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613-b 서울강의녹취 : 에베소서 제 14강
20080613-b 서울강의녹취 : 에베소서 제 14강
이름 : 오용익(IP:59.3.201.241)
에베소서 제 14강 (이 근호목사, 2008년 6월 13일-b, 서울의존교회)
육의 성전에서는 인간이 주인공입니다. 영의 성전에서는 예수님이 주인공입니다. 영의 성전을 내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도 성령 받았다. 너도 성령 받았다. 따라서 성령 받은 사람끼리 있으면 여기에 하나님이 임할 것이고 여기가 온전한 하나님의 성전이다.’ 이것은 거짓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성전의 주인공이 성령 받는 내가 주인공이 되어 버립니다. 이것은 육의 성전하고 같은 겁니다. 에베소서와 다른 성경을 읽으면서도 계속해서 육의 습관이 떠오릅니다. ‘영의 성전은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그러면 눈에 보이지 않은 것을 대신하는 것은 뭘까? 바로 우리들이다. 눈에 보이는 우리가 눈에 보이지 않은 성전의 주춧돌이기에 우리끼리 강강술래 하듯이 손을 잡고 있으면 거기에 하나님께 들어오셔서 우리가 성전이 된다.’
이런 식으로 다 설명합니다. 제가 그렇게 설명하지 않는 책을 본적이 없습니다. ‘돌로 지은 성전은 가짜지만 몸으로 지은 성전은 진짜다.’ 모든 신학, 설교, 주석들과 소위 복음을 안다, 개혁주의라는 사람들의 주장이 대부분 다 이런 주장인데 이것은 다 엉터리입니다. 눈으로 보이지 않는 성전은 끝까지 눈으로 보이지 않아야 됩니다.
그 예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지상에 계시고 하늘에 올라갔지요. 예수님이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서 구름타고 하늘로 올라갔잖아요. 제자들이 서로를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올라가신 예수님을 쳐다보지요? 그때 천사가 하는 말이 “어찌하여 올라가신 예수님을 쳐다보느냐? 그 예수님은 다시 오신다”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방금까지 눈에 보이다가 안 보이는 상태로 가버렸습니다. 제자들은 예전처럼 다시 있는 주님, 눈에 보이는 주님으로 되기를 원합니다. 그때 천사가 ‘주님은 다시 오신다’고 제자들을 꾸중한 겁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자기들을 쳐다보면서 성전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사도들이 생각하는 성전은 눈에 보이건 안보이건 항상 무조건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는 그곳이 성전이 되는 겁니다.
천천히 다시 생각해 봅시다. 에베소서 1:4에 보면 하나님과 예수님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다. ‘창세전’이니까 인간은 빠지고 없던 시절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입니다. 택한 그 시점에 우리 인간은 없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 두분 사이에서 이미 결정 났습니다. 그리고 에베소서 1:11에 보면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 되잖아요.
지금 그리스도가 눈에 보입니까? 안보입니다. 제가 차이점을 이야기합니다. 지금 사람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성전을 눈에 보이는 성전으로 하기 위해서 대타로 눈에 보이는 인간들의 집단인 자신들을 눈에 보이는 교회라고 삼았는데 저는 이것이 틀렸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는 것을 인간들이 성전으로 삼아놓고 그 다음에 거기에 하나님을 모셔버리면 이것은 육의 성전과 동일한 사고방식에서 나온 겁니다. ‘하나님, 우리끼리 모였습니다. 자, 이제 우리끼리 모였으니 하나님만 모시면 여기가 하나님의 처소가 되는구나.’ 그렇게 되어 버립니다.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처소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습니다. 예수님이 처소이고 거기에 하나님은 사랑으로 접근하고 우리는 피 흘릴 수밖에 없는 죄인으로 접근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 안에서 통일되는 겁니다. 이 안에는 시간도 초월하기에 ‘창세전’이라는 말을 쓸 수 있습니다. 인간들끼리 모이면 ‘창세전’이라는 말을 쓸 수가 없습니다.
‘우리 교회 모이기 시작한지 50년 되었다.’ 여기에 역사가 있습니다. 성전은 시간개념이 빠져야 되고 공간개념이 빠져야 됩니다. 성전이 되려면 우리들이 모인 곳이 성전이 아니고 예수님이 성전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서 예수님이 뭐라고 합니까? ‘46년동안 지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손으로 짓지 않은 성전을 지으리라’고 합니다.
제자들이 그때까지 알지 못했는데 예수님이 부활하고 난 뒤에 그 성전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을 이야기하는 줄을 알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2:19-22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륙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이 몸이 아니고 부활하신 몸입니다. 그 부활하신 몸에 우리는 끌려가니까, 끌려가는 그 말을 다른 말로 하면 부활하신 몸 되신 분의 영인 성령이 우리에게 오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있는 그 자리에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어디로 합류되고 있습니다. 그것을 통일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모든 것이 통일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가운데 계시는데 하나님은 사랑으로 합류하고 우리는 예수님의 피 흘린 죄인으로 합류하니까 우리는 십자가 안에서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가 되는 겁니다. 그냥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안에서 하나가 된다는 말을 해 줘야 창세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했다’는 말이 성립이 되는 겁니다.
이렇게 생각하지 않고 나 위주로 생각하면 이런 현상이 벌어지게 됩니다. 이제부터 기존교회 목사들이 하는 설교를 들어보세요.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성전인데 성전을 어떻게 관리했습니까? 여러분은 땅투기를 했지요? 거짓말을 했지요? 하나님의 성전인데 거짓말을 했기에 하나님은 여러분을 멸하실 겁니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일만악의 뿌리라고 했고 돈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돈을 사랑한다는 그 자체가 저주이고 악인데 당신들은 눈만 뜨면 돈을 사랑하니 그래놓고는 여러분이 성전이라 할수 있습니까?”
어떤 목사들은 이렇게 설교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성전이 되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구원 안 됩니다.” 도대체 앞뒤가 하나도 안맞으니 이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복음으로 구원 받습니다. 하지만 만약에 여러분이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의 자기 성전을 멸하시는 하나님에 의해서 여러분은 저주를 받습니다. 여러분은 그래서 구원 못받습니다.”
어쩌라는 겁니까? 예수 믿고 뭘 어쩌라는 겁니까? 어떻게 살라는 겁니까? 실컷 복음으로 구원된다고 해놓고 우리 몸을 관리 잘 못해서 지옥간다는 겁니다. 사람이 나이 80만 되어 보세요. 사람이 아니고 귀신이고 거의 짐승입니다. 자기 속에 있는 욕심을 다 터뜨려 놓고 모르는체 합니다.
처신? 체면? 인격? 천사 같은? 이것은 젊을 때 정신이 제대로 박혔을 때 하는 소리죠. 나이 80넘고 치매 걸려 보세요. 천사가 어디 있습니까? 악마지요. 나이 많아서 악마 안 되는 인간 나와 보라고 하세요. 목사? 장로? 집사? 다 추잡스럽게 늙습니다. 단지 신체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정신적으로 추잡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사람이 컨디션 좋을 때 방그레 미소가 나오면서 ‘형제사랑’이 그냥 나옵니다. 컨디션이란 습도와 기온이 몸에 잘 맞을 때 입니다. 불쾌지수가 올라갈 때 ‘형제를 사랑한다’는 것이 위선이지 어떻게 사랑이겠습니까? 월 150만원이 벌금으로 날아가 보세요. 사랑이 안 됩니다. 치통에 시달리고 불면증으로 잠을 못자면 정신이 망가집니다.
정신이 망가지면서 만사가 귀찮아지고 예수고 뭐고 다 싫어집니다. TV에서 리포터가 어떤 노인 분에게 질문하기를 “남편이 좋습니까? 돈이 더 좋습니까?” 하니까 “그걸 말이라고 묻나? 남편, 그게 무슨 필요? 귀찮아 죽겠다!” 신혼 때도 그랬겠습니까? 젊을 때 과부되어 보세요. 울면서 허수아비 만들어 놓고서 밥상을 차린다는 그런 설화도 있습니다.
어떤 유명한 양반가의 며느리가 청상과부가 되어서 그렇게 하니까 시아버지가 종과 함께도망가도록 해주고 노비문서를 없애줬다는 전설 같은 그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인간은 흙이기에 정신이 아무리 육체보고 똑바로 하라고 해도 육체는 후패해져 순간순간 썩어져 가고 있습니다. 머리가 쇤다는 말은 흙이 썩어 문드러지는 것이 갈 때가 다 되어 간다는 말입니다.
실컷 십자가로 구원된다고 해 놓고는 뒤에 가서는 ‘하나님의 성전을 관리 잘못하면 지옥간다?’ 어떻게 이렇게 무책임한 말을 합니까? 차라리 ‘내가 예수를 안믿습니다’라고 이야기를 해야지요. 이것이 그 유명한 개혁주의 성화론인데 다 그 신학교 출신 목사들인데 개혁주의는 복음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말하기를 ‘내가 다시 율법을 거론하면 십자가를 헛되게 하는 짓’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내 앞서서 나에게 묻지도 않고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나를 용서하신 그 십자가를 피를 모독하는 것은 그 어떤 것도 다 마귀의 역사입니다.
갈라디아서 1:8,9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갈라디아서 2: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갈라디아서 5: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갈라디아서 6:14,15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자뿐이니라.”
목사들이 ‘성전을 더럽히면 멸한다’는 그 본문을 가지고 왜 사람들의 도덕과 윤리로 전환을 시키는 것일까요? ‘에베소서를 봐라. 앞부분은 복음이 나오지만 뒤로 가면 하라는 명령들이 나오기 때문에 그런 명령들에 복종 안하면 지옥간다’고 합니다. 사도바울이 결국 헷갈리게 만들어 놓고 있다는 것이고 앞에서는 복음이야기인데 뒤로 가면 하라, 하라가 왜 있느냐는 겁니다.
다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즉흥적인 것이 아니고 창세전부터입니다. 마귀도 태어나기 전, 마귀가 있기 전부터 이미 하나님은 십자가를 생각했습니다. 이게 복음의 비밀입니다. 따라서 앞으로 나오는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십자가에서 나오는 마지막 사랑을 구현하기 위해서 있습니다.
“이 근호 목사, 당신이 그 말을 책임질 수 있습니까?”
“책임집니다. 성경에 나옵니다.”
골로새서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입니다. 하나님이 아닙니다. ‘창세전’부터입니다. 천사도 없을 때부터입니다. 하나님만 계실 때입니다. 십자가를 위해서 하나님은 사랑을 준비했고 우리쪽에서는 우리의 죄를 가지고 십자가에 가는데 우리 힘으로 못갑니다.
그때 성령이 오셔서 ‘너는 죄인, 예수님은 의인, 의인 예수님이 너 대신 희생했다’는 것이 성령을 통해서만 십자가가 보입니다. 십자가라는 것은 우리 마음으로 아는 것이 아닙니까? 저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인간의 마음으로는 십자가를 알수 없습니다. 그 본문 어디에 나옵니까? 고린도전서 2:8입니다.
고린도전서 2:8,9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아니하였으리라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인간의 마지막 카드가 인간의 마음인데 그 마음으로도 모른다는 것은 인간은 결국 모른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아는 사람은 어떻게 압니까? 고린도전서 2:10에 보면 ‘하나님의 깊은 것은 성령을 받아야 안다’고 되어 있는데 그 깊은 것이 십자가이고 그래서 사도는 ‘십자가외에 알지 않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2:10-12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게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고린도전서 2:2
“내가 너희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결국 하나님이 준비한 것은 사랑이고 우리가 준비할 것은 죄밖에 없는 겁니다. 죄를 들추어 내기 위해서는 ‘아내된 자들이여 남편에게 복종하라’(엡 5:24)고 하는 겁니다. 어느 여자가 남편에게 복종합니까? 잘해 줄때만 복종하는 척 하지요. 술 먹고 집에 들어오는 남편한테 복종을 왜 합니까?
어느 바보 같은 여자가 남편이 자기를 무시하는데 복종하는 여자는 바보 같은 여자입니다. 결혼한 남자의 느낌은 당황스러움입니다. 천 번을 사랑한다고 해보세요. 천 번을 사랑한다고 했기에 웬만한 작은 실수정도는 봐주겠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단 한번 약간(여기에 강조, 정말 약간)이라도 아내를 무시한다든지 혹시 아내의 가족이나 친구와 연관되어서 약간(여기도 다시 강조, 진짜 약간) 무시하는 듯 마는 듯 했는데 아내가 사흘 동안 말 안 해버립니다. ‘너, 나 무시하지!’ 이렇게 됩니다. 여자도 마찬가지로 실수하는데 풀면 되지 않느냐, 하는데 사람은 자기가 자기 욕망을 못 다스리게 되어 있습니다.
삐진 마음을 무슨 수로 돌려놓습니까? 삐지고 싶지 않아도 삐졌는데. 남편 된 자들은 이것을 이해를 해 줘야 합니다. 여기서 깊은 진리가 나옵니다. 결혼한 여자가 아이를 낳을때 본인이 낳고 싶어서 낳는 것이 아닙니다. 디모데전서에 이것이 나옵니다.
디모데전서 2:15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여자가 아이를 낳는 기능이 여자의 자존심보다 더 우선이라는 말입니다. 여자라는 용어는 원래 좀 잘못된 용어인데 일제 때 여자라고 불렀는데 남자와 같이 일을 하라는 뜻으로 여자라고 불렀습니다. 여자는 원래 여자가 아니고 여인입니다. 여인이란 ‘남자 흉내내지 말고 여자다우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여인이 뭐냐? 해산, 아기 낳는 겁니다. 남자가 죽도록 일하는데 여자보고 죽도록 일하라는 말이 아니고 남자가 죽도록 일하는 것과 동일한 가치가 여자가 아이 낳는 일입니다. 제가 거짓말 하는 것이 아니고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창세기 3:16-19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땀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니 하시니라.”
남자는 이마에 땀 흘리면서 일하고 여자는 아기를 낳으면서 아픔을 갖는 것이 여자의 본도리입니다. 여자가 품을 수 있는 운명의 실체라는 말입니다. 저주받은 운명의 실체는 여자가 아기를 낳을 때 아프다는 것과 남자의 운명의 실체란 일하면서 힘들게 일해야 된다는 겁니다. 요새는 거꾸로 되어서 남편은 집에서 놀고 여자는 취직해서 일합니다만.
성경에 ‘하라. 하지 말라’가 나오니까 그것을 착각합니다. 내 힘으로 ‘하라’는 것은 할 수 있고 ‘하지 말라’는 것은 안할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자꾸만 오해를 합니다. 인간에게 그럴 수 있는 힘이 있다면 유대인들은 그 말씀을 왜 못 지켰겠습니까? 성경에서 율법이 있는 것은 어떤 것은 할 수 있고 어떤 것은 못한다는 말이 아니고 해도 해도 단 하나라도 못 지키기도록 되어 있습니다.
왜 못지키는가 하면 지킬 능력이 없어서 못 지키는것이 아니고 방향성이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를 모르기 때문에 무엇을 지켜도 그 모든 영광과 명예가 다 누구에게 돌아갑니까? 지켜 봤자 전부 다 나에게 돌아오기에 그것이 엉터리라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말합니다. “당신이 주스를 마실수 있는가?” 주스를 마신다는 것은 주스를 내 목에 흘려 넣는다는 것을 말하는데, “아, 그것은 내가 할 수 있어.”
입에 주스를 넣었습니다. “아, 맛있다. 봐라. 지켰다!” 그런데 그것을 보고 틀렸다는 겁니다. 왜? “당신이 주스를 마시는 것은 주스를 마시면서 십자가 피를 생각해야 그게 주스를 마신 것이 된다”는 겁니다. 세상에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어디 있습니까? 구약에 보면 ‘양을 잡으라’고 합니다.
양을 잡는 것이 뭐가 어렵습니까? 칼을 들고 양을 잡으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틀렸다는 겁니다. 양을 잡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잡으라는 겁니다. 세상에 그런 엉터리가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사울이 예수쟁이들을 다 잡아 죽인 겁니다. 왜 쓸데없는 해석을 덧붙이느냐는 겁니다.
그런데 직접 예수를 만나고 난 뒤에 자기가 지금까지 율법을 지킨 것은 하나도 지킨 것이 못 된다는 겁니다. 왜? 중간에 뭐가 빠졌기 때문입니까? 모든 율법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데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는 상태에서 자기가 지켰다고 하니까 모든 율법을 지켜봐야 누구에게 돌아옵니까?
오로지 자기 영광과 자기의로 돌아오니 그 자체가 악마의 짓이 될 뿐입니다. ‘아내가 남편 복종하기를 교회가 주께 하듯이 하라’는 말씀을 지키니까 사람이 그것을 지킬 수 있고 복종 한다는 겁니다. “여보! 날 때려. 그래도 내가 복종한다.”
그런 것은 복종이 아닙니다. 진정한 복종은 “주여, 예수님은 저의 구세주고 저는 십자가 앞에 구세주입니다”라는 것이 나올 수 있게 하기 위한 하나의 배경으로서 ‘아내된 자여 남편에게 복종하라’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복종은 안 된다’는 겁니다. 두 시간은 되는데 두 시간 30분은 안됩니다. 23시간은 되는데 나머지 1시간은 안됩니다.
일평생 복종했는데 딱 한순간 남편이 나를 무시하는 그 순간에 복종이 안됩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그것을 들추어내기 위한 것이 인간입니다. 지키는 것이 인간이 아니고 못지키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의 모든 명령은 반드시 영으로 해석하라고 합니다(고후 3:6).
사도바울의 모든 말씀은 그 말씀 앞에 나의 행함을 들이대지 마시고 나의 행함을 십자가에 가지고 가서 어디로 가느냐? 십자가가 우리 앞에 주어지게 되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해 봅시다. ‘술 취하지 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이 ‘나는 이제 술 안 먹기에 지킬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술 취하지 말고 성령에 취하라’고 할 때 술 안 땡긴다고 해서 성령이 땡긴다는 법은 없습니다. 인간은 자기밖에 모릅니다. 그러니까 ‘나는 술 안 먹었다’를 자랑합니다. 나는 나에게 도취되면서 살아갑니다. 특히 연세 많은 분들, 신앙생활 오래 해도 결국 남는 것은 ‘나는 나다’만 남습니다.
‘내 앞에서 어른거리지 말라. 자식이고 뭐고 나는 나 밖에 모른다.’ 자기 부인이 안됩니다. ‘내가 얼마나 교회에 충성했는데 나를 왜 안 알아주는가?’ 남는 것은 그것밖에는 없습니다. 늙은 목사들의 특징이 그거 아닙니까? ‘내가 이 교회에 충성해서 교인들을 얼마나 모아놨는데 젊은 것들이 나를 소홀히 해?’
이것이 늙은 목사들이 주책 아닙니까? 늙어서 추잡하게 놉니다. 아주 추잡하고 더럽게 늙어요. 이것이 욕이 아니고 그 본색을 이야기한 겁니다. 욕이란 없는 것을 과대하게 하면 욕이지만 있는 것을 그대로 이야기 해 주는 것은 욕이 아니지요. 이 말은 ‘너도 더럽게 늙는 것이 아니고 나도 더럽게 늙는다’는 말이고 ‘내가 곧 뒤따라갈게’라는 말입니다.
나는 나에게 도취되면서 살아요. 성경말씀 하나 지키면 어쩔 줄 모릅니다. 사람들이 저에게 말하기를 “그렇다면 당신 주장은 뭐냐? 어떤 성경구절에서도 십자가를 끄집어내라는 말이 아니냐?”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제 말은 그게 다가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말씀이 우리에게 오면 말씀이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적용이 됩니다.
‘아내 된 자여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것을 우리에게 못 지키는데 성령을 통해서 이것을 지키게 하실 때 내 힘으로 지켰다는 말은 하지 말라는 겁니다. 왜? 나는 나밖에 모르는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나밖에 모르는 인간인데 남편에게 복종하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을 때 그 모든 것은 주께서 나를 사용한 흔적으로 믿으라는 말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예수 믿으면 구원 받는다’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 믿을 능력이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성령께서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것을 통째로 우리 안에 집어넣어 버리면 내가 이룰 수 없는 ‘예수 믿는다’가 될 때, ‘주께서 이런 믿음을 주셨구나’라는 것을 깨달으라는 말입니다.
에베소서에도 나옵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나오는데 이 말씀이 우리에게 오게 되면 예수님께서 사랑할수도 없는 타인을 예수님께서 사랑하게 하시는 겁니다. 그 와중에 우리는 쪼다가 되는 겁니다. ‘주여, 저는 사랑 못합니다. 그러나 주께서 하셨습니다’라는 고백으로 나오라는 겁니다.
그것이 베드로전서 4장에 나옵니다. 사람이 무슨 봉사를 하든지 다 주께서 작용한 봉사로 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합니다.
베드로전서 4:10,11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처음에 제 이야기를 들으면 “그러면 당신 말대로라면 십자가 빼놓고 다 찢어버려야 되겠네”라고 합니다. 뒤에 있는 명령 같은 것은 다 없애야 된다고 합니다. 그런 것이 있어 줘야 내가 못하는 것을 창세전에 예정된 사람에게 예정된 대로 하나님께서 일을 벌임으로 주님께 공로가 돌아가는 겁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악의 뿌리다.’ 이것을 실천에 옮기는 목사가 어디 있습니까? 교회재정이 바닥났을 때 “야, 우리교회 부도났다. 드디어 우리 교회 해체다!” 하고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 성령을 받았을 때입니다. 성령을 받았을 때 그런 미친 짓을 하고 있는 겁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스데반집사입니다. 교회 쓰러지는 것을 보고 춤추기 바쁩니다. 목사가 설교할 때 죽기 바쁘면 다른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죽기 좋아서 설교가 나와 버리면 다른 욕심이 거기에서 나올 수가 없지요. 그렇게 욕심이 없다는 것은 성령의 역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 성령의 역사가 오늘 에베소서 2장의 내용입니다. ‘성령 안에서.’ ‘너의 능력이 아니고 성령의 능력으로 지어진다.’ 이렇게 하니까 사람들이 오해하기를 ‘나는 성령 받았다. 이제 내 안에 성령이 있으니까 내가 성령을 쥐고 흔들어서 우리 서로 만나서 괜찮은 교회되자’고 합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지방 파 교회입니다. ‘성령 받은 거듭난 우리끼리 모이면 거기에 성령께서 외계인처럼 임재하고 그러면 우리가 붙들어줘야 계속해서 교회가 된다. 만약에 우리가 안 붙들면 주께서 훌렁 떠나버리고 그러면 우리는 닭 쫓던 개처럼 되어서 지옥 간다’는 겁니다.
이 얼마나 부실한 공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보고 집을 짓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성전 짓는 것은 우리보고 짓는 것이 아니고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 때문에, 그것도 우리하고 타협한 것이 아니고 창세전에 예수님과 있었던 자기약속을 스스로 맹세를 어기지 않기 위해서 우리를 끌어 모아서 예수님의 몸이 되게 하는 그 성전만 성전이고 다른 것은 성전이 아닙니다.
개혁주의교회론을 보게 되면 ‘건전한 사람들끼리 모여서 건전한 교회 만들기’입니다. 또 눈에 보이는 교회입니다. ‘건전한 교회가 유지되려면 강력한 치리가 있어야 된다. 치리 없는 교회는 교회 아니다. 교회의 증표는 치리와 교제와 …등등이다.’ 이것이 칼빈주의 아닙니까?
프로 흉내낸다고 헬라어 써가면서 ‘디아코니아’라고 하고 교회는 전투적교회니 뭐니 하는데 백날 해봐야 그것은 나밖에 모르는 육적인 교회입니다. 자기 부인이 안 됩니다. 그리스도몸이 교회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몸이 성전입니다. 요한복음 2장에 나옵니다. 그분에게서 성령이 나옵니다.
스파이더맨에서 거미줄이 나옵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 그 거미줄이 바로 성령입니다. 그 거미줄이 중간에 끊어집니까? 그것은 어설픈 스파이더맨입니다. 진짜 스파이더맨은 안끊어집니다. 한번 붙은 성령은 기어이 잡아 당기는데 그 잡아당기는 과정이 뭐냐? ‘너는 죄인이기에 내 피 아니면 용서받지 못한다’는 걸 보여줍니다.
그게 창세전부터 결정 난 겁니다. 우리가 죄짓고 난 뒤에 새삼스럽게 의논해서 결정한 사항이 아닙니다. ‘저 놈들이 죄를 지었으니 십자가 투입해서 살려주자’라는 것이 아니고 ‘창세전’부터, 마귀도 천사도 없을때부터 하나님과 의논한 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로 통일되는 것이 감추어진 비밀입니다.
선악과와 생명나무도 십자가를 증거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겁니다. 앞으로 나오게 되는 사도바울의 명령과 훈계들이 많이 나옵니다. ‘아비들아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것이 나오는데 아버지가 자녀를 노엽게 하면 지옥 갑니까? 그러면 모든 아비는 다 지옥가야 됩니다. 자식의 욕망은 무한대이기 때문입니다.
이것 사고 나면 저것 사달라고 하고 그것 사주면 또 다른 것 사달라고 나옵니다. 뺨을 올려붙이고 싶지요. 회초리로 종아리를 때려야 합니다. 종아리에는 오줌을 싸기 쉽도록 하는 신경이 몰려 있기 때문에 종아리 맞으면 야뇨증이 개선된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일종의 침을 맡는 효과가 있다고나 할까요?
엉덩이를 맡으면 두뇌에 충격을 줘서 정신을 차리게 됩니다. 믿거나 말거나 할 소리입니다만. ‘남편들이 주님이 교회를 목숨 바쳐 사랑한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라’고 하는데 안 그러면 다 지옥 갑니까? 그렇다면 다 지옥가야 합니다. 그러니까 다 아내 사랑하지 말기로 할까요? 그렇다면 그 사람은 성령이 없는 사람입니다.
성령이 있다면 그 사람은 이 말씀대로 아내를 사랑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누구의 솜씨입니까? 성령님의 솜씨입니다. 스파이더맨에게서 나온 거미줄의 솜씨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있으면 그것은 성전이고 자기밖에 없으면 그것은 성전이 아닙니다. 성령의 거미줄에 꽁꽁 묶여야 됩니다. 성령에 묶이게 되면 우리의 정과 욕심은 십자가에 못 박고 나를 가지고 활동하시는 분은 성령이 되는 겁니다.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겠습니다. 인간의 내부환경이 바뀌어서 화산처럼 성령이 치밀어 오릅니다. 거룩이 내부에서 올라옵니다. 올라오게 되면 ‘우리는 육적이고 아담이었으며 안에 죄를 가지고 있었음’이 드러납니다. 성령이 빠져 버리면 우리는 잘난 사람 되어 버립니다. 성령이 빠져 버리면 우리는 내 잘난 쪽으로 ‘나는 왜 이렇게 성경을 잘 지키지? 나는 왜 이렇게 착한거야. 성경말씀 다 지켰네.’
이런 식이 됩니다. 이게 성화론 아닙니까? 이게 성녀 테레사 같은 겁니다. ‘쉬지말고 기도하라’니까 꿈에도 기도하고 ‘나는 성경 안 지킨 것이 없네’ 이럽니다. ‘처나 자식을 미워하지 않으면 내게 올수 없다’고 하면 몽둥이로 패버리고. 성경은 우리의 골수를 쪼개서 우리로 하여금 벌거벗은 자로 드러나게 하는 것이 성경의 말씀의 역사입니다(히 4:12).
저는 어떤 강의중에 하도 답답해서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 믿고 성경을 지켰다는 사람이 있는데 그 지켰다는 사람 구경 좀 해봤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예수 믿고나서 이제는 하나님께 순종한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순종했는지, 늘 순종했는지 순종 안한 적은 없는지, 순종이 기준은 뭔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그 이야기는 칸트나 하이데거, 스피노자에게 혹은 러셀에게 걸리면 작살납니다. 예를 들어서 “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해서 저 원수를 사랑했다”고 하면 러셀이 하는 말이 “네가 원수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아는가?” “나에게 해코지를 했거든.” “그렇다면 해코지를 한 것은 너의 편의 위주 아닌가?”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해코지 한 그 행동이 해코지 당한 사람에게는 해코지가 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유익이 된다면 그게 어떻게 일방적으로 자기 원수라고 할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왜 세상을 넓게 볼 줄 모르고 자기만 생각하느냐는 거죠. 예를 들어 광우병 소 수입했다고 정부가 퇴진감이라고 할 때 ‘왜 너만 생각하느냐’ 말이죠.
사람이 자기 생각만 하니까 자기한테는 원수가 되어도, 그가 남에게는 영웅이 됩니다. 그걸 따지고 들어가 보면 이 세상은 전부다 자기 욕심위주로 일방적으로 원수를 정해 놓은 겁니다.
“당신은 원수를 사랑할 때까 몇시 몇분이었습니까?”
“오후 2시 50분이었습니다.”
“그 전까지는 왜 당신은 그를 미워했습니까?”
“몰라요.”
모르면서 뭘! 원수를 사랑하려면 일단 뭐가 되어 있어야 합니까? 원수가 되어야 됩니다. 그래야 ‘원수를 사랑하라’가 됩니다. 원수가 되려면 원수가 되기 위한 마음가짐이 있어야 될 것이 아닙니까? 그 마음가짐은 누구의 마음입니까? 내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그 마음이 못된 마음이 맞잖아요.
사람이 ‘나는 마음이 달라졌다’고 하는데 그것도 따져봐야 합니다. ‘달라졌다’고 누가 이야기 합니까? ‘나는 달라졌다’고 여긴 그 판정자가 누굽니까? ‘나는 내 마음이 달라졌다’고 누가 이야기합니까? ‘나’가 이야기 합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이 쥬스가 노란 색인데 자기보고 빨갛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왜 노란데 빨갛다고 하느냐?” 하면 “내가 빨갛다고 하면 빨간거야.” 이게 인간입니다.
그게 성경을 볼 때 예수님 중심입니까? 자기중심 이죠. 일방적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그 짓 했습니다. 자기 눈에 들보를 빼고 남의 눈에 티를 빼야 하는데 내 눈에 들보가 들어 있는 상태에서는 상대방의 눈에 들어 있는 것이 티인지 아닌지를 판정한다는 것 자체가 들보가 박혀 있다는 이유로 인해서 그 판정이 엉터리 판정이 되는 겁니다.
사람이 들보가 들었다는 것 자체가 비정상이라는 말인데 비정상인 상태에서 ‘나는 들보가 들어 있고 너는 티가 들어있다’고 한 그 말자체가 비정상이고 그 판정자체가 오류라는 말입니다. 나에게 들보가 있다고 이야기할 참이면 나에게 들보가 없는 상태에서 이야기를 해야 맞는 이야기인데 들보가 들어 있는 상태에서 들보가 있다고 하면 그것을 누가 믿습니까?
일지매? 자기는 의롭다는 겁니다. 누가 의롭습니까? 도둑맞은 호조판서는 의롭답니까? 50만냥짜리를 도둑질한 일지매가 의적이 됩니까? 그게 나쁜 놈이고 도둑놈이죠. 어느 엄마치가 자기 애 안 예쁜 엄마 없습니다. 자기애니까 예쁜 겁니다. 아무리 못생겨도 자기애는 제일 예쁩니다. 그게 눈에 들보가 들어 있는 거잖아요.
눈의 들보를 뺄 수가 없습니다. 들보가 이쪽 눈에 있는데 엉뚱한 쪽의 눈을 들어내는 수가 있습니다. 엉뚱한 것을 빼내는 식으로 수술을 잘못하게 되는 겁니다. 의사 눈에도 들보가 들어 있어서 들보는 그냥 놔두고 엉뚱한 것을 빼내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궁금한 겁니다. 대체 성경말씀을 지키는 사람을 구경해 보고 싶은 겁니다.
구경만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따져보고 싶어요. 소크라테스처럼. 따지고 따져보면 남는 것은 ‘나는 곧 의롭다’입니다. 이게 바로 십자가 질만한 저주받은 모습 아닙니까? ‘결핍은 욕망을 정당화 한다.’ 이게 새로 나올 제가 쓴 『피』라는 책에 보면 나옵니다.
내가 소망하고 고대하는 것, 현재 나에게는 없는데 저사람에게 있는 것, 결핍된 그것이 내가 저것을 추구한다는 그 자체를 나는 정당한 짓을 한다는 식으로 정당화시킨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배고프다. 빵이 저기 있다. 빵이 내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먹겠다’는 것은 ‘내가 배고프다는 이유 때문에, 내가 훔쳤다는 이유 때문에 나는 정당한 짓을 했다’가 되어버립니다.
사람의 욕망이 자꾸 결핍을 만들어 냅니다. 50억을 가져도 100억이 그리워지고 100억 가지면 1000억이 그리워지고 1000억을 가지면 대기업총수가 그리워지는 거예요. 결핍이 자기욕망을 정당화 합니다. ‘나는 내 할 도리 다 했다.’
“너는 왜 은행금고를 털었느냐?”
“나도 남들처럼 고급차를 굴리고 싶었다. 왜?”
‘고급차가 나에게는 현재 없고 그 고급차를 남이 가지고 있다는 그 결핍, 그 빈틈을 내 욕망이 채워나가는 이것이 내 욕망이 했기에 그것이 뭐가 잘못되었느냐’고 합니다. 이게 인간입니다.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 인간이 없습니다. 신이 되고 싶다고요? 신처럼 착하게 되고 싶다고요? 착한 것은 결핍 아닙니까?
‘나는 말씀대로 못산다. 그런데 누구는 말씀대로 잘 산다. 그 결핍만큼 내가 믿음이 좋아서 채우고 싶다.’ 그것은 욕망이 아닙니까? 다시 이야기 합니다. 영적인간이란 그 앞길에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 지고 있는 것이 영적인간입니다. 그런데 자기 앞길에 십자가가 빠진 사람은 아무리 훌륭해도 그것은 무슨 인간입니까?
육적인간입니다. 왜? 믿을 것이 자기밖에 없고 보이는 것이 자기밖에 안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교회, 성전은 누가 만듭니까? 바로 앞에 계시 분이 스파이더맨입니다. 뒤에 있는 우리에게 끈끈한 거미줄을 쳐서 사랑의 줄로 나를 꽁꽁 묶어 버립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좋은줄을 몰랐습니다. 아내를 개 패듯이 팼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성경을 보니까 ‘아내 사랑하기를 주께서 교회를 위하여 목숨을 준 것 같이 하라’고 합니다. ‘세상에 그런데 내가 아내를 개 패듯이 팼구나. 세상에 이런 죄인이 어디 있나’ 할 때 다시 한 번 십자가의 사랑을 아는 겁니다. ‘십자가 아니면 나는 진짜 맞아 죽어도 싼 인간이다.’
성경말씀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다시 한 번 예수님의 사랑이 크다는 것을 압니다. 정리하겠습니다. 용서함이 없는 사람은 사랑이 없습니다. ‘많이 용서받은 사람이 많이 사랑한다.’ 그래서 에베소서 3장을 미리 봅시다.
에베소서 3:15-19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엇을 꿇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노니, 뭐라고 합니까?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라고 하는데 그게 뭐냐 하면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그 다음에 19절에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 완전히 사랑의 풀장이 아닙니까? 사랑의 풀장!
사랑의 범위, 그것이 무릎 꿇고 기도하는 제목이 그겁니다. 제가 교인들에게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이 그겁니다. ‘제발 교인들아,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알기 위해서 우리교회 망해버리자. 아예 완벽하게 들어먹자.’ 다 들어 먹어도 싱글 싱글 웃을 수 있는, 이것이 너무 극단적입니까?
다 들어 먹어도 내 앞에 보이는 십자가 때문에 이미 우리는 더할 나위 없는 하나님의 교회이고 하나님의 성전이 된다는 사실, 그 사랑 때문에 산다는 것, 이것이 바로 창세전에 약속한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 믿는다 하면서 결국 따져보면 나 자신을 믿었고 나의 행동을 믿었습니다. 눈앞에 십자가가 사라졌습니다. 이제 성령을 통해서 눈앞에 십자가가 다시 크게 보이게 하시고 그 십자가와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그 관계를 알아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를 높이 드높일 수 있는 남은여생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