은 머리가 전이고, 그 다음에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 그 다음에 ‘남편을 가르치고, 남편을 주관하는 것’ 이게 달라지기 전이란 말입니다.

슬슬 걱정 됩니까? 달라지기 전이라고 하니까. 그 당시의 스타일입니다. 이 말에 위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그 당시의 스타일이에요. 그 당시 농경 시대의 스타일입니다. 의, 식, 주에요.

문화는 의, 식, 주입니다. 인간은 200조의 세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세포는 각자 살려고 해요. 그리니까 의, 식, 주라는 것은 밥 먹고 살자는 것입니다. 살기 위해서는 여기에서 어떤 질서가 필요한데 가족 간의 질서 사회에서의 질서가 있겠지요. 그 질서는 무엇을 위한 질서입니까? 살기 위한 질서입니다.

여자가 왜 남편에게 복종해야 됩니까? 그게 당시 사회에서 살아가는데 도움이 돼요. 그것은 옮고 그름의 문제가 아닙니다. 선(善)이란 개념이 옳다는 개념이 아닙니다. 동양철학에서 선이란 개념은 ‘잘 했다.’는 개념이에요. 소매치기 무리들이 소매치기에 성공하면 뭐라고 합니까? ‘잘 했다.’고 하지요. 그것을 선이라고 합니다. 그 소매치기를 잡을 때 경찰관 내에서 뭐라고 합니까? ‘잘 했다.’고 하지요. 그것을 선이라고 해요. 선이라는 것은 옳다는 개념이 아니고 진리 개념이 아니고 내 사는데 도움 되었다는 것을 선이라고 합니다.

어떤 분이 이런 글을 남겼어요. 50대 여자 분인데, ‘나는 직접 서울광장 촛불 집회에 갔었다. 그런데 거기에 민노당 여자 국회의원이 경찰차에 갇혔는데 그 여자를 보니까 그 사람은 정신 파탄자 같더라. 온갖 욕설을 다 하고 경찰들을 때리고 발악을 하는데 이것은 인간으로 보기 힘들고 짐승을 가둬도 저렇게 짐승다울 수가 없었다.’ 라는 글을 썼어요.

민노당 국회의원이 왜 거기에 갑니까? 잘 해보려고 하잖아요. 초등학교 학생들이 숙제를 하면 선생님이 어떤 도장을 찍어줍니까? ‘참 잘 했어요.’

왜 사람은 옳다는 것은 선으로 삼을 수 없고 ‘잘 했어요.’를 선으로 여기는가 하면, 그 옳은 것이 만약 나를 해롭게 했을 경우에 과연 내가 그것을 ‘나에게는 해롭지만 참 잘 했습니다.’라고 할 자가 누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있습니까? 인간 치고 그런 사람이 없습니다.

나에게 유익이 되어야 하나님도 좋은 하나님이에요. 나에게 유익을 줘야 좋은 하나님이란 그것 팔아서 크게 된 교회가 ‘순복음’ 교회입니다. ‘좋으신 하나님’이랍니다. 이것이 우리 동양의 심성과 맞아 떨어진 거예요. 뭐가 순 복음이냐? 뭐가 순 진리고 진, 선, 미냐? 나한테 이익 되면 좋은 거예요. good이에요. 순복음 교회가 우리 한국교회에 진면목을 드러낸 겁니다.

유다서 15절 중간부터 읽어보겠습니다.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이 사람들은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는 자며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라”

여기 보세요. ‘이 사람들은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는 자며,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인데, 이들을 저주하기 위해서 심판 날을 준비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왜 신에게 원망합니까? 왜 신에게 불만을 토합니까? 정욕이 그렇게 튀어나온다는 겁니다. 원망할 수밖에 없도록. 그러니 옳다는 것, 진리라는 것, 선이라는 것이 누구를 위한 선이냐 하면 자기 좋으라는 선이고 진리에요. 이것이 구원 받기 전의 스타일이잖아요.

그러면 여기 구원 받기 전의 스타일이 우리는 구원 받기 전입니다. 라고 말은 하지만 전, 후를 떼고 그냥 나둬 버리면 이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 사람이 그렇게 하고 싶어 그렇게 했겠어요? 살다보니 그렇게 되었지.” 살다보니 그렇게 된 거예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는 책에 나오지요. 사람이 왜 사느냐? 누가 떠미니까 밀려가는 거예요. 인생이란 것은 떠미는 대로 밀려가면서 사는 거예요. ‘나는 고쳐야지. 인간 되어야지.’ 안 돼요. 새가 스스로 날아갑니까, 공중이 있어서 날아갑니까? 그 이야기에요.

토지 때문에 씨가 자랍니까, 씨 때문에 토지를 뚫고 곡식이 자랍니까? 그 잠복된 능력이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아기가 엄마 뱃속에 있을 때 엄마의 태아 때문에 자라느냐, 아니면 태아 자체의 능력 때문에 태아가 자라는가 하는 그 문제. 이게 중세 때 큰 논쟁거리였습니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영혼이 태아 몇 개월째 들어가는가 하는 그 문제가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현재 의학에서는 22주 지나면 23주가 되어서 태어 몸무게가 500g 이상 되어야 살 가능성이 있다고 합니다. 23주에 500g 아슬아슬하지요. 그 정도만 되면 인큐베이터에 넣어서 잘 키우면 살릴 수 있다고 합니다.

과학적으로 그렇게 되니까 법률적으로 과학이 따라가니까 인간은 언제부터 인간인가? 23주부터 인간이다. 왜? 살 가능성이 있을 때라야 인간이라고 인정할 수 있으니까. 그러면 또 성경에 보면, 신명기 어디에 나오지요? 임신한 여자를 쳤을 때 살인죄냐 상해죄냐 하는 문제. 배를 차서 뱃속의 아기가 죽었을 때 그것이 상해죄에 해당되는가 아니면 살인죄인가? 성경은 상해죄라고 합니다. 아기 죽은 것은 안 쳐줍니다.

그런데 문제는 누가복음 1장에 보면, 세례요한과 예수님이 태어나기 전 태아에 있을 때 둘 다 서로 알아보고 춤추고 난리가 났습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를 찾아 왔을 때. 과연 그것이 사람이냐 아니냐는 굉장히 복잡한 문제가 됩니다.

딱 꼬집어서 이렇게 되어야 된다는 말을 한 것이 아니고, 제가 다시 이야기합니다. 변화되는 과정, 그것도 어떤 방향을 향해 변화한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남편을 주관했다고 할 때 이런 것을 나쁘다고 따지고 화내지 말고, 여기서부터 뭔가 달라지는 것, 분노하는 것이 분노가 덜하고, 분노하면서도 그것이 죄인 줄 안다든지 뭔가 변화의 표징이 있어야 돼요. 이것이 바로 구원 받았다는 뜻이에요.

물속에 빠져 죽어야 될 인간을 물에서 건져놓으니까 뭔가 마음에 감동이 오던지 뭔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뭔가 구원 받은 티가 나는 것 아닙니까. 그 티가 나는 것, 그것이 삶의 문화, 의식주 스타일로 나타나야 된다. 그런데 그 스타일의 세계에는 어찌했던 살아야 한다. 이것을 기초해서 거기에서 진리를 이야기하고, 선을 이야기하고 삶의 모든 것을 다 하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구원 받기 전이었단 말이지요.

그러면 구원 받은 후는 ‘네가 살려고 안 해도 너는 이미 살았잖아.’ 누구 때문에? 예수님. 구원자 때문에. 그렇다면 이미 나는 살았다고 여길 때 너는 어떤 스타일을 보여줄 거냔 말이지요. 죽어도 살았다는 그 여유만만. 그 여유만만이 너의 삶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를 보란 말입니다. 아시겠죠?

구원 받기 전에 여자가 남자를 주관했다. 왜 주관하느냐? 잔소리 안 하면 설거지 하나도 깨끗하게 못 하더라. 이렇게 나옵니다. 제 아내가 말하기를. 제 아내의 말에 일리가 있지요. 설거지를 깨끗이 못하게 되면 그릇에 밥풀이 묻어 있을 것이고, 밥풀이 묻어 있으면 곰팡이가 생길 것이고, 곰팡이가 생기면 가족의 건강을 해치니까 잔소리를 해야 된다고요.

그러면 나는 또 핑계를 대지요. 설거지 할 동안에 설거지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생각한다. 설거지하면서 설거지만 신경 쓰는 사람은 그릇 상태가 다 보이지만 나는 빨리 해치우고 은혜 받은 말씀 잊기 전에 빨리 메모를 해 놓아야 하니까 자연적으로 설거지는 소홀할 수밖에 없지요.

자, 그럴 때 구원 받았다고 했을 때, 그러면 아내가 남편 설거지에 잔소리 안 합니까? 계속 해요. 하더라도 전에는 설거지에 밥풀 묻는 것이 생사를 논하는 중차대한 문제였는데, 구원 받은 기쁨이 있고난 뒤에는 최고로 중요한 문제는 아니고 그 다음문제에 해당되지요. 제일 중요한 것은 구원 받은 것이고 그 다음은 설거지 깨끗이 하는 것으로.

이것을 좀 더 확대해서 생각해 보면, ‘목사님, 남편이 바람을 피웠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때 ‘성도님 구원 받았습니까?’ 라고 물어야 될 이유가, 구원 받기 전이라면 그 사람에게 제일 중요한 문제가 뭐냐 하면, 남편과 헤어질 것이냐 말 것이냐가 제일 중차대한 문제였는데, ‘당신 구원 받았습니까?’ 라고 묻는 것은, 당신의 이혼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없다? 있다는 점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 뭐 이혼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지요.

이혼 하든 말든 간에 그렇게 당당하고 여유롭게. 할 때는 하고 안 할 때는 안 하더라도 뭔가 챙길 것은 다 챙겼다는, 구원 받았다는 그 여유만만한 배부름으로 모든 문제를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 이것이 바로 삶의 변화입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전에는 남편들이 분노하고 다투고 했는데, 후에는 어떻게 한다?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고’ 분노가 기도로 바뀝니다. 옛날에는 기도해도 분노와 다툼으로 기도했는데 이제는 분노와 다툼이 아닌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게 되지요.

그러면 기도할 때 꼭 손을 들어야 됩니까? 그것이 아니라 그것은 그 당시의 기도하는 스타일이었습니다. 논리적으로 나중에 알 것을 미리 알아야 한다고 닦달하지 마세요. [일지매]나 [주몽] 드라마 보면서 ‘저 쪼다 같은 인간들. 택배로 보내면 될 것을 나귀에 싣고 가나?’ 그 당시에는 택배가 없었잖아요. 택배가 없으니까 나귀에 싣고 가는 거예요.

삼국지를 보면서 ‘기관총을 쏘면 다 죽을 것인데 화살을 왜 쏘나?’ 글쎄 그 당시에는 자동 소총이 없었어요. 그 당시에는 화살에 불붙이는 것이 최고였어요.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한다.’고 하니까, 남자들은 반드시 손들고 기도해야 된다고 해요. 문화가 달라요. 여자들이 성당에 들어갈 때 머리에 수건을 쓰지요. 이게 그 당시 스타일인 것을 모르고 하는 짓입니다. 지금 머리에 왜 씁니까?

신부들은 제사장 복장을 한다고 흰 옷을 입고. 요새 제사장이 왜 필요합니까? 그리고 특별한 복장이 왜 필요합니까? 그러면 런닝 입어도 됩니까? 그것은 예의에 어긋나지요. 지금은 지금의 스타일로 하면 됩니다. 앞으로 100년 후에 런닝 입는 것이 자연스러운 시대가 오면 그 때는 런닝 입고 활동하면 되고.

스타일이란 말은 그대로 하자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그 스타일 안에 들어 있죠. 그 스타일 안에 어디서 어디까지 가느냐 하는 그 변화의 조짐. 그 변화의 조짐이 중요하다 이 말입니다.

10분 쉽시다.

(2008. 7. 4. 11:08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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