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의 삶에 대한 빠진 내용(2)
성도의 삶에 대한 빠진 내용(2)
이름 : 이근호(IP:117.55.143.9)
질문 66 [ 치매 ]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롬10:9)
우리 할머니는 교회당에 다니다가 치매가 걸려서 죽을 때까지 집에 있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주일성수도 못하고 새벽기도도 못하고 십일조, 헌금도 못하고 교회에서 경건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치매로 다 깨어지고 죽을 때까지 벽에다가 똥 바르고 살다가 갔습니다. 전혀 경건(?)과 거룩(?)은 찾아 볼 수 없더라고요.
이근호 목사님 치매 걸려도 구원 받나요?
입으로 시인과 마음으로 믿음을 언제 해야지 구원 받나요? 치매 걸린 울 할매는 아무 것도 모르던데
답변 66
모든 인간은 날 때부터 치매에 걸렸으며 모든 자도 치매를 향하여 질주하고 있는 중입니다.
(65세 이상은 10%, 85세 이상은 50%) 예수님의 피는 치매자마저 구원할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질문 67 [ 음악 ]
이근호 목사님!
질문에 답변하시기 귀찮지 않으세요?
친절하신 답변에 감사드립니다.
음악에 대해서 설명 좀 해 주세요. 작곡을 전공하는 자매에게 음악의 키워드가 뭐냐고 물었더니 '마음'이라고 하더군요. 도대체 음악이 뭐죠? 마음과 연관해서 음악이 추구하는 것이 뭔지 부탁드립니다. 철학에서는 뭐라고 하지요?
오늘날의 음악의 관심사는 교회 음악, 찬양 목사, 경배와 찬양, CCM, 악기, 복음송, 성가대, New Age 음악 등등입니다.
답변 67
마음이란 몸이 만들어 낸 이미지에 불과합니다. 음악이란 몸의 생동력이 발산한 겁니다. 우리의 몸은 죽은 시체처럼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 움직임을 나타냅니다. 리듬을 살리면, 몸은 수월함을 느낍니다. "기분이 좋다!" 이겁니다.
몸의 컨디션에 따라 몸에게 리듬을 주기 위해 음악을 듣기도 하고 연주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음악은 우리 몸의 연장 활동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 어떤 종류의 음악이 되었든지 말입니다. 그것을 정당화 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음악은 결국 '나를 위한 음악'으로 끝이 나기 때문입니다.
질문 68 [ 거룩 ]
십자가 마을의 글들을 읽다가 보면, 이근호 목사님이 주장하시는 것과 다른 이들이 주장하는 것들이 다르다는 것을 느끼는데, 이근호 목사님이 동쪽을 말하고 있다면 다른 이들은 서쪽을 말하고 있다는 느낌!
예를 들면,
거룩 = 오직예수(이근호) / 거룩= 오직예수 + 주안에 있는 자의 차별된 거룩한 행위(다른이) 제가 이해 한 것이 맞는지?
거룩이 뭐지요? 성경에서 성도에게 말하는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거룩하라'(벧전1:16)는 무슨 의미죠?
답변 68
성경에서의 거룩이란 '언약 완성 상태'를 의미합니다. 구약에서는 옛언약 안에서의 관계를 뜻하며 신약에 있는 '예수님 안'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것을 다시 풀이하면,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에 의해서 성립된 관계가 거룩이고 신약에서는 예수님에 의해서 성사된 관계가 거룩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이나 신약이나 인간의 행위하고는 상관없고 오직 '언약의 활동'과 상관있습니다.
언약의 주체자는 인간이 될 수 없고, 하나님의 이름(주님)이 주체자가 되십니다. 이 주체자께서 자기 백성 속에서 특별히 구별된 행위를 드러내시는데 그것이 오직 하나님의 이름이신 예수님의 행위와 본질을 증거하는 일을 하게 하시는 겁니다. 성도의 개인 소지용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 분만이 이 지상에 등장한 유일무이한 거룩한 분입니다. 따라서 그 분에 의해서 용서받은 관계를 거룩이라고 합니다. 성도가 거룩함을 입었다는 말은, 언약의 혜택 속에 놓여 있다는 말입니다. '너희도 거룩하라'라는 명령이 성도 안에 계시는 성령님의 활동 내용과 그것을 실천하는 능력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성령님은 성도 안에서 성도에게 있는 비언약적 속성을 지속적으로 죄라고 규정짓고 들추어주게 되며 그것이 바로 언약 안에 있기에 비로소 발생되는 거룩한 현상임을 외부에 드러나게 합니다. 즉 '회개를 통한 주님께 감사하고 사랑하는 모습입니다.
이로서 세상은 성도가 주님과의 거룩한 관계 안에 놓인 자임을 접하는 계기가 됩니다. 인간의 힘으로 더욱 더 완전해 지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언약 안에서는 처음이나 끝이나 항상 완전한 거룩한 관계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불신자들이 말하는 '거룩'이란 인간의 최선의 노력을 두고 말합니다. 예수든, 하나님이든, 성화든, 조직신학이든, 삼위일체든 그동안 배웠던 모든 신학과 교양을 종교 기능을 총동원해서라도 스스로 완전이라는 기준에 도달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자신도 속이고 남도 속이도 하나님도 속이는 자로 살아가게 됩니다. 왜냐하면 썩어질 육체와 더불어 정신도 날로 썩어가고 축 쳐지게 마련입니다. 남는 것은 '썩어질 재료' 뿐입니다. "그래도 거룩해지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 하려고 했는데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아서...."라고 꼬리를 답니다.
애초에 성령 받은 적이 없는 자임이 드러납니다. 그저 ‘목회’라는 이름으로 종교 영업장(교회)이나 운영하고 있을 뿐입니다. 신학교에서 배운 기술이 그것에 초점이 모아져 다져져 있기 때문입니다.
질문 69 [ 법정적 칭의의 의미와 칭의라는 용어에 대해서 ]
어디서 "법정적 칭의"라는 표현을 봤는데 이 의미가 단순히 "법적으로 의롭다 칭한다"는 의미인가요? 게시판을 검색해보니 "칭의"라는 표현 자체가 인간중심의 발상에서 나온 것이라고 읽은 것 같은데, 이는 "칭의"라는 개념이 인간의 구원이나 성화에 관심을 두고 나온 표현이라서 그런가요? 만약 칭의라는 표현이 부적절하다면 어떤 식으로 생각을 전환해서 표현하는 것이 적절할까요? 간단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답변 69
질적으로 참 중요한 질문을 해주셨습니다. '법정적 칭의'라는 것은 성경에서 도저히 나올 수 없는 말입니다. 인간들이 제멋대로 꾸며낸 말입니다.
그리고 귀하의 질문처럼 '칭의'라는 말도 인간들이 멋대로 지어낸 말입니다. 성경에서 '의'(義)란 하나님의 소원이지 결코 인간들의 소원을 하나님께서 들어주시는 방식으로 제공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증거가 성경에서의 의(義)는 '예수 안'에서만 통하는 의라는 점입니다. 즉 인간 소유용으로 전환되는 의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예수 믿고 의인되었다고 해서 인간이 자기가 원할 때 의를 행할 수 있다는 것으로 오해하시면 큰일 납니다. 인간은 오로지 죄 밖에 안나옵니다.
성도가 죄를 짓는다는 말이 아니라 (성도는 죄를 지을 수는 것이 아니라 죄로 나오게 되어 있음) 성도 전체의 행위를 이미 죄라고 규정했다는 뜻입니다. 이것도 예수 안에서 특수하게 정립된 개념으로서 하나님은 ‘의’라고 규정해 주시는 겁니다. (구약 언약에서 이미 이점은 가능했습니다. 즉 죄로 나오는 것이 의로 규정받는 것을 가지고 로마서 4장에서는 언약의 완성태가 '은혜'로 인하여 제공된 결과로 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성도라는 피조물은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의 관계 자체가 의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 동원되기 때문입니다.
질문 70 [ 구원과 나의 생활이 어떻게 연관이 있나요? ]
목사님의 저서 "십자가를 아십니까?"를 읽고 난 후에 생긴 의문점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에 따라 움직이시는 분이고 그 언약에 따라 인간을 구원하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구원에 전혀 개입할 존재가 아니며, 개입할 수도 없고, 개입하는 것은 곧 자아의 교만이라는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인간 스스로가 의를 만들어 낼 수 없으니까요...
구원은 하나님의 의(핵심은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로서 이루신 하나님의 의)로서만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은 하나님이 구원할 자를 구원할 것이므로 인간이 하나님의 의를 알고 있다는 것 자체 역시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님은 왜 그토록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설명하고 계시는 겁니까?
만약, 하나님의 의를 모르는 자에겐 구원이 없다하면 하나님의 의를 알기위한 인간의 노력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분명 구원에 관한 인간의 노력들은 죄일텐데요.
저는 약 20년 정도 교회를 다니다가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다니는 것을 그만두려고 하는 상태입니다. 제가 그토록 노력하던 것들이 목사님의 책을 일고 한순간에 무너져 버렸습니다. 그 힘겨운 봉사와 기도생활(?)도 이젠 자아의 의(?)를 이루려 했던 모습에 불과한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또한 저는 죄의 무감각 상태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는 인간의 활동, 삶 그자체가 죄인데 무엇을, 어떻게 행한들 어떠하랴 라는 심정에서 말이죠. 죄를 범하지 않기 위한 노력들이 한마디로 허무하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제가 이렇게 방탕하게 생활해도 하나님의 의는 구원하실 수 있다는 생각이 날 사로잡습니다. 반대로, 구원할 자가 아니라면 저는 그저 왔다가는 하나의 불쌍한 인생일 뿐입니다. ^^.
목사님의 답변 간절히 기다리겠습니다.
답변 70
절간에 20년을 다니든 30년을 봉사하든 천국과 상관없는 것처럼 복음 없이 산 세월이 아무리 길든 짧든 그것은 딴 동네이야기입니다. 복음의 기쁨은 과거의 모든 허송세월을 너끈하게 보상하고 남음이 있습니다.
한 가지 다시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義)은 우리 소유용도 아니요 지식용도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의 의가 우리를 소유하게 됩니다. 이 때부터 하나남의 의(義)는 자체적으로 능력을 발휘하여 우리를 이끌게 되는데 그 결과는 우리의 죄성과 더불어 은혜성을 함께 드러내어 우리 자체가 아예 '언약 백성'이 되게 하는 겁니다. (마치 옛날 이스라엘 성도들처럼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전에는, "이런 것까지 설마 죄가 되겠느냐"라고 안일했던 것이 성도가 의(義)의 종이 되고 난 뒤부터는, "아하, 성경에 비쳐보니 이것까지 죄였구나"라는 것을 깨닫게하여 주님의 속죄의 은총을 더욱 깊이 느끼게 합니다.
이처럼 참된 성도는 언약의 사람이 되었기에 언약의 은혜 안에서 의라고 여기는 것도 죄라고 드러내신 식으로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경과했던 그 십자가 코스 속으로 인도받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성도 개인의 수고와 고생에 관한 관심사보다도 (성도의 행위보다도) 예수님의 수고와 고생과 행위가 주된 관심사로 변합니다.
여기에 비해 성도가 아닌 자는 죄인인 자신의 행위를 더욱 더 정당화하고 의로운 것이 되려고 시도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나 방탕하고 막 살아도 계속 의인으로 간주해줄까?”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이 사람들은 다른 신을 믿고 있는 이단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